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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계속 다루어 온 은사주의 운동에 관한 마지막 주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 아침에 이 마지막 주제를 함께 다룬 후에 고린도전서 14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동안 이 주제를 다루면서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주제를 마지막으로 이제 은사주의 운동 시리즈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계시다면,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 중에 이해하시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다룬 내용을 모두 다시 설명해 드릴 수 없는 점,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전에 살펴본 내용과 이어지는 것이니까, 시리즈 전체를 듣고 싶으시다면 녹음된 설교 테이프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은사주의 운동의 오류를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참된 영성의 문제'를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은사주의 운동에서 계시의 문제, 해석의 문제, 사도직의 특별함 등 여러 가지를 다루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에는 참된 영성의 문제를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살던 시대의 문제점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특별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했지 온 세상을 향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선지자들이 세상, 그러니까 잃어버린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 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바른 교리를 붙들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복음이 삶을 통해서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이 시리즈를 통해서 하고 있는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정결한 교리로, 그 정결한 교리에 기초한 정결한 삶으로 돌아오도록 부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보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리에 신실할 것을 끊임없이 선포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는 유다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또 젊은 제사장이었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속 불순종하면 무서운 심판을 부를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라고 외쳤습니다.

또 에스겔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맹세와 거짓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죄를 고발하고 정죄했든, 요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라고 외쳤든, 선지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사역했습니다.

또 드고아의 목자였던 아모스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또 미가는 하나님을 자기 백성에 대한 증인으로 세웠고,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를 심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대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스바냐는 하나님께서 길을 잃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과 유다에 통곡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또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심을 받아서 회개를 통해 거룩하게 준비시키고 메시아를 맞이하게 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와도 선지자의 사역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거듭 써 보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도록 권면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세상을 책망하도록 촉구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편지를 써서 교회가 스스로를 살피고, 참된 교사들이 가르치는 순수한 교리를 굳게 붙들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또 야고보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했고, 요한은 모든 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시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시작부터 신약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자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외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묵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향해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해야 합니다.

교회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달콤하고 평안하기만 한 곳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곳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참 좋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안의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사보나롤라(Savanna Rolla)와 얀 후스(Jan Hus), 칼빈(Calvin), 루터(Luther), 웨슬리(Wesley), 빌리 선데이(Billy Sunday)와 같은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사람들을 부르고, 교회가 정결한 삶과 정결한 교리를 회복하도록 외친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 수는 없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존 목사님, 왜 이런 문제를 다루십니까? 그냥 성경만 가르치시면 안 됩니까? 왜 굳이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선지자적 사역이 바로 이런 역할을 맡아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결한 교리와 정결한 삶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리적인 오류가 전혀 없고, 모든 사람이 완전히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겁니다. 사실 그렇기만 하다면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겠죠. 이미 천국일 테니까 말이죠. 그저 하프나 연주하고 있으면 될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올바르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안에도 잘못된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외면하면 안 됩니다. 자유주의나 현대주의, 신정통주의, 교회가 오늘날의 시대 정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아주 큰 문제들이 있습니다. 또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오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협 문제도 알고 있습니다. 참된 교리를 따르지 않고 함께 연합하려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문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반드시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은사주의 운동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잘못된 요소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경의 기준으로 시험해 보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를 제가 말씀드리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중의 또 하나, 영성의 문제, 참된 영성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아침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이 모든 은사주의자에게 해당된다는 말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은사주의자들의 견해가 동일한지는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성의 문제야말로 은사주의 운동에서 가장 지배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 봅시다. 참된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은사주의처럼 어떤 체험을 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체계에서는, 그 체험이 곧 영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은사를 받거나, 방언을 하게 되거나, 어떤 수준에 이르거나, 황홀한 체험을 하거나, 또 이른바 '신적인 전율(divine zap)'을 경험하게 되면 그게 바로 곧 영성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실제로 저는 은사주의자들로부터 그런 표현을 직접 들은 적이 참 많습니다.

오늘 아침에 1부 예배가 끝난 뒤에도 어떤 분이 저에게 오셔서, 자신도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이 "우리는 그런 체험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상대방이 떠나면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전율하게 하시기를(May Jesus zap you)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은사주의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관심이 그런 '전율(zap)'이나 체험을 하는 데 맞추어져 있고,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전율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면, 결국 그 전율 체험 자체를 영성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전율'을 경험하거나 황홀경에 빠지거나 방언을 하거나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면, 마치 영적으로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전율을 경험한 사람', 또 '전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 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전율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영적이라고 여깁니다. 저는 바로 이런 식의 이분법이 결국 영적인 '슈퍼 성도' 계층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 은사주의는 결국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세례, 그러니까 방언 같은 표적을 동반하는 체험을 하지 않았거나, 어떤 황홀한 체험이나 기적 또는 기적의 은사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온전히 사역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겁니다. 마치 8기통 엔진이 4기통만 작동하는 것처럼,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오순절 계열의 은사주의자인 멜빈 호지스(Melvin Hodges)가 쓴 <영적 은사(Spiritual Gifts)>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사람의 은사가 사역 가운데 완전히 나타나려면 성령 충만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의 영적 사역, 영적 은사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지만, 오순절의 은사를 경험함으로써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는 완전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체험 전까지는 결코 완전한 상태에 이를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어느 정도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사역은 할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체험에 이르기 전까지는 성령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역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호지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성령세례가 온전히 성숙한 영적 삶과 사역을 위해 필수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은사주의자들의 결론은 이겁니다. 성령 체험이 없이는 결코 온전히 성숙하게 살아갈 수 없고 성숙한 사역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바로 이게 문제입니다. 은사주의적 사고에서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영성을 얻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간극이 생깁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성경적으로 영성이 외적인 체험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겁니까? 정말 그것이 영성의 본질일까요?

우리는 흔히 사람들에게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영적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오랫동안 교회에서 '영적이다'라는 말을 지나치게 경건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처럼 사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하늘 생각만 해서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어." 그런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을 두고 "삼위일체 안에 빈자리가 있는지 찾고 다니는 사람이다"라고 농담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게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죠.

거룩한 조(Holy Joe)'라는 표현 기억하세요? "저 사람은 정말 거룩한 조야"라고 하면서 '영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커다란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책갈피로 연구하는 구절마다 표시를 해 놓은 그런 사람들이 흔히 '영적인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영적'이라는 말 자체가 좋지 않은 뉘앙스를 갖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거의 바리새인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까지 받아들여지게 됐습니다. 그러나 사실 '영적'이라는 말은 아주 좋은 말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성, 영적이란 뜻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전율(zap)'을 경험하는 걸까요? 어떤 단계에, 수준에 이르는 걸까요? 특별한 체험을 하는 걸까요? 방언을 하는 순간에 "이제 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우리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을 들으면 여러분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성경 구절을 한 스무 군데쯤 인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니 목사님, 오늘은 왜 성경을 안 가르쳐 주셨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언제 다시 성경 공부로 돌아갈 거예요?"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우리는 지금도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래도 예전처럼 성경 구절을 하나하나 다 읽어 주시지는 않잖아요."

자, 좋습니다. 2주 후부터는 다시 성경 구절을 하나씩 다 읽을 겁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부터 차례대로 계속해서 살펴볼 겁니다. 2년 전에 시작했던 고린도전서 강해를 다시 이어서 끝까지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먼저 14절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나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4절에 어떤 사람이 나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이 나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란 자신의 본래 상태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연적인 인간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중생하지 않은 사람, 구원받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개입 없이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 안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일들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제 15절을 보십시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아주 분명한 대조가 나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합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겁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고, 신령한 사람은 거듭난 사람,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 따르면, 여러분은 모두 신령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옆에 있는 아내를 툭 치면서 "거봐, 내가 10년 동안 얘기했잖아"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미 신령한 사람입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의미에서 신령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진리를 가르치시는 교사가 거하시고, 모든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가르쳐 주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모두 신령한 자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신분적인 의미에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모두 신령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하다'라는 것은 성령님이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6절부터 7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로마서 8장에도 육신과 영의 대조가 나오죠. 여기서 육신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영은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2장과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신령한 사람, 영의 사람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하는 육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육신적인 사람 역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거나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이라는 말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육신적인'이라는 말은 인간적인 본성과 욕망을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육신적인 사람도 아니고 육에 속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신령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커다란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책갈피를 잔뜩 꽂아 둘 필요는 없습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느다란 검은 넥타이를 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이미 신령한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구원받지 않았다면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개입이 전혀 없는 인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고, 육신의 생각과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신령한 사람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신령한 사람답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죠?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이나 대답해 주셨네요. 참 솔직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신령한 사람답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고린도전서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다시 말해서, "나는 마땅히 너희를 신령한 자들로 여기고 말할 수 있었어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제로 신령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어떻게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육신에 속한 사람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마치 육신에 속한 사람들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겁니다. 왜 그랬습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 만큼 미성숙했기 때문이고, 둘째, 거룩하지 못한 삶의 모습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가 2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3절에 나옵니다.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다툼 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신령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매우 육신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육신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육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회심했을 때 예수님께서 "시몬아, 시몬아, 예전에는 네 이름이 시몬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네 이름을 베드로라 하겠다. 네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 새롭게 된 너는 베드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그를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예전 이름으로 부르셨을까요? 베드로가 옛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분은 새 사람 베드로였지만 행동은 시몬처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령한 사람이지만, 바울은 "나는 때때로 너희를 육신에 속한 사람이나 육에 속한 사람을 대하듯 말할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너희가 죄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참된 영성을 보장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씀의 원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했다면, 바울은 "나는 신령한 형제들에게 편지를 쓴다. 너희는 단단한 음식을 받아들였고, 너희 가운데 분열도 없으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참된 영성은 모든 신자의 신분입니다. 그러나 그 영성을 실제 삶에서 나타내는 것은 두 가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가 없는 삶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참된 영성, 오늘날 교회에 바로 이런 사람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거룩하게 사는 신령한 사람들이 없으면, 교회는 결국 죄 가운데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왜 그런지 갈라디아서 6장을 보십시오. 사실 이 내용은 오늘 설교하려던 부분이 아니었지만, 성령님이 이 말씀도 사용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 "형제들아..." 바울이 다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여기서 '범죄'로 번역된 말은 넘어짐(paraptōma), 그러니까 죄에 빠지거나 시험에 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신령한 너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교회에 왜 신령한 사람들이 필요합니까? 다른 성도들을 붙들어 바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 전체가 신령한 사람들로 가득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이란 어떤 '전율(zap)'을 경험할 때 갑자기 생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아주 기본적인 말씀을 하나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입니다. 이미 6장을 펴셨으니까 한 장만 앞으로 가십시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하면 육신적으로 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육에 속한 사람처럼 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성령을 따라 행하면 됩니다. 여기서 이 '행하다'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행하다(walk)'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삶의 태도와 행동을 가리킵니다.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걷는다고 되어 있는데, 걷는다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영성도 바로 그렇게 나타납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의 순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영성은 절대적인 상태가 때에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순간에는 영적으로 행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존 목사님, 지금 영적이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때는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할 거고, 또 어떤 때는 "아니요, 지금은 조금 육신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왜냐구요? 영성은 순간순간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도 바울이 자신이 기록한 모든 서신에서 성령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네 가지만 요구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령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오직 네 가지뿐입니다. "성령의 체험을 구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초자연적인 영적 능력을 구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단 네 가지만을 말했습니다. 첫째, "성령을 따라 행하라." 둘째,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셋째,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넷째,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앞의 두 가지는 ‘하라’라는 명령이고, 뒤의 두 가지는 ‘하지 말라’라는 명령입니다. 바울은 이 네 가지만 제시하면서 "이것이 영성의 핵심이다. 성령은 이미 너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과 뜻을 따라 한 걸음씩 행하고, 성령의 뜻에 따라 기도하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영성의 본질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은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전율을 느끼는 것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두 번째 은혜의 역사’와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문제일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영적인 상태에 도달했다. 특별한 체험도 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쉬워질 것이다. 이제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면 된다. 순풍을 타고 항해만 하면 된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자신의 죄성을 가장 깊이 미워한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어요? 영성은 "이제 다 됐다. 더 이상 나에게 죄란 없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영성이란 순간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입니다. 한 번의 체험으로 평생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성결 운동'이라고 해서, 어떤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순간적으로 완전한 영성을 얻게 되고,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영성의 기초입니다.

바울은 한 걸음 한 걸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신령한 사람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잘 보십시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죄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을 따라 행하며 죄에 넘어지지 않기 때문에, 죄에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신령한 사람입니다. 그 어떤 신적인 전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한 가지 더 생각해 봅시다. 영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누구를 닮는 것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빌립보서 1장 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에베소서 4장 13절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바울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바울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습니다.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성은 한 번 얻어 놓으면 평생 지속되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순간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입니다. 삶의 어느 순간이든 그리스도를 닮아서 성령을 따라 행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성숙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지 겨우 네 시간밖에 되지 않은 새신자라도 성령님께 순종하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렇죠? 성령을 따라 행하면 됩니다.

반대로 5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도 가르치고, 성경 지식도 많고,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육신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영적 성장의 기간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중요합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에 이르면 그때부터 영적으로 완전한 상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성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은사주의자들은 혼란을 줍니다. 성령세례를 받거나 어떤 특별한 전율을 경험하면 함께 영성도 얻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체험을 구하고 그것을 마치 영성 자체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두 번째 은혜의 역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더 높은 차원을 추구하고, 두 번째 은혜의 역사나 순간적인 영성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의 권위를 뒤로 밀어놓게 됩니다. 또 참된 영성에 이르는 올바른 길도 뒤로 밀어 버리고, 결국에 체험이라는 잘못된 길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체험을 하고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영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더 큰 체험을 추구하고, 또 더 큰 체험을 추구하고, 끝없이 더 강렬한 체험을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바로 은사주의자들의 착각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할수록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성의 기준에서 점점 더 멀어질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말씀을 거룩한 삶으로 실천해서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자신을 단번에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줄 어떤 초자연적인 경험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내가 그런 체험을 했을 때,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부터 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고, 더 큰 능력과 더 큰 기쁨과 더 친밀한 교제와 더 큰 사랑과 더 큰 충만함을 누리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 체험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체험을 하면 모든 것을 얻게 된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라고만 했습니다. 매일의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른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루하루 이어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하루 성령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래에는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아니, 그건 이단들이 하는 말 아니에요? 다음 주에 목사님 그 말씀부터 바로잡으셔야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목사님이야말로 이단 아닙니까? 하나님이 미래에 관심이 없으시다니요." 이런 생각이 드시나요?

물론 저는 결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내일을 약속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치 다이어트 계획처럼 말이죠. 언제나 "내일부터", 아니면 "다음 주부터" 이럽니다.

"주님, 이것만 끝나면 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때부터는 정말 잘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래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저는 늘 이렇게 말하죠. 우리는 언제나 '장차 누릴 영광스러운 미래'만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의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원하신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내일이 아닙니다. 다음 주도 아닙니다. 다음 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그리스도인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성이란 순간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입니다.

제가 결혼할 때가 생각나네요. 결혼식을 하면 참 긴장되지 않습니까? 물론 정말 멋진 일이었습니다. 괜히 오해하지는 마시구요. 저는 결혼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아내는 천사입니다. 왜냐하면 늘 허공에서 뭔가 잔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농담인거 아시죠.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죠. 그리고 마치 천사들처럼 세상에는 입을 옷이 없다고도 하고요.

어쨌든 패트리샤는 정말 훌륭한 아내입니다. 정말입니다. 결혼식을 하면서 이렇게 맹세를 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습니다.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알까요? 저는 영원히 살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저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일단 몇 주 정도 살아 보고 어떻게 되는지 보자'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뿐입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패트리샤가 제게 와서 "여보, 나 사랑해?" 이렇게 물었는데, "물론이지. 앞으로 사랑하게 될 거야. 미래를 보니까 사랑이 보여.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사랑하게 될 거에요", 이렇게 대답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미래에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이 내일이나 다음 주나 내년에 헌신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지금뿐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인생의 끝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면, 여러분은 평생을 현재형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과거형으로 살아본 적도 없고, 미래형으로 살아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란 바로 이겁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참된 영성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느냐, 또 다른 체험을 했느냐 하는 것은 영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은사나 특별한 체험이 영성을 지속적으로 결코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7절을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서신 첫머리에서 하던 방식입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다시 말해서, "너희는 어떤 은사도 부족하지 않았다. 모든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을 읽어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정말 온갖 은사가 있었습니다. 예언도 있었고, 방언도 있었고, 놀라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 어떤 체험도 부족하지 않았고, 은사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자, 이 두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영성은 어떤 은사의 결과가 아닙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든,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든, 예언의 은사를 받았든,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든, 어떤 은사를 받았든 그것이 여러분이 신령한 자인지 육신에 속한 자인지를 결정해 주지 않습니다.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저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이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가 계속해서 참된 영성을 유지하도록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모든 신자는 언제 영적 은사를 받습니까? 구원받는 순간에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7장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육신과 싸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특별한 능력을 행했다고 해서 영성이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증명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을 절대로 어떤 특별한 전율이나 기적이나 체험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우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은사들이 육체의 욕심을 막아 주는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성령세례나 방언의 은사, 혹은 어떤 황홀한 체험 자체가 곧 영성이라면, 영적인 사람은 즉시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까? 육체의 욕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시험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진 형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이죠. 신령한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생각해 보십시오. 은사주의자들 가운데도 은사를 받았고, 특별한 체험을 했고, 표적과 기사를 경험했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은사만 얻을 수 있다면, 그 단계에만 이를 수 있다면,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될 텐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실이 아닙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은사를 가지고 있었나요? 가지고 있었죠. 놀라운 일들과 여러 가지 체험, 황홀한 경험들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육체의 욕심을 이루었습니까? 그랬습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를 보면, 은사는 영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관계가 있었다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그 사실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12장까지, 그리고 14장에 이르기까지 계속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열세 장에 걸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사를 가지고 있었고 황홀한 체험을 했다는 사실은 참된 영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참된 영성은 그런 체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의 은사주의 운동을 살펴보면, 예를 들어서 방언을 했던 세벤놀파(Cevenols)나 어빙파(Irvingites)는 모두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찰스 스미스(Charles Smith)는 그의 저서 <성경적 관점에서 본 방언(Tongues in Biblical Perspectiv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연애와 영적 결혼이라는 교리는 방언 현상과 함께 나타났다. 성과 결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왜곡된 사례는 모르몬교와 셰이커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역시 방언을 하는 집단이었다. 유명한 방언 지도자인 에이미 셈플 맥퍼슨(Amy Semple McPherson)은 자신의 결혼이 주님의 뜻이 아니며 다른 결혼을 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잘 알려진 한 오순절 여성 설교자는 남편과 사별한 지 3년이 지난 후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자,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주장했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찰스 파함(Charles Parham)은 극도로 심각한 부도덕한 행위로 체포되었다."

그러면 "모든 은사주의자들은 다 부도덕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저나 여러분처럼 육신과 씨름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제 말은, 이런 사실들이 영성과 체험은 아무런 상호 관계가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모두 그런 체험을 했지만, 우리와 똑같이 여전히 육신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체험 자체가 곧 영성이라면, 참된 영성은 육신의 욕심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죠.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한 번의 '전율(zap)'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며 성령께 순종할 때 얻습니다. 성령께 순종하는 삶이 영성입니다.

방언을 하는 한 청년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놀랍게도 내 영혼 안의 복된 감정들이 성적 욕망과 함께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올해 폴 세일해머(Paul Sailhamer)와 저는 댈러스 신학교(Dallas Seminary)에서 은사주의 운동에서 나온 한 청년과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도 없이 방언을 했고, 여러 차례 이른바 '성령에 의해 쓰러짐을(slain in the Spirit)'을 경험했습니다. 다양한 황홀한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년은 은사주의 운동을 떠나서 댈러스 신학교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청년이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대체로 이렇게 가르쳤다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 쓰러지고, 방언과 같은 체험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사람을 정결하게 하고, 죄를 깨끗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청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체험들을 하고 난 뒤에도 저는 이전과 똑같이 육신과 싸워야 했고, 이전과 똑같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게 바로 핵심입니다. 참된 영성은 은사나 체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은사주의 운동의 매우 안타까운 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험이 참된 영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체험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또다시 같은 길을 따라 떠나면서 더 큰 체험을 찾아 나섭니다. 마침내 참된 영성을 가져다줄 체험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 참된 영성이 바로 여기, 성령을 따라 행하는 단순한 삶에 있다는 사실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참된 영성입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실제로 월터 챈트리(Walter Chantry)는 그의 저서 <사도들의 표적(Signs of the Apostle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순절주의자들도 다른 기독교 집단과 마찬가지로 많은 혼란 속에 있다. 그들 중 신중하고 지혜로운 영적 지도자들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체험을 통해 벗어나려고 했던 바로 그 무서운 무지와 부도덕, 마음의 냉랭함, 영적인 무능력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문제들은 그 어떤 체험으로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신적인 전율(divine zap)'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방언 체험을 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영성이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영성이 있는 곳에서 여러분을 멀어지게 하고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타까운 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 안에서 얻은 존재답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신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신령함을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행하라고 하십니다.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의지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것이 참된 영성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모조품에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기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원래 준비했던 내용을 다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온유하게 인도하시는 가운데, 오늘 특별히 강조하기를 원하시는 말씀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쁨을 주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을 신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습니다. 저는 성도들을 염려합니다. 그보다 더 크게는,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교회를 염려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사도 바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또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의 외침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유다의 음성도 들립니다. 심지어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속여 어떤 특별한 체험이 우리를 단번에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게 하려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영성은 순간순간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성령님께 순종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 우리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세상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구속받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게 하옵소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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