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영적 성장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실, 믿는 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성숙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적 유아기 상태에 머무른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실제로 그런 일이 아주 많습니다. 교회 안에 평생토록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똑같은 문제와 싸우고,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다가, 결국 과거와 똑같이 패배하고 맙니다. 강건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을 공급받는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 사다리에 전혀 오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큰 승리도, 하나님께 쓰임받는 유익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성장의 지체 또는 정체라는 비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들을 함께 나누면서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궁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죠. 베드로후서 3장 18절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베드로전서 2장 2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성장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도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도록” 성숙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계속해서 성숙해져야 합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달라야 하고, 내일은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져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닮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자라지 못한 하루를 보냈다면, 그날은 그냥 잃어버린 날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매일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적 성장의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방법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쇠, 곧 영적 성장의 만능 열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성장합니다. 이미 지난 4주 동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곧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나타냄으로써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상태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남은 선택지는 단 두 가지 뿐입니다. 자신을 위한 영광 아니면 사탄을 위한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둘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를 성장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만 성장합니다. 영적 성장의 핵심 구절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여기서 말하는 ‘수건을 벗은 얼굴’은 영적인 시야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주의 영광을 우리에게 비춰줍니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점점 더 변화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영광을 바라보며 한 단계 한 단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점은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성장하려면 분명한 초점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 속에 온전히 내어줄 때, 그때부터 성장이 시작됩니다.
좀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말씀드리자면,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빌립보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점점 자라납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아비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드리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렸던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이 땅에서 복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저는 늘 흥미롭게 느낍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라는 말씀이 있죠? 이사야에는 “들짐승도 나를 존경할 것은”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들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만큼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끊임없이 거부한다는 점,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실제로 로마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바로 인간의 죄성이라는 끔찍한 유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영적으로 자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 모시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할 때, 그 순간이 바로 영적 성장이 시작되는 탄생의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이후에는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두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조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제부터는 삶의 모든 영역, 곧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구절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고 마시는 것은 가장 일상적인 일이지만, 바로 이런 작고 단순한 일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자세로 살아간다면, 성령의 능력이 실제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함으로써 여러분을 성숙의 길로 이끌어가시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우리가 성장하게 되는 세 번째 요소는 바로 죄 고백입니다. 여호수아 7장 19절에서는 “네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로마서 4장 20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나누었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다섯번째 방법은 바로 ‘열매 맺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시편 50편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최소한 여섯 가지 실제적인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영역에 헌신할 때, 우리는 점점 성숙해 갑니다.
영적 성장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번쩍 하고 신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숨에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비밀의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삶 속에서 꾸준하고 지속적인 속도로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 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같은 진리를 말하는 서로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성령님께 순복하며, 말씀 앞에 겸손하게 엎드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을 신뢰할 때,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때, 이 모든 영역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저녁에 함께 살펴보고 싶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일곱번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함께 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이전에도 잠깐 언급한 바가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깊이 강조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순종’이라는 주제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죠.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바로 ‘순종’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순종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저는 순종의 정신, 순종의 심장박동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자아이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어떤 여자 아이가 서 있었는데, 아버지가 “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계속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앉으라고 했잖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는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아버지가 “앉지 않으면 매 맞을 거야” 이렇게 얘기하자, 아이는 마지못해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앉긴 했지만 속으로는 아직도 서 있어요.”
우리가 말하는 순종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정반대인, 그런 순종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에 억눌린 채 마지못해 따르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순종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다시 만나서 사명을 회복시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5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인 ‘사랑’을 중심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15절부터 보겠습니다.
이 장면은 “그들이 조반을 먹은 후에”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바닷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다가가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헬라어로 사랑을 뜻하는 단어 중에서 가장 숭고한 의미를 지닌 아가파오(agapao)를 사용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헌신적인 사랑, 전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베드로야, 너는 진정으로, 완전히, 네 모든 마음을 다해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신 겁니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표현에서 “이 사람들”, 영어로는 “these”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해석이 갈립니다. 헬라어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물도 될 수 있고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물과 배, 그러니까 베드로가 사랑했던 어부로서의 삶을 뜻한다고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제자들을 뜻한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과거 발언, 그러니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했던 베드로의 과거 발언을 기억나게 하시면서 “정말 그들의 사랑보다 너의 사랑이 더 크냐?”라고 물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깊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냐고 물으신 겁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는 아가파오(agapao)가 아니라 필레오(phileo)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친밀하고 우정 어린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주님, 제가 주님을 정말 좋아합니다” 정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진실로 정말로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감히 “예, 제가 주님을 진실로 정말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베드로는 아직 그러한 순종의 증거를 보이지 못했기에, 그 깊은 사랑을 감히 고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연인에게 이런 편지를 쓴 남성 같다고나 할까요. “사막을 건너서라도 당신 곁에 가겠소. 영국 해협이라도 헤엄쳐 건너겠소. 오늘 밤에 비만 안 온다면 말이오.” 베드로가 딱 그랬습니다. 불순종의 현장에서 들켜버린 베드로는 감히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정말, 진실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배짱도, 아니, 염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주님을 좋아합니다.”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뒷문으로 돌아 들어가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그 정도는 받아주실 거라고 기대했던 거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역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수준을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번째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또다시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치라.” 그리고 세번째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좋아하느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썼던 그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좋아하느냐?” 그 말이 베드로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세번씩이나 물으신 것이 괴로웠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질문에서는 자신이 말한 그 ‘좋아한다’는 감정마저 의심하신 것이 마음아팠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좋아하는 것도 아십니다.”
요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의 사랑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아가파오(agapao)’의 사랑, 즉 최상의 사랑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필레오(phileo)’, 진심 어린 우정과 애정의 사랑이 있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셔서 그 사랑을 자라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역을 맡기기를 원하셨지만,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순종할 만큼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이 구절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적이 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겠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좋다, 베드로야.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알려주겠다. 너는 나를 위해 죽게 될 것이다. 그래, 베드로야. 네가 계속해서 내 일을 감당하고, 내 양들을 먹이고, 어린 양들을 돌보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야.” 그리고 예수님은 19절 마지막에 단 한 마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진정한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인생이 술술 풀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훨씬 쉽게 따라갔을 겁니다. 건강, 부, 행복, 이단들이 흔히 약속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도 사람들에게 똑같은 걸 약속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성공하고,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런 약속을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네 생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은 이런 의미입니다. “좋습니다. 따르겠습니다.”
19절과 20절 사이를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후에 일어나서 걸어가셨고, 베드로도 곧 따라 나섰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하는 길이었지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베드로가 길을 걷다 말고 돌아봅니다. 참지 못하고 뒤를 힐끗 돌아본 것이죠. 그리고 그가 본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곧 요한이었습니다.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묻던 자”입니다.
베드로가 돌아보니 요한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따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항상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다시 말해, “저는 죽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무르기를 내가 원한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이 살아 있든 말든, 그것은 베드로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단호한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 때문에 소문이 한 가지 퍼집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안 죽는대.” 이런 소문이 널리 퍼지자, 요한은 이 장의 마지막 세 구절에서 그 오해를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은 그렇게 끝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시작됩니다. 그 첫 장면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설교를 하자,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 성전에 들어가서 앉은뱅이를 고치니까 못 걷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하나님을 찬송하며 성전 안을 뛰어다닙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 서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 말을 단호하게 전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사도행전 13장까지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가장 빛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후 두 편의 아름다운 편지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벅찬 기쁨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이제 곧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만일 제가 순교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간다면, 아마 매번 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릴 겁니다. 언젠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면, 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겁니다. 계속되는 불안 속에서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반드시 내 사역을 마쳐야 한다.” 참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을 전하는 것도, 이 편지를 쓰는 것도, 내가 죽는 그날까지 그리스도를 섬기고 싶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런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기꺼이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영적 성숙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비록 어려운 일일지라도 기꺼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영적 성장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고, 그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주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과 계속 충돌시키고, 자신의 조건에 맞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내딛지 않으려 한다면, 자신의 영적 성장을 스스로 막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마다, 물리적으로 비유해 보자면, 하나님께 순종할 때마다 키가 1센티미터씩 자랍니다. 반대로 불순종할 때마다 우리의 성장은 멈추고 지체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점점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랍니다.
이제 여덟번째로, 아주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영적 성장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물론 기도에 관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등장하죠.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다루어야 할 다른 주제들이 있으니까 이 본문 하나에만 집중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부터 14절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잠깐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혹시 못 알아들었을까봐 14절에서 한 번 더 반복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 위해 기도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약속하셨기 때문에 응답하셔야만 한다.” 이런 말들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짜 이유는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나옵니다. 목적을 나타내는 헬라어 “히나(hina)”가 사용된 문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주저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거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과 성품을 드러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일하실 기회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기도는 영적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여러분의 믿음이 자랍니다. 그리고 믿음은 영적 성장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정말 중요한 진리입니다.
이제 13절 말씀을 다시 한번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 크게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떠날 것이라고,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대신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정말로 떠나실 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 몇 절 뒤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하셨고,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또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어디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막막했던 겁니다. 세금이 필요할 때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꺼내주셨습니다. 배가 고플 때는 떡과 물고기로 먹이셨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을 때는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셨고, 함께 갈릴리 언덕, 겟세마네 동산에서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가 되어 주셨고, 영적인 도움, 신학적인 도움, 경제적인 도움을 주시는 원천이셨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보장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니, 제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떠나도 너희는 여전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겠다. 너희 곁에 없더라도 말이다.”
이건 정말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세요,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이 말은 단순한 공식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의 마지막에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렇게 말해야만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기도를 마치고 그냥 “아멘” 이렇게 하면, “어휴, 그 기도는 하나님께 안 올라갔네.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 안했잖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그 말을 붙이면 하나님이 어떻게든 응답하셔야만 하는 것처럼 여기는 거죠.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기도는 공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하지 않으면 기도가 천장을 넘지 못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란 무엇을 뜻할까요?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성, 뜻, 성품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존재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그리스도의 전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네가 내 뜻에 맞게, 나의 존재와 일치하게 구하면 내가 그것을 이루겠다.” 다시 말해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은 “내 뜻에 따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기도 생활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는 기도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자라나길 원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믿음이 자라나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끝에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렇게 덧붙이기보다는 이렇게 말해보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기에 기도합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겁니다.
이제 여러분도 다음번에 기도할 때는 이런 부분을 좀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저 새 차가 하나 갖고 싶습니다. 지금 가진 차는 마음에 안 들어요. 주님의 뜻이라고 믿기에 기도합니다…” 아니죠, 아마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또는 “하나님, 저희 남편 말인데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혹시 다른 남편을 주실 순 없나요?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기에…” 아니요, 이 기도도 응답이 안 됩니다. 또, “하나님, 저희 아이가 넷인데요, 셋은 참 잘해요. 근데 이 아이는 도대체 누구 자식인가 싶을 정도예요. 혹시 어떻게 안 될까요? 주님의 뜻이라고 믿기에…” 아, 이것도 아니죠. 이 기도도 응답이 안 됩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한 아이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엄마를 축복해 주세요. 아빠도 축복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 새 자전거 주세요!” 그랬더니 엄마가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은 귀가 밝으시단다.” 그러자 아이가 대답합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옆방에 계신 할머니 귀는 안 좋잖아요.”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속이려 하고, 하나님의 손을 억지로 붙잡아 끌어내려고 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의미를 왜곡해서 우리 뜻대로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겁니다. 하지만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기도를 제한합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이 형제가 이 상황 속에서 영적으로 자라게 해 주시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해 주시며, 이 고난 가운데서도 그 마음이 주님으로 인해 풍성해지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믿기에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뜻에 일치하는 기도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뒤로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외국어를 말하거나 어떤 황홀경의 방언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곧 성령의 뜻에 일치하게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믿는 자의 삶 속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실제로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늘 보좌에 계신 아버지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통하시면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기도는 언제나 응답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곧 나의 기도를 성령의 뜻, 곧 그리스도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기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이것은 책임 회피가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를 놓치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그 일에 동참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을 겁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 모임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있었어요. 제가 오랫동안 예수님을 전했던 한 자매가 있는데, 수년 동안 그분을 위해 기도해왔어요. 그런데 이번주에 저희 집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그 자매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너무 기뻐요. 이제 그 자매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오늘 밤 이 자리에 함께 와 있어요. 그동안 이 자매를 위해서 몇 달간 함께 기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크게 감동해서 기뻐하며 말할 겁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고,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겠지요. 누가요? 바로 그 자매를 위해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무덤덤하게 반응할 겁니다.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함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손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가 함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도 함께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프랭크라는 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데, 무엇을 놓고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도제목 세 가지만 주세요"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세 가지 기도제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프랭크가 수첩을 꺼내서, 첫번째 제목을 적고, 두번째, 세번째도 하나씩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하던 일을 계속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참 신기하네. 저렇게 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이렇게 제가 생각했죠. 그런데 한 2주쯤 지나고 나서 프랭크가 저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 목사님, 그 세 가지 기도제목 제가 한번 확인하고 싶어요.” 그리고는 적어둔 수첩을 넘기면서 “첫번째는 어떻게 되셨죠? 두번째는요? 세번째는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설명해 주는 걸 들으면서 다른 칸에 하나하나 다 적더라고요. 기도 제목을 적는 칸이 있고 응답을 적는 칸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프랭크가 디트로이트로 이사 가기 전에 제가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열세 권을 가득 채우고 지금은 열 네번째 수첩을 쓰고 있다는 것, 그걸 제가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아시겠죠? 프랭크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본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프랭크, 정말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믿으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겁니다. “어떤 응답을 보고 싶으세요? 제가 항목별로 다 정리해 뒀거든요. 이쪽에는 구원 받은 사람들 목록이 있고요, 또 이쪽에는…” 프랭크는결국 이런 일을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속에서 능력을 드러내시도록 기도로써 동참한 것이죠.
이게 바로 기도의 핵심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로 내가 원하는 걸 얻게 된다면 그건 덤일 뿐입니다. 진짜 중요한 건, 나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를 그 자리로 데려갑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기도 생활에 더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여러분의 영적 성장은 훨씬 더 빨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여러분의 확신이 커질수록 영적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홉번째로, 영적 성장의 또 하나의 핵심 요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홉 번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사실 이 주제만 가지고도 한참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항상 웃습니다. 바울이 “끝으로”라고 말한 다음에 18절이나 더 이어가거든요. 전형적인 설교자의 모습이죠.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무엇을 위해 기도하라는 걸까요?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주의 말씀”, 주의 말씀은 실제로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신약에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동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23절부터 24절에서는 사도 바울의 회심과 그 이후의 사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2절부터 읽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다소 사람 사울이, 이제는 그 믿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교회들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4절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그 순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말씀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고, 존재를 새롭게 하는 말씀이고, 생명을 붙들어주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이라고 선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리고 그 다음 절에는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말씀으로써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건 정말 기본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내용이기도 해서 너무 반복하고 싶진 않지만,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음식 없이 육체가 자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매일 일어나야 하는 과정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아, 정말 좋은 말씀이었어요. 이 말씀이 다음 주까지 저를 지탱해주면 좋겠네요”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일주일 내내 그 말씀 하나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마치 주일에 저녁 식사를 하고 “주님, 오늘 정말 근사한 주일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 음식으로 다음 주 주일까지 저를 배부르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날 밤에 또 먹어야 됩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계속 먹어야 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말씀을 먹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말씀을 전한 때 온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누는 그 과정 속에서 말씀이 우리 삶에 더욱 깊이 새겨집니다. 이런 말이 있죠.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이 남는다.” 저도 가르치면서 경험했습니다. 제가 가르친 내용은 저에게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반면에 읽기만 하고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은 내용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선포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말씀을 전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복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담지 않고, 입술 위에 언제나 그 말씀이 머물러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항상 말씀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워서 입을 열 때마다 말씀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트럼불(Trumbull)은 정말 훌륭한 전도자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한 가지 서원을 드렸는데 이런 서원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신다면,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반드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트럼불은 평생 이 서원을 지켰습니다. 입을 열면 언제나 예수님에 대한 대화가 흘러나왔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예수님으로 채웠고, 그 결과 입을 열면 언제나 그 내용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데 아주 많은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한밤중에 누가 저를 쿡 찌르면 아마 무의식적으로 성경 구절을 외우거나 설교를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꿈에서도 영적인 것들을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한 꿈을 꾸고, 교회에 대한 꿈을 꿉니다. 저의 사고의 맥락이 늘 그런 식입니다.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다른 자리로 보내셨다면, 아마 이렇게 온종일 성경을 연구하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자, 그러니까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을 채우는 일,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사명이 제게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저는 매번 그 말씀을 제 안에 깊이 새기고, 또 새기고, 또 새겨야만 합니다. 원고를 작성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말씀이 제 안을 관통해야 합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은 이미 저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삶을 통해,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발람의 나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을 것입니다. 믿지 않았던 고레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을 것입니다. 악하고 부패한 대제사장 가야바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말했고 그것이 성취되었다면, 하나님은 거기서도 영광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 말씀이 신자의 삶을 통해 흘러나올 때 훨씬 더 큰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이 말의 핵심은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입으로 말하는 것, 이것이 영적 성장의 열쇠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이와 관련한 또 다른 중요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잘 보십시오. 영적 성숙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온전하게 되는 것, 성숙하게 되는 것,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모든 성경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절이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이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가장 깊이 뿌리내리는 때가 언제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나누고, 선포할 때입니다. 그럴 때 말씀이 진짜 우리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는 특별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여기서 “옳게 분별하라”는 말은 “곧게 자르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천막, 그러니까 텐트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염소 가죽을 사용했죠. 그런데 염소 한 마리로는 텐트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텐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큰 ‘슈퍼 염소’ 같은 건 없었습니다. 염소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여러 조각을 이어 붙여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각 조각을 정확하게 자르지 않으면 전체적으로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각 부분을 정확하게 다루지 않으면 전체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이 위대한 진리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선포할 때, 데살로니가후서 3장 1절에서처럼 “주의 말씀이 퍼져나가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들으려는 사람에게도,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도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설교자가 되기로 결심을 했는데, 몇몇 분들이 그 결심을 듣고 저를 돕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밤 7시에 저를 버스 터미널에 데려다 주시고는 9시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시면서 그때까지 거기서 설교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가슴에 품고, 음악도 없고, 아무도 없고, 그냥 혼자 서서 그 자리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그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기만 한 게 아니라 솔직히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제 앞을 지나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렇게 어린데 벌써 정신줄을 놓다니… 열 여덟살짜리 미치광이구먼.’
그런데도 저는 그 자리에 서서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곤 했죠. 하지만 여러분, 그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숙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의견을 전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책을 소개하는 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로는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부르심은 바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제 방식대로 뭔가를 덧붙이거나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그냥 종업원일 뿐입니다. 그렇죠? 저는 종업원입니다. 좀 멋지게 말하면 '영광스럽게 된 주방 보조' 정도입니다. 그게 바로 ‘집사’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섬기는 자라는 뜻이죠. 저는 그냥 조금 영광스럽게 된 주방 보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음식을 준비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맥아더야, 이걸 식탁까지 제대로 가져가라. 망치지 말고.” 그게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저의 창의성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전달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새로운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도한 그대로 전해라.”
이것이 바로 사역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추고,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정의하는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유일합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목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살아갈수록 저의 부족함과 실패를 더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생활이 시간이 갈수록 쉬워지지 않나요?” 아니죠, 결코 쉬워지지 않습니다.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이해할수록, 저의 한계가 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도달했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오직 그날을 고대합니다. 주님을 뵐 그날, 주님을 직접 만나뵈는 그때에 우리는 마침내 주님과 같은 성품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을 더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번째 방법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5절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깊이 염려하고 진심으로 품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사실 꽤 강하게 말했습니다. 최대한 모든 방식으로 신랄하게 책망하고, 때로는 비꼬기도 하고, ‘매를 가지고 가겠다’고까지 하고, 아주 엄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는 자신이 왜 그렇게 강하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설명합니다. 4장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해 했던 모든 사역, 내가 겪은 모든 고난들, 그러니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8절입니다, “박해를 받고”, 9절입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10절입니다, 즉 사역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것은,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철저히 다른 사람의 필요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너희를 위함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바로 구원의 은혜, 대속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왜 적대적인 도시에 굳이 들어갑니까? 왜 박해받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합니까? 왜 이런 온갖 고난을 감당합니까? 그냥 뒷골목으로 몰래 들어가서 전도지나 나눠주고 조용히 빠져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약속도 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왜 모든 사람과 정면으로 부딪칩니까? 왜 자꾸 감옥에 갇힙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모든 일은 사람들이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의 감사로.” 다시 말해, 바울은 감사의 찬양을 부르는 성가대에 또 하나의 목소리를 더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한 사람을 더하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위대한 방식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두 배가 됩니다. 제가 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또 누군가를 주님께 인도한다면,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데려올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것 또한 영적 성장의 한 부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를 하나 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들을 단순한 지식으로만 여기지 않고, 정말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영적 성장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예요. 저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들의 몫이죠.” 저도 예전에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를 읽었습니다. 또 하루에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 무릎 꿇고 기도를 해서 마룻바닥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는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읽었습니다. 강단에서 머리를 성경에 파묻고는 쏟아지는 눈물로 성경과 강단을 적셨던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 같은 사람의 이야기도 읽었습니다.
하나님과 너무나 깊이 동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읽을 때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차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또 E.M. 바운즈(E.M. Bounds)가 쓴 <기도의 능력(Power Through Prayer)>이라는 책도 읽었습니다. 기도에 온 삶을 쏟아부은 사람이죠. 그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아, 정말 소용이 없구나. 난 절대로 저 수준까지는 못 가겠구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을 다르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은 어디 먼 곳에 있는 신비한 사람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영적 성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믿고, 죄를 고백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열매를 맺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성숙으로 이어지는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이 단순한 기본들에 집중할수록,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를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역사를 더 빨리 볼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 귀한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단순하고 기본적인 원칙들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게 하시고, 사도 바울처럼 마음 깊이 예수님을 더 깊이 알기 원하며, 예수님을 더욱 닮기를 갈망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드러내며 살아가게 하시고, 모든 일에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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