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장입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부터 23절까지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큰 은혜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앞부분을 잠시 되짚어 보겠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의 중심 주제는 오실 왕,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를 다스리실 왕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강조점 하나를 고른다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특별한 분이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 예언의 핵심 주제입니다. 구약은 반복해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약속합니다. 왕에 합당한 성품을 가지신 분, 지혜를 가지신 분, 창세기 3장 15절이 말하는 것처럼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또한 인간이 잃어버린 통치권을 되찾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영원히 세우실 분이십니다. 바로 이 특별한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왕에 대한 약속을 구약 선지자들이 전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체적인 예언이 약 332개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삶의 모든 측면이 구약의 예언 속에 담겨 있습니다. 물론 선지자들은 베드로전서 1장이 말하는 것처럼, 예언을 기록하면서도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9절 이하에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들은 구원하실 왕을 예언하면서도 자신들이 기록한 예언을 스스로 깊이 살피면서 자기가 한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하게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11절입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선지자들은 예언을 받았지만, 그 예언을 깊이 살피면서 이 놀라운 예언들을 누가, 그리고 언제 성취할지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은 우리에게 왕, 인간인 왕, 하나님이신 왕, 여호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실 왕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리고 신약이 놀라운 이유는, 특별히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놀라운 이유는, 이 복음서들이 수많은 예언의 답을 하나로 모아 마치 하나님의 거대한 조명처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언을 모두 성취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모든 거짓 메시아들은 예언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분에서 선지자들의 말에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이죠.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은 첫 장 첫 절부터 왕의 계보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가면 만왕의 왕께서 영광 가운데 다스리시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마태복음의 시작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까지, 신약 전체는 왕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신 한 분, 곧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에서 “나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basileia)입니다. 신약에서 144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려 144번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나옵니다. 또 “왕”이라는 단어는 바실류스(basileus)인데, 어근이 같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15번 사용되고, 그 가운데 적어도 35번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가리킵니다.
동사형인 바실류오(basileuō)는 “다스리다” 이런 뜻인데,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열 번이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은 적어도 189번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신약 전체에서 매우 크고도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신약이 분명하게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마태복음 1장과 2장이 기록된 목적도 바로 예수님의 “이를 위하여 내가 났다”라는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이라면 예수님의 탄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참으로 왕이시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히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 이미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주를 뛰어넘게 하신 동정녀 탄생에서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알아보고 경배했던 바사의 왕을 세우는 자들, 동방 박사들의 경배 속에서도 분명히 했습니다. 또 헤롯의 적대감 속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왕인 헤롯이 다른 왕 때문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헤롯은 뒤틀린 방식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인정한 셈입니다. 자신의 왕좌를 빼앗길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마태복음의 첫 두 장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바로 예언의 말씀입니다. 구약으로부터 네 가지 예언을 끌어와서 그 예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왕은 예언의 성취자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네 가지 예언입니다. 과거에 주어진 네 가지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이 네 가지 예언이 장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애굽, 라마, 나사렛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타나는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마태가 이 네 가지 예언을 함께 엮어가는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네 가지를 연구할 때마다 늘 놀랍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한 사람의 탄생이 베들레헴, 애굽, 라마, 나사렛과 모두 연결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그 사람이 태어난 장소로 끝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탄생과 관련해서 네 장소가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적어도 그 탄생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이 네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해 버립니다. 마태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 네 가지 예언을 성취할 수 있는 분이라면 왕의 면류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다.” 예언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첫 번째 예언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예언은 마태복음 2장 4절부터 6절에 나오는 베들레헴 탄생입니다. 2장 4절을 보면 헤롯이 이렇게 묻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죠.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그리고 이어서 마태는 성령님의 감동 아래 선지자의 말에 자신의 표현을 덧붙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첫 번째 예언은 미가서 5장 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이죠.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첫 번째 표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언은 13절부터 15절에 나옵니다. “애굽으로의 피신”입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애굽으로의 피신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떠난 뒤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13절부터 나오죠.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호세아 11장 1절을 인용한 겁니다. “...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이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요소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애굽에서 나오셨습니다. 호세아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 이스라엘과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아름다운 예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세 번째 예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살펴볼 부분입니다. 라마에서의 학살입니다. 라마에서의 학살입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애굽으로의 피신과 탈출, 라마에서의 학살입니다. 16절부터 18절입니다. 예언과 연결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베들레헴의 마구간, 언덕에 있던 동굴에서 태어나셨을 겁니다. 동방 박사들이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이미 생후 몇 개월이 지난 아기로 자라 계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애굽으로 피신해서 거기서 몇 달을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천사가 돌아가도 된다고 알려주었죠. 아마 헤롯이 죽은 뒤에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사건 하나가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 가족이 돌아오기 전에, 장면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옮겨집니다. 거기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16절입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여기서 “속은 줄 알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엠파이조(empaizō)’입니다. 일반적으로 ‘조롱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15장 10절 칠십인역에서는 “속이다”, “속임수를 쓰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단순히 조롱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속임수를 써서 조롱한다, 이런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동방박사들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생각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다른 길로 돌아감으로써 자신을 속여서 조롱했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기억하시겠지만, 앞선 이야기에서 헤롯은 7절에서 동방박사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언제 태어나셨는지, 곧 왕이 언제 태어나셨는지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참된 왕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기의 나이를 알아내려고 했던 거죠. 그래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헤롯은 그 정보를 알아낸 뒤에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모든 아이들을 죽입니다. 왜냐하면 동방 박사들이 알려준 시간 범위에 해당하기 때문이죠.
이제 16절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계속 함께하셨다면 아시겠지만, 헤롯은 정말 끔찍하고 잔인하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한 사람입니다. 에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통치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시면 헤롯은 동방 박사들에게 속았다는 생각 때문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여기 “심히 노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투모오(thumoō)’입니다. 매우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격렬한 분노”를 뜻합니다. 정말 폭발적인 분노에 빠졌다는 겁니다. 완전히 격분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가 기억하기로 이 단어가 수동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헤롯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면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분노가 가득차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분노에 휩싸여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헤롯의 분노는 결국 헤롯의 판단력까지 완전히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었다면 이렇게 생각을 했어야 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돌아오지 않을 만큼 지혜로웠다면, 아기의 가족에게도 경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족도 이미 도망쳤겠지.”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판단했을 것입니다. “나를 속였다면 그 가족도 당연히 보호했을 거야. 나를 조롱했다면 그 일까지 다 처리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분노가 헤롯의 눈을 가려 버렸습니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지역의 모든 사내아이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군인들을 보내서 모든 아이를 죽이게 한 겁니다. 아마 여러분도 상상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군인들이 집집마다 들이닥쳐서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도망치는 어머니들을 뒤쫓는 그런 모습 말이죠. 군인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아기를 거칠게 빼앗아서 칼로 심장을 찔러 죽입니다. 헤롯의 분노 때문에 바로 그런 일이 베들레헴에서 벌어졌습니다.
여기 보시면 단지 베들레헴만이 아니라 “그 모든 지경 안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변 지역 전체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또 “두 살부터 그 아래로”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헤롯이 이 아이가 정말 왕인지 아닌지를 전혀 따져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을 했더라면 이 아이가 진짜 왕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헤롯이 속으로 “이 아이는 진짜 왕이다. 그러니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은 이스라엘의 참된 왕, 참된 메시아 왕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왜 두 살까지 범위를 넓혔는지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많아야 한 6개월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두 살까지 나이를 확대했을까요? 어떤 주석가들은 당시에는 첫 돌이 지난 아이를 이미 두 살로 계산했다고 말합니다. 13개월이 되면 두 살로 여겼다는 겁니다. 두 번째 해를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헤롯이 그 정도 범위까지를 포함시킨 것이라는 설명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두 살 이하를 뜻한다는 것이죠.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계산을 잘못했을 가능성까지 생각했고, 혹은 처음부터 자신을 속이기 위해 시간을 다르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거나 가까운 범위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죽이려고 두 살까지 범위를 넓혔다고 설명합니다. 어쨌든 헤롯은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면 자신이 찾는 그 아이도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악한 일인지 굳이 제가 길게 더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헤롯이 아마 이 아이가 그리스도이고, 메시아이고, 왕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악하고 비열하고 끔찍한 범죄입니까? 이 악한 사건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왕을 거절하면서 시작된 비극의 출발점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마태는 메시아의 삶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절했고, 그 거절이 죽음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불신앙, 악함, 재앙, 비극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베들레헴의 학살이 엄청난 비극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주후 70년에 디도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서 11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재앙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두 사건조차도 장차 대환난 때 일어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헤롯보다 훨씬 더 악한 거짓 메시아가 등장해서 이스라엘의 피를 훨씬 더 많이 흘리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작에 불과합니다.
왜 이런 사건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예언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었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부분을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끝까지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는 이 사건이 예언의 성취를 위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복음서 가운데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마태복음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고, 그분이 왕이심을 확증하려는 마태의 주제와는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면 이 예언은 어떤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일까요? 예레미야 31장 15절을 보겠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5절입니다. 이미 앞서 두 예언을 통해서 신약 기자들이 구약을 사용하는 방식이 때때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는 사실을 살펴봤죠.
이런 방식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이 예언은 예레미야 31장 15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자체만 보면 겉으로는 예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언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잘 들으십시오, 이 말씀 자체에 예언의 형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마태가 예언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언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어떤 상황 속에서 주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사역은 아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었을 겁니다. 왜냐고요? 죽어 가는 민족을 향해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마치 마지막 노래와도 같았습니다. 울면서 예언했습니다. 아무도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포로 생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예레미야보다 더 큰 분이 오셔서 같은 민족을 향해 다시 동일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울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은 예레미야가 울었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을 향해 가는 백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도 멸망을 향해 가는 백성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자, 이제 이 모든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집중해서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레미야의 예언 속에는 위대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믿기 어려울 만큼 큰 소망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까지의 네 장은 예레미야의 중심부에 놓여 있습니다. 소망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멸망을 선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성은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 30장부터 33장까지의 위로와 소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목해 보십시오. 소망의 한가운데에, 위로의 중심에, 기쁨의 중심에 자녀로 인한 눈물과 애통과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눈물과 애통함과 통곡이 있지만,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30장부터 33장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한 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6절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예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슬픈 날이다.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 네가 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울지 말아라. 내가 다시 구속하여 돌아오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70년이 지난 후에, 70년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마태가 이 예언을 사용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이 가득합니다. 라헬이 자녀들 때문에 애곡했습니다. 통곡하고 애통했습니다.
메시아를 거부한 나라 위에 비극과 멸망과 심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는 소망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도 남은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이 말하는 것처럼, 언젠가 하나님은 그 민족 전체를 다시 모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스가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여기에는 평행 구조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커다란 평행 구조입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멸망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울고만 있지 말아라. 결국 상황은 뒤바뀔 것이다. 결국 구원이 올 것이다.” 그리스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도 통곡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거부한 결과로 심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 울고만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모든 것도 뒤바뀌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행 구조입니다.
포로 생활이 시작되고 백성이 흩어졌을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헤롯의 증오와 복수심에 가득 찬 거부의 표시였습니다. 동시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무관심한 거부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 거부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를 것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어머니들의 마음속에도 소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의 어머니들의 마음속에도 소망이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도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개념이 라마와 라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제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서 함께 생각을 해 봅시다. 라마와 라헬입니다. 정말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도대체 라마가 왜 등장하는 걸까요? 그리고 라헬은 또 왜 등장하는 걸까요?
먼저 라마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사실 큰 도시는 아니고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잘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왕국의 경계선에 바로 라마가 있습니다. 라마는 북왕국과 남왕국 사이에 있는 경계 마을입니다. 열왕기상 15장 17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북쪽 약 8킬로미터 지점입니다.
라마는 정복 포로들을 먼 나라로 끌고 가기 위해 집결시켰던 장소입니다. 침략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갈 때에 집결시켰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위치 때문에 라마는 북왕국과 남왕국, 두 왕국 전체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라마는 이스라엘이 하나로 모이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라마는 남과 북 모두에 걸쳐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라마는 언제나 애곡하는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라마에서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라마는 애곡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레미야는 라헬에 대해 말했을까요? 예레미야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겁니다. 꼭 라헬이 실제로 라마에 가서 울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라헬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라마는 이스라엘의 아들과 딸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일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자기 자녀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요셉을 낳았습니다.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아버지이죠. 이 두 지파는 북왕국을 대표합니다. 사실 북왕국은 종종 “에브라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개념으로 본다면 북왕국은 에브라임으로 대표되는데,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고, 요셉은 라헬의 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라헬의 태에서 북왕국이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라헬이 북왕국을 낳은 것입니다.
둘째로 라헬은 베냐민도 낳았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은 남쪽의 남왕국과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라헬은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31장에서 마치 라헬이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라헬이 라마에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북왕국은 포로가 되어 앗수르로 끌려가 버립니다. 남왕국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 버립니다.
북왕국과 남왕국, 두 왕국 모두가 라헬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은 자기 가족이 모두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라헬은 하나님 백성의 역사 속에서 자녀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는 모든 어머니들을 상징합니다. 라헬은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도 함께 울기 시작합니다. 비통하게 통곡합니다.
처음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남왕국 유다와 베냐민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창세기 30장 1절에서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라고 말했던 그 사람이 바로 라헬입니다. 모든 어머니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간절히 자녀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라헬입니다. 그런데 이제 라헬은 마치 두 나라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쪽에도 자기 씨에서 나온 나라가 있고, 저쪽에도 자기 씨에서 나온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나라가 각각 다른 나라의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본 것입니다. 라헬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라헬이 라마에서 울고 있는 상징적인 모습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녀들의 포로 생활 때문에 울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마치 하나님이 자기 백성, 곧 라헬의 자녀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떠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라헬이 우는 장면을 보여주자마자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예레미야 33장에 가면 예레미야는 의로운 가지, 그러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분이십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남은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고, 포로 생활이 끝나고 회복될 것입니다.
자, 이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마태가 등장합니다. 마태는 성령님께서 이 비유와 이 그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를 드러내려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태는 베들레헴의 아이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마치 “라헬이 다시 울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레미야가 사용했던 이 놀라운 비유를 그대로 가져옵니다. 라헬이 자기 자녀들 때문에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라헬입니까? 라헬은 이스라엘의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헬의 무덤은 베들레헴 성 밖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베들레헴 택시 기사들이 알려줄 정도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어떤 성경학자들은 “라마”라는 단어가 “높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높은 지대는 어디든지 라마라고 불렀습니다. 베들레헴도 지대가 높았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당시 베들레헴도 라마라고 불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는 “높은 곳”이라는 뜻의 라마가 아주 여러 곳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마태가 사용하는 “라마에서 우는 라헬”이라는 표현이 라헬의 무덤이 베들레헴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또 베들레헴이 높은 지대, 곧 라마로 불렸다는 점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하나의 상징적 그림으로 사용했던 장면이, 결국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에 다시 일어나게 될 일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다시 웁니다. 이번에는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자기 백성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울지 않습니다. 헤롯 때문입니다. 바로 헤롯 때문입니다. 타국의 정치 권력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위로가 따라옵니다. 왕이 쫓겨나 있고 학살이 벌어지고 있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왕의 복음이 선포될 것이고, 남은 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헬은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울음을 그쳐도 됩니다. 헤롯에게 아이를 잃은 베들레헴 어머니들의 슬픔은 분명 다가오는 심판의 징조였습니다.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끔찍한 영적 포로 상태를 보여주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남은 자들에게 축복과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그 작은 아기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베들레헴의 그 귀한 아기들은 이 세상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였습니다. 첫 희생자입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 아기들은 죽는 순간 즉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하나님은 아기들을 품에 안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고 그 어머니들도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애굽으로 피신해 계신 예수님이 다시 돌아오셔서, 아기들과 다시 만나는 구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선지자는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의 예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예언들은 신약이 풀어서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도 바울이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무엇이라고 불립니까? “비밀”입니다. 감춰져 있습니다. 성령님의 놀랍고도 동일한 영감 아래 있는 신약의 기자들이 그 비밀을 열어 보여주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씀의 의미를 압니다. 사실 예레미야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예레미야도 그 의미를 들여다보고 싶었을 겁니다. 스스로 그 뜻을 연구하고 깨닫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태를 보내셔서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말씀을 해석해 주시기 전까지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말씀의 뜻을 놀랍도록 풍성하게 밝히면서 그리스도께 적용했습니다.
왕은 미가가 예언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호세아가 말한 대로 애굽으로 피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라헬,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을 통해서 라마에서 통곡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마태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오실 왕의 모습을 놀랍게 제시하면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바로 나사렛입니다.
19절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참고로 말씀드리면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 고대사(Antiquities)>에서 헤롯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자가 궤양으로 썩어 들어갔고, 장기들은 부패하여 구더기로 가득했으며, 끊임없는 경련과 악취에 시달렸고, 어떤 의사도, 어떤 온천욕도 그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9절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천사가 요셉에게 기다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13절에서 천사는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애굽에 머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롯이 죽은 것 같습니다. 이제 헤롯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이제 나아갈 때가 됐습니다. 천사가 다시 나타나서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다음 장소가 바로 나사렛이라고 말합니다.
20절입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그리고 제가 매번 말씀드리지만, 아기와 마리아가 함께 언급될 때마다 항상 아기가 먼저 나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아마 헤롯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 일에 가담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역시 제거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복수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다.”
21절입니다.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특정 장소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어딘가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애굽에서 베들레헴 쪽으로 남쪽 길을 따라서 올라왔을 겁니다. 어쩌면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요셉과 마리아는 이 아기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기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구주 예수님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이름을 받은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기가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직접 알려주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마 예루살렘이 아기가 머물러야 할 장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왕으로 태어나신 베들레헴 가까이에 머무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아이는 왕이니 우리가 그 주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아주 빠르게 바뀌고 맙니다.
22절입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요셉은 유대 남쪽 지역,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근처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 판단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왜 두려워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헤롯이 살아 있을 때는 거의 모든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이 죽자 왕국은 여러 지역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라는 사람이 북쪽 갈릴리 지역을 차지했고, 아켈라오(Archelaus)가 유대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두 사람 모두 다 헤롯의 아들입니다. 물론 죽임을 당하지 않은 아들들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헤롯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인물은 아닙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의 왕이라기보다는 총독이나 지방 영주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북쪽 갈릴리 지역에는 안티파스가 있었고, 남쪽에는 아켈라오가 있었습니다.
헤롯이 아직 살아 있을 때부터 아켈라오는 이미 악명이 높았습니다. 헤롯은 거대한 금 독수리를 만들어서 유대 성전 문 위에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왜냐고요? 독수리는 로마 사람들이 좋아하던 상징이었습니다. 아주 거대한 황금 독수리를 성전 문 위에 세우려고 했던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죠. 큰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가증한 우상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장 4절을 어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신을 두는 행위라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이 독수리를 제우스, 주피터와 연결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독수리는 로마 신들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결국 성전 위에 우상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때 유다와 맛디아라는 유명한 유대인 교사 두 명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으니까요.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한 교사였는데, 자기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이것을 그냥 두고 볼 것이냐? 정말 이것을 허락할 것이냐? 저 사람이 성전에 독수리를 세우게 내버려 둘거야?” 그렇게 학생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그런 일에 쉽게 뜨거워지곤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두를 들끓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가 혁명을 떠올릴 때면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애비 호프먼(Abbie Hoffman)의 <혁명을 위한 혁명(Revolution for the Hell of It)>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학생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희는 혁명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혹시 좋은 명분이 있을까요?” 학생들은 때때로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은 실제로 나름의 명분이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과 종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학생들을 선동해서 성전 지붕으로 올라가서 도끼로 그 독수리를 찍어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결국 모두 체포되어서 헤롯 앞으로 끌려갔죠. 헤롯은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리고로 보내서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학생들은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교사는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헤롯이 죽은 뒤, 바로 다음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두 교사가 죽임을 당한 일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돌아오시기 직전입니다. 이 위대한 두 교사의 죽음 때문에 엄청난 폭동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권력을 잡고 있던 아켈라오는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무려 3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합니다. 줄을 세워 놓고 죽였습니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온 순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종교적 열기가 극도로 높아져 있던 시점에 군대를 동원해서 피를 흘리고 3천 명을 학살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켈라오를 증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너무나 악한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구약의 악한 왕들처럼 자기 아버지보다 더 악했습니다. 결국 로마 정부조차 그를 폐위시켜 버릴 정도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로마가 그 자리를 대신 맡긴 사람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요셉은 유대로 가는 것을 망설였던 겁니다. 그리고 요셉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22절입니다.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천사가 “갈릴리로 가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입니다. 여기 그 이유가 나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싼 네 번째 예언의 요소를 만납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렛은 원래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2장 4절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라는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제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라는 말씀은 사실 구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여기서 “선지자”는 복수형입니다. “선지자들”이 말한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구약에서 이 말을 한 선지자들을 한번 찾아 보십시오. 없을 겁니다. 구약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선지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구약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 11장 1절과 연결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가지”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네체르(netser)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네체르(netser)와 나사렛(Nazareth)을 연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한 연결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원으로도 좋은 연결이 아닙니다. 게다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여기서는 “선지자들”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이사야 11장 1절 하나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런 연결은 너무 억지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선지자들”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설명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선지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다만 구약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태를 통해서 비로소 기록된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 선지자들이 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기록되지 않은 말들도 있었다는 뜻입니까?” 혹시 여러분이 조금 놀라실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실제로 구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말들이 전해진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유다서 14절을 보십시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에녹이 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약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에녹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압니까? 유다가 그렇다고 기록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떻게 알고 이것을 기록했을까요? 바로 성령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 기록했기 때문에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라고 말한 걸까요? 선지자들입니다. 다만 이전에는 기록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태복음에 처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름다운 점이 있습니다. 마태는 설명을 전혀 덧붙이지 않습니다. 그냥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라고만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미 메시아에 대해서 선지자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상식처럼 알고 있었다는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널리 알려진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탄생을 둘러싼 예언을 보십시오.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애굽으로의 피신, 라마에서의 학살, 그리고 마지막,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나사렛은 멸시받던 동네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 “나사렛인”, 이런 표현 자체가 멸시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에이, 저 나사렛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면 조롱하는 겁니다. 실제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그런 식으로 말했죠. 일종의 비아냥이고, 조롱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여기서도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은 멸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바로 이 예언이 주어진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은 반복해서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을 것이다. 멸시를 받을 것이다. 멸시를 받을 것이다. 거절당할 것이다. 미움을 받을 것이다.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다.
시편 22편이 그렇게 말합니다. 시편 69편도 그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49장도 그렇습니다. 이사야 53장도 그렇습니다. 다니엘 9장 26절도 그렇습니다. 탈무드, 유대 랍비 문헌들은 예수님을 “예슈 하노츠리(Yeshu Ha-Notzri)” 이렇게 부릅니다. “그 나사렛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 사람” 이렇게는 절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일부러 “나사렛 사람” 이렇게 부릅니다. 왜냐고요? 멸시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부 성 제롬(Jerome)은 회당의 기도문을 기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저주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나사렛 사람들은 생명책에서 지우시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옵소서.” 만일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자라셨다면, 만약 예루살렘에서 성장하셨다면, 그런 방식으로 멸시받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멸시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 멸시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드시 나사렛이어야 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게 만들었고,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하셨던 치욕스런 호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받으셨고, 거절당하셨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으로 말이죠.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을 드러내는 모든 장소마다 마태는 하나의 걸작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가는 왕이 베들레헴에서 나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호세아는 왕이 애굽을 거쳐 나오실 것이라고 했죠. 예수님이 애굽을 거쳐 나오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옛 라마에서 라헬이 애곡하는 것처럼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의 라마에서, 라헬의 무덤 곁에서, 어머니들이 자기 아기들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옛 선지자들은 그가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점마다 예수님은 자신의 왕 되심을 확증하는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분이 바로 왕이시다.” 계보를 통해서도, 탄생을 통해서도, 경배를 통해서도, 미움과 시기의 반응을 통해서도, 그리고 예언의 성취를 통해서도, 예수님은 왕이시다. 예수님은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의 위엄은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화려하게 덧칠된 통치도 아닙니다. 잠시 빛났다 사라지는 혜성 같은 영광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다스리시고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군대의 병력 때문도 아니고, 병사의 숫자 때문도 아니고, 세상 왕국의 화려함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머리 위의 면류관 위에 또 다른 면류관을 올려드리는 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의 모든 작은 왕들은 왔다가 사라졌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세 가지 반응을 봅니다. 모든 것을 무관심하게 외면했던 사람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입니다. 분노하고 미워하며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롯과 같은 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배했던 지혜로운 사람들, 동방박사들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태가 오래 전에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도 압니다. 또 오랜 역사의 세월 속에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미워하지도 말고, 무관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시 한번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고 경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놀라우시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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