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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존귀하신 어린 양의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장 놀랍게, 또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여러분을 요한계시록 1장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 위대한 계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첫번째 환상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부터 읽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은 놀라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이 본 분은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일곱 촛대는 11절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의미합니다. 20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은 그 교회의 일곱 사자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십니다. 아시아에 있었던 이 일곱 교회는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각각 편지를 받게 되는데, 단순히 당시의 일곱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존재해온 모든 유형의 교회를 대표합니다. 즉, 여기서 우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를 돌보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교회들 가운데 거닐고 계십니다.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돌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계시고, 교회 안에서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요한이 본 이 환상은 단지 그 시대와 그 장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시작된 이래 모든 시대를 위한 환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살아 계시고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십니다. 이 모습은 선지자의 복장일 수도 있고, 제사장의 복장일 수도 있고, 왕의 복장일 수도 있습니다. 선지자이자 제사장이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걸맞은 복장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스리시는 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선지자로, 백성을 하나님께 인도하시는 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14절을 보면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순전한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완전하신 왕이시며 제사장이시고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교회 안을 거니실 때에, 14절에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시선이 교회를 깊이 꿰뚫는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지 않으시고, 그 이면에 있는 진실한 모습을 살피십니다. 교회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꿰뚫어 보시는 눈으로 교회를 살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일하십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판단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살아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 꿰뚫어보시는 눈으로 교회를 살피십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이 발은 심판의 발입니다. 이 음성은 심판의 음성입니다. 교회 안에서 잘못을 발견하시면 심판으로 임하십니다. 그 교회를 향해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어드린 이유는, 오늘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보시는 등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듬으시는 빛입니다. 꿰뚫어보시는 눈으로 우리를 살피십니다. 우리 안에 온전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셔서 그 위에 우레 같은 음성으로 징계하시는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정결하게 하심을 거부한다면, 교회에 주시려는 복을 거두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성경에서 칭찬과 책망이 가장 극명하게 교차되는 본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칭찬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교회들 안에서 기대하셨던 것을 찾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레이스 교회는 지금 요한계시록 1장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거니십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신다고 믿습니다. 기뻐하시는 것을 발견하시면 복 주시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시면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대신해 서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꿰뚫어보시는 눈이 보고 싶어하시는 것을, 때로는 보고 때로는 보지 못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자리입니다. 물론 제가 하나님의 특별한 예언자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영께서 지금 이 시기에 우리 교회를 이끌고 계시다고 믿고 있고, 바로 그 성령께서 이 시리즈를 시작하도록 마음을 주셨다고 믿을 뿐입니다. 한 5주 전쯤에 <교회 해부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저는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는 겁니다. 그저 개요 하나만 적어두고, 그 개요에 기대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성령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살피실 때 우리도 주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보시는 그것을 우리도 보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반응이 너무도 놀라웠기에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이 모든 내용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의 반응으로 제가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하면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은 것 같습니다. 정말 내용도 다양합니다. 어제만 해도 다섯 통쯤 받았는데요, 그중에서 참 인상적인 편지가 두 통 있었습니다. 한 분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여기가 흑인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가 벌떡 일어나서 “목사님 계속 말씀하세요, 목사님! 아멘!” 이렇게 외칠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 긍정적으로 반응해 주셨습니다. 저도 흑인 교회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막 일어나서 "나팔을 부십시오 목사님!" 이렇게 외칩니다. 그렇게 반응하면 설교하는 사람의 심장이 뜨거워집니다. 반면에 또 다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부끄럽습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정말 너무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워 어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편지 말미에는 ‘회개한 자 드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할 모습과 자신이 너무도 멀리 있다는 현실을 정직하게 고백한 편지였습니다. 여러분이 '아멘!'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든, 잠잠히 부끄러움을 느끼든, 어떠한 상태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제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다시 <교회 해부학>에 대한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를 더 깊이 꿰뚫어보시고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 할 것들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가장 먼저 교회의 골격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를 몸에 비유한다면, 반드시 골격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골격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 즉 하나님을 높이는 관점, 성경의 절대적 우선순위, 교리의 명확성, 거룩한 삶, 그리고 영적 권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교회 안에서 생명이 흐르는 내부 체계, 즉 생명의 원리들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생리적인 체계가 순환해야 하듯이, 교회도 특정한 영적 태도들이 끊임없이 흘러야만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태도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습니다. 먼저 순종에 대해 나눴습니다. 가장 중요한 태도였죠. 그리고 겸손, 사랑, 연합, 섬김, 기쁨, 평안, 감사, 절제, 책임의식,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용서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길러야 할 태도입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께서 교회를 살피실 때 바로 이런 태도를 찾으신다고 믿습니다. 사랑의 태도, 평안의 태도, 절제의 태도, 순종의 태도, 섬김의 태도, 기쁨의 태도, 감사의 태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평안의 태도, 이런 모든 태도입니다. 주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열한 가지 태도를 말씀드렸고, 오늘 아침에는 나머지 다섯 가지를 함께 살펴보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속도를 조금 내겠습니다. 열두 번째는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표현으로 바꾸자면, 자기가 스스로 충분하지 않다는 자각, 다시 말해 자기 안에 있는 무능함을 인식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유능한 사람들은 이 태도를 갖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건강한 교회들, 그러니까 우리 교회 같은 곳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레이스 교회는 어느 정도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체계가 잘 돌아갑니다. 일이 잘 진행됩니다. 유능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성도들도 있고, 창의적인 성도들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사역의 궤적만 봐도 “우린 잘하고 있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충분하다’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하나님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목회자들의 실력, 성도들의 능력, 잘 짜인 프로그램에 기대어 그야말로 하나님께 작별을 고하고는 자신의 힘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물론 이런 일은 철의 장막 뒤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에서 아무 자원도 없이 살아가는, 박해받는 지역의 교회에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 복을 너무 많이 받은 사람들은 과거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이미 준비된 땅에 들어가서 일하지도 않았는데 기업을 받아 누리고, 파지도 않은 우물물을 마시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의 활동력과 아이디어와 비전과 계획을 갖고 그냥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핵심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완전히 확신할 수 없는 일은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 의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 주제는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어드린 시편 1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구하지 않은 채, 그저 앞만 보고 내달리기 쉽습니다. 회의하면서 이것저것 결정은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기도하셨습니까? 인내하셨습니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마음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습니까? 제가 사역하는 동안에 지속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과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예수님과 경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고의로’ 죄를 짓기 쉽습니다. 뭔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르면 그대로 밀고 나가 버립니다.

제 신학교 시절, 그러니까 탈봇 신학교(Talbot Seminary)에 다닐 때가 기억납니다. 그 당시엔 모든 학생이 1년에 두 번씩 채플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학생 수가 많아져서 아마 모두가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모든 학생이 다 했습니다. 설교자의 뒤편 단상에 교수진 전원이 앉아 있었습니다. A4용지 두 배 길이의 평가지를 들고는 설교하는 내내 평가 내용을 적었습니다. 교수님들에게도 유익한 훈련이었을 겁니다. 설교가 아무리 지루해도 잠들지 않아야 했으니까요. 설교를 하다 보면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데요, 시작한 지 10분 만에 벌써 종이를 뒤집고 있다면 그건 정말 큰일난 겁니다. 지적사항이 많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래도 다들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사무엘하 7장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본문입니다. 그 설교만큼은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기 때문에, 쉼표 하나까지 제가 다 외웠습니다. 호흡까지도 계산해두었을 정도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건 옳지 않다. 내가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짓겠다.’ 매우 칭찬할 만한 결심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말을 했고 나단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지만 하나님께서 큰 갈고리를 꺼내서 나단을 끌어당기듯이 말씀하십니다. "나단아, 누구에게 물어보고 그렇게 말했느냐? 다윗은 내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결국에 하나님의 성전은 솔로몬이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거두실 때는 반드시 다른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뜻을 섣부르게 단정짓는 죄,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지도 않는 좋은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나아가는 죄에 관해서 설교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삶을 바꿔놓는 경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설교가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덤으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 학장이셨던 파인버그 교수님(Dr. Feinberg)이 저에게 평가지를 건네주셨습니다. 종이가 접혀 있었는데요, 저는 그 설교에 대해 나름대로 스스로 큰 감동을 받았고 은혜를 누렸기 때문에 꽤 뿌듯한 마음으로 평가지를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항목을 하나도 체크하지 않으시고 그냥 앞면에 이렇게만 쓰셨습니다. “본문의 핵심을 완전히 놓쳤군요.” 아, 정말 참담했습니다. 정말 힘들었지만 동시에 아주 좋은 교훈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제가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대해 설교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그 본문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대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섣부르게 단정짓는 태도’에 대해 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으로 설교하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늘 새로운 방식으로 무언가를 빠르게 추진하고, 멋진 생각이나 구상이 떠오르면 서둘러서 실행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지하는 태도, 제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불충분함이 저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 없이 무언가를 시작해 본 적이 있다면 아실 겁니다. 가지 끝까지 혼자 갔다가 그 가지가 몇번 잘려나가는 경험을 하면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듭니다. 제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기도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을 지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 피날레를 장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고 다양한 사역과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마치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제 요한복음 14장을 잠깐 보면서, ‘의지’라는 개념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떠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락방 강화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제자들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해 왔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을 주셨고, 세금을 낼 수 있도록 고기를 잡게 하셨고, 하나님에 대해, 사람에 대해, 죄와 의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니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뼛속 깊이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함께 계실 때도 자주 흔들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떠나겠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혼란과 불안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예수님은 정말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부터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보다 더 놀라운 약속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럼 제가 원하는 건 뭐든지 구하면 주신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에 한해서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끝나면 무조건 들어주신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존재와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과 뜻과 소망과 계획과 목적에 합당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구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덧붙인다고 해서 응답이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뜻과 목적에 맞게 구할 때 이루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는 자로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이라면 행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뜻이라면 이루어 주십시오.” 그러면 만일 일이 잘 되지 않더라도, 응답이 오지 않더라도,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에 따라 역사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뜻을 따라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되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사역이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사역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의 지혜로 하는 사역이 아니라, 창의적인 사람들의 힘으로 꾸며내는 사역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역,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하나님 자신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사역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지금은 제가 다소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사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이렇게 고백하는 태도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가장 잘할 수 있을지 저는 모릅니다.’ 이런 자각이 우리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이끕니다. 그래서 기도 가운데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너무나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 가르쳐주신 ‘제자들의 기도’,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거룩히 여김을 받고, 구별되며, 유일하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결국 우리가 정말 원하는 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구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주세요, 하나님, 주세요, 주세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런 관점이 바로잡히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는 부족하다는 그런 고백입니다. 그레이스 교회에서도 늘 우리가 추구해온 바이죠.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걱정이 됩니다. 프로그램 중심이 되어버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능숙해지고, 계획대로 모든 것을 추진하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기도가 재난이 닥쳤을 때에만 등장하는 후속 조치로 변질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주님, 이 상황에서 건져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거죠. 그런데 처음부터 기도했다면 애초에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주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저는 우리가 반드시 의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와 성도님 안에 그 태도가 있습니다. 저는 이 의지하는 태도가 더 깊어지고 더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왔습니다. 기도에 의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더 많이 의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현대 기독교의 풍조 속에서 일만 너무 많이 하고 기도는 너무 적게 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기도로 시작할 때 느끼는 그 깊은 자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님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다는 확신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사실 이런 일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실지 저도 몰랐습니다. 지금도 설교할 때까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행하고 계심을 계속해서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우리 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행하시길 원하시는지 구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 방향으로 인도하셨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일들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힘으로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죠?

자, 이제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또 하나의 태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연성입니다. 유연성입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겠지만,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유연성이란 변화할 수 있는 자세를 말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남길 마지막 말은 이것이라고요. "우린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습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하신 말씀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기억하시죠? 예수님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찾아와서 따졌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손을 씻는 것은 위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의식 절차를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이런 경험 해보셨을 겁니다. 교회가 오랜 전통에 얽매이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가로막는 벽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우리 교회에서는 그건 안 됩니다. 전통이 있거든요.” 이런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어떤 교회들은 완전히 비성경적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비성경적인 사역 방식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백히 명령하신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그 전통이라는 단단한 벽에 부딪혀 버립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반드시 유연한 태도가 흘러야 합니다. 그레이스 교회에 오랫동안 계신 성도님들은 우리 교회가 얼마나 유연한지를 아실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떤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레이스 교회 조직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조직도를 좀 보내주실 수 있나요?” 제가 이런 요청을 자주 받습니다. 사실 거의 농담처럼 들립니다. 조직도를 보내려면 16mm 영화 필름으로 보내야 할 겁니다. 계속 움직이고 바뀌니까요. 정지된 사진으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하고, 헌신이 깊어지기도 하고, 또 약해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역에 사람들이 몰리면 거기에 대응해서 움직여야 하고, 그 결과 계속 변화가 일어나는 유기적인 구조가 됩니다. 저는 이게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단순한 행정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앉아서 서류나 처리하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항상 사람을 만나고, 사역을 살피고, 어떤 부분은 끌어올리고, 또 어떤 부분은 바꿔가야 합니다. 저는 이게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늘 분별해야 합니다. 습관과 현실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예전부터 해오던 방식이라고 해서 진짜를 대신하는 가짜를 붙들어선 안 됩니다.

제 아내에게 연세가 많으신 고모님이 한 분 계셨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실제로는 고모도 아니고 아주 먼 친척 정도입니다. 아무튼 저희는 매년 연말이면 고모님을 찾아뵙곤 했습니다. 쿠키 같은 걸 조금 가져다 드리면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찾아뵌 건 크리스마스 시즌이었습니다. 그때 고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존, 자네 교회는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가 있나?” 고모님은 감리교회에 다니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니요,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는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없다고?” 하고 되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네, 없습니다. 대신에 모두가 각자의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크리스마스의 의미와 주님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따로 없어요.” 이렇게 설명을 드렸죠. 그랬더니 고모님이 “아, 안됐네” 하시면서 많이 아쉬워하시더라고요. “우리 교회는 항상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가 있었거든.” 그래서 제가 “정말요?” 하고 물었더니, “그럼, 늘 있었지.” 그래서 제가 “예배에 참석하세요?” 하고 여쭤봤더니, “아니, 아무도 안 나와.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 예배는 항상 있었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무도 안 간다고요?” 제가 되묻자 이런 말로 대화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아무튼, 자네 교회에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가 없다니 참 안됐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습관의 동물입니다. 좋은 습관을 가지면 그건 참 좋은 일이죠. 하지만 나쁜 습관은 고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런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 어떤 방식이라는 것에 익숙해지고 묶여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하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저항이 큽니다. 그러나 때로는 반드시 바꿔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너무 쉽게 ‘습관’과 ‘현실’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흐름, 어느 정도의 변화, 어느 정도의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앞서 이야기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곧 유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일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는 젊은 목회자가 어떤 교회에 부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통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거 바꾸려고 하면 큰일 날 텐데요. 저쪽 사람들이 아주 화를 낼 거예요.” 이런 말들에 막혀서 말이죠.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왜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명령을 가로막게 놔두고 있는 겁니까?

우리 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수년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 "어? 이거 성경에 있네. 우리가 바꿔야겠다. 이건 고쳐야겠다.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성경 말씀에 맞춰야 한다" 이렇게 여러분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레이스 교회는 항상 그런 태도를 취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끔 젊은 사역자들을 파송해보면 6개월쯤 지나서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전통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계속 무너지고 있습니다. 과연 변하긴 할까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교회에는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항상 사도행전 16장을 떠올립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앞만 보고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쉬지를 않았습니다. 늘 움직였습니다.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에서 사역을 마친 후에, 지금의 터키 지역이죠, 이제 남쪽 아시아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주 중요하고 전략적인 지역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6장 6절부터 10절을 보면 성령님이 바울의 길을 막으십니다. 어떻게 막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명한 장애물을 두셨습니다. "아니야, 바울, 거기 아니야."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음, 내가 사역하는 걸 원치 않으시나 보다. 아시아로 가는 길이 막혔네" 그러면서 주저앉았을까요? 아닙니다. "좋다, 남쪽은 안 되겠구나. 이미 동쪽은 다녀왔으니, 북쪽으로 가보자. 비두니아로 가자"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또 막으십니다. "안 돼." 이제 동쪽도, 남쪽도, 북쪽도 다 막혔습니다. 남은 길은 서쪽입니다. 바울은 서쪽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마도 어디로 가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잠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밤에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말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바울은 순종했습니다. 복음은 더 이상 중동의 일부가 아닌 전 세계로 뻗어가게 되었습니다. 유연성입니다. 유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마티 울프 장로님이 계십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에 관한 책을 쓸 때에 언급했던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마티 장로님은 유대인 출신으로 유대인을 향한 복음 전파의 부담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에서 유대인을 전도하고 싶어하셨습니다. 큰 목표였죠. 그래서 프랑스에서 사역하는 바이블 크리스천 유니언 선교회(Bible Christian Union Mission)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대가 컸습니다. 훈련도 마쳤고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희 아버지 교회의 성도님이셨는데, 교회에 '마티 울프, 프랑스'라고 이렇게 적힌 명패도 걸었습니다. 마침내 떠나시는 날이 되었는데, 캐나다로 가셨습니다. 프랑스가 아니라 캐나다로 가셨습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몬트리올에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장소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연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는 늘 이런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이런 유연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그 뜻에 맞춰 기꺼이 방향을 바꾸는 유연한 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자세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변화나 이동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맞춰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유연성을 품어주시길 바랍니다. 정말 중요한 태도입니다.

또 하나의 태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장입니다. 성장하려는 태도입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흐르는 '자라고 싶다'는 갈망, 성장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정말 탁월한 비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젖은 고기와 대조되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그건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다른 비유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이렇습니다. "아기가 젖을 사모하듯 너희도 말씀을 사모하라. 그래야 자란다." 그렇다면 아기가 젖을 얼마나 갈망합니까? 혹시 요즘 아기하고 같이 지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기들은 젖을 달라고 찡찡대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칩니다. 젖병이 입에 들어올 때까지 그야말로 몸부림을 칩니다. 사실 아기들이 관심 있는 건 딱 두 가지입니다. 젖 먹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처리하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단 하나의 목표에 온통 몰두한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갈망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들어도 그저 그런가요? 오늘 예배가 지루하다고 느껴지십니까? 혹시 시계를 보면서 ‘이제 좀 끝나야 하는데, 5일 만에 해가 떴는데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정말로 말씀을 향한 갈망이 있으십니까? 성경을 읽는 일이 어떤 의무감에서 억지로 하는 고역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마음을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말씀에 끌리는 무언가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자라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성장 역량이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 역량만큼은 반드시 자라나야 합니다. 그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한 귀한 사역이 있습니다. 제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주 좋은 친구들입니다. 지금 이 앞줄 두번째에 로드니가 앉아 있는 것 같은데요, 로드니는 제 친한 친구입니다, 그렇죠? 맞습니다. 저는 로드니가 침례받았던 때를 기억합니다. 로드니, 기억해요? 꽤 오래 전 일입니다. 그때 로드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침례받고 싶어요. 왜냐하면 존 목사님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다 침례해 주시잖아요. 저도 예수님을 제 마음에 모셨어요. 그래서 침례받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그렉 바쇼에게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침례식이 있었던 날 저는 이쪽 옆에서 준비를 했고, 제가 로드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곧 앞에 나가서 간증을 하게 될 텐데,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어요.” 아마 로드니는 이걸 기억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죠?”라고 제가 물었더니, 로드니는 코를 찡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걸 아직도 몰라요 목사님?”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질문이죠. 당연히 알죠. 제가 목사인데요.” 로드니는 침례를 받은 후에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간증했습니다. 그 이후에 로드니에게 새 성경을 선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에 쓰던 성경이 너무 낡아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로드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숫자가 큰 성경을 갖고 싶어요. 그러면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절도 잘 보이고, 읽을 때도 몇 절인지가 잘 보이니까요.” 성도들이 그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로드니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로드니가 예배 후에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여기 좀 앉으세요. 잠깐만 앉으세요.” 그래서 제가 요기 저 앞에 계단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로드니가 말했습니다. “깜짝 선물이 있어요, 목사님.” 그리고는 시편 23편을 외워 저한테 들려주었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가 자랄 수 있는 속도만큼 자라게 하십니다. 저를 가장 두렵게 하는 일이 있다면, 교회가 성장을 멈추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제 됐어. 신학도 충분히 알고 있고, 강해 설교도 더는 필요 없어. 너무 많이 들어서 알고 싶지도 않아. 테이프가 집에 쌓여 있고, 차 트렁크에도 있고, 차고에도 있고, 줄 사람도 없어. 다들 이미 다 갖고 있으니까. 더는 듣지 않아도 돼. 이제 그냥 조용히 정리하고 빠질 거야”라고 말해버리는 상황이 생긴다면 저는 정말 두려울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계속해서 성장하려고 갈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가 그 갈망을 절대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우리는 단지 책 속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단지 어떤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태어날 때는 어린아이로서 아버지를 압니다. 말하자면 “아빠, 까꿍” 정도의 아주 단순한 관계입니다. 그러다 점점 자라 영적인 청년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거하고, 강해지고, 악한 자를 이깁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하나님을 알고, 그 다음엔 교리를 배우고, 그 다음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자,” 곧 영적인 아버지가 됩니다. 우리는 단지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알아갈수록 하나님과의 교제는 더 풍성해집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멋지고 훌륭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더 깊어진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크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날마다 자라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니까? 말씀을 묵상하십니까? 그 진리가 여러분의 마음속을 떠다니고 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의 날마다의 양식입니까? 욥처럼 “내가…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십니까?

우리는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오래 다녔고, 이제는 정말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그 시점이야말로 사실은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여전히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성경을 많이 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그 깊이만큼 성경을 알고 계십니까? 저는 성경 본문을 공부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입니다.

이제 두 가지 태도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는 ‘충성’입니다. 여러분,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영적인 단거리 선수처럼 살아갑니다. 출발선에서 빠르게 튀어나가지만 금방 지쳐서 그 자리에 멈춰 버립니다. 뭐든지 시작은 요란한데, 곧 끝나버리는 경우입니다. 마치 ‘영적 은퇴’를 준비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장거리 주자입니다. 오래 달릴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장기적인 영적 헌신입니다. 저는 연세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참 감동을 받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너무 빨라서 필기를 다 못 하겠어요.” 최근에도 80대 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0세가 넘은 분이 지금도 말씀을 들으며 필기를 하신다는 사실이 저는 참 좋습니다. 여전히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고, 여전히 신실하게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과 교회와 사역에 헌신하고 계십니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매년, 해마다 가르치고, 매년 제자훈련을 하고, 오래 전부터 했던 약속들을 지금까지도 충성스럽게 지켜가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기둥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하는 일은 감정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하면서 섬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격에서 나오는 행동이고, 인격은 오래 지속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스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시간이 될 때만 나오고, 가능할 때만 섬기는 분들도 계시지만, 항상 충성스럽게 섬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충성의 영입니다. 진정한 인격의 표지는 ‘지속적인 헌신’입니다.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울은 자신이 이제 곧 순교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제 저를 데려가셔도 됩니다. 저는 끝까지 달렸고, 맡기신 일을 다 했습니다. 싸움을 싸웠고,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무뎌지고 점점 냉소적이 되고 마음이 굳어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때로는 설교자나 교사, 또는 사역자조차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신경질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충성스럽게 섬기시는 분들을 보면 말로 다 할 수 없이 은혜롭습니다. 충성과 함께 익어가는 삶은 정말 복된 모습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입니다. 충성, 충성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다면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일 때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만일 ‘나는 그레이스 교회에 다닌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교회에 출석한다면 정말 좋겠다고요. 저는 그런 분들을 정말 자주 만납니다.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만납니다. 아내와 함께 마트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장을 보고 저는 카트를 밀면서 장을 보고 있었는데요, 어떤 분이 와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이시죠? 저 그레이스 교회 다녀요.” “정말이요?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요?” “아, 그게... 가긴 가요. 예, 갑니다.” “아, 그래요? 지난 주일에도 오셨습니까?” “아, 지난 주일엔 못 갔어요. 음, 좀 됐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그레이스 교회를 정말 좋아해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런 대화가 참 애매합니다. 때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교회에 가게 되면 꼭 그레이스 교회에 갑니다. 너무 좋아요.” 충성, 충성입니다. 예배 자리에 꾸준히 나오는 것, 꾸준히 섬기는 것, 꾸준히 기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충성스런 태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너무나 산만한 시대입니다. 수많은 방향으로 끊임없이 끌려다니는 시대입니다. 우선순위를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 태도는 ‘소망’입니다. 소망, 얼마나 귀합니까. 소망이 있다는 것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삶과 죽음을 기쁨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에서 장례 예배는 곧 찬양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 더 이상 눈물이 없는 곳으로, 질병이 있는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아픔이 없는 곳으로, 죽음이 있는 땅에서 죽음이 없는 곳으로, 한계가 있는 인생에서 무한한 충만의 세계로 옮겨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로마서 8장에서 여러 차례 배웠듯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을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될 그날을 소망합니다. 로마서 8장의 약속대로 구원받은 우리의 영혼에 걸맞은 구속된 몸을 덧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될 그 날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소망이 실제로 말해주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영원에 소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보물도 영원에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땅의 시간과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인생을 걸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소망 가운데 산다는 것은 영원한 것을 위해 헌신하는 데 훨씬 더 큰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힘, 생각, 기도, 꿈, 비전, 물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오직 하나, 영원에 투자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영원의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오늘은 참으로 복된 날입니다.

어제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 성가대 지휘자였던 잭 콜먼(Jack Coleman)이 심부전으로 입원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잭은 아주 따뜻하고, 온유하고, 사랑이 많은 정말 멋진 분입니다. 병실에 들어가서 잭과 아내 사라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잭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3일 전에 저는 거의 죽을 뻔했어요. 몇 번 숨을 더 쉬고 나면 끝이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아직 이렇게 살아 있네요.” 그러자 사라가 옆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잭이 사경을 헤멜 때 계속 이러는 거예요. ‘오른쪽으로 한 방, 왼쪽으로 한 방, 또 오른쪽, 또 왼쪽.’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어요. 복싱을 하는 건 아닐텐데 도대체 뭘 하는 건가 싶었죠.” 그래서 잭이 의식을 되찾은 후에 사라가 물어봤답니다. “잭, 그때 도대체 뭐 한 거예요?” 그러자 잭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마귀를 주먹으로 때렸어. 그놈을 KO시켰어.” 잭은 아직 때도 이르지 않았는데 마귀가 일찍 데려가려 한다고 느꼈던 겁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느꼈던 거죠.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께 편지를 썼어요. 편지와 함께 사진도 꼭 보내고 싶었어요.” 아마도 그 편지는 아직 못 끝낸 일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는 떠나도 되겠습니다”라고 말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마귀와 권투 경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게 실제로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잭은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뻐했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여러분, 이 소망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 있다면 요한일서 3장 3절 말씀처럼 우리를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영원을 위해 산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분명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러한 태도들이 교회 안에서 흐른다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명확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순종으로 부르시고, 겸손으로 부르시고, 사랑과 연합과 섬김으로 부르셨습니다. 기쁨과 평안과 감사로 부르셨습니다. 절제와 책임의식, 용서, 하나님을 의지함, 유연성, 성장, 충성, 소망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든 부르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며,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복 주시고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등불을 다듬어 주시고, 우리를 살펴 주시고,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 주시고, 사랑의 징계로 우리를 다듬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게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선지자가 되시고, 왕이 되시며, 거룩하신 본이 되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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