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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는 이 아침, 드디어 <교회 해부학>이라는 특별한 시리즈의 마지막 시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몸에 비유해서 살펴봤습니다. 교회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기초 진리들을 ‘골격’으로, 성도들의 마음에 있어야 할 영적 태도를 ‘내부 체계’로, 사역의 기능을 ‘근육’으로, 그리고 사역이 드러나는 형태를 ‘살’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몸도 머리 없이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러분이 놀라울 정도로 잘 반응해 주셔서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직설적이고 도전이 되는 말씀을 들으셨는데, 그 시간들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영이 열매를 맺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7주 동안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계획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균형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위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많이 실패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경주 중에 얼마나 쉽게 죄에 걸려 넘어지는지를 생각할 때,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워가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정말 커다란 격려입니다. 오늘 나눌 주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드려야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하고, 우리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습이 되어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한 역설입니다.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우리의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함께 살펴볼 말씀을 떠올리던 중에 히브리서 마지막 장에 나오는 장엄한 축도가 생각났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부터 21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삼고 다른 신약성경 말씀도 살펴보면서 교회를 위한 주님의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7주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눴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하시는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이 주제만으로도 하나의 시리즈 설교가 될 수 있지만, 오늘은 설교 한 편으로 압축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장엄한 송영(doxology)입니다. 이 위대한 서신의 마지막에 마치 보석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정말 아름다운 축도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 축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히브리서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구조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겠습니다. 이 찬송은 평강의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인들과 화평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지만, 한때는 진노의 하나님, 전쟁의 하나님, 심판과 분노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항상 평강의 하나님이셨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와 화평을 이루심으로써 우리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그 평강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입니다. 하지만 이 송영은 단지 하나님의 평강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평강의 하나님이 되셨는지를 선포하는 송영입니다. 서두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마지막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그 영광을 가능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하십니까? 지금 함께 살펴보는 이 구절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엿보게 해줍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은 교회의 구주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과 21절에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제가 처음 주목한 것은 2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름, '주 예수'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아, 여호수아도 같은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2장 9절과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아르케고스(archēgos)’, 그러니까 구원의 창시자이시며, 인도자이시며, 개척자이시며, 구원을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셔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을 주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축도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찬양입니다. 구원자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0절은 예수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죄가 반드시 피로 속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히브리서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입니다. 히브리서 9장 18절입니다.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여기서 말하는 첫 언약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옛 언약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레위기 17장 11절을 통해 옛 언약이 피로 확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옛 언약은 피를 흘림으로 시작되었고 피를 통해 확정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고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 피를 뿌려 언약을 확증하고 시행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모든 계명을 백성에게 말한 후, 송아지와 염소의 피, 물, 붉은 양털, 우슬초를 가져다가 책과 모든 백성에게 뿌리며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그리고 성막과 그 안에서 섬기는 모든 기구에도 피를 뿌렸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피가 사방에 뿌려졌습니다. 율법책 위에도 피가 뿌려졌고, 백성들 위에도 피가 뿌려졌고, 성막과 그 안의 모든 기구에도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야말로 온 천지에 피가 가득했습니다. 모든 곳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나와 맺는 언약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피흘림은 단지 궁극적인 희생을 상징할 뿐이었습니다. 오직 궁극적인 희생만이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 죄 사함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화평도 없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6장 28절에서 새 언약을 확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의 피가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이다.”

자, 그러니까 언약은 피로 맺어졌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동물의 희생제사도 참된 화평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참된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희생이 있어야 했습니다. 구약의 희생제사는 그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에 불과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기에 ‘영원한 언약의 피’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세 언약, 그러니까 옛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언약이었고,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였습니다. 마침내 영원한 언약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의 제사장들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희생제사는 끝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셨고, 다시 들어가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교회의 구주이심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서도 구주이심이 드러나고, 또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으로도 확증됩니다. 13장 20절 상반절에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이 말씀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있어 또 하나의 본질적인 요소를 말해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하나님의 승인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활을 우리의 부활의 근거로, 혹은 죽음을 이긴 승리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바르게 이해한 겁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온전히 인정하셨기에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이 완전하고도 충분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히브리서 13장 20절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우리를 영원한 언약 가운데로 이끄셨고, 하나님은 그 구속 사역을 확증하시는 방식으로써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0장 6절에서 우리가 ‘평안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구주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의미입니까? 이 교회, 우리 교회는 인간이 만든 조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는 인간의 힘으로 세워진 조직이 아닙니다.

이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새가족으로 등록하거나, 사람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혹은 사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삶이 나아질 것 같아서, 즐거운 행사나 음악을 좋아해서,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좋은 감정을 갖게 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고 씻김을 받은 자들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우십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자신의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예수님의 사랑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예정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던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셨고, 보배로운 피, 인간의 그 어떤 재물보다도 귀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는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너무나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사역하고, 삶을 드리고,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바치며 섬기다 보면, 교회가 마땅한 모습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왜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되지 않는지 고민하고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목회자로서, 지도자로서 이렇게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 제 삶을 이곳에 드렸습니다. 제 모든 열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붓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를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슬픔을 느낄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더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바르지 못한 길로 나아가고, 성도들이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을 때, 그래서 우리가 깊이 슬퍼할 때, 그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더 슬퍼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이 실패한다고 해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넘어졌다고 해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무관심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와 자원과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무한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완벽하게 아시는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교회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이 세상이 영원한 미래로 다시 태어나는 그날까지 반드시 그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교회에 사람들을 부르시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사랑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을 보면 그 사랑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처럼 올라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큰 위로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부족한 모습이 보이더라도 저 역시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를 너무 많이 걱정한 나머지 두려움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교회를 무한히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이 걱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교회를 위해 많이 헌신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 걱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더 많이 교회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는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 나옵니다. 사실 이 말씀 자체가 하나의 찬양,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송영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에게…” 말로 다 표현 못할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현재형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기근입니까, 적신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생명입니까, 사망입니까, 천사입니까, 권세자들입니까, 현재 일이나 장래 일입니까, 높음이나 깊음입니까, 또 다른 어떤 피조물입니까?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 그 완전한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꼭 붙들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제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완전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대상인 교회에 예수님의 모든 관심이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이 교회의 구주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구원하신 그분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시고, 교회에 더하시고, 하나의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가도록 함께 연결하고 짜맞추십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저는 참 좋습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정말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저나 다른 어떤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전략, 장치나 방법을 짜내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지옥의 문(the gates of Hades)이, 곧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지옥의 문’이란 죽음을 가리키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따르면 죽음은 사탄이 손에 쥐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탄이 아무리 죽음으로 교회를 위협해도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죽여도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는 그저 예수님께서 세우고 계신 그 교회의 한 부분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정말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반드시 성경대로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혼란을 일으킬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교회를 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세운 것인지 예수님께서 세우신 것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참 좋습니다.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가 아니라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저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교회는 누가 주인입니까?” 저는 이 질문이 참 좋습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귀한 피로 교회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시고, 교회를 세우시며, 사도행전 말씀처럼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저는 “내 양”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고, 주인이시고, 값을 치르신 분이시며, 머릿돌이시고, 기초이시며, 교회를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반대와 위협을 넘어서, 모든 육신의 연약함과 인간의 무능함을 이기고, 무관심과 냉담과 배도와 자유주의, 교단주의, 온갖 사상과 혼란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라.” 에베소서 2장에서는 “너희가 성령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네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교회의 구주이십니다.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두번째로, 히브리서 13장 20절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큰 목자이십니다. 구주로서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세우십니다. 그리고 목자로서도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하지만 먼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큰 목자'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목자들이 단지 인간일 뿐이라면,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목자’이십니다. 시편 77편 20절에서 모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백성을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양 떼 같이 인도하셨나이다.” 모세와 아론도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큰 목자’는 아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묘사하는 구절이 세 번 나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서는 ‘목자장’이십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에서는 ‘큰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 목자장, 그리고 큰 목자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적어도 여섯 번 이상 불경건한 민족들을 목자 없는 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믿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목자가 있는 양입니다. 일주일 전쯤에 사역자들과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양들을 더 잘 돌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늘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회의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요즘 잘 출석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중간에 사라졌고, 한동안 보이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디로 가신 건지, 왜 안 나오시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연락을 해보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행정적인 문제들, 양들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주님, 우리가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챙길 수 있겠습니까. 몇 주 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어디가 아픈 건가, 무슨 어려움이 있는 건가, 믿음은 잘 지켜가고 있는 건가, 구원은 확실한가 하는 이런 생각들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때로는 집에 돌아와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양들을 잘 돌볼 수 있을까, 이 무거운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가 되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큰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양떼를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양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성령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프로그램에 꼭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균형을 잃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든 도구를 갖추고 싶어하지만, 궁극적으로 주님이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주님의 양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할 것이지만, 양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저에게 맡겨주신 일을 성실히 하겠지만, 만일 모든 책임이 저에게 달려 있다고 느낀다면 저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저는 마음을 다해서 교회를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제게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이런 관점을 가지셔야 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그것이 책임이라고 느껴서가 아닙니다. 장로님들이나 지도자들이나 목회자들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제가 교회를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단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싶어서 이 일을 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있든 없든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만일 음부의 권세가 여러분을 이길 수 없다면, 저 존 맥아더가 여러분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저 없이도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저는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기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을 양육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가진 자원이 다 고갈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필요를 어떻게 채워줘야 할지 모를 때도 있죠. 그럴 때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목자장이신 예수님이 돌보신다.’ 어제 우리 교회 한 자매님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출산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나 생명 유지 장치를 달았지만, 뇌에 일정 시간 동안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미숙아인 아이를 곁에 둔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죠. 결국 우리는 위대한 목자장께서 자신의 양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위대한 목자이시고, 큰 목자이시고, 선한 목자이십니다. 돌보시는 예수님이 하시는 두 가지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21절을 보면, 위대한 목자께서 영원한 언약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모든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전함에 이르게 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다듬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빚으십니다. 성경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또 은사를 주신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우리 속에 쏟아부어줄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도 함께 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교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5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말씀이 역사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상황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말씀이 가위처럼 우리를 가지치기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직접 말씀을 주시고, 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게 하시고, 그리고 나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잠시 고난을 받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과 유혹과 고통스러운 고난 가운데 두십니다. 왜일까요? 그런 상황에 있으면 우리가 말씀을 실제로 적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죄와 씨름하고 고통과 씨름하고 불안하고 아프고 슬플 때에, 바로 그 싸움의 한복판에서 제 안에 있는 추악한 죄악이 끓어오르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그 죄를 더 깊이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 밀려올 때, 그러한 의심과 죄악된 마음을 더 미워하게 됩니다. 그렇게 무너진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일입니다. 천국을 사모하고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일입니다.

자, 그러니까 고난은 선한 일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고난은 주님이 주십니다. 저는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설교자가 고난까지 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역할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고난을 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강하게 하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능력을 받고 주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7장에서는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교회를 그렇게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훈련 과정을 진행하고 있고, 이 주제를 계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제자 훈련도 하고 있고, 복음 전도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역하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 사역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특권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은 일반적으로 결혼에 대한 말씀으로 인용되지만, 사실 그보다 더 깊은 뜻은 교회를 향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주님은 교회를 양육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양육한다’는 말은 먹여 살린다는 뜻이고, ‘보호한다’는 말은 몸의 온기로 따뜻하게 감싼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젖먹이를 품에 안고 보살피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실제로 ‘보호하다’라는 단어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에서 ‘유모’라는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품에 안고 먹이고, 품고, 따뜻하게 녹이는 주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품으시고, 먹이시고, 녹이시고, 다시 빚어 가십니다. 참으로 친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때때로 모든 자원이 고갈되고, 어떤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고, 마음속에 답답함이 밀려올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더 헌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더 잘 자라고, 더 잘 준비되고, 더 신실해지고, 더 성숙해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합니다. 더 깊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께서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교회를 온전히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교회를 먹이시고 따뜻하게 품어 주십니다. 정말 큰 위로입니다. 자, 그리고 두번째로, 목자로서 주님은 교회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지키기 위해 이리를 쫓아내듯이, 예수님은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 싸우십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성도들을 고발합니다. 욥을 고발했던 것처럼 우리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시고, 우리의 중보자이시고, 우리의 대언자이시고,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처럼 예수님은 놀라운 이 기도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신약 전반에 걸쳐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사역하고 계십니다. 요한일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고발될 때,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로 서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그 죄에 대해서 제가 이미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 죄는 제가 이미 값을 치렀습니다. 저의 피가 그 죄의 값을 치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죄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다시 정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셨는데, 그 하나님이 다시 여러분을 정죄하시겠습니까? 이미 의롭다 하신 하나님이 다시 죄를 물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보다 더 높은 법정이 있기라도 합니까? 여러분의 죄를 친히 자기 몸에 지고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정죄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속량하신 주님께서 어떤 죄는 남겨두고 여러분에게 책임을 물으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아버지께 아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대제사장이 아니십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정확히 아시고, 히브리서 2장 18절에 따르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은 예수님이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셨고, 목이 마르셨고, 피곤하여 쓰러지셨고, 주무셨고, 배우셨고, 자라나셨고, 사랑받으셨고, 미움받으셨습니다. 사랑하셨고, 미워하셨고, 놀라셨고, 감탄하셨고, 기뻐하셨고, 슬퍼하셨고, 분노하셨습니다. 의분을 느끼셨고, 때로는 비꼬기도 하셨고, 근심도 하셨고, 괴로워하셨고, 다가올 일들에 의해 깊이 요동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실천하셨고, 성경을 읽으셨고,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고통 앞에 마음을 쏟아 부으셨고, 마음이 아플 때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셨고, 불쌍히 여기시고, 공감도 하시고, 변호도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진리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신실한 대제사장이시며, 항상 중보하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목자이십니다. 한편으로는 양육하고 돌보며, 교회를 양육하고 준비시키시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관계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대신해 중보하심으로, 어떤 죄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모든 죄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깨끗하게 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바로 그 사실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구주이시며, 교회의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예수님은 교회의 주권자이십니다.

본문을 다시 살펴보면 ‘주(Lord)’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약에서 이 ‘주’에 해당하는 ‘퀴리오스(kurios)’라는 헬라어 단어가 무려 92번이나 사용됩니다. 이 단어의 다양한 뉘앙스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주권자라는 뜻입니다. 통치자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에서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으니, 교회는 그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골로새서 1장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씀입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18절에서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시며, 시작이시며, ‘프로토토코스(prōtotokos)’, 곧 만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일에 예수님이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권자이시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권은 교회 안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오늘은 그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여러분, 누가 그레이스 교회의 책임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은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케팔레(kephalē)’는 기본적으로 첫째, 으뜸, 최고, 결정권자, 이런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교회의 주권자이십니다.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심이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머리로서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가지시고, 교회 안에서 다스리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금촛대는 각각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이를 다니시며 등불을 다듬고 계십니다. 또 예수님은 놋과 같은 발과 불꽃같은 눈으로 오셔서 교회 안의 죄를 살피시고 제거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교회의 치리 과정과 죄를 다루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기도 모임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징계 과정에서 어떤 사람의 죄를 확인하기 위해 함께 모인 두세 증인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 본문 전체는 교회 징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주저하지 말고 징계를 시행하라. 왜냐하면 너희가 바른 증인들을 불러 죄를 확정했다면,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 이미 매어진 것이고, 너희가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 이미 풀린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행하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셨듯이, 경건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그레이스 교회에 50분이 넘는 장로님들이 있는 겁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그 한 가지 목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 중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 곧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사안이나, 구체적인 지침이 없는 문제를 마주할 때는 기도하고, 깊이 생각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시는지를 우리 가운데 드러내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50명이 넘는 장로님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반드시 만장일치로 해야 합니다. 만장일치가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아래에 있는 모든 목자된 우리에게는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깨닫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간절히 찾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저도 그렇고, 분별력 있는 어떤 사람도 그 책임을 스스로 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그 무게는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단 한 가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따르는 겁니다. 성경을 따르면 모든 것이 간단해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교회를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가르치십니다. 다스리심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모든 진리를 계시하실 권위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교사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 사람이라는 도구를 통해 계시되지만, 가르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제가 기억하기로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는 이러한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게 될 것인가? 2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즉,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심으로써, 제자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님이 너희에게 나에 대해 증언하실 것이며, 너희가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실 거랍니다. 또한, 16장 1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그러니까 주님이 직접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주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서 그 안에 분명히 기록된 진리를 보게 되고,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과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지혜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세상 교사들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님이 함께 계시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사 있는 사람들을 통해 성령께서 진리를 전하십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를 이끌고 계십니다.

저의 의견을 전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제 의견을 전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당장 내쫓아야 할 겁니다. 저는 저의 생각을 말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 없는 사회적 문제를 논하려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 앞에 펼쳐 보여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구주의 마음을 알게 하고, 예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단지 종업원일 뿐입니다. 제가 요리한 것이 아닙니다. 제 역할은 요리를 망치지 않고 따뜻한 상태로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세우시는 구주이시고, 교회를 훈련시키고 중보하시는 목자이시며,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치시는 주권자이실 뿐 아니라,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고 영화롭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예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에서 우리를 분리시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이 때로는 저를 염려하게 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서 죄를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걱정합니다. 그 사람이 그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때로는 직접 권면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징계의 과정까지 가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오늘 당회에서 죄에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죄에 빠졌다가 돌아오는 그 한 사람, 그 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고치겠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또다시 죄에 빠지고, 빠져나왔다가는 또다시 들어가고, 결국 다시 징계의 과정을 밟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위로가 되는 사실은, 만일 그 사람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면 예수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죄 속에 빠진 교회를 정결하게 하실 수도 있고, 고린도전서 11장이나 요한일서 5장에서처럼 신실하지 않은 성도의 죽음을 통해 교회를 정결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사람을 강하게 하셔서 거룩을 향해 가도록 이끄심으로써 정결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을까요? 왜 자신을 내어주셨을까요? 이는 곧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씻어 물로 깨끗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서 깨끗하고 정결하길 원하십니다. 궁극적으로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를 위하여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셔서 마침내 영광으로 이끄십니다. 점이나 주름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 바로 그런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결국에는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영화롭게 하십니다. 사실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결국 완전한 정결함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존재가 될 겁니다. 그리고 평강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 것이고, 우리도 하나님께 아멘으로 화답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고,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곳에 이르게 되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흠 없고 점도 없이 완전한 모습이 되어 있을 겁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큰 소망이 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길을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 진리를 다시 한번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중요한 진리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데 우리 도움이 필요해서 우리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오늘 그레이스 교회가 무너진다고 해도,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전히 전진할 겁니다. 제가 갑자기 죽고 우리 모든 지도자들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교회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있어야만 교회를 세우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느냐고요? 제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세우고 계신 그 일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놀랍고, 더 감격스럽고, 더 영광스럽고, 더 큰 기쁨이 넘치고, 더 영혼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공사 현장에 한 기자가 찾아갔습니다. 그 웅장한 성당 건축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돌을 나르는 한 인부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 뭐 하고 계세요?" 그 남자가 짜증이 섞인 듯이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안 보입니까? 돌 나르고 있잖아요. 그냥 이 돌들 계속해서 끼워 넣고 있는 거예요. 그냥 끝도 없이 돌을 옮기고 있다니까요." 기자는 또 다른 인부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물었습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가족도 있고 아이들도 여럿이니까 생계를 꾸려야죠." 기자는 세번째 인부에게 가서 똑같이 질문했습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이 세번째 인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경이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짓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뭘 하고 있냐고요? 저는 그냥 이 돌들을 여기에 끼워 넣고 있어요. 이 일을 해야 하니까요.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어쨌든 저는 그리스도인이니까 뭔가 영적인 일을 해야 하잖아요. 이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고 계신 영원한 왕국의 건축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광경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인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명확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결국 이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 이 일을 행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저희가 이 일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저희를 필요로 하셔서가 아니라, 저희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일에 참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순종하는 자, 신실한 자, 부지런한 자에게 주시는 기쁨과 감격과 복을 알고 싶습니다.

자, 조용히 묵상하는 이 시간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교회의 지체로 세우신 구주 예수님께, 여러분을 온전히 준비시키시고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시는 목자 예수님께, 여러분을 다스리고 가르치시는 주권자 예수님께, 여러분을 정결하게 하시고 결국에는 영화롭게 하실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께서 움직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주시기를, 예수님이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있다면, 성령님이 역사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감동에 따라서 하나님을 구하고 마음을 열어 응답하십시오. 어떤 분들은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고 찬양받는 교회, 그리고 그 거룩하신 이름을 섬길 수 있는 공동체에 속해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성령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신다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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