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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제 마음속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싶습니다. 몇 주 전부터 저는 우리 교회에 정말 중요하다고 믿는 몇 가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설교라기보다는 제 안에 있는 열정이고, 성령님이 제 마음에 주신 감동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렸듯이, 제가 이걸 어떻게 말씀드리게 될지, 어떤 흐름으로 풀어가게 될지, 성령님이 제 생각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필수적인 요소,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가 지난 세월 동안 올바른 일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일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이 진리들을 다시 한번 확증하고자 합니다. 혹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면, 또 새로 온 분들이 계시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힘과 복을 얻었는지를 살펴보고 함께 다시 세워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짧은 시리즈에 <교회 해부학>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교회 해부학>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몸의 비유를 차용해서 기본적으로 몸을 네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의학적인 분류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몸은 골격, 내부 체계, 근육, 그리고 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교회에는 반드시 골격이 있어야 합니다. 첫번째 시간에 다뤘죠. 교회를 형성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이 요소가 없으면 교회는 형체 없는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최소한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반드시 기초로 삼아야 할 토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중심에 있어야 할 틀과 구조, 형식과 실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높이는 관점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려면 그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교회가 집중해야 할 영역이 많지만,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집중할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 안에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모든 것의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강조한 것은 성경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는 관점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말씀인 성경의 절대적 우선순위를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명확한 교리에 헌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거룩한 삶에 헌신합니다. 말씀에서 찾은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우리는 영적 권위에 헌신합니다. 진리로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바로 골격에 해당하는 요소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관점,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말씀에 우리가 절대적으로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을 명확하게 풀어서 실질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그 말씀을 거룩한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영적 권위 아래 두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뼈대를 이루는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선포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반드시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재확인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늘 그 진리로 되돌아가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를 하고, 소그룹 모임과 교제의 시간을 가질 때, 그 모든 활동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들을 계속해서 재확인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헌신한 것들을 다시금 다짐하고 확인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먼저 찬양을 부르고, 그 다음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시편을 읽는 겁니다. 거의 항상 그렇죠. 그런 다음에 성가대가 영광의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노래하고, 시편 150편 말씀처럼 악기도 연주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관점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설 때, 저는 여러분이 네번째 단계인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배운 진리를 가지고 나가서 그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목양 사역이 뒤따릅니다. 목양이란 곧 영적 권위를 갖고 교회를 돌보고 살피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렇게나 뽑아낸 임의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우리가 확고히 붙잡고 있는 이 필수 불가결한 진리들과 일관된 흐름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입니다.

둘째로, 지난주부터 살펴보기 시작한 부분은 내부 체계입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계속 다루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강조하고 싶은 요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부 체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반드시 내부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단지 골격과 근육, 살만으로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몸 전체를 흐르는 체계가 작동해야 생명이 유지됩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단단한 교리적 기초만을 확립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생명의 흐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생명의 흐름이 바로 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바른 태도입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따라서 제가 사역을 통해 여러분 안에 올바른 영적 태도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분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했듯이,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에게 바르게 생각하는 법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여러분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사고방식을 바로잡는 문제입니다. 바른 생각이 바른 행동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생각, 잘못된 동기, 잘못된 이유, 잘못된 태도로도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위선일 뿐입니다. 모두가 위선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겉으로, 억지로 맞춰 살아가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분의 사고방식 속에 올바른 영적 태도를 세우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올바르게 생각하면 올바르게 행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저는 단지 어떤 프로그램에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단지 활동에만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어떤 외적인 기준에 맞추는 데만 관심을 갖지도 아닙니다. 제가 진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내적인 태도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그렇게 몸 안에서 흘러야 할 것들이 제대로 흐르게 되면, 그 몸은 온전하면서 건강하고, 열매를 맺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드러내게 됩니다.

자,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눴던 내용을 잠시 되짚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길러야 할 태도는 순종입니다. 순종이야말로 모든 태도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을 관통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태도입니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따르겠다는 태도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과 협상하지 않고,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태도입니다. 제사보다도 낫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외적인 예배 행위보다 더 귀합니다. 내적인 순종입니다. 모든 올바른 영적 태도가 이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오직 어려움과 시련, 부정적인 상황만이 따를 뿐입니다.

두번째로 말씀드린 태도는 겸손입니다. 순종과 겸손, 이 두 가지가 기본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저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필요가 제 필요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바람이 제 바람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행복이 제 행복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제 기쁨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자리가 제 자리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평판이 제 평판보다 더 중요합니다. 겸손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타적인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이 말하듯이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반드시 갖추어야 할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말씀드린 태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겸손입니다. 겸손의 실천입니다. 겸손과 사랑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보다 저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결코 제 자신을 여러분에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위해 제 자신을 기꺼이 버릴 수 있으려면, 저는 진정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은 사랑이 출발할 수 있는 발판입니다. 겸손이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이라면,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는 섬김이요, 자신을 희생하는 나눔입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하나됨, 연합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순종에 헌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연합입니다. 겸손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연합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자신을 내어주는 곳에 놀라운 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필요를 채우고, 제가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반복되고 계속될 때, 바로 이런 상호적인 섬김과 나눔으로 성경이 말하는 한 마음, 한 뜻, 한 영혼으로의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앞서 우리가 처음에 다룬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했죠. 이제 그 첫번째 내용을 듣고 어떤 분이 보내주신 편지를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 편지가 우리 모두에게 참 따뜻하고 큰 격려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의 최근 두 편의 설교, <교회 해부학> 시리즈는 저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시리즈를 통해 그레이스 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놀라운 일을 행하여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겸손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제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 나누고 싶습니다.”

“초여름에 저는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의 <겸손(humility)>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 하나님께서 저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죠? 몇 주 전에,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우리 그레이스 교회에서 배운 모든 성경 지식을 실제로 적용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네 명과 함께 멕시코의 쓰레기 매립지에 사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에 자원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생활 환경이 열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지만, 그곳의 오염 상태는 정말 사람을 병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제가 맡은 일은 아이들의 머리를 감기는 것이었는데, 그 아이들의 머리에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머리에 이가 있는 아이들 스물다섯 명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게다가 흐르는 물도 없어서 아이들 모두의 머리를 감기는 데 같은 물통 몇 개를 계속 돌려가면서 써야 했습니다.”

“우리는 섭씨 38도를 훌쩍 넘는 뙤약볕 아래 서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머리를 감기면서 처음에는 불쾌함이 몰려왔지만, 점점 마음이 기쁨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남자아이는 이가 너무 심하게 퍼져서 두피에 상처까지 생겨 있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 상처를 만지는 것이 꺼려졌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 앞에서 제 마음이 겸손해졌습니다. 이 아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제 몸이 편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희생에 대해서, 또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큰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제 삶 가운데 역사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들을 가르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편지입니다.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사랑이 담긴 마음의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태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생명이 흐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종과 겸손과 사랑과 하나됨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몇 가지 태도를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다섯번째 태도는 '섬기려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섬기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방금 나눈 사랑과 겸손에 대한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태도입니다. 사실상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섬기려는 마음입니다.

어느 날 한 성도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저희는 이제 그레이스 교회에 다니지 않아요. 저희를 필요로 하는 작은 교회로 옮겼어요.” 종종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뭐, 괜찮습니다. 어쩌면 성령님께서 인도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정말로 바랍니다. 소중한 분들이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교회로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옆에 계신 성도님들을 한번 보십시오. 이분들은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까? 사람이 많아진다고 해서 필요가 줄어드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저쪽 교회에는 프로그램은 많은데 운영할 사람이 없어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역이 교회 프로그램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긴 해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고, 반을 맡아서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청소를 하는 것도 아니고, 뭐든지 간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아요. 그냥 가긴 가는데, 교회에 무슨 필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여기저기 온통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4장을 잠깐 보겠습니다. 여러분께 몇 구절을 보여드리고 그 다음에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다시 말해서, 바울을 비롯해서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지?” 하고 평가할 때에, 바울의 묘비명을 새길 때에, 추도사를 낭독할 때에, 바울이 남긴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할 때에, 바울에게 칭찬이 돌아가는 그 순간에, 제발 이렇게 말해달라는 겁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헬라어에는 '종'을 의미하는 단어가 적어도 여섯 개 이상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바울은 가장 낮은 의미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바로 ‘휘페레테스(hyperetēs)’ 입니다. ‘휘포(hyper)’는 '아래'를, ‘에테스(etēs)’는 '노를 젓다'라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래에서 노를 젓는 사람', 곧 '밑바닥 노꾼'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에는 거대한 목조 함선이 있었는데요, 배 밑창에 3단으로 이루어진 노 젓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이런 배를 '트리레메(trireme)'라고 합니다. 이 3층 단에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노를 저었는데, 가장 아래층에 있던 이들이 바로 이 '밑바닥 노꾼', 즉 휘페레테스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 사도 바울을 평가할 시간이 되면, 내 이름을 딴 대성당을 짓지 마라. 미네소타의 어느 도시에 내 이름을 붙이지도 마라. 학교에 내 이름을 붙이지도 말고, 명예 박사학위 같은 것도 주지 마라. 그냥 이렇게만 말해달라. ‘바울은 삼단노선, 3단 갤리선의 노예였고, 마음을 다해 노를 저었다.’” 일꾼, 종이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 인사가 되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묵묵히 노를 젓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2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바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노를 젓겠다고 나서서 다른 사람들의 노를 다 부러뜨리는 노꾼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충성된 노꾼이 필요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자신을 종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으려고 일하는 것이 아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정말 잘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지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칭찬하지만, 여러분의 동기는 타락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비난하지만, 사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인간적인 연약함을 이겨내려 애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혼신을 다해 설교했는데도 스스로 느끼기에 형편없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완전히 핵심을 놓치고, 망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에도 누군가는 저에게 다가와서 “정말 은혜로웠어요, 최고의 설교였어요”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면 웃으면서 손을 잡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지만, 사실 그분은 잘 몰랐던 겁니다. 반대로 정말 설교가 잘 풀리고, 마치 독수리처럼 나는 기분이었던 날엔 누가 와서 “오늘 몸이 좀 안 좋으신가 봐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니요? 오늘만큼 좋았던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면, “아니, 오늘은 좀 어색하고, 버벅대시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평가를 하고, 칭찬을 하고, 비난을 하고, 축복하고,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그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그냥 노만 저을 것이다. 그게 다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실을 잘 모른다.” 저는 3절 하반절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아시겠습니까? “나는 내 판단도 믿기 어렵다. 아무래도 나 자신에게 너무 유리하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 자신도 내 삶의 모든 부분을 다 들여다보지 못한다. 내 기준에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의롭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누구십니까? “주시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주님이 마음의 동기를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울의 마음의 뜻을 보실 때에 일꾼의 마음, 종의 마음을 보시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3단 노선의 노예처럼 노를 젓는 사람, 그저 맡겨진 노를 성실히 젓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알리려 하지도 말고, 스스로를 좋게 평가하려고도 하지 말고, 묵묵히 노만 젓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기고”라고요. 다시 겸손입니다. 결국 다시 겸손으로 돌아옵니다.

이 모든 태도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깊이 엮여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이 중 한 가지 태도만 진지하게 삶에 적용해도, 나머지 모든 태도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사랑 없이 겸손할 수 없고, 겸손 없이 진정한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겸손 없이는 교제 안에서 참된 하나됨도 불가능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진심으로 섬길 수도 없고, 겸손 없이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진리를 여러 각도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중 단 하나만이라도 진심으로 붙들고 집중한다면, 나머지 다른 것들도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섬기려는 마음’이란 도대체 뭔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아주 간단합니다. 교회의 부서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로마서 12장을 잠깐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동기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이제는 기능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로마서 12장 4절을 보면, 다시 한번 몸의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몸입니다. 그리고 이 몸에는 사람의 몸처럼 여러 지체가 있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서로 다른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냥 하거라, 어서 시작하거라. 부서에 들어가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의 능력이 반드시 삶 속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물론 어떤 부서에서 섬길 수도 있습니다. 정말 멋진 방식입니다. 혹은 아주 개인적인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안 되는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시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섬기도록 부름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섬기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흐름이 막히는 병목현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사람도 많고, 내가 어디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시는 분이라면,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반드시 이루고자 하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그 사역은 꼭 필요하고, 반드시 있어야 할 사역입니다.

여기서 잘 보면 '예언'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이어서 '섬김'이 언급됩니다. 굉장히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가르치는 일', 이것도 마찬가지로 넓은 개념입니다.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이 모든 것이 다 아주 넓은 범주의 표현입니다. 결코 좁고 제한적인 특정한 하나의 일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각기 다른 사역의 범주입니다. 예를 들어, '구제'라는 범주 안에도 나누는 방식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르침'과 '설교' 역시 수많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은사들은 특정한 기술 하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광범위한 사역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이것들은 은사의 범주입니다. 여러분과 제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다양한 범주에서 완벽하게 조화된 한 가지 조합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조합은 오직 각 사람에게만 주어진 은사입니다. 범주 안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도 다른 은사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것들을 각각의 범주로 보고, 하나님께서 그 범주 중에서 하나를 고르시고 그 안에 있는 은사들을 조금씩 섞어서 나눠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설교하고, 가르치고, 인도하고, 권면하고, 어쩌면 지식의 은사를 나타내는 일로 부르신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은사, 저 은사를 택하셔서 섞으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는 영적인 눈송이처럼, 어느 누구도 서로 같지 않은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섬기지 않는다면, 단순한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렇게 구경꾼처럼 지켜보기만 하는 태도는 정말 쉽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걸로 만족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예전에 <무디 월간지(Moody Monthly)>에서 우리 교회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다고 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때 우리 교회에는 큰 예배당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곳곳에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다뤄보고 싶어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무디 월간지를 잘 알지도 못했고, 무디 출판사와 책을 쓰기도 한참 전이었습니다.

그렇게 무디 월간지의 로웰 손더스(Lowell Saunders) 기자가 와서 우리 교회에 대해 기사를 썼습니다. 조사를 하고, 현장을 살펴보고,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에 손더스가 붙인 기사 제목이 바로 “900명의 목회자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에 성도가 900명 정도 있었는데 손더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가 섬기고 있더군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부서도 적었지만, 모두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각자의 은사를 따라 섬기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원에 누가 계시면 제가 찾아가도 될까요? 유아실에서 도울 수 있을까요? 저기서 어린아이들을 따라다니느라 분주한 자매들을 좀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의자 좀 옮겨도 될까요? 화장실 청소를 해도 될까요? 창문을 닦아도 될까요? 저는 그냥 돕는 은사를 쓰고 싶을 뿐이에요. 혹시 가르치고 싶어하는 사람을 훈련시켜 줄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까? 배우고 싶습니다. 혹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갈 수 있는 자리도 있을까요? 전도하고 싶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들립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축복해 주고 계십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교회는 원래 이래야 합니다. 교회가 커지면 다들 누군가가 대신 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교회가 커질수록 필요한 손길은 더 많아지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어떤 프로그램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라면 반드시 자기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야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순종하는 삶이 됩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지고 있는 은사를 가지고 그냥 시작하면 됩니다. 분석이 꼭 필요하지 않습니다. 은사가 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설교하고, 가르치는 등의 몇 가지 일을 하지만, 그게 무슨 은사인지 일일이 분류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은 컴퓨터로 여러분의 은사가 뭔지 출력해주는 서비스도 있다지만,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컴퓨터가 어떻게 압니까?

저는 제 자신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사가 어떻게 섞여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사실 제가 못하는 것이 뭔지를 더 잘 압니다. 그런데 제가 제 은사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그냥 사역을 하다가 뒤를 돌아보며 ‘아, 내가 이런 걸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사역의 흐름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능력 가운데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무엇을 하실지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필요는 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샌퍼난도 밸리(San Fernando Valley)에 사는 18세 이상의 성인 중에서 70%가 비혼 상태라고 합니다. 믿어지십니까? 수많은 가정들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방황하는 세대입니다. 이혼 가정, 한부모 가정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필요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수많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 안에도, 우리 주변에도 필요가 가득합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미혼인 분들에게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끔 보면 결혼하지 않은 분들은 인생의 목표가 오직 결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 나은 대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독신의 은사를 주시지 않아서 절제할 수 없으면 결혼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않고 지내라고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미혼인 분들이야말로 가장 큰 영적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얽매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32절부터 36절까지를 보면, 미혼인 사람은 주의 일을 염려하지만,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와 가정,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필요를 돌보느라 마음이 나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잘못됐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미혼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복음을 전해야 할 미혼인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이실 겁니다.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주신 사역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그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십시오.

제가 참 좋아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두 사람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골로새서 4장 12절에 나옵니다. 이름은 에바브라입니다. 에바브라. 잘 들으십시오.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라고 합니다. 참 좋지 않습니까? 에바브라는 누구입니까? 박사 학위가 있습니까? 신학 박사입니까? 의사입니까? 명문대를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입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백성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라를 일컬어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이런 문장을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묘비에 새기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이름을 적고, “우리 중 한 사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새기는 겁니다. 그냥 우리 중 한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아주 고귀한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에바브라의 사역은 무엇이었습니까? 위대한 설교자였습니까? 수려한 웅변가였습니까? 아닙니다. 에바브라의 사역은 이렇습니다.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얼마나 훌륭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에바브라 같은 사람들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 성도 중 한 사람입니다. 그저 “너희 중 한 사람”인데, 언제나 열심히 기도합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에바브라는 모든 이의 영적 성장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믿음의 은사라고 믿습니다. 믿음의 은사는 기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명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고, 그 외에 어떤 은사들이 섞여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온 힘을 다해 자기의 은사를 실천했습니다. 어떤 조직적인 부서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무릎을 꿇는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5절에는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름도 비슷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다시 말해 “너희가 나에게 보내 준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라고 합니다. 동역자였습니다. 여러분,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아십니까? 전투 중에 함께 있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십니까? 단지 곁에 있어 주는 사랑하는 친구, 함께 칼을 들고 싸워 줄 누군가, 많은 이들이 그런 동역자를 필요로 합니다.

“...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라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심히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교회가 들었다는 걸 알고, 그 일로 인해 슬퍼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겁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슬퍼했던 이유는 자신이 아파서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자신이 아픈 걸 알고 슬퍼할까 봐 그게 슬펐던 겁니다. “제가 아프니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손톱이 좀 아프네요”라는 식으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자기 병을 알고 슬퍼할까 봐 슬퍼했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따뜻한 관계의 공동체였는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정말 심하게 아팠습니다. 27절을 보면 병들어 죽을 뻔했다고 말합니다. 병에 걸려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 병에 걸렸을까요?” 30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저는 천국에 가면 이런 사람들이 눈에 띌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더 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오히려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일을 했습니까? 동역자였습니다. 돕는 자였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이것은 자발성의 문제입니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섬기려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늘 뒤로 물러서서 “저 일엔 얽히고 싶지 않아. 나를 받아줄지 모르겠어.” 혹은 “나는 저 사람들이랑 일하는 게 불편해” 이런 식으로 망설이고 있다면, 그렇게 변명만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마십시오. 그냥 섬기면 됩니다. 그냥 섬기십시오.

또 하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여섯번째 영적 태도는 기쁨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열린 야외 집회(tent meetings)에서 켄 푸어(Ken Poor)라는 분이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함께 이 주제를 생각하고 나누면서 참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많이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기쁨은 일종의 외적인 환희입니다. 마음과 영혼과 생각과 몸, 즉 전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반응하여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항상 함께 키워오고자 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엄숙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고 완전히 지혜로우신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것이기에 말씀을 대하는 일에는 엄숙함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삶과 죽음, 인간으로서 겪는 온갖 고통과 불안 속에서 우리가 치러야 하는 치열한 싸움에도 엄숙함이 있습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일들이 참 많지만, 동시에 우리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기쁨은 모든 것이 결국 잘될 것이고 마침내는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영혼의 깊은 확신에서 오는 열정입니다.

저는 이 기쁨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반드시 우리에게 기쁨이 주어집니다. 요한일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고,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저는 기쁨이 섬기려는 마음, 곧 자원하여 헌신하는 자세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은사를 따라 일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자기 자신을 내어줄 때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기 안에만 갇혀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필요만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결국 내면이 뒤틀리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 인생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쁨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말로 신납니다. 그리고 제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저는 기쁨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가끔은 제 기쁨을 빼앗으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존 목사님, 여기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정말 심각한 문제예요.” 그래서 제가 묻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그러면 얘기를 해주는데, 들어보면 정말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겠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봅시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정말 문제가 되는 문제를 가지고 올 때도 있습니다. 큰 문제 말이죠. 그런데 저는 제 마음속에 이런 반응을 의도적으로 길러왔습니다. 그게 뭐냐면, 정말 큰 문제가 생기면 제 첫 반응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정말 흥미롭네요. 오, 대단한 일이에요. 고맙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정말 기대가 됩니다.” 저와 오랫동안 함께 계신 분들은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야, 그 문제를 알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참 멋진 문제네요.”

그러면 사람들은 저를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인가 싶겠죠. 그런데요, 제가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반쯤은 해결된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모르면 그게 진짜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고 있다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기쁩니다. 왜냐하면 저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목장에서 거름 더미를 뒤지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선택입니다. 본인이 선택하는 겁니다. 저는 기쁨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행복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열정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흥분하며 기대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래서 저는 제 영혼에게 말합니다. “기뻐하라, 맥아더, 기뻐하라. 너를 구속하시고 네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라. 언젠가 천국에 가게 될 것을 기뻐하라. 그래, 지금은 문제가 있지만 천국에 가는 날이 올 것이야. 그곳에는 완전한 성도들이 있는 완전한 교회가 있을 것이고, 완전한 목회자도 있을 것이야. 그땐 서로 필요하지 않을 테니 교회도 해산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될 거야.”

여러분, 누구에게도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만약 여러분 안에 주님의 기쁨이 없다면, 여러분이 잘못된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언제든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그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제가 보기에, 문제를 해결했을 때만큼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때는 없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기쁨도 누릴 수 없습니다.

여섯번째(일곱번째) 태도는 평안입니다. 평안, 참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평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평안을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15절은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1절은 “마음을 같이하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3절은 “너희끼리 화목하라”라고 말합니다. 평안입니다.

기쁨이 외적인 활력이라면, 평안은 내적인 만족입니다.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을 보면, 항상 기쁨과 평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기쁨, 그리고 깊고 안정된 평안입니다. 평안입니다. 다시 말해서, 평안이란 “모든 것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내면의 확신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삶에 죄가 있다면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배하며 성령 안에서 행하고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의 평안을 빼앗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평안의 태도, 안식의 태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태도를 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몇 주째 로마서 8장을 가지고 제 마음을 쏟아내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안전한지를 보여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확신이 낳는 열매는 깊고도 강한 안식입니다. 평안. 영혼의 평안입니다.

불안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염려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요. 아무것도.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이 부분에서 시험을 당합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완전한 평안 속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평안은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평안의 태도입니다.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평안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리스도인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바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인간의 본성은 갈등을 향해 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욥이 말했듯이,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면 마찰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인생은 그렇게 불꽃이 튀는 일의 연속입니다. 성격의 차이로, 다양한 이유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이 있다면, 바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안을 조장하지 말고, 그 불안을 가라앉히십시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더라.” 그러면 여기저기서 이런 말들이 돌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이 또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사람이 듣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를 덮치는 큰 파도처럼 일이 커집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그건 조금 과장된 것 같네요.” 그런데 누군가 중간에서 화평하게 하는 역할을 해주기보다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일에 가담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이런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평안하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 나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겠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갈등의 한가운데로 들어갈 기회가 생길 때마다 평화를 이루십시오. 양쪽 당사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화해할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쪽 편에 서서 저쪽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찾고, 저 사람에게서도 좋은 점을 찾아보십시오. 부정적인 부분은 덮고, 그 관계 속에서 올바른 점을 기준 삼아 건강한 관계를 세우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 남편인 분들, 아시죠? 어떤 말은 아내를 단번에 폭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하지 마십시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가정에서도 제가 옳을 때가 있습니다. 제 아내는 제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제가 옳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틀릴 때도 있지만요. 아내는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제가 옳았고, 하나님과 저만 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굳이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화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신념에 관해서는 타협하지 않지만,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제 권리를 고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뜻과 제 방식보다 평화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계속해서 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 이들과는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한다면 삶이 정말 간결해질 겁니다.

또 하나는 감사입니다. 이건 너무나도 분명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 뜻을 덤불 어디 구석에 숨겨 놓은 부활절 토끼처럼 생각하고는 “조금 더 가까워졌어, 조금 더 가까워진거 같아”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듬으면서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425쪽이나 되는 책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두 단어입니다. 그냥 감사하면 됩니다. 그냥 감사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더 좋은 직장이 있었으면, 더 좋은 아내가 있었으면, 더 좋은 남편이 있었으면, 더 나은 가정, 더 나은 상황, 더 좋은 차, 더 나은 이것저것, 이런 문제들만 없었더라면...” 대신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키울 수만 있다면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냥 계속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들이 사라집니다. 더 이상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바로 이렇게 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압살롬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서 바위 밑에 숨어 있었던 때도 그랬습니다. 다윗 이야기이죠. 자기를 지켜줄 사람 하나 없고, 광야에 혼자 남겨져 있습니다. 압살롬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서 다윗을 뒤쫓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바위 아래 숨어 앉아 울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합니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납니까? 여호와여, 언제까지입니까? 주님 왜 저들을 멸하지 않으십니까?” 탄식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마침내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 주님, 주께서 이것을 하셨습니다. 오 주님, 주께서 저것을 하셨습니다. 주는 높으신 분이십니다. 주는 능하신 분이십니다. 주는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이것에 감사합니다. 저것에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면, “오 주여”라고 외칩니다. 다윗은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바위 아래에 있고, 압살롬은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갖게 된 겁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늘 불평하고 투덜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상황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긍정적인 일들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찬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시편 30편 4절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합니다. 시편 106편 1절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고린도후서 9장 15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 선물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7절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다가올 하나님 나라로 인해 감사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실제로 역사하는 것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25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내주하는 죄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사실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은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다니엘 2장 23절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에 감사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6장 17절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회심에 감사했고, 로마서 1장 8절에서는 성도들 안에서 나타난 믿음에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3절에서는 성도들 안에 있는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고에 감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4절에서는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했고, 고린도후서 8장 16절에서는 성도들 안에서 보이는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함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자꾸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불평하면서 다니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감사할 수 없어요,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요.” 아닙니다, 그건 상황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지금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진짜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지옥에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버리십시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원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지 않는다면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삶의 모든 신랄함과 불평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감사, 평안, 기쁨, 기꺼이 섬기려는 마음, 연합, 사랑, 겸손, 그리고 순종입니다. 자,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처음엔 이 말이 이단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여덟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요, 그 중 한 가지만 여러분 삶에서 진짜로 주인처럼 자리잡고 있다면, 나머지 모든 덕목들도 함께 따라올 겁니다.

순종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순종하는 태도를 가지면 모든 것이 정리됩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겸손하고 이기심이 없다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연합을 이룹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섬기게 되고, 그 섬김에서 기쁨이 생기고, 그 섬김과 사랑에서 깊은 평안이 흘러나오고, 깊은 평안과 깊은 기쁨이 있고 삶이 의미 있는 섬김으로 채워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게 되겠습니까? 감사입니다.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온전히 사랑에 지배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모든 것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겸손하게 되고, 연합을 이룹니다. 그렇게 큰 사랑에서 섬김과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분께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기쁨이 넘치고,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마음에 평안이 가득하게 됩니다.

아니면, 하나됨, 연합에서 출발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다른 모든 믿는 사람들과 마음과 뜻을 하나로 엮어가고자 한다면,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사랑과 겸손과 순종이 드러나야 합니다.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8천 개쯤 너희에게 주었다. 아무 데서나 시작해라.”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듯이 “성령의 열매는,” ‘열매들’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는 말씀처럼, 이 열매는 다 함께 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성령께서 주신 참된 사랑이 내 안에 있다. 그런데 내 삶은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전혀 기쁨이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삶은 기쁨과 평안과 온유와 선함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옵니다. 아니면 그냥 기쁨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기쁨을 길러내기로 작정한다면, 그 기쁨에서 감사와 평안과 섬김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어디에서든지 시작하십시오.

자, 이 권면의 말씀은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순종하고, 겸손하고, 사랑하고, 아름답게 연합하고, 섬기려는 마음이 있고, 기뻐하고, 평안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 눈에 명확하게 보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다만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조금이라도 흐려졌을까 염려가 되어 다시 한 번 상기시키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더 풍성하게 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삶으로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편지가 하나 있습니다. 참된 축복이 담긴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실 겁니다. 자, 들어보십시오.

“오늘은 저희 가족이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출석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희는 플로리다 주 포트로더데일(Fort Lauderdale)에 살고 있었는데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뎌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부로 이사와 지낸 한 해는 그리스도인인 저희 가족의 삶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과거에 사람들이 금을 찾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던 골드 러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추구한 것은 썩을 금이 아니라, 그레이스 교회에서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썩지 않을 부요함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귀한 라디오 방송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분명히 자라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레이스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에 저희 자신을 헌신해야 할 때라고 느꼈습니다.”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희 부부는 양떼 사역(the flocks ministry)과 유니언 구조선교회(Union Rescue Mission),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안내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진정한 기쁨입니다. 섬김을 통해 얻는 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또한 그레이스 교회의 성도들과 교역자들이 저희가 주 안에서 자라가도록 도와주셨을 뿐 아니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음식과 의복 같은 필요를 채워주시고 집을 구하도록 도와주신 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여러 시련을 겪는 동안에도 외롭다고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이 저희의 짐을 함께 져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34편은 저희 가족 모두에게 특별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필요 가운데 주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들으셨고, 그레이스 교회의 사랑받는 성도들을 통해 저희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습니다. 저희는 정말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고,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지금 저희는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의 성도들이 재정적으로, 또 영적으로 저희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대해 오직 주님께 찬양을 드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날마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쉬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이런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어떤 교회가 한 가정의 삶을 이처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이 가정은 수많은 사례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사랑, 겸손, 섬김, 기쁨, 평안, 감사와 같은 올바른 마음의 태도를 가진 교회, 바로 그런 교회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자,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기를 기대하며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찬양과 노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말씀 앞에서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계속해서 자라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마음을 선한 것들로 채워 주옵소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자,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자, 기꺼이 섬기는 자, 주신 은사를 어디에서든 사용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순종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서, 진정으로 헌신된 자에게서 나타나는 사랑과 겸손이 저희 삶에서 흘러나오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을 받을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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