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오늘부터는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물론 전부 다 살펴보려면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겁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전체에 걸쳐 나옵니다. 저는 산상수훈이 예수님께서 한 자리에서 한번에 전하신 한 편의 설교라고 믿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안에 담긴 진리들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내용을 한 편의 큰 설교로 묶어서 보면, 그 안에 놀라운 힘과 능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혁명적인 진리들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살펴볼 겁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폭탄처럼 터진, 세상을 뒤흔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이 놀라운 본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앞으로 몇 달 동안 계속 이 말씀을 살펴볼 겁니다. 그 전에 가장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첫번째 설교의 제목을 “행복이란…” 이렇게 정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행복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자신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행복을 주십니다. 행복은 예수님 사역의 본질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번째 설교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처음으로 등장하는 바로 이 산상수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이라는 주제로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1절 이하를 보면 ‘복이 있다’는 말이 아홉 번 반복됩니다. 이 단어는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행복하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가 행복할 것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복이 있다’는 말이 아홉 번이나 반복됩니다.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행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 결과가 12절에 나옵니다. 이 행복 선언은 결국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행복으로 채우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산상수훈 설교의 서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세상의 상황이나 우연에 따라 변하는 그런 행복이 아닙니다. 차차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추구하신 목표가 ‘참된 행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좋은 설교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예수님도 서두에서 먼저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서두에는 산상수훈 전체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복, 참된 행복, 참된 기쁨, 참된 즐거움,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의 상급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예수님은 그러한 행복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삶의 방식이 이런 행복을 만들어 내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바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설교,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를 이해하기 전에 기본을 먼저 붙잡아야 합니다.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먼저 기초를 다지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설교보다는 가르침에 가까운 방식으로 접근하겠지만, 이 기본을 확실히 이해해야 나머지 내용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의 배경을 조금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당시 이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의 맥락 안에서 이 부분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전체적인 그림과 이 부분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는 성경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의 어디쯤에 와 있는가, 하나님의 계시의 흐름 속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람에게 드러내시는 계획 가운데 이 시점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입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자, 무슨 뜻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메시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말씀은 말라기 4장 6절입니다. 구약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참 흥미롭습니다. 구약은 저주로 끝납니다. 그러나 신약은 복으로 시작합니다. 얼마나 극적인 변화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말라기의 마지막 말은 “저주”였습니다. “저주.” 저주가 마지막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말씀은 “복이 있나니.” 복입니다. 복입니다. 저주로 끝나고 복으로 시작합니다. 구약은 율법, 시내산, 천둥과 번개, 심판, 저주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시온, 은혜, 평안, 복입니다. 얼마나 극적인 변화입니까.

이 “복이 있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 ‘마카리오스(makarios)’는 사실 그리스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그리스 정교회의 마카리오스 주교, 기억하실 겁니다. ‘마카리오스’는 기본적으로 ‘행복한’, ‘기쁜,’ 이런 뜻을 가진 형용사입니다. 이 단어에 담긴 메시지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조금 더 확장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어근은 ‘마카르(makar)’인데요, ‘참된 행복’, 곧 ‘진정한 기쁨’ 이런 뜻입니다. 세상의 조건이나 상황이 좋아서 느끼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본질적인 참된 행복을 말합니다.

호메로스(Homer)와 헤시오도스(Hesiod)는 그리스 신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들은 그리스 신들이 스스로 복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인간 세계, 즉 가난, 연약함, 죽음에 속한 세상과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어, 그러니까 헬라어 ‘마카르’(makar)와 ‘마카리오스’(makarios)는 행복, 기쁨, 만족, 그리고 복이라는 뜻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외부 환경에 의해 생겨나거나 바뀌지 않는 내적인 복, 내적인 행복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복이 있다”는 말의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즉,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평안, 내적인 기쁨, 내적인 행복, 내적인 즐거움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자녀들의 행복한 상태, 평안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 “복이 있다”라는 단어는 ‘성품’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사람의 존재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부분, 그러니까 성품을 다루는 단어입니다. 성품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묘사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는 “Blessed be God,” 그러니까 직역하면 “하나님은 복되시다”, 의역하면 “하나님을 찬송하라”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시편 68편 35절입니다. “...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시편 72편 18절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시편 119편 12절은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1절은 “복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복이 어떤 의미를 가지든 간에 하나님은 복되십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복이 있다’, ‘복되다’라는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복인 분이십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덧붙이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도 사용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 그러므로 이 ‘복됨’은 하나님의 성품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이 복됨이 하나님께 참되고 그리스도께도 참되다면, 잘 들으십시오. 이 복됨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복됨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이 진리를 여기에 적용하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그 동일한 기쁨, 동일한 내적 평안, 동일한 깊은 행복을 우리도 누릴 수 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결국 ‘마카리오스’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오직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때에만 그 성품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은,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행복과 만족, 그 기쁨과 복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진리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순간, 복된 삶이 열립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행복이나 복됨은 성경적 맥락 안에 있어야 합니다.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피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생겨나는 내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옛 언약이 저주로 끝났다면, 새 언약은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이 믿는 자 안에 거함으로써 하나님께만 속한 복된 상태를 누릴 수 있는 상태로 끝납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복된 기쁨을 우리도 알 수 있다는 사실,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그런 만족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은 아담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이야기가 곧 구약의 이야기입니다. 다소 슬픈 이야기입니다. 최초의 왕은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초의 왕 아담은 타락했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구약은 저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새로운 왕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이 신약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유는 바로 새로운 왕을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왕이 등장합니다. 마지막 아담, 두번째 아담, 첫번째 아담보다 크신 예수님은 결코 타락하지 않는 왕이십니다. 첫번째 왕은 타락해서 저주를 남겼지만, 두번째 왕은 다스리시며 복을 남기십니다. 한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첫번째 아담은 아름다운 동산에서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위험한 광야 시험에서 승리했다. 첫번째 아담은 강도가 되어 낙원에서 쫓겨났지만, 마지막 아담은 십자가 위에서 강도를 향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첫번째 아담의 족보는 저주로 끝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시는 저주가 없으리라”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요한계시록에 그렇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약에서 인간의 비참함을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인간의 복됨을 드러내기 위해 생명을 주셨습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곧바로 우리에게 새로운 왕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는 인류 역사에 새로운 현실이 펼쳐졌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새로운 왕이 오셨습니다. 아담의 끔찍한 저주를 뒤집을 수 있는 분이 오셨습니다.

이제 신약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제시되는 왕의 모습을 마주합니다. 우리는 이미 왕의 족보를 살펴보았고, 왕의 탄생을 살펴보았고, 왕께 드려진 경배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왕에 대한 예언적 기대를 살펴보았고, 왕의 선포자 세례 요한을 살펴보았고, 왕의 공적인 인정과 시험에서의 승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왕의 사역까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왕의 설교, 곧 왕의 선언으로 나아갑니다. 산상수훈은 왕이 입을 열어 말씀하신 위대한 선언입니다. 저주가 아닌 복을 구하는 자들에게 복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설교가 선포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왕, 그리고 새로운 메시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이 있다’는 메시지를 살펴보면, 그 내용이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나라를 보여줍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보여주는 행복은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박해를 받는 자, 모욕을 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그런 행복이라면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행복이 아니라 고통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행복이 고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행복이 고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앞으로 계속 살펴볼 것입니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의 열쇠입니다.

“잠깐만요, 고통이 행복의 열쇠라니요?” 네, 맞습니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한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인생이라는 큰 진열장 안으로 몰래 들어가 모든 가격표를 바꿔놓으신 분과 같다.”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행복이 나온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요?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 뭐냐고? 행복은 말이야, 책도 많이 있잖아. 행복은 뭐냐면, 남을 밀어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쟁취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야.” 세상은 이게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이란 강한 자의 것이다. 행복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행복은 손에 닿는 만큼 움켜쥐는 것이다. 이런 게 행복이다. 행복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다. 부자가 되어야 행복하고, 귀족이 되어야 행복하고, 유명한 자가 되어야 행복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하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의 말씀은 그런 세상의 정의와 전혀 다릅니다. 마태복음이 이렇게 왕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세상의 가치관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뿐만 아니라 처음 이 말씀을 읽었을 유대인들의 생각까지도 뒤흔들었습니다.

심지어 1세기 로마 철학자이자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이성적인 존재에게 좋은 것을, 이성적인 인간에게 좋다고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네카의 말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외적인 것으로 인간의 공허한 영혼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압니다. 이성적인 필요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비이성으로 이성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행복의 나무는 저주받은 땅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행복의 나무는 저주받은 땅에서는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죠. 솔로몬을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사람이 바로 솔로몬일 겁니다. 솔로몬은 왕족이었습니다. 솔로몬의 혈통은 메시아가 오실 다윗의 왕가에서 이어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가문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고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솔로몬의 궁전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재산을 소유했습니다. 보물이 너무 많아서 구약성경은 은이 돌처럼 흔했다고 기록합니다. 또 날마다 화려한 음식을 즐겼고 마구간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웅장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북부 메기도(Megiddo)에 있는 솔로몬의 마구간에 가본 적이 있는데, 정말 놀라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들이 수천 마리나 있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건물도 있었고, 수많은 종들도, 또 포도원, 연못, 정원도 있었습니다. 여자요? 수백 명이었습니다. 지혜는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완벽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모든 것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사람이었죠. 그러나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의 뜻은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신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잘 들으십시오. 세상 것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면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저주받은 땅에는 행복 나무가 자라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없습니다. 물질은 영혼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주 단순한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은 영혼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필요는 물질로 채울 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혼 생활이 너무 힘들면 새 차를 사세요. 아내와 심하게 다퉜다면 새 양복을 사세요. 기분이 좀 나아질 겁니다’ 라고 하지만 영적인 필요를 물질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고플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밥이 먹고 싶을 뿐이죠. 사막에서 갈증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때 필요한 건 물입니다. 육체의 필요는 영적인 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영적인 필요를 육체적인 것으로 채우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폭풍 속에서 마음을 잠잠하게 하지 못하는 것들은 결코 어떤 복도 줄 수 없습니다. 상처 입은 마음에 기름을 부을 수는 없습니다. 사울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울이 깊이 괴로워할 때, 왕관에 박힌 그 어떤 보석도 사울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니엘에 나오는 벨사살 왕을 떠올려 보십시오. 술을 마시면서 쾌락에 빠져서 역사상 보기 드문 대연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5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의 전 성소에서 탈취한 금 그릇으로 포도주를 마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잔뜩 술을 마셔서 취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금잔을 들었는데, 그 순간, 사람의 손가락 같은 것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썼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뜻입니다. 그 손가락을 본 순간, 성경은 벨사살 왕의 얼굴빛이 변했다고 기록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순식간에 포도주가 써졌고, 음식은 뱃속에서 돌덩이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이 감동을 받는 놀라운 글을 남긴 위대한 청교도 성인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토머스 왓슨입니다. 토머스 왓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영혼의 괴로움을 막아주는 데 있어 종이 한 장이 총알을 막는 것만큼이나 무력하다.” 또 이렇게 덧붙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마치 정원에 잠시 머물다 사람이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는 새 떼와도 같다.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라는 잠언 23장 5절 말씀처럼, 세상의 부요함은 잠시 타오르다가 사라지는 유성 같고, 태양의 뜨거운 볕 아래 놓인 눈으로 만든 성처럼 스스로 녹아 없어진다.” 외적인 것들은 영혼을 복되게 하기보다 오히려 더 불편하게 만들 뿐입니다.

전도서 5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들으셨습니까?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세상 것에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은 세상의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세상 것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정적 번영, 돈, 성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산상수훈 어디에도 그런 약속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교만의 연료요 정욕의 연료가 되어 결국 올가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친히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가 셔츠나 옷감을 찢듯이 세상 것들이 여러분의 영혼을 해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랍고 비교할 수 없는 산상수훈, 이 팔복을 통해 말씀하시는 요지는 이겁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결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과 같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이제 이 개념을 빌려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참된 복을 찾으려 한다면, 마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없습니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만족은 세상에 없습니다. 행복은 이 땅에는 없습니다. 복됨은 저주받은 이 땅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여러분을 그곳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이 말씀은 여러분을 세상 밖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세상의 모든 메시지를 정면으로 거스를 것입니다.

세상 광고판이 보여주는 것, 잡지에 나오는 모든 것과 완전히 반대일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삶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말씀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실제로 살아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왜냐구요? 세상이 끊임없이 다른 소리들로 여러분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른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놀라운 정치적 배경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통치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흰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로마인들을 단번에 물리쳐 모두 쓰러뜨리고는, 유다 마카비와 그의 아들들이 한때 그리스를 무너뜨렸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혁명을 이끌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정말 폭풍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변화를 원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사람들이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때문이었죠. 복지 국가가 시작된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2만 명을 먹이셨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무료 아침 식사를 기대한 것이죠. 자신들을 먹여 주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늘 복지가 보장되는 세상, 예수님을 그저 음식을 만들어 주는 존재 정도로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면만 보았습니다. 인간적인 욕구를 채워줄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기대를 피해 지나가셨습니다. 그런 왕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나라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그런 나라를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모욕적인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죠. “네 말이 옳도다.” 그러자 빌라도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나라의 왕이란 말이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정치 문제를 다루신 적이 없습니다.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보다 사람들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첫번째 설교에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산상수훈에는 정치가 전혀 없습니다.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 대한 언급이 여기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와 사회 문제에 그렇게나 몰두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오직 ‘내면’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내면’입니다. 다스리는 것도 아니고,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행위보다 사람의 내면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내면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내면이 그 사람의 행위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 제시된 모든 이상은 인간이 생각하는 정부나 나라에 대한 개념과 완전히 반대됩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장 낮다고 평가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메뚜기를 먹고 낙타털 옷을 입고 광야를 돌아다니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종교 체계에 속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모든 인류 중의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내면의 공허함을 아는 자, 긍휼이 가득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박해받는 자, 욕을 먹는 자, 거짓으로 거스르는 모든 악한 말을 듣는 자.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가장 불쌍한 사람처럼 들립니다. 사실 세상은 그렇게 봅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권력을 써라. 권리를 주장해라. 높아져라. 스스로 높아져라. 자존심을 지켜라.”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나라는 박해를 받아도 보복하지 않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복되다고 하는 나라입니다. 영적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메시지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메시아가 하실 말씀이라고 도무지 상상하지 않았던 정반대의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종교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산상수훈의 전체적인 방향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 전체의 맥락을 조금 살펴봤고, 마태가 본 관점도 살펴봤습니다. 세상이 이 말씀을 어떻게 보는지, 정치적인 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도 함께 보았습니다. 이제는 종교적인 면을 알아볼 차례입니다. 정말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종교적인 사회와 마주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그 사회 전체가 종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의식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교적인 면에서 살펴보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배경이죠. 유대교 안에는 네 가지 주요 집단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입니다. 이 네 집단으로 나뉩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자, 먼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행복이 전통과 율법주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과거에 집착했습니다. 과거에 열광했습니다. 아주 철저했습니다. 참된 행복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있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다음은 사두개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행복이 현재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대주의, 자유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과거는 버려야 해. 지금 우리가 여기 있잖아. 지금 해야 해.”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옛것은 다 버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종교, 새롭고 진보적인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입장 모두에 진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옳았던 점은 참된 종교는 반드시 과거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사두개인들도 부분적으로는 옳았습니다. 참된 종교는 현재의 삶 속에서도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에세네파입니다. 에세네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은 세상과 분리되는 데 있다.”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에세네파가 말한 ‘분리’는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물리적인 분리’였습니다. 그냥 도시를 떠나 버렸습니다. 예전에 한 아주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대학이 기독 잡지에 광고를 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는 세상이라는 죄로부터 24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제 생각엔 그냥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하지만 에세네파는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죄가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이죠.

자,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그리고 이제 열심당입니다. 열심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은 정치적 혁명에서 온다. 행복은 로마를 무너뜨리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뒤로 가라”, 사두개인들은 “앞으로 가라”, 에세네파는 “세상 밖으로 가라” 이렇게 말했고, 열심당은 “맞서 싸워라”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현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에세네파는 고립주의자들이었습니다. 수도원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열심당은 이른바 종교적 사회운동가들이었습니다. 아주 정말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꼭 1978년 미국하고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과거에 머무는 종교인들이 있는 반면,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자유주의자들도 있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물리적 분리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죄 비슷한 것에는 가까이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종교란 모름지기 행진이나 시위를 이끄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인들로 가득한 사회에 계셨습니다. 각자 자기만의 신앙 방식을 가진 사람들 속에 계셨습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너희 모두 잘못되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종교는 외적인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종교는 시대에 맞게 인간이 만든 철학이 아니다,” 에세네파에게는 “종교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열심당에게는 “종교는 사회운동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바로 이겁니다. “내 나라는 마음 안에 있다.” 아시겠습니까? 내면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근본 기초입니다. 바깥이 아니라 내면입니다. 외적인 의식이나 철학, 장소나 수도원 같은 공간, 혹은 사회적 행동이 아닙니다. 내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새 언약의 문을 열고 계십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로 그 새 언약,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라는 말씀을 이루고 계십니다. 바깥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에세네파나 열심당원이나, 혹은 그 네 가지 부류 중 하나에 속한 모두에게 말한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겉모습 그 이상의 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주받은 이 땅에는 복의 근원이 없습니다. 복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그 당시 종교는 모두 겉모습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산상수훈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강하게 뒤흔들면서 참된 복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 마십시오. 자유주의자들처럼 ‘이제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세웠다,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시대에 맞게 잘 바꾸었다’라고 하면서 자화자찬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저 시대의 흐름을 좇고 있을 뿐이죠.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세상의 유혹 없이 하나님만 묵상한다고 해서, 세상 것에 방해받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또 사회운동가가 되어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고 해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모든 태도에도 진리가 담겨 있기는 합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책임 있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고, 시대에 맞게 깨어 있어야 하고, 동시에 과거의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외적인 일이죠. 하나님은 겉이 아니라 마음속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잠언 4장 23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따라서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만약 우리가 육체의 심장을 돌보는 것처럼 영적인 마음을 돌본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말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심장을 지키기 위해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언덕을 오르내리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쇼핑센터에 가서 팔을 기계에 넣고 500원쯤 넣으면 심장이 어떤 상태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다들 한 번 해 보셨죠? 혈압 측정기 해보신 적 있으시죠? 정말 모든 사람들이 심장 관리를 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지방도 줄이고 콜레스테롤도 줄이고, 중성지방 수치를 조심하고, 이것저것 끝도 없이 조심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 진짜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이죠. 히브리인들은 마음을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의 자리, 모든 생각의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만큼 영적인 마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정말 건강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부분을 종종 무시하죠.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신 겁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윌리엄스 번역본이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습관적으로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 마음속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구나.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시지 않으셨느냐? 이제 결단하여 네 속사람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핵심입니다.

이제 이 모든 맥락과 개요를 바탕으로,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공부해야 할 내용입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다섯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산상수훈은 거듭남의 절대적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산상수훈은 여러분이 스스로, 육신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불가능합니다. 제가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참된 복을 아는 사람은 오직 복이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이 얼마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고는 단 하루도 복된 상태로 살 수 없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없이 사람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지를 신약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두번째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거듭남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보여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알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의 설교를 공부하십시오. 예수님의 심장이 어디에서 뛰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의 설교를 공부하십시오. 예수님이 삶과 그 기준에 대해 진정으로 어떻게 느끼시는지를 알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의 설교를 공부하십시오.

세번째 이유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의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신비한 체험을 좇아다니지 마십시오. 잡히지 않는 꿈을 좇지도 마십시오. 여기저기 집회를 옮겨 다니면서 공중에 떠 있는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행복과 복됨, 기쁨과 즐거움을 알고 싶다면 산상수훈을 공부하고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또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라니,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실 텐데, 정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세상이 깜짝 놀랄 겁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복음 전도의 도구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복음 전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산상수훈을 공부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죄 많은 저 존 맥아더, 그냥 평범한 제가, 바울이 노래했던 것처럼, 그저 평범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처럼 산상수훈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많습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이 말씀에 쏟을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1절과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제 배경은 살펴봤으니까, 간단히 몇 가지를 덧붙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상황’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자,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무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 14장 14절, 15장 32절을 보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실 때마다 어떻게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 무리에 대한 묘사는 마태복음 4장 23절부터 25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마다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굶주렸을 때는 음식을 주셨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영적인 굶주림을 보셨을 때는 불쌍히 여기시고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놀라운 매력이 있었습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었습니다.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사람, 열심당원, 형식주의자, 창녀, 바리새인과 세리, 학자와 문맹자, 고상한 자와 타락한 자, 부자와 거지까지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정말 다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가득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계급도, 돈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참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정말 아름답게 요약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러니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사실 무리에게 직접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가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살아낼 수 없었고, 그 복됨을 경험할 수도 없었지만, 적어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은 1차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 말씀을 듣게 된 2차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무리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전하신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듣고 그 복된 삶에 끌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자, 지금까지 산상수훈의 배경과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설교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설교자는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옛날 랍비들의 말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얼마나 놀라운 설교자입니까.

이 설교는 제가 본 가장 훌륭한 강해 설교의 본보기입니다. 분명한 요점이 세 개 있습니다. 설교학적으로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서론이 있습니다. 첫번째 요점은 ‘나라의 시민’입니다. 두번째 요점은 ‘나라의 의’입니다. 세번째 요점은 ‘나라에 들어가라는 권면’입니다. 그리고 7장 마지막 부분에는 그 설교가 미친 영향이 나옵니다. 완벽한 구조입니다. 아름답게 흘러갑니다. 한 부분에서 다음 부분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전환이 아주 탁월합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설교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설교에는 분명한 구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위임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은 같은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은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완전한 지성과 지혜로써 그 어떤 설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말씀을 준비하실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따라 때가 이를 때까지 말씀을 제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능력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지금까지 문맥, 상황, 설교자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배경입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예수님은 강단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헬라어로 “그 산”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산.” 어떤 산일까요? 특별한 산은 아닙니다. 제리가 말했듯이, 갈릴리 바다 북쪽 해안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는 언덕입니다. 아름답고, 푸르고, 햇살이 비치는, 인생에서 한 번쯤은 꼭 보고 싶은 가장 장엄한 광경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그 위에 앉아 이 위대한 설교를 전하셨던 바로 그 산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잔잔하게 출렁이는 갈릴리 바다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갈릴리 언덕들, 오른쪽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높은 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의 시작점이 요단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서 사해로 이어집니다. 오른쪽으로는 요단강이, 서쪽 산 너머로는 샤론 평야와 지중해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작은 언덕 위에 예수님이 앉아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산이었지만, 헬라어로는 “그 산”이라고 합니다. “그 산”인 이유는 그 산 자체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설교하심으로써 특별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설교를 하시기 전까지는 그냥 보통 산이었습니다. 그 설교로 인해서 “그 산”이 되었습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그것은 이미 “그 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곳이기에 “그 산”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을 “그 산”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전까지 보잘것없던 산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그 산’으로 구별하셨습니다. 그 후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산이 어디인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저 작은 언덕일 뿐이지만, 이제는 ‘그 산’으로 불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그곳을 ‘그 산’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방식을 보겠습니다. 설교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예수님은 앉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랍비들이 가르칠 때의 전통적인 자세가 바로 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랍비가 서 있거나 걸으면서 이야기할 때는 비공식적인 대화입니다. 그러나 앉는 순간,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표현을 씁니다. 대학에서 교수가 정식 교수직을 맡게 되면 ‘교수 자리를 받았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르칩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이 엑스 카테드라(ex cathedra)로 말한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좌석에서’, ‘의자에서’ 말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앉아서 가르친다는 것은 곧 권위를 의미합니다. 공식적인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즉흥적인 말씀이 아니라, 왕의 공식적인 선언입니다. 왕의 선언문이었습니다.

“입을 열어 말씀하시니”라는 표현은 헬라어에서 아주 아름다운 관용구입니다. 엄숙하고, 중대하고, 권위 있고, 진지하며 무게 있는 진술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즉흥적으로 던지는 말이 아니라, 품격 있고 단단하고 깊은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표현은 성경 이외의 문헌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나누는 행위를 묘사할 때 쓰이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설교는 공식적었습니다. 엄숙했습니다. 진지하고 품격 있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1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보이십니까? 제자들이 바로 산상수훈의 주요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된 삶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사람들도 제자들뿐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끝까지 따르고, 이루어낼 수 있는 이들도 오직 제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만이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자신의 삶 안에서 누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제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산상수훈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만이 살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영국의 메이지(Magee)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모든 일을 산상수훈의 원칙 위에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영국은 그 왕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이 맞습니다. 왕을 알지 못하면 산상수훈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사회복음으로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사회개혁이나 윤리적 행동 강령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시도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우리를 그런 생각에서 깨어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을 사회복음으로 만들려던 시도는 전쟁으로 인해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세대에서든, 3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여덟 명에서 열 명 정도뿐일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그렇다. 그러나 서양 문명 전체를 통틀어,” 듀런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인물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우리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지만, 우리의 행동에는 그렇지 않다. 매우 중요한 차이다.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지만, 우리의 신학은 그렇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윌 듀런트(Will Durant)가 말한 요지는 이런 겁니다. 약 한 달 전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상수훈은 훌륭한 가르침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살아낼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위대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그 일을 가능하게 할 자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만이 이 말씀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 제자들만이 그 말씀을 완성할 수 있었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 역시 동일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가르침이 3절부터 12절까지 이어집니다.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에 담긴 가르침은 깊고, 인생을 바꿉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산상수훈을 진지하게 배우고 나서도 이전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제 마음에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로 함께 결단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실제가 되도록 살아갈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복이 되는 길을 택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놀라운 진리를 함께 공부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이제 그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복임을 압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과 세상 속에서 어떤 능력으로 역사하는지를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