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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4절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다윗의 시편 중에는 실망과 슬픔 가득한 인생을 살며 겪는 깊은 고통이 담겨 있는 것도 있습니다. 시편 55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다윗은 모든 사람의 입에서 한번쯤은 터져 나왔을 그 탄식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슬픔을 겪을 때, 실망을 경험할 때, 비극을 만날 때, 낙심할 때마다 나오는 말이죠. “아, 도망갈 수만 있다면, 날아가서 쉬고 싶다.” 다윗은 타락한 인류의 탄식을 대변합니다. 자유를 향한 탄식, 날개를 달고 고통과 슬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외침입니다.

그런 일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고통 속에서, 슬픔 속에서, 실망 속에서, 혹은 쓰라린 상처 속에서 어떤 위로를 갈망하는지 잘 압니다. 우리는 모두 도망치고 싶어합니다. 슬픔을 피해서 웃고, 고통을 피해 숨고 싶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너무 깊이 감춰져 있고, 너무나 멀리 있는 듯합니다. 슬픔이 깊어질수록, 실망이 깊어질수록, 고통이 깊어질수록, 그 위로는 더욱 멀게 느껴집니다. 아마 이것이 바로 이 팔복의 역설일 것입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픈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다니,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우리 인생의 구조는 슬픔을 피하려는 방향으로 가득 짜여 있습니다. 쾌락에 미친 세상, 놀이공원 같은 인생, 끝없는 오락과 자극 추구, 돈과 에너지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는 즐거움의 삶, 그 모든 것은 슬픔을 피하려는, 애통과 고통을 피하려는 세상의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자가 행복하다. 애통하는 자가 행복하다.”

사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25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 웃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애통하며 울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세상의 철학과는 정반대입니다. 삶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하셨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겉보기의 웃음과 행복을 책망하시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복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존 목사님,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 먼저 이 질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네 가지 질문을 다루면서 각각의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의미이길래 참된 말일까요? 이제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홉 가지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 사용된 이 단어가 가장 강한 표현입니다. 가장 깊고, 가장 심한 슬픔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홉 가지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무엇을 보여줍니까? 슬픔이 인간 삶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분입니다. 인류 역사는 눈물의 역사입니다. 고통과 슬픔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도 많은 슬픔을 겪어왔지만, 앞으로 다가올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24장 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태복음 24장을 알고 계시다면, 예수님이 세상의 끝날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아직 아무것도 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슬픔의 역사입니다. 눈물의 역사입니다. 고통과 비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그 시작을 본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떤 애통을 염두에 두신 것일까요?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애통이 나옵니다. 슬픔의 형태가 아주 여럿입니다. 그중의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가장 일반적인 슬픔이 있습니다. 즉 삶 속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슬픔입니다. 말하자면 정상적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아주 인간적인 슬픔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눈물과 애통은 인간 삶의 일부분입니다. 사실 이 수준의 슬픔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만약 우리가 마음속 고통과 불안을 눈물로, 슬픔으로 쏟아낼 수 없다면, 우리 감정은 병이 들고 내면 전체가 해를 입을 것입니다.

슬픔과 눈물은 마치 압력 밸브를 열어 안에 쌓인 고통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감정이 온 마음을 병들게 만들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눈물은 아픔을 풀어주고 치유의 과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고통이나 후회, 슬픔과 애통함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면 결국 감정을 병들게 합니다. 슬퍼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애통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그렇게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 슬픔이 눈물과 애통으로 흘러나온 것이죠.

시편 42편 1절부터 3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애통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다시 말해서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 부재에 대한 슬픔과 고통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로 밖으로 흘러나온 것입니다.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외로움만으로도 눈물을 흘릴 이유가 충분합니다. 슬퍼할 충분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어떤 시점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듯한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슬픔을 다루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바로 눈물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디모데는 깊은 낙심과 패배감으로 인해 울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때때로 외로움 때문에, 혹은 낙심과 패배감 때문에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레미야 9장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경고하시기 위해 부르신 선지자 예레미야가 눈물로써 말씀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예레미야 9장 1절입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시편 기자는 외로움 때문에 울었습니다. 디모데는 낙심과 좌절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신이 사랑한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깊은 실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너무도 비참하고 너무도 실망이 컸습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슬픔이 너무 커서, 머리 전체가 강물이 되어 그 고통이 흘러나오기를 바랐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시편 기자의 눈물은 외로움의 눈물이었습니다. 디모데의 눈물은 낙심의 눈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실망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눈물은 염려와 걱정, 그리고 깊은 관심의 눈물이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한 아버지가 귀신 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두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소서.”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시자, 곧이어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외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아버지의 눈물은 어떤 눈물입니까? 아들을 향한 간절한 사랑, 귀신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뜨거운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마치 시편 126편 5절 말씀과 같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랑, 그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을 보면 한 여인이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식탁에 기대어 쉬고 계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그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바리새인이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용서받은 자는 감사할 줄 안다. 그 여인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습니까? 헌신의 눈물이었습니다. 예배의 눈물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감사할 때도 웁니다. 간절히 사랑할 때도 웁니다. 염려하고 걱정할 때도 웁니다. 실망해서 울기도 하고, 낙심해서 울기도 하고, 외로워서 울기도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울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사랑으로써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사랑으로써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셔서 울었습니다. 죽음을 마주한 슬픔에서 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마음의 깊은 고통을 풀어내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 그러니까 인간적인 방식으로 애통하는 것,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으로써 슬퍼하는 것도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을 통해 마음속의 감정이 흘러나오기 때문이죠. 눈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마음의 고통을 풀어내도록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전도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그런데 이와는 다른 종류의 눈물도 있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눈물입니다. 잘못된 눈물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흘리는 눈물, 악한 욕심이 좌절되어 생긴 눈물, 사무엘하 13장에 나오는 암논의 눈물이 바로 그런 눈물입니다. 자신의 누이 다말을 욕보이고자 하는 아주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혀 병이 날 정도로 애통합니다.

아합도 마찬가지로 잘못 애통했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죠. 열왕기상 21장 4절입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죄악된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생긴 부적절한 애통입니다.

또 다른 형태의 잘못된 애통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놓지 못하고 끝없이 슬퍼하는 애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삶 전체가 무너지고, 심지어 믿음 안에서도 감정의 균형을 잃습니다. 최근에도 예수님 품에 간 배우자로 인해서 정신적으로 무너진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중심적인 슬픔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이가 예수님 안에서 영광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상실감에만 매여서 기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애통이 아닙니다.

또 다른 부적절한 슬픔이 있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지나치게 애통하는 슬픔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속죄하려는 마음으로 지나치게 슬퍼하고 지나치게 애통해합니다. 성경에 좋은 예가 나오죠. 바로 다윗입니다. 압살롬이 아버지를 몰아내려 했던 일,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사무엘하 15장부터 20장을 읽어보면 아주 자세하게 나옵니다.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를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특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아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다윗을 몰아내기 위해서 음모를 꾸몄죠. 아버지의 지위를 빼앗고자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습니다. 압살롬은 궁전을 차지하고, 다윗의 군대를 몰살시키려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서 결국 전쟁이 일어났지만, 불행하게도 압살롬의 군대가 패배했습니다. 압살롬도 죽임을 당했죠.

다윗은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하 18장 5절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 그렇게 사악하고 죄 많은 반역자를 너그럽게 대하라고요?” 그렇게 하랍니다. 그리고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아들을 향한 사랑은 존경할 만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 누가 압살롬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길 바라겠습니까? 이스라엘에는 교만하고 죄 많고 자아도취에 빠진 압살롬이 아니라 다윗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그렇게 슬퍼했을까요? 자신이 너무나 형편없는 아버지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영혼을 씻어내려는 일종의 정화 작용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은 밧세바 사건으로 인한 죄의 대가 중의 일부였음이 아주 분명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사무엘하 12장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죄로 말미암아 네 배로 갚으리라.” 다윗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윗에게 네 가지 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가 죽었습니다. 딸 다말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아들 암논이 죽임을 당했고, 이제 압살롬이 살해당했습니다.

압살롬을 잃은 다윗의 애통은 일종의 속죄입니다. 사무엘하 19장을 보면, 다윗이 너무 슬퍼하자 군사들이 승리하고도 부끄러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요압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처럼 잘못된 애통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팔복에 나오는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한결 나아지잖아요. 슬픔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고,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법이죠. 그래서 시인들도 슬픔에 관한 시를 쓰지 않습니까?” 고대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기쁨과 한 길을 걸었다네. 걷는 내내 수다를 떨었다네. 그러나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네. 슬픔과 한 길을 걸었을 때, 슬픔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슬픔과 함께 걸으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네.”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아랍에는 “태양만 내리쬐면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슬픔은 분명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슬픔, 그것이 옳든 그르든, 세상적 슬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그런 슬픔이 아닌, 경건한 슬픔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러분은 외로움이나 낙심이나 실망 때문에 울 수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눈물, 그런 세상 슬픔은 생명을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그 모든 세상 근심은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생명을 주는 슬픔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회개로 이끄는 경건한 슬픔입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죄입니다. 죄에 대한 슬픔, 이것이 참된 슬픔입니다. 세상 슬픔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죽음을 낳을 뿐이죠. 그러나 경건한 슬픔은 회개를 낳고, 회개는 구원을 낳고, 구원은 위로를 줍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경건한 슬픔은 회개와 연결되어 있고, 회개는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바로 이겁니다. 마태복음 5장 4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외로워서가 아닙니다. 낙심하거나 실망해서도 아닙니다. 간절히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고,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서도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서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기서 애통하는 것은 어떤 인간적인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팔복이 시작되는 3절을 기억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말씀드렸죠.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상태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3절이 지적인 부분이라면, 4절은 감정적인 부분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완전히 빈곤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이 감정을 움직이고 그 영적 빈곤을 슬퍼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스스로 아무런 능력도 없고 도움도 받지 못하는 거지처럼 몸을 낮추고 간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3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가난하여, 자비와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압도적인 무력감, 영적인 가난함에서 시작됩니다. 영혼의 파산을 깊이 깨닫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적인 파산을 느끼지 못했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라면, 그 감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 속에는 여전히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영적 가난함을 느낍니다. 만약 그 감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 감각이 없다면, 여러분이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한번 의심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가난함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조지 맥도널드(George McDonald)는 산상수훈 해설에서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 야망이 없고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들,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고 칭찬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에게서 자랑할 것을 찾지 않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존경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이들이 새 예루살렘의 시민이다. 이들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가난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들이다. 친구가 부족해서, 영향력이 없어서, 재물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초라한 피조물임을 알고, 스스로 만족할 이유가 없으며, 자신을 좋게 생각하게 할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며, 진정한 삶의 가치를 얻기 위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합당하게 살기 위해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바로 이 겸손한 사람들이 주님께서 복되다고 하신 사람들이다.” 그리고 맥도널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저는 낮고 보잘것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바로 그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3절에서 시작된 영적으로 가난한 마음은 4절에서 애통으로 이어집니다. 참된 죄에 대한 애통입니다. 오직 영적 거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오직 영적 거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다윗을 보십시오. 밧세바와의 끔찍한 죄 이후에, 그리고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의 죽음을 계획한 후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난한 존재인지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아무 소망도 없는 사람임을 알고는 시편 51편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애통하며 영혼이 찢기듯 괴로워했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얼마나 부자였는지 아십니까? 욥기 29장 6절을 보면, “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서 ‘젖’은 버터를 말합니다. 정말 부자였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철저히 낮추신 후인 욥기 42장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 다음 이런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참으로 깨닫는 사람은 모두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납작 엎드려 기어갑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애통하다(mourning)’라는 단어는 헬라어 중에서도 가장 강한 표현입니다. 주로 죽은 사람을 위해서 슬퍼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터져 나오는 깊은 슬픔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는데,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겪은 깊은 비통을 묘사할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복음서에도 같은 단어가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0절입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이 애통하던 장면이죠. 같은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두고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내는 통곡, 가장 강한 형태의 슬픔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도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큰 바벨론이 멸망할 때 세상의 악한 체계가 자기의 상업이 무너진 것을 두고 슬퍼하며 애통하는 장면이죠.

이제 이 단어의 개념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겉으로 울부짖는 슬픔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내적 고통을 뜻합니다. 헬라어에는 단순히 외적으로 울부짖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쓰인 단어는 그보다 훨씬 깊은 내면의 통증, 영혼의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고뇌를 의미합니다. 시편 32편을 보면 다윗이 바로 그런 상태를 경험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잠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32편 3절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속을 갉아먹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여기서 ‘진액’은 피, 림프액, 침 이렇게 몸속의 모든 체액을 의미합니다. 온 존재가 뒤틀려버린 것이죠.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밧세바 사건의 죄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가 눈앞에 계속 보인답니다. 마음에 계속 남아있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애통하며 고백하자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다윗이 이 모든 것을 토해내고 나서 시편 32편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죄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애통하는 자만이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끝없는 죄책감 속에 살아갑니다. 아무런 위로도, 해방도 없이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행복은 애통하는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애통에 응답하실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마음속에 품고 숨겨보십시오. 얼마나 파괴적인지 금방 알게 될 겁니다. 그 죄를 고백해 보십시오. 그러면 용서를 받음으로써 자유와 기쁨이 찾아옵니다.

다윗은 외로움의 눈물을 흘려본 사람입니다. 거절의 눈물도 흘려 보았습니다. 좌절과 낙심, 실망의 눈물도 흘려 보았습니다. 패배의 눈물도 흘려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 속죄해 보려다가 흘린 잘못된 눈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을 진정으로 꺾어 눈물 흘리게 만든 것은 오직 자신의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위로를 받은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슬퍼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은 가방에 싸 넣고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애통하라, 애통하라, 애통하라.”

야고보서 4장을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는 이런 것이 너무 부족합니다. 너무 부족합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절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보다 더 절실한 말씀이 또 있을까요? 웃는 대신 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가벼움, 어리석음, 경박함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잘 들으십시오. 자신의 죄를 애통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저에게나 누구에게라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의 삶 전체에 걸쳐 자신의 죄로 인해 계속해서 슬퍼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죄 사함 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그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자신의 죄로 인해 마음이 깨어진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이제 예전처럼 쉽게 기뻐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입니다. 예전에는 훨씬 더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많이 알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쉽게 웃을 수가 없습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스겔 21장입니다.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심판을 내리실 준비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웃고 있겠습니까? 결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야 22장 12절은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 장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큰 잔치, 연회를 벌이고 술을 마시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왜입니까? 죄를 웃어넘기는 한 결코 깨끗하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을 보며 웃으십니까? TV 속에서 악한 장면이 나올 때 웃으십니까? 누군가의 악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웃으십니까? 불경건함을 소재로 한 농담을 들을 때 웃으십니까? 그런 일들이 정말 웃을 일입니까?

잠언 2장 14절입니다.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2절입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오늘날 교회가 죄에 대해 감각이 무뎌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교리에 결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교회를 조롱거리로, 웃음거리로 여깁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마치 교회가 농담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풍자하며 비웃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희화화하는 재미있는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우리는 ‘기독교식 가벼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제가 즐거움을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잠언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너무 균형을 잃었습니다. 그 결과로, 이런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은사주의 운동은 가장 위대한 부흥입니다.” 하지만 들어보세요. 제가 보기에는 경박하고 가벼운 모습입니다. 애통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죄에 대한 확신은 회심 이전에도 있어야 하고, 회심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행복을 찾는 데 평생을 쏟습니다. 상담을 받기도 하고,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 같은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애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으로 가는 길이 바로 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영적으로 파산했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오는 몇 가지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바리새인들처럼 부인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면서, 속은 전혀 다르지만, 남들에게는 완벽하게 보이려는 가식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는 자신의 영적 파산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좋아, 이번에는 정신 차리고 내 힘으로 나 자신을 바꿔야지”라며 스스로 해결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 재무장입니다. 또 다른 반응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절망이 너무 깊어서 유다처럼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죠.

우리 교회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제가 부임했을 때부터 함께해온 청년인데,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틀 전에, 아니 어제입니다. 총으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시신으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절망이 너무 깊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죄를 부인하며 가식적으로 살 수도 있고, 인정하고 스스로 바꿔보려고 할 수도 있고, 인정하고 절망 속에 빠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올바른 선택입니다.

탕자 이야기를 보십시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처지를 부인했습니까? “괜찮아,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야. 난 해낼 수 있어.” 이렇게 스스로를 속였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이제 다시 일어나야지. 일꾼으로라도 시작해서 이겨내 보겠어.” 이렇게 결심했습니까? 혹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긴 했지만 절망에 빠져 쓰러져 버렸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옳은 선택을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은혜와 긍휼의 근원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애통했습니다.

구원은 회개를 통해 옵니다. 애통함을 통해 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영적으로 파산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애통하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이야말로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그렇지 않다면, 과연 진정으로 구원받았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답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압니까?”라고 다시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 강대상 앞으로 나갔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혹은 “제가 헌신을 결심했던 때가 있습니다”라고 말이죠. 다시 말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의 근거를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두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은 결정을 내린 때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강대상 앞으로 걸어나간 일이나, 카드를 작성한 일이나, 혹은 상담자가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해준 그날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이 말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입니다. 지금 현재 그 증거가 있느냐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핵심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가 그 죄를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내가 대신 슬퍼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죄 깨닫기를 요구하십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자기연민에 빠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아주 문제가 심각합니다.

참고로 고린도후서 2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너무 지나친 슬픔입니다. 또 때로는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 곧 ‘거룩한 척’하는 태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얼굴이 길게 늘어진 당나귀를 보고 ‘아주 영적인 그리스도인인가 봐요’라고 말한 어린 소녀처럼 말이죠. 행복은 참으로 애통할 때 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편 말씀이죠.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우리가 죄를 인식하며 영적으로 가난함 가운데 애통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때만이 아니라, 평생 동안 계속되는 일이라고요. 로마서 7장을 보십시오. 오늘 아침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직접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7장은 바울이 한 시점에 겪은 일이고, 8장에 이르러서는 그런 문제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7절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절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라고 고백합니다. 20절에서도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다시 말해서, 의와 죄가 싸우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에게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한번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승리의 선언이라고 말하지만, 그 다음 구절을 읽지 않은 거죠.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즉, 바울이 어디에 승리가 있는지를 알았다고 해서 단번에 결정난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뵐 때까지 매일 죄와 싸워야 했습니다. 죄와 씨름하는 삶, 결코 바뀌지 않는 신자로서의 삶의 방식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8장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이 싸움이 지긋지긋합니다. 이 죄가 싫습니다.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는 바울의 말이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라는 말도 놀랍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시작했고, 죄로 인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평생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진심으로 괴로워해야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여기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은 한 번 고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죄를 자백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끊임없는 죄의 자백이야말로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자 왕의 자녀는 늘 죄를 고백하는 삶으로 특정됩니다.

언젠가 UCLA에 다니는 한 학생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이제 완전히 해방됐어요. 아주 완전히 자유로워졌어요. 어떤 사람이 요한일서 1장 9절을 아주 새롭게 해석해줬는데, 이제는 제가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다는 걸 제가 알게 됐어요. 너무 좋아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걸 언제 알게 됐습니까?” 그랬더니. “몇 달 전이에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다시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 물어볼게요. 형제님은 죄를 고백하십니까?” 그랬더니 청년이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이에요.” 이렇게 대답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래도 고백하십니까?”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합니다. 죄가 저를 계속 괴롭혀요.”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아주 좋은 일입니다. 형제님이 잘못 배운 사실보다 형제님 안에 있는 새로운 본성이 더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죄를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5장으로 돌아가 보면, 여기 사용된 단어는 현재형입니다. ‘펜쑨테스(penthountes)’는 계속적인 행위를 나타냅니다. 즉 “계속해서 애통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위로를 받는다” 이런 뜻입니다. 루터는 95개 조항에서 “우리의 전 생애는 회개와 통회의 연속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윗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시편 38편이죠.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삶 전체가 그랬습니다. 다윗은 평생토록 자신의 죄를 현실로 마주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약 전체를 보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참 많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신약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웃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은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웃을 만한 일이 많지 않으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배고프셨고, 분노하셨고, 목마르셨지만, 웃으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셨다고 말이죠. 예수님은 슬픔을, 고통을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애통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락, 자극, 쾌락에 미쳐버린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익살꾼, 희극인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그런 재주로 사람들을 웃기려고 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기독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어떤 사람을 이렇게 소개하는 걸 봤습니다. “오늘의 게스트는 가장 유명한 기독교 코미디언입니다.” 누구에게 애통이 필요합니까? 애통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입니다. 이제 죄를 슬퍼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럼 애통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두번째 질문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앞부분에서도 다 말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매주 듣는 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전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다 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애통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내가 죄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면, 그게 나에게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이겁니다. 위로입니다. 위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는 애통하기 때문이 아니라 위로받기 때문입니다. 애통하지 않으면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죄책감을 숨기려고만 하면 결국 우리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세상의 슬픔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슬픔에는 결코 행복이 없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강조 대명사 ‘아우토이(autoi)’는 이런 뜻입니다. “계속해서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오직 그들만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애통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를 압니다. 죄를 애통하는 자만이 눈물을 닦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손길을 압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위로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칼레오’는 ‘곁으로 불러 함께하도록 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혜사’, 그러니까 돕기 위해 곁에 부름받은 분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위로자’이시라고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시편 30편 5절, 시편 50편 15절, 이사야 55장 6절부터 7절, 미가 7장 18절부터 20절 등 수많은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붙들어 주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늘 곁에서 권면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위로도 하시고, 공감도 하시고, 격려도 하시고, 힘도 주시고, 용서하시고, 회복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입니다.

우리의 애통이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갈 때,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위로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첫번째 위로자였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예수님이 첫번째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는 첫번째 보혜사로서 우리 곁에 오셔서 돕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일을 이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도 위로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도 위로의 영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위로가 단지 미래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참고 견디세요,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받을 겁니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원문과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위로는 애통과 나란히 함께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애통할 때에, 동시에 계속해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의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는 현재의 위로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위로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예수님이 위로자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또한 위로자입니다. 성경이 위로자라는 사실, 아셨습니까? 로마서 15장 4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섭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고, 용서를 말해주고, 도움과 격려와 임재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위로를 받고, 성경을 통해서도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됩니다. 바울이 “누가 와서 나를 위로했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우리가 죄로 애통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씀의 사역으로, 그리고 다른 성도의 섬김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위로를 받으면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슬픈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슬퍼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슬픔이 위로로 이어지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하신 말씀이 참 좋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도 아시죠? 자신에게 짐이 있다는 것을 모르면 쉼을 구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죄의 무게에 눌려서 죄가 등을 굽게 하고 삶을 짓누르는 것을 느낄 때, 그제서야 예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무거운 짐을 벗기시고, 대신에 자신의 멍에를 주시는데, 쉽고 가벼운 멍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기준과 그리스도의 명령을 제 어깨에 지고 가는 것은 저의 죄의 무게를 지고 가는 것에 비하면 아주 훨씬 가벼운 짐입니다. 위로입니다. 우리가 애통하는 동안,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동안 위로가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서 날마다, 날마다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십니다. 위로를 주십니다. 그 위로 안에서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미소를 짓고,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죄를 슬퍼하는 것이 바로 애통이군요. 그리고 그 결과는 위로군요. 위로를 받으면 행복해지는군요.” 그렇다면 세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제 마지막 두 가지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방해물을 제거하십시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 말은 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돌 같은 마음은 결코 애통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쟁기가 그 마음을 갈아엎을 수 없습니다. 굳은 마음은 진노의 날에 받을 진노를 쌓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그 방해물들을 없애야 합니다. 그 돌 같은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마음을 돌처럼 만드는 걸까요?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애통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마음을 굳게 만드는 것들이죠. 첫째,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죄를 사랑하면 회개하지 않는 냉랭한 돌덩이로 마음이 굳습니다. 죄를 사랑하는 순간 마음은 굳어버립니다. 두번째, 절망입니다. 절망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죄를 용서하실 수 없어.’ 절망은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된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8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으시다. 우리는 소망이 없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자”라는 뜻입니다. 절망의 언어입니다. 절망은 무지 뒤에 하나님의 긍휼을 숨기고, 의심 뒤에 은혜를 숨깁니다. 잘 들으십시오.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을 붙잡고 변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애통을 막는 장애물 중 하나는 죄를 사랑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절망입니다. 절망은 죽음의 구름 뒤에 하나님의 긍휼을 숨기려 합니다.

세번째는 교만입니다. 또 다른 애통의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괜찮아. 사실 꽤 괜찮은 편이지.” 치명적인 병을 감기 정도로 여기는 어리석은 의사와도 같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다면, 여러분은 정말 심각한 죄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나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사랑하는 것, 절망, 교만이 애통함을 막는 방해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방종’입니다. 네번째 방해물, 방종이란 값싼 은혜를 의미합니다.

“나는 예전에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다고 고백했고, 그 절차를 다 밟았어. 앞으로 나가서 세례도 받았으니까 이제 됐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냥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아. 죄를 고백할 필요도 없어.” 이런 식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예로 말씀드렸던 사람처럼 “삶에서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어, 그냥 예수님만 받아들이면 돼. 예수님이 알아서 깨끗하게 해주실 거야”라고 말하는 태도입니다.

이사야 55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그리고 악인이 자기의 길을 버리지 않는다면,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값싼 은혜란 없습니다. 죄를 지을 자격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 그러니까 첫째는 죄, 둘째는 절망, 셋째는 교만, 넷째는 방종입니다.

다섯번째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루는 태도입니다. ‘언젠가는 해야지. 언젠가는 내 죄를 제대로 돌아보고 정신 차려야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너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게 굴지 마십시오. 죄라는 질병은 빨리 다룰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위로가 오고, 그 위로와 함께 복이 옵니다. 그러나 만약에 죄를 제때 다루지 못한다면, 하나님 없이 영원을 보내게 될 겁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애통하는 마음을 무엇이 방해합니까? 죄를 사랑하는 마음, 절망, 교만, 방종, 미루는 습관입니다. 그리고 하나를 덧붙이겠습니다. 웃음입니다. 진짜입니다. 웃음입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인생을 진지하게 다루려 하지 않고, 늘 웃어 넘기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한낱 파티처럼 여기면서 그 파티를 계속 이어가기만 하면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아모스 6장 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웃을 일이 아닌데 웃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웃을 이유도, 웃을 자리도 없습니다. 그들은 슬퍼했어야 합니다.

욥기 30장 31절에도 다시 이 방해 요소가 언급됩니다.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 다시 말해서 세상은 음악과 파티에 미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환난이 끝날 때 맨 먼저 하시는 일이 모든 음악을 멈추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18장을 보면, 모든 음악이 멈춥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도 가끔 라디오를 꺼보십시오. 그러면 내면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 절망, 교만, 방종, 미루는 습관, 웃음. 이러한 것들이 바로 애통을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방해 요소들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방법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적 즐거움에 빠져 있으면서도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보십시오. 만약 그 사실이 여러분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도 깨뜨릴 수 없을 겁니다.

크리스티나 로세티(Christina Rosetti)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저는 양이 아니라 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 서서 피가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을 수 있다니요?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은 지극한 슬픔으로 주님을 위해 울었습니다. 넘어진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도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해와 달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별 하나 없는 하늘 아래 얼굴을 숨기고, 한낮 큰 어둠의 공포가 드리운 그때, 오직 저만, 저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소서. 참된 목자이신 주님, 잃은 양을 찾아 주옵소서.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이여, 한 번 더 돌아보시고 그 바위를 치소서.”

잘 들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제대로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여러분이 자신의 죄를 얼마나 마주해야 하는지를 바라보십시오.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보십시오. 그러니 먼저 그 방해물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두번째로, 성경에서 죄를 연구하십시오. 연구하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다윗을 연구하십시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함이라” 이렇게 말한 이사야를 연구하십시오. 죄를 두고 눈물 흘렸던 예레미야를 연구하십시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한 베드로를 연구하십시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을 연구하십시오. 그들이 자기 죄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를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 보고도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설득해 보십시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을 근심하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복을 멸시합니다. 죄는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죄는 우리를 벌거벗게 합니다. 죄는 우리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의 옷과 면류관을 빼앗습니다. 죄는 우리의 영광을 망가뜨립니다. 죄는 우리를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은 자로, 더러운 옷을 입은 자로 남겨둡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결국 짐승처럼 썩어 없어질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방해물을 제거하고, 죄를 연구하십시오.

세번째, 애통한 심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애통하는 자란 무슨 뜻입니까?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위로와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방해물을 제거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애통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거기에 이르렀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죄에 민감한가? 죄를 보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죄를 보고 웃는가? 그냥 지나치는가? 즐거워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갖 죄 가운데 살면서도 전혀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도덕적인 영역의 죄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에서의 죄일 수도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일 수도 있습니다. 선한 생각을 하지 않는 죄, 사랑하지 않는 죄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죄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자신의 죄를 애통합니까? 더 나아가 말씀드립니다.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예레미야가 왜 이렇게 웁니까?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면서 그런 마음을 느끼십니까?

예수님은 산 위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습니다. 에스겔을 보면, 에스겔 또한 울었습니다. 9장 전체, 그리고 10장까지 그 내용이 이어지지만, 9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울고 있는 자들을 찾아라. 형제와 자매를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찾아라.”

시편 119편, 그 긴 시편의 136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여러분은 그런 눈물을 흘리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플 때 여러분의 마음도 함께 아픕니까? 다윗이 시편 69편에서 이렇게 말한 것처럼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며 주를 비방하는 자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실 때 나도 울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애가 1장 16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와 주위의 죄를 보며 정말로 울고 있습니까? 애통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합니다. 저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처럼 얼굴만 일그러뜨리고 마음으로는 슬퍼하지 않는 그런 겉모습의 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해 놓고는 선지자 사무엘에게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이렇게 속삭였던, 그런 거짓된 애통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죄에 대해 민감합니까? 그리고 두번째로, 여러분이 진짜 애통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준은 하나님의 용서를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있습니까? 행복과 평안과 용서받고 깨끗해진 삶에서 오는 위로가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애통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위로받을 수 있고,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원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주의 말씀 안에서 참으로 풍성하고 깊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진리들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 주님, 제가 애통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아파하실 때 저도 아파하기를 원합니다. 제 자신의 죄에 민감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세상의 죄를 향해, 형제자매들 가운데 있는 죄를 향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의 죄를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죄로 인해 마음 아파하게 하옵소서.

마음이 식지 않게 하시고, 굳지 않게 하셔서 더 이상 죄에 무감각해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우는 열심을 주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지키기 위해 힘쓰게 하옵소서. 그리고 제가 그 기준을 어기거나, 다른 사람이 어길 때마다 제 마음이 아파하게 하옵소서.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참된 위로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 저녁에 아직 자신의 죄로 인해 깨어져본 적이 없는 사람, 영적으로 가난해져 애통함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오늘 저녁이 바로 그 순간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애통함 가운데 오직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사람들이 있다면, 마음이 굳어지고 세상의 방식에 빠져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잊고 더 이상 죄로 인해 아파하지 않는 우리가 있다면, 하나님, 우리 안에 의로운 영을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각자의 형편과 필요를 모두 아시는 아버지,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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