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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에베소서 5장 18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정말 놀랍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다른 주제를 다루기도 했지만 약 6주 동안 정말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더 들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부터 21절까지 읽겠습니다. 함께 따라 읽으시기 바랍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가득찬 삶의 모든 문제와 고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하옵소서. 주님의 손길로 정결케 하사 어떠한 선입견이나 편견도 없이 순수한 마음과 생각으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게 하옵소서. 주님, 말씀을 전하는 저를 인도하여 주셔서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성령님이 전하시는 말씀만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 16장에 기록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모두 매우 놀랍고도 믿기 어려운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약속의 핵심은 단 하나, 바로 성령의 오심이었습니다. 배신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마지막 밤에 예수님이 하신 모든 약속은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인용한 유대인들의 기도문인 쉐마(Shema)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한 분이신 주님,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가지 구별된 위격으로 계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세 위격으로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하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확증하시는데, 성령님 또한 제3위격으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임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약속을 실현시키십니다. 잠시 요한복음 14장을 보면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매우 중요한 약속을 많이 하셨습니다. 13장이나 15장, 16장보다도, 특히 14장에서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셔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느낄 공허함과 그리움을 달래시기 위해서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약속은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17절을 보면 그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정말이지 위대한 섭리가 담긴 말씀입니다. 신약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위대한 선언입니다. 성령께서 지금까지는 너희와 함께 계셨으나, 이제 너희 안에 계시리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이 약속은 새로운 언약의 시대, 즉 오순절 이후의 새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백성 곁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약속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6절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제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정말로 위대한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내가 떠나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그곳으로 데려가 너희가 나와 함께 있을 수 있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보증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약속을 하면, "좋습니다. 약속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혹시 보증이 될 만한 것이 있나요?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요?"라고 묻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보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아셨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5장과 에베소서 1장에서, 지금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라본(arrabōn), 즉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라본'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보증, 첫 할부금, 계약금, 또는 약혼반지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천국으로 데려가 나와 함께 있게 하여 내 나라를 상속받게 하겠다. 그리고 이 약속의 계약금으로, 보증으로, 이 약속이 진실이라는 증거로 너희에게 성령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천국 유업 약속의 보증이 되십니다. 만일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장의 후반부인 12절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또 다른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가 더 큰 일을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질적으로 더 큰 일이 아닙니다. 질적으로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양적으로, 즉 더 넓은 지리적 범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활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더 큰 일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답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활동하셨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가보시지 않은 땅 끝까지 가서 그 일을 할 겁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성취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께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보증과 확신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받을 유업에 대한 보증과 확신도 가질 수 없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13절과 14절에서 또 다른 약속을 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14절에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기도라는 도구를 주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이루어주겠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로마서 8장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를지라도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끊임없는 중보 사역이 없다면 이 약속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의 유업을 보장받고,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고, 구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 달려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18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그렇다면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예수님이 떠나신다고요?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고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오신다고요? 20절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어디에 계신다고요?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제자들은 언제 하나님이 자신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바로 오순절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그들 안에 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떠나가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 너희는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15장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14장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하셨고, 15장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주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사랑을 주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사랑, 기쁨,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신자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취됩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6장 14절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다시 말해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약속이 신자에게 전달되는 통로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이 없다면, 예수님의 약속은 우리 삶에서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 모든 약속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되지만,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삶에 적용되고 작용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약속들이 성취될 모든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이런 놀라운 약속들을 소유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성취되지 않는다면 약속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베드로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크고 보배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모두 우리의 것으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만,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면 삶과 죽음 가운데 안전하다는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꿈꾸는 것 그 이상의 일을 목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지속적인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이 모든 약속을 가지고 있다 해도, 여러분의 삶에서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본질입니다.

이제 에베소서 5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만일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에서 열매 맺기를 원한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실현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장까지의 전체 내용을 통해 바울은 신자가 가진 엄청난 능력과 잠재력을 설명하고 있지만, 전부 하나로 요약됩니다. 아무리 에베소서 5장 17절까지를 잘 이해해도 18절에서 막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과 지혜와 사랑과 빛과 독특함과 겸손과 하나됨의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6장에 들어가서 사탄과의 전쟁을 시작할 때,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지 않다면 곧바로 실패하게 될 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18절에 잘 보이게 빨간 펜으로 표시해 두십시오.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 우리는 18절에서 21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실은 18절과 19절 일부를 다뤘죠. 주목해야 할 세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대조, 명령, 결과입니다. 대조와 명령과 결과입니다. 먼저 대조를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 하나님과의 교제, 친밀함과 능력은 이교도처럼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성령 충만에서 옵니다. 이것이 바로 대조입니다.

그리고 이 대조에서 명령이 나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유지하라."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고 잠재력을 실현하는 방법이 성령 충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유지하고 성령님의 다스림 아래 있으라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삶을 성령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신비롭고 이상한 영적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매 순간을 성령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과 영혼을 채울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세번째 결과도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결과를 말씀하시는데, 아마 몇 주 후에는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 안에서 나타나는 결과로써 노래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결과로써 감사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신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결과로써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를 추가해야 될 것 같은데, 불신자들에게까지 미치는 결과로써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차차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됩니다. 자신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은 상담을 받고,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분석가, 기독교 상담사를 찾아다닙니다. 발륨, 토라진, 리브륨 같은 정신안정제나 수면제 같은 약을 복용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또 립 반 윙클(Rip Van Winkle)처럼 낮잠을 자면서 모든 것을 잊으려고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부르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나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이죠.

둘째로, 하나님의 영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2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게 됩니다. 셋째로, 21절 말씀처럼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이 생깁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됩니다. 네번째로, 섬김의 영역은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데, 주님께서는 "성령이 너희를 충만하게 하면, 너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흐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관계는 성령 충만으로 완성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실 때,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첫번째로 살펴본 것은 노래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면, 내면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서 차꼬에 묶여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이 차꼬는 단순히 손발을 고정시키는 일반적인 형태의 차꼬가 아니었습니다. 점점 간격이 넓어지는 구멍이 있어서 다리가 찢어지지 않을 만큼 최대한 벌린 채로 몇 주 동안이나 그대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밤새도록 무엇을 했습니까? 찬송을 불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환경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이 찬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내 마음이 평안하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찬양이 저절로 나옵니다. 오늘 아침 설교가 끝날 때쯤이면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마음에서 무언가가 우러나와서 노래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가정사역과 전도사역을 담당하고 계신 제리 미첼(Jerry Mitchell) 목사님이 이스라엘에서 2주를 보내고 오셨습니다. 미국계 유대인들과 함께 가셨는데, 그 팀에 동행한 최초의 이방인이었습니다. 다른 팀원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은 이스라엘 장군의 집에 머무르셨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2주 동안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 처음이었죠. 교제를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월요일에 돌아오시는 바람에 지난 주일 제 설교를 목사님은 못 들으셨는데, 목회자 회의에 오시자마자 첫 마디가 "형제님들과 다시 교제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여기 있다는 게 정말 좋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계속 비신자들과만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샤워할 때마다 찬양이 터져나왔어요." 그 말에 모든 목사님들이 웃었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한 설교를 듣지 못하셨지만,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신자가 억눌려서 찬양을 부를 수 없을 때는 뭔가 잘못된 것이고, 결국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욕실에서라도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되는 법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일부 호텔에서는 그렇게 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신약성경을 읽기 위해 일부러 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떻게든 표현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서 존 번연(John Bunyan)은 기독교인의 삶을 걸작으로 그려냈습니다. 주인공인 순례자 ‘크리스천’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계속해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절망의 수렁에 빠지기도 하고 의심의 성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잘못된 길로 빠져 허영의 시장으로 이끌려가는 등 수많은 문제를 겪으면서 계속해서 길에서 벗어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강을 건너 언덕을 올라 천성(Celestial City)에 들어가게 됩니다. 존 번연은 성령 충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천로역정 전체를 통틀어 성령 충만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죠. 하지만 약 50번이나,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크리스천이 다시 길로 돌아와 무엇을 하며 길을 갔다고요?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이 존 번연이 성령 충만을 표현한 방식입니다. 크리스천은 노래하며 길을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노래가 바로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일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교도들이 난잡한 방식으로 사탄을 숭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노래를 주셨기 때문에 함께 모여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하면 노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노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면 찬송하게 된다, 노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노래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했던 질문들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누구 사이에서 노래하는가? 19절입니다. "서로 화답하며." 우리는 서로를 향해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전도의 도구로 음악을, 찬양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여러 곳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는데, 어떤 팀이 특정한 종류의 찬양을 연주하면 제가 이렇게 묻습니다. "왜 그런 종류의 찬양을 하시나요?"라고 말이죠. 그러면 "찬양을 통해 세상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면 세상이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때마다 제가 하는 질문은 같습니다. "성경 어디에 찬양을 통해 세상에 다가가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까?" 그러면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항상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노래로 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전하라고 말할 뿐이죠.

하나님께서는 음악을 전도 도구로 의도하신 적이 없습니다. 음악은 계속 존재해 왔기 때문에 찬송과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불신자의 마음과 양심을 찌른 때가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음악이 복음의 진리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누군가에게 증거가 되는 것과 같은 부수적인 혜택일 뿐입니다. 전도의 핵심은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으로 살고, 복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이 찬양팀에 의해 전도되어야 한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너무 엄격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본문에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다시 살펴본다면, 세상에 다가가야 한다는 구실로 기독교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좋지 않은 일들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성경에는 세상에 찬양으로 다가가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노래가 아닌 말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기셨다고 확신합니다.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강하게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이성적 판단과 결단이 아닌 감정에 이끌려 결정을 내리게 되는 그런 혼란을 막으려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즉 음악을 신자들 사이에서, 교회 안에서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음악이 있어야 할 곳은 교회입니다.

저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음악, 찬양을 듣는 것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음악을 좋아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이해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노래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 음악이 그 감정적인 힘과 영향력으로 도구처럼 사용되는 것이 정말 걱정됩니다. 그리고 만일 교회 음악이 세상의 음악과 너무 비슷해진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세상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게 하기가 매우 어려울 겁니다. 이 점을 너무 강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에 따르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이스라엘의 음악은 이스라엘만의 음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음악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의 표현이었습니다.

두번째입니다. 우리의 노래는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요? 19절 하반절입니다. "너희의 마음으로…" 문자 그대로 마음으로부터, 내면의 원천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출발점은 마음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아모스 5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정말 어리석구나. 상아 침상에 누워서는 잔이 작다고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방탕하게 지내며,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장신구로 치장한 채, 온갖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읊조리면서 새롭고 정교한 악기들까지 만들어내고 있지만, 나는 그 어느 것도 듣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을 당장 멈춰라."

그리고 8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다시 말해서, 노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노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핵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가사로 찬양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여기서 부르든 저기서 부르든 집에서 부르든 문제가 됩니다.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잘 부르더라도 그 노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음치여서 음정을 전혀 못 맞추더라도, 마음이 바르다면 그 노래는 하나님께는 달콤한 음악이 됩니다. 바로 마음이 핵심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교회는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르지 않은 수많은 음악가들과 가수들을 끊임없이 내세우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이 바르지 않은 자들의 노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제가 이들의 사역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음악을 대표한다고 하기 전에, 잠시 멈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의 음악과 우리의 음악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음악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음악은 언젠가는 멈출 겁니다. 알고 계십니까? 음악을 송출하는 모든 라디오 방송국이 멈추고, 모든 악기가 멈추고, 세상의 음악은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그게 언제입니까?"라고 궁금해하실 텐데, 요한계시록 18장 20절에서 2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하나님은 세상에 심판을 내리시는데, 여기서는 큰 성 바벨론이라고 불립니다. 바벨론은 악한 세상 체계의 기원이자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그리스도의 세상 체계의 마지막 모습은 바벨론으로 불립니다.

18장은 바벨론이 대환난의 마지막에 어떻게 멸망당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멸망하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21절입니다.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그렇게 바벨론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무엇이 사라집니까? 22절입니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세상 음악의 종말입니다. 모든 것이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끝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모든 음악이 그 즉시 멈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음악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축복이었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선물들처럼 이 음악이라는 선물도 타락시켰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실 날이 올 것입니다.

음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집에서 차까지 가는 아주 짧은 거리도 라디오를 켜지 않고는 못 견디고, 차에서 집으로 돌아와서도 스피커로 음악을 들어야만 견딜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음악은 직장에서 나오고, 공장에서 나오고, 상점에서 나오고, 미식축구 경기 중간 휴식 시간에도 나오고, 어디서나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사람들이 음악 없는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음악이 마음속에 가사를 통해 생각을 심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 없는 세상은 정말 답답한 곳이 될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26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노래 소리를 그치게 하며 네 수금 소리를 다시 들리지 않게 하고." 이것은 두로에 대한 말씀이었고, 실제로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두로를 멸망시켰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일어날 일의 작은 예시였습니다. 지옥에는 그 어떤 노래도 없습니다. 지옥에서 사람들은 아무 음악도 없이, 부를 노래 하나 없이, 가혹한 심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그 무엇도 없이 영원히 지옥에서 살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음악을 멈추신 후에는 오직 한 가지 노래만이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채우고 영원까지 이어질,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성도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노래,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찬양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노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노래여야 합니다.

세번째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향해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요? 5장 19절 하반절을 보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우리는 주님께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것처럼 박수를 치거나 환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꼭 그런 방식으로 감사를 표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노래하는 것이니까요. 누군가 박수를 쳐야 한다면 그건 바로 주님이십니다. 어젯밤에 마치 주님이 박수를 치시는 것처럼 천둥이 크게 쳤지만, 그건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이 그런 방식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을 테니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주님께 무언가를 드릴 때는 오락거리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가대가 노래하거나, 루퍼스(Rufus)가 했던 것처럼 연주를 하거나, 또 다른 누군가가 노래를 부를 때, 여러분을 위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찬양팀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주님께 찬양으로 올려드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찬양은 여흥을 즐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찬양팀과 연주자들의 인도를 따라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바로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음악은 주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점에서 자신의 찬양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저 사람은 맨날 앞에 나와서 노래하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이 앞에만 나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중석에서도 다 같이 찬양할 때 주변 다섯 줄의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큰 소리로 부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뒤돌아보면서 "어머, 저분 누구지? 정말 대단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런 모습이 아마도 성가대석보다 회중석에 더 많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노래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역대하 5장에는 아주 실제적인 예시가 나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웅장한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정말 영광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역대하 5장 12절을 보면, 성전 봉헌식을 위해서 노래하는 레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흰 세마포 옷을 입고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나팔 부는 제사장 120명이 함께 찬송했다고 합니다. 성가대 4천명에 나팔 120개라니, 정말 엄청났을 겁니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일제히 소리를 내어…" 이들은 모두 같은 곡을, 같은 방식으로, 같은 가사로 노래했기에 하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음악적으로도 뛰어났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음악적으로도, 마음으로도 모두 올바른 상태였던 것이죠. 계속 읽습니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하나님께서는 이 찬양을 매우 기뻐하셔서 구름, 즉 쉐키나 영광으로 성전을 가득 채우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영광이 너무나 가득해서 능히 서서 섬길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에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찬란해서 제사장들이 서서 섬길 수조차 없었던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미래에는 엄청난 규모의 성가대가 "어린 양은 합당하시도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라고 주님께 노래합니다. 모든 음악은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수세기 전에 "모든 음악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흐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노래할 때는 주님께 드리는 찬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모든 노래의 가사는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 계시를 올바르게 담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찬양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학적으로 혼란스럽고 교리적으로도 잘못된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찬양의 가사는 반드시 올바라야 합니다. 게다가 곡조와 노래하는 방식도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찬양이 너무 세속적인 경우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문화를 생각할 때,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아름답고 특별하면서도 구별된 노래여야만 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찬양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도 주면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제 경우에는 찬양을 들으면서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주님을 찬미하거나,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들을 때면 전율이 느껴지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정말 놀라운 영향을 줍니다. 가끔 집에 돌아왔을 떄 우울하거나 슬플 때가 있는데, 특별한 찬양을 틀어놓고 들으면 제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저 자신에서 벗어나 함께 노래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찬양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제 마음이 어느샌가 하나님을 향하고 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낍니다.

제 아내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네 명의 아이들과 바쁜 남편을 돌보느라 하루 종일 정신없이 지내는데 음악, 특히 주님의 음악인 찬양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데 최고라고요. 저는 찬양에 이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효과를 의도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23절에 나오는 다윗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정말 뛰어난 음악가였습니다. 다윗이 잘하는 일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음악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악기 연주도 잘하고 노래도 아주 잘했습니다. 시편에서 볼 수 있듯이 위대한 찬송가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23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이 마음이 힘들거나, 괴롭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다윗을 불러 수금을 연주하게 했죠.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전체 이야기를 다 하지는 않겠습니다, "손으로 탄즉." 이때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수금만 연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윗이 평소처럼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주님을 향해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께 수금을 연주했고, 그 결과로 사울에게도 좋은 영향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여기서 세 가지가 보이십니까? 정신적, 육체적, 영적 측면입니다. 음악은 먼저 사울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울이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사울은 매우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혼란스러웠지만, 다윗이 하나님께 바친 음악에는 사울의 고통받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의사들이 정신 질환 환자에게 음악을 처방했습니다. 각각의 정신 질환에 맞는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치료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음악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은 거친 야수도 달래는 힘이 있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텐데, 어떤 면에서 사실입니다. 음악은 괴로운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에는 ‘뮤작(Muzak)’이라는 회사가 있는데요, 이 회사에서는 산업용 음악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치과의사를 찾게 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치료를 잘하기 때문도, 웃는 얼굴 때문도 아닌, 어쩌면 음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음악에는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입증된 사실입니다. 뮤작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음악가가 아닌 행동과학자들인데, 치과에서 환자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파악했습니다. 이는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공장이나 생산 시설에서도 동일합니다. 뮤작은 고용주에게 공장에 뮤작이 만든 음악을 틀어놓으면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장합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치도 가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뮤작은 자신들이 만든 음악을 틀어놓은 상점에서는 구매율이 눈에 띄게 상승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특정 종류의 음악은 말 그대로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정리해줍니다. 많은 분들이 퇴근 후에 복잡한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 클래식 음악이나 부드러운 음악 방송을 듣는데, 주변의 혼잡한 상황에서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락 음악만 들어봐도 왜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음악은 사람을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뮤작의 회장인 제이 키난(Jay Keenan)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물과는 다르게 음악은 혈류에 들어가지 않고도 심리적, 생리적 영향을 미친다. 연구를 통해 음악에는 우리의 신진대사와 심장박동, 맥박에 영향을 주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뮤작은 행동과학과 관련된 산업 분야에서 특별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음악이 주는 미묘한 영향력을 이용해 직장인들에게 통제된 자극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있다." 뮤작은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높아지고, 매출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 등 효과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음악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17세기 독일에는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라는 유명한 과학자이자 의사가 있었습니다. 음악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는데, 유리잔 가장자리에 물을 묻히고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여러 가지 소리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 나아가 음악이 몸 주변의 공기에 진동을 일으켜서 혈액, 침, 림프액 등 체액의 흐름에 변화를 준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키르허의 연구에 따르면 협화음과 불협화음, 템포와 음높이를 통해서 신경과 근육은 물론 맥박과 심장박동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혹시 ‘타란텔라’라는 곡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 ‘타란텔라’ 작곡가는 타란툴라에 물린 사람의 독을 빼내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작곡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타란툴라에 물린 사람에게 이 곡을 들려주면 독이 빠져나간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음악의 영향력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병원에서는 특정 질병의 회복 과정에 음악을 직접 활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질병에 걸린 비슷한 상태의 환자 두 명이 있을 때, 한 명에게는 음악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제공하지 않아 보면, 음악을 들은 환자가 더 빠르고 더 잘 회복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음악은 우리 몸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음악은 영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사울은 상쾌하여 나았을 뿐만 아니라 "악령이 그에게서 떠났다"고 했는데, 음악에 영적 효과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악령이 들렸다고 해서 적당한 음악을 틀면 떠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음악이 누군가의 영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영적인 사역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일로 우울할 때 앉아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양을 아름답게 연주한 곡을 들으면 제 영은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음악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악을 놀라운 선물로 주셨습니다. 적절히만 사용한다면 음악은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몸을 치유하며 영을 회복시킵니다.

자, 좋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에베소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네번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앞서 설명한 방식으로 찬양을 작곡해서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에게도 놀라운 효과가 있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이 음악을 연주해야 할까요? 어떤 악기들이 허용 가능할까요? 누군가 우리 교회가 기타 연주를 허용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실제로 기타를 쳤다, 누군가가 기타 줄을 튕겼다고 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기사거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화를 냈는데, 우리 교회에 기타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 교회를 자유주의 교회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악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누가 정하는 건가요? 허용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정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정말 놀라운 내용입니다.

첫째로, 19절에서 ‘화답하다’라는 단어를 보겠습니다. 헬라어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랄레오(Laleō)’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십니까? 라-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데-다 이런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랄레오’는 의성어입니다. 그 의미하는 바와 비슷한 소리가 납니다. 라-라-라-라, 그저 소리일 뿐입니다. 랄레오는 단지 혀의 움직임, 라-라-라처럼, 그저 혀가 움직이는 겁니다. 혀가 움직일 때 라-라-라-라 이렇게 소리가 나죠, 바로 그겁니다. 이것이 랄레오의 뜻입니다. 어떤 소리를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기의 의미는 지저귀는 것입니다. 고대 헬라어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고, 어린 아이들이 옹알거리는 것을 표현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저희 집에 어린 아기 손님이 왔는데요, 제가 한 시간 정도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바닥에 앉아있는 아이의 모습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라라라라라라' 그러면서 계속 '라라라'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랄레오(laleō')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옹알이와 새들의 지저귐에서 유래되었죠. 이 단어는 동물들이 내는 소리, 으르렁거림이나 신음소리 같은 작은 소리들을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고대 헬라어에서는 메뚜기와 귀뚜라미가 내는 소리를 표현할 때도 썼습니다. 즉, 이 단어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어린이들이 나와서 한 아이는 사포를, 다른 아이는 막대기 두 개를, 또 다른 아이는 작은 트라이앵글을, 그리고 누군가는 작은 셰이커를 들고 소리를 내는 장면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것이 바로 '랄레오(laleō)'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계시록 4장 1절에서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라는 말씀에서 쓰였는데, 나팔 소리를 뜻합니다. 고대 헬라어에서는 하프, 호른, 드럼 등 이렇게 모든 악기의 소리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0장 4절에서는 천둥을 표현할 때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요한이 말하고자 한 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소리를 낸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이 ‘랄레오’는 매우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랄레오’는 올바른 맥락에서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모든 소리를 말합니다. 기타일 수도 있고, 바이올린일 수도 있고, 드럼이나 하프, 호른, 클라리넷, 플룻, 목관 악기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저녁 예배 때에는 한 45명에서 50명이 이 모든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우리 모두가 주님께 화답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소리들을 모두 만드셨다는 것 한번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음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요? 우리가 노래를 할 수 없다면, 인간의 목소리가 항상 한 가지로만 나와서 기계음이나 컴퓨터처럼 말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너무나 비인격적일 것입니다. 10분만 들어도 귀가 울릴 테니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음의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하셔서,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요점은 모든 종류의 소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경우를 보면, 자꾸 저희 가족 이야기를 예로 들긴 좀 그렇지만 저희 막내 멜린다를 보면, 정말 웃음이 납니다. 다른 식구들보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거든요. 저희 가족은 보통 6시나 6시 15분에 일어나는데 멜린다는 5시 30분쯤에 일어납니다. 거의 매일 아침 같은 일과를 반복하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 앉아서 작은 스탠드를 켜고 책을 꺼냅니다. 성경 동화책이 잔뜩 주변에 있는데, 멜린다는 이것만 봅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거의 매일 읽어준 책들이거든요.

멜린다는 혼자서 이야기를 읽어내려 갑니다. 사실 글자는 하나도 읽을 줄 모르지만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요, 오히려 그게 더 좋습니다. 같은 그림으로도 매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서 계속 재미있어 하거든요.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다가 노래도 부르고, 짹짹거리고 소리도 흉내내고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제게 와서는 "아빠, 아빠, 들어보세요" 하더니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제가 "우리 딸이 휘파람도 불 줄 아는구나" 하니까 "네" 하더라고요. 이제 소리 내는 새로운 방법을 하나 더 터득한 거죠. 저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바닥에 앉아서 예수님 이야기를 스스로 들려주고, 흥얼거리고, 짹짹거리고, 휘파람 부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가 무엇이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으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어떤 종류의 소리가 나옵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노래입니다. 19절 하반절의 다른 부분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는, 한글 성경에는 ‘찬송하며’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멜로디를, 곡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노래는 헬라어로 '아도(adō)’입니다.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음악을 만드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죠. 누군가가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좋은 겁니다. 누군가가 이 자리에서 마음을 다해 주님께 독창을 부르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성가대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성가대를 두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전체에 사실 성가대가 나옵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주님께 드리는 찬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목소리로 노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목소리가 그리 좋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목소리로 노래해야 합니다. 아주 좋은 목소리를 가졌더라도 역시 주님께 목소리로 노래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저보다 음악을 더 잘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인간의 목소리가 현존하는 악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라고 믿습니다. 가장 유연합니다. 정말 목소리와 비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놀라울 뿐입니다. 인간의 목소리에 이토록 영광스러운 유연성이 있다는 것이 말이죠. 아마도 바이올린이 그나마 가장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목소리는 고음과 저음을 넘나드는 유연성과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정말 놀라운 도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꼭 여기 강단에 서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서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세계 최고의 바리톤 가수보다, 여러분이 주님께 부르는 노래를 통해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떤 분들은 "강단에 서지 않으면 주님을 위해 노래할 기회가 없다"라고 생각하시는데, 때로 저에게 이런 요청을 하시는 음악가 분들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제게 훌륭한 목소리로 멋지게 노래하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특송을 한 번 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 제가 묻습니다. "그 은사는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인가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재능이라면,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기쁨을 느낄 때까지 노래하세요. 뛰어난 목수들이 의자를 가지고 나와서 "제가 이렇게 잘 만듭니다"하고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처럼, 꼭 앞에 나와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파이를 잘 만드시는 분들도 계시죠. 그렇다고 18명의 어머님들이 여기 나와서 파이를 보여주면서 "제가 이렇게 잘 만듭니다"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파이를 만들어서 가족들을 즐겁게 하고, 그 재능을 주신 것을 감사하면 됩니다. 노래하는 은사가 있으시다면, 샤워할 때 마음껏 부르세요. 성경공부 모임에서 함께 부르세요. 가족들과 함께 부르세요. 그저 주님께 노래하시면 됩니다.

제가 듣기로 크리스웰(Criswell) 목사님 교회에는 솔로로 노래하고 싶어하는 교인들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의 밤을 열기로 했답니다. "오늘 밤에는 누구든지 원하는 찬양 한 절을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강단 앞에 한 명씩 서서 찬양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필요는 없지만,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누구나 노래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멜로디를, 곡조를 만든다'라는 부분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번역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일부 교회에서는 악기 사용이 죄악이라고 하면서 신약 교회에서는 악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보면 그런 주장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멜로디를 만든다'는 말의 원어는 살로(psallō)입니다. 살로 혹은 프살로는 '시편'이란 단어의 어원이 되었는데, 본문에서는 살론테스(psallontes)로 쓰였습니다. 이 단어의 본래 뜻은 '튕기다'입니다. 예를 들어 활을 쏠 때 시위를 두 손가락으로 튕기는 동작을 표현할 때도 이 단어를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튕기다'라는 의미입니다. 후에 이 단어는 하프를 튕긴다는 의미로 발전했고, 살로는 하프를 연주한다는 뜻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살로’는 어떤 악기를 연주한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나요? 소리를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목소리와 악기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아름다운 ‘살로’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입니다. 피아노는 현악기입니다. 오르간은 원래 관악기였지만, 지금은 훨씬 저렴한 가격에 관악기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서 전자식이 되었습니다. 루퍼스(Rufus)가 오늘 아침에 연주한 호른도 있습니다. 오늘 저녁 예배에서 모두 들게 되실 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기악 연주를 통한 찬양도 받으십니다. 비록 가사가 없고, 우리가 노래에서 말하는 특별한 메시지가 없더라도, 마음이 올바르다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선율의 아름다움과 장엄함, 화음, 박자, 리듬,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음악에 담긴 모든 경이로움이 하나님께 큰 찬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휴거 때는 트럼펫 솔로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환난 기간 내내 악기가 연주될 겁니다. 트럼펫이, 하나님은 정말로 트럼펫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아침 루퍼스(Rufus)가 트럼펫을 웅장하게 연주하는 것을 들었을 때, 하나님이 이 소리를 정말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루퍼스(Rufus)와 조니 젤(Johnny Zell)이 말세에 주님께 크게 쓰임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마음으로 연주하는 사람들의 악기 소리를 기뻐하십니다. 주님께 휘파람을 불거나, 흥얼거릴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내는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기뻐하십니다. 지난 수요일, 2주 전 수요일에는 아이들이 올라와서 노래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찬양이었습니다. 여기서 아이들이 주님께 작은 종을 울렸습니다.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음악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표현 방식을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음악을, 찬양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요? 바울은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즉 시편, 찬송가, 영적인 노래입니다. 쉬운 내용이니까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시는 헬라어 '살모스(psalmos)'에서 유래했습니다. 주로 구약의 시편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다른 의미로도 쓰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가를 뜻하기도 하죠. 이처럼 폭넓게 사용되지만, 흥미로운 점은 누가는 이 단어를 오직 시편을 지칭할 때만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쓴 글에서는 이 단어가 항상 시편을 의미했는데, 그 당시 이 단어가 주로 구약에서 찬송으로 부르던 시편을 의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시편을 예전만큼 많이 부르지 않습니다. 찬송가가 등장하고 저작권 문제가 생기고 사람들이 새로운 노래를 쓰고 싶어하면서, 교회는 시편 노래를 잃어버렸습니다. 최근에 잭과 대화를 나누면서 더 많은 시편을 노래로 부르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게 된 것이 제게는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몇 가지는 부릅니다. 주일 저녁에는 시편 19편이나 5편을 부르고 23편도 부르고, 다른 시편들도 부릅니다. 성가대도 시편을 직접 인용한 찬양을 많이 부릅니다. 하지만 시편을 더 자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시편만 전문적으로 부르는 팀이 많습니다. 저도 시편으로만 구성된 찬송가를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불렀던 것이 바로 이 시편 찬양이었습니다.

시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을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찬송가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새로운 시편을 가지고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의 영감된 시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노래들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을 찬양하는 노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흄노스(humnos), 즉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찬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구분해서 보자면, 이 찬송가라는 개념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1장에는 아주 훌륭한 찬송가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골로새서 1장 12절부터는 찬송가 가사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초대교회의 찬송가라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빌립보서 2장도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가라고 봅니다. 이처럼 찬송가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노래하기에 적합합니다.

그러니까 ‘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고,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령한 노래들’은 간증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노래’라고 표현되지만, 영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인 노래입니다. 무슨 뜻인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시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시편 23편의 아름다운 시와 같은 것입니다. 또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와 같은 현대의 찬송가도 현대적 형태의 시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는 “갈보리산 위에” 같은 곡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말하는 곡입니다. 영적인 노래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나 “예수 사랑하심은” 같은 곡들과 같이 개인적인 고백과 간증을 담은 신령한 노래입니다.

이 모든 것들, 즉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찬송가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노래든, 또는 위대한 간증의 고백이든 간에, 이 모두는 성령으로 가득 찬 마음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악기로 연주하든 목소리로 노래 부르든, 마음이 올바르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령 충만할 때에는 노래로 터져 나오는 기쁨, 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기쁨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음악에서 우리는 심각한 위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유명해지려고 음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노래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성경적이지 않은 생각이나 진리, 신학이 담긴 노래를 쓰는 이들도 많습니다. 세속적인 삶의 표현을 닮은 음악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세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성경에 나오는 시몬 마구스(Simon Magus), 마술사 시몬과 비슷합니다. 성령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부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기독교 음악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짜가 있다면 진짜도 항상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가짜가 있는 것은 그만큼 진짜가 가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짜가 있다면 진짜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생각을 나누면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진정한 음악을 부를 때, 무슨 일이 일납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예수님께서 교회, 즉 믿는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솔로 가수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놀라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을 받는 부분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른다면, 내가 너희를 통하여 내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시는데, 여기서 "아버지, 제가 주님의 백성들을 통해 그 찬양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넘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노래할 때, 우리 마음의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부를 때, 그것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찬양을 드리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말입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을 소멸할 때, 우리 삶에서 아버지를 향한 그리스도의 찬송을 막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이렇게 놀라운 방법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이 방식으로 사용해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찬송으로 가득 차게 하옵소서. 그리고 오늘 저녁 예배에서 우리가 노래와 연주로 함께할 때, 우리를 통해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와 연주를 듣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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