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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주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님을 설교하는 기계라고 생각해요. 목사님의 진짜 마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항상 성경 본문 해석에만 매달려 계시니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그럼 이번 주일이 좋은 기회가 되겠네요. 제가 그냥 제 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이거든요." 우리는 마태복음을 계속 연구하고 있고, 원래대로라면 21장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예수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대한 내용이죠. 하지만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약 5년 동안 기다려온 마태복음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절정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저의 마음속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 가서 사역하고, 설교하고, 다른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책을 읽을 때는 보통 이런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 있을 때는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께서 제 마음에 특별한 감동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것들, 제 마음과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야 할 것들을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걱정됩니다. 우리 교회가 제 인생 그 자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삶의 심장이고 영혼입니다. 저는 이곳에서의 사역이 정체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는 그냥 현상유지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제가 쏟아부은 모든 열정은,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앞으로 15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쏟아붓고 싶은 열정에 비하면 단지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저는 진짜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고 믿습니다. 흥미진진하고, 기쁨과 기대감으로 가득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미래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지금 교회 역사상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우리에게 찬란한 미래가 펼쳐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바로 지금 우리 손에 주어진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이번 여름 들어 처음으로 골프를 쳤습니다. 휴가 기간이었지만 설교를 요청하신 곳들을 방문하느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야 겨우 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한 분과 함께 쳤는데,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 궁금해 하셨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싶은 열망이 있었고 정말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목자 컨퍼런스(Shepherds’ Conference)에도 참석하셨습니다. 사실 두 번이나 오셨습니다. 제가 동부에 있는 그 목사님 교회에 가서 설교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목사님, 정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걸 보고 싶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걸 보고 싶어요" 그렇게 사역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셨습니다.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목사님 교회 같은 교회는 어떤가요? 그렇게 큰 교회에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사역도 그렇게 많은데 말입니다. 아직도 힘이 드시나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목사님 질문의 속뜻은 이제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가 되었으니 좀 편하지 않느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건 쉽습니다. 마치 돛단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바람으로 배를 밀어주는 것과 같아서 그냥 그 안에 앉아만 있으면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레이스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시절, 4-5백 명에서 시작해서 성장하고 또 성장하던 시절에는 정말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았죠."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저는 몰랐습니다. 매주 교회에 와서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뿐이었죠. 사실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놀랍고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원리를 적용했고, 특정한 강조점도 있었고, 탁월하게 해내려고 노력도 했습니다만, 정말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말 그대로 황홀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기를 “발견의 시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 교회에 이제 막 부임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주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교인들과 함께 배우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전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와, 성경이 이런 뜻이었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군!”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사람들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성장했습니다. 매일이 신혼여행 같았습니다. 교회 곳곳에 에너지가 넘쳤고, 모두가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지금처럼 많은 사역을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뭔가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저 놀랍기만 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곳에 왔을 당시의 목표는 기존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저의 목표였습니다. 저로 인해 성도들이 떠나지만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하는 것처럼, 이곳에서 사역하면서 가장 실감나게 다가온 성경 말씀이 있다면 바로 에베소서 3장 20절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께서 정말 이 말씀을 이루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초기에는 모두가 흥분해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희생했고, 모든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성장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몇 주 전에 우리 교회 교역자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 생활과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1세대는 진리를 발견하고 세우기 위해 싸웁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다. 처음 몇 년간은 진리를 탐구하고 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했죠. 계속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2세대는 그 진리를 지키고 선포하기 위해 싸웁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한 일입니다. 진리를 책과 테이프에 담고,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고, 사람들을 불러 가르치고 훈련시켜 내보내고, 목회자들과 협력했습니다. 진리를 지키고 선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3세대는 무관심한 세대입니다. 그 어떤 싸움에도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정말 두려웠습니다. 정말로 두렵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회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관심, 태만, 그리고 안일함입니다.” 이런 태도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습니다. 사실 더 많습니다. 성도가 더 많기 때문이죠. 사람이 없다면 문제도 없겠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존 목사님,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말 큰일이에요.” 이번 여름에 제가 몇 차례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마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큰일났어요.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요. 이런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럴 때 제 반응은 늘 이렇습니다. “멋지네요. 정말 신나는 일이군요. 우리에게 문제가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해결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멋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역의 재미입니다. 저는 늘 젊은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문제가 없는 교회를 발견한다면 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는 순간 교회를 망치게 될 겁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반길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적용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오히려 기대가 생깁니다.

하지만 안주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태도는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싸움에는 전혀 참여해본 적이 없어서 모든 걸 당연하게 여기는 세대가 생긴다는 생각만 해도 말이죠. 그냥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자, 다 여기 있네요. 우리는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늘 지금과 같이 평안하고 풍족할 거에요"라고 말하는 거죠. 그 대가를 모르니 승리의 달콤함도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과정을 다 겪어본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말이죠. 인생은 한 번뿐인데, 하나님은 제게 주신 이 한 번의 기회를 가장 훌륭하고 멋지고 짜릿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바로 이곳에 두셨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걱정하는 건, 교회를 세우고 진리를 위해 싸우는 과정, 그러니까 진리를 발견하고 모든 걸 내려놓고 움직이게 만드는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와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른 채 제대로 감사하지 못할 거라는 점입니다.

이 시점에서 떠오르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신명기 6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한 좋은 예시로, 본보기로 기록된 구절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자비로 그 종살이에서 건져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풍성한 은혜와 복을 넘치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6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계명을 지켜야 하고 믿음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신앙을 지키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새 차, 집, 직장, 돈, 옷장,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물건, 그 어떤 장소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지난주에 성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가 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고전을 읽었습니다. 정말 마음을 찌르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음이 콕콕 찔렸습니다. 베르나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에는 세 가지 큰 소망이 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와는 참 다릅니다. 만약 우리에게 세 가지 큰 소망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과연 이런 것들일까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언제나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베르나르는 이것이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두었다. 내가 너희를 가장 복된 곳에 두었으니, 이제 너희는 나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한 헌신을 마음속 깊이 새기라."

이제 6절에서는 내면에서 외면으로 나아갑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마음에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도 말해야 하고,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집에 앉아 있을 때든지, 길을 걸을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말씀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대화는 어떻습니까? 경건한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성령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성경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덕을 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선하고 정직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주말에 누군가와 여행을 가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순종의 관점에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주제로 이야기하십니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지키려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말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자극을 받고 말씀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 라디오 방송 사역과 설교 테이프 배포 사역을 하게 하신 이유는 세속적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밀려오는 불경건의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그런 불순한 것들로 공격받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냥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과 이야기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온 세상이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오고,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불경건한 철학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주일부터 다음 주일이 오기까지 영적 헌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자원들을 활용하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마음이 정결해질 때까지 말씀 속에 깊이 잠겨야 합니다. 항상 말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말씀 이야기를 하십니까? 말씀이 여러분의 대화 주제입니까? 물론 가끔 다저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별로 의미 없는 다른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십니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표지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기독교 가정이나 사무실,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기억의 표지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말씀에 나오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고, 헌신해야 할 것을 기억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을 상기시켜 줄 표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입술로 표현되고, 표식과 상징을 통해 우리의 생각 속에 새겨져야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결과를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조차도 그 과정을 잊어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손길과 우리가 보았던 하나님의 역사를 잊을 수 있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새로 온 많은 사람들은 어떤 대가를 치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재능, 노력, 그리고 재정을 희생했는지 그들은 모릅니다. 저는 한 젊은 부부가 헌금을 내려고 신혼여행을 포기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수천, 수만 개 예시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상황에 그저 함께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습니다.

작은 문제가 생기면 이 사람들은 지나치게 까다로워집니다. 진짜 영적 전쟁이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진정한 싸움이 무엇인지,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으로 시비를 겁니다. 마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의 갑판 위에서 의자 배치를 바꾸는 것과 같다.” 때때로 사람들이 저에게 사소한 문제들을 이야기하면, 항상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정말로 신경 쓰는 것은 이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 그렇군요”라고 말하죠. 이제 정말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본질이 아닌 것들에 매달리려 할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하찮은 일, 사소한 것에 얽매여서 살아갑니다. 본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무관심의 결과가 바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우리는 점점 무관심해지고, 비판하기 시작하며, 모든 결점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토머스 하디는 아름다운 초원에 들어가자마자 즉시 거름 더미를 찾아내는 친구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갖지 말아야 할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정말 훌륭한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교회입니다. 이렇게 행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편할 때만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편할 때만 오신다는 것 제가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 편안해서 왔습니다. 편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인생의 다른 모든 것들을 보는 것처럼 교회도 동일한 관점으로 봅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면 가고, 더 잘 채워주는 곳을 찾으면 그쪽으로 갑니다.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 떠나고, 이 교회 오는 게 괜찮다고 생각하면 이 교회에 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말에 돈이 부족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 같은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오고 싶을 때만 옵니다. 진정한 헌신이 필요하다고 보지 않고, 주일 저녁에는 아예 참여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설교는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번주에는 최소한 설교를 200편 정도는 더 들으셔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안주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는데, 아마도 키에르케고르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설교자는 배우이고 자신들은 그를 비평하러 온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배우이고, 설교자는 무대 뒤에서 잊어버린 대사를 알려주는 연출가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태도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말하자면 “네 방식대로 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모든 것이 너를 위해 준비되어 있어.” 이런 식입니다. 심지어 이른바 기독교 세계 안에서도 이런 생각이 똑같이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바라볼 때도, 무엇인가 나에게 유익한 것이 있으면 참석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습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전할 때 설교자를 지지하고 함께하는 충성심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가끔 다른 분이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에 이런 점이 걱정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하죠. “오늘은 그냥 아무개가 설교하네. 안 가도 되겠어.” 이런 태도가 설교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그런 태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그냥 아무개일 뿐이에요.” 이런 마음가짐이 교회 안에 안일함을 키우고, 결국 위대한 사역조차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바로 에베소 교회가 이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모습을 잊어버리셨습니까? 제가 아까 말씀드린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큰 교회가 되고 나면 관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고 안일함과 무관심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가르침은 너무나 훌륭하고, 찬양도 너무나 멋지고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리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에 정말 많은 성도들이 수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제 말은, 여러분, 저를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항상 목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그 말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붙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설교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압니다. 제가 설교하는 기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 서서 쏟아내듯 설교를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점수를 매겨가며 평가할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지난 번 설교가 괜찮다고 생각해서 또 들으려고 오시고, 또 좋은 설교를 기대하며 오는 것이겠죠. 그건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뿐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다른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까? 이곳에서 섬기고 인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비판은 빠르면서 기도는 느린 경우가 많습니다. 지도자로 섬기시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인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혹시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고 있으니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은 단지 결과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눈물과 수고는 모르실 겁니다. 교회에서 지도자로 섬기는 우리는 서로를 붙잡아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꼭 기억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함께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온전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해서 섬겨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 사실을 마음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한 젊은 목회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가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기 때문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이 편지가, 이번주, 아마 다음주까지 이어질 텐데요. 이렇게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게 된 계기입니다. 목회 사역에서 가장 큰 기쁨은 젊은이들이 사역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역을 그만둘까 고민하는 한 젊은 목회자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습니다. 읽겠습니다.

“목사님께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비록 목사님을 직접 만나뵌 적은 없지만, 목사님의 책 몇 권을 읽었고 라디오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설교를 들었습니다. 저의 큰 고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사역을 떠날까 고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목사님의 통찰을 통해 주님께서 제게 빛을 비춰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우선, 제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개인적인 영적 삶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성도들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삶에 있어서도 최고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것은 완벽함이나 어떤 초인적인 모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살아 있고 성장하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주님과 지역 교회 공동체에 헌신하고 충성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따르는 이들 역시 그러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맥아더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선출된 직분자들의 3분의 2가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예배에 참석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에 전부 참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나 질병, 휴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과 목회자를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서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지도자들이 성도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아서 성도들의 아픔과 두려움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성도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장로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성도들의 필요와 아픔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안건들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 교회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정체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여러 차례 장로회에 제기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장로들도 신실하게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러한 염려를 분명히 전달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말로 참석할 여건이 안되는 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지 않는 분들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이 문제를 제기하면 항상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제가 너무 바쁩니다.’ ‘일을 마치면 너무 피곤합니다.’ 혹은 아예 변명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일수록 교회의 영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과시합니다.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내년까지 계속된다면 사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양떼를 이끌고, 필요한 사역들을 세우며, 영적 지도자들을 세우려고 할 때, 시작할 수 있는 지지조차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목사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저희 교회가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로 머문다면, 주님께서 저희에게 복을 주시거나 저희를 사용하시지 않을 겁니다.”

수천 명의 목회자들이 썼을 법한 편지 아닙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일이 너무나 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계속해서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잠시 베드로후서 1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저의 심정이 잘 나와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저는 이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소홀히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높은 부르심입니다. 큰 특권입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나의 부르심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겠다.” 오늘 저는 이 자리에 같은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새로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오래된 진리들을 다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4절부터 15절입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진리들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데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그런 마음으로 제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십니다. 우리 교회가 왜 성장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오시는 거죠. 대부분 자신들의 교회로 가져가서 적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찾으려고 오십니다. 우리 교회가 주최하는 목자 컨퍼런스(Shepherd’s Conference)에 참석하러 오시는 분들이 그렇습니다. 10월에도 있을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꼭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250명의 새로운 목사님들이 오실 텐데,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방법론이나 도구, 프로그램, 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가져가서 자신의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합니다. 이건 마치 몸에서 피부만 떼서 가져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제 말은, 목사님들이 우리 사역에 어떻게 살이 붙게 되었는지만 보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 컨퍼런스(Shepherd’s Conference)에 오시는 분들에게 이런 점들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표면 아래에 정말 많은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기초가 되어야 다른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이죠. 잘 돌아가는 모습만 보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용했던 몸의 비유를 빌리려고 합니다. "교회 해부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비유를 드는 겁니다. 우리 몸을 뼈 혹은 골격, 내부 체계, 근육, 그리고 살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골격, 그러니까 뼈대가 있어야 합니다. 또 내부 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교회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육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교회의 기능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살이 붙어서 외적인 사역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외양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냥 외양만 따라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 생명이 없으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제대로 세워지지도 않고, 결국 무너집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함께 옛날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원하시는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방향에 처음부터 헌신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마음을 모아서 하나되어 나아간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울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이렇게 예배당이 꽉 찼는데, 뭘 더 하겠다는 건가요?” 그런데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 예배당 위에 저희가 준비해 둔 발코니가 있습니다. 필요하다는 확신만 들면, 언제든지 바로 설치할 수 있도록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필요가 반드시 있다고 믿습니다. 이 작은 밸리(Valley) 지역에만 해도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주일에 복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아무리 많아도 2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 98만 명 이상이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정도면 다 된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교회 근처를 조금만 돌아봐도, 이 예배당 문턱조차 한 번도 넘은 적 없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초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고 “기초 참 잘 닦았네, 감사하다” 하고 만족해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제 그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끝까지 완성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비유 하나를 좀 빌려오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원래 의미에서 잠시 벗어나 응용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먼저 골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마 오늘 아침엔 이 골격 이야기만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몸이 제대로 기능하고 움직이려면 반드시 골격이 있어야 합니다. 구조가 있어야 하고, 형태가 있어야 합니다. 몸에 기본적인 형태와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골격입니다. 저는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붙들고 있어야 할 골격 같은 진리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타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모양으로도 절대 포기하거나 흔들려서는 안 되는 진리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의 골격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말할 때, 사랑하는 여러분, 그건 어떤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바로 이 교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회의 골격,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중에서 첫번째는 바로 하나님을 높이는 관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시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중심을 두는 태도입니다. 이제까지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살펴봤는지 떠올리면, 하나하나 다 되짚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여러분의 기억력을 믿고 몇 가지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관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게 너무 기본적이라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미국 안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이 수준에서 점점 내려와서 결국은 사람을 돕는 기관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기분 좋게 느끼게 해주는 것, 심리학적인 요소를 통해 위로하는 것, 결혼생활을 잠깐 봉합해주는 것, 그런 일들을 하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문제에 대해서 마라벨 모건(Marabel Morgan)이 말한 것처럼, 검은색 속옷을 입고, 입에 장미꽃을 물고, 식탁 밑으로 기어가서 남편에게 윙크를 하면 관계가 회복된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혼생활이 무너져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걸 해본다고 해서 진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는 반드시 성경적 기초가 있어야 하고, 부부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있어야 서로 간에도 바른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임시방편이나 눈가림식 위로는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본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유기체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저 사람들 기분만 좋게 해주는 조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삶이 훨씬 나아집니다.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모든 해답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모든 지혜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바르게 연결되면, 그 다음의 모든 것들은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가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한 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헌금 시간에 하나님이 벼락이라도 치셔서 누군가를 그 자리에서 죽게 하시면 좋겠다고요. 물론 그 말을 진심으로 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게 저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아시죠? 하나님을 참으로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 뭔가 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극적인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일을 허락하실 수 있지?” 그런데 여러분, 이건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물으셔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진작에 다 없애버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진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이유로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편하게 여기고 무관심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진지하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짓밟는 듯한 설교자들이나 그런 식의 사역자들을 보면 정말 의로운 분노가 솟아납니다. 하나님을 보좌에서 끌어내려서 마치 사람들의 종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마치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줘야 하는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경외심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예배가 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배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상 그냥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정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걸 예배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제가 예배 시리즈에서 말했듯이, 우리 중에는 마르다 같은 사람은 너무 많고 마리아 같은 사람은 너무 적습니다. 우리는 늘 뭔가를 하느라 분주하지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씻기며 경배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압도당하고, 내 죄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런 깨어짐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릅니다. 대신 우리는 그저 기분이 좋아지길 원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길 원합니다. 필요한 걸 다 받고, 문제는 다 해결되고, 그저 편안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종교적 심리학이 가득 담긴 한 꾸러미를 “교회”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의 90퍼센트를 바다에 던져버려도 우리가 잃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진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저 표면만 건드리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가 거룩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곤 합니다. 그 시절엔 읽을 수 있는 자료가 정말 몇 개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읽을 게 너무 많고, 정보는 쏟아져서 넘쳐나는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깜짝 놀랐던 일이 있습니다. 무디 성경학교에서 있었던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목회자들이 가장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분야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이 “가정 문제”라고 답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잠깐만요.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 시중에 그 수많은 자료와 책들과 세미나와 프로그램들이 다 나와 있는데, 아직도 더 필요한 겁니까?” 문제는 자료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이 모든 이야기와 가르침이 다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고, 결국은 스스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에 관한 시리즈도 시작한 것이고, 그 내용을 담은 책도 출간된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 책을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정말로 그러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샀어요, 샀어요"라고 하시는데, 압니다. 근데 제발 읽어보십시오. 야고보서 4장 8절이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여러분 가까이에 계신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좋겠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좀 떨려요, 무서워요”라고 하실 수도 있겠죠. 맞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내 죄가 더 선명히 보입니다. 그러니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죄 앞에 무너지고 낮아지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높임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사람 중심적인 교회가 되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향해 손을 뻗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배의 중심,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문제 해결 공식집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두번째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은 첫번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인데, 바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저는 풀러 신학교(Fuller Seminary)의 루이스 스미디스(Lewis Smedes)라는 사람이 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동성애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관용 안에 있다고 말하더군요. 만약 그런 주장을 하려면, 성경을 그냥 없애버리면 됩니다. 아주 편리한 방법이죠. 그런데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정한다는 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입니다. 그야말로 성경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일입니다.

저는 지금도 성경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은사주의자들(charismatics)은 자신들이 받았다는 환상이나 계시 같은 걸 자꾸 덧붙이면서 성경을 은근히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런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고 저기서 말씀하셨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쌓아가면서, 어느 순간 성경은 더 이상 유일한 권위가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전에 이야기했을 수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자기 욕실에 들어와서 팔을 감싸주셨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면도하는 도중에 말이죠. 제 머릿속에는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면도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계속했을까?” 만약 거룩하신 하나님이 정말 욕실에 들어오셨다면 그대로 땅에 엎드러져 죽을 만큼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는 건 이처럼 무게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 특별한 메시지를 받았다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로 붙들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공격 유형은,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안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가장 교묘하고 위험한 형태입니다. 미국 전역에 “저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성경이 뭘 말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문단 하나, 문장 하나도 제대로 모릅니다. 그러면서 믿는다는 거죠.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제가 강해 설교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말씀 하나하나를 공부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는 그 본질을 많이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제는 설교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별의별 방식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말씀을 전할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누군가가 말씀에 대한 그런 갈망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확신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글쎄요, 우리는 더 이상 설교는 필요 없고, 그냥 교제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교제도 참 좋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저도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겁니다. 계속해서 그 말씀으로 여러분을 먹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자라나는 데 필요한 것은 말씀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제도 중요하고, 다른 것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제가 느끼기에 가장 달콤하고 순수하면서도 깊이 있고 보람 있는 교제는 항상 말씀을 중심으로 한 교제였습니다. 항상 말씀이 중심에 있을 때 가장 진실한 교제가 일어났습니다. 제 절대적인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중심에도 말씀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우리는 이미 배울 만큼 배웠고,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교만의 극치입니다. 말씀을 알아가고 발견해가는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설교 사역의 가장 큰 기쁨은 설교 자체가 아닙니다. 설교는 오히려 노동입니다. 진짜 기쁨은 발견의 과정에 있습니다.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이전엔 보지 못했던 것들, 몰랐던 것들,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그 과정 말입니다. 제 삶에서 매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실 그 누구도 놓쳐서는 안되는 멋진 모험입니다.

예전에 미시간에 간 적이 있는데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한 교회에서 딱 2년만 목회하고 떠납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네, 여기서 2년, 저기서도 2년, 또 다른 곳에서도 2년, 그렇게 계속 해왔습니다." 제가 다시 여쭤봤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제게는 설교가 52편 있습니다. 그걸 한 번 설교하고, 다음 해에 한 번 더 설교하면 끝입니다. 그러면 저는 떠납니다." 그 말이 좀 웃기기도 했지만,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 전체는 어떻게 하십니까?" "전부 전하진 않습니다.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전합니다"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세번째는, 이것 역시 두번째 원칙인 바른 교훈, 건전한 교리에서 흘러나오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시작하면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고, 하나님께 헌신하면 결국 하나님의 계시, 곧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말씀에 헌신한다는 것은 결국 그 말씀 속에 담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른 교훈입니다. 건전한 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분명한 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흐릿하고 모호합니다. 그저 쉽고 짧은 설교를 통해서 그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설교는 그럴싸하고, 도움이 되는 것 같고, 때로는 흥미롭고 감정적으로 뭔가를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슬퍼지거나, 잠시 힘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건전한 교리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 인생과 죽음, 천국과 지옥, 인간, 죄, 그리스도, 천사, 성령, 신자의 지위, 육신, 세상 등등에 대해 진리를 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제게는 붙잡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본문에서 원칙을 끌어내는 것, 즉 말씀을 ‘원칙화’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본문을 펴고, 본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낸 다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끌어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분명히 세우기 위해 열 가지 방식으로 반복해서 두드립니다. 혹시 모르셨다면, 제가 설교할 때 바로 이렇게 합니다. 본문을 차근차근 살펴가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끌어내고, 여러 각도에서 열 번쯤 반복해서 두드립니다. 이 말씀에서도, 저 말씀에서도, 또 다른 말씀에서도 계속 반복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여러분의 마음 안에 그 진리가 깊이 새겨지고, 단단한 진리로 자리잡게 됩니다. 저는 이걸 어릴 때 배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께서 성경 한 권을 선물로 주시면서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를 꼭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읽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먼저 네 마음을 그 진리로 양육한 후에 성도에게 전하라. 바른 교훈,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라.”

목사가 바로 신학자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딕과 제가 시카고에서 열린 ICBI 총회, 국제 성경 무오성 위원회에 다녀온 일을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습니다. 벌써 한 1년쯤 됐습니다. 백여 명의 신학자들 중에 목사는 단 세 명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딕까지 포함하면 네 명이 되겠네요. 우리 넷을 제외한 나머지 96명은 전부 대학이나 신학교 출신의 목사가 아닌 학자였습니다. 성경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을 때 목사들을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없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다만 성경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찾을 때, 그 대상이 목사가 아니란 말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왜 거기에 초청되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설교 속에 본래 있어야 할 교리적 명확성과 뚜렷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확실한 해답을 필요로 합니다.

몇 주 전에 라디오 방송 사역 중인 여러 사역단체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늘 성경으로 질문에 답하고 있으니까, 다른 단체들은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지 보기 위해 질문을 보냈습니다.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답장을 보낸 단체들이 모두 서로 다른 답을 보내 왔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사역단체들 각각에게 상담을 요청했다면, 각각 전혀 다른 답변을 받았을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참 슬픈 일입니다. 성경에 분명하고 명확하게 제시된 진리에 대해 이처럼 혼란스럽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의 사역 초기에 에베소서를 함께 살펴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지위에 대해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우리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었죠. 그러다가 얼마 안 지나서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교회에 한 번 오신 적 외에는 정말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제는 주님 품에 계시죠. 생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던 정말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함께 운동하던 시절의 재밌는 일들을 떠올리면서 웃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감독님이 저한테 이러시더군요. "있잖아, 존. 너의 에베소서 1장에 대한 설교, 난 그 테이프를 정말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었어. 계속 듣고 또 들었지. 그러면서 그걸 해마다 학생들에게 가르쳤단다. 그 설교를 통해서 ‘신자의 지위’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게 내 인생 전체의 기초가 되었어. 그 진리가 내 안에 콘크리트처럼 딱 자리 잡은 거야." 제가 저를 자랑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에베소서 말씀의 역사이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처럼 말씀의 진리 위에 삶의 기초를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견고하고 건전한 교리 위에 말이죠.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말씀은 인생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진리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매우 본질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천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성경이 천사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명확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귀신에 대해 알고 싶다면 성경이 귀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성경에 근거한 확고한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네번째로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네번째는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저는 우리가 모두 거룩하지 않은 사회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생각하면 정말 몸이 움찔할 정도로 불쾌합니다. 온갖 더럽고 쓰레기 같은 것들이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고, 도덕적으로도 완전히 타락한 것들이 끝이 없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마치 깨진 하수관에서 오물이 줄줄 새는 것이 아니라, 하수관이 아예 박살이 나서 오물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게 새로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 팝 음악에 늘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단지 그 음악 스타일 자체가 싫어서가 아니라,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사에 담긴 성적인 표현들이 너무 노골적이고 문란해서 듣기가 거북합니다. 이걸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면 늘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은 옛날 사람이잖아요.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시잖아요. 가사는 그냥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면 되는 거예요.” 뭐 이런 식입니다.

최근에 TV를 켰는데, 그 뮤직비디오라는 걸 하나 봤습니다. 그걸 보고 제 생각이 완전히 정리됐습니다. 그런 음악에 그런 영상을 입히면 더럽습니다. 정말입니다. 우선, 성적인 내용이 노골적으로 넘쳐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현실과는 완전히 단절돼 있습니다. 사람들을 분별력 있고 이성적인 사고에서 떼어놓기 위한 겁니다.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마치 약물로 인위적인 황홀감을 주려는 것처럼 완전히 괴리된 상태입니다. 온통 단절된 데다가 뒤죽박죽에 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이치에 맞는 흐름이나 논리적인 연결점이 전혀 없습니다. 전부가 그냥 기괴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마흔셋이긴 해도 정신은 멀쩡합니다. 그런 걸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건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런 쓰레기에 젊은 세대 전체가 그냥 흠뻑 젖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이제는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 분명한 경계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 주변 사람들이 무엇에 노출되어 있는지 신중히 살펴봐야 합니다. 영화관에 아무렇지 않게 들락거리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 영화나 보고, 쓰레기 같은 책을 읽고, 온갖 더러운 것에 자신을 노출시키면서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른 건가?" 저는 영화를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직접 접해본 적이 없어서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정말 우리 사회가 이 정도까지 온 겁니까? 이처럼 혼란과 혼돈에 빠진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것들 때문에 망가진 사고방식이 자리잡은 겁니까? 우리는 분명히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과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타협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함과 정결함의 기준을 분명히 세우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고린도후서 7장이 떠오릅니다. 1절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권징 제도가 있는 겁니다.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그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셔야 하고, 저도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형제님이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우리 교회 직원이 이런저런 행동을 했다는 온갖 이야기를 다 써 놓았습니다. 우리 직원 한 명을 헐뜯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장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님께, 만일 어떤 형제에 대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형제에게 직접 가십시오. 제 앞에서 그 형제를 비방하지 마십시오. 저는 형제님의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형제에게 직접 가십시오. 둘이 직접 해결하십시오. 그리고 해결되었다면 저는 알 필요도 없습니다. 형제님이 직접 찾아가지도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를 제게 고발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그 형제님이 다시 아주 정중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저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누군가가 불쾌하게 했다면 당사자와 직접 풀어야 합니다. 저는 사실 그 형제가 정말 잘못을 했는지도 확신이 없습니다. 제가 너무 단호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이 성경적인 태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지 교회가 거룩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사랑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이죠.

거룩함의 영역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을 기르는 기도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 생활은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은 또 어떻습니까? 금식은 어떻습니까? 묵상은요? 언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하십니까? 언제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장로입니다. 저는 집사입니다. 성경공부 준비도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십니까? 그저 짧은 순간의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오랜 시간 지속되는 기도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시간을 가지십니까? 우리는 지금 거룩함이라는 면에서 어디에 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라는 면에서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건 단지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지도자들의 문제 맞습니다. 저도 그렇고 다른 모든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뒤로 물러서서 반쯤만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적인 권위입니다. 영적 권위입니다. 저는 교회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 안에는 성도들 위의 권위가 존재합니다. 그 권위는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한 장로들을 통해 다스리십니다. 이건 제가 만든 개념이 아닙니다. 장로교가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장로들이 성도들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를 가졌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게 아닙니다. 아주 분명하고 단순한 진리입니다. 장로에게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물론 이 권위는 남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위의 자리에 올라가면 자신이 그 직책을 가졌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인격 때문에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장로의 권위는 경건한 사람의 손에 들린 하나님 말씀의 권위입니다. 다시 말해,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저 건물을 지으세요”라고 말할 권위는 없습니다. 또는 “여러분, 제 휴가를 늘려주세요, 제 월급을 올려주세요, 이 벽을 초록색으로 칠하세요, 제가 권위자니까요”라고 말할 권위도 없습니다. 저는 페인트에 대해서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유일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범위를 벗어나면 그 권위를 어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는 분명한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제가 뉴욕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무려 25장짜리 논문을 건네주더군요. “꽤 흥미로우실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종이 뭉치 하나를 저에게 줬습니다. 그 논문의 제목은 <맥아더주의의 이단성(The Heresy of MacArthurism)>이었습니다. 물론 맥아더 장군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맥아더주의의 이단성”이랍니다. 그래서 도대체 제가 어떤 면에서 이단인지 알아보려고 기대하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서문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심하라. 존 맥아더는 겉으로 보기에는 선해 보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있다. 첫째, 전도를 반대한다. 둘째, 선교를 반대한다.” 그리고 그 뒤로 열 가지 항목이 쭉 이어졌습니다. 마지막 열번째는 이랬습니다. “열째, 장로 제도를 믿는다. 이것이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마치 제가 장로 제도를 발명한 이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사실은 영적인 권위 아래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죠. 물론 그런 사람들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한다면, 과거에 권위가 남용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경건한 사람들을 세우시고 교훈과 모범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의 인도를 사랑으로 따르며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그 권위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실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늘 기도합니다. 최대한 실수가 없기를, 가능한 한 온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인의 군대가 유일하게 다른 점은 부상자에게 총을 쏜다는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공격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르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 전체를 망치는 일은 아닙니다. 잘못했더라도 고백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고 바로잡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십시오. 지도자들을 존경하라고, 사랑 안에서 높이 평가하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3장은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 설교는 늘 목사님이 하시나요? 그건 은사가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택하셨죠. 그런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네 곳에 열두 사도 명단이 나오는데, 그 명단마다 베드로가 항상 첫번째로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늘 대표로 말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된 겁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족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봐도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항상 함께 다녔습니다. 여러분, 요한이 말할 게 없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과 나눈 교제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누구보다도 귀한 진리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2장까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베드로에게 말하는 은사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나바는 뛰어난 교사였고, 설교자였으며, 아마도 바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과 함께 다니기 시작했을 때, 심지어 이방인들조차 바울이 대표 설교자라고 여겼습니다. 은사는 이렇게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 장로, 목사, 감독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모두 동일한 영적 권위와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지도자들의 돌봄 아래 있어야 하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원한다면 반드시 올바른 골격을, 뼈대를 갖춰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 교회의 분명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이것이 교회의 열망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만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높이고, 분명한 교리를 알아야 하고, 바른 교훈(건전한 교리)을 붙들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하고, 우리보다 위에 있는 영적 권위자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이 다섯 가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밖에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다 단기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걸 18개월 안에 해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현재 목회자의 평균 재임 기간이 2년 6개월입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는 이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이런 토대를 세우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리고 이건 그저 뼈대, 골격일 뿐입니다. 아직 내부 체계도, 근육도, 살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 한번 뿐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삶을 살아내고 주님께 드려야 한다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쁩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모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런 큰일을 해냈으니 이제 다 흩어져서 각자 여기저기로 가자”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이 교회가 제 마음의 열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진짜 싸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보고, 진짜 토대가 무엇인지를 끝까지 붙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미래를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바로 여러분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교회의 소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다루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반드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들이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중요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하고, 그 가르침도 중요하고, 거룩한 삶도 중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권위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중요하게 여기게 하시고,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들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더 나아가, 이 세상에 길들여져 마음이 무뎌지거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당연하게 여겨 무관심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 영적 전쟁의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한때 참여했지만 이제는 그냥 물러나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다시 우리를 그 자리로 불러 주옵소서. 제 마음에,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는 모든 마음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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