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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주일부터 저는 <교회 해부학>이라는 제목으로 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지금이 우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고, 앞으로도 더 큰 일들을 행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이 교회와 이 사역,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더 깊이 헌신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기대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이 모든 것을 방해하려는 원수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치열한 영적 전쟁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태복음 강해를 잠시 멈추고, 저의 마음을 여러분에게 조금 더 열어서 보여드려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영적인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누고 싶었습니다. 지난 주일 이후로 여러분의 반응에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카드, 편지, 전화뿐만 아니라, 직접 찾아오셔서 격려해주신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이 교회에, 목사님의 사역에 다시 한 번 헌신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에게 정말 큰 격려가 됩니다. 저는 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자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반응해 주시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계속해서 지난 시간에 나눈 내용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일종의 영적 고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는 우리 교회가 기초를 다질 때 함께하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가 세워지던 시기에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눈에 보이는 여러 사역이 어떤 기초 위에 서 있는지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초를 조금 파내서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사역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기초가 되는 토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 기초를 들여다보는 데에 도움이 될까 해서, 저는 바울이 사용한 멋진 비유, 곧 몸에 대한 비유를 빌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교회 해부학>이라고 붙였습니다.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을 말씀드렸습니다. 골격, 내부 체계, 근육, 살입니다. 간단한 구조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틀을 제공해줄 겁니다.

지난 시간에 교회에는 반드시 골격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에 형태를 주고, 틀을 제공하고, 교회가 바로 설 수 있게 해주죠. 이 골격이야말로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토대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이 골격 위에 세워지고 그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필수 불가결한 골격의 다섯 가지 기초 원칙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높임, 성경의 절대적 권위, 분명한 교리, 거룩한 삶, 그리고 영적 권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복된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말씀을 삶의 전부로 삼고, 연구하고,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말씀에서 분명하고 정확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리를 끌어내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거룩함과 덕과 경건과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영적 권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와 따르는 자 모두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때때로 저에게서 하나님, 성경, 교리, 거룩함, 권위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게 되더라도, 교회의 구조와 골격, 틀을 계속해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주제들은 우리가 끊임없이 되새기고 돌아가야 할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같은 설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실제로 같은 설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만약 가끔씩 같은 설교를 할 때에는 항상 제가 강조하는 부분을 바꿉니다. 그러면 적어도 겉으로는 새롭게 들릴 테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거듭 확인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똑같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시간을 얼마나 주실지, 제가 이 교회에 얼마나 오래 있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떠나게 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이 교회를 떠난 후에, 혹은 천국에서 우리 교회의 사역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가 계속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내가 있을 때 헌신했던 그 진리에 여전히 헌신하고 있구나.”

우리는 이러한 기초적인 진리들을 다시 확립하기 위해 구조를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러한 필수적인 요소들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요소들이 설교 시간에 반복적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두번째로, 이 요소들은 교육 사역부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소그룹, 교리반, 성경공부, 유치부, 청소년부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면, 또는 누군가를 제자 삼고 있다면, 이러한 기본 원칙을 계속해서 되새기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 몸이 되게 하는 기초와 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기초를 설교해야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에 헌신하는 모습을 삶으로 보여야 합니다.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제가 거룩한 삶, 교리의 명확성, 성경의 권위 등을 제 설교에서만큼이나 제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러한 원칙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두번째 범주인 내부 체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과 또 다음주, 이렇게 두 번에 나누어서 다루려고 하는데, 두 주 안에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만, 지금부터 내부 체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 특정한 영적 태도가 흐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몸의 내부를 생각해 보면, 혈액이 그 안을 흐르면서 몸이 살아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단순한 골격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골격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형태를 제공하지만, 생명은 아닙니다. 살아있기 위해서는 특정한 영적 태도가 흐르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 영적 태도를 교회의 내부 체계라고 봅니다.

목회 사역의 목적, 장로들의 목표, 교회 지도자들의 목표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특정한 영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에게 어떤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하십시오, 저것을 하십시오”라고 단순하게 지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영적 태도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태도 자체가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겉으로는 옳은 일을 하더라도 그 마음의 태도가 바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바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제가 성령의 열매, 즉 내면의 동기와 태도를 다루는 데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시작하면서 어떤 교회에 부임하게 되면, 교회가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기대한 모습들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조직을 개편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저에게 연락을 하거나 찾아와서는 “장로 제도를 도입하고 싶습니다, 교회를 이렇게 저렇게 다시 조직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럴 때 제가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를 재조직하면 변화가 일어날 것 같습니까?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태도에서 단지 구조만 달라질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왜 구조를 바꾸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하기가 굉장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제가 처음 그레이스 교회에 왔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부임하고 한 달쯤 되었을 때, 주일학교를 완전히 새롭게 운영할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걸 정리해서 교육위원회에 제출했는데 만장일치로 반려됐습니다. 제게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더군요. “목사님이 그렇게 대단하십니까? 우리 교회는 우리가 더 잘 알아요. 목사님의 능력을 먼저 보여주셔야죠, 우리는 아직 하나도 못 봤습니다.” 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뜻은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 교육위원회가 새로운 시스템을 저에게 제안했는데, 전에 제가 냈던 아이디어와 똑같았습니다. 결국 문제는 구조가 아니라, 올바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영적 태도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달려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구조에 너무 신경쓰지 않고 올바른 영적 태도를 세우는 데 집중하면, 구조는 스스로 정돈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성령님이 이끄시는 일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성경적인 교회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태도를 강조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내면의 변화에 집중해야 합니다. 단지 행동만 틀에 맞추려고 하면 안 됩니다. 헌금은 꼭 하세요, 주일 아침, 저녁, 수요일 예배 다 참석하세요, 일주일에 기도는 다섯 시간 이상 하세요, 매일 성경 읽으세요, 이런 식으로 의무감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방식은 우리가 바라는 방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적이거나 피상적인 접근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사역의 목적은 언제나 올바른 태도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때로는 올바른 태도를 갖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싸움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태도는 옳지 않지만 그냥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식은 결국 율법주의에서 오는 만족감을 부추기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제가 피하려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태도를 다뤄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제가 제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꼭 세워지고 자라나기를 바랐던 태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모든 태도를 아우르는 정말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타협하지 않는 영적 태도입니다. 몇 달 전에 성찬예배에서 다니엘을 잠깐 살펴보면서 나눴던 바로 그 태도입니다. 순종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걸로 끝입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 모든 태도의 근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매달, 매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모두의 마음과 생각에 부지런히 새겨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는 언제나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반응해야 합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 우리에게 주어질 복을 위한 길, 다른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길,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줄 본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우리는 순종합니다. 옳기 때문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고, 우리를 복 주시는 자리로 이끌기 때문이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본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맞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니까, 말만 하지 말고 정말 주라고 고백했다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시라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죠.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길이 좁은 이유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서 그 문을 통과했고, 예수님의 주되심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켰습니다. 그것은 결국 순종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번주에 라디오 사역부에서 사역하는 필 존슨(Phil Johnson)이 아주 흥미로운 테이프 하나를 저에게 전해줬습니다. 한 청취자가 보내온 것인데, 편지와 함께 녹음한 내용을 전해 왔습니다. 약 10분 동안 우리 교회 프로그램을 어떻게 듣고 있는지, 성경 공부가 얼마나 유익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본인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죄의 영역에서 역사하고 계시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궁금한 부분이 있다면서 물어왔습니다. 자신이 평생 여성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갖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했고, 대신 농장의 동물들에게 감정을 느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농장 동물에게입니다.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죄책감도 없었고, 하나님께서 다른 영역에서는 자신을 연단하고 계시지만 이 부분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청취자에게 제가 네 장짜리 답장을 보내면서 문제가 된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 청취자가 구약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이미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짐승과 동침하면 죽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따로따로 나누어서 “이 죄는 심판하겠다, 이 죄는 별로 신경 쓰지 않겠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점도 부드럽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전달했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한 모욕입니다. 다양한 성경 말씀도 함께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다시 녹음 테이프가 저한테 왔습니다. 필이 저에게 그 테이프를 틀어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너무 얽매여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얽매여 있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에 너무 얽매여 있어서 정작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시는지를 잘 몰라요.” 정말 믿기 힘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얽매여서 하나님의 감정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읽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감정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저한테 성경 이야기하지 마세요. 저는 죄책감도 없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에는 신경쓸 생각도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습니까? 교회에 얼마나 자주 가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렇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줄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가증한 죄를 삶에 품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성경에 얽매이기 싫다고 하면서, 성경과는 별개로 자기는 하나님의 감정을 안다, 이렇게 말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는 본래 그런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자기 합리화의 수렁으로 끌고 갑니다.

물론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주는 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감정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사역의 가장 분명한 목적과 목표는 백성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백성들에게 바라신 것도, 신약의 교회에 바라시는 것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삶 속에 있는 어떤 문제가 하나님의 진리로 들추어질 때, 순종하기보다는 그 진리를 그냥 밀어내버리고 기존의 불순종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들었는데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 봅시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말씀을 의식에서 지워버리고 여전히 쓴 뿌리와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일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교회에 잘 다니고 있어요.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죠." 정말 그럴까요? 사무엘상 15장 22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순종이,” 무엇보다 낫다고요? “제사보다 낫고.” 결코 의식으로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다잡으라는 뜻입니다. 우선순위를 바로잡고 순종하는 자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전에 알지 못하던 때를 따라 살지 마십시오. 과거의 욕망을 따라 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순종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16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면서 성도들을 칭찬합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성도들이 순종하는 모습이 분명히 드러날 때야말로 목사로서 가장 기쁜 때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시는 분들은 분명히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함으로써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성숙하지 못합니다. 이번 주에 운전을 하다가 라디오를 틀었는데, 하워드 헨드릭스(Howard Hendricks) 교수님이 나와서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50세가 넘은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가장 열정적이고,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정결하고, 가장 활기차고, 봉사에 가장 열려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왔고, 오랫동안 삶에 적용해 왔고, 오랫동안 성숙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열매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활기차고, 헌신적이고, 기쁘고, 기도에 힘쓰며, 역동적인 사람들, 교회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바로 50세, 55세, 60세 이상의 성도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전도의 최전선에 서야 하고, 기도의 최전선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가장 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해온 시간이 가장 길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삶이 더 오래 지속되어 왔고, 진리를 끊임없이 적용해 온 결과로 더 성숙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말 자주 들어보셨습니까? 저도 하워드 헨드릭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면 이런 말은 얼마나 자주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교회가 정말 좋은 건,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교회에 활력소가 되면서 생동감을 주죠." 저도 젊은 사람들 좋아합니다. 저도 아직 젊습니다. 맞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분명히 활력이 있습니다. 저도 항상 젊은 사람들에게 말씀 전하는 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관심이 없으면 없다고 말은 해주거든요. 지금 지루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게 말이죠. 그만큼 젊은이들에게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게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선 안 됩니다. 오히려 그건 교회에 대한 슬픈 평가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목회자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교회를 보면요, 어르신들만 가득해요." "지역도 좋고 교회도 좋은데, 나이 많은 분들만 계세요."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런 분들이야말로 교회의 진짜 에너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진리를 계속해서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나이만 든 그저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반복적으로 외면하고 적용하지 않는 삶을 계속 살다 보면, 어느 순간 50이 넘고,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섰을 때 이제는 나설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한발 물러서게 됩니다. "나도 참 오래 섬겼지. 이제는 좀 쉬고 싶어. 제자훈련이나 복음전도는 이제 젊은 사람들이 하지 않겠어? 나는 나이가 좀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겁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발이 성성한 경건한 노인들입니다. 초대 교회를 봐도, 그 안에는 성숙한 성도들이 가진 생동감과 역동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를 보면, 그 생명력을 어린 아이들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청소년만으로 채워진 교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가진 생기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오랜 세월 진리를 삶에 적용하며 살아온 성숙한 신자들이 가진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듣고도 성령의 능력으로 그 진리를 적용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예전과 똑같은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나이만 먹을 뿐입니다.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역동적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갈 때쯤이 되면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로켓이 발사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 나이에 다다를 즈음이면 삶 전체에 에너지가 넘쳐야 하니까요.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들은 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식어가는 모습을 아주 자주 봅니다. 듣기는 잘합니다. 교리가 머리에 가득합니다. 배운 것은 많은데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굳어져서 차가운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머릿속에는 지식이 가득한데 능력은 없습니다. 저는 제 삶이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 저는 계속해서 달리고 싶습니다. 설교하다가 틀니가 강단에서 떨어질 때까지라도 말입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너무 열정적으로 설교하다가 정말 그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을 돌아보면서, 45세, 50세 즈음에 모든 능력과 에너지와 역동성이 다 사라졌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서 은퇴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듯 퇴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삶에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아예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영적으로 제대로 먹지 못하거나,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순종하는 데 헌신해야만 합니다.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진리를 들었을 때, 성령님이 분명하게 알려주셨다면 즉시 삶에 적용하십시오. 마음이 찔릴 때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마십시오. ‘저 설교 누가 들었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면서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여러분은 점점 성숙해지면서 하나님께 더욱 귀하게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힘과 능력이 말씀을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많이 적용한 사람들의 순종에서 흘러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두번째 태도는 겸손입니다. 겸손, 겸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태도입니다. 저는 늘 이 겸손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 자신에게도 교만은 늘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다는 걸 잘 압니다. 교만은 제게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한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겸손은 참 어려운 성품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이제 나는 정말 겸손해졌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겸손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여러분과 함께 겸손에 대해 배우고, 겸손을 이해하는 길로 함께 나아가고자 애써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체육관을 지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강단을 무대처럼 설치했습니다. 누군가가 등받이에 왕관처럼 뾰족한 장식이 달린 커다란 의자를 다섯 개를 주문했는데, 그 가운데 의자는 저를 위한 거였습니다. 나머지 네 개는 누가 앉든 상관없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몇 주 정도는 그 왕관 의자에 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되더군요.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앞줄로 내려가서 앉았습니다. 제가 겸손해서 그랬던 게 아닙니다. 그냥 무대 위에 앉아 왕관을 뒤집어쓴 모습이 제가 의도하지 않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여러분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하는 게 맞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다른 점은 오직 하나님께서 저를 설교자로 부르셨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는 것뿐입니다. 제 영성이 더 나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나중에 클레이튼(Clayton)이 우리 교회에 왔을 때 저한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왜 단 아래에 앉아 계세요?" 그래서 제가 "글쎄요, 그냥 여기가 편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클레이튼이 "단 위에 앉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아, 지금 단 위에는 의자도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의자를 찾아내서는 함께 단 위에 앉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클레이튼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 목사님 이건 아닌 것 같네요." 그래서 제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라고 하니까, 클레이튼이 "정말 그렇습니다. 다시 내려가는게 좋겠어요"라고 했습니다.

작은 일 같지만, 그 밑바탕에는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겸손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이미 겸손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겸손을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간절히 필요로 하셨다고 착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이 구원받았으면 정말 좋을 텐데. 돈도 많고, 재능도 있고, 리더십도 뛰어나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구원하시기만 하면 대단한 일이 일어날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핵심이 아닙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그 빚을 갚을 수 없었던 이유는, “갚을 것이 없는지라”라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들어갑니다.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스스로 얻을 능력조차 없어서 구걸할 수밖에 없는 거지로 들어갑니다. 완전히 파산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가 지금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 곧 하나님의 구원과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자랑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애를 숭배하는 이 시대의 문화, 이기심에 물든 현대 사회에 맞서 싸워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유하고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겸손의 태도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역의 주요한 강조점이었고, 여러 각도에서 이 주제를 다뤘습니다. 마태복음 10장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버리면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과 25절에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지우고, 낮추고,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낮추어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2장을 여러 차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항상 다른 사람 아래에 서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더 낫습니다. 저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저는 당신을 높이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필요를 채우기 원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겸손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권력과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툰다면,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동일한 혼란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정말 한심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장 작은 자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덕분입니다. 겸손이란 단순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당신이 저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겸손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벌레야.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쓰레기야.”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런 말은 겸손이 아닙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매우 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구속받았고, 성화되고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잠재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이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에겐 당신이 저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어떻게요? 네 자신과 같이입니다. 나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나 자신에게 쏟는 헌신과 정성을 이웃에게도 동일하게 쏟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고린도전서를 함께 연구하면서 살펴봤듯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얼마나 심하게 책망했는지를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황홀경적인 체험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면서 마치 그것이 자기 영성의 증거라도 되는 양 교만하고 자기도취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더 깊은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더 영적인 사람인 양 영적인 리본을 달고 다니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겸손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더라도 저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제 우선순위를 기꺼이 내려놓습니다. 여러분의 자유를 위해 저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합니다. 만일 제가 고기를 먹는 것이 여러분을 실족하게 한다면 저는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마시는 것이 여러분에게 거리낌이 된다면 마시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14장이 말하듯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을 실족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자유를 내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걸림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필요를 제가 채우겠습니다.

저는 저를 여러분을 돌보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제 양떼인 여러분 중의 한 명이 길을 잃는다면 마태복음 18장이 말하는 것처럼 제가 반드시 찾아서 데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라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모습이 비쳐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바랐던 것은 교회가 단지 순종하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겸손과 온유, 낮아짐과 자기 부인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뜻을 고집하고, 자리를 원하고,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늘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듣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말이죠.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에 대해서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제가 보통 이런 말을 하면 대체로 끝날 때가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그렇죠?

자, 이제 세번째 태도는 사랑입니다. 겸손에 대해 말하면서 사랑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세상의 가짜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랑은 대상 지향적입니다. 괜찮아 보이는 대상을 보면 감정적으로 끌리는 것입니다. 결혼이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단지 감정일 뿐입니다. 감정이 사라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면 관계도 끝나버립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사랑은 세상의 그런 대상 지향적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만족을 위한 사랑도 아닙니다. 세상은 사랑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감정 때문에 사랑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줄 수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짜릿할 때는 좋지만, 그 짜릿함이 사라지면 관계도 끝납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적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희생적인 섬김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태도가 아니라 행동입니다. 사랑은 항상 어떤 일을 행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십시오. 전부 동사입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오래 참고, 모두 동사형입니다. 사랑이 이렇게도 행하고, 저렇게도 행 합니다. 사랑은 행동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사랑이란 겸손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타인을 위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보다 나를 덜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니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가 ‘겸손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 특정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적인 끌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 사람 외에는 아무에게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의 사랑은 자기와 마음이 잘 맞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향하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즐거워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제가 처음 우리 교회에 왔을 때, 감정적으로 사랑하기가 정말 어려운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저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온 양떼를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감정적으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고, 그 사실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냥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어도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분들도 저와 똑같이 느꼈을 겁니다. 서로가 잘 안 맞았던 거죠.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평생을 살고 죽어서 천국에 가서도 한 시간도 함께 보내지 않아도 전혀 아쉬울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겁니다. 실제로 어떤 분들은 천국에서 제가 있는 곳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가기를 바라기도 할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저의 설교 테이프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모든 사람에게 끌릴 수 없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건 사랑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은 사랑의 기준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주 단순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필요가 있다면 내가 그 필요를 채우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누구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겁니다. “누가 당신의 이웃인가?” 길 위에 쓰러져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의 길 위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끌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랜 세월동안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겸손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보다 더 중요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요한복음 1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본문으로 설교했던 날이 지금도 정말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날의 날씨, 예배당의 모습, 성도들의 모습까지 다 기억이 납니다. 아마 너무나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제 마음에 깊이 새겨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미 식사가 시작된 후였습니다. 그냥 식사가 아니라 만찬입니다. 당시에 만찬을 할 때는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머리가 다른 사람의 발에서 불과 20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채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발을 씻어주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 누구도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더 크냐를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종이 하는 것처럼 발을 씻기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교훈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감정적으로 사랑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느끼신 유일한 감정은 실망이나 안타까움이었을 겁니다. 제자들이 너무나 교만하고 이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은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발을 씻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누군가에게 필요가 있다면 그 필요를 채워 주라."

여러분 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여러분은 그 즉시, 자발적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그 사람을 돕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겸손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겸손을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따라서 겸손이란 누더기를 입고 돌아다니면서 “나는 벌레야,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교묘하게 포장된 교만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이 말하는 거짓 겸손, 사람을 속이는 미혹입니다. 참된 겸손은 결코 자신의 겸손을 입으로 떠들지 않습니다. 겸손은 항상 눈에 보입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한 섬김의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항상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고, 그 즉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랑은 반드시 행동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요한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간단히 질문하겠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필요를 향해 나아갑니다. 감정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한 섬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하면서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요한일서 2장 9절부터 11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된 사랑을 반드시 자신의 백성 안에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사랑, 사랑,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매력적인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한 섬김의 태도입니다.

이번주에 제가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가 나눴던 원칙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읽겠습니다.

존 목사님께,이 편지는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이제야 시간을 내어 씁니다. 지난 5월에 저와 남편은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예배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방문자의 시각에서 본 그레이스 교회와 교인들에 대해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희가 출석하는 교회도 매우 큰 교회입니다. 교회의 모토는 "사랑이 있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제 평생 그레이스 교회에서보다 따뜻한 환영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성도들은 정말 친절했습니다. 마치 저희를 왕족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교회 곳곳에서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하고 환영해 주었습니다. 한 신사분은 아침 일찍 저를 데리고 교회 구석구석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1부와 2부 예배 사이의 쉬는 시간에는 또 다른 분을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이 예배 설교 테이프를 받고 싶냐고 물으시길래 "물론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다룬 총 6개의 테이프가 도착했습니다. 제 주변 친구들이 그 시리즈를 듣고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질문들에 답을 얻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9월 18일에 다시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사님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목사님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놀라운 분들인지를요. 하나님께서 목사님과 가정에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그 두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교회를 안내해 준 분은 사실 그럴 시간이 없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맡고 있는 일이 정말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 테이프를 보내준 두 번째 분은 사실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겸손한 마음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위로, 만족, 기쁨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 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사랑이 앞으로도 언제나 이 교회 안에 흐르게 하여 주옵소서. 겸손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타적인 사랑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계속 흘러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머지 열두 가지는 다음주나 그 후에 다루겠습니다. 바로 ‘연합’입니다. 하나됨입니다. 이 연합 역시 제가 항상 깊이 생각해 온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연합입니다. 그 말씀의 가장 본질적인 적용은 구속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공통된 영원한 생명 안에서의 성도들의 연합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더 확장하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단지 구속의 차원에서의 연합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삶과 목적에 있어서의 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자신의 백성이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맞습니다. 바울은 연합을 만들어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연합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지키기 위해 힘쓰라고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연합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저는 이 하나됨이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요소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끊임없이 이 연합을 공격하려 드는 겁니다.

여러분은 혹시 얼마나 많은 교회가 분열되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지, 얼마나 많은 분열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제가 이번주에 마운트 허몬(Mount Hermon)에서 열린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어떤 한 자매님이 사흘 동안 매일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목사님과 꼭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제발요.” 얼마나 간청을 하던지 결국 함께 자리에 앉았습니다. 한 40분 동안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자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저희 교회가 분열 위기에 처했어요. 교회 전체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죠?”

그러자 자매님은 멍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희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어요. 더는 이유가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분열이 너무 심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어서 진짜 이유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요.” 안타깝지 않습니까? 교회가 분열되고 있답니다.

그런 후에 자매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세요. 교회를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그랬더니 자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분열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요.”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같은 믿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네, 우리 모두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냥 성격 차이일 뿐이에요.” 정말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에 한번은 패트리샤와 함께 성경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댈러스 제일침례교회(Dallas First Baptist) 크리스웰 목사님(Dr. Criswell)의 딸도 있었는데, 아주 실력 있는 소프라노입니다. 교회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을 “아빠”라고 부르더군요. 크리스웰 목사님 같은 위엄 있는 분에게 그런 호칭을 쓴다는 게 제겐 좀 낯설게 느껴졌지만, 아빠가 맞긴 하죠. 그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 아빠가 한 번은 끔찍한 일을 겪으셨어요. 어떤 사람이 교회 직원으로 들어와서 파벌을 만들고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했거든요.” 아니 그렇게 위대한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아빠는 그 일이 벌어지는 걸 보면서 마음이 너무 괴로우셨대요. 그래서 그 일 때문에 몹시 마음이 뒤숭숭했던 어느 주일 날, 아무런 상의도 없이, 당회나 누구의 동의도 없이, 건축 업자에게 직접 전화를 하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다음 주일까지 이 교회 모든 좌석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기도용 의자 받침대를 설치해 주십시오.’ 그리고 정말로 다음 주일까지 공사팀이 들어와서 접이식 무릎 꿇는 받침대를 다 설치했어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었을 때, 아빠는 강단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지 W. 트루엣(George W. Truett) 목사님의 45년 사역 기간 동안에도, 그리고 제가 이곳에서 사역한 지난 35년 동안에도, 이 교회는 단 한 번도 분열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크리스웰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그 무릎 꿇는 받침대를 내리고 전 교인이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게 하셨답니다. 수천 명이 함께 무릎을 꿇은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교회 공동체 안에 놀라운 치유를 베풀어 주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분열을 막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입니다. 저는 사탄이 끊임없이 교회를 분열시키려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25년이 넘게 사역하는 동안 한 번도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물론 사소한 일들은 있었습니다. 커튼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지, 일이 자기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만을 갖고 떠나고 싶어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성도들의 말이 일리가 있었던 적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겸손한 태도를 갖고 사랑으로 행하는 성도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그리고 제 자신의 마음에 어떻게든 하나됨을 심어가려고 애써 왔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그것을 갈기갈기 찢으려 합니다. 그런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사탄은 늘 불만을 품은 한 사람을 교회 직원으로 들여보내고, 그 사람을 통해 분열을 일으키려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달콤한 일치와 조화를 허락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입니다. 우리는 늘 경계하며 살펴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항상 불화를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누군가 나타나서, 이런저런 일로 작은 불화를 만들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분열을 심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비록 그 사람이 맞다 해도, 맞다고 해서 반드시 단상에 서서 말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옳다는 것 아시죠. 하지만 그건 잠시 제쳐두고 지금은 연합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말이죠.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의견 차이는 반드시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심을 다해 간청하는 장면입니다. "모두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은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노라," 바울은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뉘셨느냐?"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으셨습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연합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태도들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순종하는 삶을 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즉시 바르게 적용하고, 그 결과로 점점 성숙해지고 거룩함이 자라나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 영적인 헌신에 있어서도 절정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겸손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리는 마음, 그 겸손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실천은 또 어떻습니까?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평화를 이루며 성령 안에서의 하나됨을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가야 할 방향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저부터 시작하게 하옵소서. 제 마음 속에 순종에 대한 헌신이 다시 불타오르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의 은혜로, 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함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제 앞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저에게 있는 한,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하며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 말과 행동이 분열이 아니라 하나됨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냐하면 겸손이 없고, 사랑이 없고, 하나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참된 순종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도, 우리 모두도, 진리를 듣고도 삶에 적용하지 않아 마음이 굳어지고 정체되고 식어버린 죄를 짓는 자가 될 것입니다.

잠시 후에 다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개를 숙인 그 자리에서 우리 모두 마음속으로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나눈 네 가지 태도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도록 조용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순종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여러분의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하시도록,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랑을 주시도록,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굳어버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만일 이렇게 기도하기가 싫다면 정말로 더 심각한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았고, 그 결과로 불순종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 습관을 끊어내기가 너무나도 어려워졌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중보기도를 통해 영이 깨어지고 새로운 순종의 습관이 시작되도록 간절히 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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