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 1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는 18절부터 25절까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마태가 기록한 말씀, 그러니까 전도자 마태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야말로 삶의 모든 영역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매우 강력하고 힘 있게 선언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정하신 원리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18절부터 25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함께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22장 42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한 가지를 물으십니다. 그때 이후로 모든 시대에 걸쳐 계속된 질문이죠.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마태복음 22장 42절에서 예수님이 던지신 질문입니다.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약속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윗 왕가에 속한 사람, 왕의 계보, 왕의 혈통에 속한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이상은 잘 몰랐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메시아가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부는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대다수의 유대 사람들은 장차 오실 왕이 다윗의 혈통, 완전한 인간으로서 왕의 계보에 속한 인물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을 때 신성모독이라고 정죄했습니다. 다윗의 왕가일 것은 기대했지만,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저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의 자손으로 인정합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왕의 계보에 속했다 것까지는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 곧 예수님의 신성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떠오르는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높은 하늘에 계신 주께 영광, 영원하신 주 그리스도, 때가 차서 오셨네,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네, 육신 안에 감추인 하나님을 보라, 성육신하신 하나님께 영광,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기뻐하신 주, 우리 임마누엘 예수, 들으라 천사들의 찬양, 새로 나신 왕께 영광.”
이 찬송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 실제 의미를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10여 년쯤 전에 한 잡지사에서 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목회를 준비하는 학생들 가운데 56퍼센트가 동정녀 탄생을 부인했습니다. 56퍼센트입니다. 이들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의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한 조사 기관이 여러 교단을 대상으로 동정녀 탄생에 대한 견해를 조사했습니다. 미국 침례교인의 69퍼센트, 루터교인의 66퍼센트, 연합 장로교인의 57퍼센트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대답한 반면에, 성공회는 39퍼센트, 감리교는 34퍼센트, 회중교회는 겨우 21퍼센트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교회입니다, 자유주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조차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이 위대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여러분의 신학을 다수결에 맡기면 안 됩니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노골적으로,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교묘한 형태가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한 인물의 말을 제가 인용해 보겠습니다. 가든 그로브 커뮤니티 교회(Garden Grove Community Church)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976년 1월에 <위텐베르크 도어(The Wittenberg Door)>에 실린 내용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도 않고, 또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다루지 않는다.”
동정녀 탄생을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것이 어쩌면 가장 심각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교묘한 문제입니다. 의심해서도 안 되고, 부인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25절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달라스 신학교 총장이었던 월부드 박사(Dr. Walvoor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기독교의 중심이다. 모든 기독교 신학의 구조는 그 위에 세워져 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육신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예수님의 탄생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반드시 붙들어야 할 핵심 교리입니다.
만일 예수님에게 인간 아버지가 있었다면, 성경은 신뢰할 수 없는 책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게 인간 아버지가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나셨다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삶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 이 모두가 신성의 증거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따로 떼어내서 그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릴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나머지를 받아들이면서 하나만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전부 믿든지, 아니면 하나도 믿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던지신 그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누구의 자손인가? 지난주에 살펴본 족보에서 마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인간적인 측면의 답을 제시합니다. 인간으로서 누구의 자손입니까? 다윗의 자손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다음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18절부터 25절까지에서 우리는 신적인 측면의 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아들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윗의 자손, 이것은 인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것은 신성입니다.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다윗의 계보를 통해 세상을 다스릴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신적인 측면에서는 인간의 아버지 없이 성령님의 역사로 태어나심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유대인 독자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독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답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과정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말해줍니다. 만일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족보만 있었다면, 예수님은 왕이 될 법적인 권리는 가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구속하실 수는 없었을 겁니다.
죽음을 이기실 수도 없었을 겁니다. 죄를 이기실 수도 없었을 겁니다. 사탄과 지옥을 이기실 수도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100퍼센트 하나님이고 100퍼센트 사람이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장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태복음 1장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먼저 인성을 다루고 그 다음에 신성을 다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마태는 이 부분을 변증적인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변증론(apologetics)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폴로기아(apologia)’에서 비롯되었는데요, 무언가를 변호하기 위해 논증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대응해서 변증의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한 비방을 반박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사생아다, 이렇게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혼외자라고 비방했습니다. 로마 병사가 마리아와 함께 살았다, 마리아가 간음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출신 성분이 정당하지 않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비방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기록하면서 당대에 퍼져 있던 이런 비방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비방을 완벽하게 바로잡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사도신경에서도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백할 만큼 본질적인 교리입니다. 언제나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서 공격을 받아 온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세상에는 때때로 특별한 출생이 있습니다. 최초로 다섯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제가 기억이 나는데요, 아마도 1934년경에 태어난 디온 다섯 쌍둥이였을 겁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죠. 그 다음에 미국에서 피셔 다섯 쌍둥이가 탄생을 했고요, 또 1973년경에는 스타넥 여섯 쌍둥이 탄생 소식도 있었습니다. 참 특별한 탄생이죠.
저희 첫째 아이 매튜가 태어났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정말 대단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보, 몇 킬로였죠? 4.6킬로그램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건강한 아이였습니다. 그날 저희는 세상에서 제일 큰 아이를 얻은 것처럼 아주 기뻐했습니다. 아버지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장 나가서 미식축구공을 하나 사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제가 신문을 보는데 7킬로그램이 넘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정말 큰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죠.
이처럼 특별한 출생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같은 사건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가장 특별한 사건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원을 부인해 버리면, 예수님의 삶도, 죽음도, 부활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가 무너집니다. 만일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 자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는 처음부터 동정녀 탄생을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제 18절부터 25절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특징, 다섯 가지 요소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서사적 형식의 글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탁탁 나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이야기 형식으로 흐릅니다. 그러나 나눠서 보면 핵심을 더 분명하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에 정리를 해보는 겁니다. 아마 주보에도 개요가 있을 겁니다. 함께 잘 따라오시면 됩니다. 다섯 가지입니다. 동정녀 잉태, 정혼자의 인지, 천사의 설명, 구약과의 연결, 동정녀 탄생의 성취입니다. 이 단어들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 제가 선택한 것뿐입니다.
동정녀 잉태, 정혼자의 인지, 천사의 설명, 구약과의 연결, 마지막으로 동정녀 탄생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다루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요,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록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사람일 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가 이 복음을 기록하던 당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주후 한 40년에서 70년 사이로 보는데, 그 무렵에는 이미 세상에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가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를 가져다가 여기에 끼워 넣었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중의 하나를 그냥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을까요? 사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속이는 자입니다. 위조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비슷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초대 교회 시대의 신학자였던 오리건(Origen)을 비롯해서 많은 저술가들이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되고 타락했는지를 분명하게 아주 지적해 왔습니다.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자,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전설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에게서 태어나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메대-바사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쪽으로 진군해서 그리스 제국을 건설한 아주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알렉산더 대왕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뱀이 올림피아스의 침상에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고 합니다.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설에 따르면 올림피아스가 뱀과 관계를 맺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뱀이 누구인지는 그리스 신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것입니다. 여러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음란한 이야기와 자주 연결되는 신이 있죠. 이상한 성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그 신하고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제우스입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그리스 문화 속에서는 제우스가 어떤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상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이야기가 아주 자주 등장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경우도 바로 그런 식입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제우스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올림피아스의 침상에 들어갔고, 그 결과로 올림피아스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제우스는 어떤 때는 새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또 바다의 거품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배를 뒤집어엎고 성행위를 벌였다는 이야기들입니다.
어쨌든 전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가 이 일을 알고, 아내를 향한 욕망이 식어 버려서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는 뱀의 아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바로 알렉산더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동정녀 탄생 이야기죠.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아주 더럽고 터무니없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이런 이야기 중에서 하나를 그냥 가져다가 예수님의 탄생에 붙여 넣었다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마태를 노골적인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동정녀 탄생은 신화가 아닙니다. 환상이 아닙니다. 역사입니다. 분명한 역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7장 14절 같은 말씀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구약에는 메시아가 하나님이실 것이라는 단서가 담겨 있습니다.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선언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단서가 구약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하나하나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이 사실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 희미했던 것이 신약에 이르러 경건의 비밀, 그러니까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신약에 와서야 비로소 그 진리가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면, 모든 거짓된 사상이 가장 먼저 무엇을 공격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죠. 실제로 모든 거짓 사상은 예외 없이 이 부분을 공격합니다.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을 믿었는지, 어떤 전설이 떠돌았는지, 비평가들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 어떻게 비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이제 이 놀라운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입니다. 동정녀 잉태입니다. 18절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기적입니다. 너무 자주 들어서 그 경이로움에 익숙해져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초자연적인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1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동정녀 탄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마태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이제 흥미로운 점을 보겠습니다. “나심”이라는 단어가 보이십니까? 18절에 “나심”이라는 단어가 보이죠. 1장 1절에 나오는 “계보”와 같은 헬라어입니다. “계보”와 같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예수님의 계보를 신성의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했고, 1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니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계보를 두 가지 측면으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계보의 두 측면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살펴보겠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사실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더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알려진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알려진 몇 가지를 조금 정리해 보겠습니다. 어쩌면 이런 가능성이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입니다. 찾아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마리아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이 말씀을 보면 마리아에게 자매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글로바의 아내인데 이름이 마리아입니다. 당시에는 같은 이름이 아주 흔하게 사용됐습니다. 또 누가복음 1장 36절도 보겠습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그 아들이 누구일까요? 세례 요한이죠.
그러니까 마리아에게 자매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따르면 실제로 친자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라는 친척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의 가족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의 계보에서 마리아 쪽 계보를 보면, 마리아의 아버지 이름은 ‘헬리’로 나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친척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도 친척 관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가난했을 겁니다. 부지런했을 겁니다. 매우 경건했을 겁니다. 마리아의 성품을 알고 싶다면, 마리아의 말을 들어 보면 되죠. 누가복음 1장에 수태고지와 관련된 병행 기록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성령님이 하신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누가복음 1장 35절입니다. 아이를 낳게 될 것이고, 그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곧 신성을 가지신 분이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8절은 마리아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또 4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마리아의 두 번째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천사가 와서 이런 말을 한다면,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바로 고백할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말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마리아는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대부분은 “요셉, 나 이상한 꿈을 꿨어.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이런 믿음은 의로운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고, 말씀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도,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어도,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의 찬가에 정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참으로 경건한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따져 묻지도 않았습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즉각적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참으로 의로운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 옛 언약 시대의 참된 성도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분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미리 알고 찬양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이 “마리아”라는 이름이 헬라어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헬라어로는 미리암입니다. 그런데 그 어원의 의미가 뭔지 아십니까? 반항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성품은 이름과 전혀 달랐죠.
마리아는 지금 약혼한 상태입니다. 18절을 보시면 요셉과 약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배경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헬라어로 목수로 번역이 되기도 하고 석공으로 번역이 되기도 하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마 두 가지 일을 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라면 벽돌도 쌓아야 하고, 창문이며 문이며 모든 걸 만들어야 하니까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가난하지만 성실했고, 무엇보다도 의로웠다는 사실입니다. 19절에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요셉 역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참된 옛 언약의 성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두 명의 옛 언약 시대 성도가 등장합니다. 두 사람 모두 매우 젊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당시에 결혼을 매우 어린 나이에 했기 때문에 이들도 아마 십대였을 것으로 봅니다. 놀랍게도 열두 살에도 약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아마도 십대 후반 정도였을 겁니다. 특히 상당히 성숙한 마리아의 모습을 볼 때 이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 “약혼”이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헬라어로는 “정혼하다” 이런 뜻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혼동합니다. 그냥 단순히 약혼한 것일까? 요즘 말로 연애를 시작한 정도일까? 약혼 반지를 목에 걸고 다니는 그런 정도의 관계일까? 도대체 마리아와 요셉이 어떤 상태였다는 건가?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약과 유대 랍비 전통에서는 결혼을 두 단계로 나눕니다. 히브리식 결혼에는 단계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키두신(kiddushin)이고, 다른 하나는 후파(chupah)입니다. 키두신과 후파, 이렇게 두 가지 단계입니다. 여기서 키두신이 바로 정혼이고, 마태복음 1장 18절이 말하는 약혼 단계입니다.
신명기 20장 7절을 보면 그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가정이 약속을 하거나, 두 사람이 직접 결혼을 약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법적인 효력을 가진 계약이라는 점입니다. 이 정혼 기간 동안에 약속을 깨뜨리려면, 반드시 공식적인 이혼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함께 살거나 육체적인 관계는 없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는 그런 상태입니다.
보통 이 정혼 기간은 한 1년 정도 됩니다.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서로의 정절을 확인하는 기간인 것이죠. 만일 신부가 임신을 했다면 이 기간 동안에 분명하게 드러날 겁니다. 신실하지 못했다거나 문제가 있다면, 그 사실이 드러나고 정리될 수 있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는 서로 자주 만나거나 가까이 지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계약이었기 때문이죠. 이 기간이 끝나면, 길게는 1년, 짧게는 6개월 정도 후에 후파를 진행합니다. 실제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은 보통 한 일주일 정도 걸렸습니다. 요즘도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느끼시겠지만, 당시에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일주일 동안이나 술과 음식을 대접해야 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여러분 기억하시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바로 이런 일들이 히브리식 결혼의 배경입니다. 딸을 시집보낼 때 대가를 받으려는 이유도, 손님 접대 비용을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하르(mohar)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부값이죠. 이 신부값은 사람마다, 형편에 따라 모두 다르게 책정이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양 몇 마리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닭 한마리일 수도 있습니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어떤 경우에는 거의 아무것도 내지 말고 데려가라고 할 수도 있었고, 오히려 “내가 양 몇 마리 더 얹어줄 테니 데려가라”라고 말할 정도의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그냥 농담입니다.
어쨌든 ‘모하르(mohar)’라는 ‘신부값’ 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혼할 때에 신부값을 지불했습니다. 창세기 34장을 보면, 보통 물건이나 노동의 형태로 지불했습니다. 이 모하르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에 대한 보상입니다. 딸을 시집보내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보전해 주는 역할을 했죠. 또 아내를 위한 일종의 생명 보험 역할도 했습니다.
보통의 경우에 유대인 아버지가 이 신부값을 보관하고 있다가, 만일 정혼자가 죽으면 그 재산을 생계비로 딸에게 주었습니다. 또 일종의 이혼 방지 장치 역할도 했습니다. 정혼자가 이혼을 하게 되면 그 값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그 값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않는 한 다시 회수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상속 외에는 돌려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결혼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 번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다 내주고 결국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거지가 될 테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정혼 기간은 후파, 실제 결혼식 이전의 기간입니다. 육체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기 전입니다. 이 정혼 기간은 시험, 검증의 기간입니다. 신부의 순결과 신랑 신부의 정절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도 이미 “남편”과 “아내”라는 표현을 사용할만큼 법적으로는 유효한 관계입니다. 다만 아직 육체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25절에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고, 18절에는 “동거하기 전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바로 이 정혼 기간에 성령으로 잉태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냐는 의심은 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경건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순결을 매우 가치있게 여기십니다.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저는 마리아를 보면서 순결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거룩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순결을 귀하게 여기셔서 마리아를 그렇게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누가복음 1장을 통해서 마리아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26절입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여기서 여섯째 달이라는 것은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째 달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잉태했을 때 엘리사벳은 이미 임신 6개월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났죠.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나사렛은 마리아가 살던 곳입니다. 지금도 나사렛에 마리아가 어릴 때 물을 길으러 다니던 우물이 남아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믿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27절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다시 한 번 강조되죠. 정혼 상태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놀라는 게 당연하죠.
변두리 시골, 농사를 짓는 평범한 마을에 살던 어린 처녀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대도시 예루살렘도 아닙니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것도 평범한 천사가 아니라 가브리엘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받은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전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뭐라고.’ 이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자신이 처녀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님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무엇이라 불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나사렛이라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 살던, 이름 없는 한 여인에게 이런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잉태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요셉은 몰랐습니다. 요셉에게는 큰 충격이었죠.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마음이 아주 크게 흔들렸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약혼한 사이니까요.
요셉은 마리아의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의롭게 살았는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를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잉태했다니, 마리아의 모습과 전혀 맞지 않는 그런 일이었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신명기 22장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면 어떤 벌을 받았습니까?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습니다.
신명기 22장에는 이와 관련된 여러 규정들이 나옵니다.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신명기 22장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맞이하여 그에게 들어간 후에 그를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그에게 누명을 씌워 이르되 내가 이 여자를 맞이하였더니 그와 동침할 때에 그가 처녀임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면.”
만일 사실로 드러나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21절입니다.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할지니라.” 물론 그 사이에 여러 규정이 더 있습니다. 22장은 음행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이렇게 모든 경우가 다 나옵니다. 결혼 전에 잉태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큰 충격이 클 수밖에 없죠.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의 명예를 지킬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아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잉태된 겁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비웃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자신의 명예를 지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명예를 지켜 주셨습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어떤 비난도 받지 않도록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라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태어나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래서 탄생의 방식도 다릅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리아의 부정 행위로 태어났다면, 또 요셉과의 자연적인 관계로 태어났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모든 주장은 거짓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구원도 거짓입니다. 구원이 거짓이면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동정녀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렇게 묻고 싶으시죠? 저에게 묻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물어봅니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죠. 언젠가 제가 한번 요한계시록을 가르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을 주실 것이다”라고 하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꼭 있더라고요. “무슨 이름을 주셨나요?”
저는 일반적인 출생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어떤 의사도 그 신비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동정녀 잉태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에게는 의심과 수치와 소문의 그림자가 드리울 수밖에 없죠. 인류 역사상 동정녀가 아이를 낳은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을 했다, 그러면 원인은 하나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달랐습니다. 다른 원인이 있었죠. 뭡니까?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께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창조 사역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혼돈과 공허 위에 운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동정녀 탄생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시는 것이 왜 불가능할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는 예상을 해야 했습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넘어지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사탄아, 장차 한 여인이 나올 것이다. 그 여인이 한 후손을 낳을 것이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실제로 갈보리에서 그렇게 했죠. “그러나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후손”은 보통 남자에게서 나온다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역사상 단 한 번,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했죠.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여고냐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만일 예수님께 인간 부모가 전혀 없었다면,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신 분이 아니었을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셨다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피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러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에게서 태어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셨습니다. 신성이 인간의 저주를 이겼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동정녀가 잉태했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정혼자의 인지입니다. 요셉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요셉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겁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던 요셉은 마리아를 아주 깊이 사랑했고, 정혼 기간을 지나서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이런 일이 닥친 것입니다. 이제 요셉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19절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직 정혼 기간인데도 “남편”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동정녀 탄생을 정혼자가 인지하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이 일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 일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요셉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표현은 요셉의 성품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의로웠지만 동시에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수치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을 따라 사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는 뜻입니다. 옛 언약 시대의 참된 성도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결론을 내리겠습니까? “이 상태로는 이 여인과 결혼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기준을 어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죠. 마음으로는 사랑하지만, 이 상황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따르려고 했습니다.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같은 부류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두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또 성경이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시므온처럼 여기는 겁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그런 일이 있을 때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참된 성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반응은 의로움에서 나온 것이죠. 그러나 두 번째 반응은 사랑과 배려에서 나왔습니다. “드러내지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죠.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수치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요셉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시대였다면 한 가지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의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데 좀 느슨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보다 더 약한 기준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그로 인해 율법이 본래 가지고 있던 보호하는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었죠. 보호를 못하니 많은 문제에 빠지고 만 겁니다.
이처럼 율법이 느슨해진 시대에는 요셉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공개 재판에 세워서 간음했다고 고발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마리아는 수치를 당하고, 재판을 통해서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마리아의 명예는 완전히 무너져 버립니다.
다른 방법은 조용히 해결하는 겁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두세 명의 증인 앞에 서서 신명기 24장에 나오는 것처럼 이혼 증서를 작성하는 겁니다. 사적으로 이혼 문서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재판 절차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알려질 일도 없습니다. 떠들썩할 일도 없습니다. 아무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이혼 문서에 이혼 사유를 굳이 기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이 알지 못한 채로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조용히, 비밀스럽게 처리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아니었지만 요셉이 살던 시대에는 이렇게 느슨해진 관습 속에서 이런 선택지가 허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런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 “끊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폴루오(apoluo)’인데, 신약에서 이혼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정혼을 이미 법적 결혼 상태로 보기 때문에, 관계를 끊으려면 이혼을 해야 했습니다. 요셉은 “조용히 정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망신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세워서 수치를 당하게 하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조차 쉽게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죠. 그래서 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여기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요셉은 아마 나사렛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깊이 고민했을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했습니다. 계속 씨름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잠을 자는 중에 동정녀 탄생이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동정녀 탄생이 20절에서 밝혀집니다. 요셉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그런 꿈하고는 다릅니다. 단순히 어떤 상상이나 허상이 아닙니다. 꿈이었지만 실제로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그 천사를 실제로 봤습니다.
마태복음에 자주 나오는 방식입니다. 이런 형태의 계시가 최소한 여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장, 2장, 27장, 또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도 예언적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만 나오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꿈속에서 천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셉이 겪은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꿈과는 다릅니다. 잠이 들어 꿈을 꾸기 시작했지만, 꿈을 꾸는 중에 실제로 천사를 만납니다. 그때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왜 굳이 이렇게 불렀을까요? 다윗의 계보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다윗의 자손 요셉아,”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인간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체마흐(tsemach)라고 부릅니다. ‘가지’라는 뜻인데, 한 곳에서는 “다윗의 가지”라고 부르고, 또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의 가지”라고 부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손이십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불리는지 아십니까?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러니까 요셉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21절에 더 구체적인 지시가 주어집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히브리어로는 예슈아(yeshua), 여호수아(yehoshua)인데,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해야 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제 21절을 잘 보셔야 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아, 네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로 부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2장 13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항상 “아기와 그의 어머니” 이렇게 나옵니다. 왜 “네 아들과 네 아내를 데리고 가라”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왜 항상 “아기와 그의 어머니”일까요? 요셉은 실제로 아버지의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 2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계속해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 이렇게 나옵니다. 요셉을 결코 아버지로 부르지 않습니다. 동정녀 탄생입니다.
그의 이름은 예슈아(yeshua), 여호수아(yehoshua), 곧 예수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뿐입니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 한 분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습니다.
시편 20편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고, 어떤 사람은 병거를 의지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을, 직관을, 명성을, 지위를, 기계를, 친구를, 교육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동정녀가 잉태했고, 정혼자가 인지했고, 이제 천사가 설명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로 넘어갑니다. 동정녀 탄생이 구약과 연결됩니다. 동정녀 탄생은 구약과 연결됩니다. 마치 마지막 순간에 급하게 덧붙여진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도록, 어떤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떠도는 이야기에서 따온 신화처럼 보이지 않도록 말이죠.
마태는 22절과 23절에서 해설을 덧붙입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이 잠시 멈춥니다. 더 이상 천사가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 마태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런 방식을 복음서 전체에서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에서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횟수가 50번이나 되고, 간접 인용은 76번이나 됩니다. 말하자면 마태가 사용하는 공식 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선지자의 말은 곧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그리고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바로 여기에서 동정녀 탄생이 구약과 연결됩니다. 나중에 덧붙여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어낸 전설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은, 이사야가 말한 그대로 완전하고 정확하게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사야에 어떤 단어가 쓰였는지, 왜 ‘알마(almah)’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왜 ‘베툴라(bethulah)’를 쓰지 않았는지, 정말 ‘처녀’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논쟁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사용된 이 ‘알마(almah)’라는 단어는 ‘처녀’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처녀’입니다. 비평가들이 지워버리려고 아무리 부정해도, 마태의 해석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그 단어를 ‘파르데노스(parthenos)’, 그러니까 ‘처녀’라는 의미로 분명하게 사용했습니다. 마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썼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동정녀 탄생을 피해갈 수가 있습니까? 왜 이사야 7장 14절의 ‘알마’라는 단어를 붙잡고 논쟁을 하려고 합니까? 왜 하나님의 해석은 듣지 않으려고 합니까?
이사야의 예언이 주어진 배경은 아주 분명합니다. 아하스 왕은 유다 왕국이 시리아와 이스라엘에 의해서 멸망할까 두려워했습니다. 남쪽 유다에서 북쪽의 이스라엘과 또 한쪽의 시리아를 바라보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이 내려와서 왕조의 계보를 끊어버릴까봐 염려했던 겁니다. 다윗의 왕조가 끊어질까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을 주겠다. 왕조의 계보는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계보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그 표징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역사의 긴 흐름을 바라보아라. 처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날 것이고, 그 아이가 다윗의 계보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했던 예언의 성취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윗의 왕좌는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하고, 또 영원하고, 영원히, 영원히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분명하게 드러난 진리입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번역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런 뜻입니다. 그 단어의 마지막의 “엘(El)”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엘 샤다이(El Shaddai), 엘 엘리온(El Elyon), 엘 마코데쉬킴(El Maqoddeshkim), 이 모든 이름에 “엘”이 들어가죠. 그리고 “임마누(Immanu)”는 “우리와 함께”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런 뜻이 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실제로 임마누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잖아요?” 맞습니다. 이름이라기보다는 누구이신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에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호칭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름이 많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니까 동정녀 탄생을 천사가 설명한 후에 구약과 연결되었습니다.
다섯 번째입니다. 동정녀 탄생의 성취입니다. 24절입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자는 동안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요셉에게 얼마나 특별한 시간이었겠습니까?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단순히 마리아와의 결혼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함께 맡는 일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요셉은 분명 선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온 우주의 하나님께서 한 가정에 자신의 독생자를 맡기시는데,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상상이 되십니까? 오히려 요셉에 대해 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 이후로는 요셉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보시고, 마리아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떠나셔야 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돌보아 달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아마 이미 요셉이 세상을 떠난 뒤였을 겁니다.
요셉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 없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독생자를 맡기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분명 따뜻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완전하신 아들을 양육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들을 두어야 하니까요.
천국에 가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렇게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와서 결혼식을 치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고, 그 후에는 천사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동정녀 탄생은 이렇게 성취되었습니다. 혼인은 이루어졌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요셉은 마리아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다른 자녀가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다른 자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예수님의 형제들이 등장하죠.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25절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가 그녀를 알지 아니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다가 첫 아들을 낳았다” 이런 뜻으로 나옵니다. 첫 아들을 낳은 이후에는 더 이상 그 상태를 유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이후에는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 이후로 여러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탄생은 예수님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만일 오늘 병원에 가서 인간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가 있다고 말하면, 그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신자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 아이가 예수님처럼 산다면, 믿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시작될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두고 혼외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가 끝날 때에는 제자들이 시신을 훔친 후 감추고는 부활을 꾸며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 비방에 대해서 반박하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마지막 비방에 대해서 반박합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과 마지막 사이 전체를 통해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수많은 비방과 거짓을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병든 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고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귀신 들린 자들과 함께 거하시며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고, 근심에 짓눌린 자들을 돌보시며 그 짐에서 풀어주시기 위해 오셨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기 위해 오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기 위해 오셨고, 장애가 있는 자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자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무한히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셨고, 인간 본성을 입으셨으며, 죄로 오염된 이 세상 가운데 들어오셨지만 결코 그 죄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셨고, 슬픔을 당하셨으며, 고난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시려고 하늘로 올라가셨고, 지금은 우리 마음에 거하시도록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오셔서 우리를 데려가셔서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탄생에 담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시고, 능력의 일을 이루시고, 초자연적인 일을 이루실 때마다 마리아와 요셉과 같은 겸손하고 신실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동정녀 탄생의 교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평범한 두 사람을 사용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본보기로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오늘날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의롭고 유용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들을 택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저희를 사용하시니 얼마나 놀라운지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 귀하신 주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앎으로써 겸손하고 순종하며 신뢰하고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다시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때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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