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도 에베소서 6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니셨다면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씩 풀어가는 강해 설교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차근차근 배우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어떤 본문은 굉장히 무겁고,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너무 많아서 결과적으로 신학적인 연구에 가까운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한 가지 주제에 더 깊이 파고들게 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주제별 설교를 하게 됩니다.
지금 에베소서 6장을 살펴보는 과정이 바로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여전히 본문을 따라가면서 강해 설교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빠르게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매주 한 가지 전신갑주만을 다뤘죠. 그리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하나만 다룰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마저도 다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 다음주까지 이어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에베소서 전체를 살피며 참으로 놀라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대해서 깊이 살펴보고 있죠. 오늘 아침 본문 에베소서 6장 13절부터 17절까지를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부터 17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위대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특히 사탄과 그 귀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들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몇 주에 걸쳐서 이 내용을 살펴봤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 서론만 다시 언급하고 곧바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수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주에 든 생각은, 신자에게 주어진 특권을 가장 위대하게 풀어내는 서신인 이 에베소서에,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이라는 중대한 주제가 함께 담겨 있다는 사실이 어떤 분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처음 다섯 장에 걸쳐 하늘의 영광스러운 진리들을 찬란하게 펼쳐 보입니다. 그런데 6장에 이르러 갑자기 지옥이 등장합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천사들에게 증거되는 장면을 찬미하였는데, 6장에서는 귀신들과의 직접적인 싸움이 등장합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권능과 영원한 계획이 드러났지만, 6장에서는 사탄이라는 괴물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납니다. 이처럼 에베소서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하늘에서 시작해서 지옥으로 끝나고, 천사로 시작해서 마귀로 끝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적하는 사탄의 공격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높고 거룩한 특권으로 시작했다가, 그 특권을 빼앗으려는 죄와의 싸움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는 대조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특권이 클수록 싸움도 커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현실이 분명할수록, 그리스도의 왕권을 끌어내리려는 사탄의 공격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특권은 언제나 원수와의 충돌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신자의 지위와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한 뒤에,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은 존재로서의 복됨을 충분히 찬양한 뒤에, 5장 끝과 6장에 이르기까지 신자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과 역할을 설명한 다음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싸움을 준비하라.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저지당하고, 방해받고, 공격받고,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방해를 받을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갈등을 세 가지 차원으로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과 육체 사이의 갈등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이의 갈등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육체나 세상과의 갈등이 아니라 신자와 귀신 사이의 갈등입니다.
물론 이 싸움을 나머지 두 가지 싸움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세상과 육체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바울은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11절에서 “마귀의 간계”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12절에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부르는 이 존재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는 신자가, 어떻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도로 조직되고 치밀한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참된 승리를 거둘 수 있느냐는 질문이죠. 그래서 조금 앞부분으로 돌아가서,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들을 먼저 짚어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로 돌아가 보면 위대한 진리가 하나 나옵니다. 앞선 세 장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에 담긴 그 의미 때문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신자의 지위에 대한 요약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필요한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4장 1절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든 자원, 모든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그 능력에 합당하게 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5장 18절이 그 열쇠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성령 충만함을 통해 발휘됩니다. 주님께서도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권능을 붙들고 살아갈 때에 승리합니다.
이제 6장으로 넘어가 보면, 사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에 명령도 주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발휘되는 능력의 자원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에 입대한 우리는 전장에 나아가면서 승리를 성취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쉬울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는 끝이 없습니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잠시 소강 상태에 있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끊임없이 전투가 계속될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고, 말씀으로 양육받아 성숙해질수록 승리하는 횟수가 증가합니다. 승리하는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승리와 패배를 모두 경험합니다.
이번주에 저는 보스턴의 한 청취자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에는 이렇게 완벽한 예화가 될 줄 전혀 몰랐을 겁니다. 자, 읽겠습니다. “친애하는 존 맥아더 목사님께, 목사님의 사역은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감사의 말씀을 드릴 뿐 아니라 재정적인 후원을 하고 싶은 마음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보스턴 지역을 포함해, 어디에서든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영적 성장과 사역의 확장을 위해 계속해서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23살 청년으로, 19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말씀 안에서 성장하기도 했고, 비틀거리기도 했고, 넘어지기도 했고, 짓눌리듯 무너진 적도 있었습니다. 신경질적인 율법주의자에게 귀신 들렸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기도 했고, 여자 친구를 임신시키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이제야 영적으로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 남성은 분명히 전쟁 한가운데 있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보시다시피 모든 것이 잘 되어 온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문단에서 이렇게 이어갑니다. “탄약을 좀 보내 주십시오. 지금까지 저는 전선을 만들고 참호를 팠습니다. 저는 지휘관께서 돌아오실 때 부끄러운 모습으로 붙잡히는 병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복무 기록에 이렇게 적히기를 바랍니다. ‘전시 경보 상황 속에서 반복적으로 명령을 어기고 무단 이탈을 했던 병사가 마침내 전신갑주를 입고 지휘관께 복귀하여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용감하고 담대하게 싸웠다. 무엇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적을 공격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들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모든 것은 오래 참고 용서하시는 지휘관의 지도로 가능했다.’ 아멘.” 그리고 편지의 끝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서받은 죄인) C.T. 드림.”
이 성도님은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렇죠? 분명히 전쟁 중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전신갑주 착용 유무의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14절 이하에 나오는 전신갑주로 다시 돌아가서, 오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봅시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처음에 강해 설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약 8년쯤 전에 제가 에베소서를 가르칠 때에 전신갑주를 2주 만에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8주에서 10주 정도가 걸리고 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에 이 놀라운 전신갑주 하나하나를 다시 살펴보면서, 너무도 풍성한 진리의 보고가 열리는 바람에 한 번에 하나씩밖에 살펴볼 수가 없었죠. 그리고 오늘 다룰 다섯 번째도 이번주와 다음주 이렇게 2회에 걸쳐서 살펴볼 겁니다.
먼저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내용은 마지막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다뤄집니다. 여기서는 내용이 아니라 태도가 중심입니다. 바울은 알레데이아(alētheia)를 진실한 태도, 헌신된 태도, 위선이 없는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준비를 뜻하는 유대적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기대와 각오를 의미합니다. 군사는 전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미 결단을 내리고 군대에 들어와 허리를 동이고 승리를 향해 전투에 임하는 사람입니다. 승리를 향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았습니다.
두번째, 14절에 나오는 의의 호심경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무장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는 정결한 삶, 그러니까 의로움과 거룩함인데, 실제적인 의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된 의를 이미 받았습니다. 우리 의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반드시 정결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의 급소를 공격합니다. 의로움으로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부분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를 틈탑니다. 그리고 세번째, 우리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의 복음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한때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다른 편에 서 있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는 사실로 만들어진 신발을 신고 사탄 앞에서 굳게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 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는 확신 위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 장비들입니다. 늘 몸에 지니고 있는 장비이죠. 그런데 전투가 정말로 치열해지면 나머지 장비를을 들어야 합니다. 16절에서는 동사가 “가지고”로 바뀝니다. 17절에서도 “가지라”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군사는 호심경을 이미 몸에 붙이고 있고, 신발도 이미 신고 있고, 허리띠도 이미 동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전투가 격렬해지면 투구를 집어 쓰고, 칼을 들고, 방패를 집어듭니다. 그러니까 화살이 본격적으로 날아올 때를 대비해 즉각적으로 준비하는 장비들입니다. 지난주에 16절로 넘어가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라는 말씀을 살펴봤죠. 사탄이 유혹의 화살을 쏘려고 한다는 것, 그 불화살을 꺼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마귀의 거짓말을 믿은 겁니다. 마귀의 말에 속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사탄의 말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방패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 복을 받을 것이다.” “내 말대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내 말대로 행하면 행복할 것이다.” “내 말대로 행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내 말대로 행하면 참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 한번 지어봐, 재밌을 거야. 하나님? 신경도 안 쓰실 거야. 징계하지도 않으실 거야. 에이, 그냥 해. 재밌잖아.” 누구를 믿습니까? 사탄을 믿으면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방패의 의미입니다.
이제 오늘 아침에는 다섯번째 장비로 넘어가겠습니다. 17절에 나오는 놀랍고도 놀라운 진리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가지라.” 성경에는 이 구절이 아주 짧지만, 오늘 이 주제를 다 다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마 다음 주까지 이어질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투구? 쉬운 거 아닌가요? 구원받는 거잖아요”라고 이렇게 말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먼저 투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로마 군사는 투구 없이 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로마 군사는 투구를 제대로 쓰는 데 아주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투구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재질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는 가죽에 금속을 덧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이 깃털 장식이 달린 모습으로 본 적이 있을 텐데요, 그렇게 주조해서 만든 단단한 투구입니다. 소속된 부대나 임무,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을 착용했습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장비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했을까요? 한편으로는 날아오는 화살이지만, 더 주된 대상은 대검입니다. 17절에서 언급되는 ‘마카이라(machaira)’라는 작은 단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길이가 한 1미터에서 1미터 20센티미터에 이르는 아주 큰 대검을 들고 싸우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손잡이가 아주 매우 크고 무거워서 야구 방망이처럼 두 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그런 무기입니다.
이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 올려서 휘두르면 말 그대로 적군의 머리가 쪼개졌습니다. 대검을 사용하는 이유이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아래에 있는 보병들을 향해서 마구 휘둘러 댔습니다. 이 대검은 실로 엄청난 무기였습니다. 그래서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구가 필요했습니다.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대검은 두개골을 짓누르고 으깨고 갈라 버릴 만큼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봤습니다.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두개골 한가운데가 완전히 갈라진 해골이 발견되었는데, 연구자들이 누군가가 대검으로 머리를 찍어내려서 생긴 흔적일 것이라고 추정을 했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투구를 써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투구는 구원의 투구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구원을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군대에 들어왔고, 사탄과 싸우고 있고, 의의 호심경을 입었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었고, 믿음의 방패를 들었으니 이제 구원을 받으라,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구원 문제는 이미 끝난 일입니다. 사실 구원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군대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탄과 싸우고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사탄과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투구는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투구는 구원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다섯번째로, 구원을 받으라”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2장에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가 아니면 애초에 하나님의 군대에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사탄도 신앙이 없는 사람은 공격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편에 있기 때문이죠. 불신자는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에 속해 있고, 사탄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신자입니다. 이미 신자의 신분입니다. 구원의 투구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조직신학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편안하게 앉으셔서 메모하시면 되겠습니다. 함께 살펴봅시다.
먼저 이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을 겁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 문제로 아주 혼란스러워합니다. 저에게 늘 이렇게 묻습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구원이 지속된다고 믿으십니까? 마사 이모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셨는데, 그럼 그분은 구원받은 겁니까, 아닌 겁니까?” 이런 종류의 질문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고민을 합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느끼면서 “내가 정말 구원받은 게 맞나?” 이렇게 생각을 하죠. 또 젊은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께 삶을 드린 적이 있니?” 이렇게 물으면 “네, 스물네 번이요. 혹시 몰라서 계속 반복했어요. 오늘도 또 했어요”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자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첫걸음은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를 통해서,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아주 쉬운 출발점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세 가지 측면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측면은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측면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저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겁니다. 언제 일어난 일입니까? 수년 전 어느 시점에,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제 삶에 영접했을 때입니다. 말하자면 그때 그 순간 제 죄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 전가되었고, 예수님이 죄의 형벌을 모두 받으셨습니다. 과거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가 받아야 할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죽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는 말씀처럼 말이죠. 저는 죽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바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죽었으니 다시 죽을 필요가 없다.’ 언제 죽었습니까? 처음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죄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죄 문제가 처리되었습니다. 받아야 할 형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무엇이 없다고 합니까? “정죄함이 없나니.” 죄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과거적 측면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구원에는 현재적 측면도 있습니다.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어떤 책 제목이 표현하듯이, 이제 죄가 더 이상 왕 노릇 하지 못합니다(It Ain’t Going To Reign No More). 죄는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하나도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아무도 못합니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계속해서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죠.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주님께서는 구원하실 때 우리를 한번 완전히 씻기시고, 그 이후에는 날마다 우리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 주십니다.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저는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았은즉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구원을 받으리라.”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구원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죄의 형벌로부터 이미 구원받았고, 지금은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끊임없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는 계속해서 구원받고 있습니다.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적 측면이 있습니다. 과거적 측면에서는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고, 현재적 측면에서는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있고, 미래적 측면에서는 죄라는 존재 자체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날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이 더 이상 사망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이죠. 사망이 없다면 죄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같아질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흠도 없으시고, 티도 없으시고, 아무 결함도 없으십니다. 죄라는 존재 자체로부터 완전히 구원받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잘 들으십시오. 구원은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장차 일어날 일입니다. 이미 받은 구원은 칭의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구원은 성화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구원은 영화입니다. 로마서 8장은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따라서 구원을 생각할 때, 구원을 단지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이단이나 일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미래에 가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구원은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현재에는 계속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핵심이자 본질입니다. 과거적 측면, 현재적 측면, 그리고 미래적 측면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로마서 8장 23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큰 도움이 될 몇 구절들을 함께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을 보기에 앞서, 먼저 22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저주에 대해, 그리고 죄가 창조의 세계에 영향을 끼쳐 헛됨에 굴복하게 된 경위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세상은 정말로 더 좋아질 겁니다. 사실, 세상은 완전해질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다시 말해 온 세상이 어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조차도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까지도…” 지금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잘 들으십시오. 우리의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고, 지금도 구원받고 있고, 언젠가는 그 영혼과 함께 우리의 몸도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완전히 거룩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4절이 말하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사실 “~으로(by)”보다는 “~안에서(in)”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우리가 소망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만약 어떤 분이 저에게 “지금 우리가 받은 구원이 전부입니다. 더 이상 더해질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 말은 평생 동안, 아니 영원히 이 육신과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처럼 사탄하고 싸우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겁니까? 계속해서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외치면서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이 짐을 도대체 언제 벗게 됩니까?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입니까?”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겁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저 이 싸움을 도와주시는 것에 그치신다면, 구원의 최종 결실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현재가 끝이 아닙니다. 구원의 미래적 측면이 존재합니다. 언젠가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그 지점이 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을 살아갈 소망도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결승선이 없는 경주를 달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달려가십시오. 평생을 달리셔야 합니다.” “어디까지요? 끝이 어딘데요?” “끝은 없습니다. 계속 전력을 다해서 달리십시오.”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끝이란 없으니까 영원히 싸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요한계시록조차도 죽은 후에는 그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완급 조절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만일 영원토록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보내야 할 겁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미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라고 말하는데, 분명히 신자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능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의 성령이시기 때문이죠.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여기서 바울은 구원의 과거적인 측면이나 현재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싸움이 끝날 것이고, 더 이상 죄와 육신과 마귀와 세상과 귀신들과 씨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그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의의 소망을 완전히 알게 될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참으로 위대한 축도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다시 말해서, 우리는 소망을 갖도록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구원에 또 하나의 측면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드러날 측면입니다. 산 소망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상급과 유업을 받게 되는 그때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6절에서 말하듯이,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겁니다. 보이십니까? 우리는 약간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결승선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약간의 수고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기 때문이죠. 저는 고등학교 때, 또 대학 시절에 육상 경기를 많이 치러봤기 때문에, 직선 구간을 달릴 때는 아주 자신감에 차서 달려가다가 마지막 코너를 돌아서 결승선에 가까워질 때, 갑자기 소위 ‘벽에 부딪히는’ 순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는 달리라고 명령하는데, 다리가 못 가겠다고 버티는 바로 그 순간이 옵니다. 그때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짧은 구간을 싸우듯이 달리는데, 그때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승리의 감격, 명예, 자존감,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보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거의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구원을 겨우 유지하도록만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도행전 1장에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를 보십시오. 제자들은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울 텐데, 이제 주님마저 떠나시니 분명히 격려가 필요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두 천사를 보내서 이렇게 말하게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너무 지치고, 이 전쟁이 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질 때를 대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끝이 있습니다. 목표가 있습니다. 결승선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투구입니다. 궁극적인 구원의 소망이죠.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입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우리는 밤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밤은 사탄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빛의 자녀들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싸움을 하다가 결국 심판으로 끝날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아직 받아야 할 구원의 측면이 남아 있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최종 구원에 이르도록 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소망을 영혼의 닻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투구는 무엇일까요?
이제 요약해 보겠습니다. 구원의 투구란 장차 올 완전하고 최종적이고 전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언젠가는 이 싸움이 끝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어디엔가 결승선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저는 싸울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투구가 왜 전신갑주에 포함되었을까요? 잘 들어보십시오. 로마 군사는 거대한 대검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사탄에게도 그런 대검이 있습니다. 두 개의 날을 가진 대검입니다. 한쪽 날은 낙심이고, 다른 한쪽 날은 의심입니다. 의심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살펴보도록 하고, 오늘은 낙심을 보겠습니다. 사탄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아십니까? 낙심과 의심으로 여러분의 머리를 세게 내려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낙심하게 만들려는 겁니다. “너는 참 많이 주고도 얻는 게 별로 없구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고 세상과 구별되어 살았는데 결과가 뭐야? 직장을 잃었잖아. 거참 대단한 복이네. 매일 성경을 읽고 있는데도 아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까칠한데? 별 효과도 없잖아.”
“하나님이 네 삶에서 도대체 뭘 하고 계시지?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녔는데 네 자녀들 한번 봐봐. 예전보다 너를 더 존중해? 아니지? 전혀 아니지?” 그러다 보면 낙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반을 가르쳤는데 과연 누가 무엇을 얻고 있기는 한 걸까?”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렇게 깊이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탄이 머리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날은 의심입니다. “네가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긴 해? 네가 정말 구원받았다는 걸 어떻게 알아? 너 자신 한번 봐봐, 방금 네가 한 행동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그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야?” 이렇게 사람들은 의심과 낙심에 시달립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바로 이때 구원의 투구가 우리를 보호합니다.
자, 이제 낙심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봅시다. 열왕기상 19장을 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는 엘리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베드로와도 같은 인물입니다. 기복이 아주 심한 사람이죠. 그런데 19장의 엘리야는 정말 엄청난 승리를 막 거둔 상태였습니다. 어떤 선지자도 경험하지 못했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그 승리입니다. 칼을 들고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을 모두 처단했습니다. 그날 엘리야는 분명히 완전한 승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제물을 태우시고, 제단을 태우시고, 그 주위에 부어 놓았던 물까지 핥아 없애신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엘리야는 말 그대로 정상에 올라 있었습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바알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알은 패배했습니다. 엘리야는 완전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런데 19장에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다시 말해서, “엘리야야, 네가 그런 짓 저질렀으니,” 참고로 이세벨은 바알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네가 그런 짓 저질렀으니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죽이겠어.” 솔직히 저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큰일 하나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을 없앴는데, 하루쯤은 쉬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 다음날 이세벨을 보내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조금은 쉬게 해 주셔야죠.”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유대 명예의 전당에 앉아 칭송을 받을 시간도 없었고, 월계관이나 메달을 받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길 위에 섰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를 450명이나 상대하지 않았습니까? 이 여인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흔들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꼭 그렇게 논리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많은 남자들은 잘 감당했던 사람이 단 한 명의 여인 때문에 흔들린 경우도 꽤 많았으니까요. 어쨌든 엘리야는 이제 한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도망치는 겁니다. 아마도 80살 가까이 되었을 텐데요, 하나님께서 80살 선지자가 브엘세바까지 전력 질주하도록 의도하신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달렸습니다. 정말로 먼지를 일으키면서 혼비백산해서 달렸습니다. 3절에 보면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하루 길을 더 광야로 들어갑니다. 브엘세바는 성읍이고요, 거기서 다시 하루를 더 달려서 광야 한가운데로 들어간 겁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그야말로 낙심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 이제 그만 여기서 끝내 주세요. 저 그냥 데려가 주세요. 이만하면 됐습니다.” 그렇게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말합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천사는 엘리야를 그냥 자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깨워서 먹게 했습니다. 엘리야가 보니까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있었습니다.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잤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두번째로 와서 다시 어루만지면서 깨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무슨 음식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효과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러니까 제가 말한 대로 효과가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죠. “엘리야야, 낙심하고 있을 이유가 없어. 호렙 산으로 올라오렴. 네게 할 말이 있단다.” 그래서 엘리야가 올라갔습니다. 주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 엘리야는 “저만 남았습니다, 주님. 너무 힘들고 너무 낙심이 됩니다. 저만 남았다니까요.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이제 저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나님께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19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너 말고도 칠천 명이 더 있어.” 다시 말해서, “엘리야야, 너 혼자 아니야. 너 하나가 아니라 칠천 한 명이 있어. 이제 다시 가서 해야 할 일을 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낙심하는 건 정말 쉽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승리를 경험한 직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그 현실이 너무 냉혹하기 때문에, 너무 적나라하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잘 압니다. 낙심하는 건 정말 쉽습니다.
에베소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자기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난 때문에도 낙심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낙심하고 지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주님, 또 주일 설교를 해야 합니다. 또 설교 준비해야 하고, 또 하루를 공부해야 합니다. 주님, 또 한 사람을 심방하러 가야 합니다. 또 같은 사람과 제자훈련을 해야 합니다. 주님, 며칠쯤은 성경을 읽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요? 주님, 주일학교 반을 또 한 주 더 맡아야 한다니 너무 버겁습니다. 주님, 정말 그 이웃에게 다시 한 번 더 찾아가서 말을 걸어야 합니까? 주님, 똑같은 유혹과 이렇게나 오래 싸워 왔는데, 이제는 너무 지쳤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낙심합니다.
아서 클러프(Arthur Cluff)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싸움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수고와 말이 헛되다고 말하지 말라. 원수는 지치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아서 상황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다시 말해 이런 뜻입니다. “나는 계속 싸우고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지쳐 가는데, 원수는 지치지 않는다고 하지 말라.” 여러분도 느껴보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금세 지치는데, 사탄은 멈추지 않습니다.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젊은 시절은 피와 전쟁으로 가득했고, 내 장년 시절 또한 피와 전쟁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 생을 전쟁 속에서 마치게 될 것이다.” 이 싸움이 과연 끝나기는 할까요? 우리는 평생 원수와 싸웁니다. 사도 바울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람들이 바울에게 말합니다. “바울,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하고 감옥에 가게 될 겁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괜찮다. 나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결코 낙심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아주 큰 칭찬이죠. 하나님은 레위기 26장에서, 신명기 11장에서도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내 율례를 지키고 내 규례를 순종하며 내가 말한 대로 행하면, 내가 네 삶을 복되게 하고, 네 땅을 복되게 하고, 네 몸의 소산을 번성하게 하고, 모든 복을 네게 주겠다.” 하나님은 레위기 26장 전체에 걸쳐 그 복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십니다. 그런데 14절에 이르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내 율례를 버리고 내 계명을 멸시하면, 내가 너희 가운데 재앙과 고통과 슬픔을 가져올 것이다.”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요지는 이것입니다. 끝까지 버티십시오.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아가십시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낙심하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것 같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음이 지칠 수 있습니다. 혹은 여러분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 자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여러 해 동안 복음을 전해 온 친구가 있을 수도 있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마땅히 받아야 할 감사나 격려를 전혀 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연약함, 신체적 장애로 인해서 계속 싸워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싸움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지치고, 또 그 문제가 여러분을 묶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구원에 세번째 차원이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장차 올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저는 로마서 13장 11절 말씀이 참 좋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우리는 지금 결승선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지금 포기하지 마십시오.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믿기 직전까지, 그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지점에 와 놓고, 다시 뒤로 물러가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그리고 이렇게 권면합니다. “...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야, 너는 내 선지자다. 나는 네가 평생 나를 위해 설교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네 메시지다. 있는 힘을 다해 전하라.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전하라. 덧붙이자면, 아무도 듣지 않을 거야. 네가 하는 말을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을 거야.” 그래서 늙은 예레미야는 홀로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홀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그리고 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인간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벗기셨습니다. 욥이 가진 모든 것, 소유한 모든 것, 사랑하던 모든 것을 다 가져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욥은 끝까지 버텼습니다. 모든 일이 다 끝났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전에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듣기만 했는데, 고난 가운데서 신실하게 서 있으면서 주님을 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끝까지 버티십시오. 사탄이 낙심으로 여러분을 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낙심하고 있다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사탄은 늘 저를 낙심시키려고 합니다. 정말 미친 듯이 그렇게 합니다. 이번 주에 저는 영국의 한 인물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윌리엄 데이비(William Davie) 목사님입니다. 인생 말년에,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신학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무려 12년을 바쳤습니다. 모두 26권으로 완성했습니다. 유명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데이비 목사님의 신학서를 소장한 곳도 거의 없습니다. 모든 작업을 마친 뒤에 활자를 조판해 줄 사람을 찾지 못해서 직접 조판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일입니다. 처음 300쪽은 40부를 인쇄했고, 나머지 26권은 겨우 14부만 인쇄했습니다. 12년의 작업 결과물이 겨우 14부만 남았습니다. 데이비 목사님은 가난하게 무명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천국으로 가셨을 겁니다. 한 사람이 아무도 들어보지 못했고 아무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를 26권짜리 신학서를 썼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끝까지 추구했습니다. 끝까지 버텼습니다.
런던에 살던 한 어린 소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길가에 서 있는데 석탄 트럭이 와서 그 아이 집 앞에 석탄을 한 트럭 내려놓았습니다. 그 아이는 지하실에 가서 작은 삽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겨우 다섯 살 아이가 작은 삽으로 석탄을 한 삽 떠서 길을 건너서 지하실 계단으로 내려가 지하실에다 쏟아부었습니다. 옆집 남자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세번째 삽질을 하고 있을 때 그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그걸 다 옮기려면 평생이 걸릴 거야.” 그러자 그 아이가 환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충분히 오래 하면 다 할 수 있어요.” 충분히 오래 하면이랍니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가가 그 사람의 성품을 결정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첫번째 방어선에서 바로 포기합니다. 총소리 한 번 들리면 바로 전장을 이탈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한 줄, 또 한 줄, 또 한 줄, 계속되는 저항을 뚫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충분히 오래 하면 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아직 아무도 여러분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다. 버티십시오. 끝까지 버티십시오. 문제는 낙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는 겁니다. 사탄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여러분을 낙심케 할 겁니다. “그렇게나 애쓰는데 아무 열매도 없잖아. 너한테 관심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 이렇게 성실히 해왔는데 칭찬 한마디도 없지. 알아주는 사람이 누가 있기는 해? 다 안 보이는데서 하는 일인데 네가 죄에 빠진다고 누가 알겠어? 그냥 조금만 포기해. 긴장 풀고 쉬어.” 이렇게 속삭일 겁니다. 그러나 구원의 투구는 저를 낙심하지 않게 지켜 줍니다.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지쳐 쓰러지지 않게 합니다. 왜입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터널 끝에 빛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저는 그 빛 속으로 뛰어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편지를 썼던 그분처럼, 저는 전투가 가장 치열할 때 포기해서 제 지휘관 앞에 부끄러운 얼굴로 서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멍들고 피 흘렸을지는 모르지만, 저는 끝까지 싸웠습니다.”
제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암으로 임종을 맞으셨습니다. 암이 온몸을 다 삼켜버려서 몹시 쇠약해지신 상태였지만, 임종을 앞두고 제 아버지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잭,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어. 설교 한 편만 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어.” 끝까지,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준비하셨지만 끝내 강단에서 전하지 못했던 그 설교 원고를 가져가서 인쇄하고는 교회 성도님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는 설교 한 편을 더 하신 셈이 되었습니다. 정말 끝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버티십시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십시오. “이기는 그에게는, 이기는 자는, 이기는 그에게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주리라, 내가 주리라, 내가 주리라.”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들을 위해 특별한 것을, 위대한 것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디모데를 기억하십니까? 디모데도 인생에서 크게 흔들리고 낙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디모데를 낙심하게 했을까요?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는 디모데가 젊었기 때문에 젊은 정욕의 유혹과 싸우느라 지쳤습니다. 또 하나는 디모데가 젊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저 친구가 뭘 알겠어” 이렇게 하면서 젊음을 업신여겼습니다. 또 한 가지는 위장병이 있어서 늘 속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위장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권할 정도였습니다. 디모데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 때문에 부끄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늘 감옥을 드나들었죠. 사람들은 디모데에게 감옥에 갇힌 사람의 제자 아니야? 이렇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교묘하게 거짓을 가르쳤습니다. 디모데는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죠. 거기에다가 철학과 쓸모없는 논쟁과 헛된 속임수와 족보 이야기들이 더해지면서, 디모데는 낙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써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디모데야, 다시 정신을 차려라. 다시 힘을 내라. 디모데는 낙심해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박해 가운데 있던 성도들에게 같은 말을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복되고 행복한 자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가끔은 너무 지칩니다.” 그렇습니다. 트랙의 마지막 바퀴를 도는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가 되면, 저는 여러분도 묵상해 보셨을 말씀을 떠올립니다. 이사야 40장입니다. 이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사야 40장 29절입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정말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쓰러지기 직전이라고 느낄 때에,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 이제 더 이상 힘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십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다른 새들보다 훨씬 높이 치솟아 오르는 독수리는, 연약함 가운데 있는 신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독수리는 높은 하늘 위로 솟구쳐 오릅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의 투구는 위대한 날, 위대한 승리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끝까지 신실하면 놀라운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광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원은 과거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현재의 일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여러분을 낙심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기대하는 설렘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을 헌신하게 만드는 그 소망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요한은 요한일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알고, 그 위대한 날이 앞에 놓여있음을 알고, 구원이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을 알면, 그 소망이 우리의 삶을 정결하고 깨끗하게 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예수님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탄과 귀신들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지금 우리의 구원이 훨씬 더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승리의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히브리서 6장 11절과 12절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우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옵소서. 신실한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여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던 이들처럼, 우리도 끝까지 동일한 부지런함을 보이게 하시고, 소망을 마지막까지 붙들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신실한 자들처럼, 끝까지 견디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낙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인간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나라가 우리 앞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관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의 상황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낙심하겠습니까. 하나님, 이러한 미래를 바라보며, 어떤 현실이 주어지더라도 신실하게 구원의 투구를 쓰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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