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예배에 오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오늘 오전에는 에베소서 5장 18절 본문에서 잠시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에베소서를 계속 살펴보면서 지난주에는 18절에 담긴 의미를 살펴봤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술을 마셔도 되는지에 대한 주제로 이어집니다.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질문을 너무나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셔도 되나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나요?” 그래서 잠시 멈추고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셔도 되는지에 관해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 성도님이 오늘 아침 교회로 오는 길에 "짐 빔(Jim Beam)이 없다면 크리스마스가 무슨 소용인가?"라는 새 광고판을 봤다고 하시더군요. 짐 빔, 미국에서 유명한 위스키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사회의 병적인 상태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술에 취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명령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술에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음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죄로 가득하고 쾌락에 찌든 사회가 그로 인한 죄책감, 불안, 좌절, 우울증을 잊고 해소하기 위해 술을 즐기려 한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우리 주님의 정의에 따르면 겸손하고, 이타적이며, 완전히 용서받고, 성령으로 위로받으며, 주님의 기쁨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들이 술병에서 위로와 기쁨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합니다. 금지된 일이다, 잘못된 일이다, 죄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도 술을 마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적당히 마시면 괜찮다고 합니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도주를 마셨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적당히 마시면 문제가 될 게 없다고 합니다.
저는 미국, 유럽,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다른 여러 지역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와인을 주문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와인을 먼저 주문하고 나서 식사를 고르기도 했습니다. 여러 선교지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어디어디가 와인으로 유명하니 그곳에 머물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랫동안 선교지에 있었지만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한 혼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저에게 "술을 마시는 것을 반대하는 설교는 언제 하실 거예요?"라고 물어봅니다. 또 다른 성도들은 "술 마시는 것을 반대하는 설교는 안 하실 거죠?"라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어제 집에서 전화를 참 많이 받았는데 직접 들려드리고 싶을 정도로 재미가 있었습니다. 상반된 감정이 담겨 있었거든요. "그냥 여쭤보려고 전화드렸는데, 내일 이런 말씀 안 하실 거죠?" 이렇게 말이에요. 저는 "오셔서 직접 확인해보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계신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가 영성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이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것이지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단지 영성의 표현일 뿐입니다.
지난주에 에베소서 5장 18절과 관련해서 말씀드렸듯이, 바울이 술 마시는 것을 성령 충만과 대조하고 있는 이유는 사회적인 측면보다는 신학적인 측면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에베소 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의 모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근심을 잊기 위해, 기쁨을 느끼기 위해, 위로를 얻기 위해 술을 마셨습니다. 사회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염두에 둔 것은 사회적인 측면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신학적인 것입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이교도 신들을 숭배할 때 술에 취하기 위해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더 높은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여 신들과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한 것과 정확히 같은 내용입니다. 바울은 귀신의 잔과 주님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즉, 이방 신들과 교감하기 위해 취하게 만드는 잔을 마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성찬식의 잔을 마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할 때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우리의 모든 기능을 온전히 사용해야 합니다. 술에 포함된 알코올에 의해 기능이 상실되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죠.
지난주에 저는 사탄이 복음 전체를 위조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탄의 거짓 아버지와 같은 제우스 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아버지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제우스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사지가 찢긴 후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거짓 부활입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가 제우스를 만나지도 않았는데 잉태되었습니다. 일종의 처녀 잉태죠. 또한 제우스가 그 아들을 땅의 주인으로 삼기로 결정했다는 것도 기억하실 텐데, 이 또한 위조입니다. 그리고 이 다시 태어난 제우스의 아들이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디오니소스, 포도주의 신입니다. 왜일까요? 이방 종교는 술 취함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 종교 체계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바울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것은 옛 종교 예배 방식은 끝났고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술 취함이 아니라 성령 충만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대조하고 있는 뿌리입니다. 비교하는 뿌리입니다.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합당하게 행하고자 한다면, 겸손과 연합 안에서 행할 것이고, 이방인과는 다르게 행할 것이며, 사랑과 빛과 지혜 안에서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술에 취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으로 교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술 취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유는 새 생활과 맞지 않는 옛 생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성경에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전 생활에 속한 방식입니다. 로마서 13장 13절에 매우 명확하게 나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17절에서는 육신에 대해 말하고, 19절에서는 육신의 일에 대해 말하며, 21절까지 나열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이런 일들은 새로운 삶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6장 10절도 같은 말을 합니다.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베드로전서 4장 3절입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우리가 과거에는 이렇게 살았지만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고, 과거에 속해 있습니다. 과거일 뿐입니다. 과거의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술취함은 우리가 벗어난 밤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으로 들어왔습니다. 더 이상 술취함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는 겁니다. 신자는 술에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항상 "술 취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라고 묻습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알코올이 통제력의 일부를 장악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술취함입니다. 물론 그 정도가 다양하고, 사람마다 그 경계선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어떤 의미에서든 알코올에 통제력을 빼앗긴다면 술에 취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짚어드리고 싶습니다. 잠언 20장 1절입니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습니다. 요점은 술을 마시고 취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는 겁니다. 술에 취하는 것이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면 속은 겁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간 겁니다. 술은 우리를 거만하게 하고 떠들게 만듭니다. 술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술은 우리를 조롱합니다. 잠언 23장을 통해서 성경에서 술취함에 대해 가장 흥미롭게 묘사하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잠언 23장 19절입니다.
잠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책입니다. 따라서 잠언 전체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23장 19절에서 다시 한번 들어봅시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고, 왕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세계와 영역에 속한 사람이라면, 빛 가운데 행한다면, 그 길에 있다면 자신을 그 길에 지키고, 마음을 그 길로 인도하라고 합니다. 20절에서는 "술을 즐기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과거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던 술 취한 사람들의 삶과 양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알코올 중독자는 결국 해어진 옷, 누더기를 입게 됩니다. 이번주 뉴스에서 빈민가의 흉기 사건을 보셨다면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정확히 보셨을 겁니다. 저는 아주 다양한 선교지에서 설교했습니다. 사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밤마다 서드 스트리트(Third Street)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술 때문에 누더기를 입게 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알 수 있었죠. 술은 사람들을 품위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더기를 입게 만듭니다. 그 지역을 돌아보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29절은 술에 취한 자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줍니다. 참고로 중간에 음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술 취함과 성적 부도덕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에서 창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모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9절은 술에 취한 자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한번 보시죠.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누가 재앙을 겪고, 마음의 고통을 겪고, 슬퍼하고, 싸우고, 횡설수설하고, 아무 이유 없이 상처를 입습니까? 누가 아무런 이유 없이 고속도로 교각에 부딪히고, 소화전에 부딪히고, 전신주에 부딪히고, 벽에 부딪히고, 창문에서 떨어집니까? 누구입니까? 누구의 눈이 붉어지고, 누가 스스로를 곤경과 슬픔과 싸움에 빠뜨리고 말이 횡설수설해집니까? 바로 술 취한 사람입니다. 혼합주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죠.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다시 말해서 포도주, 와인을 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와인을 바라보면,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광고에 가끔 나오는데, 와인병을 들고 빛을 비춰서는 와인의 빛깔을 바라보면서 감탄을 하다가, 천천히 와인을 잔에 따라내는 그런 장면을 보셨을 겁니다. 와인을 전문적으로 마시고 시음하는 사람들도 있죠. 유혹거리를 가지고 노는 겁니다. 그리고 32절입니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이런 경험을 한 모든 분들에게 일어나서 간증해 달라고 요청하지는 않겠습니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이상한 것들, 분홍색 코끼리 같은 것들을 보게 되고, 비뚤어진 것을 말하게 됩니다.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이 구절의 의미는 바다 한가운데 배가 있는데, 술에 취한 자는 그 배의 돛대에서 잠을 자려는 자와 같다는 겁니다. 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아래쪽에서의 작은 움직임이 돛대 꼭대기에서는 극심해진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따라서 돛대 위에 누운 자는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번주에 술에 자주 취했던 분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술취한 상태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가 바로 이 구절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부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정말 놀랍습니다. 그 모든 고생을 하고 일어나서는 무엇을 합니까? 다시 술을 찾으러 갑니다. 위대한 구약 주석가 델리취(Delitzsch)는 이렇게 말합니다. '잠언 기자는 매춘과 부정의 죄에서 술취함의 죄로 넘어간다.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술취함은 육체적 욕망을 자극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관능의 진흙 속에서 쾌락에 빠지기 위해서는 먼저 술에 잔뜩 취해서 자신을 짐승처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술취함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말합니다. 이사야 5장 11절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알코올 중독자의 특징은 아침부터 술을 마신다는 겁니다. 아침에 시작해서 밤까지 마시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더 살펴보겠지만, 그 당시 술은 알코올 함량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취하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마셔야 했을 겁니다. 물론 독주를 마시지 않는 한 말입니다. 만일 포도주만 마시고 있었다면, 당시의 포도주는 지금과 달랐기 때문에 취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잠시 후에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일어나자마자 하루 온종일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사야 28장을 비롯한 많은 구절이 있는데, 몇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이사야 28장에서 하나님은 주님의 자녀인 에브라임을 매우 혹독하게 비난하십니다. 28장 7절입니다. "...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다시 말해서 술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보십시오.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제사장은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만일 취해서 잘못된 판단이나 해석을 하게 되면 많은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취해 있었고, 잘못을 저질렀으며, 진실이 아닌 말을 했습니다. 포도주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주로 말미암아 옆걸음을 치고, 환상을 잘못 풀었습니다. 재판할 때에 실수했습니다. 잘못된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8절은 이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말해줍니다.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이들은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토하고 배설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바로 그곳에서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이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사야 56장 11절과 12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 사람들을 돌봐야 했던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그렇게 계속 취해 있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실제로 심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든 영적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술을 마시고 취하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하나님이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호세아 4장 11절입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술 마시는 것이 간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음란과 매춘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술 취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해하게 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술 취함의 결과로 끔찍한 근친상간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은 술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신자는 알코올에 취해서 통제력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입니다. 모두 영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말을 하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대변하며, 항상 하나님을 바르게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술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포도주를 권하기도 합니다. 좀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때로 포도주를 권합니다. 공평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9장과 레위기 23장을 보면 하나님께 전제를 드릴 때 헌물로 포도주를 드렸습니다. 사사기 9장 13절과 시편 104편 15절에서는 포도주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55장 1절부터 2절에서는, 참 놀라운 말씀인데, 이사야가 포도주를 구원과 동일시합니다.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라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구원의 초대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성찬식을 제정하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서 디모데에게 위장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 마시라고 했습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에는 포도주를 음료수로 마셨습니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누가복음 10장 34절을 보면 상처 부위에 포도주를 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언 31장에서는 누군가가 늙고 병이 들어서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진정제나 마취제 역할을 하는 포도주를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술, 그 중에서도 포도주는 파괴하는 것이자 조롱하는 것, 방탕함을 초래하는 것,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술취함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반면에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포도주는 허용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라고 물으신다면, 포도주도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라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포도나무에 달린 작은 포도는 좋은 일에 쓰일 수도 있고 나쁜 일에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술을 마셔야 할까요 마시지 말아야 할까요? 성경에 도움이 되는 말씀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포도주 목록>이라고 부릅니다. 모두 여덟 가지 항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여러분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님을 제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형식으로 된 여덟 가지 항목을 드릴 텐데, 저와 함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오늘은 셋째 항목 정도까지를 다룰 겁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자, 먼저, 이것이 여러분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아멘"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변에 충격을 받는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성경은 포도주 마시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냥 그 구절을 읽어드리고, 기도하고, 그냥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다른 설교를 해야 했겠죠, 그렇죠? 그렇게 간단히 끝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포도주를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번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질문입니다. 동일한 포도주인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아시겠나요? 오늘날 사람들이 마시는 것이 성경 시대의 포도주와 같은 것인가? 더 정확히는, 오늘날의 포도주가 그 당시와 같은 것인가? 제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정확히는 술을 마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술을 마실 권리가 성경에 기반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셨고, 사도들도 마셨고, 구약 시대에도 마셨고, 신약 시대에도 마셨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것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판단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도 마셨으니 뭐가 문제인가? 그때는 냉장고가 없었으니, 당연히 발효된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고, 우리도 발효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인데, 뭐가 문제인가?" 그래서 제가 오늘날의 포도주가 그 당시와 같은 것인지 궁금해진 겁니다. 그래서 지난 3주 동안 조사를 하면서 정말 같은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노력을 했는데, 놀라운 정보를 찾았습니다. 지금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먼저 몇 가지 단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입니다. 우리가 논의할 내용에 연결시킬 것입니다. 당시에 마신 포도주가 우리가 오늘날 마시는 것과 같았을까요? 만일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포도주를 우리 음주의 기준으로 삼으려면, 두 술이 같은 술이어야 합니다. 만일 다르다면, 그 원칙은 적용되지 않으니까 다른 원칙을 찾아야 할 겁니다. 우선, 신약에서 가장 흔히 등장하는 단어는 '오이노스(oinos)', O-I-N-O-S, 헬라어 '오이노스'입니다. 포도즙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매우 일반적인 단어로서, 신약에서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오이노스'에 해당하는 단어는 '야인(yayin)', Y-A-Y-I-N입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에서 141번 사용되었습니다. '야인'은 혼합된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다른 포도주와 섞은 것이 아니라 주로 물을 섞은 것입니다. 때로는 꿀, 허브, 몰약과 함께 섞기도 했지만, 항상 무언가 섞여 있었습니다. 꿀, 몰약, 허브를 섞고 나서 물을 또 섞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종류의 혼합된 포도주가 있었던 겁니다.
'야인'이 혼합된 포도주를 의미한다는 점은 1901년 유대인 백과사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해석이 아닙니다. 그냥 생각해낸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히브리어 문헌과 단어 용례를 검토한 결과, '야인'은 혼합된 포도주를 의미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단어가 두 개 더 있습니다. '글류코스(gleukos)'는 우리가 ‘포도당’이라고 부르는 당 기반 물질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새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2장 13절에서 사도들이 오순절 날에 "새 포도주에 취했다"고 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신선한 포도주이지만 주목할 점은 여전히 발효된 상태라는 겁니다. 발효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냉장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포도에서 갓 짜낸 포도주도 매우 빠르게 발효됐을 겁니다. 그래서 비교적 신선하고 완전히 숙성되지 않았어도 취하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13절에서 "그들이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라고 말한 겁니다. 새 포도주라고 해서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빠르게 발효됐기 때문입니다.
갓 짜낸 포도즙은 당연히 발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글류코스’, 즉 새 포도주라고 불리는 것은 갓 짜낸 포도즙이 아니라 며칠, 몇 주, 몇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으로서 여전히 발효 중인 상태입니다. 참고로, 구약성경에서 이를 나타내는 단어는 ‘티로쉬(tirosh)’입니다. T-I-R-O-S-H 입니다. 이 ‘티로쉬’도 새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아까 제가 호세아 4장 11절을 읽어드렸는데, 그 구절에서 새 포도주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티로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같은 구절에서 새 포도주와 함께 술취함이 언급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새 포도주인 ‘티로쉬’나 ‘글류코스’ 모두 취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라고 해서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제 또 다른 단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알아야 할 또 다른 단어는 ‘샤카르’(shakar)입니다. ‘샤카르’는 독주를 의미합니다. 섞이지 않은 포도주를 뜻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시케라’(sikera)입니다. 역시 섞이지 않은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 가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이노스’와 ‘야인’은 물과 섞인 포도주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마시던 포도주였습니다. 둘째, ‘글류코스’와 ‘티로쉬’는 신선한 새 포도주이지만 역시 물과 섞였습니다. 역사책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셋째, ‘샤카르’와 ‘시케라’는 섞이지 않은, 포도만으로 짜낸 순수한 포도주입니다. 이러한 용어들은 역사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결론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제가 나아가려는 방향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시대의 포도주는 오늘날의 포도주와 정확하게 같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마시는 포도주는 물과 섞이지 않은 포도주입니다. 이는 성경 시대의 포도주와 다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성경 시대의 포도주 중에는 전혀 취하게 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발효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취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사무엘 리 교수에 따르면, ‘야인’, 즉 혼합 포도주나 신약성경의 ‘오이노스’는 발효된 알코올 음료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한 비알코올성 시럽이나 잼을 가리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보관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끓여서 만든 겁니다.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끓여서 액체를 전부 증발시킨 후에 발효되지 않게 했고, 그러면 저장할 수 있는 일종의 농축액 형태가 됩니다. 이 농축액을 병에 담아서 보관한 겁니다. 오늘날 주부들이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통조림을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진한 농축액 형태의 물질을 용기에 보관했습니다. 참고로, 끓이는 과정 후에 남은 포도즙은 그 상태에서 발효될 수 없었습니다. 이 포도즙을 새 포도주 부대에 담았던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포도주의 알코올 성분이나 발효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알콜 성분이 있는 포도주를 마셨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포도젤리와 비슷한 진한 농축액은 잼처럼 빵에 발라 먹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에 따르면, 이 포도 시럽을 다른 병에 넣고 최대 20배의 물과 섞어 마시기도 했습니다. 농축된 시럽의 경우 빠져나간 만큼 물로 희석해서 마셔야 하겠죠? 이 시럽을 다시 물로 희석해서 발효되지 않은 알콜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마셨던 겁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에는 이렇게 포도 시럽을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사무엘 리(Samuel Lee)가 가장 일반적인 포도주 저장 및 준비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액체 상태보다 포도 시럽 상태가 보관하기에 훨씬 용이했습니다. 왜냐하면 액체 상태로 보관하면 부피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시럽으로 만들어서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고대 작가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제 출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주전 35년에 호라티우스(Horace)는, 아주 오래 전인데, "그늘 아래에서 취하지 않는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후 60년에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여과된 포도주는 뇌를 흥분시키지도 않고 마음과 감정을 어지럽히지도 않으며 마시기에 훨씬 더 즐겁다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말한 겁니다. "나는 마음을 흥분시키지 않는 알코올 없는 포도주를 좋아한다. 마시기에 훨씬 더 즐겁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아르카디아의 포도주는 너무 진해서 가죽 병에서 긁어내어 물에 녹여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기원전 30년에 베르길리우스(Virgil)는 끓여서 농축된 즙으로 보관하는 포도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호메로스(Homer)는 <오디세이> 제9권에서 율리시스가 달콤한 검은 포도주를 담은 염소 가죽 부대를 배에 싣고 갔다고 말합니다. 20배의 물을 섞어 마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너무 진해서 음료로 마시기 위해서 물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콜루멜라(Columella)를 비롯한 사도들과 동시대의 작가들은 로마와 그리스에서 포도주를 끓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알려줍니다. 알코올 성분을 유지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1674년에 태어난 대주교 포터(Archbishop Potter)는 1813년에 에든버러에서 출판된 저서 <고대 그리스의 유물(Grecian Antiquities)> 제2권 360쪽에서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포도주를 끓인 후에 마셨다고 했습니다. 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부분을 여행하고 주전 300년경에 사망한 유명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와 헬라인 의사 팔라디우스(Palladius)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고대의 권위있는 작가들은 포도를 끓인 즙을 포도주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Pliny)가 언급한 오피미안 포도주를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플리니는 이 포도주가 꿀과 같은 농도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포도주 형태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예로 들어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도노반(Donovan) 교수는 성경 주석에서 “로마인들은 포도주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포도즙을 증발시켜 농축했다”라고 말했습니다. 포도즙을 진한 시럽처럼 만들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이렇게 했습니다. 유대교 율법을 성문화한 미쉬나(Mishnah)에 따르면 끓인 포도주를 사용하는 습관이 유대인들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18세기에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전역을 여행한 W. G. 브라운은 시리아의 포도주가 대개 포도를 짜낸 직후 끓여서 양을 줄인 후 항아리나 병에 담아 보관하는 형태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18세기 베를린의 화학 교수였던 뉴먼 박사(Dr. Newman)는 단 과즙을 끓여서 걸쭉하게 만들면 발효되지 않을 뿐 아니라, 물을 섞어도 쉽게 발효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에 희석해 놓으면 다시 발효될 수 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렸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시대에는 알코올이 없는 포도잼이나 포도시럽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농축된 포도즙은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딥스’(dibs)라고 부릅니다. 이 농축된 포도즙은 현재 팔레스타인, 요르단, 레바논의 포도밭에서 만들어집니다. 식품 조미료로 사용하거나 빵에 바르기도 하고, 냉장 보관 없이도 비발효 음료 형태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꼭 알아야 하는 점은 당시 마셨던 포도주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포도주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포도주는 발효 성분을 없애고, 취하게 하는 성질도 제거한 농축된 포도즙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점은 이렇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오늘날 포도주를 마셔도 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오늘날 마시는 포도주가 당시에 마신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런 주장은 접어두고 포도주를 마시는 또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또 다른 이유를 살펴볼 수도 있겠지만, 두 포도주가 동일하지 않다면 그 이유 역시 포도주를 마셔도 된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에는 포도주를 농축된 형태로 저장했을 뿐만 아니라, 액체 형태로 저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액체 형태의 포도주는 발효되기도 했습니다. 1975년에 이에 대한 연구를 한 로버트 스타인이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매일 사용하는 포도주를 액체 형태로 저장하기도 했습니다. 농축된 포도즙을 물에 섞어 마실 시간이 없거나 여의치 않을 때를 대비해서 액체 상태로 보관하기도 했다는 겁니다. 포도주를 대형 항아리인 ‘암포라’(amphorae)에 저장했습니다. 암포라에 물을 섞지 않은 순수한 포도주를 보관했습니다. 그런 다음 ‘크라테르’(kraters)라는 용기에 포도주를 부어서 물과 섞었습니다. 크라테르에 물을 부어서 혼합한 후에 ‘킬릭스’(kylix)라는 컵에 옮겼습니다. 암포라에서 꺼내서 바로 킬릭스에 포도주를 따르지 않고, 항상 크라테르를 통해 물과 섞은 후에 마셨습니다. 즉, 물과 섞지 않은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농축물이 아니라 액체 형태로 발효된 포도주가 있다고 해도 물과 섞어서 마셨다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혼합 비율은 20대 1에서 3대 1까지 아주 다양했습니다. 가장 낮은 비율은 3대 1이었습니다. 20대 1에서 3대 1까지의 비율로 물과 혼합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심지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도 물을 섞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야만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아테네의 메네스테우스(Menestheus of Athens)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들은 포도주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축복이 되도록 인간에게 계시하셨지만, 절제 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가 된다. 포도주는 음식이 되고, 정신과 신체를 강화하며, 의학적으로도 가장 유익하다. 포도주는 액체나 약물과 혼합할 수 있으며 부상자에게 도움이 된다. 일상에서는 적절히 섞어 마시면 좋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경계를 넘으면 폭력으로 이어진다. 반반으로 섞으면 미친 듯이 행동하게 되고, 전혀 물을 섞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진다.”
보시다시피, 당시의 사람들은 포도주에 물을 섞었습니다. 심지어 1대 1로 섞는 것도 야만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제가 찾을 수 있었던 가장 낮은 비율은 3대 1이었습니다. 고대에는 포도주가 약으로, 심지어 음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음료로서는 항상 물과 섞어서 마셨습니다. 농축물에 물을 섞었습니다. 액체 형태의 포도주는 암포라에서 크라테르로 옮겨 물과 혼합한 후에 제공했습니다. 물을 섞지 않은 채로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물과 포도주의 혼합 비율은 달랐지만, 물을 섞지 않고 마시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여겼습니다. 물과 포도주를 동등하게 1대 1로 섞은 것도 독주로 간주되어서 좋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된 포도주, 오이노스, 야인이라는 용어는 물과 섞인 포도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물과 섞지 않은 포도주를 언급할 때에는 ‘아크라테스테론(akratesteron)’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즉, 중간에 크라테르로 옮겨 담지 않고, 암포라에서 꺼내 물에 섞지 않은 상태로 바로 킬릭스에 담아서 마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이렇습니다. 물을 섞지 않은 포도주는 당시 문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물을 섞지 않은 독주는 야만인들이 마시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신약 교회를 지나 초대교회 시대로 넘어오면서, 이들은 <사도전통(Apostolic Tradition)>이라는 문서에 이러한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사도전통>에는 초대교회가 시럽이든 액체 형태든 상관없이 물과 섞은 포도주만을 제공하는 관습을 따랐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게 다 무슨 뜻인가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성경에서 포도주를 마셨다는 이유로 정당화하고 싶다면, 우리가 오늘 마시는 포도주가 당시에 마셨던 것과 같은지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당시에 마시던 포도주는 시럽의 형태로 전혀 취할 가능성이 없거나, 물을 많이 섞어서 마셨기 때문에 취하게 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알코올 협회 도서관의 정보 센터에 직접 문의를 해서 이런 정보를 얻었습니다. 맥주의 알코올 함유량은 4%이고, 포도주는 9%에서 11%입니다. 보관 기간에 관계없이 발효로 인해 생성된 알코올의 범위입니다. 브랜디는 도수가 더 높은 포도주로서 15%에서 20%를 말합니다. 위스키나 라이 등의 술은 40%에서 50%입니다. 미국에서 80프루프(proof)짜리 술은 알콜 함유량이 40%이고, 100프루프(proof)짜리 술은 50%입니다.
성경 시대에 15%에서 50%의 알코올이 함유된 음료를 마시는 사람을 야만인으로 여겼을 것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독주나 도수가 높은 술을 마셔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술을 마시고도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조금만 마셔야 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독주를 마시는 것은 명백히 부적절합니다. 이렇게 도수가 높은 술에는 그만큼 많은 알코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코올이 인체에 미치는 의학적 영향은 굳이 논의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서 간경화로 사망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보수적으로 추정해 보겠습니다. 포도주가 발효되면 알코올 함량이 9%에서 11%까지 올라간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제 제가 찾을 수 있었던 가장 낮은 혼합 비율인 3대 1을 적용해 봅시다. 5대 1, 10대 1, 15대 1 등의 비율은 논외로 하고, 그냥 3대 1이라는 가장 낮은 비율만 고려해 보겠습니다. 암포라에 알코올 함유량이 9%에서 11%인 발효된 포도주가 담겨 있습니다. 이 포도주를 크라테르에 담아서 물과 3대 1의 비율로 혼합합니다. 그러면 알코올 함유량이 2.25%에서 2.75%인 포도주가 완성됩니다.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참고로, 알코올 음료로 분류가 되려면 알코올 함유량이 3.2% 이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알코올 음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물과 3대 1로 혼합된 포도주에 취하려면 하루 종일 마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교회의 장로들에게 “포도주를 즐기지 말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포도주에 취하려면 일부러 취할 목적으로 마셔야 했습니다. 방광의 한계를 넘을 정도로 많이 마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취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독한 술을 한번에 마시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러면 물과 섞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고 야만인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경고는 이렇습니다. 알코올 함유량이 낮은 포도주라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너무 오래 앉아 마시다 보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 당시에 소비된 포도주는 3대 1로 물과 혼합되었을 경우 알코올 함유량이 2.25%에서 평균 2.50%였으며, 이는 알코올 음료로 분류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낮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점은 이렇습니다. 당시 마셨던 포도주는 농축물이든 혼합물이든 알코올 함량이 없거나 매우 미미한 포도주였습니다. 취하려면 일부러 취하려는 의도가 있어야 했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술에 취할 때까지 계속 마셔야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45분 만에 포도주 서너 잔을 마시고 제정신을 잃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성경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포도주를 정말 많이 마셔야 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 시대에 소비되었던 포도주를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질 겁니다. 오늘날의 포도주는 당시에 마셨던 포도주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따라서 첫번째 질문, ‘당시의 포도주가 오늘날의 포도주와 같은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포도주가 꼭 필요한가?’ 여러분, 포도주가 꼭 필요합니까? 우리가 알기로 성경 시대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어느 정도 필요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포도주가 필요한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포도주를 절대 마시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때에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는 상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국가에서 물이 부족해서 갈증으로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포도주를 활용할 수밖에 없겠죠.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완전히 금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포도주가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포도주를 만드셨고, 포도주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구약 시대에는 포도주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효되어 알코올이 있는 포도주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포도주가 발효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1대 1로 혼합된 포도주를 마셔야 했던 상황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임의 주최자가 그러한 포도주만을 제공했을 경우가 있었을 것이고, 그 경우 매우 조심해서 마셨을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강한 술이 제공되어 목을 축이기 위해 조금만 마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당시나 오늘날,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필요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 포도주를 무조건 마시지 말라고는 명령하지 않으신 겁니다.
요점은 이겁니다. 우리가 “내가 술을 꼭 마셔야 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겁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당시에는 포도주, 과일 주스, 우유, 물이 전부였을 겁니다. 선택의 폭이 매우 좁았죠. 오늘날의 마트 선반에는 각종 음료가 가득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에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꼭 필요할까요? 그 답은 분명합니다. “아니다, 꼭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는 필요성의 범주에서 벗어나 선호도의 범주로 이동합니다. 개인적인 선호나 욕구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마신다면, “성경이 쓰여진 당시에도 마셨기 때문에 마셔도 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나는 그냥 마시고 싶어서 마신다”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콜라나 차, 아이스티보다 포도주를 더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주장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정말로 술을 마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러면 사람들이 불쾌해할 거예요.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이 많은데 모두가 술을 마시니 저도 친구들과 맥주를 한 잔 하거나 함께 마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친구들이 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을 언짢게 하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논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왼쪽 귀를 긁는다고 해서, 여러분도 무리에 끼기 위해서 왼쪽 귀를 긁으실 건가요? 만약 여러분의 이웃들이 모두 데오드란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사용하지 않을 겁니까? 이게 무슨 논리인가요? 전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비논리적입니다. 말도 안되는 말이죠. 어리석은 말입니다. 사실, 요즘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기독교인만큼 많을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비기독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가면 그런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술을 완전히 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기독교인이 술을 마시고 비기독교인이 술을 마시지 않는 상황, 그런 상황을 본 적도 있습니다. 따라서 술마시는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마신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는 그런 신학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한다는 주장은 별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저는 남미, 라틴 아메리카, 멕시코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술을 마십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교회 야구팀의 모든 경기에 참석했습니다. 몇 년 전에는 멕시코에서 열린 멕시코 전국 챔피언 대회를 참관하러 갔습니다. 매번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항상 우리를 위해 정말 큰 파티를 열어주곤 했습니다. 정말로 성대한 파티였습니다. 우리를 현지 식당이나 컨트리 클럽 같은 데로 데려갔죠. 정말 대단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각 접시 앞에 엄청나게 큰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정말 컸습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몇 리터는 되었을 겁니다. 병이 엄청나게 컸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콜라를 주문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자기 것뿐만 아니라 우리 것까지 다 마셨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놀라운 점은, 우리 모두가 함께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을 즐겼습니다. 우리는 맨정신으로, 그들은 술에 취해 즐겼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들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를 안아주었습니다. 다음 해에도 다시 오라고 초대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해서 멕시코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럽에도 가본 적이 있는데, 누군가가 제 기독교 신앙을 폄하하거나 제가 술을 마시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저를 낮춰보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필요하다면, 만일 술을 마시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이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신중하게 필요에 따라 대처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이 선택 사항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순전히 개인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제 세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소개만 하고 다음번에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두 가지를 말씀드렸고, 여섯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이제 세번째 질문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가?’ 자, 여러분이 술을 마시기로 선택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가요? “커피보다 훨씬 낫고, 코카콜라보다 훨씬 낫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콜라 여덟 잔을 마시고 똑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논쟁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술을 마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가요? 이제 한 가지를 보여드리고,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예 술을 마시지 말라고 금지한 사람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를 통해 술을 마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마무리하기 전에, 누가복음 1장 1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을 만나보시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사람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당시까지 존재했던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정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여기에서 포도주는 ‘오이노스’이고 독주는 ‘시케라’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던 요한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방울도 마시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일까요? 다음주에 알아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종종 우리의 영적 삶을 진정한 핵심이 아닌 행위로 평가하곤 합니다. 주님께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성경에서 명확히 제시된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언제나 깨달아야 할 것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영적이고 마시는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다른 것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지가 중요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 문제를 어디서 어떻게 겪어왔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에게 많은 진리를 주시고, 저희를 보호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죄를 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죄를 짓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잠시 묵상하시는 동안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는 다소 특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모든 부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멋집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이곳에 오신 여러분 중에는 “아, 저는 여기 와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고, 제 삶과 문제들, 마음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는데, 오늘의 말씀은 그런 부분에서 저에게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잠시 후에 제가 기도로 예배를 마칠 것입니다. 강당 앞에, 제 오른쪽 피아노 옆에 기도실과 상담실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지, 때때로 술로 채우려 했던 마음의 공허함을 어떻게 주님이 채워주실 수 있는지 그분들이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여러분의 삶을 기쁘게 만드시고, 불안한 마음에 평화를 주실 수 있는지 말씀드릴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마음을 깨끗케 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지 알려드릴 것입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 한번 들러 보시기를 바랍니다. 의무도 아니고 강요도 아닙니다. 뭔가에 가입하거나 사야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고 사랑을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지 그분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혹시 술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민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술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여러분을 눈처럼 희게 씻어주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술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 맡기실 때에 여러분의 의지와 마음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신다면, 여러분에게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어떤 상태에 있든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비록 여러분이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술에 취해 있더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을 도와드릴 분들이 기꺼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드릴 겁니다.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를 깊이 아끼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말씀해 주셔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삶을 지키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복을 주시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에도 다시 모이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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