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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장을 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에베소서 강해를 지난번에 이어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잠시 쉬어야 하기도 하고, 또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의 본문은 반드시 한 덩어리로 다뤄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더욱 더 집중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중간에 멈추기보다는 잠시 기다렸다가 부활절 이후에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12절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1년에 한 번쯤은 그레이스 교회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들을 분명하게 다뤄야 한다는 부담을 느낍니다. 이번주에 어떤 말씀을 가지고 전할지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 말씀이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모든 내용을 말한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너희는 강해져야 한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영적 전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전쟁입니다. 제가 처음 그레이스 교회에 왔을 때는 마치 신혼여행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까 그 모험심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냥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계속 설교 준비하고, 주일에 설교하고 나면 또 월요일에 다시 처음부터 다음주 설교 준비를 시작해야 하고, 준비해 둔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고는 일정을 따라잡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려가야 했습니다. 정말 그냥 저에게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느 날 이것은 신혼여행도 아니고 일도 아닌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전투입니다. 전쟁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는 말의 핵심이죠. 에베소서 4장 1절의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고…”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과 하나됨으로 행하는지, 이방 사람들처럼 헛된 마음으로 행하지는 않는지, 새 사람을 입고 있는지, 정욕이 아니라 사랑 가운데 행하는지, 어둠이 아니라 빛 가운데 행하는지, 미련함이 아니라 지혜 가운데 행하는지, 우리가 술 취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한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노래가 아니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그리고 교만하고 개인주의적인 태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복종하고 있다면, 아내가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가 자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양육하고 있다면, 고용인과 고용주가 성령 충만한 영향력 속에서 성경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체계를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걷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CBS 방송국에서 전국여성단체 소속의 여성 페미니스트와 한 시간 동안 토론해 달라는 요청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알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누군가가 보내주는 신문 기사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기사를 오려서 저에게 보내주시는데, 그 내용을 보니까 우리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든 전반적으로든 잘못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걱정하며 미친 것은 아니냐고 묻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점은 이겁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 속에서 어떤 잘못된 것들에 대해 분명하게 굳게 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다만 교회의 규모와 영향력,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큰 은혜 때문에 이제 세상이 더 이상 이것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을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 속에서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 참 신나는 일이지만,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에 복을 주실 때에, 사탄은 반드시 그 교회를 공격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레이스 교회에 오면서 구석에 편안하게 앉아서 둥지를 틀고 조용히 지내면 되겠다고 생각하셨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방식으로 시험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신자를 군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복을 주시는 동시에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교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매일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편지를 받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의 목회자들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 옵니다. 인도의 이름도 생소한 지역, 또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유럽,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아프리카 전역, 뉴질랜드, 호주에서 보내온 목회자들의 편지도 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이런 내용의 편지들이 계속 옵니다. “목사님,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시길래 하나님께서 어떻게, 왜 그렇게 복을 주고 계신지 알려 주십시오.” 또 저는 목회자와 교회만이 아니라 미디어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세상의 시선도 접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으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질 때에는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했을 때를 떠올립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들어갔을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죠. 사도행전 19장입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은 아마 2년 내내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가르쳤을 겁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자기가 사용하던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 없애 버렸습니다. 도시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은을 녹여서 작은 신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은 더 이상 장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깨뜨리기 시작했고, 도시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빠져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바울이 세운 그 위대한 에베소 교회는 이후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리고 디모데와 아볼로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가장 뛰어난 사람들, 가장 좋은 환경, 가장 빛나는 역사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이처럼 부흥하기 시작하자 사탄의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저는 에베소서 3장 20절을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저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상상조차 못할 일들을 이루어 갈 때 영광을 받으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겠다고 완전히 헌신할 때, 에베소서 4장, 5장, 6장이 요구하는 삶을 살겠다고 전적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이제 막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시작되는 순간, 사탄은 반드시 대적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죠. 구약으로 돌아가 보면, 다니엘 10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셨을 때 귀신이 그 천사를 막아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더 강한 대천사 미가엘을 보내셔서 귀신을 몰아내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유다서 9절을 보면 미가엘 대천사가 모세의 시체를 두고 사탄과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탄은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고 했죠.

이렇듯 매우 높은 차원의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엄청난 갈등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가 매우 자기만족적이고 안일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대면하기보다는 체계에 맞춰서 춤을 추듯이 가볍게 걸어가고, 그 체계에 적응하려고만 합니다. 세상과 같이 되면 세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세상 체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4장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과 9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다시 말해서, 사탄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분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입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 이름을 아는 것만큼이나 분명히 알고 있다. 내일 해가 뜨는 것을 아는 것만큼 확실하다. 내가 떠나면 외부에서는 이리가 들어오고 내부에서는 거짓 교사가 일어나서 여러분을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경고하는 사역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처럼 복을 주시고, 우리의 사역을 지금처럼 넓혀 주시고,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악한 세상 속에 길을 내고 계신다면,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러 올 겁니다.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사탄이 어떻게 공격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탄의 계략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 안 됩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할까요? 요한계시록 1장을 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귀신 들린 소녀가 있는 방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여러 귀신에 들려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아주 여러 개였습니다. 소녀의 입을 통해서 소리가 나왔지만, 분명히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방 안에서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책상을 뒤집어 엎고, 물건을 부수고, 사납게 날뛰었습니다.

제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에, 소녀가 의자를 팍 치더니 광기 어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소녀의 목소리가 아닌, 제가 알고 있던 그 소녀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을 내보내. 저 사람은 안 돼. 빨리 내보내.” 제 반응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저는 아주 흥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제가 누구 편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 기뻤기 때문이죠. 귀신들은 압니다. 분명히 압니다.

귀신들은 저를 알고, 이 교회를 알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서 하시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으려고 할 겁니다. 바로 여러분을 통해 막으려 할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슬처럼 연결된 고리들의 모임인데, 가장 약한 고리를 노리기 때문이죠. 사탄은 반드시 공격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격할까요? 저는 주님께서 그 답을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편지에서 보여주셨다고 믿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그 중의 첫번째가 에베소 교회이고 나머지 여섯 교회 모두 에베소 교회로부터 세워진 교회들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이 일곱 교회에 주신 편지 속에서 사탄이 교회를 어떻게 공격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반드시 이 부분에 대해서 교회에 경고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1장 9절을 통해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 때문에 유배되어서 밧모 섬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환상을 통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하셨습니다. 10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날에,” 일요일입니다,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성령님이 계시를 주시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주님께서 이 일곱 교회에 하실 말씀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교회들은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들이지만, 동시에 교회 전 역사에 존재하는 교회의 다양한 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교회는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을 포함한 모든 시대에는 에베소 교회 같은 교회, 서머나 교회 같은 교회, 버가모나 두아디라나 사데나 빌라델비아나 라오디게아와 같은 성격을 가진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들은 역사적 교회일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의 유형을 보여줍니다.

이제 12절을 보겠습니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이 일곱 금촛대는 무엇입니까? 20절 하반절에 설명이 나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본 환상입니다. 요한은 각 교회를 상징하는 촛대를 보았습니다. 촛대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는 존재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소아시아의 그 일곱 교회가 각기 하나의 촛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일곱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서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서 움직이시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신데,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이 입던 옷입니다. 이 모든 직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또 허리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거룩함과 정결함을 상징합니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교회를 살피고 꿰뚫어 보시는 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뵙습니다.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모습으로 주님께서 서 계십니다. 흰색으로 빛나는 머리털은 정결함을 상징하고, 불꽃 같은 눈은 교회를 평가하시면서 깊이 살피며 꿰뚫어보시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교회를 심판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또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라고 했습니다. 아주 크고 위엄 있고 권위 있는 음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20절에 설명이 나오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교회의 사역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들 사이를 걸으시면서 교회를 평가하고, 살피고, 꿰뚫어 보시고, 조사하십니다. 일곱 편의 편지를 쓰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신 것이죠.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가 나타나고, 그 결과가 2장과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2장에서 편지들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교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일곱 편지는 정말 놀라운 편지입니다. 그 중의 다섯 개에는 경고가 담겨있습니다. 표시해 두십시오. 경고가 없는 교회는 두 개뿐입니다.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에는 경고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머나는 박해받는 교회였고, 빌라델비아는 복음을 전하면서 적극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두 교회가 마치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으면 정결함이 유지됩니다. 왜냐하면 불순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박해받는 공동체에 속하려는 사람은 그 믿음이 정말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박해받는 교회는 정결합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계속 세상을 향해 있고, 적극적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고 있으면, 교회는 안으로만 몰두하는 병을 피할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열린 문을 가진 교회는 복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 반대와 박해의 불길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던 교회, 이 교회 또한 복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교회에는 아주 심각한 경고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섯 가지 경고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아주 가벼워 보이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무겁고 심각해져서 결국에는 배교에까지 이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상 교회가 아닌 상태가 되죠. 이런 하향적 흐름, 이 흐름이 교회사 속에서 실제로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제가 이번주에 그레이스 교회를 바라보면서 이 다섯 가지 경고를 다시 읽고 있었는데,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수천, 수만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바로 그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너무 좋습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출발합니다. 그러나 내리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저는 미국에서 4천 석 규모의 예배당 여러 곳에 가 봤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앞쪽에 한 150명 남짓한 자유주의자들이 모여 있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직접 제가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가봇”이라고 쓰신 것 같은 교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발코니를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시에서 허락을 받은 뒤에 뒤쪽에 한 200석이 넘는 좌석을 이미 추가했죠. 발코니뿐만 아니라 교육관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아주 기쁘고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발코니가 세워질 때,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이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 교육관에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아이들과 청년들과 어른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경고를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탄은 이 그레이스 교회를 거대한 채석장처럼 돌덩이만 남도록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경고입니까? 이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에베소 교회에 닥쳤던 문제입니다. 첫사랑을 버렸습니다. 첫사랑을 버려 버렸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설교 한 편이 가능할 만큼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교회에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의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당시에 에베소에서 벌어진 일들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혼란하고 소동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기존의 종교 체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작은 무리의 성도들이 타락한 도시 한가운데서 마치 정결한 섬처럼 시작했습니다. 도시 전체에 침투해서 정결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복잡하고 견고했던 종교 체계들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그 작은 공동체의 시작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놀라웠습니다. 또 바울보다 더 적합한 목회자가 있을까요? 또 가장 뛰어난 설교자이자 성경 해석자였던 아볼로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가르칠 수 있었던 디모데보다 더 좋은 목회자가 있겠습니까? 에베소 교회에 이런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활동적인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코포스(kopos)’, 수고를 안다. 네 인내, 휘포모네(hupomone)를 안다. 어려운 때에도 끝까지 견뎠음을 안다.” 에베소는 결코 쉬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다산과 풍요의 여신인 아데미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거대한 신전은 말 그대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수많은 내시들, 수천 명의 창기 여사제들, 노래하는 사람들, 피리 부는 사람들, 각종 음악과 광란, 술취함, 방탕, 성적 타락이 뒤섞여서 광기 어린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그 신전의 도덕성을 가리켜서 짐승보다 못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가 그 문화를 뒤흔들어서 우상 판매가 줄어들면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정말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견디고, 버티고, 신실하게 시작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에베소 교회는 죄를 다루는 교회였습니다. 죄를 조금도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악을 행하면 그 문제를 반드시 다뤘습니다. 죄를 용납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은 니골라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성적 부도덕을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니골라에 대해서 “염소처럼 쾌락에 탐닉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방탕하고 음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행동들, 곧 음란과 관련된 악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 수고하고, 인내하고, 죄를 용납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2절을 보십시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이는 “너희는 거짓 교사를 다루고 있고,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있고, 신앙고백과 신학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으로 사람을 분별하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교리적으로 아주 견고하고, 죄를 다루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정말 훌륭한 교회 같지 않습니까? 3절을 보면 이렇게 반복됩니다. “또 네가 참고.” 과거에도 많은 일을 견디면서 계속 바르게 서 있었다는 겁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가장 높은 동기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동기입니다. 가장 고귀한 동기이죠. 에베소 교회는 동기까지도 옳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기고, 주의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견고한 교리가 있었고, 거짓 교사들을 드러내는 일에 힘썼고, 죄를 짓는 자들을 징계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잘 갖춰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1장 14절로 돌아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 불꽃 같다고 했습니다. 살피고, 꿰뚫어 보는 눈입니다. 그 불꽃 같은 주님의 눈이 4절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사랑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사랑 없는 정통, 사랑 없는 활동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 편지를 읽었을 때, 아마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정통적이고 근본적이고 복음주의적인 만큼 하나님을 가장 잘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셨던 바로 그 질문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내 양을 먹이라 명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를 묻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야,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후에야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그레이스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사역을 하고 있고, 너무 많은 일에 참여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어느 순간 활동 자체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는 역사상 위대한 교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꿰뚫어 보시는 눈이 그 치명적인 결함을 찾아내셨습니다. 뜨거운 마음을 버리고 차가운 정통 교리만 남은 그런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적으로 옳은 사역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안에 열정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께, 그리고 저에게도 경고합니다. 장로들과 목회자들로부터 우리를 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까지 모두에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사랑 없이 정통적인 교리만을 행하는 순간 내리막의 첫번째 단계로 접어든 셈입니다. 사탄이 발판을 얻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아마 나머지 단계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 알게 될 겁니다. 신앙의 신혼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교회 일을 하게 되는 순간, 그때가 정말 위험한 때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더 이상 설레지 않습니까? “그냥 하기는 하는데, 예전 같지는 않아요” 이렇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한다면, 이미 첫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자신이든, 가족이든, 여가이든, 돈이든, 성공이든, 무엇이든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여러분의 삶에서 신혼이 끝났다면 정말 심각한 위기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통적인 교리를 수행하는 방식이 되어 버렸다면, 이미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그렇게 느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으실 텐데, 5절이 답을 줍니다. 세 가지입니다. 먼저 ‘기억하라’입니다. 기억하라. 놀라운 일입니다. 영적 이탈은 대부분 ‘망각’에서 시작됩니다. 영적 이탈은 대체로 망각에서부터 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억하라.” 예전이 어땠는지를 잊으셨습니까? 여러분의 사랑이 식기 전에 어땠는지 기억하십시오. 그 따뜻함과 그 불꽃과 그 기쁨과 그 벅찬 감격을 기억하십시오. 기억해 내십시오.

두번째입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 추락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잃어버린 상태,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린 상태, 사람들을 향한 첫사랑을 잃어버린 상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할 상태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어떤 신자를 볼 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첫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 때 온 마음을 다한 뜨거운 사랑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첫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세번째입니다. 기억하고, 회개하고, 다시 행하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예전 그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만약 지금의 섬김이 차갑고 기계적인 정통 교리 수행에 불과하다면,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릎으로 돌아가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전도와 교제와 기도와 나눔과 찬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불 가까이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지도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고, 처음 행위로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5절에 기록된 일이 그대로 일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는 결국 죽었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위대하고 복음적이고 정통적이고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이었던 그 교회가, 첫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두번째로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장 12절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건너뛰었는데, 박해받는 교회였기 때문에 주님의 경고가 없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이십니다. 계시록 19장과 히브리서 4장에 나오는 것처럼 입에서 나오는 심판의 검입니다. 주님께서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잠깐 멈추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버가모야, 너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살피고 꿰뚫어 보는 눈이 모든 것을 드러낸다. 너의 행위를 내가 안다. 네가 참여하고 있고, 활동하고 있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 그리고 네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안다. 정말 힘든 곳에 살고 있구나.” 실제로 버가모는 매우 험한 도시였습니다. 버가모는 황제 숭배, 그러니까 가이사를 신으로 섬기는 중심지였습니다.

또 버가모는 제우스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제우스는 그 신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이라고도 불렸죠. 버가모 사람들은 제우스를 위해서 아주 거대한 제단을 만들었는데, 왕좌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13절에 나오는 “사탄의 권좌”가 바로 이 제우스 제단을 가리킨다고도 합니다.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거대한 제단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버가모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치유의 신을 섬겼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늘 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버가모에는 이 신을 위한 신전과 의학학교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의사의 상징에 이 뱀이 그려져 있는 것도 실제로는 그리스 신화, 그러니까 바로 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 신전의 바닥에 독이 없는 뱀들이 아주 가득했는데, 병든 사람들이 그 바닥에 누워서 자신의 몸을 그 뱀이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뱀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 그 자리에 치유가 일어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버가모에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극심한 이방 우상 사회 한가운데서 작은 기독교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 아노라.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 그러나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았고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심지어 너희 중에 한 사람, 안디바가 사탄이 사는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그러하였다.” 여러분,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힘든 도시에서 살아도, 힘든 환경 속에서도, 악한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드는 일에 있어서는 기준을 낮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있는 곳이 얼마나 힘든 곳인지 안다. 그렇다고 해서 기준이 바뀌지는 않는다. 어렵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너희가 참아냈고, 순교했고, 주를 위해 헌신했고, 내 이름을 붙들었다고 해도,”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무엇입니까?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도록 부추겨서, 우상 숭배에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교회가 이방의 체계와 타협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세상과의 타협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방인들과 통혼했습니다. 실제로 신자들이 비신자들과 결혼하고 있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매우 가능성이 높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버가모 교회가 세상과 연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탐하고, 세상의 방식에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고린도후서 6장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세상적인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교회가 세상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세상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지난 몇 달 동안 계속 말씀드려 왔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교회가 얼마나 무분별하게 세상을 흉내내고 있는지를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세상이 가정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교회도 거기에 맞춥니다. 세상이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교회도 그대로 맞춥니다. 세상이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교회도 그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하는 모든 일에 교회가 편승합니다. 세상과 같아지고 싶어하는 것이죠. 충격적입니다. 정말 충격적인 일입니다. 세상이 물질주의에 빠지면 교회도 물질주의에 빠지고, 세상이 오락에 집착하면 교회도 오락에 집착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읽은 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거듭난 사람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교회에 실제로 등록한 교인 수는 반대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기사에서는 매우 통찰력 있는 지적을 했습니다. 이른바 ‘전자 교회’의 부상이 사람들이 지역 교회에 속하지 않게 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집에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으면 교회가 마치 눈앞에 쫙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옷을 차려입을 필요도 없고, 집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것 또한 환상입니다. 텔레비전 자체가 환상이고, 이 세상은 그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집에 돌아가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으면, 그 교회는 언제나 완벽한 교회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찬양, 정말 환상적이죠. 멋진 옷을 입은 오케스트라에, 뛰어난 가수들이 앞에 나오고, 행진이 이어지고, 조명과 카메라 각도,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연출됩니다. 설교자는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딱 서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것이 바로 ‘환상적인 교회’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옆에 앉을 필요도 없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주차할 자리 때문에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아주 정말 근사합니다. 가끔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서 약간의 헌금만 보내면,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일이라고 말해 주고, 여러분이 얼마나 헌신적인 사람인지 증명하는 종이 한 장을 보내 줍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한 작가는 전자 교회가 오락을 기반으로 구축되었다고 했습니다. 전자 교회는 교회가 항상 비난해 왔던 세상 것들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전자 교회는 결국 문화적 종교의 표현에 불과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부한다고 고백하는 가치와 성공의 화려함과 장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자 교회와 경쟁할 수 있는 교회는 우리와 같은 큰 교회뿐입니다. 작은 교회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마틴 마티(Martin Marty)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전자 교회 현상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늦은 토요일 밤, ‘보이지 않는 종교’에 속한 남녀가 프릴 달린 셔츠와 분홍색 턱시도를 입은 남자, 머리를 높이 올리고 깊게 파인 옷을 입은 유명 여성들이 ‘거듭난 간증’이라는 외피를 쓰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흥분을 즐긴다. 그리고 주일 아침이 되면 시청자들은 분수대가 튀어 오르는 가운데 성령의 연예인들이 마이크를 어루만지고, 매우 전문적인 은사주의 지도자가 자신들을 즐겁게 해 주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흥분을 즐긴다.”

“그 사람들이 과연 텔레비전을 끄고, 집 앞 거리를 걸어 내려와 진짜 성도들의 모임, 죄인들의 모임, 음정이 불안한 성가대, 땀냄새 나는 평범하고 투박한 사람들,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랑해야 할 사람들, 은혜를 설교하면서도 제자의 삶으로 부르는 평범한 목회자가 있는 교회로 갈 것인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청지기 직분을 간청하는 곳으로 말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전자 교회가 적어도 그리스도를 전하고 어느 정도는 선한 일을 할 수도 있으니 그냥 두자. 그 구성원들이 그 비용을 치르게 하자. 그러나 교회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분명히 깨닫고, 값싼 은혜의 유혹이나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는 십자가의 언어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길을 가야 한다.”

아주 직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제발 현실 속에서 살아갑시다. 우리가 속한 이곳이 바로 진짜 세상이고, 진짜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면서 너무 안일해지고 너무 편안해지다 보니 결국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겁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버가모 교인들은 세상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세상을 유혹하고, 세상을 조금 끌어들여서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의 일을 조금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5절에 나오는 그 약간의 음란과 타협쯤은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장로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장로 두 명이 서로 배우자를 바꾸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그 일에 대해서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불편해할까봐 그냥 덮어 두었답니다. 교회가 죄를 용납하고, 조금씩 타협하기 시작하면, 겉으로는 여전히 같은 말씀을 전하고 여전히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흰개미처럼 기초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잘 들으십시오. 사탄이 교회를 어떻게 공격하는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아주 교묘하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첫사랑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나면 어느 순간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버리면 타협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의 가장 큰 소망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광을 지키는 것이 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체계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는 순간, 세상의 함정에 빠지지가 훨씬 쉬워집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겁니다. 인간은 반드시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결국 주변의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 이제 세번째 교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18절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살피고 꿰뚫어 보시며 심판하러 오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 모든 일들을 점점 더 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보십시오. 정말 열심히 일하는 교회입니다. 아주 열심히 일하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세상과 결혼했다면, 이 두아디라 교회는 기념일을 축하하고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죄를 용납했습니다. 에베소는 첫사랑을 잃었고, 버가모는 세상과 타협했고, 두아디라는 죄를 용납했습니다. 이제 죄의 물꼬가 완전히 터져서 자유롭게 흘러들어온 그런 상태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19절에서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랑도 있었고, 섬김도 있었고,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죄가 마음껏 활개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실제로 음행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고린도 교회도 결국 사라졌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여자 이세벨은 사람들을 꾀어서 당시의 우상 숭배에 끌어들였습니다. 제가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그 시대의 우상 숭배는 성적인 행위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세상의 더러움과 썩어짐 속에 깊이 빠져들어 그 안에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지금 그레이스 교회 안에서도 과거보다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과거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결혼 전 상담을 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동침한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이제 아주 드문 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그런 대답이 오히려 드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패역하고 악한 세상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고, 방어선을 세우지 않고,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죄로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죄를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주변에 악한 일이 더 많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인구 수가 늘어나면서 자연히 더 많은 죄가 눈에 띄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죄를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침상을 좋아하던 자이니까 침상에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음행을 즐기던 자이니 음행의 자리, 심판의 자리로 던지겠다는 겁니다.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이 여자의 가르침을 따랐던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사망의 침상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교회가 보고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교회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신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음란의 자리는 죽음의 침상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간음했기 때문이죠. 22절은 그들이 실제로 간음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혼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과 음란에 빠지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죄를 용납하는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반드시 돌이키라.”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22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그러나 그 일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그러나 악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용납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교회가 지금도 너무 많습니다. 죄를 다루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누구와도 부딪히기 싫어합니다. “아니, 그러면 목사님, 목사님 교회는 성도들을 징계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우리 교회는 징계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는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아요. 괜히 사람들 마음 상하게 할까봐요.”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죄를 용납하는 태도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입니다.

점점 타락해 갑니다. 먼저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님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타협이 시작됩니다. 조금 타협하다가, 그 타협이 곧 용납으로 바뀌고, 결국 죄가 교회 안으로 넘쳐 들어옵니다. 그렇게 두아디라 교회의 상태에서 그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데, 바로 다음 장 1절에 나오는 사데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프로그램에 만족하는 교회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생명이 사라집니다. 죄를 용납하는 교회는 결국 타락하고 죽은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죽은 교회, 시체 같은 교회입니다. 사데가 고대 사회에서 위대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사데의 가장 위대한 왕은 크로이소스(Croesus)입니다. 영어로 누군가 매우 부유하다고 말할 때 “크로이소스처럼 부자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사데는 부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는 결국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도 사라졌습니다. 타락해서 이미 생명을 잃은 죽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저 겨우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죠. 2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사데 교회는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남은 것은 단지 형식뿐이었습니다. 마치 ‘늙은 선원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시체들이 배를 움직이고, 죽은 자들이 노를 젓고, 죽은 자들이 배를 조종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기능적으로는 움직이고 있었지만,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이러면 교회는 단순한 활동 집단이 되고, 그저 프로그램의 연속이 되어 버립니다. 각종 강의가 열리고, 소그룹이 모이고, 어린이, 젊은이, 성인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마련됩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교회는 활발해 보이고, 사람들은 꾸준히 찾아옵니다. 그런데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가봇(Ichabod)”,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그 말이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이 흐름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먼저 첫사랑을 잃습니다. 그 첫번째 타오르던 사랑, 모든 것을 삼킬 듯한 열정적인 사랑을 잃고 나면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죄가 밀려 들어오고, 그 죄를 받아들이고 용납하게 됩니다. 결국 죄가 교회를 완전히 장악하면 영적인 생명이 질식당하고, 그 결과는 죽은 교회입니다. 삼손처럼 움직이기는 하지만 힘은 없습니다. 결국 희생자가 되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주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아직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교회를 겨우 붙들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모두 죽어가는 중에 몇 사람만이 살아남아 있습니다. 처음엔 에베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대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첫사랑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소수의 사람들만이 남았습니다. 흰 옷을 입은 몇몇, 끝까지 신앙을 지킨 몇몇. 그저 아주 조금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의 몰락에서 마지막 단계는 사탄의 최후 공격입니다. 바로 3장 14절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첫사랑을 버린 교회, 세상과 타협한 교회, 죄를 용납한 교회, 형식과 의식과 조직과 프로그램에 만족하는 교회를 경고하시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경고하시는 교회가 바로 배교한 교회입니다. 사실상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교회이죠.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우리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뜻은 이것입니다. “차갑다”는 것은 복음에 무관심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원을 받지 못했고, 관심도 없고, 전혀 개의치 않는 상태입니다. 위선적인 것도 아닙니다. 가식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저 구원받지 못한 상태, 아무런 감동도 없고, 아무 관심도 없는 상태입니다.

“차라리 네가 그렇게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했으면 좋겠다. 믿고, 구원받고, 속량된 상태, 이런 상태라면 좋겠다. 그런데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미지근하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최악이다.” 신앙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구역질 나게 하는 위선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차가운 자들에게는 주님의 사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뜨거운 자들은 주님이 안으십니다. 그러나 미지근한 자들은 입에서 토해 버리십니다. 위선자들입니다. 바로 위선적인 교회, 가짜 교회,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교회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자유주의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성경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기독교 신앙의 모든 위대한 핵심 교리들을 부정하면서도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르는 모습, 그런 모습이 존재합니다. 인본주의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인본주의 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자입니다. 돈이 많아졌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보세요. 우리는 모두 성공했습니다. 큰 기관이 되었습니다. 돈도 많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이런 류의 거대한 교회, 거대한 교단, 거대한 종교 체계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모든 돈과 모든 외양과 모든 장비와 모든 치장을 다 갖추고 있지만, 배교한 교회입니다. 결국 주님이 입에서 토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지금 자기 자신을 잘못 평가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경고하시는지가 보이십니까? 교회는 배교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결국 사라졌습니다. 첫사랑을 잃은 교회는 너무도 쉽게 세상과 타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서, 혹은 기도하기 위해서 교회에 잘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는 때때로 마음에 걸립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려면 뭔가를 보여 줘야 하고, 뭔가를 즐기게 해야 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큰 공연 같은 걸 하면 다 모일 텐데요” 이런 말을 제가 듣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공부합시다”라고 하면 늘 충성된 아주 소수만 모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점점 그쪽 방향으로 방향을 틉니다. 성도들을 즐겁게 해주고, 세상을 흉내내고, 그렇게 하면서 타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죄를 용납하는 교회입니다. 세상과 결혼한 교회입니다. 물질적 풍요에 만족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교회입니다. 죽은 교회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사탄의 공격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부제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3장 7절입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가 세상에 나아가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 이 문은 활짝 열린 문이다. 교회가 이 문으로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설령 사탄의 회당이 앞에 있어도, 환난의 때가 와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전도는 교회를 지키는 방부제입니다. 전도는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끌어내서, 두려움을 넘어서게 도와주고,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리고 2장 앞부분에 나오는 그 작은 교회, 서머나 교회가 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교회였습니다. 비방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담대하게 맞서고, 그 결과를 기꺼이 감당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우리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편에 설 수 있고, 다른 다섯 교회가 빠졌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이 어떻게 교회를 공격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경계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경고를 받고, 깨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이 교회를 지켜 주옵소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증거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변에서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았고,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쇠퇴해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신실하게 하여 주옵소서. 첫사랑을 끝까지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죄를 용납하지 않게 하시고, 형식과 프로그램과 기능과 조직으로 대체하지 않게 하시고, 미지근한 위선자들로 교회가 채워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참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주님께서 교회의 등불들을 다듬으실 때, 우리의 등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밝게 빛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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