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은사주의 시리즈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매우 어려운 주제입니다. 무엇보다 어떤 운동을 평가하면서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을 다루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 안에 너무나 다양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죠. 또한 저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멀어지게 하거나 배척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원리로 세워 주신 기준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우리 교회의 사역이 비판하는 데 치우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이 시리즈를 통해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목회자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때에 따라 서로 다른 주제를 강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전체 그림을 성도들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내용은 그 전체 가운데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주제도 아니고, 단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은사주의 운동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 앞에서 시험해 보는 한 가지 방법일 뿐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이 운동을 통해 좋은 열매도 맺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가 전파되었고, 주님의 사랑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사주의 운동 안에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운동에 속한 모든 사람을 이단이라고 단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반드시 다루어야 할 문제는 분명하게 다루려는 것입니다.
제 자신도 늘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걸러내고, 말씀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받아들이십시오. 우리가 은사주의 운동을 살펴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은사주의 운동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 드러나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계시의 문제입니다. 2주에 걸쳐 살펴보았죠. 다른 하나는 지난 주부터 살펴보고 있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이 해석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둘째, 성경이 반드시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부터 이 주제를 시작했는데, 저는 지난주에 전한 말씀이 정말로 매우 중요한 메시지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과 함께 이 두 설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원리를 실제로 적용하는 방법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도록 돕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모든 은사주의자를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은사주의자들 중에도 정말 소중한 친구들이 많습니다. 또 가르치는 내용도 매우 다양합니다. 지금 다루려는 것은 은사주의 운동 전반에 나타나는 몇 가지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죠. 물론 모든 본문에 대해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해서는 견해가 상당히 일치합니다. 그 한 예로 찰스 헌터(Charles Hunter)와 프랜시스 헌터(Frances Hunter) 부부가 있습니다. 책을 여러 권 썼고요, 전국 각지의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집회에 아주 자주 출연해서 매우 적극적으로 은사주의 운동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헌터 부부가 쓴 책 중에 <왜 방언을 해야 하는가?(Why Should I Speak in Tongues?)>라는 책이 있습니다. 방언을 하게 된 여러 간증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그 책의 서론을 읽다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그 부분을 조금 읽어 드리면서 그 글을 바탕으로 오늘 말씀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서문의 첫 부분부터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신 예수님은 태어나시는 순간부터 작은 인간의 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지니고 계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과학자나 교육자나 교사들이 이룬 모든 업적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일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정죄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속했다면서 능력이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세상의 구주이신 분을 향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성령님이라는 아름다운 선물에 대해 예수님께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다. 고든 린지(Gordon Lindsay)는 이렇게 말했다. ‘방언을 비롯한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을 악한 영들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대담하고도 위험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근본주의자들이었고, 예수님의 사역을 마귀의 능력으로 돌렸다. 예수님은 그런 비난을 꾸짖으셨을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이 아름다운 능력의 은사는 20세기의 바리새인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고, 정죄를 당하고, 금지당하고, 조롱을 받고, 비판을 받아 왔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마귀의 역사로 돌리면서, 예수님은 변하셨고 2천 년 전의 예수님과는 더 이상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성령께서 치유하시는 능력을 부인하려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마귀에게서 왔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쓰러질 때 일어나는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언이나 방언의 메시지와 통역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이 참되다고 믿는다면 성경은 언제나 모든 시험을 견뎌낸다. 성경 어디에도 방언을 마귀와 연결해서 말하는 곳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방언은 언제나 성령과 관련해서만 언급된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설 때는 어떤 비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령세례를 받은 가장 분명한 증거는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는 삶이다.”
“성령세례는 실제로 일어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활력 있는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말과 생각과 행동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향해 있다. 삶에는 성령의 열매가 넘쳐 흐른다. 많은 사람이 은사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성경이 성령세례의 증거로 제시하는 유일한 표지가 바로 방언이기 때문이다.”
서론의 시작 부분입니다. 들으시면서 여러분도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이 하나하나 쌓여 가면서, 결국에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위축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방언을 부인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했던 것과 같은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를 정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부인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방언을 부인하는 것은 성령세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에서 제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 많이 있지만, 오늘은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몇 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려는 것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주장입니다. 저를 매우 안타깝게 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에게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얼마나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다루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제가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저를 20세기의 바리새인이라고 부르면서, 성경을 공격하는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부류로 몰아가면서, 제가 성령의 모든 사역을 사탄의 일이라고 정죄하는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저는 그런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식의 잘못된 해석과 지나친 일반화가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은사주의 운동으로 끌어들이는 도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당신이 방언을 부인하면 그리스도를 정죄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편에 서는 것이고, 성령을 정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는 두려움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방언을 부인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줍니다. 헌터 부부(Hunters)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마귀와 방언을 함께 언급한 곳은 없다. 방언은 언제나 성령과 관련해서만 언급된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을 주시는 분이 반드시 성령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방언을 흉내내고 왜곡하고 변질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사람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서론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면, 성경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이나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곧바로 압박을 받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이 바리새인이 될 수도 있고,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그런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강력한 심리적 장치 아니겠습니까? 특히 아직 그런 성경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이 매우 파괴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사람들을 은사주의 운동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져다가 자기 뜻대로 비틀어 버리는 이단들이 사용하는 방식과 똑같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그런 모습이죠. 어린아이 같은 신자들이 온갖 교훈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사람들의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아직 스스로를 지킬 만큼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 영적으로 아직 어린 사람에게는 성경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헌터 부부(Hunters)는 서문에서 마태복음 12장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다룬 뒤에, 마가복음 16장 18절을 언급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8절에는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뱀과 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누가 일부러 뱀을 손으로 집어올리고 싶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울뱀이 가득 든 바구니에 손을 넣고는 과연 물리는지 물리지 않는지 시험해 보라고 의도하신 것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구절은 무슨 뜻일까? 사도행전 28장 3절부터 5절을 보면 바울이 배가 난파되었을 때 어떻게 했는지가 나온다. 바울은 우연히 뱀을 집어 들었다. 덧붙이자면, 본문에는 바울이 뱀을 집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점은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나를 봐라, 나는 뱀에 물리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떠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저 뱀을 불에 떨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신 것을 찬양했을 뿐이다. 우리도 독을 먹어서 독에 면역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일부러 그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가는 곧 면역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정말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성경은 우리가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더라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할렐루야! 우리가 아는 최고의 보험 증권이다.”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연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8절 어디에도 이 '우연히'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방울뱀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와서 손을 넣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도 실제로 그렇게 했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연히'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맞지 않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실수로 독성 물질을 마신 적이 있었는데요, 제가 못 견디고 결국은 위세척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령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한 일을 알고 계실 겁니다. 독 때문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약물을 잘못 맞아서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약물 역시 독입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이 표적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된다. 믿는 사람은 뱀에 물리거나 독을 마셔도 괜찮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에는 뱀에 물리거나 독 때문에 죽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그 해석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조금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에 나오는 가장 큰 뱀은 누구인가? 물론 사탄이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무엇을 해 주는가? 성령세례는 사탄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말씀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려다 보니 결국 비유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뱀이 사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번 주에 제가 읽은 또 다른 책에서 오랄 로버츠(Oral Roberts)도 이 본문을 동일하게 해석했습니다. 역시 비유적 해석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18절의 병 고치는 부분, 17절의 방언에 관한 부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독과 뱀에 관한 내용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섯 가지를 모두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비유로 해석하든지 모두 같은 원칙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를 모두 인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설명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지고만 것이죠. 그래서 '우연히'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실 이 다섯 가지는 구한다고 해서 모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하면"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잠시 후에 이 말씀을 함께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또 흥미로웠던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20세기를 사는 우리는 제자들이 누렸던 것보다 못한 것에 만족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날에도 성령을 부어 주고 계신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아마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구절은 히브리서 13장 8절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어제 방언을 증거로 하는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면, 오늘도 분명 그렇게 하고 계시고 내일도 계속 그렇게 하실 것이다. 신약성경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 다시 기록된 적이 없다. 만일 우리가 다른 증거나 분명한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면, 신약성경이 다시 기록되었다고 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세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고, 예수님도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효과가 있다.”
이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본문은 나중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은사주의자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한 모든 기자가 방언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 기자들이 모두 방언을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방언을 명하셨다고 했지만, 역시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태복음 12장과 히브리서 13장을 통해서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다루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내용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쉽게 그 주장에 현혹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성품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한 사람이다. 성령의 역사를 마귀의 역사로 돌리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정죄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현대판 바리새인이라는 식으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은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두렵게 만듭니다. 어떤 이들은 왜 이런 은사주의 운동에 끌려 들어가는지 의아해합니다. 많은 경우에, 바로 이런 접근 방식이 만들어 내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성경 해석 방식 때문입니다.
해석 문제에서 제가 반복해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치유가 속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질병까지도 대신 담당하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근거로 듭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는 말씀이죠. 이 구절을 근거로 치유가 속죄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질병은 이미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실제로 아프지 않다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병이 낫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연 이 구절이 정말 그런 뜻일까요? 은사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하기를 원하고, 결국 그렇게 해석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무류하거나 무오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또한 그레이스 교회가 무류하거나 무오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그렇듯이, 우리 역시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성경을 잘못 해석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저는 은사주의자들이 성경 전체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특히 강조하는 핵심적인 부분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바로 이런 본문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성경이 실제로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저 존 맥아더의 개인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원칙을 따라 온 신실한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해 온 역사적인 해석입니다.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은 자신의 저서 <성경적 계시(Biblical Revel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느슨한 해석학은 영감의 의미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으며,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을 감추는 가면이 될 수도 있다. 성경에 대해 아무리 정통적인 입장을 취한다 해도, 왜곡된 해석으로 성경의 진리가 무력화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바로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못 해석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디모데후서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잘라야 합니다.
이제 해석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어떤 원리가 필요할까요? 지난주에는 해석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살펴보았죠. 이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떤 원리들을 따라야 할까? 성경을 펼쳐 놓고 "아, 나는 이 말씀이 이런 뜻인 것 같아"라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따라야 하는 원리들이 있습니다.
그 원리들을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입니다. '문자적 해석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성경 해석의 원리입니다. 첫 번째는 문자적 해석의 원리입니다. 꼭 적어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곁에 두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맨 앞의 여백에다 적어두시면 아마 가장 좋을 겁니다. 그곳에 오늘 말씀드리는 내용을 적어 두시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문자적 해석 원리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을 본래의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말씀을 가장 자연스러운 보통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본 의미를 따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하려 하신다면 가장 분명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을 겁니다. 가장 분명한 방법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간단한 방식이란 사람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말씀하시는 것이죠.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야말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면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나 비밀스러운 의미, 상상해 낸 의미, 우화적인 의미, 또 지나치게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주에도 살펴본 것처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다는 말씀은 성령님이 인간의 인격이라는 성벽을 재건하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다는 뜻이죠. 그것이 전부입니다. 거기서 끝입니다. 또 성경이 소를 말하면 소인 것이고, 집을 말하면 집인 것이고, 남자는 남자인 것이고, 여자는 여자인 것입니다. 물론 스가랴서나 다니엘서, 에스겔서, 또 요한계시록처럼 장차 일어날 일을 환상으로 보여 주는 묵시문학에서는 비유적인 언어나 상징적인 표현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들 역시 당시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 상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문맥과 성경 전체를 통해 이해하고 해석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도 문자적 해석의 원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문자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제가 한 가지를 경고하고 싶습니다. 문자적 해석이라는 원리를 버리는 순간, 정확한 성경 해석에 대한 희망도 함께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아무 기준이 없어지고, 오직 사람의 상상력만 남게 되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해석의 승자가 되고 맙니다. 문자적 의미를 부인하는 순간, 성경을 이해함으로써 성경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기 뜻대로 사용하면서 성경을 종으로 부려 버립니다.
옛날 유대 랍비들이 하던 방식이 바로 이런 방식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알파벳의 각 글자마다 숫자값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알파벳에 숫자값을 더해서 거기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Abraham)이라는 이름의 숫자값을 모두 더하면 318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에게 종이 318명 있었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이라고 말할 때는 그의 종 318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해석은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무너뜨리는 해석입니다. 언어의 목적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문자적 해석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두 번째 원리는 '역사적 해석 원리'입니다. 깊이 배우시려면 해석학 과정을 따로 공부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만 간단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역사적 해석 원리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고린도전서 강해를 계속 들으셨다면, 13장까지 마쳤다는 것을 아시죠. 그리고 그 강해를 들으셨다면 제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재구성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도 기억하실 겁니다. 또 주일 저녁마다 함께했던 스가랴서 강해에 참석하신 분들이라면, 당시의 역사를 어떻게 되짚어 왔는지도 잘 아실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성벽 재건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등등 계속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본문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든 공부하는 사람이든 역사적 배경을 충실하게 재구성하기만 하면, 성경을 읽기만 해도 성경 스스로가 의미를 설명해 준다고 오래전부터 확신해 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 장면 자체가 본문의 의미를 거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약성경의 각 책이 처음 교회에 전달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해설서가 있었을까요? 아니죠. 왜 없었을까요? 당시의 문화와 역사적 상황, 그리고 그들이 처해 있던 문제들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읽기만 해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경을 다시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리도 조금 공부해야 하고 여러 가지를 알아야 하죠. 예를 들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각 도시의 지리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지리적 배경이 편지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역사도 공부해야 합니다.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누가 통치하고 있었는지, 누가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 사회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긴장 관계가 있었는지, 문화는 어땠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풍습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더샤임(Edersheim)의 <유대인의 사회생활 풍경(Sketches of Jewish Social Life)> 같은 그런 책이 필요한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과 관습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덕분에 성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배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사전은 역사적 배경을 재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또 <구약개론(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이나 <신약개론(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같은 책들도 많은 도움을 주죠.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 당시의 배경을 재구성하면, 그 배경 속에서 본문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제가 역사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도 성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세 번째 원리입니다. '문법적 해석 원리'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역사적 배경도 충분히 살펴보았다면,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내용을 단어와 문법에 따라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휘학, 통사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그대로 살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어 하나하나를 씨름하면서 살피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온 일입니까? 어떤 단어 하나를 놓고 그 의미가 뭔지, 그 단어가 가진 미묘한 의미 차이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살펴보죠. 또 전치사 하나도 매우 중요합니다. '~안으로'라고 했는지, '~안에'라고 했는지, '~에 의해'라고 했는지, '~와 함께'라고 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때문에'라고 했을 수도 있고, '~을 통하여'라고 했을 수도 있는데 모두 다 중요합니다. 또 어떤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떤 절이 앞의 구와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모두 살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문법적 해석입니다. 본문에서 한 부분만 뚝 떼어내어서 자기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됩니다. 말씀 전체가 어떤 순서와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 흐름 속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물론 본래 그 단어가 말하는 의미 그대로 말하도록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 자체를 철저하게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설교를 준비하실 때 가장 먼저 뭐하십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본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쓰인 단어가 정확히 무엇인지, 헬라어 원문에서는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문장의 배열은 어떤지, 문장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문법은 어떤지, 이런 것들을 살펴봅니다. 직접목적어는 무엇인지, 간접목적어는 무엇인지, 주어는 무엇인지, 서술어는 무엇인지, 수식어는 무엇인지, 형용사는 무엇인지, 부사구는 무엇인지, 조건절은 어디인지를 하나하나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야 본문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법적 해석입니다.
네 번째 원리입니다. 이쯤 되면 어떤 분들은 "아, 큰일 났다. 성경을 혼자 공부하지도 못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원리들을 얼마나 깊이 적용할 수 있는지는 신앙생활을 얼마나 했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 맞추어서 역사하십니다. 그 부분은 잠시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네 번째 원리는 '종합 원리'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 이렇게 불렀습니다. 종합 원리란 이런 것입니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다른 부분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전체를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기록하셨다면, 성경은 놀라운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본문을 해석한 결과가 다른 본문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그렇다면, 둘 가운데 하나는 잘못 해석한 것이 됩니다. 성령님은 결코 자신과 모순되게 말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가르칠 때도 자주 그렇게 하죠. 먼저 한 본문을 설명하면서 그 안에 있는 단어와 의미와 문장의 구조를 살펴봅니다. 그런 다음에 성경의 다른 책에 있는 여러 본문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본문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드리기 위한 겁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모든 부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임스 아이 패커(J.I. Packer)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God Has Spoke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마치 하나의 교향악단 같고, 성령은 그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토스카니니(Toscanini)와 같다. 각각의 연주자는 위대한 지휘자가 원하는 그대로,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자신에게 맡겨진 악보를 연주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교향곡 전체를 들을 수는 없었다. 각 부분의 의미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볼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내용입니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기록한 내용은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기자들조차도 자신들이 기록한 말씀이 성경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반드시 성경 전체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하는 일이 이겁니다. 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 뭔지 아시겠어요? 바로 이 네 가지입니다. 먼저 성경을 읽으면서 문자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다음으로 역사적 배경을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문법을 분석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본문을 성경 전체의 큰 그림 속에 맞춰봅니다. 성경 전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다섯 번째 원리입니다. '실천 원리'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좋다, 그렇다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지?" 바로 이 단계에서 우리는 성경의 원리들을 실제 삶에 적용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한 뒤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유익하다고 합니다. 어느 부분이 유익합니까? 모든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은 교훈에 유익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실제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을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그저 현실과 동떨어진 상아탑 속에서 안개처럼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실제 삶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다섯 가지가 전부입니다. 이게 전붑니다. 이 다섯 가지가 좋은 교훈을 얻는 다섯 가지 요소이고, 좋은 설교를 만드는 다섯 가지 요소이고, 좋은 성경 연구로 이끄는 다섯 가지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위에, 이 모든 원리를 덮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더 있습니다. 저는 '조명하시는 성령님' 이렇게 부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원리도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결국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 그럴까요? 고린도전서 2장 14절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어리석게 보이며,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장은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실 수 있고,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이 아니시면 성경은 닫혀 있는 책입니다. 그저 신비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비로소 조명이 일어납니다. 조명이란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겠습니다. 성경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뿐입니다.
죄를 품은 채로 성경을 연구하면 안 됩니다. 저는 공개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십니까?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말이에요. 당신의 그릇은 죄로 덮여 있고 쓰레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로 가득하면 진리는 부딪혀서 튕겨 나갈 뿐입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베드로전서 2장 1절부터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은 죄라는 쓰레기를 버리기 전에는 말씀을 사모할 수도 없고, 그 말씀으로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1절이 2절보다 먼저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신자뿐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거룩하게 살아가는 신자만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성령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어 왔고, 앞으로도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치 가사(Gaza)로 가는 길에서 빌립을 만났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말입니다. 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어떤 사람의 책을 읽다가 "도대체 여기서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게 무슨 뜻이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저자가 여기 함께 있다면 내가 직접 물어볼 수 있을 텐데." 책을 살 때마다 저자를 일주일 동안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부분을 저한테 설명해 주세요." 그러면 저자가 "아, 이건 아주 분명한데요. 이런 뜻입니다"라고 설명해 줄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갖게 된 날, 성경의 저자도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일주일이 아니라 평생 동안 말이에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기록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기록하신 진리의 교사가 여러분 안에 함께 거하시게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조명하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석에 앉아서 "자, 이제 성경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성령님, 제게 다 알려 주세요", 이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말하는 부지런한 연구와 성령님의 가르치시는 사역,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성령님이 여러분이 부지런히 연구한 말씀을 조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과 분리된 채 성령님께 호소하는 것은 기독교 이하의 광신주의다." 성경을 떠나 "성령님이 내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광신주의에 가까운 것입니다.
반면에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성경에만 호소하는 것은 교만이다."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자신의 지혜만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은사주의는 종종 기독교가 아닌 신비주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시와 영감과 조명을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하면서, 성경을 펼치기만 하면 성령님이 곧바로 그 의미를 알려 주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해석의 원리를 살펴봤습니다.
좋습니다. 지난주에는 첫 번째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두 번째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원리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번에는 그 원리를 적용했을 때와 적용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여러 가지를 준비했지만, 오늘은 상당 부분을 생략하고, 처음에 말씀드렸던 몇 가지 중요한 예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주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마태복음 12장으로 다시 가 보겠습니다. 헌터 부부(Hunters)의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온 주장은 이겁니다.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이 주장하는 방언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모독하는, 그러니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정말 이 본문이 그런 뜻일까요? 은사주의 운동을 성경적으로 평가하려고 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까? 혹은 방언이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2장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이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4절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해석의 원리들을 실제로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22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바알세불(Beelzebul)은 사탄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탄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말한 겁니다.
이제 여러분이 한번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살피는 것입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아주 분명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는 귀신의 왕인 사탄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역사적 해석의 원리를 적용해 보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미 약 3년 동안 사역해 오신 시점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은 수없이 반복해서,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기적에 기적이 이어졌죠.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절을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탄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이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결론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죠. 여러분, 잘 보십시오. 조금 빗나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편으로 간 겁니다. "좋은 분인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게 아니라, "이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겁니다.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사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이제 종합 원리를 적용해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성령님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알고 계셨어요?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에 가나로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사건을 가리켜서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행하셨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전에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래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 새의 부러진 날개를 기적으로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를 해 왔지만, 그거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날개를 고쳐주셨을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면 나무 막대기로 부목을 대 주셨을 겁니다. 기적을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고, 아버지께서 공식적으로 확증하시고, 성령께서 임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기적 사역이 시작됐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자는 성령과 하나 되어, 또 아버지와 하나 되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성령의 역사로 돌리셨습니다.
이사야도 성령님이 예수님 위에 임하실 이유가 복음을 전하시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기 위함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탄의 능력이 아니라 누구의 능력으로 사역하신 것이 됩니까?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성령이라고 결론내리지 않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여러분, 역사적 배경과 성경 전체의 조화라는 원리를 적용하니 본문의 의미가 분명해지지 않으세요? 이제 2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자, 여기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들어 본 말 가운데 가장 터무니없는 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사탄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낸다면, 사탄이 지금 자기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말이냐?" 이런 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증오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이성적인 사고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제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은 여기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은사주의 운동을 비판하는 말을 하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문맥을 봐야죠.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죠.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 들어보세요. 누구든지 용서를 받으려면 언젠가는 성령을 모독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6장을 보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또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담당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언젠가는 성령을 모독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성령을 모독한다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보다 더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한 가지 가능한 해석입니다. 이제 32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자를 거역하는 말", 이것입니다. '인자'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호칭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적인 호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자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외모나 행동이나 태도를 보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 잘못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사탄의 역사라고 단정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에 대한 모든 증거를 보았다. 모든 계시를 받았다. 기적 위의 기적을 보았고, 놀라운 일들을 계속해서 목격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사탄에게 속했다고 결론내렸다. 그렇다면 너희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라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너희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계시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이상 무엇을 더 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신 나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 3년 동안 너희와 함께하게 하셨다. 기적 위에 기적을 행하게 하셨고, 가르침 위에 가르침을 베푸셨다. 그런데도 너희가 내린 결론이 "예수는 사탄에게 속했다"라는 것이라면, 성령을 거부한 것이다. 성령께서 하신 일을 사탄의 역사로 돌린 것이다. 그러니 너희에게는 소망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방언이나 은사주의 운동이나 혹은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을 성경적으로 평가하는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해석은 이 본문의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32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교회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언제 시작됐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던 시대입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시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또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오는 세상에서도"라고 하셨죠. 유대인에게 있어 '오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바로 메시아 왕국입니다. 유대인들은 교회 시대를 몰랐습니다. 교회라는 비밀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바라본 미래는 메시아 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에서는 누가 이 땅을 다스리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친히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만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때는 두 번뿐입니다. 한 번은 복음서의 시대이고, 또 한 번은 장차 올 메시아 왕국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적용할 원리는 바로 문법적 해석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의 의미를 문법적으로 살펴보았고,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오는 세상의 능력"과 같은 다른 성경 구절들과 비교해서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로 '오는 세상'이 메시아 왕국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석의 원리를 적용하면, 이 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만 범할 수 있는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복음서 시대와 장차 왕국 시대에만 가능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직접 적용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존 목사님, 그렇다면 이 본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성령께서 회개와 믿음으로 부르시는 음성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이 구절을 근거로 "방언은 반드시 옳고, 방언을 부인하는 것은 곧 성령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이 또 사용하는 구절은 히브리서 13장 8절입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빨리 봐야겠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말씀드리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히브리서 13장 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그때 하셨던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 그러므로 계시도 계속되고, 방언도 계속되고, 신유도 계속되고, 기적도 계속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그대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도 안됩니다. 우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라고 말합니다. '어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 시대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사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이전에는 어떠셨습니까? 하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격으로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제'와 '내일'은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광으로 오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높임을 받으시는 왕으로 오십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을 둘러싼 상황이나 사역의 방식이 언제나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원하신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성품을 나타내시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죠.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지 않죠.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모든 은사가 계속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왜 고린도전서가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장차 폐할 것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이 영원히 동일하시다면 그것들도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해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이제 다시 마가복음 16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6장의 본문 자체에 대해서는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상 상당한 논쟁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신뢰할 만한 고대 사본들에는 예외 없이 9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이 없습니다. 주후 5세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과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은 가장 중요한 고대 사본 두 개인데요, 둘 다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현존하는 수백 개의 헬라어 사본 중에서도 5세기 이전의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9절부터 20절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5세기의 필사자에 의해서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이 마지막 부분에는 마가가 다른 곳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여덟 개에서 열두 개 정도 등장합니다. 마가가 주로 사용하는 어휘와 전혀 다른 표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원래 있어야 할 말씀을 함부로 제외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이 원래 본문에 속한다고 가정하고,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5절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이어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보십시오. 여기에는 놀라운 다섯 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 방언을 말하는 것, 뱀을 집는 것,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것, 그리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치는 겁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두고 "보십시오. 이게 믿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표적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도 언제나 그대로 적용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먼저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귀신을 쫓아냅니까? 모두가 방언을 말합니까? 모두가 뱀을 집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습니까? 또 누구나 언제든지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모두 낫습니까? 여러분, 역사적 해석의 원리를 적용해 보십시오. 역사적 사실은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말이지만, 은사주의자들 중에도 아픈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은사주의 가정에도 암으로 죽어 가는 가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내용을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거죠. 또 역사를 돌아보면 독을 마시거나 뱀에 물려 죽은 그리스도인도 있었습니다. 분명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을 하던가요? 헌터 부부(Hunters)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자신을 맡기고, 그분 앞에 복종하고, 이런 은사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말씀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본문 어디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성경은 단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말한 뒤에 곧바로 다섯 가지 표적을 나열합니다. 조건이 뭡니까? 누구라고 합니까?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본문은 거기에 자신을 내어드리라고도 하지 않고, 복종하라고도 하지 않고, 찾아서 구하라고도 하지 않고, 간절히 구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말씀이 교회 전체에 항상 적용되지 않는다면, 이 본문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실제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구에게 해당되었습니까? 바로 사도 공동체(apostolic community)입니다. 사도 공동체는 실제로 이런 일을 행했습니다. 다섯 가지 중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하지 못하는 것은 독을 마신 경우뿐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표적들이 사도 시대 이후에는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 전에도 미국 동부에서 아직도 뱀을 집을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을 사도들에게 적용하면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또 바울은 뱀에 물렸지만 그 뱀을 불 속으로 떨어 버렸습니다. 이런 표적들을 사도 공동체 안에서는 실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 전체를 통틀어 항상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지금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병에서 낫지 않는 이유가 결국에는 "당신이 충분히 영적이지 못해서 이미 받은 것을 믿음으로 주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죄책감을 안겨 주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은사주의자들은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사용합니다. 속죄 안에 치유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을 두고 속죄 안에 육체의 치유가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주 간단한 질문 하나만 해 보면 됩니다. 물론 여러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지만, 우선 이것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나음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육체의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적인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 본문 어디에도 육체의 치유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내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입니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영혼은 이미 구속을 받았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 구속받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은 우리가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점점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깁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 구속받지 않았습니다. 또 이사야 53장 5절도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말한 것은 육체의 치유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죄의 치유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1장을 읽어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도 다시 성경 전체를 종합해서 보는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이사야 1장은 이스라엘이 죄로 병들어 있고, 온몸에 성한 곳이 없고, 죄로 인해 완전히 더러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53장에 와서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말하는 치유는 죄로부터의 치유입니다. 육체의 치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다는 것은 우리 영혼의 질병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다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친히 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깊이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셨다는 뜻입니다. 그 의미는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질병에 걸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질병 가운데 겪는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게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에서 이 "얻었나니"는 어떤 시제입니까? 과거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이미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구절은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가 계속해서 육체의 치유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법, 시제를 살펴보는 원리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해석의 원리들을 본문에 적용해 보면,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 성경으로 뒷받침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이제 함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살펴봤습니다. 단지 어떤 특정한 운동을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말씀을 신실하게 연구하는 학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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