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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계속해서 은사주의 운동에 관한 시리즈를 이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주제를 다 끝낼 수가 없는데, 다음 주에도 못 끝낼 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다음 주는 종려주일이고, 또 그 다음 주는 부활주일이기 때문입니다. 4주 후에나 설교의 나머지 절반을 마무리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하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니까 오늘 저녁에도 꼭 참석하셔서 후반부도 꼭 들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아침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오늘 저녁 후반부도 꼭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디모데에게 목회의 기본 정의를 제시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라는 부분에 주목해 보십시오.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는 일만이 목회 사역이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일도 목회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기꺼이 인정하려 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이를 어떻게 양육합니까? 칭찬과 격려만 하면 안됩니다. 잘못을 고쳐 주고 훈계하는 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적인 자녀를 양육하거나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잘못을 지적해야 하고, 책망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건전한 성경적 교리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번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 안에 참된 성경적 교리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러한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여러분 모두가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교회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 외부의 거짓 교사들과 거짓 가르침,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다시 말해서 바울은 교회 외부에서 거짓 교리가 밀려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교회 내부에서도 거짓 교리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이나 눈물로 경고했던 것이죠. 사람을 격려하고 세우는 것만이 목회가 아닙니다. 잘못은 경고하고 바로잡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로잡는 목적은 언제나 사람을 세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에베소서 4장 15절에 나오는 바울의 한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잘못도 아니고 사랑이 없는 행동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입니다. 첫번째, 이미 이러한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도록 돕기 위함이고, 두번째, 아직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은 여러분이 앞으로도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이끄는 것은 사랑의 사역입니다.

이번 주에 리치 톰슨(Rich Thompson)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잠언 27장의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 시리즈에 관해서 직접 다루는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 시리즈에서 취하고 있는 접근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것을 비판하면 사랑이 없다는 생각이 아주 널리 퍼져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그런 문제를 조용히 덮어 두어야지 괜히 문제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잠언 27장 5절을 보십시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참 명확하지 않습니까?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자, 이제 5절의 이 면책,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면책이 원수의 행위라고 해석해 봅시다. 실제로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고요? 5절과 6절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친구와 원수를 대조하고 있으니까 5절에도 같은 대조가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친구라고 하면서도 사랑을 마음속으로만 감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원수의 공개적인 책망이 낫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대조가 5절까지 이어진다면 말이죠. 그러나 중요한 원리는 분명합니다. 공개적인 책망이 숨은 사랑보다 낫습니다. 저는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수의 공개적인 책망이 친구의 숨은 사랑보다 낫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 친구보다, 비록 원수일지라도 진실을 말해 주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더 유익합니다.

이어서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성에서 말미암는 것이나.” 그렇지요?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성에서 말미암는 것이나.”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네 가지 관계가 나오는데, 가장 좋은 것부터 차례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드러난 사랑입니다. 6절 앞부분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해 주는 친구 관계입니다. 두번째는 공개적인 책망입니다. 5절에서 “공개적인 책망이 더 낫다”고 했죠. 다시 말해서, 원수라도 진실을 말해 주는 관계가 세번째인 숨은 사랑의 관계보다 낫다는 겁니다. 숨은 사랑은 5절 끝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은 하지만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드러나지 않는 책망입니다.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 원수이죠.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진실을 말해 주는 친구일 것이고, 그다음은 진실을 말해 주는 원수입니다. 그다음은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 친구이고, 가장 나쁜 것은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 원수죠. 자, 그런데 잘 보십시오. 좋은 두 경우의 공통점은 모두 진실을 말해준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제가 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그대로 진리를 말해주는,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랑이 없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레위기 19장에도 같은 원리가 나옵니다. 굳이 찾아보실 필요는 없지만 이런 말씀입니다. 아마도 17절이나 18절일 것 같습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다시 말해, 이웃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이웃을 책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미움으로 변질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책망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반드시 잘못을 바로잡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자녀를 책망하고 훈계도 할 겁니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은사주의 운동의 오류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에 기초한 성경적인 책망의 자세로 접근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운동을 논할 때 반드시 다루어야 할 몇 가지 주제를 살펴봤습니다. 계시의 문제, 해석의 문제를 다뤘고, 지난 시간에는 사도 시대의 특별함이라는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아침에는 네 번째 주제인 ‘과도기’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과도기의 문제입니다. 감사하게도 한 출판사가 이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내년 1월쯤에는 여러분도 이 책을 손에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주제들이 성경적이고 반드시 출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자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과도기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그 핵심을 사도행전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과도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과도기의 문제를 살펴보려면 사도행전으로 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펴시기 바랍니다. 우선 2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생각을 많이 하셔야 할 겁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가지 참 기쁜 일이 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에 시애틀에 다녀왔는데요. 금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갔다가 돌아왔죠.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서너 차례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모두 저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신학을 가르치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모일까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계속 오십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사모하는 것이 저는 정말 기쁩니다. 제 마음에 큰 도전이 됩니다. 그리고 믿으십시오. 지금 미국 전역의 목회자들에게도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께서 자기 백성에게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깊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마다 사람들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이 참 귀하다는 것, 제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자, 다시 역사적 과도기를 논하려면 반드시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에서 이 ‘방언’은 문자적으로는 ‘다른 언어’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운동 때문에 매우 유명한 구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할 것은,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들이 이 말씀을 신약성경의 핵심 본문으로 삼는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이 본문이 기준이고, 출발점이고, 모든 활동의 근거이고, 중심 역할을 합니다. 모든 게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물론 1900년대 이후에 등장한 것이지만, 은사주의 교리는 바로 이 본문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회심할 때 성령을 받기는 하지만 제한된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충만하지 않은 상태로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어느 시점엔가 또 다른 체험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이 두 번째 체험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영의 능력 안에 초자연적으로, 체험적으로, 의식적으로 분명히 잠기고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체험에는 방언이 반드시 뒤따를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 나타난답니다. 구원을 받을 때는 제한된 방식으로 성령을 받지만, 그 후 어느 시점엔가 성령세례를 받게 된다는 은사주의 운동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독특한 교리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끝내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기도 하지만,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결국 받게 되고, 그때 방언이 나타나고 기적을 포함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1955년 12월호 <오순절(Pentecost)>지 제34호를 보면, 이 교리가 적어도 20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주의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도널드 지(Donald Gee)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순절 운동을 독자적인 운동으로 만드는 가장 분명한 특징은 무엇인가? 바로 성령세례이다. 그 최초의 증거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먼저 구원을 받고 그 후에 방언을 동반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교리가 오순절주의를 규정하는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은사주의자들이 쓰는 거의 모든 글에서 이 주장이 반복해 나타납니다. '후속성(subsequence)'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먼저 구원이 있고, 그 후 어느 시점엔가 성령세례가 있다, 라는 개념입니다.

프레더릭 브루너(Frederick Bruner)는 그의 저서 <성령 신학(The Theology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께서 모든 신자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도록 세례를 주셨다고 믿지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에게 성령과 한 몸이 되도록 세례를 베푸신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브루너는 이 모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오순절주의가 이해하는 성령세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첫째, 일반적 거듭남과는 구별되는, 거듭남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둘째, 최초의 증거는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반드시 간절히 구해야 한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 그리고 은사주의자들의 교리는 세 가지 요소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성령세례는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후속 사건이라는 것, 두번째, 방언이 그 증거라는 것, 세번째,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간절히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속성, 증거, 조건'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른 신학적 영역에서는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그렇게까지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다릅니다. 일단 성령세례를 받으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도 모두 기적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이미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을 다루면서 자세히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의 실제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그 설교를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오순절주의의 견해, 그러니까 오순절주의의가 정의하는 성령세례를 살펴보고, 그 주장의 성경적 근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오순절주의의 후속성, 증거, 조건이라는 교리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근거는 사도행전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나오는 성령세례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전혀 말하지 않기 때문이죠. 고린도전서 12장은 단지 모든 신자가 구원받는 순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다고 말할 뿐입니다. 거기에는 구해야 한다는 말도 없고, 구원 이후에 일어나는 후속적인 사건이라는 말도 없고, 증거가 따른다는 말도 없고, 특별한 조건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본문을 근거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죠. 또 고린도전서 14장도 후속성이나 증거, 조건을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전체를 살펴봐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성령을 받는지, 또 어떻게 성령의 능력을 받는지 설명하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영적 은사의 남용을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구원 이후에 일어나고, 방언이 그 증거이고, 반드시 추구해야 한다는 이 교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곳은 사도행전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이 사도행전을 통해 교리를 세우려고 하는 겁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저술에서 인정하듯이,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곳은 사도행전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맥아더 목사님, 그렇다면 도대체 사도행전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이에요?” 사도행전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 정말 사도행전으로 뒷받침되는지를 살펴보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사실상 사도행전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런 기록은 복음서에도 없고, 서신서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에게 사도행전은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들의 운동 전체를 사도행전 위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들이 내리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기본적인 결론이 이렇습니다. 사도행전을 연구한 결과, 사도행전 2장에서 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에 구원을 받았고 그 후에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후속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이 나타났으니까 이것이 증거라고 합니다. 다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조건은 사도행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도행전 8장으로 갑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도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고, 거기에도 방언이라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빌립의 사역을 통해서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사도행전 2장에도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라고 말이죠. 아마 그 이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을 겁니다. 오늘 저녁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그 후에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사람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성령세례는 나중에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후속성 교리입니다. 이어서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 10장으로 갑니다. “보십시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세례를 받았고,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 그리고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방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후속성과 증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을 함께 놓고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8장에는 실제로 후속성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는 후속성이 없습니다. 믿는 즉시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즉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구원과 성령세례 사이에 반드시 시간적인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도행전으로도 뒷받침받지 못합니다. 오직 사도행전 2장과 8장에만 해당될 뿐, 10장과 19장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은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흥미롭습니다. 방언이 기록된 것은 사도행전 2장과 10장, 그리고 19장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에는 방언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반드시 간절히 구해야 한다는 조건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2장에서도 그들은 구하지 않았습니다. 8장에서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10장에서도, 19장에서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추측에 불과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사도행전이 성령을 받는 일반적인 원형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사도행전 안에서도 일관성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먼저 구원을 받고, 그 후에 방언을 동반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말은 더욱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주장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너무나 낯선 것입니다. 190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가 1,800년 동안 한 번도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성령의 충만한 능력 없이, 육신의 힘만으로 사역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교회 역사를 다시 한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이렇습니다. 제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여러분이 꼭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에서 발견된 후속성, 증거, 조건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되는 정상적인 기준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도행전 자체 안에서도 그런 요소들이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에서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는 역사적인 과도기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가 계속 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아주 중대한 오류는 이런 겁니다. 이 점만 제대로 이해하면 핵심을 붙잡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만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면 핵심을 다 이해한 것이다.”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 기본 원리를 확실히 이해하시면, 매우 견고한 토대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과 오늘 저녁에 도와 드리겠습니다. 물론 오순절 성도들인 사도행전 2장의 사람들,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 사람들,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들, 그리고 사도행전 19장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고 방언도 말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구원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그런 일이 한 번 일어났다고 해서,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표준이 되고, 변하지 않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한 가지를 더 덧붙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 가운데 어느 본문도 다른 사람들도 반드시 그런 체험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또 어느 본문도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정상적인 경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권하는 본문도 없습니다. 성경은 역사적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뿐입니다. 아무런 해설도, 아무런 적용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만일 성령님이 이것을 모든 시대의 원리로 삼으려 하셨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방식이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혹은 “장차 모든 세대의 성도들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각각의 사건들은 그저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어떤 적용도, 어떤 해설도 없이 말이죠. 그리고 성경은 곧바로 다음 사건으로 넘어갑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핵심은 과도기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과도기의 기록입니다. 정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 마칠 즈음에는 제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여러분도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 시대는 신약 시대로 넘어갑니다. 옛 언약은 사라지고 새 언약이 시작됩니다. 회당에서 교회로, 율법에서 은혜로, 구약의 성도들에게서 신약의 성도들로 옮겨갑니다. 또한 유대인 신자들만의 공동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이루는, 함께 한 공동체가 되는 교회로 나아갑니다. 에베소서 2장이 말하는 것처럼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께서 둘을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 바로 그 과도기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절대적인 교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교리적으로 분명하게 입증되는 내용들 뿐입니다.

이 점을 조금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시간에 사도 시대의 독특성을 살펴보면서 이 시기가 매우 특별한 시대였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이 과도기의 기록이라는 것을 몇 가지 예를 통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펴 보십시오. 3장의 의미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세례 요한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몇 가지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역사 속에 등장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아주 짧고 간단했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세례 요한은 이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성경은 요한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메시아는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고, 세례 요한은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였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렇게 외쳤죠. 천국이 이제 곧 임할 것입니다.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백성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품고 있던 사람들은 요한이 설교하던 요단강으로 몰려나왔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께서 오셔서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정결을 상징하는 유대인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회개했고, 유대인의 정결 예식인 씻음을 통해서 마음이 깨끗해졌음을 상징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백성을 준비시키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마침내 왕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똑같습니다. 마태복음 앞부분, 특히 1장부터 11장을 읽어 보십시오. 거기서 예수님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12장에 이르러서 갑자기 유대인들이 거부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유대인들이 확고하게 거부하자, 13장에서는 곧바로 교회에 대한 새로운 계시가 등장합니다. 아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16장에 이르면 예수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물러나고, 교회,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십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거부했기에 한편으로 제쳐졌습니다. 이제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가 등장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왕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심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곧바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너무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습니까?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맥락에서 다루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이것이 사도행전이 과도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예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자,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미 오순절 이후입니다.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고,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교회는 힘 있게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제 성찬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날이 밝았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십시오. 마치 마태복음 초반부를 읽는 것 같습니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친 직후의 장면입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여기서 잠깐 멈춰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유대인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미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적어도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베드로가 말하는 형제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입니다. 또 2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놀라운 점은 베드로가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교회가 탄생했고, 이제 유대인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면, 왜 베드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교회와 구별된 대상으로 대하고 있을까요? 왜 이스라엘을 이처럼 특별한 대상으로 구분하는 것일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 1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죽인 예수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생명의 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의 증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 여러분의 메시아를 다시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에게 왕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비록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기회를 아직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여기서 두 가지를 보셔야 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또 21절에서는 만물이 회복될 때를 말합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고, 2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메시아이신 예수를 보내실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메시아’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기만 하면 여러분은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22절에서 모세를 인용해서 이 제안을 확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약속의 성취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25절에서 이렇게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참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지금 사도행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탄생했고,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니 맥아더 목사님,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이 과도기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두 시대가 겹쳐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신 은혜 가운데 교회의 탄생이 곧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도록, 이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도록 하기 원하셨습니다.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작된 직후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를 다시 제시함으로써 아무도 그 뜻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상황이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서 계속되는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 시대를 통틀어서 전해지는 일반적인 메시지도 아닙니다. 실제로 로마서를 읽어 보면 바울은 이스라엘이 한동안 제쳐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지가 접붙여졌다고 말합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마서 11장이 말하는 것처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선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먼저 교회가 충만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휴거가 있어야 하고, 환난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 시대 전체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준을 알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과도기 동안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 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리를 알고 싶으시다면 서신서를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과도기의 신학은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도기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과도기가 끝난 후 교회의 모습은 서신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도기가 끝난 뒤에는 서신서가 교회의 표준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를 다시 제시하는 놀라운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두 시대가 서로 겹쳐 있는 과도기였습니다. 옛 시대는 갑자기 끝나지 않고 점차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 사이에 겹친 기간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과도기의 신학을 설명합니다. 모세도, 다윗도, 여호수아도, 모든 제사장도 그 역할을 마쳤고, 이제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의 가르침이죠. 또 율법의 시대는 지나가고 은혜의 시대가 왔고, 외적인 규례는 지나가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7장과 8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그 자리를 교회에 내어주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과 25절이 바로 그 점을 보여줍니다. 또 구약의 제사 제도는 단 한 번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로 대체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4절의 가르침이죠. 다시 말해서, 과도기의 신학은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도기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과도기가 끝난 후 교회의 삶과 교리를 규정하는 내용은 서신서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사도행전을 읽을 때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역사서입니다. 물론 그 안에 신학적인 의미도 담겨 있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에 수반되는 제한된 범위의 신학입니다. 사도행전의 모든 내용을 교회 역사 전체에 적용되는 절대적인 교훈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은사주의자들의 해석이 옳다면, 오늘날에도 방언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 나라를 다시 제시하면서 “지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것이다”라고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될지를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를 다시 제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환난의 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스가랴도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라고 예언했습니다. 환난의 후반부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 그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한다고 선포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이 과도기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고, 그 안에 담긴 신학도 그 역사에 수반되는 제한된 범위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교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암시되고 분명하게 확증되는 내용들 뿐입니다. 물론 사도행전에는 중요한 신학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해 주고, 확대해서 설명해주고, 생생하게 보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은 과도기 동안 실제로 일어난 사건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모든 시대의 교회에 적용되는 절대적인 원리를 세우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이 과도기의 기록으로서 중요한 이유는, 그 과도기 자체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단번에 끝내시고 모든 것을 갑자기 끊어 버리셨고, 옛 시대와 새 시대를 이어 주는 특별한 과정 없이 곧바로 교회를 시작하셨다면,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이른바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얼마나 잘못 대했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대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와 이스라엘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여겼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보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만큼 두 공동체는 뗄레야 뗄 수 없이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삶 전체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유대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유산이고, 문화고,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전통이었고, 자부심의 근원이었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였고, 자기 정체성 그 자체였습니다. 유대인의 도시는 이방인의 도시와 가까이 붙어 있어도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마을에 들어가면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의 정통파 유대인 지역에 한번 가 보면 지금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가 보면 더 그렇습니다.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리의 모습도, 건물도, 집들의 배치도, 도시의 규정도, 종교 생활의 규범도, 사람들의 예절 관습도, 가정과 가족의 모습도 모두 다른 사회와는 아주 뚜렷하게 다릅니다. 유대인의 삶 곳곳에, 오늘날의 많은 유대인의 마음속에 여전히 같은 인식이 남아 있습니다. 유대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의 신조도 아니고, 단순한 율법 조항의 집합도 아닙니다. 삶의 방식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의 율법 위에 수많은 의식과 예식, 관습과 규정, 세부적인 법칙들이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살아가는 삶, 매 순간의 행동, 삶의 모든 영역은 성경의 규정이든, 탈무드의 전승이든, 미슈나(Mishnah)든, 혹은 기록되지 않은 랍비들의 전통이든, 그런 규범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규정되고 통제되었습니다. 문화, 정치, 사회, 종교가 모두 하나로 얽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자녀들을 끊임없이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서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그 핵심에는 신명기 6장 4절부터 6절의 쉐마(Shema)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이루는 모든 것을 걸고 이 모든 전통과 규례를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안타까운 예가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될 당시에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임종 장면입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제자들이 임종을 앞둔 그를 찾아왔을 때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그런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빛이신 선생님께서 어떻게 죽음을 이렇게 두려워하실 수 있으세요?”

그러자 랍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의 왕 앞에 서게 된다 해도, 그 왕은 오늘 있다가도 내일이면 사라질 존재지. 분노도 영원하지 않고, 형벌에도 끝이 있어. 말로 풀 수도 있고, 어쩌면 돈으로라도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야. 그런 왕 앞에 서는 것도 두려움에 떨텐데, 하물며 이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어찌 두렵지 않겠어.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심판은 끝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는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나를 변호할 수 없어. 지금 내 앞에는 두 갈래길이 놓여 있어. 하나는 낙원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야. 그런데 나는 내가 어느 길로 가게 될지를 몰라. 그러니 내가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어…” 랍비는 평생 율법을 지키며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과연 구원에 이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거룩한 유다’라고 불리던 랍비 예후다(Rabbi Yehudah)의 말입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내 손가락 하나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적이 없다.” 한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에 그 정도로 깊게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라고 했을 겁니다.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유대인에게 이 말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삶 전체를 뒤흔드는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가는 과도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조차도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크게 당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 주시면서 가라고 말씀하셨죠. 베드로는 결국 순종했지만, 나중에 다른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동일한 환상을 계속 보았다, 계속 말씀하셨다. 내가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막상 가 보니 그 이방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성령을 받았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처럼 성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과도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 초기 과도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변화가 얼마나 어려울지를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옛 시대와 새 시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시면서 두 시대가 서로 겹치는 기간을 두셨습니다. 사도행전 전체를 보면 이러한 과도기의 모습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디에서 모였습니까? 성전입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성전에서 복음을 전했고, 성전에서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은 그들이 성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3장 1절도 마찬가지죠. 5장 42절, “날마다 성전에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5장 12절은 그들이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유대교와 단번에 즉시 결별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3장 이후에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도시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어디를 찾아갔습니까? 회당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와의 관계를 곧바로 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완전히 버리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분명한 선을 긋지도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도 가장 먼저 회당으로 들어가서 세 달 동안 담대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은 과도기의 기록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시기의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오셨을 때 방언이 나타났던 일과 그 밖에 함께 일어났던 여러 현상도 모두 이 과도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는 역사적 과도기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일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오늘 저녁에 이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끝으로 사도행전 18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이 과도기를 잘 보여 주는 아름다운 예가 나옵니다. 18장 18절입니다. 바울이 이제 막 고린도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낸 뒤입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사역했고, 마침내 유대인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12절을 보면 바울을 갈리오 앞에 끌고 갔지만, 갈리오는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구해 주신 것입니다.

그 후에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배를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일찍이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은 길을 떠나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왜 머리를 깎았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서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는 서원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실인 서원입니다. ‘나실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지르(nazir)’에서 나온 말로​, ‘구별하다’, ‘헌신하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나실인 서원은 대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에서 드리는 서원입니다. 평생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은 세례 요한과 삼손처럼 극히 드물었습니다. 일반적인 나실인 서원은 민수기 6장 1절부터 8절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드리는 서원으로서 보통 30일이나 60일, 혹은 100일 동안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30일 동안의 서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에서 겐그레아까지 가는 데는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했을 겁니다. 그래서 30일이 지났을 때 머리를 깎았습니다. 서원이 끝난 겁니다.

이 나실인 서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구약 시대 유대인의 방식입니다. 서원 기간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고, 포도와 관련된 특정 음식과 음료도 삼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잔치, 연회,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또 머리도 자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외모나 겉모습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서원입니다. 참 아름다운 유대인의 전통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서원을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분들이 계신데,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바울은 세대주의자 아닙니까? 이미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민수기 6장의 나실인 서원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아요?” 그러면 제가 되묻겠습니다. 만일 사도행전의 모든 것을 오늘날 교회의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면, 왜 은사주의자들은 방언만 규범으로 삼고 나실인 서원은 규범으로 삼지 않을까요? 둘 다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둘 다 그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입니다.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과도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전히 회당에도 갔고, 성전에도 갔고, 유대인이었습니다. 평생 삶의 방식이 그랬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끊어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도 나중에는 바로잡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바울은 또다시 서원을 했고, 다른 네 사람도 함께 서원했습니다. 과도기의 모습입니다. 모두가 과도기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18장 후반부인 24절부터는 아볼로가 등장합니다. 아볼로 역시 과도기에 살았습니다. 구약 시대 성도였습니다. 성경에 능통했고, 말을 잘했고, 주의 도를 배워서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알고 있던 것은 세례 요한의 세례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는 예수님에 관한 그 메시지를 힘 있게 전하는 훌륭한 구약 시대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복음을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도 잘 아시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복음을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복음의 온전한 내용을 가르쳐 준 것이죠. 이들은 모두 과도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과도기의 기록입니다. 그 안에는 과도기적인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과도기적 사건들을, 모두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리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만일 한 가지는 그렇게 적용하고 다른 것은 적용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기준을 어떻게 정하시겠습니까? 오늘 저녁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의 내용을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만 선택하고 다른 과도기적 사건들은 제외하는 근거는 뭡니까? 바로 이 문제를 오늘 저녁에 함께 살펴보고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너무도 분명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참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말씀의 깊이와 풍성함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더욱 은혜가 풍성하고, 주님의 성품이 더욱 놀랍게 드러나고, 주님의 생각이 얼마나 일관적인지, 주님의 계획이 그 깊이를 따라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지가 드러납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게 하시고, 그 깊은 진리를 부지런히 탐구하는 신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귀한 성도들이 열심을 다해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성도의 교제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위에 특별한 은혜의 손길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을 우리의 주와 왕으로 사랑하며, 남은 삶 동안 말씀에 분명히 계시된 뜻을 따라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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