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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은사주의 운동 시리즈를 이어가겠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겁니다. 여러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만, 특정한 본문을 다루기보다는 신학 용어를 중심으로 해서 질문해 보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가운데 행하는 많은 선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주 안의 형제 자매들이 행하는 선행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은사주의 운동을 평가함으로써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분별하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라고 붙였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채널 40’을 보고 있었는데, 잘 알려진 기독교 지도자인 데이브 윌커슨(Dave Wilkerson)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윌커슨은 뉴욕 거리에서 참으로 훌륭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죠. 그런데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은사주의 운동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여겨질 만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흥미롭더군요. 이어서 깊은 우려를 표하면서, 은사주의 운동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저는 윌커슨이 지적한 사항에 모두 동의합니다. 윌커슨이 언급한 문제들은 앞으로 몇 주 동안 우리가 다루게 될 내용에도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윌커슨이 문제점을 충분히 깨달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문제점을 언급한 뒤에 말을 잠시 멈추고는 자기가 방금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다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흥미롭다. 윌커슨은 은사주의 운동 안에 있는 몇 가지 표면적인 문제들은 볼 수 있으면서도, 아직 문제의 핵심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에 계시를 덧붙이다니.” 저는 지난 2주 동안 바로 이 계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윌커슨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있다면서, 그 계시에 따르면 뉴욕시는 파산하게 될 거고, 미국 중서부 지역에는 치명적인 가뭄이 닥칠 거고, 캘리포니아에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들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고, 기독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될 거랍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빚을 청산하고 신용카드를 없애야 한답니다. 왜냐고요? 어디로든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교회와 가정이 무너지면 거리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다른 것들도 말씀하셨다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러자 리포터가 말합니다. “식량을 비축하는 문제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그것도 말씀하셨나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제 친구들에게는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해서는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흥미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윌커슨이 은사주의 운동 안에 있는 몇몇 문제들은 보면서도, 정작 가장 큰 문제는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하는 그 문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가 성경이고 어디서부터가 사람의 생각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윌커슨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내용들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큼이나 구속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우리는 계시의 문제를 살펴봤죠. 은사주의 운동의 첫 번째 문제점이 바로 계시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에 계속해서 새로운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덧붙인다면, 결국 혼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오늘 다루고자 하는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바로 해석의 문제입니다. 해석 문제입니다. 이 주제를 연구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 문제가 가져오는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해석 문제 역시 첫 번째 문제인 계시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이고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데 동의한다고 한들, 정작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과는 똑같을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놓치고 마는 것이죠. 성경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입니다”라고 말해 놓고는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본래 의도하지 않은 뜻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잘못입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모든 기독교 이단은 결국 성경에 무엇인가를 덧붙인 결과입니다. 성경에다 사람의 글을 추가하는 것이죠. 게다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제가 이번 주에 서랍에서 아주 오래된 자료집을 하나 꺼내 보았습니다. 수년 동안 이단에 관해 수집해 놓은 자료들을 살펴보았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교리들을 나열해 놓고는, 각주에 자기들의 잘못된 교리를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라며 적어 놓은 겁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성경을 이용해서 증명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비틀어서 해석하면 얼마든지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아주 유명한 예가 있죠. “유다가 나가서 목매어 죽으니라.” “너는 가서 그와 같이 하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세 구절을 이어서 읽으면 안되죠. 실제로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어서 붙이면 안 됩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하면 어떤 주장에라도 근거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전염병은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전염병을 내리실 권리를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전염병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구절을 잘못된 자리에 갖다 놓고, 문맥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끌어다 쓰고, 거기에다가 전혀 맞지 않는 다른 내용들을 억지로 연결해 놓으면, 그 어떤 황당한 주장이라도 성경에 근거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석 문제를 반드시 다루어야 합니다. 이단들도, 로마 가톨릭교회도, 자유주의자들도 모두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렇다고 저나 그레이스 교회가 무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 결단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 마음,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 굳은 헌신을 다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몇 가지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해석학’이라고 하죠. 헬라어 ‘헤르메뉴오(hermēneuō’)에서 나온 말인데, “의미를 밝혀 주다”, “뜻을 설명해 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번역하면 이런 뜻이라” 또는 “해석하면 이런 뜻이라”, 이런 표현이 아주 여러 차례 나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장 23절입니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바로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헤르메뉴오(hermēneuō)입니다. 임마누엘의 의미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석학이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성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밝혀내는 학문입니다. 저에게 맡겨진 책임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죠. 성경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국가의 헌법을 해석해야 할 책임은 대법원에 있는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중요한 문서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경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 역시 신중하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뜻을 왜곡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은사주의자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늘 걸립니다. 물론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문제는 은사주의에만 있지 않습니다. 여러 기독교 이단이 동일한 잘못을 범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가 특히 은사주의 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구절이 이런 뜻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또 “이 구절은 제게는 이런 의미예요” 이런 말도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성경 구절은 무슨 뜻이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의 본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의 성경관은 이렇습니다. “이 구절은 나에겐 이런 뜻이다.” 은사주의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이 자신에게 이 구절은 이런 뜻이고, 저 구절은 저런 뜻이고, “예수님께서 이 구절은 이런 의미라고 제게 말씀해 주셨다”고 말하면서, 결국에는 기독교를 신정통주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버렸습니다. 성경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의미가 있을 때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 내용이 무엇이든 다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의미와 상관없는 성경 말씀의 실제 의미입니다. 성경은 개인의 경험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상관없이 성경이 말하는 의미, 그 자체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의 답으로써가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내 생각이나 의미를 덧씌우기 전에, 성경 구절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 디모데후서 2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성경해석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니까 꼭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든 배우는 사람이든 반드시 익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 바로 성경해석학입니다. 성경의 의미를 바르게 찾아내는 학문이자 원리입니다. 또 어떻게 보면 기술입니다. 사실 성경해석학은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일꾼'이라고 부르면서 디모데후서 2장 앞부분에서 시작한 주제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2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묘사한 뒤에, 여기에서는 계속해서 교사를 일꾼으로 설명하면서, 그 일꾼이 해야 할 사역을 네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14절에 있습니다. 교사는 이단과의 무익한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다시 말해서 교회 앞에서, 믿는 사람들 앞에서 이단들과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논쟁은 문제를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따라서 이단들과의 무익한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제가 박사 과정을 공부하러 갔던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무엇을 전공하시겠어요?”, 이렇게 묻기에 제가 “성경, 특히 신약을 전공하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성적표를 한번 봅시다” 하더니, 성적표를 살펴보고는 “바로 학위를 받을 수는 없겠네요. 성경 공부를 너무 많이 하셨군요”,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과 신약을 전공하는 사람이 성경을 너무 많이 공부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철학을 훨씬 더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폭이 너무 좁습니다”라고 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 200권이 적힌 종이를 한 장 주는 겁니다. 영어로 된 책은 절반도 안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목록을 다시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내려고 몇 년씩 보낼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유익도 없는 논쟁에 제 자신을 빠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워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책들은 포도원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과 같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가는 청년들에게 늘 신학교를 아주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권면합니다. 신학교는 여러분이 이미 믿고 있는 진리를 더욱 굳게 세워 주는 곳이어야지, 믿음의 흔적이나 간신히 붙들고 나올 만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전쟁터가 되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익한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도 본질적으로 같은 말을 합니다. 4절입니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이단들과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종류의 대립은 사람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무너뜨릴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올바른 해석이 있기 때문에, 다른 해석 가능성을 두고 끝없이 논쟁하고 다투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여러 사람이 토론을 통해서 의미를 결정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지런하고 신중하게 연구하여, 본문이 담고 있는 기본 요소들을 살피고 그 본래의 의미를 밝혀내야 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주장만 내세우면서 논쟁할 문제가 아닙니다. 열 사람이 모여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저렇게 생각해.” 또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고 말한다고 해서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뚜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이미 모두 주셨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의미를 놓고 끝없이 논쟁을 벌이거나 토론하거나 함의를 찾아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직 한 가지 의미만 있습니다.

두 번째 원리는 말씀을 맡은 일꾼에게 주시는 교훈인데, 이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힘쓰라” 입니다. 무익한 논쟁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종인 성경 교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그러니까 인정받는 도키모스(dokimos), 일꾼이 되도록 자신의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정확해야 합니다. 정확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수치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성경의 의미는 한 가지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헌신하고 부지런히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며칠 전에 주방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주님께서 이 구절이 이런 뜻이라고 보여 주셨어요”라면서 아주 엉뚱한 해석을 내놓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사실 그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일들이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 구절은 제게 이런 의미에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은사주의 운동에 속하지 않은 우리 그레이스 교회, 또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도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이런 함정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서로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저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만 하다가, 결국 아무도 성경 말씀의 실제 의미는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 말입니다. 올바른 성경 공부 방법이 아닙니다. 적용 단계에서는 얼마든지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석 단계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려면 부지런히 연구해야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이 모두 열심히 연구하면 더 좋습니다. 각자가 부지런히 연구한 결과를 함께 모을 때 풍성한 유익이 나오죠.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부지런히 힘써야 합니다. 성경의 의미를 깨닫는 일은 힘든 작업입니다. 씨름해야 합니다. 땀 흘리고 수고해야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흔히 하는 것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가볍게, 되는대로 “제게는 이렇게 느껴집니다”라고 말하면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자, 세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 말씀에는 의미가 하나 뿐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정확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를 직역하면 “곧게 자르라”, 이런 뜻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자신이 천막을 만들던 일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겁니다. 천막을 만들 때 도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녔을 겁니다. 천막의 도면을 따라 만들려면 각각의 조각을 정확하게 잘라서 서로 잘 이어 붙여야만 했습니다. 당시의 천막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 조각을 이어 붙였습니다. 각각의 가죽 조각을 정확하게 잘라야만 마지막에 천막을 제대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조각을 정확하게 제대로 자르지 않으면 전체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각 구절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정확하고, 신중하고, 바르게 다뤄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의도하신 전체와 완전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공정하게, 신중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제가 은사주의 설교자와 교사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겁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고 정확하고 치밀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냥 대충 넘어가고 허술하게 다루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특히나 참기 힘든 문제입니다. 격한 반응이 자동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책을 주셨고, 하나님은 이 책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부지런히 연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씀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정말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만 해도 평생을 오직 연구하는 데만 바칠 수 있을 정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만큼의 수고를 요구하는 책입니다.

정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고린도후서 2장 17절이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말씀을 전하러 설 때는 말씀을 정확하게 자른다. 옳게 분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도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 설교를 좋아하도록 준비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기쁨으로 잘 받아주시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를 준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설교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이 “나는 말씀을 정확하게 자른다, 말씀을 옳게 분별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는 카펠로스(kapēlos)인데, 본래 뜻은 속여서 장사하는 행상이나 사기꾼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속이는 자, 부정직한 자, 협잡꾼, 거짓 교사, 하나님의 말씀을 장삿거리로 삼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고 왜곡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섞어 버립니다.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에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 목적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성경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는 것이죠. 저는 그런 일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건축을 추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원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성전 건축에 관한 구약의 말씀을 끌어다가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십일조를 하게 만들고 싶어서 말라기 3장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라기 3장은 교회에 헌금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라기 시대에는 교회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곳간에 바쳐야 할 조세와 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는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만 비틀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값싼 유리를 다이아몬드인 것처럼 속여서 파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죠.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정말 큽니다. 정말입니다. 설교를 하다 보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뜻이 아닌 성경 구절을 조금만 억지로 끼워 맞추고 살짝 비틀면 마치 그런 뜻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강한 압박을 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장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사람들을 속여 잘못된 해석을 믿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여기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지난주에도 다른 문맥에서 살펴봤지만,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두 가지로 규정되는 사람들의 특징을 주목하십시오.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억지로 풉니다. 헬라어로는 '스트레블루신(streblousin)'인데, 비틀고, 뒤틀고, 억지로 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비틀고 뒤틀어 버립니다. 다른 성경도 그렇게 하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멸망에 이릅니다. 성경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성경을 비틀고 왜곡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장사를 하고, 사람들을 속여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입니다”라고 믿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본 모든 이단도 성경을 인용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합니다. 기독교 안에 거짓 교리를 들여오려는 모든 거짓 교사는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이리저리 비틀고 왜곡해서 사용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성경을 비틀기만 하면 성경을 가지고도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17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여호와의 증인, 크리스천 사이언스, 가톨릭교회, 암스트롱주의, 장미십자회 이것들을 한번 보십시오. 요즘은 텔레비전에서도 나오지 않습니까? 또 유니테리언, 그 밖의 수많은 이단종파들도 모두 성경을 사용합니다. 인용합니다. 그러나 모두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몰몬교, 에덴동산이 미국 미주리주에 있었다고 가르칩니다.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오시죠? 저도 왜 그렇게 가르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든 것의 시작을 아마도 조셉 스미스와 모로나이 같은 존재들과 연결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창세기 2장 14절은 에덴동산이 티그리스강과 유브라데강이 있는 앗수르 지역에 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몰몬교는 “그것은 단지 비유일 뿐이다. 실제 에덴동산은 미주리주에 있다. 실제로 앗수르 지역에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당신의 해석일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저는 사람들이 “그건 목사님의 해석일 뿐이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 솔직히 거부감이 듭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저의 해석을 전하기 시작하면, 꼭 저에게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사역은 끝난 겁니다. 물론 제가 가끔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결코 무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을 바랍니다. 저는 제 해석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세워 주신 교사들의 역할을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는 성경 구절의 의미를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평생을 바쳐 성경을 연구하여 그 본문의 의미를 설명해 주면, 사람들은 “그건 당신의 의견일 뿐입니다”, 이렇게 해 버립니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는 풍조가 퍼지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경 교사의 신뢰와 권위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저는 “성경이 당신에게 말해주는 것이 곧 성경의 의미다”라고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적 사고방식이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복음주의 교회들 안에까지도, 심지어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도 그런 사고방식이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몰몬교는 요한계시록 14장 6절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천사가 전하는 '영원한 복음'이 바로 몰몬경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은 몰몬경이 아닙니다. 성경해석의 원리에 따라서 영원한 복음이 무엇인지 제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고 의를 행하는 자에게 상 주신다는 복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건 당신의 해석일 뿐입니다”라고 되받아칩니다. 또 몰몬교는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두 막대기, 곧 유다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그 두 막대기가 사실은 성경과 몰몬경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해석의 원리에 따라서 그것을 성경과 몰몬경이라고 볼 수 없고, 유다와 이스라엘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고 설명해 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또다시 “그건 당신의 해석일 뿐입니다”라고 합니다.

몰몬교는 자기들이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위해서라면 다른 성경 구절과 충돌하더라도 원하는 대로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 49편 7절부터 8절은 분명하게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라고 합니다. 아무도 자기 형제를 대신하여 구속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몰몬교는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을 근거로 해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 형제를 구속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해석하면 안됩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또 “그건 당신의 해석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단지 우리의 해석일 뿐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따라야 하는 원칙들이 있습니다. 이단에게 그렇게 오류가 많은 이유는 바로 올바른 해석 원리가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설교자와 교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데 허술하고, 마땅히 기울여야 할 만큼의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자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계시가 잘못 해석되고, 잘못 적용되고, 잘못 전달되며, 결국 잘못 이해되고 맙니다. 정말 비극적인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책이 수도 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책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제가 가장 견디기 힘든 말은 “예수님께서 이 구절의 의미를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그 구절을 완전히 잘못 해석합니다. 저는 은사주의자들의 간증 가운데서 그런 말을 정말 수도 없이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사견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원리,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가르쳐 주는 올바른 해석 원리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원리들을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아직도 디모데후서 2장을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해석하는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잘 보십시오. 첫째, 성경 해석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단들과 쓸데없이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그 하나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힘써야 합니다. 셋째, 말씀을 정확하게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 전체와 조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넷째, 거짓 교리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올바른 해석을 깨달았다면 그 자리를 내어주면 안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처음에는 진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가르침에 마음을 내어주고, 조금씩 조금씩 올바른 해석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진리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면, 거짓 교리에 노출시키면 안 됩니다. 거짓 교리는 암처럼 조금씩 사람을 잠식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해석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고, 말씀을 정확하게 잘라서 성경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하고, 거짓 교리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면 그 결과가 20절 이하에 나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받는 사역자,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사역자, 하나님의 밭에서 열매를 맺는 사역자는 말씀을 정확하게 자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다루는 사람입니다. 거짓 교사들과 어울려 영향을 받아서 무너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허술한 해석이나 엉성한 본문 해석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어야 합니다.

자, 이제 구약으로 가서 느헤미야 8장을 보겠습니다. 새로운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보여 드리겠습니다. 느헤미야 8장 1절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던 때에, 이스라엘 역사에는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8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잘 들으십시오.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율법책을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부흥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여기에서,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무엇이 이어지는지 보십시오. 7절로 가겠습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잘 보십시오. “자, 율법책이 여기 있으니 이제 각자 읽고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 알아보십시오, 각자 알아보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설명해주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그 당시에도 교사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은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오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하신 정확한 말씀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바르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다시 디모데전서 4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어떻게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디모데가 반드시 따라야 할 기본적인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3절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다시 말해서, “디모데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원리를 붙들어라”라는 말입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이 세 가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읽고, 본문을 설명하고, 본문을 적용하라.”

여기서 말하는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하는 것'은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적용은 하면서도, 정작 그 의미를 설명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즉흥적이고 변덕스럽게 해석을 늘어놓습니다. 저는 실제로 성경의 한 부분을 펼쳐 놓고는 준비도 없이 강단에 올라가서, 이 구절 저 구절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설명하는 설교자들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다루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대개 상상력이 풍부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납니다. 재미있고 상상력이 좋아서, 코미디언이나 뛰어난 연설가처럼 청중을 휘어잡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자르지 않습니다. 읽고, 설명하고, 적용하는 일에 헌신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은 성경을 발판으로 삼아서 자기 자신의 개성과 매력을 표출할 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떤 본문들은 우리가 가진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끼리도 견해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더 많은 지식과 통찰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의 견해를 바꾸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괜찮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6년 전에 한 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다르게 말씀하시네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네, 맞습니다. 제가 성장하고 있는 겁니다. 배우고 있는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겠다는 자세를 분명하게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이 구절은 제게 이런 의미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결국에는 신정통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동일한 성경관입니다.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든, 여러분에게 강하게 와닿기만 하면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방식은 성경을 대하는 매우 위험한 관점입니다.

이제는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쳐 준 성경해석의 네 가지 긍정적인 원리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성경에는 오직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힘써야 합니다. 셋째, 말씀을 정확하게 잘라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넷째, 한번 바른 해석에 이르렀다면 거짓 교리 때문에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피해야 할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잘 따라오십시오.

성경을 해석할 때 피해야 할 첫 번째는, 올바른 해석을 희생하면서까지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올바른 해석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문맥에서 뚝 떼어내서 성경 구절을 사용하려는 유혹을 언제나 받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 봅시다. 제가 어떤 본문을 연구하다가도 “이 문제를 어떻게든 이 본문 속에 집어넣을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꾸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 본문을 이용하면 저 사람들에게 한마디 제대로 해줄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교회 안에 문제가 있을 때 강단에 서서 “지금부터 바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정면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직접적이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좀 교묘하게, “마침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이 본문으로 인도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그 본문과 상관없는 내용을 억지로 끼워 넣고 싶은 유혹을 받죠.

그러나 그런 유혹은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성경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객관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생각에 성경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객관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만을 그대로 말하게 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교사의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의도 자체는 좋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죠. 그런데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바벨탑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저는 “흥미로운데, 한번 계속 읽어 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일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물질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은 나중에 생각했기 때문이다. 탑이 높아지자 벽돌을 나르는 사람이 맨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벽돌을 가져다주려면 몇 시간이 걸렸다. 만약 사람이 벽돌을 들고 올라가다가 떨어져 죽으면, 사람들은 그 사람보다 벽돌을 잃은 것을 더 슬퍼했다. 반대로 내려오다가 떨어져 죽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벽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사람보다 벽돌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그만 그만. 더 이상은 못 읽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그런 해석은 어디서 가져온 것입니까? 전부 상상입니다. 바벨탑 사건의 메시지는 '사람이 벽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탑의 핵심 메시지는 '우상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시다'입니다. 물론 사람이 벽돌보다 중요하다는 말 자체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이 그것을 가르치지 않죠.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성경으로 무엇이든지 지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신학도 만들어 낼 수 있고, 나쁜 신학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벽돌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올바른 진리입니다. 그러나 바벨탑 본문의 가장 중요한 교훈,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우상보다도 더 중요하시다는 메시지를 놓쳐 버린다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기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설교하고 싶은 내용을 정해 놓고, 그다음에 그 내용을 뒷받침해줄 만한 성경 구절들을 찾아서 문맥에서 떼어내서 자기 멋대로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마치 어떤 설교자가 “여자는 머리를 올려 묶으면 안 된다” 이런 설교를 한 것과 같습니다. 본문이 “머리 위에 있는 것을 내리지 말라”라는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실제 본문은 마태복음 24장의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오지 말라”는 말씀인데, '머리 위의 매듭(topknot)'으로 억지로 연결을 시킨 겁니다. 물론 과장된 예시이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려는 요점은, 사람들의 반응만 이끌어내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면서, 결국에 효과만 있으면 방법이야 어떻든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1977년 2월 4일 자에 실린 글 하나를 제가 읽었습니다. 듀에인 리트핀(A. Duane Litfin)이 쓴 <설득력 있는 설교의 위험성(The Perils of Persuasive Preaching)>이라는 글이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리트핀은 사람의 행동이 변화하는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다섯 단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관심을 끄는 것이고, 둘째는 이해시키는 것이고, 셋째는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기억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이랍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관심을 끌어야 하고, 다음에는 말하는 내용을 이해시키고, 그다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계속 기억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섯 단계입니다. 그런데 리트핀은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설교자들은 언제나 세 번째 단계, 곧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도록 배워 왔다. 사람들의 결단을 이끌어내고, 반응을 얻어내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됩니까? 설교의 동기가 되고 방향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반응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자극하고, 눈물을 짜내는 이야기 열다섯 개를 들려주고, 리트핀의 표현대로라면 거룩한 척하는 할리우드식 스타 강사들을 불러다가 사람들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키고, 마지막 찬송은 마흔여덟 절까지 부르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질 때까지 몰아붙여 어떻게든 결단을 끌어내려고 합니다.

또 우리는 전도할 때도 “무슨 일이 있어도 결신을 받아내라. 결신을 받아내라. 결신을 받아내라”,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물건을 팔면서 계약서에 서명도 받지 않고 그냥 물러서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서명을 받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왜곡하는 일까지 생깁니다. 그러나 리트핀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세 번째 단계인 '받아들이게 하는 것'까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은 두 번째 단계인 '이해시키는 것'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람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은 성령님께 맡겨야 합니다. 저는 그 말에 백 퍼센트 동의합니다.

제 책임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고,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 드리는 것까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해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을 책망하시고 확신하게 하십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반응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리트핀은 최면술에 관한 책을 쓴 프레더릭 마큐즈(Frederick Marcuse)를 인용합니다. 인용문 전체를 읽어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충분히 설득력 있고 강력한 방법만 사용하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밝힌 사람을 세 번의 상담만으로 종교적인 사람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설득의 힘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시킬 수 있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사람들을 모두 부두 끝으로 이끌고 간 것처럼, 사람들을 어디든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득력을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심리학자인 제임스 맥코넬(James McConnell)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내게 몇 주만 맡겨 주면,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일만 아니라면 현재의 행동을 원하는 어떤 행동으로든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날개를 퍼덕여 하늘을 날게 만들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을 공산주의자로도 만들 수 있고, 공산주의자를 그리스도인으로도 만들 수 있다.” 설득이 가진 힘입니다.

사람들의 감정을 충분히 고조시키고, 성경 구절을 조금만 비틀어 그 감정을 자극한 다음, 원하는 반응을 얻어 내면, 사람들은 모든 것이 정당화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리트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특정한 기술만 사용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셔도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물론 바울은 그런 방법을 분명하게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올바르게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온전함을 희생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응답으로 반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과 중심적인 태도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을 이리저리 비틀어 사용하는 것은, 결국 성경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산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려는 경우가 그 한 예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사가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어떤 결단을 억지로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진리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순종과 결단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피해야 할 것은, 성경을 이용해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것뿐만 아니라, 연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성경 연구는 힘든 작업입니다. 마치 도랑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끝날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묵묵히 파야 합니다. 힘든 노동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제가 이 일을 워낙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평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성경만 연구해도 여전히 부족하다, 이렇게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노동에 견줄만한 연구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TV 프로그램 '700 클럽'에 나와서 성경을 펼쳐놓고 “며칠 전에 부엌에서 이 구절을 읽고 있었는데, 이 말씀이 제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저는 그저 “아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는 “이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면서 전혀 엉뚱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주님께서 저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반드시 연구해야 하는 책입니다. 물론 저는 성령님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교사들을 세우신 이유는, 교사들이 성경 말씀 연구에 헌신하고 힘써서 말씀을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라고 했겠습니까?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교회에서 두 배로 존경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서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저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하면서 무지만 모아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 그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반드시 깊이 알아보아야 합니다. 주석을 찾아보든지, 그 의미를 아는 성경 교사에게 물어보든지 해야 합니다.

제가 은사주의 운동에서, 그리고 더 넓게는 오늘날 교회 전반에서 이제는 성경 전문가가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성경을 정말 탁월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어떤 구절이든, 어떤 본문이든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제 자신을 탁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흥적으로 내놓는 해석을,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힐 수 있는 학문적 훈련과 도구를 갖춘 성경학자들의 해석과 같은 수준에 두면 안 됩니다. 이 둘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교사들을 주셨습니다. 왜 에베소서 4장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라고 말할까요?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으면 성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에서 “너희는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의 지혜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교회에는 분명하게 교사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교사들에게는 선하고 정확하게 말씀을 가르치려는 막중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한 은사주의 목사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주석서나 책을 읽지 않는다. 오직 성경만을 읽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리를 직접 보여주신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4장 26절을 근거로 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약속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강단에 올라서 “하나님께서 제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적어도 절반 이상은 하나님께서 그 본문에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내용을 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75퍼센트쯤은 말씀에서 빗나갈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그런 말은 매우 영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감춰진 자기중심적인 태도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은사주의 여성 설교자가 라디오 방송에서 “설교는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위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직접 전달해 주십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너무나 우려스럽습니다. 이런 즉흥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매우 염려합니다. 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기독교 행사에 참석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시간조차 내지 않는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깊이 우려합니다. 그러면서도 강단에 올라서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본문의 의미가 전혀 아닌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제 친구인 로버트 실리(Robert Sealy)가 은사주의 운동에 들어간 한 청년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서 답장을 받았는데요, 그 내용의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제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제 위에 쏟아질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고, 휘장을 지나 예루살렘 성으로, 지성소로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이런 식의 신비주의 영성 표현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그분 안에 있는 저 자신을 보았고, 그분도 제 안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불 성령세례를 받았고, 그때부터 그분의 사랑이 제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날마다 그분과 교제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문단을 잘 들어 보십시오. “저는 더 이상 성경을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 안에 거하시니, 그분이 곧 말씀이십니다. 물론 저는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고, 성경은 중요하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밑줄까지 그어 놓았습니다. “성경은 중심도 아니고 결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저를 붙들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차적인 근원입니다. 성령세례를 통해서 제 안에 있는 말씀이 일차적인 것입니다. 그분께서 제게 말씀하게 하신 것을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청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내 안에 살아 있는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성경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세요? 정말 두려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 은사주의 운동에 속한 청년이 한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계속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감지하는 것, 나의 해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재앙이 일어납니다.

저는 어떤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알려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과연 그런 방식으로 성경의 어려운 내용도 설명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에게 세둘과 모압과 마헬살랄하스바스와 갈노와 갈그미스와 다그모니 사람 요셉밧세벳에 대해서 아무 연구도 하지 않고 한번 가르쳐 보라고 말해보고 싶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케노시스(Kenosis)',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 이런 교리를 설명해 보라고 하고도 싶습니다. 모두 기독교 신앙에 있어 핵심적이고 중요한 교리들입니다. 연구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자를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합니다. 부지런히 연구하지 않고, 교리를 정확하게 다루지 않은 결과가 바로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 전반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오해입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성경 구절이 잘못 해석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해석은 결국 세 번째로 피해야 할 문제를 낳습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입니다. 사람들이 상상력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성경의 실제 의미를 모르니까,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대신에, 마치 우화나 비유나 영적인 이야기처럼 다루면서, 거기에 자기 생각을 덧붙여서 영적인 교훈을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읽어 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읽어 넣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 안으로 자기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설교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제가 택한 본문은 “천사가 돌을 굴려 옮기니”였습니다. 부활에 대한 얼마나 좋은 설교 본문입니까? 그런데 저는 부활을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서 돌을 굴려 내십시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의심의 돌을 굴려 내고, 절망의 돌을 굴려 내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돌을 굴려 옮겼다”는 본문의 메시지는 제가 설교한 내용의 뜻이 아니죠. 저는 그렇게 설교하기보다는 천사가 왜 그 돌을 굴려 옮겼는지 본문의 의미를 깊이 연구한 다음에 부활에 대해서 설교해야 했던 것입니다.

또 오래전에 아버지께서 사도행전 27장의 “닻 넷을 바다에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라는 말씀으로 설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본문을 가지고 “믿음의 닻을 내리고, 소망의 닻을 내리라”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 그 사람들이 닻을 내린 이유가 뭔지 아세요?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붙잡아 두려는 것뿐이었어요. 그게 전부에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아버지도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웃으십니다. 저는 아버지께 “제가 돌을 굴려 내는 설교를 하게 된 것도 결국 아버지의 닻 설교를 보고 배운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시겠어요? 저는 정말 그렇게 믿습니다. 성막 기둥 중에는 그저 옆 벽을 지탱하기 위해 세워진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성소 뒤편 중앙에 있는 널빤지가 '영원한 구원의 보장' 교리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하면 정말 끝이 없습니다. 제가 또 한번은 나사로에 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나사로를 교회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교회의 휴거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설교를 '꼬마 보핍(Little Bo Peep) 설교'라고 부릅니다. 이런 식이라면 성경도 필요 없습니다. 상상력만 좋으면 어떤 말씀이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꼬마 보핍은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양처럼 목자 없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결국 집으로 돌아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런 식이라면 성경은 아예 필요 없습니다. <꼬마 보핍 이야기>도 사용할 수 있고, <이솝 우화>도 사용할 수 있고, <마더 구스 동요집>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런 식으로 다루면 안됩니다.

한 젊은 부부가 결혼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서 제리 미첼(Jerry Mitchell)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상담을 시작한 지 한 30분쯤 지나자 제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두 분은 도대체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습니까? 두 분은 너무나 달라요.” 그러자 두 사람이 “교회 목사님의 설교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도대체 무슨 설교였는데요?”라고 묻자, 그랬더니 “여리고성에 관한 설교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리고성 설교가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설명합니다.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여리고성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일곱 번 돌았더니 성벽이 무너졌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젊은 여성을 당신에게 주셨다고 믿는다면, 그 여성을 붙잡고 일곱 번 돌면 그 여성의 마음의 성벽도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대로 했어요. 그리고 나서 우리가 결혼하게 됐어요.” 제리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실이 아니지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아니에요. 진짜에요. 정말이에요. 그 설교를 듣고 결혼한 사람 우리 말고도 많이 있어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제리는 정말인지 확인해 보려고 그 목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예, 제가 실제로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본문으로 여러 가지 다른 주제의 설교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여리고 성벽이 무너진 사건의 메시지는 어떤 여자를 일곱 번 돌면 그 여자의 마음의 성벽이 무너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식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옛날 알레고리 해석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부르신 것은 사실 아브라함이 영원히 살 것이라는 뜻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두 번 반복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의 해석이 문제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이런 해석 방식 위에 쌓아 올린 종교입니다. 예전에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간 여정을, 감각적인 이해를 버리고 더 높은 깨달음에 이르는 스토아 철학자의 상상적인 여행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또 선한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준 두 데나리온을 세례와 성찬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도 욥기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이단들을 가리킨다. 욥의 일곱 아들은 열두 사도를 가리킨다. 욥의 칠천 마리 양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가리키고, 삼천 마리의 낙타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0장으로 가서는 “성경에 이 모든 일이 본보기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0장을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이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죽었으니, 여러분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같은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의미입니다. 결코 낙타가 이방인을 상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유명한 은사주의 설교자는 느헤미야를 가지고 연속 설교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것은 인간 인격의 무너진 성벽을 의미한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성령을 상징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무너진 인간의 인격을 다시 세우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본문에 나오는 작은 요소마다 모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마침내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그 왕의 못이 성령세례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거기서 다시 방언에 대한 가르침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이야기는 성령이나 인간 인격의 성벽이나 성령세례나 방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사람들은 대단한 성경 해석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강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아닌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장사거리로 이용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고도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토마스 소령(Major Thomas)이 쓴 <죽으면 죽으리이다(If I Perish, I Perish)>라는 책을 읽어 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성령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에스더에는 성령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에스더를 성령으로, 모르드개를 인간의 영으로, 하만을 육체로 해석해서 하나의 알레고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게 해야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이제 이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성경을 충분히 비틀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소방차는 왜 빨간색입니까?” 그러자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소방차에는 바퀴가 네 개 있고 소방관이 여덟 명 타니까 모두 열둘입니다. 열둘은 1피트가 12인치인 것과 같습니다. 피트(foot)는 발이기도 합니다. 발은 자(ruler)를 이용해 잽니다. 룰러(ruler)는 자라는 뜻도 있지만 통치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통치자(ruler)였습니다. 또 Queen Elizabeth는 여객선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배는 바다에 있고, 바다에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fins)가 있습니다. 핀란드인(Finns)은 러시아 사람들과 싸웠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공산주의자였으니 빨갛습니다(red). 그리고 소방차는 항상 급히 달립니다(rushin'). 그러므로 소방차는 빨간색입니다.” 여러분, 아시겠어요? 이런 식이라면 무엇이든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은사주의 운동을 비롯한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기들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4장에서 두 제자와 엠마오로 가셨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참 좋습니다.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기서 '설명하시니라'라고 번역된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헤르메뉴오(hermēneuō)'입니다. '해석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르치실 때는 언제나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셨습니다. 바로 '헤르메뉴오', 성경해석학(hermeneutics)의 원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은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바르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올바른 원리로 성경을 해석하신 완전한 교사의 본이십니다. 이 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왜곡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일이죠.

다음 시간에는 이런 잘못된 해석의 희생양이 된 성경 본문들을 몇 가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오늘 아침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올바르게 다루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고, 또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가르치게 하여 주옵소서. 부지런히 연구하게 하시고, 훌륭한 교사들과 좋은 책들을 통해 배우는 겸손함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물론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면 우리의 견해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빛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진리를 알려고 힘썼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그대로 말씀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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