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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고린도전서 16장을 보겠습니다. 앞으로 몇 주면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 장에 담긴 바울의 권면을 살펴보겠습니다. 16장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부분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두번째 부분, 그러니까 지난 2주 동안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부분에서는 바울 자신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주님의 일에 어떻게 헌신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부분은 고린도전서 16장 13절과 14절, 딱 두 절입니다. 바울은 이 짧은 구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명령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15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교회 안의 여러 인물들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13절과 14절에 집중하겠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아주 짧은 본문이지만,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단 두 절이지만 강력한 진리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 담긴 다섯 가지 명령, ‘능력 있는 삶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는 다섯 가지 진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신약에서 바울이 편지를 보낸 여러 교회 가운데 고린도 교회만큼 문제가 심각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만큼 죄 가운데 빠져 있었던 교회도 없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가장 크게 벗어나 있었습니다. 상황이 정말로 심각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고린도 교회를 두고 ‘형편없는 교회’라고 말한 적이 있죠. 무슨 문제가 있다 하면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극심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만큼 문제가 아주 많았습니다. 신약의 모든 교회 중에서 고린도 교회가 가장 심각한 상태였던 만큼, 가장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이 책망은 사랑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죄가 드러날 때 반드시 권면하고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꼭 기억하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를 합치면, 29장이나 됩니다. 한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서 성경에 무려 29장이 쓰였다는 거죠. 장 수만 놓고 보면 신약에서 가장 깁니다. 가장 가까운 것이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이지만, 그래도 28장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내용이 기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라면 성경의 29장에 걸쳐서 저에 대한 책망을 듣느니 차라리 성경에 나오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고린도전서는 책망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로움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망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길이 옳다. 이 길로 걸어가라.” 고린도전서 전체의 핵심을 보여주는 말씀이 4장 14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고린도전서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짓눌러 버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책으로써, 권하여 의로운 행동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는 사랑의 책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13장에 이르러서는 가장 깊고 아름답게 사랑을 정의하는 말씀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했지만, 그 책망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죄로부터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잘못된 행동과 교리를 바로잡기 위해서 열 네장에 걸쳐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16장 마지막 부분에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다룹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13절과 14절을 기록한 겁니다.

바울의 서신 마지막 부분을 보면 모든 내용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마치 편지 끝에 쓰는 추신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편지의 공식적인 결론이 15장 58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 말씀이 전체 편지 내용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추신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추신에는 먼저 연보, 그러니까 헌금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도 고린도 교회가 이 문제를 바울에게 질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편지 끝에 덧붙였습니다. 이어서 바울 자신이 어떻게 사역을 감당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더하고, 마지막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몇 가지 상황을 언급한 후에 문안 인사를 함으로써 마무리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바로 13절과 14절에 있는 명령입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다섯 개의 명령형 동사가 등장합니다. 선택이 아니고 명령입니다. 성령께서 믿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필수 사항이죠. 제목을 붙여 보자면 ‘능력 있는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다섯 가지 명령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바울의 생각을 제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이 다섯 가지 명령을 깊이 살펴보는 과정에서, 1장부터 15장까지 바울이 말한 모든 부정형 문장의 긍정형 명령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명령입니다. 바울은 15개 장에 걸쳐서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하지 마라, 이런 일 좀 하지 마라, 저런 일 좀 하지 마라, 이렇게 좀 하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이렇게 하라, 하라, 하라, 하라, 하라.” 반대로 표현이 되었죠.

바울은 마치 군대에서 훈련 교관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듯이 다섯 가지 군사적 명령을 제시합니다. “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행동하라,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실 고린도 교회가 이 다섯 가지 명령 만이라도 제대로 반응했더라면, 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은 기록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령들이 앞에서 지적된 모든 문제를 바로잡는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이 다섯 가지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원하시면 주보에 나와 있는 개요를 함께 보시면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이 다섯 가지 군사적 명령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첫번째 명령은 깨어 있으라입니다. 13절에 나오는 단어가 바로 ‘깨어라’입니다. 깨어라. 혹시 여러분이 아들 이름을 그레고리(Gregory)라고 지으셨다면, 사실상 ‘깨어 있는 자’ 이렇게 이름을 지은 셈입니다. 헬라어로 그레고레오(grēgoreō)는 ‘깨어 있다’, ‘경계하다’ 이런 뜻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잠자는 것의 반대 상태인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절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라고 하는데, 여기서 깨어 있다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같은 장 6절에서는 영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따라서 이 단어는 육체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말할 수도 있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바울이 지금 육체적으로 잠든 자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니잖아요. 영적으로 잠든 자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깨어라, 정신을 차리라.” 대부분의 사전에서 말하듯이 이 단어는 단순히 잠들지 않은 상태를 넘어서,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의식이 분명한 상태를 뜻합니다. 의도적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라는 명령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이 ‘깨어라’, ‘정신을 차리라’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22번이나 등장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반복해서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평가하고, 대적, 사탄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인식할 수 있도록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하거나 혼미한 상태로는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없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깨어있지 않았습니다. 늘 혼미했습니다. 먼저,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혼미한 상태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주님의 만찬, 성찬식을 위해 모였지만 실제로는 술에 취한 상태로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술에 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항상 혼미할 수밖에 없었죠.

우리가 술에 취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술에 취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더 이상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공격도 보이지 않습니다. 유혹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필요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깨어 있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은 육체적으로 술에 취해 혼미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핵심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으로도 혼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신이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치명적인 상태이죠. 사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보면,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영적 원리를 알지 못하는 교회에서는 성도들 거의 대부분이 이런 혼미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전혀 모릅니다. 아주 간단한 영적 진리를 말해줘도 “정말입니까?” 이렇게 하면서 마치 방금 하늘에서 떨어진 새로운 내용을 듣는 것처럼 그렇게 반응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다섯 가지 명령 중 첫번째인 ‘깨어 있으라’와 관련해서,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반대의 모습을 보였는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다섯 명령이 어떻게 문제를 반대로 뒤집어서 해답이 되는지를 보여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자,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깨어 있었습니까? 답은 ‘아니오’입니다. 잠시 성경을 찾지 말고 그냥 들어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5장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제발 좀 생각해 보라. 죄를 그대로 공동체 안에 두면 결국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모르느냐.”

5장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다시 말해 “성도의 교제에 유익한 사람인지 해로운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하느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6장 2절에서는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책망합니다. 바울은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룩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너희 가운데 죄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심판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렇다면 이 땅의 문제 정도는 스스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6장 3절에서는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부르심을 받았는지 모르느냐? 그렇다면 너희끼리의 문제 정도는 해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6장 5절에서는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묻습니다. 6장 9절에서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6장 15절에서는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고, 6장 16절에서는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6장 19절에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면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 혼미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8장 9절에서 바울은 “조심하라, 깨어 있으라”라고 합니다. 10장 12절에서도 “조심하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혼미했습니다.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6장 12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늘 혼미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얽매이고 말았습니다. 온갖 거짓 인간 철학, 잘못된 인간적 행동들, 그 모든 것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 참 불쌍하네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이렇게 말한 겁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곧 “깨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신자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지한 채로는 절대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로서 살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잘 몰라요”라는 이런 태도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할 때 주어지는 기쁨과 그 순종 속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입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깨어 있어야 하는지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을 들으면 이런 질문이 생길 겁니다. “존 목사님, 깨어서 뭘 보라는 걸까요? 저는 정말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데,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첫째입니다. 성경은 사탄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누구를 삼킵니까? 깨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서 사탄의 교묘하고 간사한 속임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탄의 일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마치 세 가지 전술밖에 없는 미식축구 감독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방어하기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닙니다. 세 가지 전술이 무엇일까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무엇입니까?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이 세 가지 방식 중의 하나로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전략을 배워야 합니다. 사탄의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사탄은 사자 우리에 놀러 가서는 차에서 내려서 풀밭에 누워 잠을 자는 사람 같은, 그런 사람을 노립니다. 그러니까 사탄을 조심하고 경계하셔야 합니다.

둘째,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4장 38절에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유혹입니다. 우리는 깨어서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각도에서 공격합니다. 세상을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니면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자신에게 노출시키면 반드시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을 해치고, 유혹에 노출시킵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신약이 말하는 것은 무관심과 냉담함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사데 교회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교회는 어느 순간 무관심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자기 만족에 빠져서 안일해지고 냉담하고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주님은 자신의 죄와 연약함, 불순종을 다루지 않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그리스도인을 징계 하십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는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이유는 바른 삶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른 삶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무관심도 반드시 조심해야 할 대상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죄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뿐 직면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계시다면, 이미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 깨어 경계하십시오.

네번째입니다. 거짓 교사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5절에서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다시 주고 있습니다. 거짓 가르침, 거짓 교리를 분별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다섯번째, 성경은 기도 가운데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서 바울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저희 딸 마시가 어렸을 때의 이야깁니다. 마시는 항상 “하나님, 온 세상을 축복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시야, ‘온 세상을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안 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돼” 이렇게 말하곤 했죠. 실제로 “하나님, 온 세상을 축복해 주세요”라는 기도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구체적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좋습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사탄을 경계하고, 유혹을 경계하고, 무관심을 경계하고,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고,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며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신약은 마태복음 24장 42절, 25장 13절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늘 하늘만 쳐다보면서 “오늘은 안 오시네?” 이렇게 하면서 살라는 걸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하늘만 쳐다보라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피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사탄에게도 속고, 유혹에도 넘어지고, 무관심하고, 냉담함에도 빠지고, 거짓 교사들에게도 휘둘리고, 기도하지 않는 삶에도 빠지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부활을 부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거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깨어 있기만 하면 수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깨어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립니다. 모든 경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깨어 있으려면 성경을 보면 됩니다. 사탄의 모든 교묘한 속임수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게 해주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깨어 있으십시오. 성경을 통해 살피고,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우리를 온전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말씀이야말로 깨어 있게 하는 창입니다.

능력 있는 삶의 두번째 원리는 ‘굳게 서는 것’입니다. 첫째는 깨어 있으라, 둘째는 굳게 서라입니다. 저는 굳게 서 있는 사람을 참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이 믿는 것을 굳게 붙드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바람이 부는대로 이리저리 떠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신념을 붙드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라.” 헬라어로는 스테코(stēkō)인데, 깊이 박혀서 흔들리지 않게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들으면 말뚝을 단단히 박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바울은 “굳게 서라”고 말했습니다. 호지(Hodge)의 말처럼 “모든 교리를 열려 있는 상태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굳게 서라.” 고린도교회가 꼭 들어야 할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에 굳게 서라”는 것은 막연한 영적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 복음의 내용입니다. 유다가 말한 것처럼 “성도에게 주신 그 믿음”, 그러니까 복음, 기독교 진리 전체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라, 복음을 붙들라, 하나님의 계시에 흔들림 없이 서 있으라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영적 감정이나 개인의 신념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으로는 조금 다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 싸우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진리의 내용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사탄과 싸워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어땠습니까? 믿음을 붙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근본 토대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믿음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의 믿음, 그러니까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가 없습니다. 계시된 믿음이죠.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이 사실마저도 놓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3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어리석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미련한 것,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20절에서는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과 변론가들이 인간의 지혜를 높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세상의 지혜”라고 합니다. 23절입니다. “...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겁니다. 고린도교회는 인간의 지혜가 교회 안에 깊이 스며들도록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지혜를 동등한 수준에서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더 이상 권위를 지니지 못하게 된 거죠. 전에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죠. 온갖 인간 철학을 예배 공동체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인간의 철학과 하나님의 진리를 뒤섞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죠.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는 인간 철학이 하나님의 계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기독교의 핵심을 스스로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네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틀린 것이다. 네 인간적 지혜를 빼야 남는 것이 참된 지혜다.” 바울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믿음의 핵심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그냥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인간적으로 해석한 책 정도로 취급합니다. 인간 지혜의 본 모습이죠. 기독교의 본질을 뿌리째 흔드는 일입니다.

자, 기독교의 두번째 중요한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두번째 특징입니다. 12장을 보겠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교적 요소와 기독교를 뒤섞어 놓았습니다. 많은 이방 종교의 관습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문화적 관습상 있었던 온갖 황홀경, 무아지경, 이상한 의식을 그대로 기독교 안으로 들여온 겁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사람들은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섬기고 있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정신이 흐트러지고 감정적으로 뒤흔들린 채로, 마치 어떤 황홀경 속에서 사역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상은 순수한 이방적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12장 2절입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여기 사용된 표현은 황홀경이나 무아지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끌려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말 못하는 우상을 섬길 때 그런 황홀경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 그와 본질적으로 똑같은 일이 교회 안에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고린도 교회의 예배 중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유일한 권위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을 저주하는 일이 실제로 그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죠. 고린도교회는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심장을 스스로 찌르고 있었습니다.

세번째입니다. 15장을 보십시오. 15장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렸습니다. 두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세번째, 무엇이 없다고 말합니까? 부활이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스스로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믿음 위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전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돌아가라.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라.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부활의 진리로 돌아가라. 이 짧은 표현 속에 담긴 뜻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방금 설명한 진리를 거스르는 모든 문제들을 뒤집는 명령입니다.

만일 고린도교회에 이런 문제가 없었다면 고린도전서는 이 두 절로 충분했을 겁니다. “계속 깨어 있으라, 계속 믿음에 굳게 서라, 계속 이 다섯 가지 원리를 지키라”라고만 강조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원리가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를 뒤집는 해답이니 계속하라고만 하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깨어 있으라, 굳게 서라고 명령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굳게 서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4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말로나 편지로나 가르침 받은 것을 굳게 붙들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여러분,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말씀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서신서입니다.

깨어 있으려면 말씀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굳게 서려면 말씀의 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교리를 아는 만큼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비결도 말씀이고, 굳게 서는 비결도 말씀입니다.

신약에는 굳게 서라는 명령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은 “주 안에 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합니다. 또 연합에서도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도 “한 마음으로 굳게 서라”고 합니다. 연합 안에서 굳게 서라는 뜻입니다. 또한 자유에도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또 하나님의 뜻 가운데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4장 12절에서 에바브라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온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사탄을 대적하는 데서도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6장은 “주 안에서 강건하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에 굳게 서고, 연합에 굳게 서고, 자유에 굳게 서고, 하나님의 뜻에 굳게 서고, 사탄을 대적하는 데 굳게 서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온갖 교훈의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미혹하는 영들과 거짓 교리에 끌려가지 않는 굳건함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굳게 서지도 깨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에도, 자유를 누리는 것도, 연합에도, 하나님의 뜻에도, 사탄을 대적하는 일에도 굳게 설 수 없었습니다. 말씀 안에 충분히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입니다. 바울이 명하는 또 하나의 군사적 명령입니다. “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그리고 그 다음으로 무엇입니까? 제가 참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남자답게 행하라.” 남자답게 행하라. 저는 ‘성숙하라’ 이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숙하라. “남자답게 행하라.”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제가 기억하기로는 여기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에서 단 한 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자주 사용됩니다. 종종 “담대하라” 이렇게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에는 담대하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동시에 성숙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담대함 그리고 성숙함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거의 같은 의미 아닙니까? 미성숙한 어린아이, 아직 자라지 않은 사람은 대개 담대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어린아이는 쉽게 두려움을 느끼지만 성숙한 사람은 통제력과 자신감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너희는 담대하고 성숙한 사람처럼 행해야 한다.” 헬라어로 ‘안드리조마이(andrizomai)’를 번역한다면 ‘성숙한 사람답게 행하라’ 혹은 ‘담대하게 행하라’ 정도가 될 겁니다.

이제 이 명령의 핵심이 성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담대함은 성숙 뒤에 따 라오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수도 없이 다루었는데, 14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어른이 되라는 겁니다. 바울은 이 말을 여러 방식으로 반복했습니다. 4장에서는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를 어린아이처럼 대할 수밖에 없다. 너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너희에게 갈 것이고, 가서 필요하다면 매를 들겠다”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채찍을 맞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한마디로 어린아이였습니다.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담대함에서도, 성숙함에서도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다투고 싸우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온갖 거짓 교훈에 휘둘려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사탄의 공격 앞에서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말씀인 3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은 “너희는 정말 어린아이 같다. 단단한 음식을 줄 수가 없어서 계속 젖만 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합니다. 어린아이 상태에서 자라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다뤄야 했습니다. 때로는 매도 맞아야 했습니다. 형제끼리 다투는 일도 있었습니다. 형제를 법정에 끌고 가서 서로 다퉜습니다. 바울은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예배조차도 유치했습니다. 진리와 교리가 아니라 감정과 느낌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장하라고 명하는 겁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정말로 성장했다면 수많은 문제들이 사라졌을 겁니다. 육신적이고, 싸우고, 다투고, 감정에만 의존하는 어린아이 같은 종교 형태가 없어졌을 겁니다. 진리를 깊이 생각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면 문제가 아주 많이 정리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교회가 드리는 찬양도, 교회의 구조도 항상 가장 높은 수준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을 성숙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어린아이 수준의 감정과 느낌에만 호소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성장하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성장했다면 많은 일들이 달라졌을 겁니다.

바울은 “깨어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깨어 있었다면 이런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굳게 서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일 굳게 섰다면 신학적으로 흔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또 “성숙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일 성숙했다면 다툼과 갈등과 싸움이 없었을 겁니다. 성숙하지 못해서 생기는 부족함과 서투른 모습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역시 성숙해야 하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 18절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에베소서 4장 13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더 이상 어린아이로 머무르지 말고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 가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자라 가라”.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깨어 있는 법은 알겠어요. 말씀을 통해 세상을 보는 거죠. 굳게 서는 법도 알겠어요. 말씀의 교리를 아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랄 수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듯이, 그 말씀을 통해 자라나는 겁니다. 방법은 같습니다. 말씀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깨어 있게 됩니다. 좋은 출발점이죠. 말씀을 알면 굳게 서게 됩니다. 성숙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네번째 명령입니다. “강건하라”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오늘 본문에서 유일한 수동태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강건하여지라”라고 말한 겁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강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바울이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강건하여지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기록된 것처럼, 이 단어의 의미는 영이 강해지는 것, 속사람이 강해지는 것, 내면이 강해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이 강해져야 육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절입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육신을 이기는 것은 바로 강한 영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강건해지지 못했습니다. 육신이 지배했습니다. 육신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육신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다. 육신으로 인해 희생된 자들이다.”

놀라운 점은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너무 강해서, 내가 너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서 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울은 절대 우리에게 못 와. 우리 상대가 안돼” 이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제 4장을 통해서 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봅시다. 참고로 훨씬 많은 예가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고 있는 겁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전체가 이 다섯 가지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4장 6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교만해졌다”고 합니다. 18절에서도 “너희가 교만해졌다”고 합니다. 5장 2절에서도 “너희가 교만해졌다”고 합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교만했습니다. 자신들이 정말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강하고 영향력 있는 영적 슈퍼스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정말 교만하구나.” 7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잘난 척을 하느냐? 너희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고, 너희가 가진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너희 공이 아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정말 대단히 강하다고 믿었습니다. 뻐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놀라울 만큼 날카롭게 비꼽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랄합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모두 풍자입니다. “정말 너희가 왕이기를 바란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을 왕처럼 여겼습니다. 부유하고 강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이제 바울의 풍자가 더 강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보십시오,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다시 말해, “너희 말대로라면 너희는 잘났고 우리는 실패자다.”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사도들을 내리깔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위대함은 참된 겸손에서 나온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에서도 말했죠.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강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결국 육체적으로도 약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0절입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약하고 병든 자가 많았고 심지어 죽는 자도 많았습니다.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약했습니다. 아주 약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너희는 이것이 달리기 경주라는 것을 모르느냐? 이기려면 달려야 하고, 달리려면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너희는 절제를 배우고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를 훈련해야 한다. 무기력하고 성의도 없고 그냥 대충 대충 넘기려는 태도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 달릴 것이라면 이기기 위해 달려라. 이기기 위해 달리려면 훈련해야 한다.” 바울은 또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자기 훈련입니다. 절제입니다. 무모하고, 무기력하고, 훈련되지 않은 상태였던 연약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나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원하는 대로 향락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자기부인과 자기희생,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약은 우리에게 강해지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은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섬기는 데에 있어서 강해지라고 합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사역과 섬김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한 일을 하되 강하게 하심을 따라 하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과 11절은 “선한 일을 하며 능력으로 강하게 되라”고 말합니다. 다니엘 11장 32절은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존 목사님? 말씀을 통해 깨어 있고, 굳게 서고, 성숙해지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강해질 수 있습니까?” 그런데 강해지는 것은 수동적인 일입니다. 수동태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 근원이 무엇입니까? 시편 27편 14절에 나옵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입니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어떻게 강해지냐고요?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여러분이 성령님께 삶을 드리면 성령님의 능력으로 강해집니다. 이 원리를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참된 능력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성령님께 우리를 내어드리면 성령님이 강하게 하십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리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말씀 안에 거하고 성령님께 순복하기만 하면 깨어 있게 되고, 굳게 서게 되고, 성숙해지고, 강해지게 됩니다.

다섯번째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모든 것을 균형 있게 만들어 주는 아주 중요한 명령입니다. 앞의 네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꽤 딱딱하고 전투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행군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전투를 위해서 굳게 서고, 전쟁을 위해서 무장했습니다. 우리를 전장에 내보내는 지휘관의 명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싸우라는 명령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바울은 한 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기억하라.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아름다운 원리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변함없는 사랑, 이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만 많고 굳게 서는 태도가 부족하면 감상주의에 휩쓸립니다. 반대로 굳게 서기만 하고 사랑이 부족하면 거친 신학자가 되고 맙니다. 둘 다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건전한 교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신약 전체를 통해 이 두 가지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너희 하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

그렇다면 사랑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을 희생하여 섬기는 겁니다. 감정이 아니라, 느낌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사랑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필요를 실제로 채워주는 방식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죠? 첫번째 장에서 바울은 “너희가 서로 다투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1장 10절에서는 “너희 가운데 분열과 다툼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3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타락하여 음행하고 있다. 사랑을 정욕으로 착각하고 있다. 심지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이어서 6장에서는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뒤틀어 버린 겁니다.

6장을 보면 교인들끼리 소송을 벌였습니다. 7장을 보면 부부가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8장을 보면 강한 형제가 약한 형제를 짓밟고 있었습니다. 11장을 보면 성찬식에서 음식을 독차지해 버려서 늦게 온 가난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영적 은사에 대해서도 사랑 없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모든 일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단 한마디로 고린도 교인들의 생활 방식을 뒤집어 버립니다. 이 한 문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고 싶은가? 건전한 교리와 사랑으로 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붙들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에서 옵니까? 어떻게 얻습니까?” 처음 세 가지는 말씀을 통해 얻는다고 했습니다. 네번째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했죠. 잘 들으십시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옵니다. 성령님과 말씀이 함께 역사하여서 건전한 교리와 사랑을 세웁니다. 이를 통해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이제 잘 들으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깨어 있으라, 굳게 서라, 성숙하라, 강하여지라, 사랑하라’는 명령은 능력 있는 삶의 원리입니다. 이 모든 것은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말씀과 성령님이 함께 역사하여 건전한 교리와 사랑을 세웁니다. 이 두 가지가 교회를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실제적인 진리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기꺼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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