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에베소서 1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우리는 지금 에베소서 1장 15절부터 23절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소유한 자원, 신자의 자원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레이스 교회에 다니신 분들에게는 베드로의 말처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 이 진리를 접해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자원이 주어졌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주제를 시작하면서, 전에도 몇번 말씀드렸던 걱정을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에는, 아마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매우 염려스러운 흐름이 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제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제가 '무언가 더'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다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또 다른 무엇인가를 더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널리 퍼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를 더 구해야 한다, 예수님을 더 구해야 한다, 성령을 더 많이 구해야 한다, 더 큰 능력을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흔히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을 수 있는 자원이 마치 약국에서 받는 처방약처럼 조금씩 나눠져 있다, 그래서 추가로 더 받으려면 반드시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야 하거나, 어떤 특정한 의식이나 절차를 거쳐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한 여성도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가능한 한 예수님의 전부를 소유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 말에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예수님을 전부 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받을 권리는 얻었지만, 실제로는 아직 다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적어도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올바른 신학일까요, 아니면 잘못된 신학일까요? 예수님을 더 구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더 구해야 할까요? 성령님을 더 구해야 할까요? 더 큰 능력을 구해야 할까요? 아니면 구원받은 순간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답을 먼저 보겠습니다.
에베소서를 보기 전에 잠시 베드로후서 1장 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 여기까지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잘 들으십시오. 성경은 신자가 구원을 받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신자에게 모두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무언가를 더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더 찾으려는 것은, 사실 구원 교리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Tetelestai)”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었고, 끝났고, 이루어졌고,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이죠. 그런데 그 말씀을 사실상 뒤집어 버립니다. 아직도 무언가 부족해서 더 구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좋은 예로서 골로새서 2장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당시 많은 로마 초대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단 사상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골로새 교회에 널리 퍼져 있던 이단이 하나 있었는데, 뿌리가 아마 에세네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겁니다. 오늘 아침에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현재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기 때문에, 그 이단의 핵심 주장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겁니다.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뭔가를 더 구해야 한다.” 결국 오늘날의 주장과 똑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골로새서 2장 시대까지 이 문제는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전적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기 위해서 골로새서를 썼습니다. 1장에서부터 그 점을 암시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한 뒤에, 이어서 그 아들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소개합니다. 또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고…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리고 19절에서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통해서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는 전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도 충만합니다. 골로새서뿐 아니라 에베소서가 전하는 메시지이죠. 또 골로새서 2장에 이르면 똑같은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골로새 교회에는 그리스도에 더하여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무언가’가 사람을 더 영적으로 만든답니다.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고, 정말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해 준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에 철학을 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 인간의 지혜를 덧붙이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에 인간의 철학을 추가한 겁니다.
오늘날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현대주의와 똑같습니다. 그리스도로 시작하지만 인간의 지혜, 이성, 논리, 철학을 더합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2장 8절에서 경고한 내용이죠.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여기서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두 표현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인간 종교의 초보 원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철학을 더해야 한다는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겁니다.
둘째, 이 거짓 교사들은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에 인간의 지혜를 더해야 할 뿐 아니라, 율법주의도 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16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다시 말해서 어떤 의식이나 규례를 지키느냐를 기준으로 영성을 판단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17절에서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리스도에 철학을 더하면 안되고, 그리스도에 율법주의를 더해도 안됩니다.
셋째, 골로새 교회를 미혹하던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에 신비한 체험, 신비주의를 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 ‘꾸며 낸 겸손’이란 거짓 겸손을 의미합니다. 또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가 본 것들을 근거로 들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상을 보아야 한다. 천사와 대화해야 한다. 더 깊은 체험, 특별한 체험이 필요하다. 하늘의 환상을 경험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런 체험을 구하는 것은 꾸며낸 겸손입니다. 18절 하반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결국은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된 마음”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체험을 더해야 영적으로 더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율법주의를 더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인간의 철학을 더해야 한다고 합니다.
넷째, 바울은 금욕주의도 언급합니다. 금욕주의란 자신을 부인하는 삶, 수도승 같은 삶, 수도원 생활이나 은둔 생활을 말합니다. 20절부터 23절까지입니다. 이것 역시 “세상의 초등학문”에 속한 인간적인 종교입니다. 앞서 말한 인간 종교의 초등적인 원리와 같은 표현입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합니다. 또 23절에서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 몸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자기 몸을 고의로 괴롭게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수도승 같이 살거나, 수도원에서 생활하거나, 자기를 부인하고 육체적으로 고행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골로새서 2장 당시부터 교회 역사 내내,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이러한 것까지 해야 비로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런 주장이 여러분의 마음을 흔들게 하지 말라. 이 모든 논의의 핵심이 골로새서 2장 9절과 10절에 있습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그 안에는…” 여기에서 이 ‘그’는 8절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어떻게 했다구요? “…충만하여졌으니.”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우리에게는 그 무언가 더 필요하지 않다. 이미 다 이루어졌다. 이미 받았다. 이미 확정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합니다. 신약은 구원 교리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따라서 무언가를 더 찾아다닐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무언가를 더 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이미 있기 때문에 신자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원들을 사용하면 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이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다시 에베소서 1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14절까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자원과 지위를 매우 신중하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구원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를 보여주는 참으로 놀랍고 장엄한 선언입니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절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시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과거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셨습니다.
이 진리는 너무도 심오하고, 너무도 깊고, 너무도 포괄적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지위와 우리가 소유한 자원에 관한 위대한 진리들을 설명한 뒤에, 15절에 이르러서 잠시 기도합니다. 방금 자신이 말한 이 놀라운 진리의 실체를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달라고 구합니다.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할 뿐 아니라, 백성들이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역사하시도록 기도합니다.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의 지성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특별하게 역사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27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름 부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성령으로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님께 의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지위와 자원에 관한 이 위대한 선언을 마친 뒤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1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우리가 이 진리를 참으로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평생 삶으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하시는 교사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르침을 잠시 멈추고 15절에서 기도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무언가 더 얻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지혜와 계시의 영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여기서 바울은 이사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외적인 감각으로는 알 수 없다,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다. 계속 읽습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인간의 직관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이성으로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0절에 답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잘 들으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바로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님이 이미 거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의 교사이십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분이시고,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들을 우리의 마음이 깨닫도록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11절이 말하는 것처럼, 오직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일을 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진실로 붙잡는다면, 우리의 삶이 완전히 바뀝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지금도 계속 가르치고 계시고 저는 아직도 다 깨닫지 못했습니다만, 성령님이 제 삶에 이 진리를 비추어 주셨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제게 주어진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을 때, 제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말 그대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깨닫기를 원하는 세 가지 위대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진리를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획의 위대함, 둘째,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 셋째, 하나님의 인격의 위대함입니다. 오늘 아침 한 번의 설교로는 이 놀라운 진리들의 표면조차 다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그 문을 열어드릴 뿐이고, 그 이후에는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 진리를 붙들고 묵상하셔야 합니다.
먼저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계획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18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로 이겁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부르심과 세상이 끝난 후의 소망,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이 전체가 이 한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계획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예비해 두셨는지를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제 18절 첫 부분을 보겠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르디아스(kardias)”입니다. 영어로 심장을 뜻하는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마음’입니다. 따라서 헬라어 본문을 직역하면 “너희 마음의 눈이 밝아져”가 됩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영적인 깨달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15절부터 17절에서 보았죠. 바울은 하나님께 이 깨달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깨달음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통로는 뭡니까? 성령이십니다. 그 깨달음의 목적은 17절 끝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해 주옵소서.”
여기에 깨달음을 담당하는 기관, 장기가 나옵니다. 깨달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통로는 성령님이십니다.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기관은 바로 심장입니다. 우리의 심장으로 깨닫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심장’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감정을 떠올리죠. 미국 문화에서 이 ‘heart’라는 단어를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랑 노래에 하트가 나옵니다. 밸런타인데이에도 하트 모양의 쵸콜릿을 주고받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트, 그러니까 심장을 감정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감정을 말할 때 ‘심장’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헬라어로 ‘스플랑크논(splankhnon)’을 사용했습니다. ‘창자’, ‘장’, 이런 뜻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느낌이 전혀 다르죠. 우리가 아내에게 “나는 당신을 온 창자로 사랑해요”, 이렇게 말하지 않죠. 뭔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성경에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감정을 주로 창자, 그러니까 장 부위와 연결해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애가 탄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긴장하면 속이 뒤틀리고, 불안하면 배가 아프죠. 고통과 불안을 장으로 느낍니다. 감정을 심장이 아니라 창자로 느낍니다. 히브리 사람들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가서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내 창자가 움직였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설렘, 기대감이 창자에서 느껴졌다는 겁니다. 구약성경 곳곳에 반복해서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 22편에서도 시편 기자가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면서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장에서 녹았으며”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 11절에서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의 멸망을 보며 애통할 때에도, “내 창자가 끊어지며”라고 합니다. 심지어 “간이 땅에 쏟아졌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유대인들은 창자로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신약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여기에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이라고 번역된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긍휼의 창자를 닫으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감정을 장에서 느낀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의 사고에서 심장은 감정을 뜻하지 않습니다. 심장은 생각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카르디아스(kardias)라는 단어가 ‘심장’으로도, 또 ‘이해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이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또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장은 생각하는 기관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는 말씀도 생각, 의지, 이해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잘 보십시오. 신자가 진리를 이해하는 기관인 심장은 감정을 느끼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지성에 호소하십니다. ‘카르디아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기독교는 감정에 호소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감정은 생각한 이후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생각보다 앞서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생각, 그러니까 지성이 아닌 감정에만 호소하는 형태의 기독교는 결국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에 근거한 반응이 아니라, 진리와는 분리된 감정적 반응만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을 보십시오. 11절입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바울은 한숨을 내쉬듯이 말을 시작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마음’을 생각과 이해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을 너희에게 숨김없이 전하고 싶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깨달은 것, 내 의지와 생각을 모두 너희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의 생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배우고 이해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 가로막는 게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12절입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여기서 “심정”으로 번역된 말이 바로 헬라어 스플랑크논(splankhnon), 그러니까 ‘창자’, ‘내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의 요점은 이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내 생각에서 너희 생각으로 전해 주고 싶은데, 너희의 감정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창자가 좁아져 있다”입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감정적으로 꽉 막혀 있다”, “감정적으로 경직되어 있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감정이 진리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는 순간, 진리는 왜곡되고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맙니다.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마음, 그러니까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한 말씀은 문자 그대로 생각하는 능력, 이해력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그들이 이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신자의 마음, 그러니까 생각에 역사하시면 그 생각을 풍성하게 하시고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말한 의미입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철학도 아니고, 인간의 지혜도 아니고, 율법주의나 금욕주의나 신비주의도 아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것이 핵심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님이 진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지 않으시면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성도들의 마음에 이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성도들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뼈대만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성령으로 성도들이 이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좋은 예가 누가복음 24장에 나옵니다. 찾아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곁에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은 알고 있었죠. 그런데 지금 옆에 있는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필요한 정보는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참 놀랍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기서 “마음”은 감정을 뜻하는게 아닙니다. 생각과 의지와 내면 전체를 가리킵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고, 말씀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 주실 때에 비로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말씀을 가진 우리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그 진리를 우리의 생각 속에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밝히실 때,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실까요? 첫번째는 제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위대한지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여러분, 이 말씀에 대해서 제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 한 구절은 성경 전체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구속하시고, 기업을 약속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고 구속을 받아,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 나라의 모든 기업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의미를 깨닫게 하옵소서.”
여러분은 이 계획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진실로 아십니까?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인간 역사의 한가운데 우연히 덧붙여진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 계획 안에 포함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정체성을 이해할 때에 그에 걸맞게 살아가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영원한 계획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영원 전부터 정해졌고, 앞으로 올 영원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는 계획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바울은 우리가 정체성을 이해하기 원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언젠가 우리가 누구와 같아집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뵐 때에 예수님과 같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계획입니까?
그리고 위대한 계획일 뿐 아니라 풍성한 계획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말합니다.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는 성도입니다. 하기오이(hagioi),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거룩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기업이 있습니다. 그냥 기업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기업입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스러운 기업의 풍성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이 얼마나 큰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죠.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기업, 영광스러운 기업, 그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기업… 아무리 말해도 끝이 없다. 헤아릴 수 없이 깊다.” 바울은 구원이 가져다주는 이 놀랍고도 헤아릴 수 없는 복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우리가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곧바로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끝입니다. 그 이상 더 구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겁니다. 성도에게 예비된 풍성하고 영광으로 가득한 기업, 이것 말고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아직도 저쪽에 더 많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없습니다. 신자는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영적 자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계획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계획의 일부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도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대목은 참 흥미롭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성령님이 기록하게 하신 것이지만, 성령님은 언제나 인간 저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나타내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면서, 생각나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9절에는 ‘능력’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가 무려 네 개나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능력”이라는 단어를 보겠습니다.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두나미스(dunamis)입니다. 영어 단어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능력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더 얻어야 할 능력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더 큰 능력이 필요하다”, “더 많은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더 받아야 하는 능력 같은 것은 없습니다.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믿는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믿은 후에 환상을 본 사람”, “믿은 후에 어떤 규칙까지 지킨 사람”, “믿은 후에 무엇인가를 더 받은 사람”, 그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바울은 “역사하심을 따라”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또 다른 단어인 ‘에네르게이아(energeia)’를 사용합니다. 영어 단어 에너지(energy)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제 “그의 힘의 위력으로” 가봅시다. 여기서 “위력”으로 번역된 단어는 ‘크라토스(kratos)’입니다. 역시 ‘능력’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인데요, 때로는 ‘권세’ 혹은 ‘통치’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힘”이라는 단어는 ‘이스퀴스(ischus)’입니다. 앞에서 사용된 단어들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별개의 단어입니다.
첫 번째 단어인 두나미스(dunamis)는 본질적으로 내재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단어인 에네르게이아(energeia)는 실제로 역사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단어인 크라토스(kratos)는 최고의 능력, 절대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 단어인 이스퀴스(ischus)는 부여된 힘, 부여받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죠.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 결국 능력, 그 모든 능력이 신자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저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 참 안타깝습니다. 바울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너희가 너희 안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지극히 위대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할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복음을 전할 능력이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러분은 바로 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복음을 전할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복음을 전하는 능력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견디며 승리로 이겨 낼 능력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열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지만, 동시에 부활의 생명도 경험하며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할 능력이 있고, 고난을 견딜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필요한 힘이나 자원이 없다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2장 13절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섬길 능력도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바울은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어요”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언제 여러분에게 임하셨습니까? 구원받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엄청난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조심해야 할 정도죠.
에베소서 3장 20절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참으로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시겠어요? 뭔가 더 많은 것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은혜로운 사랑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능력을 분명히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예를 하나 들어 주십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한다면 이것을 봐라. 바로 이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하늘의 보좌에 높이 올려 왕으로 즉위하게 하셨다. 혹시 하나님이 약속을 끝까지 이루실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면,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고난 중에서도 너희를 영광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실 수 있을지 염려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능력은 지금도 동일하기 때문에 너희에게도 똑같이 행하실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섬김을 위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안전하게 보존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소망을 반드시 이루실 능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모두 때때로 의심이 들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끝까지 이루실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일으키셨고, 죽음의 결박을 산산이 깨뜨리셨고, 사망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늘 오른편으로 올리셔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영원한 존귀와 위엄의 왕으로 높이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여러분에게도 행하실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도 무덤에서 일으키실 것이고,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불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의 보좌에 앉히신 바로 그 능력이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성도들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의 위대함, 그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인격을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이어지는 21절부터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대관식에 대해서 말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위엄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위엄과 함께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붙드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예”와 “아멘”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잃을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더 이상 찾아 헤멜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께 성령님을 한량없이 주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시 디모데는 점점 위축되고 있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젊다는 이유로 디모데를 업신여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르침을 문제 삼았습니다. 에베소의 거짓 교사들은 디모데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사역의 열정을 점점 잃고 낙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아들 디모데야, 다시 불을 지펴야 해.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해야 해. 다시 힘을 내. 위장도 돌봐야 하니 포도주를 조금 써. 몸도 추스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도 다시 일으켜.”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8절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 안에 살아 계신 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기억하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다. 예수님의 인성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신성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선하신 뜻을 우리를 통해 이루실 만큼 능력이 충분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하라. 그리고 예수님이 네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저도 말씀드립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라. 그러면 성령님이 너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우리가 심리적인 문제에 덜 집착하고, 사소한 영적인 문제들에 덜 매달리고, 우리가 반복하는 자질구레한 일들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자체에 더 집중하고,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는 얽매임에서 자유롭게 될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주변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너무 안 읽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책을 읽으신 것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은 위엄에 걸맞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저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21절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여기서 ‘통치’는 아르케(archē)입니다. ‘권세’는 엑수시아(exousia)입니다. 아르케는 가장 높은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엑수시아는 권세를 위임받은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들이 선한 천사들이든 악한 천사들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통치, 권세, 주권, 이런 명칭은 천사들의 계급과 직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모든 천사들보다 훨씬 높은 분이십니다.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인격을 진정으로 깨달으면,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달라집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위대하신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도 없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존재가 없기 때문이죠. 누구도 예수님보다 여러분을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예수님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모든 존재는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또 누구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안전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1장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보다 높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계신 머리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라는 점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입니다. 이 마지막 절은 시간이 있다면 몇 시간이고 연구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여러분을 통해 나타내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을 이루실 능력을 공급하시고, 친히 우리 안에 거하셔서 그 계획을 끝까지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후페르니카오(hupernikaō)’, ‘넉넉히 이기는 자들’, ‘압도적인 승리자들’이라는 바울의 말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마지막 장인 6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뿐입니다. 조금 앞의 10절에서는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받은 가장 높은 영광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와 연합하시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자신을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신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이르기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부분을 다 가지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신을 완전한 분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온 교회 가운데 나타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날, 그 연합이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것을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위한 저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저는 우리가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 얻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사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고, 주의 피로 구속받았고, 주의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확신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고, 능력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며, 삶을 변화시키는 견고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셔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을 예배의 제물로 주께 드리오니,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모든 영광을 홀로 받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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