오늘 아침부터는 지난 몇 달 동안 기다려온 특별한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고린도전서 13장을 마쳤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4장을 시작할 순서입니다. 얼마 전에 질병으로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못하시다가 다시 나오신 성도님 한 분을 만났는데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고린도전서를 하고 계시다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한동안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적 은사, 그러니까 ‘카리스마타(charismata)’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를 살펴보는 중에 여러분께 정말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혼란스러워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3장과 14장 사이에서 잠시 멈추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14장이 방언을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14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은사주의 운동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것이 유익하겠다, 이렇게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 동안 특별 시리즈를 진행할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할지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내용을 모두 말씀드릴 때까지 계속할 예정입니다. 전체적인 개요는 이미 정리해 두었고 상당 부분 준비도 마쳤지만, 이게 몇 주나 걸릴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부터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평소 들으시던 설교와는 조금 다를 겁니다. 특히 오늘 처음 오신 분에게 평소와는 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통은 제가 성경 본문을 한 절 한 절 살펴보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시작하면서 몇 가지를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논란이 되는 문제를 다루기만 해도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의 의도는 전혀 그런 것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리와 성경의 진실성을 변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진리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의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결코 사랑 없는 행위가 아닙니다. 제가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어떤 교회나 단체를 적대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우리 교회에 은사주의 운동에 깊이 관련된 분들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은사주의 운동은 그 규모와 범위가 매우 커서 기독교계에서 너무도 강력하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외면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은사주의를 현실적으로,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제대로 다루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이 일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분명히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분들이 계실 거라고 예상합니다. 사실 이미 그런 분들이 계셨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저는 사랑이 없고 분열을 조장한다 이런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분열을 조장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미 분열되어 있는데, 그래서 그 분열에 대해 말하고 진리를 통해 해결하라고 하는데, 오히려 이런 행동을 분열을 일으킨다고 비난하다니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는 이미 갈등이 존재합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매우 크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제가 분열시키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저는 진리로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저만 진리를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성경에 나오는 대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태도로 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마치 초록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은사주의자의 집 우편함에 설교 테이프를 담은 갈색 봉투를 몰래 놓고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라고 제가 이러는 거 아닙니다. 그런 의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진리를 붙드는 것만큼이나 사랑의 정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자, 이렇게 서론을 말씀드렸으니, 이제 앞으로 몇 주 동안 은사주의 운동을 성경의 빛 아래에 비추어 볼 때에 제기할 수 있는 20가지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을 가만히 보면, 매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기독교 서점, 기독교 음악회, 집회, 다른 교회 예배, 혹은 그리스도인의 사적인 모임에서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의 주장들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와 기적을 행하고 계신다는 놀라운 주장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인쇄물을 통해서 퍼지고,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고 있습니다. 그 양이 얼마나 방대한지 정리는 고사하고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만남을 가졌다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육신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다고 합니다. 매우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성령님이 직접 사람들을 만나주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치유가 일어났다는 간증 소식이 기독교 매체를 통해 전해집니다. 매우 놀라운 일도 있지만 그리 놀랍지 않은 일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척추를 고쳐주시고, 짧은 다리를 길게 늘려주시고, 암을 치료하시고, 심장을 회복시키시고, 그 밖에도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전해집니다. 은사주의 계열 방송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2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국은 모두 은사주의자들이 세운 겁니다. 그러니까 은사주의 운동이 기독교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진행자들이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사람들처럼 기적이며 치유며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을 즉석에서 분별해내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지금 방송을 보는 누군가가 병에서 치유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병에서 치유받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에선가 한 분이 병에서 치유받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또 이런 방식도 있습니다. 이런 얘기 여러 번 들어봤습니다. “오늘 밤에 15명이 암에서 치유를 받을 겁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15명에게 선착순으로 주어질 겁니다. 또 5명이 편두통에서 치유를 받을 겁니다. 선착순으로 믿는 5명에게 이 치유가 임할 것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마치 치유가 공중에 떠다니고 있어서 원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그물을 던져서 붙잡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어떤 기적 이야기는 기괴하기까지 합니다. 죽은 강아지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고장난 세탁기가 고쳐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것도 두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자동차 기름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 막힌 변기가 기적으로, 능력으로 다시 뚫렸다는 이야기, 어떤 사람들은 뒤로 쓰러지는데 성령의 쓰러짐이라고 합니다. 또 환상이며 꿈이며 계시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여성은 새로운 배꼽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빈 포드라는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천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천국이 어떤 곳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왔다고 간증을 합니다.
이러한 신비한 체험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쉴 새 없이 움직이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마치 6일간의 창조 사역과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에 필적할 만한 초자연적 공연을 펼치고 계신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께서 수세기 동안 이렇게 활발하게 일하신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일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감당하고 계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무엇보다도 은사주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성령 충만이나 성령 세례를 경험해야 한다, 방언이나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두 번째 복(Second Blessing)’ 혹은 ‘무언가 더(Something More)’이렇게 부르기도 하죠. 실제로 이 <무언가 더(Something More)>라는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복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충만하게 경험하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라고 가르칩니다.
이번 주에 유명한 은사주의 설교자의 설교를 제가 들어보았습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반드시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방언 자체를 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라는 것이고 방언은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흥미로운 예를 듭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사람들이 신발 가게에 가서 진열장을 보면서 ‘저 신발 끈을 사고 싶어’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사려는 것은 신발입니다. 신발 끈은 신발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죠.” 그러면서 “여러분이 정말 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영적 삶의 여정에 필요한 신발입니다. 방언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끈 없는 신발을 좋아합니다. 어쨌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골로새서를 공부할 때 보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들 때문에 위축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을 자신만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 두려움 때문에 은사주의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고 또 객관적인 마음으로 답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주님의 뜻 가운데 성령님의 능력으로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답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겁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늘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속 동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역도 하고요, 하나님의 말씀도 읽고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제 자동차 기름을 채워주지 않으실까요? 왜 저의 세탁기는 고쳐주지 않으실까요? 왜 저는 특별한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저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황홀경에 이르지 못할까요? 만일 이런 신비한 경험이 영적인 사람에게 나타나는 정상적인 모습이라면, 왜 저는 아직도 그 영적인 신발을 받지 못한 걸까요?”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결국 교회가 영적으로 가진 사람들과 영적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로 나뉩니다. 은사주의의 비극입니다. 가진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갖죠. 은사주의 구조 안에 이미 내재돼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태도를 거부하려고 애쓰고, 또 실제로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자신은 가지고 있다, 이렇게 느낄 겁니다. 아마 저는 가진 사람들보다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 쪽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저 역시 가끔은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어쩌면 은사주의 교회 안에도 이런 위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많을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압력이나 이상하고 기이한 체험을 나누는 집단에 속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기적을 과장하거나, 극적으로 꾸미거나, 심지어 지어내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위축감은 매우 강력합니다. 그러나 새롭지는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온 일입니다. 골로새서를 공부하면서 살펴보았죠. 잠시 골로새서 2장을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내용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고 그 외에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로 충분하시며 무엇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2장 10절입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골로새서 2장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충만합니다. 바울은 11절부터 13절까지에서 그 충만함의 내용을 계속 설명합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들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아직 충만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성, 성숙, 영성은 그리스도만으로는 되지 않는답니다.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더하기 또 무엇’, 이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 율법주의가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6절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합니다. 또 이렇게 주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에 초자연적인 체험이 더해져야 한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이어서 자신이 본 것을 내세우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비주의적인 체험이나 환상에 관한 이야기죠. 우리는 골로새서를 공부하면서 이 부분에 사용된 헬라어 표현까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신비주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완성하기 위해 천사와의 초자연적인 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이하고 이상한 체험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외에 철학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율법주의를 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초자연적 신비주의를 더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위협받지 말라. 위축되지 말라.” 실제로 골로새 성도들은 너무나 위축이 된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함의 확신을 버리고 그 이단 사상을 받아들일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에게는 천사와의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비밀스러운 체험도 필요하지 않다, 더 깊은 체험도 필요하지 않다, 특별한 환상도 필요하지 않다. 그런 것들 때문에 위축되지 말아라.”
이번 주에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참 많은 자료를 읽고 또 들었습니다. 그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실패하고 있다면, 삶에 문제가 가득하다면,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통해 역사하실 통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매우 위축감을 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 엉망인 이유가 방언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런 위축감은 새로운 게 아닙니다. 골로새서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방 안에 앉아 있습니다. 매우 열정적으로 예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열정적인 찬양이 울려 퍼지고 그 사이사이에 찬양의 외침과 뜨거운 기도가 막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분 가까이에 서 있던 어떤 한 사람이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빠른 음절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말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주 크고 극적인 목소리로 외치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그리고는 예언이라면서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몇몇 사람들이 기절한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어디인 것 같습니까? 은사주의 기도 모임 아니냐고요? 비슷한 모임에 가보신 적이 있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은사주의 집회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전형적인 모습이죠. 아주 익숙하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방금 묘사한 장면은 현대 은사주의 모임이 아닙니다. 2세기에 있었던 몬타누스주의자(Montanists)들의 집회입니다. 똑같지 않습니까? 이 지도자 몬타누스를 따라서 모든 신자가 특별 계시의 통로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를 통해 특별하게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증거로 예언과 방언을 포함한 극적인 성령의 은사들을 행했습니다. 말세이기 때문에 회복된 것이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바로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제기되는 주장이죠. 몬타누스는 계시가 계속 발전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하셨다. 그 후 주님의 제자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이제 성령의 새로운 시대 안에서 계속해서 자신과 자신의 말씀을 계시하고 계신다.” 몬타누스는 이것을 ‘성령의 새로운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2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 그 성령의 새로운 시대에 성령님이 몬타누스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당시 교회에 아주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교회를 위축시켰습니다. 몬타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 한 부류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부류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문자에 불과한 성경만 가지고 있는’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골로새 교회에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는 가졌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위축되었습니다. 2세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도 계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반대로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육적이라고 불린 이유는 단지 죽은 문자에 불과한 성경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결국 어떻게 됐나요?” 교회에서 배척당했습니다. 이단으로 규정됐습니다. 그리고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몬타누스주의자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지만, 이단적 요소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의 훈련과 검증을 거쳐서 매우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또 역사적 관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현대의 은사주의 운동은 ‘신몬타누스주의(Neo-Montanism)’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몬타누스주의입니다. 역사적 기독교 아닙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간에, 교회가 반드시 다루어야 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운동을 객관적으로,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저의 개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다른 의도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순수함과 본래의 의도대로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함께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몇 가지 기본 원칙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론이 길어지고 있지만 조금만 더 참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몇 가지 기본 원칙을 세우고 싶습니다. 첫 번째 원칙입니다. 이것은 포괄적인 연구가 아닙니다. 제 의도는 모든 기적과 모든 사람의 체험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죠.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이런 일을 경험했어요.” 또 “저는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연구를 마치고 나면 저는 그 질문에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할 겁니다. “이제 여러분이 배운 내용을 가지고 그 일을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보십시오”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어떤 일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모든 상황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그런 모든 것을 제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려는 것은 진리로 기준을 세우는 것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우리가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근거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프레더릭 브루너(Frederick Bruner)는 <성령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Holy Spirit)>이라는 매우 훌륭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기독교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기준은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그 시험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 뿐이다. 진정한 기준은 진리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원칙은 이겁니다. 이번 연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제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하나하나 다루는 그런 포괄적인 연구가 아닙니다.
두번째, 저는 모든 은사주의 형제자매들이 제가 설명하는 모든 범주에 다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저도 은사주의 친구들이 있는데요, 그분들은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런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은사주의 안에는 매우 다양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다루게 될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신학이 없다는 점입니다. 신학이 없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은사주의자가 될 수 있고, 그 반대편 끝에 있는 사람도 은사주의자가 될 수 있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든지 은사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주의를 규정하는 신학 체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이나 남성이나, 심지어 어린아이도 예배 중에 일어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옳은지 그른지, 혹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지 판단할 기준이 없습니다. 체계적인 신학이라는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모든 사람이 제가 말하는 범주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많은 차이점들이 있고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 싶은 것은 꼭 이해하셨으면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예외적인 사례를 보려는 게 아니라, 세상과 교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은사주의 운동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목도하고 있습니까? 물론 예외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이 운동의 전반적인 모습입니다.
세 번째 기본 원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그런 체험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저를 비판할 겁니다. 실제로 그런 비판을 이미 받았습니다. 침례교 목사였다가 은사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 하워드 어빈(Howard Irvin)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주의적 현상을 은사주의적 체험 없이 해석하려는 시도는 거듭남의 능력 없이 기독교 윤리를 적용하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성령님은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비밀을 계시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는 아주 편리한 방법이죠.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논쟁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미리 선을 그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주장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체험이 아닙니다. 체험이 결코 아닙니다. 그게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의 체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성령님이 진리의 교사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 손에 있다면, 저는 누구 못지않게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체험이 오직 헌신된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고 주장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헌신하지 않았는데도 권능을 행했습니다. 저는 오직 한 가지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나오는 고상한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제 오늘 아침에는 앞으로 말씀드릴 스무 가지 문제 가운데 첫 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오늘 이것 하나도 제대로 끝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주제들은 조금 더 빠르게 다룰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첫번째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은사주의 운동과 관련해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첫 번째 문제,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첫 번째 문제는 바로 계시(revelation)라고 생각합니다. 계시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계시. 제가 말씀드리는 이 계시 문제는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말씀을 계시하고 계신가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 이외의 계시가 지금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 직접 말씀하시고 계신 것인가? 수많은 환상과 체험들, 그리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일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 끊임없이 듣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지금도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걸까요? 지금도 직접 계속 말씀을 주고 계시는 겁니까? 지금도 절대적인 권위로서의 진리를 직접 계시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지금도 자신의 말씀을 계속해서 직접 펼쳐 보이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고 종결된 것일까요? 계시의 문제입니다.
이번 주에 저는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신다(God Is Speaking to You)>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부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How to Know the Voice of God)>이더라고요. 그 책이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 직접 말씀하고 계시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도록 준비하는 방법과,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계속 직접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책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늘 듣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 한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칠 전 제가 면도를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욕실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 어깨에 팔을 두르시고는 어깨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러자 저의 어깨 통증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우리 아주 멋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몇 가지를 저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저를 매우 위축되게 만듭니다. 왜냐구요? 저는 신앙생활을 오래 해 왔지만 저에게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빌 게이서(Bill Gaither)가 받은 편지 이야기를 말씀드린 적이 있죠. 좋은 예시가 될 것 같아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빌 게이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즐겨 부르는 훌륭한 찬양을 아주 많이 쓴 작곡가입니다. 은사주의 운동과 연관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을 보여 주는 예기 때문에 사용하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게이서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의 찬양 <주님이 오고 계시네(The King Is Coming)>에 담긴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느냐,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로 찬양입니다. “시장은 텅 비고...” 이렇게 시작하는 그 찬양입니다. 우리는 그 찬양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큰 감동을 받곤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찬양에 담긴 신학이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성경 구절뿐 아니라 찬양 가사도 분석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찬양을 분석하면서 가사의 신학적 내용이 완전히 일관되게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조금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편지가 너무나 많이 왔던 모양입니다. 결국에 <주님이 오고 계시네> 찬양에 담긴 신학에 대한 문의가 오면 보내는 정형화된 답변을 만들어 두었더라고요. 답장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노래의 해석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주님이 오고 계시네>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빌과 글로리아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이 찬양은 단시간에 주어진 것이고, 가사에 담긴 신학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가사를 분석하는 것 자체가 찬양을 만드는 데 영감을 주신 성령님의 사역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여러 면에서 매우 놀라운 답변입니다. 우선 이 찬양이 “단시간에 주어졌다”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또 성령님의 영감으로 주어졌다는 생각은 이런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게이서 부부가 초자연적인 형태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사실상 요한계시록 다음에 추가되어야 할 ‘계시록 23장’이라는 생각이죠. 또 그 찬양의 신학을 논의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이 말은, 사실상 이 노래에 어떤 종류의 무오성을 부여하는 주장과 매우 가깝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은 그렇지 않죠. 이 노래는 성경적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성경적으로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게이서 부부가 정말 그런 주장을 하려고 했다는 말이에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게이서 부부를 폄하하거나, 교회에 끼친 훌륭한 공헌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휩쓸리고 있는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지는 유일성과 절대적 권위를 점점 희미하게 만드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무엇을 계시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메시지를 받는 데 더 관심을 두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게이서 부부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통해 찬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찬양은 무오하지도 않고, 무류하지도 않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치 그 찬양이 절대 권위를 가진 양 생각하게 만드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계시’와 ‘영감’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사용되면서 생겨난 혼란을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성령님의 영감을 받고 있는가? 우리가 책을 쓸 때, 설교를 할 때, 지금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고 있는가? 내 설교는 영감을 받은 것인가?”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에게 영감을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제가 그런 말을 너무 자주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서 끝나고, 또 존 맥아더의 말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아주 혼란스러워지실 겁니다. 제가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전하는 유일한 순간은 제가 성경을 그대로 읽을 때뿐입니다. 그 외에는 전부 헛소리라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요일이 되면 녹음본에서 그런 부분들을 다 잘라냅니다. 여러분이 받는 설교 테이프에는 오직 순수한 내용만 남도록 말이죠.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까? 은사주의자들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제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멜로디랜드 신학교(Melodyland School of Theology)가 있습니다. 로드먼 윌리엄스(Rodman Williams)가 총장이었는데요, 당시의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은사주의 신학교 가운데 하나로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스는 열렬한 은사주의자입니다. 그의 저서 <성령의 시대(The Era of the Spirit)>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현재 행하고 계시는 활동을 증언하는 하나의 동료 증인이 되었다.” 들으셨죠? 성경이 하나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시는 일을 증언하는 여러 증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랍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본다면, 그런 일이 이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누군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면,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계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누군가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고 말하면서 성경을 넘어서는 내용을 전하더라도, 그런 일은 오래전에도 일어났다. 성령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서 과거의 증언 기록들을 통하여 움직이실 뿐 아니라,” 이제 잘 들으십시오. “과거의 증언 기록을 넘어 움직이신다. 물론 그런 기록은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의 모델로서 가치가 있기는 하다.” 여러분, 이 말에 따르면 성경은 어떤 존재가 됩니까?
성경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한 여러 증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 기록을 넘어 계속 역사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결국 윌리엄스의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최종적인 근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은 단지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계속 주고 계시는 추가적인 계시에 대한 증언의 모델일 뿐이고,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단지 오늘날 성령님께서 주고 계시는 계시의 옛 사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정말 두렵습니다. 너무도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라는 기초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멈추어서 영감(inspiration)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디모데후서 3장 16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에 이 “감동”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영감”이라고도 하죠. 빌 게이서는 자신의 찬양이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고 했습니다. 로드먼 윌리엄스는 회중이 영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개의 헬라어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테오스(theos)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프뉴스토스(pneustos)는 숨을 내쉬다, 호흡을 내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이 단어의 의미는 성경이 하나님의 숨결 자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예레미야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에스겔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노라.”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모든 말을 너는 네 마음으로 받으며 네 귀로 듣고.”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3,808번이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의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죠.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도 영감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성경을 설명합니다. 20절에서는 “성경의 예언”이라고 하고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은 결코 사람의 의지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감입니다.
시냇물에 던진 막대기가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신 적 있으습니까?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끌려 가는 것, 운반되어 가는 것, 밀려 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성령님이 자신들을 이끌어 가셨기 때문에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들어왔기 때문에 기록했습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거룩한 사람들을 이끄시고 지금도 자신의 말씀을 내쉬고 계시는데 말이에요.” 제가 성경으로 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있는 짧은 서신, 유다서 3절을 보십시오. 유다서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잘 들으십시오. 헬라어 원문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달된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의미로 말합니다. “힘써 싸우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헬라어로 에파고니조(epagōnizō)입니다. 어근이 아고니조(agōnizō)인데요, 애쓰다, 분투하다, 싸우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전치사 에피(ep)가 붙이면서 강렬하게 싸우다, 온 힘을 다해 방어하다, 필요하다면 피를 흘리기까지 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뇌 가운데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셨던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의 계시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합니까?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서입니다.
자, 이제 아주 간단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믿음은 몇 번 전달되었습니까? 한 번입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바로 그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표현은 갈라디아서 1장 23절과 디모데전서 4장 1절에서도 사용이 되었죠. 거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주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객관적인 믿음, 그러니까 진리, 계시의 내용,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단번에” 전달되었습니다. 헬라어로 하팍스(hapax)입니다. 이 단어는 한 번 이루어져서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고, 무엇을 더할 필요도 없는 일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단 한 번,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성도들에게 이미 전달되었습니다.
베드로에 의하면 하나님이 성경을 자신의 숨결로써 내쉬셨고, 거룩한 사람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완전한 계시의 체계를 주셨습니다. 단 한 번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다시는 무엇이 더해질 수 없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태초에 시작해서 세상의 종말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계속 새로운 계시들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더 이상 어디에 서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과연 누가 옳을까요?
제가 말씀드렸던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신다(God Is Speaking to You)>라는 책을 보면, 마지막 장의 제목이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열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한 뒤에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심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냥 조심하십시오”라니오, 이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판단 기준이 무엇입니까? 몰몬경이든, <과학과 건강, 그리고 성경의 열쇠(Science and Health with Key to the Scriptures)>이든, 은사주의적 계시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혼란에 빠져들고 맙니다. 누가 옳습니까? 성경은 이미 전달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전달되었다”는 표현은 헬라어 문법상 부정과거 수동분사입니다.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을 뜻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과거에 이루어진, 완료된 행위로써,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부정과거 용법의 의미이죠. 성경은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교훈의 총체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무엇을 뺄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계속 하나님께 새로운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을 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겠습니까? 이런 현대의 주장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 권위와는 어떤 관계를 가질까요? <주님이 오고 계시네>라는 노래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일까요? 어떤 신자가 보았다는 환상이 성경과 권위가 동일할까요? 정말로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는 문제입니다.
현대 신학자 듀이 비글(Dewey Beegle)이 있습니다. 신정통주의자(neo-orthodox)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영감을 믿는 복음주의자나 근본주의자는 아닙니다. 영감과 계시가 계속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계시가 계속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신정통주의자들은 그렇게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을 부인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몇몇 기적들의 실제성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오류가 없다는 사실도 부인합니다.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을 부인합니다. 완전영감(plenary inspiration)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성경이 우리에게 말을 걸 때에 비로소 영감이 된 것이다. 무언가가 우리를 강하게 감동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글은 찬송가 작곡가들과 찬송이 성경 저자들보다 더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아이작 와츠(Isaac Watts)가 솔로몬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성경에는 솔로몬의 아가서 대신 아이작 와츠의 찬송이 들어갔을 것이다. 더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명백한 이단입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듀이 비글의 견해가 은사주의 멜로디랜드 신학교 총장인 로드먼 윌리엄스의 견해와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은사주의 신학교가 그런 총장을 세울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관점이 같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견해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주장을 수없이 합니다. 그리고 신정통주의자들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어떤 목사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의 미래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저 마을이 네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그 지역 상공을 날아가서 사진을 찍었답니다. 그리고는 사진을 게시판에 붙여 놓고 “이 지역은 하나님을 위해 확보되었다”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죠. “어떻게 그렇다는 걸 아시나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끊임없이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로드먼 윌리엄스는 은사주의자입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자신이 신정통주의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숨기지 않았습니다. 듀이 비글도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계시가 지금도 계속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로드먼 윌리엄스의 말입니다. “이제 예언 안에 있는 놀라운 요소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 그것은 예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선포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예언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예언 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단순하면서도 심오하고 놀라운 사실이다. 교제 모임 가운데 누구를 통해서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다. 그래서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는 선언이 모임 가운데 터져 나온다. 대개 일인칭으로 하신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내가 너희와 함께하여 너희를 축복하리라’ 이런 형태이다. ‘나와 너’의 직접적인 만남처럼 다가온다. 하늘의 언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모국어로 말씀하신다. 또한 그 사람 특유의 억양과 말투와 표현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잘 다듬어지지 않거나 문법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 킹제임스 성경식 표현과 현대적 표현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유창하게 흘러나올 수도 있고 더듬거리며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예언하는 중에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을 사용하시고, 연약한 인간의 도구를 통해 성령님이 주의 말씀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의 특징은 그 말이 인간이 숙고하거나 사전에 준비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 전에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기다렸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는 성령님이 인간의 마음 위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다.” 여러분, 정말 두려운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실제로 계속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예언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미리 알지 못한다. 언제 그 순간이 올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 그 순간이 올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언을 미리 계획하거나 순서를 정하지 않는다. 그냥 일어나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2절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윌리엄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시 말해 매우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익숙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고 선포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에 톰이나 메리가 일어나서 옛 선지자들이 했던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예언이 신약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로 인해 예언이 다시 살아났다. 이제 우리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신약성경을 잘못 읽어 왔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 일어나는 예언과 계시가 하나님의 영감이며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톰이나 메리가 일어나 말하는 것은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일어나 한 말과 동일한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은사주의 신학교의 총장이 한 말입니다. 여러분, 결국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의 마음속에서 성경의 신뢰성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말한 것처럼, “우리처럼 성경의 권위를 굳게 붙들고 있지 않은 다음 세대가 오기를 기다려 보자. 그것이 사람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합니다. 만일 은사주의 운동이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이런 성경관을 계속 유지한다면, 결국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온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이단으로 변질될 겁니다.
저는 종교개혁자들이 서 있었던 자리에 저도 서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성경의 거룩한 권위를 넘어서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토대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성경이 신앙과 삶에 대한 최종 권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단의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혼란의 문이 열립니다. 무질서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셈입니다.
멜빈 하지스(Melvin Hodges)는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 소속 목사입니다. <영적 은사들(Spiritual Gifts)>이라는 책을 썼죠. 시애틀에서 그 책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고요? 은사주의 운동 안에 있으면서도 매우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계속 일어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라고 말하는 그 상황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는 다른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들, 우리는 이 운동 안에서 이 혼란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교회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선포할 때,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아니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얼마나 큰 혼란입니까? 멜빈도 “그 결과 혼란이 초래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교회가 새 담임목사를 청빙하기 위해서 모여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이 사람은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만일 그를 선택하면 화가 있을 것이다.’” 자, 이 말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그것이 그의 고민이었습니다. 정말 골치아픈 고민입니다.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과 자신의 생각을 구별하는 법을 썼던 저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조심하십시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겁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정말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예언이라는 말들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엄청난 혼란을 만들어 냅니다. 누가 옳습니까? 저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구절 아시죠?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는데요, 그 성경 구절은 이런 뜻이고 저런 뜻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말은 들은 다른 사람들은 옆에서 “정말 놀라운 해석입니다, 놀랍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저는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분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원칙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계시의 첫 번째 부분인 구약을 마치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무려 400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본보기와 모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계시가 주어지는 때가 있고, 계시가 끝나는 때가 있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침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은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400년의 침묵이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통해 다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주후 96년경 사도 요한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장차 요한계시록 11장이 이루어지는 그때에 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두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침묵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달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구약성경이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신약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시기에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96년경 이후로는 침묵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의 사랑하는 은사주의 형제자매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계시를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권위와 절대성을 무너뜨리고 있을 뿐 아니라, 해석과 실제 삶의 판단에 있어서도 끊임없는 오류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일들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목적이 뭐라고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그렇다면 사람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입니까? 모든 성경입니다. 그 외에 뭐가 또 필요합니까? 환상입니까? 계시입니까? 방언입니까? 체험입니까? 해석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께서 혹시 다른 사람에게 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세상을 돌아다니고, 그것이 유효한 것인지 또 판단을 해야 하고, 또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까지 고민해야 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되게 하기 위함입니까? 온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저는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찾는 사람들이 정말, 결국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얻게 될까 두렵습니다. 다만 그들이 얻게 되는 그 ‘무언가 더’는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으로 온전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저는 은사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실행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계시와 점진적인 계시를 허용하는 순간, 성경을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중요한 말을 한마디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그리고 완전히 로마 가톨릭교회가 역사 속에서 해 온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상관없는 전통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실은 은사주의적 전통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구속력을 가지게 합니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제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제가 그들의 입장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꾸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성경을 더 분명히 하고, 더 개인적으로 적용하도록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건 말장난일 뿐입니다. 표현만 바꾼 것일 뿐입니다. 성경의 절대성을 붙들면서 동시에 성경 이외의 수많은 계시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죠.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계시들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서 놀랍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강단에서 외칠 겁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성경 말씀을 살아 있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제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고 말하고 전도하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에 성령님이 제 안에서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안에서도 마찬가지죠.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시라고 부르고, 영감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유일성과 권위를 부인하는 오류에 힘을 실어 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국 여러분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죠. 성경과 전통, 이 둘 모두에 동일한 구속력을 부여하는 것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파생된 모든 거짓 체계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거짓 체계들 말입니다. 다음 주에 제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해 드리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독교에서 파생된 모든 거짓 체계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경에 무엇인가 추가적인 계시를 더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합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사주의 운동 안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이 주제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행하게 하시고, 성도들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게 하옵소서. 사탄은 진리를 흐리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분명하게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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