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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적 성장에 대한 네번째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자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면서 매우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자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생명의 기본적인 특성 중 하나는 성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계속 성숙하고 성장해야만 합니다. 이 영적 성장의 실제 의미를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성장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마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처럼 점점 더 높은 영광으로 나아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이란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에 이끌려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결국 영적 성장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즉시 영적 성장이 멈춥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명예와 찬양을 향해 온전히 드려질 때,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장의 길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흐릿하고 막연한 개념이 아닙니다. 신비롭고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진리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미 세 가지 영적 성장의 열쇠, 다시 말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세 가지 핵심 영역을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빌립보서 2장입니다. 둘째, 우리의 삶 전체를 그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조준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여호수아 7장 19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네번째 원칙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쩌면 너무 기본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본질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창문이나 거대한 성당,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명목 하에 종교적 권위를 더하고 장엄하게 꾸며놓은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그렇게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성경에서 아주 적절한 예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4장 20절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에 대해 기록된 아주 중요한 본문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경험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19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한번도 자녀를 낳은 적이 없었습니다. 사라의 태가 이미 닫혔기 때문에 자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점점 더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그리고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브라함의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아브라함아, 이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들리는지 나도 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이삭”인데요, “웃음”, 이런 뜻입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느꼈기 때문이죠.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저는 믿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겁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나님. 좋은 뜻으로 하신 말씀인 줄 압니다. 그 마음은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지금 제 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셨잖아요.”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걱정하기 시작하고, 불안해하고, 어디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하나님이 정말 채워주실 수 있는지 의심을 하고, 마음이 점점 무너져 내리면서 심리적으로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합 겁니다. “잠깐만요, 당신은 늘 ‘하나님이 내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을 삶에서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을 의심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성과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요한일서 5장 10절에는 매우 짧지만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보이십니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우리의 물질을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희생적으로, 풍성하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정도로 은밀하게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드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헌금을 하려고 하면 손을 멈칫하면서 많이 넣는 것을 주저합니다. 일정한 금액 이상 헌금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믿지 않는 겁니다.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 거라고 믿는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앞두고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죽을 때보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훨씬 더 힘듭니다. 마치 치과에 가기 전의 두려움,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음 이후에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이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길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 길을 걸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이삭이 자라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었다. 그 아들의 후손 안에 내가 약속한 아브라함 언약이 있다. 그의 후손에게서 큰 민족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그 약속을 성취할 것이다. 이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러자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 말 없이 이삭을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산으로 올라가서 제단 위에 눕히고, 그의 몸을 묶고, 칼을 들어 심장에 꽂으려 했습니다.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수풀에 걸린 숫양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자신의 삶에서 받은 그 대상조차도 죽이라는 명령 앞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그저 하면 되는 것이고,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바닷가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아질 거라고 약속하셨으면서 유일한 아들을 죽이라고 하시면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인생에서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지만 말이죠. 그만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의 총합이며, 하나님의 위엄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믿고 따르며 살아갈 때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면 그대로 순종하고, 약속을 주시면 그것을 믿고 붙들고, 무엇을 하라고 하시면 그대로 행하겠다고 결단하며 살아가는 삶, 바로 그런 삶이 영적 성장을 이끌어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한다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약속하셨다면, 저는 믿겠습니다. 명령하셨다면,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우리의 태도는 이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삶의 문제 앞에서 무너진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모욕하는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니엘 3장을 보겠습니다. 다니엘 3장에는 불타는 풀무불 사건이 나옵니다. 13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왕의 명령을 거절한 자들입니다.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고 오직 참되신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고 결단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불러서 이렇게 묻습니다. 14절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다시 말해서, 너희가 이 나라에서 통용되는 종교 체계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지금 상황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매우 위급한 상황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위급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이야기를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비교적 안전한 상태에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분명히 말합니다. “절하지 않는다면 죽게 될 것이다. 그때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자가 있겠느냐?” 이 말은 믿음을 시험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나 느부갓네살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반면 느부갓네살은 눈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눈에 보입니다. 강력한 군대가 서 있습니다. 세 사람은 세상이 직접적으로 가하는 죽음의 위협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6절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불에서 건져내시든지, 건져내지 않으시든지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절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 속에서 구하시든, 죽음을 통해 의로운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 줄을 믿습니다.

19절을 보면 느부갓네살은 분이 가득해서 얼굴빛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얼굴을 일그러뜨릴 정도로 화가 났다는 뜻입니다. 명령을 내려서 풀무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을 더 강하게 피웠습니다. 얼마나 뜨거웠는지 세 사람을 던진 사람들이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풀무불 앞에 서서 던져질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가끔 상담을 하다 보면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더 이상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요.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남편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인이신가요?” “네.” “본인도 그리스도인이신가요?” “네.” “그렇다면 두 그리스도인이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러면 이렇게 대답들을 하십니다. “목사님이 모르셔서 그래요. 저희는 성격이 안 맞아요.” 그래서 제가 다시 묻습니다. “두 분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까?” “네.” “두 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까?” “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예수님과 성격이 안 맞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아닌데요… 목사님은 잘 모르세요.” “아니요, 본인이 모르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결혼을 지키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시다면 그 결혼을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단지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지 마십시오.”

어떤 부인분이 담임목사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남편은 항상 저를 살살 긁어서 짜증나게 해요.”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냥 긁게 내버려 두세요. 그러면 다 괜찮아질 겁니다.” 문제의 해답은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르게 서 있기만 하면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삶의 소소한 문제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인류 역사상 믿음에 대한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노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방주를 지으라.” 하지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바닷가 근처가 아니라 사막 한가운데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노아는 한 번도 강이나 호수, 바다 같은 큰 물을 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크기입니다. 게다가 근처에 목재를 살 수 있는 재료상도 없었기 때문에 직접 나무를 베고 다듬어서 판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막 한복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거대한 배를 지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리고 노아는 그 일을 시작합니다. 그 배를 완성하는 데 무려 120년이 걸렸습니다.

목재를 주문해서 간단히 몇 가지 일을 작업을 하는 것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120년이 지나서야 겨우 문을 달고 완성하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저라면 그 전에 진작 포기했을 겁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에게 노아에게 하셨던 말씀을 똑같이 하셨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비가 올 것이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 당시에는 비라는 것 자체를 본 적도 없었습니다. 노아 역시 비가 뭔지도 몰랐을 겁니다. 또 120년 동안 사람들은 줄곧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마치 여러분의 동네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곧 엄청난 홍수가 닥쳐서 우리 모두가 물에 떠내려갈 거라고 외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아마 그 사람을 보고 ‘미쳤다’, ‘정신 나갔다’ 이렇게 말할 겁니다. 당시 사람들도 노아에게 똑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비’를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아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여러분, 이건 너무 약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라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노아는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아무 근거도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120년 동안이나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광을 돌렸는지 모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제 삶에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믿음의 상태에 머무를 때 우리는 자랍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행한다고 말합니까? 믿음으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진, 성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한 걸음씩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믿음으로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려 들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낸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메뚜기 콤플렉스'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저들은 너무 크다. 우리는 안 된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다. 이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두 사람은 믿음으로 보았고, 열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열 명은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감당하실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상황보다 크신 분이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아브라함처럼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러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영적 성숙의 여정입니다.

이제 다섯번째 원리로 넘어가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다섯번째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주제는 오랜 시간 나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지만, 이번 시간에는 핵심만 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이 핵심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참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하나 된 유기적인 존재입니다. 예수님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흐름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8절은 열매 맺음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열매 맺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성장은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곧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서 실제적인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 우리 안의 죄를 다루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열매 맺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열매가 거의 없다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겁니다. 저는 ‘열매가 전혀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열매가 있는 사람’, ‘열매가 적은 사람’, ‘열매가 많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딘가에 말라붙은 포도 몇 송이쯤은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걸릴지라도 열매가 반드시 있습니다.

저희 집 뒷마당에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그 복숭아나무가 엄청난 결실을 맺었습니다.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시입니다. 말 그대로 온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많은 복숭아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작년만 해도 쪼그라들고 보잘것없는 복숭아 하나를 간신히 찾아낼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는 달려 있어서 적어도 그 나무가 사과나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비슷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무언가를 간신히 찾아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열매를 많이 맺는 삶입니다. 그리고 신자로서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바로 열매 맺는 삶, 열매를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삶입니다.

이처럼 열매를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열매가 바로 인격이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삶에 아무런 열매도 없다면, 무엇을 보고 믿겠습니까? 사과가 하나도 없는 나무를 보고 누가 사과나무라고 하겠습니까? 복숭아가 열리지 않는 나무를 보고 어떻게 복숭아나무라고 하겠습니까? 열매가 없다면 여러분이 어떤 나무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이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이 세상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을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로마서 2장 24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소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원래 이스라엘은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통로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을 살아간 겁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이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는 하나님의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열매, 우리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통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면, 세상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때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진액이 흘러와 가지인 우리의 삶 속에서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맺히고, 다른 사람에게 복이 흘러가는 통로가 될 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드러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9장 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정말 당연한 질문입니다. 포도를 심었으면 그 열매를 먹으려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자신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는 존재로 만드신 이유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목사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 ‘열매’가 도대체 뭔가요? 무슨 뜻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무슨 열매일까요? 빌립보서 1장 11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무슨 열매입니까? 의의 열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맺힐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우리 삶에서 열매란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의입니다.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의는 무엇입니까? 바로 옳은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겁니다. 의란 복잡한 개념이 아니라 그냥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잘못된 일을 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곧 눈에 보이는 의, 눈에 보이는 옳은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의로움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의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절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다시 말해,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자신의 선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능력의 팔이 드러나고, 은혜가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열매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바로 이겁니다. 결국 다시 돌아가는 결론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면 우리 삶에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뭔가 달라요.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영향을 줘요. 태도도 다르고 행동도 다릅니다. 영향력도 다릅니다. 당신을 통해 무언가 달라집니다. 당신의 삶은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르네요.” 이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열매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제가 임의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행동의 열매’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부르지는 않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럼 이 ‘행동의 열매’란 무엇일까요? 로마서 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왜 바울이 가고자 했습니까? 목적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는 "열매"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회심자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지역에서처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행동의 열매"란 다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이런 열매가 있습니까? 제 생각에 참된 신자는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생식, 곧 재생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계속 이어져야 할 과정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재생산해야 합니다. 재생산은 생명이 가진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열매란 그리스도께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다른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라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성경은 또 다른 형태의 열매도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4장 17절을 보겠습니다. 당시에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아주 관대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사랑이 담긴 헌금이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왜일까요?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의 선물이 귀한 이유는, 그 선물이 나에게 유익해서가 아니라 너희 삶에서 맺힌 열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큰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 있을 때 그냥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면, 이미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 큰 어려움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나눠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나누게 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나눔 자체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나눔이라는 행위, 그 자체가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에게 금전적인 선물을 주는 것도 열매입니다. 크게 어렵지 않아 보여도 말이죠. 그냥 주는 겁니다. 마음속 깊이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주는 겁니다. 저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줄 수 있지만, 사랑하면 주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이 사랑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주게 될 겁니다. 계속해서 주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시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시지 않습니다. 항상 그 이상을 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에베소서는 하나님은 “그의 풍성함을 따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의 풍성함에서”가 아니라 “그의 풍성함을 따라” 주신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백만장자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찾아와서 “돈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봅시다. 제가 “자, 좋습니다. 저는 돈이 많으니 여기 만원 드릴게요. 잘 사용하세요”라고 말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 잠깐만요. 그건 당신의 풍성함을 따라 준 게 아니라 조금 떼어준 거잖아요” 이렇게 말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천만 원이나, 혹은 1억을 준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의 풍성함을 따라 주셨군요.” 바로 이것이 “풍성함을 따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주십니다. “조금씩 떼내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함을 따라”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참된 나눔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음이 여러분의 삶에서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열매는 히브리서 13장 15절에 나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열매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따라서 열매란 무엇입니까?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또 골로새서 1장 10절을 보십시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이제 이 말씀이 얼마나 포괄적인지 아시겠습니까? 어떤 선한 행위이든지 모두 열매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 누군가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 혹은 어떤 선한 일을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것들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핵심은 이겁니다.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자라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삶에 그 어떤 실질적인 열매도 없고, 사역의 열매가 드러나지도 않고, 뭔가 눈에 보이는 변화나 결실이 없다면, 인생에 탐스러운 포도송이 같은 열매가 맺히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라고 있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있지 아닙니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지금 열매를 맺지 않고 있는 겁니다. 영적 성장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납니다.

제가 아까 열매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첫째는 ‘행동의 열매’입니다. 어떤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선한 일을 행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행동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열매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저는 ‘태도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이 ‘태도의 열매’가 나옵니다.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행동을 말하지 않습니다. 태도를 말합니다. 사랑은 태도입니다. 기쁨도 태도입니다. 평안,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모든 것이 다 태도입니다.

하지만 잘 보십시오. 한편에는 행동의 열매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태도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만일 태도의 열매 없이 행동의 열매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억지로 행동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은 하고 다니지만 태도는 엉망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단지 의무감이나 책임감, 또는 두려움 때문에 하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헌금을 하긴 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마지못해 합니다.

또 겉보기에 좋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릅니다. 속으로는 옳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행동은 올바르게 하지만 태도는 썩은 겁니다. 반면에 태도가 올바르면 자연스럽게 행동도 올바르게 합니다. 이것이 참된 영성입니다. 태도의 열매 없이 행동의 열매만 맺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태도의 열매는 행동의 열매를 낳습니다. 참된 태도가 맺는 참된 행동이 참된 영성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영적인 개념입니다. 바로 성령님께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님께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절제라는 태도를 우리 안에 맺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반드시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겉으로는 올바른 행동을 하면서도 마음에는 그런 태도가 전혀 없는 거짓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와서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놀라운 일을 많이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올바른 태도와 행동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태도’가 정말 중요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바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으로 가득한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이 그 해답을 보여줍니다.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삶의 통제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리는 문제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의 삶을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때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올바른 태도가 우리 존재 전체를 관통하며 삶의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열매 맺는 삶을 말합니다.

이제 여섯번째 원리로 넘어가겠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위한 성장의 자물쇠를 여는 또 하나의 열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 점을 잠시 언급했습니다. 저는 찬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자라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찬양은 우리를 성장의 흐름 안으로 이끌어 줍니다. 여기 아주 단순하고도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50편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찬양하십시오. 찬양의 제사를 드리십시오.

또 하나의 아주 단순하고 실천적인 원리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나 웅장한 오르간 소리가 아닙니다. 그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겸손히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겸손히 드리는 찬양이 우리를 성장의 길 위에 세웁니다. 저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도리어 자기 자신을 찬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겸손으로써 찬양을 쏟아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위한 영적인 방식을 마련하실 때, 찬양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아예 찬송가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시편이라고 부르는 책 말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부르거나 혹은 낭송하던 위대한 찬양의 노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들이 널리 알려져서 반복해서 낭송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86편 9절입니다.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참으로 위대한 고백입니다.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 86편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시편 92편 앞부분, 1절과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아주 명료합니다. 아침과 저녁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선하다고 합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찬양으로 맞이하는 것이죠.

느헤미야 8장 6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존경심, 겸손한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제 '찬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해봅시다. “자, 제가 셋을 세면 다 함께 주님을 찬양합시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어떤 사람은 “주님을 찬양합니다”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을 흔들면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중에 무엇이 정답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찬양해야 할까요? 찬양한다는 건 단지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걸까요? 요즘은 이 말조차도 하나의 형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P.T.L.’이라는 줄임말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조차 간단하게 줄여서 빨리 끝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Praise the Lord” 이렇게 말하는 것 조차도 말하기가 귀찮아서 ‘P.T.L.’로 줄여버리는 현실입니다.

찬양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가끔 입으로 툭 던지는 어떤 공식 같은 말, 기독교적인 상투어 같은 걸까요?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참된 찬양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합니다. 첫째, 참된 찬양은 하나님의 속성을 되새기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 표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양이란 하나님의 성품, 그러니까 하나님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참된 찬양은 하나님의 속성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구약은 잘 안 봐요. 신약이 중요하잖아요. 신약 시대에 살고 있고, 신비가 드러난 시대니까요. 구약은 좀 시대에 뒤처졌잖아요.” 하지만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구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구약이 하나님의 성품을 너무나도 풍성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박국은 하박국 1장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찬양하고,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찬양하고, 영원하시다는 사실을 찬양하고,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찬양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큰 문제를 풀어나갑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민족인 갈대아 사람들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의 백성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여, 부흥을 허락해 주십시오.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나는 그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것도 더 악한 자들을 통해 그렇게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박국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혼란 가운데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약속을 어기지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역사에 휘둘리지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갈대아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으신다 것.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되새기며 찬양하다가 결국 이렇게 고백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님,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이런 표현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마음은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다윗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도시를 벗어나서 사막 한가운데 덤불 속을 헤매다 숨이 가쁘게 차오릅니다. 결국 어떤 덤불 아래 몸을 숨긴 채 벌벌 떨고 있는데, 누군가 묻습니다. "다윗 왕이여,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다윗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그리고는 다윗이 덤불에서 일어섭니다. 압살롬이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 뒤쫓고 있는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다시 정의하자 그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일어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되새기며 찬양을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덕을 높이는 동시에 연약한 우리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찬양 가운데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감당하시기에 충분히 강한 분이셨습니다.

이것은 제 삶에서도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삶에는 늘 이런저런 사소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건 정말 큰일이야.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모든 게 너무 부족해. 하나님, 이게 꼭 필요한데 돈도 없고요…”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잠시 멈추고 이렇게 말해보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역사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온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결코 부족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성품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열려 있고,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마음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되새기고 선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요소입니다.

두번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되새기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행하신 일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찬양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우리가 반복해서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분이십니다. 요단강을 마르게 하신 분이십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신 분이십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원수들을 멸하신 분이시며,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신 분이십니다.” 이처럼 계속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박국이 3장에서 했던 일이 바로 이겁니다. 하박국은 3장에서 자신의 문제를 다시 바라보며 재정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3장 3절부터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주님이 이것을 행하셨고, 또 저것도 행하셨고, 이것도 하셨고, 저것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16절에 이르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참고로 무화과나무, 감람나무는 잘 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감람나무를 베어내면 기름기가 너무 많아서 40년을 묵혀야 비로소 조각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오래 갑니다. 잘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나무들이 다 쓰러지고, 언덕 위의 짐승들이 다 죽고, 자연이 온통 망가지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이 역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 알 수 있도록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찬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닥쳐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아니면 어떤 위기 상황이든 간에 말입니다. “주님, 제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라고 하나님께 물으실 때에, 그럴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정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말씀 한마디로 별들과 행성들을 우주에 펼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작은 지구를 만드시고, 혼돈 가운데 아름다운 땅을 세우시고 바다와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셨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타락했을 때, 주님은 곧바로 그를 구속하시기 위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민족을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그 민족을 역사 가운데 보존하셨습니다. 주님은 놀라운 일을 거듭해서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손가락으로 산 옆면에 율법을 새기셨고, 주님의 백성이 애굽을 빠져나오게 하셨으며, 바로의 군대를 물속에 빠뜨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주님, 저에게 지금 작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그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삶 속에서 끊임없이 씨름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우리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찬양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단지 그 자체로도 하나님에 대해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되새기고 고백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며, 셋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찬양의 중심에는 언제나 ‘감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감사는 찬양의 본질적인 표현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능력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멀리서 예수님께 부르짖은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가 병이 나은 후에 사회로 돌아오려면 먼저 제사장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고, 제사장이 그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선언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매우 전염성이 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순종해서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올랐을 때, 아직 병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에, 그 믿음의 걸음 속에서 열 명 모두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자, 여기서 핵심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혼혈로 여김받고 따돌림받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열 명 중 오직 이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광을 돌렸습니까? 예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써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에 감사합니다. 행하신 일에 감사합니다. 병을 고치시는 능력에 감사합니다. 그 능력을 제게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하나님의 속성과 그 역사 모두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찬양이란 단지 나와 상관없는 사건들에 대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삶과 관련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고, 이런 일을 제 삶에 직접 행하셨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찬양이란 그렇게 우리의 삶과 깊이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저는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이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열 명 모두 육체적으로는 고침을 받았지만,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곧, 돌아와 감사한 그 한 사람, 오직 그 사람만이 진정으로 구속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장면은 찬양과 감사가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참된 믿음과 구원의 열매가 될 수 있음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역사가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우리가 깨닫고 표현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내 삶에 임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감사하고,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그 능력에 감사를 표현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 덕분이며, 따라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에가 고치를 지을 때 자기 몸을 그 안에 숨기고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무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다면 우리 자신은 숨기고 그 모든 칭찬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 덕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였음을 인정하고 감사로 응답해야 합니다.

자, 지금까지 무엇을 배웠습니까? 영적 성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이 찬양으로 가득할 때 자랍니다. 우리 삶에 열매가 맺히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때 자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자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갈 때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기까지 변화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집니다. 이 주제로 더 나눌 말씀이 많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영적 성장에 필요한 이 기본적이고 실제적인 진리들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열쇠들을 굳게 붙잡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두신 복의 창고를 열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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