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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 동안 함께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는 지금 마태복음 강해를 잠시 멈추고 <교회 해부학>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기초로 다시 돌아가고자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다 보면 피사의 사탑처럼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림줄을 내려서 정확히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짧은 시리즈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세워진 기초를 다시 살펴보고, 처음에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진정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점검하는 겁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의 간절한 열망입니다. 이번주에 <제자도(Discipleship)>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네비게이토(Navigators) 출판사의 편집장님과 인터뷰를 했는데, 제게 교회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설계하신 모습이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이죠. 이 동일한 소망이 우리 장로님들과 교역자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여정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놓친 것들을 다시 되짚고,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금 확고히 하고, 교회의 골격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어떤 모습으로 설계하셨을까요?

제가 몇 년 전에 탈봇 신학교(Talbot Seminary)에서 교회론, 즉 교회와 관련된 교리를 가르쳤을 때, 학생들에게 <건망증에 걸린 하나님의 순례자(God’s Forgetful Pilgrims)>라는 책을 읽게 했습니다. 영국 출신의 마이클 그리피스(Michael Griffiths)가 쓴 흥미로운 책인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집단적으로 이상한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듯하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교회가 무엇을 위한 곳인지 잊어버렸다. 매주 예배당에 모여 익숙한 순서를 따라 예배를 드리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누더기를 입고 재 속에 앉아 있는 신데렐라 같다. 자신이 자라서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저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전역의 교회를 보고 있자면,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신부여야 하지만, 현실은 누더기를 입은 신데렐라와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있어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인 요소들, 반드시 회복해야 할 것들을 다시 꼭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 짧은 시리즈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교회가 반드시 따라야 할 핵심 원칙들을 다시 짚어보는 겁니다.

교회를 잘못된 기준으로 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잘못된 원칙이나 잘못된 잣대로 교회를 평가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진 게츠(Gene Getz)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지적합니다. 자신의 저서 <교회의 척도(The Measure of a Church)>에서 게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숙한 교회는 활동적인 교회’라고 한다. 매주 열리는 모임의 수나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수로 교회의 성숙도를 평가한다. 어떤 이들은 ‘성숙한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와서 정착하면 교회가 성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 사역팀의 규모가 커지면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여긴다. 또 어떤 이들은 ‘성숙한 교회는 베푸는 교회’라고 한다. 사람들이 교회의 운영을 위해 재정적으로 기여하고 다양한 사역을 후원하면 성숙한 교회라고 판단한다. 어떤 이들은 ‘성숙한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라고 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고 회심의 고백과 세례가 꾸준히 이어지면 신약의 교회라고 본다.”

“또 어떤 이들은 ‘성숙한 교회는 선교에 헌신하는 교회’라고 한다. 전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하며 전체 예산의 많은 부분을 세계 복음화를 위해 사용하는 교회를 성숙하다고 평가한다. 어떤 사람은 ‘성숙한 교회는 원활하게 돌아가는 교회’라고 한다. 조직의 모든 장치가 규칙적으로 작동하는 교회이다. 업무 분장이 명확하고 8시간 근무, 쉬는 시간, 출퇴근 시간 확인까지 갖춘 정교한 시스템 안에서 각자가 맡은 일을 정해진 시간에 효율적으로 해낸다.”

“또 어떤 이들은 ‘성숙한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라고 한다. 열정과 역동성, 감정과 흥분이 가득한 교회이다. 모든 성도가 자신의 은사를 알고 사용한다. 또 다른 이들은 ‘성숙한 교회는 대형 교회’라고 한다. 매주 수천 명이 주일학교와 예배에 참석하고, 직원도 많고, 버스 수십 대로 아이들을 실어나르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라디오 및 TV 방송 사역, 기독교 학교, 기독교 대학교, 신학교, 그리고 자체 문서를 인쇄하는 출판 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면 성숙한 교회라고 보는 것이다.” 게츠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이 실제로 성숙한 교회의 성경적인 지표라고 믿는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활동적이고, 성장하고 있고, 베풀고, 전도하고, 선교에 헌신하고,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성령 충만하면서도 큰 교회라면 누구나 이상적인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만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교회 해부학을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몇 주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많은 목회자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어떻게 외적으로 성장했는지 알고 싶어하지만, 저는 내적인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진짜 핵심입니다. 활동이 아니라 태도가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흘러가는 생명의 흐름, 곧 마음가짐과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먼저 골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필수 불가결한 기초, 교회의 형태를 만들어 주는 요소를 다뤘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태도, 성경의 절대적 우선순위, 명확한 교리, 거룩한 삶, 영적 권위입니다. 이것이 골격을 이루는 핵심 개념입니다.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골격을 세운 후에는 교회 안에 특정한 내부 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체 내부에서 혈액과 체액이 흘러서 생명이 유지되듯이, 교회 안에도 내부를 흐르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태도입니다. 저는 교회가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형식이나 의식, 겉치레에만 매달리는 조직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셨던 말씀을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호세아도 같은 진리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사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올바른 태도 없이 외적인 종교 의식만 행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저는 사역의 핵심이 교회의 골격을 세우는 데 있고, 그 다음에는 성도들의 마음 안에 올바른 태도를 세우는 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올바른 태도야말로 교회를 아름다운 신부로 빚어가는 일이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내면의 태도 중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순종, 겸손, 사랑, 연합, 섬김, 기쁨, 평안, 감사를 살펴봤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세 가지를 더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 안에 다 마칠 수는 없겠지만,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꼭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태도는 아홉 번째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매우 본질적인 태도입니다. 바로 ‘절제(self-discipline)’입니다. 절제, 절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절제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절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선과 의에 대해서는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 복잡한 정의는 아니지만, 그 안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절제된 삶이란 하나님의 법을 알고 이해하고, 그 기준을 벗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아니야’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자, 이제부터 설명해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을 펴 주십시오.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 바울은 운동과 매우 밀접하게 살아가는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바로 경주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비유입니다. 24절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경주에 나선 사람은 모두가 달립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상을 받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다시 말해 경주란 모두가 상을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다시 말해, 이 경주에 참여한 목적은 상을 받기 위함이니 이기기 위해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된 우리 역시 이 경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 경주 비유가 사용됩니다. 우리는 지금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뿐만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동일한 비유가 반복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이 경주에서 이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25절이 그 해답을 줍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여기서 말하는 절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훈련, 자기 절제입니다.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를 향한 헌신의 본질입니다. 체중이 10kg이나 더 나가거나 근육이 퇴화된 사람은 이기기는 커녕 경주에 나서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경주에 참여하려면 엄청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운동선수들이 승리를 위해서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쏟아붓는 시간과 노력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1년 후면 우리가 사는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1984년 LA 올림픽이 열립니다. TV를 통해서 운동경기의 경이로움과, 금·은·동메달을 목에 거는 선수들의 엄청난 절제력을 보게 될 겁니다. 세계 대회에서 승리하려면 엄청난 대가를 감수해야 합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씩, 오 년에서 십 년, 혹은 그 이상을 훈련합니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헌신입니다. 통증의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혹시 ‘세컨드 윈드’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선수들은 실제로 이 상태 이상을 경험합니다. 통증을 넘는 그 다음 지점의 상태까지를 압니다. 심지어 어떤 선수들은 통증 너머에 일종의 황홀감이 있다고까지 합니다. 선수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저 역시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황홀함을 조금은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일종의 ‘황홀한(high)’ 상태, 통증을 극복한 후에 오는 믿기 힘든 그 자유로움, 넘치는 에너지, 뭐 어떻게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운동의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나는 지금 경주 중이다." 영적인 경주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이 경주에서 나는 반드시 이기고자 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26절입니다,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다." 이 말은 디모데후서 2장에서 디모데에게 했던 말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운동 경기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훈련에 헌신해야 하고, ‘nominos’, 곧 ‘규칙대로’, ‘법대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정해진 법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경기에서 정해진 한계를 지켜야 합니다. 정해진 코스를 달려야 합니다. 선을 넘으면 안 됩니다. 원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경기장을, 트랙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참여한 종목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지켜야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나는 이기고 싶기 때문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여기서 사용된 '승리를 위해 힘쓴다'는 동사는 자기 절제와 자기 희생, 그리고 강도 높은 노력을 포함하는 동시에 규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27절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곧 자신을 철저히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때려 복종시키고 억누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자신이 어떤 죄로 인해 실격하게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죄를 범함으로써 영적으로 패배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자신의 몸을 망치거나 훈련을 하지 않아서 패배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노력을 쏟아붓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마이애미 돌핀스(Miami Dolphins) 팀을 만나서 성경 공부를 인도했는데, 지금 여러분과 나누는 내용을 먼저 나눴습니다. 돌핀스 선수들은 로스앤젤레스 경기장으로 가서 전투복을 입고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레이더스에게 패했습니다. 전투 태세를 갖추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선수들은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수많은 시간과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서 최고의 운동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자신을 훈련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절정에 이르러 이제 전투복을 입고 전쟁터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합니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선수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썩어 없어지지 않는 면류관을 위한 전쟁, 영광 가운데 영원히 간직된 유업을 위한 영적 전쟁 말입니다. 인생에서 그 어떤 미식축구 경기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전쟁이 있고, 그 전쟁에는 어깨 보호대나 가슴 보호대, 팔 보호대, 헬멧, 엉덩이 보호대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갑옷이 필요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입어야 할 전혀 다른 종류의 갑옷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베소서 6장 11절을 소개했습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저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LA 레이더스를 상대로 츄리닝만 입고 경기에 나가면 안 되는 것처럼, 영혼의 원수를 상대하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12절을 알려줬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는 지금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사실 사람들과의 전쟁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단지 보이지 않는 악한 영적 세계에 있는 귀신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졸병 혹은 장난감일 뿐입니다. 진짜 전쟁은 귀신들과의 전쟁입니다.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평생 잊지 못할 전쟁이 하나 있습니다. 제리 미첼(Jerry Mitchell)과 함께 귀신 들린 소녀를 상대한 일이었죠. 소녀는 소리를 지르고 발길질을 하면서 방 안의 가구들을 집어던졌습니다. 제가 방에 들어갔을 때 소녀는 “저 사람은 안 돼. 저 사람만은 안 돼. 들여보내지 마”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귀신들이 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소녀가 “저 사람만은 안 돼, 저 사람은 안 돼”라고 소리를 칠 때에, 저의 첫 반응은 “알았어, 나갈게”였습니다. 하지만 곧이어서 귀신들이 저를 알고 있고 저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제가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상황에 맞섰습니다. 우리는 그 방에서 몇 시간 동안 정말 고통스러운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소녀가 죄를 자백하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소녀를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이상 이 전쟁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분명히 압니다. 진짜 전쟁이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를 말이죠. 이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매우 심각한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귀신들의 손에 놀아나는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전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예수님께 속한 모든 자들을 향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전쟁에 맞서기 위해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14절에 나오는 두 가지 요소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입니다. 로마 병사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헐렁한 옷(tonic)을 그냥 입고 가는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생사를 가르는 육탄전에 그렇게 입고 나가면 치명상을 입을 겁니다. 옷자락에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허리띠를 착용해서 그 옷자락을 단단히 묶고 정리했습니다. 느슨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단정히 조이고 고정시켰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진리의 허리띠라고 부릅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싸움에 임하는 태도, 절제하는 자세를 말하는 겁니다. 단순히 겉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지금 전쟁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 임하라는 겁니다. 산만한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태도를 정돈하라는 외침입니다. 모든 느슨한 마음을 걷어내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진지하게 전쟁에 임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절제라는 영역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말해야 할 때입니다. “이 길이 좁은 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을 걷겠다.” 하지만 좁은 길을 걷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수많은 유혹의 소리가 우리를 다른 길로 이끕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한순간이라도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만족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길을 벗어난 것입니다. 절제력을 잃어버린 그 순간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건 전쟁이다. 반드시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이 옷자락을 끌어올려 단단히 조이듯이, 승리를 향한 진정한 헌신으로 자신을 정돈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의의 호심경에 대해 말합니다. 로마 병사는 가슴 부위에 호심경을 붙여서 가장 중요한 장기인 심장을 보호했습니다. 만일 호심경이 없다면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나 칼에 치명상을 입게 될 겁니다. 그래서 호심경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이 호심경은 바로 ‘의’입니다.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옳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호심경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공격받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향해 달리는 경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된 삶, 절제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 정결함을 지켜가는 삶이 요구됩니다. 바울은 바로 그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도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전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바울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까?’ 이는 6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특권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그러니 이제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매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이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야 합니다. 규칙을 지키고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힘을 쏟아야 합니다. 저는 훈련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삶에 구멍이 너무 많이 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순종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지만, 그 길에 철저히 헌신하지 못한 채 늘 벗어난 자리에서 머무는 이들을 볼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마지막 장, 4장 8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여러분, 절제는 결국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생각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어디에 고정시키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결한 삶, 훈련된 삶, 절제된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진 생각에서 나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이유는 말씀을 여러분 안에 심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유혹을 마주했을 때 성령님께서 그 심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말씀이 여러분 마음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했듯이 말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져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이 말하듯이 말이죠.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것이 절제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이 절제는 여러분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매우 염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훈련이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준을 바꾸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좁은 길도, 좁은 문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처음 주셨을 때보다 더 너그러워지지 않았습니다. 순종의 기준도 여전히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그 기준을 넓혀 버렸고, 인위적인 관용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유혹, 방향을 틀어버리는 달콤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번 달 초에 제가 오리건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중등부 사역자인 크리스 뮐러(Chris Muller) 목사님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숲속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삼천 명의 남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고, 몇몇 남성들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또 다른 이들은 믿음 안에서 큰 격려를 받고 헌신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복된 사흘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크리스 목사님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중등부에서 사역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기독교 사회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크리스 목사님이 이번 여름 중등부 수련회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아이들 5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중에서 9명만이 청소년관람불가(R-rated)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답니다. 나머지 45명은 본 적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만 따로 조사를 해봤더니, 35명 중에서 25명이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본 적이 있었고, 26명은 어느 정도 수준에서든 음란물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24명은 기독교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아이들의 가정에서 케이블 TV를 통해 온갖 음란한 콘텐츠가 무분별하게 흘러나오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참담한 일입니다.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중학생 아이에게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보여주면 아이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아이들은 아직 그런 내용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중학생의 사고로는 그런 장면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스크린에서 5미터나 되는 나체를 보고 그 장면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도 내 아이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중학생 자녀에게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보도록 허락한다면, 그 아이가 죄에 빠지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밀어 넣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케이블 TV에서 더러운 것들을 마음껏 보게 둔다면, 나중에 그 아이가 하나님께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때 가서 “우리는 아이를 늘 교회에 데리고 갔었는데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간다면, 죄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건 그냥 예술 작품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예술이 아닙니다. 그건 쓰레기입니다. 그냥 쓰레기일 뿐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 영화는 사회를 비평하는 거예요. 우리 문화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작자들이 그런 식으로 홍보하기 때문이라는 것 아십니까? 그런 영화를 예술이나 사회비평처럼 보이게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이들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기독교인의 삶에는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 나오는 욕설조차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에 나오는 노출과 음란함이 자리 잡을 곳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그런 영화를 보러 가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세상의 체계에 완전히 현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화면에 나오는 충격적인 장면에 노출된 피해자일뿐 아니라, 여러분을 극장까지 끌어들인 광고 전략에 넘어간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이유는,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강한 부담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거대한 영상을 보면서 끊임없이 음란한 장면을 눈에 담는다면 어떻게 경건한 사고가 함양될 수 있겠습니까? 음란한 잡지, 썩어빠진 내용들에 마음을 열어주는 삶을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 여러분이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절대 아이 혼자 안 보내요. 제가 같이 가죠." 아이고 맙소사, 아닙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저는 우리 애가 뭘 하는지 잘 몰라요." 이게 제일 나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아이들의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청지기적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아이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온갖 쓰레기로 채워지는 걸 방치한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그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중학생 아이들 54명 중에 45명이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봤다고요? 충격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제가 우리 아이가 뭘 하는지 어떻게 다 알고 막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그런 영화를 보러 가면 안 됩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영화라도, 그 안에 욕설이 들어 있으면 안 됩니다. 결국 기준을 조금씩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화들은 우리의 기준을 공격하고 또 공격하고 계속해서 공격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공격하고 공격해서 결국에는 우리가 가진 정결함에 대한 단호한 헌신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우리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저는 이런 것들에 제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붙들고 싶지, 세상의 관점을 붙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격리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합니다. 하지만 저는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습니다. 부모지도관람(PG movie)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냥 <꼬마 보핍 이야기(Little Bo Peep)> 같은 그런 게 아니면, 영화 자체를 안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마음을 세상의 쓰레기에 노출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합니까? 어린아이들이 그런 것들에 노출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 것들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인생의 여러 혼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에 대한 생각과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는 그 시기에 그런 자극들을 경험하는 건 절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건 어떤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저 추하고 더러운 죄 말입니다. 세상이 어린아이들의 눈앞에 추잡한 것들을 들이밀면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유혹에 휘둘려서 인생의 방향을 잃은 채 그저 피해자로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리 와, 이리 와. 우리가 널 행복하게 해줄게. 쾌락을 줄게." 그렇게 유혹하는 세상의 소리에 이끌릴 때가 아닙니다. 그럴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그런 것들에 참여하고 있다면, 교회에 아무리 자주 나온다 해도,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은 순종이라는 절제된 길에서 스스로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마음속에서 제가 드리는 이 말을 거부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여러분이 지금 영적 전쟁 중이라는 뜻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지셨습니다. 어느 정도 나쁜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나쁘지 않은 것’을 생각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생각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아침에 나누고 싶은 두번째 태도로 넘어가겠습니다. ‘책임의식’입니다. ‘책임의식.’ 이 태도 역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서로에 대한 책임의식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카펫 색깔이나 벽지 무늬, 프로그램 운영 방식이나 취향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관심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책임의식의 의미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두 절을 보겠습니다. 3절과 4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여기서 '티'란 아주 작은 조각, 이를테면 이쑤시개 같은 겁니다. 다른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신경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티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죄, 실패, 잘못을 가리킵니다. 물론 신경써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그 티는 그렇게 신경 쓰면서, 정작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들보에는 관심이 없냐고 말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과장법입니다. 만일 만화였다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과장된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 자신의 삶이 바로 서 있지 않은데 어떻게 형제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

이 말씀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눈에 있는 티, 그러니까 문제를 돌아보고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서로의 죄를 다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자기 자신의 죄를 먼저 다뤄야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의 이 책임의식, 즉 서로에 대한 책임의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질 수 있으려면 먼저 제 자신의 삶을 정돈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책임의식은 거꾸로 저에게 영향을 줍니다. 제가 누군가를 돌아볼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저는 반드시 제 자신부터 바르게 서야 한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조금 더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는 성도들을 알고 계실 겁니다. 한동안 나오다가 지금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형제님은 지금 성도의 모임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돈 버는 데만 매달리는 삶, 이 땅에 재물을 쌓는 저주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데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제 삶에도 문제가 많은데,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바로 그게 핵심입니다. 먼저 자신의 삶을 정결하게 하고,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빼십시오. 그 다음에 그런 말을 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다른 형제에 대한 책임은 먼저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돌아보려 할수록, 필연적으로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문제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이게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순종하고 있는 사람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향한 책임의식은 스스로를 정결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이 없는 교회, 넘어지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책임을 지지 않는 교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죄도 쉽게 숨기게 됩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누구도 들추지 않기 때문에 죄가 더 깊이 숨겨지는 겁니다. 따라서 책임의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다할 때, 나 자신에게도 책임을 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로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제 마태복음 18장으로 가서 이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겠습니다. 내가 내 눈 속의 들보, 다시 말해 2미터짜리 들보를 먼저 처리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나는 어떤 태도로 반응해야 할까요? 마태복음 18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몇 달 전에 함께 살펴본 적이 있는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이것이 바로 교회가 지녀야 할 책임의 방식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정직하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면, 직원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면, 동업자에게 불의하게 굴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형제님, 형제님은 지금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 말을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저도 문제가 많은데요." 그렇다면 먼저 여러분의 문제부터 해결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의 기도는 단 몇 초면 됩니다. 깨끗한 마음과 사랑의 태도로 그 사람에게 가서 죄의 문제를 직면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 관계에서 진실하지 못하거나, 부모가 자녀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거나, 자녀가 부모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교회에서 누군가가 분명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서 말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책임의식이 여러분 자신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이 책임은 먼저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누군가의 삶에 간섭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삶이 바로 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런 태도를 갖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각자가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내 삶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가?”라고 점검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책임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정면으로 대면하고 책망합니다. 11절부터 14절을 보면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지적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일이고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공개적인 책망입니다.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장로나 지도자와 같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번주에 저도 그런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제가 해야 했으나 하지 않았던 일,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께 다시 편지를 써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신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지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말해주시지 않으면 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겁니다. 똑같은 함정에 계속 빠지게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이런 수준의 책임의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정결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아내도 남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서로의 죄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 반드시 서로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에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마태복음 18장 16절은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교회 전체에 알려야 합니다. 교회 전체가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지난번 성찬식 때에, 우리가 죄에 빠진 성도 세 명을 교회 전체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과연 얼마나 많은 성도님들이 직접 찾아가거나, 편지를 쓰거나, 카드를 쓰거나, 교회 사무실에 연락해서 주소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고 죄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왔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행동들이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 책임이 교회를 정결하게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처음 그레이스 교회에 와서 이런 원칙에 헌신하기로 결단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몇몇 목사님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맥아더 목사님, 교회를 망치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여기가 제 첫 목회지였거든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교회에 가서 사람들마다 서로의 죄를 살피게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망가집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할 겁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건 저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예수님과 경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제 일이 아닙니다. 제 일은 단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대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초창기 시절에 있었던 좋은 예가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남편이 집을 나가서 다른 여자와 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 여자 이름 아십니까?” “네, 알아요. 지금 거기에 가 있거든요. 남편이 저랑 아이들을 버리고 갔어요.” 저는 그 이름을 듣고 전화번호부에서 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형제님이 전화를 받더군요. 제가 말했습니다. “존 목사입니다.” 깜짝 놀라더군요. 정말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종을 요구하려고 전화를 했다,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라, 그곳에 있으면 하나님께, 아내에게, 교회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님이 저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는 남편이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그 형제님이 저를 보더니 저를 꼭 껴안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거기 있고 싶지 않았어요. 유혹을 받았을 뿐이에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셨습니까? 죄를 살피도록 한 그 일은 그 형제님을 멀어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붙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겁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짓는 일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원하지 않는 일이죠.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것이 바로 육신입니다. 그러니까 책임을 나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침해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죄와 싸우는 싸움을 함께 싸워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 내 눈 속의 들보를 제거하기 위해, 그래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서로를 사랑 안에서 회복시킬 수 있고, 선한 일을 하도록 서로를 격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의 ‘서로 하라’는 말씀으로 귀결됩니다. 여러분은 서로를 권면하고, 책망하고, 교훈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고, 가르치고, 세우고, 훈계하고 계십니까? 이런 ‘서로 하라’는 말씀이 성경 전체에 가득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력입니다. 이 태도가 교회 안에서 흘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책임의식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 모두 그렇습니다. 누구나 실패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특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에게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음속에 암을 품고 있는 것이고, 그 암이 결국 그리스도의 몸 전체로 퍼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을 잠깐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모든 죄는 하나님께 빚진 것이고, 그 빚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으로만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 그대로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다시 말해, 여러분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구원과 관련된 영원한 용서가 아닙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의, 현재적인, 일상적인 용서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속의 용서를 받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맑고 정결하고 복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어떤 상처를 줬든지 간에, 여러분 안에 영적인 암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많은 비극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저는 몸이 마음의 병을 따라간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영혼 때문에 실제로 암으로 죽은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의학적인 진단이 아니라, 마음이 병들면 몸도 병든다는 단순한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죄책감이 가장 심각한 병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깊고 쓰라린 분노를 만들고, 결국 죄책감까지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맑고 정결하고 달콤한 교제를 매일 누리고 싶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용서받기 위해서 말이죠. 여러분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까? 누구이기에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만 달란트, (그러니까 수조 원에) 달하는 빚을 졌는데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나아가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 전부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가서 자기를 향해 고작 백 데나리온, (몇백만원 정도 되는) 빚을 진 사람을 붙잡고 목을 조르면서 감옥에 가두고 다 갚을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네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을 다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고작 백 데나리온, 몇백만원 때문에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에베소서 4장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러분,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큰 용서를 베풀어주셨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교회는 용서하는 사람들로 가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수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도 여러분을 불편하게 할 만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용서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여러분은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상처와 쓴뿌리의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품으면, 여러분 안에 쓰디쓴 쓴뿌리가 자라납니다. 누가 그런 걸 원하겠습니까? 용서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저는 제 삶에 절제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향한 책임의식도 필요합니다. 누군가 죄를 범했을 때 저는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저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해주고 싶습니다. 저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말입니다. 만일 용서가 없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반드시 큰 문제를 겪게 됩니다. 정말 큰 문제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겸손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짓을 해?”라고 말하는 교만한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당신은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용서하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더 나누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교회 안에 있어야 할 태도에 대해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순종, 겸손, 사랑, 연합, 섬김, 기쁨, 평안, 감사, 자기 절제, 책임의식, 용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 교회가 이런 태도들로 가득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성도들입니다. 이 모든 태도를 성도들 안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 이 교제 안에서 우리가 누려온 용서로 인해 감사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 책임의식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절제된 삶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본이 되고 모범이 되는 삶의 모습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가 이 모든 태도들을 계속해서 잊지 않고 충실히 살아내야 함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옵소서. 혹시라도 이 모든 일을 마치 관객처럼, 표를 사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일처럼 여겨왔던 이들이 있다면, 이제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바른 태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거룩한 목적을 온전히 이루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교회의 가장자리에서 머무는 자가 아니라, 중심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를 함께 세우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옵소서.

이제 마무리하기 전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계실 때 이렇게 권면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하는 기도를 드리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절제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맹세합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정결한 것을 생각하겠습니다. 좁은 길을 걷겠습니다. 그리고 절제되고 정결한 삶 위에 책임있는 삶을 세우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저도 섬김을 받겠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약속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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