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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이제 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새신자이든, 신앙생활을 한 지 조금밖에 안 된 분이든, 오랜 세월 신앙을 지켜온 분이든,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만일 멈췄다면 정말 매우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한 신자라면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나누는 원칙들은 단지 새신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서서 완전한 영화의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신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영적으로 자라고 성숙해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시간에 나누는 진리들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태이든, 영적 성장 여정의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든, 오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유익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이 진리를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진리가 제가 생각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을 잠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 곧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또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단순히 자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 역시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온전하게 하며”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성숙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단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짜릿한 경험을 하려고 읽는 것도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어떤 황홀경을 경험하기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점진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위해 주어진 도구이자 수단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에게 음식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양식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마치 아기가 젖을 빨듯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에너지와 생명의 원리를 공급해서 성장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주셨고, 또한 성령님을 우리 안에 두셔서 그 길을 따라 성장하도록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이전에 함께 살펴본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요한일서 2장 13절과 14절 말씀을 통해 영적 성장의 중요한 단계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 말씀에는 세 단계의 영적 성장이 나옵니다. 첫째는 아이, 둘째는 청년, 셋째는 아비입니다. 인생의 단계와도 일치합니다. 먼저는 영적 유아기입니다. 이 시기는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아는 시기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은 청년의 시기입니다. 이때는 내가 무엇을 믿는지를 아는 시기입니다. 말씀에 대한 교리적 이해가 자리를 잡아 흔들리지 않고, 진리에 뿌리를 내리는 시기입니다. 더 이상 온갖 교훈의 바람에 밀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아비의 단계는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아는 것뿐 아니라, 무엇을 믿는지를 넘어서서, 내가 믿는 분이 누구신지를 깊이 있고 성숙하게 아는 단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고도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단계입니다.

영적 성숙의 과정은 언제나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성장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대부분의 사역을 마치고 인생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모든 소망과 꿈이 거의 이루어진 시점에 이르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여…" 다시 말해서 바울은 영적 성장의 높은 단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다고 갈망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을 더 넓고도 풍성하게 이해하고자 열망했습니다.

지금까지 영적 성장의 세 가지 요소, 곧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반응을 통해 성장한다는 일반적인 내용을 나눴습니다. 영적 성장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에만 자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 그 순간 성장은 멈춥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장은 우리가 영적인 상태에 있을 때만 일어납니다. 육적인 상태에 있을 때는 전혀 성장하지 않습니다 성장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을 때에만 일어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 있을 때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을 때 일종의 균형 잡기를 합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동시에 여전히 우리 육체 안에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부로서, 가치 없는 죄된 본성이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이후에도 삶의 일부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또 다른 일부는 죄에 내어주면서 양쪽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해질수록 점점 더 의로운 삶의 비중이 높아지고, 죄된 삶의 비중은 줄어들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순간 죄를 완전히 멈추고 완전한 의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전진하는 과정입니다. 항상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이룬 것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우리는 언제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장하고 있다는 실제 증거는 죄를 짓는 빈도가 점점 줄어드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저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아주 잘 알려진 죄인입니다. 제가 처음 구원을 받았을 때도 제 안에는 치열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묘사하는 바로 그 싸움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계속하게 되는 그런 갈등과 투쟁이었습니다. 제 안의 육체와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성령 안에서 걷고, 순종의 삶을 통해 자라가면서 점점 성숙해지는 과정을 거칠수록 죄를 짓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보다 훨씬 덜하고, 점점 더 의로운 기준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고린도후서 3장 18절이 바로 그 핵심 구절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구약 성경의 시대처럼 우리를 가리는 수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건은 이제 벗겨졌습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어떤 분이 지난주 예배 후에 왜 ‘거울’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는지를 저한테 물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반사가 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의 영광, 즉 쉐키나(Shekinah) 영광 자체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직접 본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굴절시켜서, 반사시켜서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의 원리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비추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는 점점 더 큰 영광으로, 더 깊은 영광으로 나아가게 되며,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자, 이처럼 성경은 영적 성장을 아이와 청년과 아비로만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점진적으로 전진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적 성장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출 때 일어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을 요약하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 때에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더욱 더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육체를 위해 살면 그때는 영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다시 한 가지를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에는 몇 가지 아주 실제적인 원칙들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그 중 일부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그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나서 계속해서 다음 원칙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영적 성장의 핵심이라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산다는 것은 실제로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세" 이렇게 찬양합니다. 또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죠. 성경에도 끊임없이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너무나 익숙한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말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제 실제적인 의미로 풀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가장 먼저 살펴본 내용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 성장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아비가 되려면 먼저 영적인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기 전에 반드시 유아의 시기를 지나야 하듯이, 이 여정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실제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번째입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첫째,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야 하고, 둘째로는 우리의 삶 전체의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에 맞춰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이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조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무슨 뜻이라고 말씀드렸는지 기억하시죠?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기꺼이 만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실 때 하나님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괴로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저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든 상관없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공로를 인정받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가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든, 제가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미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기독교 문화 속에서 흥미롭게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길러내고 있는 이 세대는 그런 정신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섬김의 태도, 겸손한 마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헌신의 영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삶을 드리겠습니다’라는 자세보다 오히려 ‘나는 성공하고 싶습니다’ 이런 태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 어떤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컨퍼런스를 열거나, 새로 나온 책을 접하거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한 자리에 모으려고 할 때마다, 항상 유명 인사를 초청한다는 겁니다. 이른바 '멋진 사람들'이죠. 컨퍼런스의 강사 명단을 보면, 미스 아메리카가 등장하고, 부유한 사업가가 등장하고, 대기업의 CEO, 텔레비전이나 영화로 성공한 헐리우드 스타들, 유명한 운동선수, 정치인 등이 이름을 올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읍니다. 부유하고, 유명하고, 성공한 이들이죠. 그런데 이런 방식이 기독교 안에 어떤 모델을 심고 있느냐 하면, ‘섬김의 자세’가 아닌 ‘개인의 성공’이라는 모델입니다.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가라고 말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사명에 헌신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안에서 성공한 사람은 부유하고, 유명하고, 인기가 있고, 잘나가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들어왔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겸손한 섬김보다는 개인의 성공을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형성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내 경력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나를 홍보해줄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란 내 삶이 희생되더라도 괜찮다고 여기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사는 삶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만약 제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을 하다가 죽게 된다면 복된 죽음입니다. 복음을 위해 제 몸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저는 희생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희생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핵심은 ‘겸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여러분 안에는 이런 겸손함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파하실 때 저도 아프고, 하나님의 가슴이 뛰는 그 자리에 제 가슴도 함께 뛰고, 제게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가고 싶습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마음이 부족한 경우를 종종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나 기독교 대학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가 정한 조건 안에서 섬기려 한다는 점입니다. 완벽한 환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모든 성공의 조건들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 이름도 없이 철저히 잊힌다 해도, 그 모험을 감수하려는 겸손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시간에 나눴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훨씬 더 잘 해내는 사람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핵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먼저 붙잡아야 할 두 가지 진리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먼저는 구원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시라는 사실 앞에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할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성공할 수 있을지, 편안한 길인지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영적 성장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방식대로 움직일 때에, 심지어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처럼 보여도 동기가 바르지 않다면, 곧장 성장이 멈추고 맙니다.

이제 세번째 중요한 요점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세번째로, 우리는 죄를 자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흐름과 같은 맥락입니다. 가장 위대한 겸손의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죄를 자백하는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죄를 대충 넘기고 맙니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죄를 인정할 여유가 없기도 하고, 대부분은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스스로의 허물을 들춰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는 환경이나 상황, 주변 사람들 탓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죄를 자백하지 않으려는 성향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이제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주 통찰력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을 때에 명하는 대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죄를 범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 능력을 보게 하려 했기 때문에 그 땅으로 백성을 인도할 권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첫번째 성인 여리고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졌고 그 성을 점령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가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에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 이방 사회의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기를 원한다. 아무것도 모으지 말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그 자리에 모두 다 남겨두어라. 너희는 이방인과 다른 존재이다.” 여기서 한 사람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바로 아간입니다. 저는 아간이 뭔가 훔치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사람이라고 기억합니다. 아간은 성 안에서 물건을 훔쳤습니다. 그 결과로 다음 성읍인 아이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게 되죠. 이후 여호수아가 아간을 직접 대면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 7장 19절입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런데 어떻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그러자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합니다.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설명합니다. “이것을 보고 탐내었고, 저것을 보고 탐내었고, 장막 안에 감추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이 구절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24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아간이 가져간 모든 것, 그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소유물을 비롯한 모든 것과 함께 갔습니다. 2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아간이 죄를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고백이 징계를 면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다윗도 시편 32편과 51편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용서가 징계를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아간도 과거의 일을 고백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골(achor)'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고난', 또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 교훈은 이것입니다. “내 말을 거역하지 말라. 만약 거역하면 무서운 결과가 따를 것이다.” 그 결과는 아간과 그의 가족 모두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이었습니다. 가족 또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아간에게 죄를 자백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 설명 없이 아간과 그의 가족을 죽이셨다면,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존재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간이 자신의 죄를 자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저를 징계하실 정당한 권리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에는 아무런 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죄를 자백한다는 것에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간에게 자신의 죄를 자백하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아무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죄에 대해 반드시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그대로 넘기실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냥 넘기실 수 있었다면, 예수님을 죽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다루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우리가 그것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에 불의하고 불공평한 분으로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간이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한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아간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상황 탓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영향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죠? 한 강도가 평생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삶의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누가복음 23장 41절에서 다른 강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다시 말해 이렇게 말한 겁니다. “왜 불평하느냐? 우리는 당연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이 일로 욕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을 탓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오늘 여러분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핵심입니다. 우리가 죄를 정당화할 때마다 결국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먼저 하와가 죄를 지었고 그 다음에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그때 아담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하시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사람들은 흔히 아담이 하와를 탓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와를 탓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탓한 겁니까? 하나님을 탓한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여자를 주셨습니다. 저 혼자 자다가 눈을 떴더니 부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면 다른 여자를 주실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왜 이 여자입니까? 실패작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으니까요. 저는 여자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여자가 제 옆에 있었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여자”랍니다.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여자를 끌어들였고, 그 과정에서 아마도 뱀에게까지 책임을 넘기려 했을 겁니다. 아담은 끝까지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어떤 사람을 보내셨기 때문도 아니고, 어떤 상황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굳이 사탄을 만드실 필요는 없으셨잖아요. 타락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셨어야죠. 저를 이곳으로 보내지 않으셔도 됐고, 저 사람을 제 앞에 두지 않으셔도 됐잖아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죄의 책임에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죄를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죄를 지었다면, 제가 죄를 지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오직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죄책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죄를 자백하는 것이 영적 성장의 본질이라고 확신합니다. 자신의 죄를 의식하면서 솔직하게 마주하고 자백할 때에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자백하는 순간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면,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끌어내리는 무거운 짐을 없애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이 경주와 같다면, 히브리서 12장에서 말하듯이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릴 수는 없습니다. 그 짐은 우리를 끌어내리고, 속도를 늦추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죄를 인정하고, 직면하고, 자백할수록 짐이 가벼워집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성장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5장에서 다시 한번 이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께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종교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제사도 드리고 의식도 지켰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블레셋 군대가 전력상 훨씬 우세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빠졌는데,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을 무시해 왔기 때문에, 사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조차도 제자리에 두지 않고 아무 데나 옮겨 놓았던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그래서 사람들이 달려가서 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사무엘상 4장 7절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냥 하나의 우상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신의 형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작은 상자, 그 위에 천사의 날개가 있고 고리에 막대기가 꿰어 있는 그 상자를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게 이스라엘의 신이구나. 저 신은 아주 강력한 신이야. 큰일났다” 이렇게 말합니다. “저 신이 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낸 신이야. 애굽 군대를 홍해에서 수장시킨 신이야. 온갖 재앙을 내린 신이야. 저 상자 속에 있는 신과 엮이면 안돼.” 그렇게 두려워합니다. 그런데도 싸움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잠깐요, 이스라엘이 패했다라뇨?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편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대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 죽고, 보병 삼만 명이 쓰러지고,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요정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치 요술램프를 문지르면 하나님이 튀어나와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인님?”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젤리처럼 우리가 원하는 모양으로 틀에 맞춰서 우리 뜻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무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한 교훈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고통이었다면, 블레셋에게는 훨씬 더 큰 재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곧 알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그 궤를 들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정말 말 그대로 온 나라에 재앙이 덮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상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까지 가져가니라.”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블레셋 지역의 여러 도시를 거쳐서 지나갑니다. 참고로 ‘블레셋’, 영어로는 ‘필리스티아(Philistia)’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되는 고대 명칭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하나님이 신이니까 신들의 집에 있게 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다곤은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던 신인데요, 반은 물고기, 반은 사람인 이상한 형상이었습니다. 남성 인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곤은 그런 모습의 우상이었습니다. 신전이 따로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잡았으니, 우리 신 다곤의 집에 모셔두자.”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어느 방향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궤를 향해 절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신전에 들어와서 봤더니 자신들의 신이 궤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라고 합니다. 아마도 작은 지진이 나지는 않았나 그렇게 생각했던 거겠죠. 우상이 넘어졌으니 다시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다시는 일으켜 세우지 마라. 우상은 거기, 땅바닥에 있는 게 마땅하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의 비교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우상도, 그 어떤 거짓 신도 하나님과 동격으로 여기는 것을 참지 않으십니다. 5절을 보면, 그 일이 있은 후로 아무도 다곤을 다시 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옆집 신에게도 당한 신을 누가 섬기겠습니까? 엎드러져서 머리와 손이 잘린 신을 누가 예배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어떤 번역본에는 ‘치질’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주 잘못된 번역입니다. 치질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치질도 큰 문제이긴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앙은 그것이 아닙니다. 고전 번역본 중의 하나가 ‘에머로즈(emerods)’, 그러니까 치질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마치 꽃 이름처럼 들리죠. 그러나 가장 정확한 번역은 ‘종기’입니다. 아스돗 사람 모두에게 종기가 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쥐가 옮기는 병입니다. 마치 흑사병과도 같습니다. 전염병 때문에 죽지 않은 사람들은 종기에 시달렸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꽤 똑똑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가져온 뒤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궤를 당장 여기서 없애야 한다.” 8절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러자 방백들이 말했습니다. “가드로 옮겨 가라.”

가드(Gath), 어딘가 익숙한 도시 아닙니까? 거인 골리앗이 바로 이 가드 출신입니다. 가드 역시 블레셋 지역의 한 도시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속한 궤를 가드로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그건 가드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큰 재앙이 닥쳤습니다. 쥐떼가 창궐했습니다 곳곳에 죽음이 가득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여기서 말하는 종기는 몸 안에 생긴 종기입니다. 그러니까 내부 장기에 발생한 암 같은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궤를 당장 내보내라!" 그래서 그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말합니다.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그러니까 이 궤는 블레셋 온 지역을 돌면서 계속해서 재앙을 일으켰습니다.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그렇다면 이들이 하늘을 향해 무엇이라고 외쳤을까요? 하나님께 저주를 퍼붓고 있었던 겁니까? 요한계시록 14장에서처럼, "하늘의 하나님을 저주하며," 그런 반응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십니까?"라며 항의하는 부르짖음이었을까요? 이어지는 6장 1절에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점쟁이들과 제사장들에게 이 난국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냐고 물은 겁니다.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잘 들으십시오. 속건제는 무슨 제사입니까? 죄를 인정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는 고백입니다. 참된 평화를 원한다면, 이 블레셋 사람들은 제가 아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똑똑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욕되게 하고, 더럽혔으니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 방식이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하라는 겁니다. 지금 너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가 이 하나님을 거역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속건제를 드리라는 겁니다. 사무엘상 6장 4절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그러자 방백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속건제는 레위기에서 말하는 속건제가 아닙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이 제물을 바칠 때는 '봉헌물(votive offering)'을 바쳤습니다. 봉헌물이란 신을 욕되게 해서 생긴 문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모형입니다. 예를 들어서, 당시에 누군가가 손이 오그라드는 병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당시의 이교도적 사고방식으로는 신을 욕되게 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전으로 가서 진흙으로 손 모양의 모형을 만들어서 바쳤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 앞에서 "이 병이 내 죄로 인한 것을 내가 압니다"라고 인정의 표시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봉헌물입니다.

제가 고린도에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때 박물관 안에 있는 작은 전시실에 들어갔는데, 이런 봉헌물들이 수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잘 공개되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마침 열쇠를 가지고 있던 사람 덕분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방 안을 둘러보니까 온갖 종류의 장기와 팔다리를 본뜬 진흙 모형들이 가득했습니다. 팔, 다리, 사지는 물론이고 내부 장기들도 있었습니다.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를 경배하러 온 사람들이 가져왔던 겁니다. 자신들이 앓고 있는 질병이 신의 뜻을 어긴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신체 부위를 상징하는 모형들을 가져와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방인들, 아스돗 사람들이 한 행동은 그 당시로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겁니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종기과 쥐의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나님께 보여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자, 이제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인정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변명만 하고 있다면, 절대로 영적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할 때 일어납니다. 영적 성장이 죄를 짓는 빈도가 점점 줄어드는 과정이라면, 그 성장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실제적인 대면과 처리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죄를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상황을 탓하지 마십시오. 남편이나 아내를 탓하지 마십시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상사나 직원, 심지어 목사를 탓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심지어 마귀를 탓해서도 안 됩니다. 한동안은 마귀가 시켰다는 식의 핑계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귀신 탓으로 돌립니다. 제가 읽은 책 중에는 자기 콧물이 심한 것도 후비루 귀신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귀신이 아닙니다. 마귀도 아닙니다. 상황이나 친구들도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죄를 짓는 환경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죄는 매번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한 행동입니다. 따라서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9장 33절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흥미로운 표현 아닙니까?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은 주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러면서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만 여겨달라고 말합니다. 그것조차도 은혜라고 생각한 겁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 나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 바로 그 깨달음이야말로 죄를 다루는 참된 출발점이며, 영적 성장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다윗은 누구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고백한 겁니다. 하나님, 내 삶에 일어난 모든 일들 속에서 주님은 의로우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백이 시작됩니다. 죄가 내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죄를 자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즉, 이것은 내 문제이고, 분명히 죄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창세기 41장 9절에서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창세기 44장 16절에서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사무엘상 15장 24절에서 사울은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다윗은 나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다니엘 9장 20절에서 경건한 다니엘조차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며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며…"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여러분, 이처럼 죄의 자백이란 죄가 나 때문이고 나의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저는 이 점이 영적 성장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죄가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무거운 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자백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로게오(homologeo)’입니다. 이 단어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로게오(logeo)’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고스(logos)’와 어원이 같습니다. '말하다' 이런 뜻입니다. ‘로직(logic)’, 그러니까 논리라는 말도 어떤 원리에 대해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로게오는 ‘말하다’ 이런 뜻이고, 나머지 부분은 ‘호모(homo)’입니다. ‘호모지니어스(homogeneous)’는 '동일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모로게오(homologeo)’라는 말은 ‘같은 것을 말하다’, 다시 말해 ‘같은 말을 하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백한다는 것은 그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똑같이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것은 죄이고, 너의 책임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백은 애원이나 간청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죄가 분명히 죄라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자백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하나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꼭 용서해 주세요’ 라고 애타게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부흥회 같은 데서 ‘형제여, 기도하라, 끝까지 기도하라, 뚫고 나가라,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것이다’ 이렇게 했죠.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얼마나 용서하셨습니까? 성경 요한일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건 미래에 지을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 죄는 전부 미래에 지을 죄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자백은 용서를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자백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죄를 삶에서 다루려는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위한 대가를 모두 이미 치르셨기 때문에 다시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이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기서도 ‘용서하심’은 과거 시제입니다. 이미 용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용서를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백은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 앞에 죄의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일 뿐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여기서 요한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전체의 논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 전체는 진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강의를 들으시면 더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불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자백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그것이 죄임을 고백하고,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구원받을 때 죄 문제는 다 끝난 것 아닙니까? 다시는 다룰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의 끝입니까? 나는 이제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앞으로는 보이는 대로 행할 거라고 말할 겁니까? 아니죠.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믿음으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죄를 자백함으로 구원받았고, 지금도 삶 속에서 죄를 자백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요한일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죄를 자백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를 자백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자백의 깊이나 표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자백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라면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성실하게, 객관적으로 죄를 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 죄를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백에는 반드시 회개가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 역시도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죄를 지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걸 압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죄를 또다시 짓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 죄를 진심으로 자백하지 않습니다. 그냥 과거의 문제만 정리하고 싶은 겁니다. 미래까지 없애고 싶진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 죄를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죄와 마주할 때는 그것이 내 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죄의 자백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이것이 정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자라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주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에 보면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기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와 정직하게 마주하고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셔도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왜 저만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왜 저는 항상 손해만 봅니까?"라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한 번쯤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일이 어쩌면 여러분이 받아 마땅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라면 반드시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는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장을 가장 심각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최대한 실제적으로 적용해보겠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죄를 자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죄를 겉으로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다루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징계든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모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가 잘못해도 혼내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요. 저도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저에게 징계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저를 징계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죄책감’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유익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몸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간단한 예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던 문둥병, 그러니까 나병이 원래 알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예전에는 나병이 살을 파먹는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굴과 코, 손가락과 발가락, 이렇게 몸을 갉아먹는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필 얀시(Phil Yancey)가 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은 계신가(Where Are You God, When It Hurts?>라는 책에서 언급된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문제의 본질은 전혀 달랐습니다. 나병은 살을 갉아먹는 병이 아니라 말초 감각을 마비시키는 병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는 거죠. 예를 들어서, 너무 꽉 끼는 신발을 신은 나병 환자가 결국 발가락을 모두 잃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병이 발가락을 먹어치운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너무 꽉 끼는 신발 때문에 발가락이 닳아서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느낌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죠. 또 코에 문제가 생긴 한 나병 환자의 경우, 계속해서 코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다가 결국 코가 완전히 닳아 없어졌습니다.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코를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나병이 신체를 먹어치운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망가뜨린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체계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병에 걸리면 그 체계가 사라지고 결국에는 몸이 손상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삶에 하나님께서 죄책감이라는 경고음을 주셨습니다. 죄책감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울리는 작은 종소리이자 경고음입니다. 이 경고음이 들리면 곧바로 자백해야 합니다. 죄를 짓고 나서 그 죄책감을 느끼고 그 실체를 직면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고통을 느끼게 하심으로써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너, 아프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죄를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죄인 줄 압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일인 줄 압니다. 제 잘못입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돌이킵니다. 다른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놀라운 영적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는 문제를 직면하고 다루지 않으면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가 무엇을 배웠습니까? 영적 성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틀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겁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고, 기꺼이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번째 부분의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내 삶에 어떤 일을 허락하신다 해도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런 틀 안에서, 이런 마음의 자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적으로 자라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영적 성장에 이르는 열두 가지 열쇠 중에 겨우 세 가지만 다뤘습니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세 가지처럼 길지는 않을 겁니다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가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기본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함께 말씀을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기초가 굳게 세워지고, 이 열쇠들이 성숙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여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배워갈 때에 도와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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