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도 <교회 해부학>을 다루겠습니다. 지난 6주 동안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씀들이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무엇을 행하고 말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매주 저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시면서 이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진리들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교회와 함께 살아갑니다. 저의 업무는 오전 9시에 시작해서 오후 5시에 끝나지 않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사역하는 일에는 끝이 없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깨어 있는 모든 순간 제 마음에 가득한 생각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푹 잠겨서 살아가는 것이죠.
저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부르심에는 엄청난 기쁨, 벅찬 감격, 말로 다할 수 없는 특권이 따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무겁고 엄중한 책임도 따릅니다.
저는 종종 야고보서 3장 1절 말씀을 떠올립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러니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책임의 자리에 쉽게 올라서려 하지 말라. 실패에 대한 대가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또 히브리서 13장 17절도 생각납니다. “...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사역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목회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돌보는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기쁨과 감사와 복이 가득한 삶이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교회를 대해야 하는 엄청난 무게감이 늘 공존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는 이와 관련해서 출발점을 제시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함께 고린도전서 4장을 보겠습니다. 4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사역에 임하는 자세를 설명합니다. 1절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기를 바란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페레테스(hupēretēs)’인데, 노를 젓는 최하층 노예라는 뜻입니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충성스럽게 일하는 자,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이란 바울에게 계시된 신약의 위대한 진리를 뜻하고, ‘맡은 자’란 자기 것이 아닌 주인의 것을 대신하여 관리하는 청지기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내가 그리스도의 하층 노예였다는 것, 노예들 중에서도 가장 최하층 노예였다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청지기로서 오직 하나님의 비밀을 잘 관리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2절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 삶의 목표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충실히 감당하는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은 신실한 자로서 부르심에 충성했다’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3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는 이 일에 있어서 사람들의 판단을 신경쓰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여론이 어떻든,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나 자신의 평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너희는 내 마음을 알 수 없고, 사실 나도 내 마음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나는 내 약점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니 결국 너희도 나도 진정한 심판자가 될 수 없다.”
4절입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즉,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노골적이고 외적인 죄를 스스로 찾을 수 없다 해도,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라는 말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시 말해서 내가 나에게서 아무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해서 내가 의롭다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정말 엄중한 선언 아닙니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는 사역자로서 그리스도의 노예,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살았다고 평가받기를 원한다. 나는 사람들의 판단에 얽매이지 않았고, 내 스스로의 판단에도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든 사실을 알 수 없고, 때로는 편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편견이 있을 수 있고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사람은 결국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이 몸으로 행한 일들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선한 일이든 쓸모없는 일이든 전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렇다면 그 ‘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오시는 때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똑똑했는지, 얼마나 말을 잘했는지, 얼마나 설교를 잘했는지, 얼마나 지도력이 뛰어났는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은 바로 마음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나 자신조차도 내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 때’가 되어야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엄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입니다. 실패했을 때 두 배의 심판을 받을 것인데, 말씀을 가르치고 섬기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 양떼를 어떻게 돌보았는지, 어떻게 먹였는지를 반드시 하나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청산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저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의 호의적이고 너그러운 평가에 만족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착각 속에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는 이야기는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제가 짊어지고 있는 짐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이들이 짊어지는 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 모두가 저와 함께 이 짐을 나눠 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에 바라시는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모은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이 머물고 있는 항구까지 내려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전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너희가 먼저 자신의 삶을 점검하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다시 말해, “먼저 너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그 후에 주께서 너희에게 맡기셔서 인도하고 양육하게 하신 교회의 상태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교회를 맡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대충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교회에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맡기셨으니, 교회를 돌볼 때마다 그 피의 대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짐을 조금이나마 함께 지고, 저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 장로님들과 목회자들의 마음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려고 했던 겁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 앞에서 청산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바울이 사용한 ‘몸’의 비유를 계속 사용해 왔습니다. 바울의 비유를 빌리되, 주제별 접근을 통해서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몸을 네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골격, 내부 체계, 근육, 그리고 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골격입니다. 교회의 형태와 기초를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진리, 교회의 기초가 되는 본질적인 진리입니다.
다음으로는 교회 안을 흐르는 내부 체계, 즉 영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주제를 몇 주간 다뤘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근육에 대해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근육은 기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형태와 기초를 이해했고, 그 안을 흐르는 올바른 영적 태도를 갖추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작동해야 합니다. 근육은 교회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은 근육에 해당하는 내용을 마무리하고 교회의 ‘살’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이 시리즈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말씀을 전할 예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자, 이제 교회의 '근육'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교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사역하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지난주에는 그 기능 가운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설교와 가르침’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설교와 가르침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고하며 권하라.” 그러니까 설교와 가르침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둘째로, 지난주에 우리는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도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자로서, 사람들을 권면하고 경고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닥칠 멸망을 알고 있는 우리가 나아가서 경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전도와 선교 역시 교회의 핵심적인 기능입니다.
셋째로, 예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개인적으로든 공동체로든 우리는 예배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은 성도를 정의하는 가장 분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예배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하나님은 구속받은 백성이 드리는 찬양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으로서도 예배하지만, 공동체로서도 예배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넷째로, 교회의 중요한 기능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공동체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선택이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18절을 보면 바울은 믿는 자의 전신갑주를 설명하면서 모든 갑옷을 하나씩 언급한 뒤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기도야말로 궁극적인 무기입니다. 곧 “전신갑주로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고 손에 검을 들고 있다 해도,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는 결코 제대로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먼저 나오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항상 끊임없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결이 끊기면 끝입니다. 육체로는 아무 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를 세우는 원칙을 말할 때도 “첫째로 권하노니”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각처에서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다른 기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여러 번 다뤘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 짚고만 넘어갈 겁니다. 다음 기능은 제자 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교회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부터 20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여기서 ‘제자로 삼아’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데튜사테(mathēteusate)인데, ‘배우는 자’ 또는 ‘제자’라는 뜻의 마데튜오(mathēteuō)에서 나왔습니다. 배우는 자, 제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베풀고,” 제자 삼기의 시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로 훈련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제자 삼기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도록 인도하는 전 과정입니다. 이것이 제자 삼기입니다.
저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을 제자로 삼으셨다고 말하는 부분이 참 좋습니다. 원문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자라.”
우리 모두가 제자가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여기서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입니다. “...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열둘을 제자로 삼으셨고, 사도행전은 그 제자들이 무엇을 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시작하신 일이 사도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사도들에게 바통을 넘겨줬고,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줬습니다.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또 그 다음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그렇게 누군가 우리에게도 이 복음의 바통을 넘겨줬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바로 제자 삼기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받은 바통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합니다. 혼자 뛰는 경주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투자를 했고, 이제는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신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제자훈련을 받고 있고, 또 누군가를 제자로 삼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렇다면 여러분보다 더 모르는 사람을 찾아서 여러분이 아는 것을 나누시면 됩니다. 또 여러분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배우십시오.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연결되어서 배우기도 하고, 또 가르치기도 하십시오. 저도 누군가를 제자훈련하는 과정에 마음을 다해 쏟아붓습니다. 그 내용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흐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어딘가에 따로따로 존재하는 고립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흐름 속에 있습니다. 사슬처럼 서로 연결된 존재입니다.
앞서 보았던 고린도전서 4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자훈련의 본질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기본적으로 책망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기초에서 떠나 갖가지 죄악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 이 편지를 쓰면서 14절에서 제자 삼는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나눕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파이다고고스(paidagōgous), 그러니까 일만 명의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쯤 고린도 교인들이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편지로 네 장 반 분량이나 되는 책망을 들었으니 말이죠. “당신이 대체 누군데 우리한테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야?”
그래서 바울이 잠시 멈추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이토록 책망하는 이유는 내가 너희의 영적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자 삼는 첫 단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는 제자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하던데, 그렇다면 복음 전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제자훈련은 복음 전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누구를 제자 삼겠습니까? 제자로 세우려면 먼저 낳아야 합니다. 아기를 먼저 낳아야 자라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복음 전도에 헌신합니다. 그리고 제자로 삼기에 가장 좋은 때는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바로 그때입니다. 그 자리에 서게 되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특별한 연결고리가 생깁니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도 강한 유대감이 생길 수 있지만,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거듭남의 순간을 함께한 관계는 참으로 놀랍고 특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실 때, 그 사람과 여러분 사이에는 책임감과 사랑의 빚진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하나님의 도구임을 알기에 그 사이에 특별한 연결고리가 생깁니다. 따라서 제자훈련은 전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 그러니까 아무도 제자삼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안고 제자훈련을 시작한 적이 있을 겁니다. 발버둥치고 소리지르던 이들을 우리가 책임지고 이끌었습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과 그 사람 사이에 생기는 연결고리는 정말 놀랍습니다. 모든 것은 복음 전도로 시작됩니다.
제자훈련은 그렇게 시작이 되어서 이어져 갑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말합니다. 제자훈련은 사랑의 태도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늘 강조하듯,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고 겸손하게 필요를 따라 섬기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훈련은 이런 사랑의 환경에서 이루어집니다. “너를 위해 내 생명을 줄게. 내 시간을 줄게. 너를 위해 기도할게. 내 통찰력을 나눌게. 내 자신을 네게 줄게.” 이런 마음 없이, 누군가를 정말 아끼지 않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없다면, 제자훈련은 결코 풍성하게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14절에서 바울은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누데테오(noutheteō)’인데,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결국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교정의 권면입니다. 제자훈련은 먼저 구원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경고해야 합니다. 마치 자녀를 키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녀에게는 반드시 경고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가르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경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한 겁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밀레도에서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까 경고하고 또 경고하고 또 경고했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역에서 경고하는 일이나 훈계하는 일이 목사님께 얼마나 중요합니까?”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제자훈련 중에도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계속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이제 멈추셔야 합니다.” 울타리를 세우고 경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자훈련의 일부입니다.
이 모든 핵심이 16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제자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처럼 되라’고 말하라니요?”
그런데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제자로 삼은 사람보다 영적으로 더 앞서 계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방향입니다.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는지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여러분을 따르는 이들은 여러분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됩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불완전한 모습에서 방향의 중요성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완벽하다면, 글쎄요, 저는 따라가고 싶지 않을 겁니다. 완벽한 사람을 따라가는 건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 오히려 제가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면 방향의 중요성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결국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누구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본받으라고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듯이 나를 따르십시오.” 그렇다고 이 말을 교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충분히 인식한 채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합니다. 디모데가 가서 무슨 일을 할까요?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디모데는 가서 가르칠 겁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핵심입니다. 제자훈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진리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제자훈련이란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고, 그 사람과 희생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잘못된 삶의 방식을 고치도록 권하는 것이고, 필요하다면 징계하고 축복만 하지 않는 것이고, 본이 되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영적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가 헌신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항상 우리 교회의 중심이 되어 온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가 온전히 배우면 그 선생과 같으리라.” 참 놀라운 말씀이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온전히 배우면 그 선생과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재생산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생명의 특징은 재생산입니다. 재생산하지 않는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죽은 것입니다.
생명은 재생산합니다. 생명이 있는 여러분은 지금 누군가에게 자신을 쏟아붓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고,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고,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유아부 아이들일 수도 있고,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새신자반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여러분의 삶을 쏟아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 속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알려주세요.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정돈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책임의식이야말로 우리에게 정말 유익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제자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요한일서 2장 6절에 나옵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리스도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본보기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길로 자라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추구해 온 일입니다. 지금도 추구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절대로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양육하고 세워가는 과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보내주시는 사람들 중에서 양육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제자 삼아야 합니다. 다양한 관계와 상황 속에서 말입니다.
제자훈련이란 결국 '영적인 일을 중심으로 진정한 우정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 삼는 일입니다. 단순히 야구를 좋아해서, 음악 취향이 같아서, 같은 직장에 다녀서, 취미가 비슷해서, 혹은 인디애나에 사는 누구를 둘다 알아서 친구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피상적인 이유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깊고도 진지한 우정입니다. 그 우정의 중심에는 영적인 주제에 대한 솔직한 나눔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훈련을 지속시키는 힘입니다.
결국 제자훈련이란 경건한 삶의 방식, 성경적인 반응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반응이 경건한 것’이라고요. 즉, 내 안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반응이 덕스럽고 거룩하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삶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이끌어가려는 방향입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해서 겨우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사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제자훈련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실패도 경험할 겁니다. 저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아침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UCLA 철학과 교수와 여섯 달 동안이나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서 진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주 1시간씩, 여섯 달 동안 빠짐없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섯 달이 지난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들을 만큼 들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떠났습니다. 지금은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훨씬 더 큰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 하나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겨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아주 작게나마 예수님의 제자훈련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돌봄'입니다. 목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이 주제로 깊이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는 양떼가 있고 목자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며 함께 돌보고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 다시 말해,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양들을 먹이고 이끄는 것이 목자의 사명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도 같은 내용을 강조합니다. 양 떼를 먹이고 이끄는 일, 다시 말해 '먹이고 이끄는 일'이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가 목양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곳저곳에서 양들과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양들이 어디에서 다쳤는지 알아야 합니다. 양들의 필요를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접시에 음식이 충분한데 양들에게는 없다면 나누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통찰력이 있는데 누군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면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목양은 그렇게 삶의 모든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주님은 ‘목자장’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목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양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필수적인 일입니다.
저도 목양을 잘하고 싶지만 때로는 참 쉽지 않습니다. 미처 다 챙기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분명 그런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제가 많이 아팠는데 아무도 연락을 주지 않았어요”라든지 “문제가 생겼는데 아무도 찾아오지도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이렇게 말할 때마다 저의 마음이 찢어집니다. 때로는 낙심한 분들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목사님도 연락도 안 주셨고, 관심도 없으셨고, 교회에서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대가 현실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제가 모든 곳에 다 있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어디든 다 가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던 겁니다. 이런 일은 특히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주 일어납니다. 가족이 죽으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위로를 하고 돌보는 데 집중합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모두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때부터 엄청난 공허함이 찾아오면서 우울해집니다. 힘과 위로를 주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삶은 평소대로 흘러가는데, 정작 가장 깊은 슬픔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 외롭게 남겨지는 겁니다. 우리는 때로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주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도 하셨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니 목자가 바로 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목자는 울타리 입구에 누워서 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양이 들어오거나 나가려면 반드시 그 목자를 지나야 했습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사용해서 양들을 하나하나 멈춰 세우고, 상처가 있나 멍이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살폈습니다. 상처가 보이면 기름을 발라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목자는 이렇게 자신의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목양의 책임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교회 안에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너무 조용히 계시니까 목양을 거의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늘 죄 가운데 있으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 곁에는 목자들이 늘 붙어서 계속 돌보고, 떼로 몰려가서는 그 사람을 바로 세우려고 애를 씁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성도 하나 때문에 장로님 여덟 분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런 기도 제목이 올라왔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계속 바람을 핍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번 붙들고 다시 바로잡아 주면 또다시 그 짓을 반복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또 목양을 받습니다.
심지어 목양을 원하지도 않는데도 말이죠. “제 삶에 끼어들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는데도 계속 돌보게 됩니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속으로는 ‘누가 내 삶에 다가와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도 계시다는 것만 알 뿐이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모든 짐을 다 짊어질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양이자 목자라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진심으로 우리가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길 바랍니다. 이 일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교회는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의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청지기의 사명입니다.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이 교회를 맡았고, 우리 모두가 돌보아야 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게 될 겁니다.
목양은 서로를 돌보는 사역입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영적으로 올바른 길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주일에 새가족 등록 카드를 작성하는 것이 단순한 형식적 절차라고 생각하십니까? 헌신된 성도들이 그 카드들을 매주 꼼꼼히 살펴보고, 일정 기간 동안 출석하지 않은 분들에게 전화를 겁니다. 왜 교회에 오지 않았는지, 어떤 필요가 있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묻고 돌보기 위한 과정입니다. 필수적인 일입니다.
제가 그레이스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당시 예배당 앞쪽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성도님들을 어떻게 목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체계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먹일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동시에 바른 길로 이끄는 일 역시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먹이고 인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인도해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이 있습니다. 가정을 세우는 일입니다. 저는 가정이 하나님의 의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하기 위한 하나님의 장치라고 믿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듯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의를 보존하는 기본 단위로 가정을 세우셨고, 그 안에서 진리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사탄은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것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이 의를 지키기 위해 세우신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본질적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정, 교회, 그리고 정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징벌하고 의인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를 세우셨습니다. 사탄은 그 정부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고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가 있다면, 사탄은 그 교회를 공격할 것입니다. 의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가정이 있다면, 사탄은 그 가정을 분열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겁니다. 이 세상 속에서 의를 지켜내는 기본 단위는 바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정부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음모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모는 실제로 성공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붕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탄의 도구가 되고 있고, 결국 이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렇게 묻습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자유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참담한 현실입니다. 이번주에 저는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에서 새로운 비성차별 성경을 출간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모든 성차별적인 표현을 제거했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표현도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랍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바로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입니다. 교회들이 모여 있는 단체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가정은 어떻습니까? 도덕과 절제가 무너진 세상, 욕망으로 가득한 사회의 공격으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까스로 유지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가정이라는 사회의 기본 단위를 지켜내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명을 반드시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제자 삼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6학년짜리 아이들을 한 명씩 맡아 제자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정말 신이 납니다. 우리 아이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돌보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왜냐하면 다음 세대에 믿음을 지켜나갈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결혼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상담 사역, 가정 사역, 가족 센터와 같은 경건한 가족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다양한 사역이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5장 18절 말씀은 단순히 음주를 금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당시의 종교적 술 취함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의 이단 종파들은 술에 취하면 신들과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과거에 동양 사람들이 마약으로 황홀경에 이르렀던 것처럼, 술에 취해서 도취 상태에 이르면 신과 하나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방탕하게 술을 마시고, 신전의 창기들과 음란한 의식을 벌이면서 신들과 교감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과 교제하길 원한다면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 그래야 살아계신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 중 하나가 바로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복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으로 복종합니다. 양육하고, 소중히 여기고, 거룩하게 하는 사랑으로 복종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녀들을 분노케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교훈대로 양육함으로 복종합니다. 이 모든 관계의 조화는 성령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우리 교회 안에서 보기를 원하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바로 각 가정을 성령님의 다스리심 아래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만 진정한 순종이 가능하고, 순종 안에서만 관계가 의미 있고 복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각자가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우위를 다투기 시작하면, 어떤 관계도 건강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을 함께 지켜가야 하는 겁니다. 서로의 가정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친구의 자녀가 말썽을 부리고, 마땅히 해야 할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그 자녀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혹시 그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기꺼이 함께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십니까? 교회는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은 바로 훈련입니다. 훈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훈련이란,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사역을 위한 준비, 일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에베소서 4장 12절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봉사의 일을 하도록, 사역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려고 합니다. 단순히 영적인 진리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나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진리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전도 훈련 과정을 수강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성경 구절들이 하나의 체계로 정리가 되고,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도 현장에서 더 큰 확신과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여러분이 선교지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낀다면, 선교팀에 달려가서 “하나님께서 저를 선교지로 부르고 계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음주에 비행기에 태워서 보내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여러분을 준비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이 떠나는 그날, 최상의 준비가 되어 있도록 도울 겁니다. 교회는 반드시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사역, 훈련시키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성도들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성도들을 훈련하기 위한 과정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장로와 집사 훈련 과정이 있습니다. 전도 훈련 과정도 있고, 선교 훈련 과정도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로고스(Logos)에는 청소년 사역자를 훈련하는 2년 과정도 있습니다. 청소년 사역을 위한 과정입니다. 신학교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게 할 수 있도록 신학생들을 훈련하고, 교회 안에서는 청소년을 위해 사역할 수 있도록 로고스를 통해 훈련합니다. 일반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방향을 설정하여 체계적으로 훈련하고, 과정이 끝났을 때 실제로 사역할 준비가 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훈련하는 기능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아이들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 어떤 배우자가 되어야 할지, 어떤 교회 지도자가 되어야 할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이란 가르침을 하나로 묶어서 어떤 사람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거의 쓰임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최대로 쓰임받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훈련은 필수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세우는 일은 이 훈련의 일환입니다. 여러분도 이 일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맞는 사역 훈련을 받고 계십니까?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기능은 헌금입니다. 시간 관계상 자세히 다루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헌금은 교회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나는 양들을 돌보고 있는가? 기도하고 있는가? 제자훈련에 참여하고 있는가? 가정을 하나님 뜻대로 세우는 일을 돕고 있는가? 훈련을 받고 있거나 누군가를 훈련시키고 있는가? 나는 헌금하는 일에 충실한가?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가 더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드리고 있습니까?” 저는 제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더욱 충성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 삶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쓰고 싶습니다. 제가 마지막 숨을 쉬는 그날까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적을 이루며 살고 싶습니다. 저는 에너지를 남긴 채 천국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헨리 마틴이 “하나님을 위해 저를 태우소서”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완전히 소진된 상태로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뿐 교회의 기능에 참여해서 사역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런 성취감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결산의 때가 올 것이고, 그때는 가진 것들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헌금은 어떻습니까? 마게도냐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히 드렸습니다. 이건 결코 가진 것이 얼마나 많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제가 더 많이 가졌다면 더 많이 드릴 텐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적게 드리면 적게 돌려받고, 많이 드리면 많이 돌려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드리는 것이 아니라 투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 하나님은 재물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려는 겁니다. "내가 너를 믿고 이 재물을 맡겨도 될까?"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맡기시면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를 신뢰해도 될까?" 그리고 우리는 그 재물을 하나님께 다시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신뢰하셔도 되는 사람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삶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최고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을 위탁받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얼마나 충성스럽게 관리하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그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만약 지금 가진 것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진짜 보화를 여러분에게 맡기시지 않을 겁니다. 누가복음이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아예 헌금을 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혀 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약간은 하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헌금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헌금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의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돈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레이스 교회는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놀라운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순종의 자리를, 그리고 곱절의 복을 받는 자리를 놓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조금씩만 헌금합니다. 몇 천원 정도로 최소한만 드리고 그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다 불타 없어질 것들에 써버리기 때문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분들 자신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넉넉히 헌금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리로 들어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드리는 시늉만 하지 마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값을 내지 아니하고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내려놓으면 비로소 자유해집니다. 관리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누군가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정신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어디쯤 와 있을까요?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우리 교회보다 참석 인원이 절반밖에 안 되는 교회인데, 헌금은 우리보다 두 배나 많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대답했죠.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혹시 잘못된 동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쩌면 그 교회는 율법주의적으로 헌금을 강제로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헌금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동기로 드리는 헌금은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만일 모두가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헌금하고 있다면 참 감동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저축하여 두라.” 저도 이 말씀을 따라서 매주 제 마음을 살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어떤 주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매주마다 씨름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교회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단지 우리 공동체의 사역이 지속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너머까지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사역을 하는 이유는, 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곳을 넘어 확장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로 들어오는 재정은 다시 밖으로 흘러나가야 합니다. 제가 어떤 부를 축적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야기했습니다. 이 예배당을 짓는 데 약 75만 달러, 그러니까 (당시) 한화로 하면 약 5억 정도가 들었습니다. 아마 조금 더 들었을 수도 있죠. 괜찮은 수준입니다. 예배드리는 데 여기저기 성물이 달려 있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같은 거요? 그런 것 없어도 됩니다. 우리가 가진 자원을 잘 관리하고, 남는 것은 밖으로 보내는 겁니다.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제도 교회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 기능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교제란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모든 내용을 요약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삶을 나누고, 함께 식사하면서 누군가의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병문안을 가고, 같이 말씀을 배우고, 가정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갖고, 처음 만난 사람과 함께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갓 믿은 성도들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사랑하는 가족이 병에 걸렸을 때 함께 기도하고, 이 모든 것이 다 교제입니다. 바로 교제하는 삶입니다. 함께 모든 것을 나누는 것, 이것이 교제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여러분은 공동체에 속해 계십니까? 누군가와 교제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열고, 상처와 아픔과 문제를 다른 성도들과 나누고 계십니까? 그 성도들 역시 상처가 있고, 문제를 안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서로를 섬길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교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설교, 가르침, 전도, 선교, 예배, 기도, 제자훈련, 목양, 가정 세우기, 훈련, 헌금, 교제입니다. 교회의 필수적인 기능입니다. 자, 이제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맥아더 목사님, 골격에 대해 다루셨잖아요.” 그렇습니다. “내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다루셨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능까지 다뤘어요. 그렇다면 ‘살’은 무엇인가요?”
그거 아십니까? 사실 살, 그러니까 외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몸에 대한 비유를 다시 한 번 들자면,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정말 여러분 알고 싶으신가요? 교회는 결국 그 중심이 어떠하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제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그 교회의 골격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관점, 성경의 절대적 우선순위, 명확한 교리, 거룩한 삶, 영적인 권위에 헌신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태도는 어떠한가? 순종과 사랑, 섬김과 연합 같은 태도가 있는가? 교회의 기능은 어떠한가? 이것만 제대로 확인된다면, 여러분, 교회의 외형이 어떻게 생겼든, 프로그램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레이스 교회에 오게 되었을 때에, 저는 마음 속으로, 이후에는 동역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만 하면, 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모습은 그저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앞서 시리즈 초반에 말씀드린 것처럼, 외부 목회자들이 이번주처럼 우리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우리 교회의 살을 가져가서 그분들의 교회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합니다. 견디지도 못하고, 살아 숨쉬지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되는 본질적인 요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면, 외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어떠하냐보다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실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역을 살로 드러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살’, 곧 우리의 설교와 가르침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가정 성경 공부, 교회 내 소그룹, 교제 모임, 다양한 성경 공부반, 로고스 사역, 기독교 학교, 신학교 등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가르치고 또 가르칩니다. 설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곳 강단에서뿐 아니라 교도소에서, 구호 사역지에서, 녹음된 메시지를 통해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우리 장로님들이 외부로 나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 사역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와 선교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삶으로 전도하는 사역을 합니다. 친구 관계를 통한 전도, 초신자를 위한 성경 공부, 새로 거듭난 이들을 위한 <믿음의 기초> 과정, 제자 훈련 전도, 그리고 전도 훈련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사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례식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간증의 자리일 뿐 아니라 전도를 더욱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선교에 대해서는, 전 세계를 향한 전략을 개발해가고 있습니다. 매달 모여서 훈련받고 있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모든 준비가 되면 선교지로 나가게 될 겁니다. 필리핀과 괌에서 외국어 라디오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봄베이, 마닐라 등 여러 지역에 테이프 센터를 세워서 보급하고 있습니다. 남미, 호주, 뉴질랜드, 유럽에도 사역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우리 사역의 외적 실현, 곧 구체화입니다.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들은 바로는 ‘가정 시리즈’가 일본어로 번역이 되어서 일본 교회 성도들이 제 설교를 일본어로 듣게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이제는 영상 사역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프리카 영어권 국가인 라이베리아의 교회들이 자료나 사역자, 팀을 보내줄 수 있는지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복음주의 교회를 훈련시켜달라는 요청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살이 되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중심이 바르게 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이해되시죠?
공예배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합니다. 주일 아침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과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에 대해 노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성찬의 자리에서도 예배하고, 특별한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우리의 찬양은 모두 예배하기 위해 드려집니다.
목사로서 저는 아침 기도 시간에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올려드리는 제사장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전하는 모든 가르침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진정한 예배가 흘러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르칩니다. 저는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 아침마다 우리 교회 사역자들은 함께 모여 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이어서 한 시간 동안 교회를 위한 기도와 예배의 시간을 갖습니다. 장로들은 매주 주일 아침마다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수년간 이어져 온 전통입니다. 성도들의 짐을 함께 지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중 내내 교회 곳곳에서, 가정에서, 구역 모임에서, 양떼 모임에서, 사역자와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기도 모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자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제자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모임이 제자훈련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리더들을 훈련하고, 각 모임의 구성원들을 훈련하고, 가장 어린 아이들부터 가장 연로한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대의 모든 사역 안에서 제자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양은 어떻게 살로 드러날까요? 장로와 집사, 여집사들이 성도들을 돌보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에는 ‘사랑의 실천 사역’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하면 도움을 주기 위해서 준비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양떼 모임을 통해서 잘 구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알려오면, 그 지역에 해당 도움을 제공하기로 자원한 성도를 연결해 줍니다. 자동차 변속기를 고쳐주는 일부터 병문안까지, 다양한 실질적인 돌봄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목양의 일부입니다.
가정 세우기 사역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사역, 가정을 위한 사역, 그리고 ‘여성을 향한 은혜(Every Woman’s Grace)’ 같은 여성 사역이 있습니다. 남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여성을 위한 모임도 있는데, 남편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졸업합니다. 그리고 졸업을 기념하는 큰 축하 행사가 열립니다. 자녀 양육을 위한 잠언 프로그램, 아버지들을 위한 코칭,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가르치는 클리닉,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를 위한 결혼 예비 학교도 있습니다. 정말 탁월한 과정입니다. 결혼 전에 꼭 알아야 할 것들을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전도 훈련, 교도소 사역 훈련, 선교 훈련 등 다양한 훈련 과정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목양 사역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헌금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마다 드리는 헌금,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드리는 수고와 헌신, 은사와 에너지를 쏟아 부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제는 언제 어디서나 살로 드러납니다. 주일에 모이는 교제 모임은 그런 교제를 위한 아주 좋은 장입니다. 양떼 모임 등을 비롯한 여러 모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사역은 결국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올바를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세우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정말 특별한 교회입니다. 저는 거의 매주 주일마다 새신자 안내 데스크에 서 있는데, 항상 누군가가 와서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에서 왔습니다.” 지난주에는 미시간에서 왔고, 그 전주에는 플로리다에서 왔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였을 수도 있고요. 그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는 미시간에서 왔어요.”
“아, 반갑습니다. 여행 오신 건가요?”
“아닙니다, 이사 왔습니다.”
“정말요? 왜요?”
“그레이스 교회에 다니고 싶어서요.”
“아, 그러셨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혹시 머물 곳이나 집, 아니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데가 있을까요?”
“그럼, 모든 걸 정리하고 그냥 이곳으로 오신 건가요?”
“네, 그레이스 교회에 오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부부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여럿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머물 곳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실까요? 저희는 삶의 중심이 직장이 아니라 교회라고 믿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울컥하고 목이 메어 오면서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우리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계속 남아있게 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많은 성도님들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세워진 교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아멘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저희에게 허락하신 시간에 감사합니다.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믿음의 고백이 담긴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생각만 해도, 또 실제로 하나님이 여기 계시기에, 우리에게는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소망도 넘치고, 어둠을 몰아낼 능력도 넘칩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요. 우리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립니다. 선한 일, 좋은 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보다 못한 일은 우리가 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하실 수 있도록 온전히 맡겨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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