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도 계속해서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내용이 정말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은사주의 운동만 다루는 게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가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더 크고 본질적인 싸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는 사실로 인해 기대도 크고 격려도 받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주의 운동으로 인해서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에도 이 문제를 교회의 당면 문제로 염려하는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은사주의 운동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경험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바로 경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제가 평소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설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통 때에는 성경을 한 절 한 절 차례대로 강해합니다. 저도 강해 설교를 제일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좋아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점을 다루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장로님들과 저에게 주셨습니다. 사탄이 교회를 무너뜨리고 그 증거를 잃어버리게 하려는 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붙들어야 하는지, 어디에 굳게 서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전투를 앞두고 군사들을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함께해 주시고,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시리즈는 평소 같은 성경 강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변증학 강의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에는 성령님이 우리를 이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성경을 펴시고 베드로후서 1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오늘 말씀드리려는 핵심을 먼저 보여드리고, 이어서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믿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주제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오늘 아침에 성가대가 찬양한 것처럼, 가장 놀라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계속해서 전했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기를 원했습니다. 단순한 환상이나 동화나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장 16절에서 이 점을 매우 강조합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한 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교묘하게 만들어 낸 속임수가 아니다. 재림의 위엄을 직접 본 목격자로서 한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잠깐만요,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베드로는 그때 살아 있었고, 예수님은 아직 다시 오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재림의 영광과 재림의 위엄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까?" 계속해서 17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베드로는 "내가 재림의 영광을 엿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버지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였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물으실 수 있죠. "하나님이 언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언제 있었던 일인지 기억하시겠어요?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야고보, 요한, 베드로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변화하셨습니다. 기억하시죠? 성경은 예수님이 육신을 걷어내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재림의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재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죽은 후 구속받은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또 엘리야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영화롭게 되거나 변화된 구속받은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육신을 입은 채로 그 자리에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땅에 있을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거듭나지 않은 무리는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산 위에 없었습니다. 재림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모든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장면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재림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하고 재림의 영광을 말하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재림의 영광을 보았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 선생님, 존 맥아더 목사님은 신학을 경험에 기초해 세우면 안 된다고 가르치시는데요"라고 말이죠. 베드로가 어떻게 말할까요? 19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무엇보다 더 확실하다는 겁니까? 경험보다 더 확실하다는 겁니다. "내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내 경험은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말씀이 있다. 예언의 말씀이다." 예언이란 뭡니까?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가장 확실하죠. 이제 21절로 가서 예언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 경험 참 귀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거룩한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 기자들이 받은 계시가 사람의 경험보다 더 확실하다는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 자신의 경험보다도 더 확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요점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경험이든 성경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그 경험을 근거로 진리를 세우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매우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말씀이 더 확실하다." 결론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경험은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계시, 경험보다 더 확실한 말씀에 의해 반드시 검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리를 찾을 때나 그리스도인의 교리에 대한 진리를 찾을 때는, 누군가의 경험을 듣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미 계시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경험은 그 어떤 것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서 계속 이런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가장 큰 오류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비난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 전체가 진리에 헌신하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촉구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이 저에게 있습니다. 제가 은사주의 운동에서 보는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진리를 결정한다는 점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계시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교리의 기초로 삼는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은 말씀 신학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경험 신학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강조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을 특징짓는 가장 분명한 표지는, 구원을 받은 후에 성령세례라는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게 만들고, 그 경험을 추구하도록 하면, 결국 둑이 무너진 것처럼 모든 것이 쏟아져 들어오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경험을 좇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언제나 무엇인가 더 큰 것, 더 나은 것, 또 다른 경험을 해야만 한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에는 반드시 어떤 육체적인 체험과 감정과 감각과 느낌이 뒤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좇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한 뒤에 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평생 또 다른 경험을 찾아다니게 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나 육체적인 현상, 기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교리를 만들어 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봤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옆을 보니 예수님이 조수석에 앉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의 모습으로 거기에 계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 앞에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차를 몰면서 옆에 앉아 계신 예수님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이 충분하다면 예수님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나타나실 겁니다." 그러면 결론이 뭡니까? ‘믿음만 충분하면 그리스도인도 육체로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경험 신학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경험이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적지 않죠. 지난번에도 제가 말씀드렸죠.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갔고, 천국을 둘러보았다. 그 후에 나는 다시 돌아왔다. 그러니 여러분도 믿음만 충분하면, 아무리 중한 병에 걸렸더라도, 심지어 죽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죽었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렇습니다. 또 다시 성경과 경험이 충돌합니다. 그런데 경험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이 경험에 맞도록 성경을 해석해 보자", 이렇게 시도합니다. 그러나 옳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학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고 나면 얼마나 복잡해지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경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은사주의 운동은 역사적인 기독교 정통 신앙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도 아니고, 진리와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접근법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경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베드로와 동일한 입장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 영광이 충만한 때가 있습니다. 저는 경험을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저만큼 감격하고 흥분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고통은 싫어하지만 기쁨을 즐겁게 누리고, 또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도 경험합니다. 저는 참된 경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기독교도 참된 경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검증합니다. 결코 경험에 성경을 맞추지 않습니다. 경험에 성경을 맞추는 것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접근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과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그리고 기독교 신비주의가 전통적으로 해 온 접근법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은 결코 그런 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목사님, 그렇다면 이런 접근법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잠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끝까지 잘 따라오십시오. 매우 흥미로울 겁니다. 경험에서 진리를 끌어내는 이러한 방법론, 이러한 진리 접근 방식의 뿌리는 기독교 교리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거짓 종교와 철학에서 비롯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만들어 낸 거짓 체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저는 은사주의자들의 진실성을 부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진실합니다. 대부분은 자신의 접근법이 옳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인들에 대해 한 말과 같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지식 없는 열심입니다. 깨달음 없는 열정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열심은 있지만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경험을 진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오순절 계열의 그리스도인들은 스토트가 말한 것처럼 반지성주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지 않은 채, 사고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주신 이해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채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그 계시를 받아들이고 깊이 숙고하라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하심으로써 교만한 지성을 우회하시고, 그렇게 해서 겸손하게 만드신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성적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 계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을 사용하게 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이해하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분명한 사고로써 계시된 말씀을 숙고하는데 기초해 왔습니다.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거나, 환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끌어내는 데 기초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고(故) 루퍼스 존스(Rufus Jones)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갈 때마다 머리를 떼어 의자 밑에 두고 싶은 기분이 든다. 목 위에 있는 것은 전혀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사실입니다. 은사주의자나 오순절주의자가 아닌 우리 복음주의 교회들조차도 많은 경우에 감정적인 것들을 선택해 왔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이런 감정적이고 경험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기독교인의 정신(The Christian Mind)>을 쓴 해리 블레마이어스(Harry Blamires)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인의 정신은 세속화의 흐름에 굴복했으며, 그 정도는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20세기 교회가 지적인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현실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이를 묘사하려면 마치 과장되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세속화에 굴복했다." 그의 말이 옳습니다. 정말로 옳습니다.
우리는 속담에 나오는 타조처럼 머리를 땅에 파묻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감정에만 의지하면서 우리의 느낌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감정에 기초해서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정신으로 깨달아 이해함으로써 살아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찾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원하시면 적어 두십시오. 에베소서 1장 17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이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들으셨습니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모두 정신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에베소서 3장 18절에서도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알게 하시기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사실과 진리로 계시하신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또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는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3장 10절에서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는 자니라"라고 합니다. 또 빌립보서 4장 8절에서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생각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를 이해할 수 있게 주셨습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는 도덕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리로 기록해 놓으신 것을 깨닫기 위해 우리의 생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따라다니며 환상과 경험을 찾아 헤매고, 경험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잘못된 결론에 이르고 맙니다.
제임스 오어(James Orr)는 <기독교적 하나님관과 세계관(The Christian View of God and the World)>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가르치는 직분을 가장 높이는 종교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흔히 다른 종교에서는 교리적 요소가 거의 없다는 말이 있어 왔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구별된다. 기독교에는 분명한 교리가 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적극적인 가르침으로 나아간다. 기독교는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종교를 지식 위에 세운다. 물론 그 지식은 도덕적인 조건 아래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진지하고 고상한 사고와 분리된 종교는 교회 역사 전체를 통틀어 언제나 약하고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역사적인 기독교는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위에서, 위대한 기독교 정통 신앙의 주류는 사람들의 경험을 모아서 거기에서 신학을 만들어 내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기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진리 여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존 목사님, 이런 것이 어떻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됐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하고 말이죠. 이런 현상에 영향을 미친 요소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오. 머리를 떼어내서 의자 밑에 두셨다면 이제 다시 꺼내시기 바랍니다. 이 세 가지는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면서 경험 중심의 신학 같은 것이 자라나는 토양이 된 세 가지 철학적 사조입니다. 실존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이교주의입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먼저 첫 번째인 실존주의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존주의가 뭡니까?" 이렇게 물으실 텐데요, 신학적, 또는 철학적 관점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실존(existence)'이라는 말에서 나온 이 용어는 결국 "중요한 것은 오직 당신 자신뿐이다."라는 뜻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인생은 한 번뿐이다.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려라. 먹고 마시고 즐겨라. 내일이면 죽는다. 마음껏 즐겁게 살아라." 이것이 실존주의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실존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느끼느냐이다.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은 가장 강렬한 느낌과 가장 강렬한 경험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이고,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느끼느냐이다. 성경의 권위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것이 실존주의입니다. "네가 느끼는 것이 곧 진리야. 네가 원하는 것, 네 마음을 사로잡는 것, 바로 그것이 진리야." 여러분,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고상해 보이는 철학이 결국은 광고에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유명한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흄 레이크(Hume Lake)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1711년부터 1776년까지 살았는데, 사실상 이 모든 흐름의 출발점이 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성은 신뢰할 수 없다. 이성으로는 결코 진리를 알 수 없다.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최고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좌절한 사람의 말입니다. 평생 자신의 이성으로 진리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성을 내던져 버리고는 "그냥 마음껏 경험하며 살아라”,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실존주의가 탄생했고, 그 다음 세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에게 아주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헉슬리는 1963년까지 살았습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흄의 생각에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오직 경험이다. 최고의 경험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바로 마약이다." 그래서 1894년에 태어난 헉슬리는 1900년대 초부터 마약을 적극적으로 아주 옹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헉슬리의 유산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현재를 위해 살아라. 경험을 붙잡아라"라는 철학의 일부입니다. 마약이 여러분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고 더 강렬한 경험을 준다면 최고의 것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헉슬리는 죽어가면서 아내에게 자신에게 LSD, 그러니까 환각제를 투여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실존주의적인 환각을 체험하며 죽고 싶었던 겁니다. 오늘날에도 마약은 극강의 경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비주의와 오컬트도 이런 사고방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오컬트나 사후 세계나 온갖 기이한 것들에 빠지는 사람들은 이성적인 세계를 벗어나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경험 신학이 자라나기에 아주 좋은 토양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도 이런 영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단 한 번도 역사적인 기독교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실존주의와 쌍둥이 자매 같은 사상입니다. 인본주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너는 반드시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군중 속에 파묻혀서는 안 된다. 그저 인류라는 거대한 덩어리의 한 조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 네 방식대로 살아라. 인류라는 벽에 네 낙서를 남겨라. 뭔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라. 어디에든 네 이름을 남겨라." 컴퓨터 시대와 대중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아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책을 써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쓰는 그런 시대입니다. 자기 돈을 내고 책을 출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겁니다. 반드시 자신이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토크쇼의 시대가 됐습니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남들과 구별되고 싶어합니다.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가치 있는 자아상을 스스로 만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어. 나는 이런 경험을 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아무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한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말한 것처럼 "비이성으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했다. 나는 저런 경험을 했다"라고 말하면서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버립니다. "그런 건 잊어버리세요. 중요한 것은 경험이에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저는 상관없어요." 저는 심지어 "성경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습니다"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사람은 자기 성경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다. 나는 경험했기 때문이다." 예술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가 지적한 것처럼, 예전에는 그림을 보면 나무가 있고, 산이 있고, 말이 있고, 여인이 있죠. 그런데 지금은 그림을 보고 "저게 뭐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저게 나무고, 저게 산이고, 저게 말이고, 저게 여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 그림인지 그것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화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물어보는 것 자체가 모욕이니까요. 그가 경험한 것이니까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비이성적입니다.
미술이나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덤프트럭 두 대가 충돌하는 소리같은 음악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란스럽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불협화음에 조화롭지도 않고, 듣기 거북해도 괜찮답니다. 그 사람만의 경험이니까요. 자, 보십시오. 철학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비이성적인 경험을 향해 뛰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어느새 실존주의 보따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뒤로 물러서 버렸습니다. "현재를 위해 살아라. 특별한 사람이 되어라. 일어나서 네 이야기를 해라." 이것이 오늘날 경건한 사람들이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모두가 자기 의견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오늘날의 시대 정신이 이렇습니다.
이처럼 실존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에서는 특히 두 저술가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쇠렌 키르케고르(Soren Kierkegaard)와 칼 바르트(Karl Barth)입니다. 이들이 실존주의와 인본주의를 기독교적으로 포장한 결과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가 생겨났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인본주의적 실존주의이고, 신정통주의도 마찬가집니다. 이들은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믿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교회들은 이 성경이 실제 진리이고,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번쩍 하는 경험을 하면 그 순간 성경은 당신에게 진리가 된다." 그들에게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성경의 내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의미 없는 기독교만 남습니다. 실존주의와 인본주의가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를 통해서 남긴 유산입니다. 모든 것을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같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늦은 시간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흥미로우실 겁니다. 여러 사람이 패널로 참석해서 사후 세계에 대해서 토론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책으로 쓴 휠러(Wheeler)라는 사람이 나오고 또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사이언톨로지 계열의 오컬트적이고 다소 기이한 형이상학 교사, 런던에서 온 의사, 그리고 저, 이렇게 나올 겁니다. 물론 사회자는 따로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자신의 경험담 주장을 책으로 쓴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함께 나오고요. 실제 방송에서 어떤 내용이 나갈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녹화한 내용을 어떻게 편집할런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은 갑니다. 아마 제 말이 많이 잘려 나갈 것 같습니다. 어쨌든 대략 어떤 분위기였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분장실에서 처음 휠러 씨를 만났습니다. 제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목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부터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아주 신앙심이 깊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들으니 참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러자 그는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경험한 것은 <내세의 삶(Life After Life)>이나 퀴블러 로스(Kubler-Ross)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들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러자 사회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죽었을 때 병원에서 임상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까?" 그랬더니 "아닙니다. 임상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회자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저는 제가 죽었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그것을 아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똑같은 겁니다. 사랑은 증명할 수 없죠. 경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죽었다는 것을 압니다" 참 어처구니 없는 말 아닙니까?
그 사회자는 기독교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경험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당신이 죽었을 때의 경험이 세상에 얼마나 큰 희망을 주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그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도,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습니다. 자유주의 기독교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자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도 죽었고, 또 이 사람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따뜻한 느낌을 받았고, 평안과 사랑을 느꼈고,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책에서 그리스도로 보이는 존재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따뜻하고 너무나 놀라웠다고 합니다. 누군가 죄에 대해 이야기하자 웃으면서 '여기서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단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단다'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심판은 없고, 오직 행복과 빛뿐이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훌륭했다고 합니다. 휠러 씨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주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심판에 대한 그런 옛날 기독교의 두려운 이야기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실제로 저승에 갔다가 돌아왔고, 저승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보십시오. 이제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사회자의 말입니다.
그러자 런던에서 온 의사가 의학적인 관점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반박했습니다. "우선 미국 인구의 약 1퍼센트는 편집증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돌아왔다는 이런 집단적인 현상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초록색 비행접시를 봤다고 생각해서 신문사에 제보했고, 다음 날 신문에 그 기사가 실리면 실제로는 그런 비행접시가 없었더라도 같은 초록색 비행접시를 봤다는 전화가 백 통은 걸려올 겁니다. 암시가 작동한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그런 암시의 영향을 받기 쉬워서 실제로 보지 않았는데도 봤다고 믿습니다. 단지 시대적인 유행의 문제이기도 하고, 결국은 책을 팔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흰 존재를 본다고 말하는 것도 실제로 그런 것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몸이 죽음 직전의 심각한 외상을 입었을 때 신경계가 반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의사가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의사에게, 아마 야구방망이로 사람의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쳐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더니 의사도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크게 느끼는 불안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삶이 행복하고 긍정적인 경험이기를 바라는 환상을 갖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쉽게 동조하게 됩니다." 저는 그 의사에게 그 말은 맞지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죄의 결과에 대해서 사회 전체를 무감각하게 만들려는 사탄의 계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회자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말이 맞다면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군요." 그래서 저는 "맞습니다. 사탄의 계략을 알면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놀랍고 기쁜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어떤 사람이 경험을 했다는 주장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사탄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신학을 만들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탄은 경험을 너무나 쉽게 위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결코 위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서야 할 자리, 그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굴복하면 안 됩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경험 중심 신학은 역사적인 기독교가 물려준 유산이 아닙니다. 실존주의와 인본주의의 유산입니다.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지 어떤 심리적인 현상이 사람의 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종교적인 감정이나 체험은 자기 자신밖에 증명하지 못한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일부 신학자들이 종교적인 감각을 높이기 위해 마약 사용을 지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실존주의라는 수레를 역사라는 말 앞에 두는 순간, 신학은 인간의 미신을 짜깁기한 것이 되고, 성찬용 포도주에 환각제를 넣는 것조차 정당한 일이 되고 만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경험이 최고 권위라면, 더 강렬한 경험을 만들어 내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많은 은사주의 집회에서는 감정을 극도로 고조시키고, 음악이나 리듬이나 여러 방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황홀한 상태로 몰아갑니다. 마치 마약과 비슷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감정과 느낌을 일으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신학적인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성경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이 시대의 세속주의, 그러니까 인본주의와 실존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언제나 성경의 교리는 뒤로 물러나고 맙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극단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부터 개신교의 가장 극단적인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도 쉽게 함께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리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뭐가 중요합니까? 경험입니다. 그래서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한 이후로 저는 마리아를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일까요? 성령님이 우리가 마리아에게 헌신하기를 원하실까요? 보십시오. 교리가 중요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교회를 다스리지 않게 되고, 경험이 왕이 되고, 감정이 그 왕자가 됩니다. 월터 챈트리(Walter Chantry)는 <사도들의 표적(The Signs of the Apostles)>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사가 강조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일은 줄어든다. 집회는 경험을 나누는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가끔 언급될 뿐이다. 이 운동에 이끌려 들어온 많은 사람은 말씀을 등한시한 결과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진리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과 감정적인 경험 위에 선다. 심지어 성경을 여러 시간 읽는 사람들 가운데도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메마른 자기 영혼에 또 다른 감정적인 흥분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며 읽는 사람들이 있다. 오순절주의의 실제 모습은 성경의 충분성을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다."
이번 주에도 저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증언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은사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 중에는 우리의 형제자매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은사주의자들이 성경과 교리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토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이성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황홀한 메시지나 감정을 능숙하게 자극하는 설교자를 통해 더 크게 흥분합니다. 반복되는 오르간의 리듬 속에서 전해지는 이른바 계시가 사도들을 통해서 전달된 그리스도의 계시된 말씀보다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제게 와서 그레이스 교회를 떠나서 은사주의 교회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레이스 교회의 가르침이 더 낫다는 것은 저희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 교회의 분위기와 느낌이 더 좋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참된 가르침이 참된 감정과 참된 기쁨과 참된 감격을 낳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의 정신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느낌입니다. 어떤 경험만 하면 그걸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배경에 실존주의와 인본주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교주의가 있습니다. 사실 경험주의는 이교주의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거짓 종교들이 감정과 느낌과 경험과 의식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교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신비 종교들은 바벨에서 시작된 거짓 종교였습니다. 이 신비 종교들이 그리스도 당시에 엄청난 규모로 성장해서 헬라와 로마 세계 전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수많은 신들을 섬겼는데 모두 신비 종교였습니다. 거짓되고 악하고, 방탕하고,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우상숭배로 가득한 그런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신비 종교들을 연구한 역사학자들은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경험했고,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했고, 삶의 만족을 느끼고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신비 종교의 특징입니다.
앵거스(Angus)는 그의 책 <신비 종교(The Mystery Religion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비 종교는 성인과 금욕주의자와 순교자들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탄의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신비 종교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종교 집단에서 참된 신도들은 자신이 선택한 신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가 되었고, 공동의 서약으로 결속되었으며,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졌고, 부흥 운동과 같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잠시 멈춰 보겠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교제가 있었다.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전도하고 자기 종교를 전파했다. 그리고 놀라운 부흥 집회와 같은 열정으로 자신들을 끊임없이 고무시켰다. 그렇게 해서 감정적인 필요를 채웠다.” 앵거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경건한 신도는 황홀경 속에서 자신의 일상적인 한계를 넘어 복된 환상을 바라본다고 느낄 수 있었고, 열광하는 가운데서는 자신이 신의 영감을 받았거나 신으로 충만해졌다고 믿었다. 이런 현상은 어떤 점에서는 성령이 부어졌을 때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보십시오. 사탄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참된 감정과 매우 비슷한 감정을 위조해 낼 수 있습니다.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우리의 경험에 맞추려 해서도 안 됩니다. 이교주의적인 방식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거짓된 경험을 만들어 사람들을 성경적이지 않은 결론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게 만들고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든 다음에, 그 감정을 위조해서 사람들을 오류의 길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초월명상이나 이슬람이나 로이 마스터스(Roy Masters)나 사이언톨로지나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느낌, 감정, 경험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데이비드 해든(David Haddon)의 <초월명상(The Transcendental Meditation)>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성은 신비주의적인 역설을 위해 버려진다. 단지 추상적인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초월명상이 만들어 내는 조건화 과정을 주관적으로 지각하게 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초월명상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을 비워야 한답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명상은 논리적인 사고를 완전히 방해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진리를 분별하는 수단으로 이성을 버리고 신비적인 경험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해하셨습니까? 초월명상은 궁극적인 진리는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은 제쳐 두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바로 이교주의의 유산입니다. 기독교 안으로까지 들어온 것이죠.
우리는 실존주의, 인본주의, 이교주의라는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이어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경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관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경험은 단순한 위장 장애와도 구별할 수 없다." 어떤 경험은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생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신학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악한 영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경험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된 모든 종교 체계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런 길을 걸어가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우리가 높이 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위한 싸움(The Battle for the Bible)>을 쓴 해럴드 린셀(Harold Lindsell)이 옳았습니다. 그는 단지 책 한 권의 제목을 지은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규정했습니다. 정말로 기도해야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우리 앞에 제기한 중요한 문제 하나는 경험입니다. 지금까지 경험을 기초로 신학을 세우려는 은사주의 운동의 경향을 살펴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진리에 접근해 온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받아 왔습니다. 인간의 경험에서 진리를 찾은 적이 없고, 느낌이나 감정이나 주관적인 체험으로부터 신학을 만들어 낸 적도 없습니다. 또한 오늘날 이 운동이 사용하는 이러한 방법론은 실존주의와 인본주의와 이교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알 숭배와 예배를 비교한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바알 숭배는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종교였다. 그리고 포로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경쟁 종교로 존재했다." 구약성경을 아는 분들이라면 바알 숭배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알 숭배의 핵심은 심리와 육체를 결합한 체험과 주관적인 경험에 있었다. 신의 초월성은 황홀한 감정 속에서 사라졌다. 감각적인 참여가 중심이었고, 형상이 반드시 필요했다. 더욱 화려하며 자극적일수록 더 좋았다. 음악과 춤은 사람들을 각자의 개별적인 상태에서 끌어내어 하나의 집단적인 반응 속으로 몰아넣는 수단이 되었다. 그 종교에서는 성적인 행위도 흔했다. 바알 숭배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 주었기 때문이다. 곧 인간의 모든 감각이 종교적인 열정 속으로 황홀하게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전 매춘은 바알 숭배를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이 되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런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경험이 되었을 겁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알 숭배는 예배의 수준을 끌어내린 것이다. 흥미롭고, 현실과 관련이 있고, 자극적이어야 했다. 반면에 야훼 신앙, 곧 여호와를 예배하는 신앙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중심으로 예배했다. 사람의 의지에 호소했고,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의 이성과 사고를 일깨웠다. 야훼 신앙에서는 말씀이 선포되었다. 사람들에게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고, 결단하도록 부르는 말씀이 선포되었다. 바알 숭배와 달리 야훼 신앙은 예배를 끊임없이 의식적인 이해와 분명한 개념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성숙한 이스라엘의 예배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의해 지배되었다. 단지 감각적인 경험을 위해 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알 숭배와 여호와 예배의 차이는 이해하고 알고 순종할 수 있는 언약의 하나님의 뜻에 나아가느냐, 아니면 느낄 수만 있을 뿐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생명력을 향해 나아가느냐의 차이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새로운 바알 숭배가 있다. '예배를 통해 어떤 체험을 해야 합니다.' 또는 '나는 예배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예배를 통해 체험을 하자'라는 말이 '하나님을 예배하자'라는 말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 차이는 개인에게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의미 있는 것에 응답하느냐의 차이이다. 예배를 체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관심을 자극하는 어떤 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종교적인 의미를 덧씌우려 한다. 그렇게 되면 주관성이 장려된다. 바알 숭배란 결국 예배하는 사람의 감정과 영적 취향에 짜 맞춘 예배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런 모습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예배에서 체험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곳은 바알 숭배뿐이었다. 이스라엘과 기독교 교회는 예배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그 뜻에 사람이 응답하도록 부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고, 그 계시에 순종하는 행위였다."
제가 이렇게 조금 길게 읽어 드린 이유는,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경험 중심의 신학을 세우는 데 사용하는 방법론의 뿌리는 실존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바알 숭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교주의에 있습니다. 바알 숭배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예배했습니다. 그들의 종교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근거로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느낌과 경험을 근거로 결단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믿음은 이성을 떠나 경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실존주의적인 마술 지팡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처음으로 보여 준 사람이었습니다. 믿는 백성의 한 민족을 이루는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마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신비로운 체험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이렇게 될 것이다. 이것도 이루어질 것이다. 저것도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주신 약속을 믿고 그 약속 위에 행동한 사람입니다.
신약에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바울은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또 하늘로부터 비치는 빛을 보았는데, 그 빛이 너무나 강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이 멀었습니다. 아나니아도 하늘로부터 환상을 보았죠. 그러니까 이 환상,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한 빛,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 신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땅에 고꾸라졌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선포할 때, 설교의 중심은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자신의 경험을 진리의 근거로 삼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바울의 놀라운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그 일을 겪은 직후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20절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전했겠습니까? "내가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다시 말해서 자신의 경험만 이야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경험한 일과 같은 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그 사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에 사도행전 17장 2절에서도 같은 모습을 봅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어떻게 증명했습니까? 성경을 풀어 설명함으로써 증명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진리의 근거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23절입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다시 말해서, "생각하라. 머리를 쓰라"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성경적인 접근법이지만,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실존주의 철학과 인본주의, 그리고 이교주의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동시에 성경에도 연결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들의 신앙적 배경이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당신들은 성경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물론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을 거스르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그들도 성경을 붙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로 붙들면서 동시에 자신의 경험도 권위로 삼으려고 하면, 그 사이에는 엄청난 줄다리기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랄 로버츠 대학교의 교수였던 찰스 패라(Charles Farah)는 <크리스천 라이프(Christian Life)>라는 잡지에 실린 글에서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개인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체험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로고스'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말씀이다." 여기서 그는 '말씀'을 뜻하는 헬라어 '로고스'를 인용합니다. 계속 읽습니다. "그러나 '레마'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로고스, 그러니까 성경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레마는 주관적이라는 겁니다. "로고스의 의미를 깨달을 때 레마가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로고스는 문자적인 말씀이지만, 레마는 체험되는 말씀이다."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인 말씀인 로고스가 있지만,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와 체험될 때 비로소 레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개인적인 말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정말 위험한 접근법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성경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신정통주의가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해 왔습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 방법이 전혀 아닙니다. 저는 어떤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어떤 감정이나 황홀한 체험을 얻기 위해서 읽지도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제가 성경을 펴서 단 한 구절만 읽어도,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제게 적용됩니다. 저는 어떤 특별한 체험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잘 들으십시오. 바울은 “성경이 너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에 어떤 황홀한 체험을 덧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도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성경이 유익합니다. 전부 유익합니다. 유익하게 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유익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잘 들으십시오. 말씀은 여러분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또 모든 선한 일을 행하도록 성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어떤 주관적인 체험을 더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힘써 싸워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위해, 성경의 충분성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황홀한 체험이나 어떤 특별한 감정을 기다리도록 만드는 시대정신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면, 어떤 느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싸움입니다. 우리보다 두 세대 앞서 살았던 사람들도 전선은 달랐지만 똑같은 싸움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로스앤젤레스 성경학교(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의 초창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또 <기독교의 근본 진리(The Fundamentals)>라는 책들이 출판되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주의에 맞서 싸웠습니다.
첫 번째 공격이 바로 그때 시작되었습니다. 정면에서 공격해 왔습니다. 정문으로 들어와서 성경의 진정성과 권위를 정면으로 공격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바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성경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공격했습니다. 그 공격은 특히 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향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교단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각 교단의 학교까지 장악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교단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지금도 그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자유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향한 두 번째 공격이 들어옵니다. 이번에는 정문이 아닙니다. 뒷문입니다.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매우 교묘합니다. 뒷문으로 들어와 성경의 권위와 충분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은사주의 운동이 이 공격의 선두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공격은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안으로까지 들어와 경험을 권위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교묘하게 성경의 충분성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정면에서 들어오는 공격과 싸워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뒷문으로 들어오는 공격과도 동시에 싸워야 합니다. 두 공격 모두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시대정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경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경험이 반드시 성경의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는 어떤 교리도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은 말씀일 뿐이고, 우리는 성령의 역사, 곧 영적인 체험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를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말씀과 성령을 결코 분리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을 보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사람들은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령과 영적인 체험을 자신이 하신 말씀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경험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사무엘상 15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사울에 대해서 이 본문을 여러분과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입니다. 여기에는 영으로는 예배하려 하지만 진리로는 예배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도 나옵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입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는 그 경건하지 않고 이교적이며 타락한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 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민족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8절을 보십시오.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이 왕을 살려 둔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왕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 것만 없애고, 원하는 것은 남겨 두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집에서 왕위를 빼앗으셨습니다. 13절을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그러나 거짓말이었죠. 사무엘이 말합니다.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사울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다시 말해서 "저는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입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17절에서 사무엘은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라고 합니다.
21절에서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백성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합니다. 22절에서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잘 들으십시오.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 예배 방식입니다", "이것은 제 경험입니다", "저는 제 나름의 느낌을 추구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무엘하 6장을 보겠습니다. 아주 짧게 한 가지 예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는 언약궤를 옮기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었습니다. 5절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언약궤를 모시고 가면서 온갖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약궤에 대해서 분명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첫째, 언약궤는 어떻게 운반해야 합니까? 수레에 싣는 것이 아니라 레위 사람들이 채를 꿰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합니다. 둘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언약궤를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는 규례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아마 웃사는 분명히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언약궤를 운반하는 일을 맡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웃사에게 매우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가 돌부리에 걸리자 언약궤가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웃사가 손을 내밀었죠. 얼마나 경건한 행동처럼 보였을까요? 얼마나 하나님을 높이려는 행동처럼 보였을까요? 하나님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길바닥의 먼지와 흙에 떨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그러자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잠깐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웃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한 것 아닐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겁니다. "저는 이렇게 예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 방식입니다", "저는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느낍니다"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바알 숭배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였습니다. 뭔가요? 경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의 질문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였습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공예배이든 개인적인 예배이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지적인 응답이어야 한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과 말씀으로 예배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평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입니다. 말씀을 떠난 성령의 역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순종하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2편을 보십시오.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가야 할 길로 인도하겠다. 내가 너를 가르치고 훈계하고 인도하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너를 인도하고 싶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싶다. 올바른 예배로 인도하고 싶다. 내 뜻 가운데로 인도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네가 이해할 때이다."
아시겠습니까? 이해력이 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우리의 이해를 통해,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훈을 깊이 살피라고 한 겁니다.
헨리 W. 프로스트(Henry W. Frost)가 쓴 <기적적인 치유(Miraculous Healing)>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배교가 더욱 심해질수록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성과 주되심을 점점 더 많은 기적과 표적으로 나타내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은사주의자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요한복음 14장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놀라운 장입니다.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예수님이 다락방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제자들을 떠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위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나를 통해 아버지를 보았고, 나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충분하다." 그러나 빌립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으로도 부족했습니다. 무언가 더 원했습니다. 또 다른 경험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빌립이 말하죠.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더 보여 주세요. 하나님을 직접 보게 해 주십시오.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겁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는 황홀한 체험을 그는 원했습니다. 경험을 갈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 말씀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빌립아, 내가 부족하니? 내가 충분하지 않다는 거야? 너는 나를 보았고, 내가 행한 일도 보았고, 내가 한 말을 들었는데 또 다른 것이 뭐가 필요하단 말이야?" 아마 빌립은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잠시 본 그 경험보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인 예수님과 3년을 함께하는 것을 훨씬 더 원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빌립은 또 다른 것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모욕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성경책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직접 보는 환상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놀라운 체험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원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과 말씀을 참되게 알면 놀라운 경험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가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마음이 상해서 아마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겁니다. 메시아께서 죽으시고 자신들의 구주가 떠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곁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함께 길을 가던 중에 예수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부터 시작해서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기억하시죠? 진리입니다.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이 떠나시자 그들이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보십시오. 경험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기쁘고 감격스럽고 흥분됩니다. 베드로도 믿는 사람은 때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진리 안에서 살아 본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기쁨과 평강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는 의지와 지성과 감정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34편 8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라고 합니다. 또 말라기는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기쁨과 충만한 경험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데 대한 응답으로써 경험이 따라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경험 자체를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면 경험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 자체를 좇기 시작하면, 우리의 대적 사탄은 그 경험을 너무나 쉽게 위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리에 관해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를 놓치고 맙니다. 우리의 많은 은사주의 형제자매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사실 성경에 없습니다.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 설명했습니다. 참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 역사 속에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영적인 부활을 자랑하지도 말고 종교적인 경험을 자랑하지도 말라."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기독교가 없다면 어떤 경험도 참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기독교가 참이라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역사적인 기독교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십시오. 곧 마치겠습니다. 10절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데살로니가에서 죽임을 당할 위험 때문에 밤에 떠나야 했습니다.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급히 그 성에서 내보냈고, 베뢰아로 갔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이제 잘 들으십시오. 이 부분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얼마나 자주 했다고요? 날마다 했습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알아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이 말씀이 참된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계속해서 증언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이 말씀을 양식으로 삼으면 가장 큰 기쁨과 가장 놀라운 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 위에 굳게 뿌리내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에도 주님의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교회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이곳에 이러한 교회를 세우셨다는 사실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저마다 신앙의 성숙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가 주님의 가족입니다. 이 가족을 위해 한 가지를 기도합니다. 저희를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상고하여 말씀이 참된지 확인하는 너그러운 사람들, 고상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옵소서. 또 우리의 확신을 언제나 사랑과 온유함으로 붙들게 하옵소서. 다투려 하지 말고 온유하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시고, 이 지역과 온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저들은 말씀의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영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참된 삶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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