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펴시고 마태복음 5장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절입니다. 우리는 지금 산상수훈 중에서 팔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6절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1절부터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에도 이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살펴볼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 이 말씀의 뜻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광맥을 캐내며 우리 삶 속 깊은 곳을 살피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하고 있는지 진실하게 돌아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께서 은혜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수훈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첫 설교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듯 마태복음 전체의 주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앞부분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의 왕 되심을 강조합니다. 족보에 나타난 왕의 혈통에서, 공식적인 왕의 인준권을 가진 동방 박사들의 경배에서, 구약의 왕에 관한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에서, 혹은 사탄을 제압하심으로 자신이 사탄보다 더 위대한 통치자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에서, 이 모든 것을 통해 마태는 한 가지 관점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이제 마태가 5장에 이르러 그 왕의 말씀, 곧 왕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을 기록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참된 왕이시라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가 바로 그 나라의 모습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로서 영적인 성품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왕의 나라를 영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 마지막 부분, 산상수훈의 끝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왜 놀랐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왕 같았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하시는 방식 또한 왕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왕의 태도였습니다.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말이 진리인 이유는 누가 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랍비들과 서기관들은 언제나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말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왕의 말씀이었을 뿐 아니라, 그 말씀하시는 방식 또한 왕의 권위가 드러나는 방식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과 그 나라에 속한 자들의 특징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설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왕의 선언문입니다. 왕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이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1절부터 12절까지 서론으로써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복, 참된 행복으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좋은 설교자는 설교 시작부분부터 사람들의 귀를 열게 합니다. 처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합니다. 복을 원하고, 참된 기쁨과 의미를 찾기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복을 주겠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행복을 제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씀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날 즈음에는 매혹을 넘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몹시 놀라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 진정한 복을 약속하셨지만, 오직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자,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팔복의 진리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는 겁니까?” 대답은 둘 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어떤 상태여야 하는지를 보여줄뿐만 아니라, 그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도 보여줍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살면서 자신의 영적 가난을 계속해서 인식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죄를 애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나라에서 살면서 죄를 애통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온유해야만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 안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배워갈수록 더욱 온유해집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 안에서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따라서 팔복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자, 그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특징을 함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그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모두 묘사한 말씀입니다.
이제 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에서 주리고 목마른다는 것은 아주 강한 열망을 말합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힘, 멈출 수 없는 갈망, 말하자면 일종의 ‘야망’을 의미합니다. 물론 ‘야망’이라는 단어는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애쓰고, 추구하고, 열정을 쏟아붓고, 이루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강한 욕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루시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루시퍼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시퍼는 타오르는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 열망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사야 14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루시퍼의 야망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루시퍼는 굶주렸습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루시퍼는 의가 아닌 권력에 굶주렸습니다. 권력에 목이 말랐습니다. 분명한 야망과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권력을 향한 굶주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너의 야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을 기억하십니까?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왕이었고, 세상의 모든 제국 가운데 가장 위대한 나라를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처럼 군림한 왕은 없었습니다. 거대한 통치권을 가졌던 지상의 절대 군주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영화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런 느부갓네살도 강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4장 30절은 느부갓네살의 욕망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루시퍼가 권력을 갈망했다면, 느부갓네살은 찬양을 갈망한 사람입니다. 너무도 찬양을 받고 싶은 나머지 스스로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루시퍼는 권력을 갈망했고, 느부갓네살은 찬양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둘 다 자신의 야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야망을 가졌던 사람, 그런 사람은 많지만, 여기서는 한 예만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7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부자는 그 많은 것을 누구에게도 나눠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쌓아두려고만 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야망이 있었습니다. 소유에 대한 야망입니다. 소유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야망을 가진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권력을 탐한 사람, 칭찬을 탐한 사람, 소유를 탐한 사람, 쾌락을 탐한 사람도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러나 모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잘못된 것을 갈망했기 때문이죠. 야망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열정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굳은 결심이나 강한 열망 자체가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옳은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이 옳은 것입니까?” 6절로 돌아가 보면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음식과 물은 생명에 필수적이죠. 꼭 필요합니다.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우리에게 음식과 물이 필요하듯이 의가 필요합니다. 배고픈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목마른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죠. 가장 보편적인 욕구이자 가장 필수적인 욕구입니다. 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체적 생명이 음식과 물에 달려 있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이 의에 달려 있습니다. 육체가 음식과 물 없이 살 수 없듯이 영은 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면, 육체적인 굶주림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이 형들을 이집트에서 만난 이후로,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세상은 기근의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기원전 436년에 로마에 기근이 닥쳤을 때에, 수천 명이 굶어죽는 것보다 티베르 강에 떨어져 죽는 것을 택했습니다. 서기 1005년에는 영국에 기근이 들었고, 879년과 1016년, 1162년에는 유럽 전역이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기술과 상업이 어느 정도 발전한 19세기에도 러시아, 중국, 인도, 아일랜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비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인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영양실조와 그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도 수백 명이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기근은 전쟁과도 같고, 전염병과도 같습니다. 생명을 죽이고 쓸어버립니다.
이처럼 음식과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이 모든 육체적 굶주림의 고통은 채워지지 않은 영적 굶주림과 해갈되지 않은 영적 목마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육체의 필요는 단지 인류가 마주한 더 깊고 더 심각한 굶주림, 곧 영적 굶주림을 보여주는 작은 예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에 들어오는 사람과 내 나라 안에서 사는 사람은 음식과 물을 갈망하듯이 의를 갈망하고 목마름을 느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야망이 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행복에 대한 갈증과 만족에 대한 배고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곳에서 찾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토한 것을 다시 핥는 개에 비유했습니다. 진창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뒹구는 돼지에 비유했습니다. 세상은 영양가 없는 것을 먹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필요를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의 마음,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거짓된 것들로, 쓰레기와 돼지우리의 쭉정이로 채우려고 합니다. 탕자가 그랬습니다. 마음은 좋은 양식을 구했지만, 결국 돼지 사료를 먹으며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개는 토한 것을 다시 핥습니다. 생명의 떡을 찾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떡이 아닌 것’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들의 양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의 배고픔을 아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수로 내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의 목마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생생하게 말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과 배고픔을 가지고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수의 근원을 거부하고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만들어 그 안에 물을 담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웅덩이는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향해서 배고파하고 목말라하고, 행복과 의미와 만족을 갈망하면서 결국 자기중심적인 쾌락과 소유와 권력과 명예로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탕자는 쾌락을 원했고, 소유를 원했고, 방탕한 삶이 주는 인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굶주렸습니다. 마침내 제정신이 들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는 그렇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잔치가 열렸습니다. 영적인 잔치 비유입니다. 세상은 방탕한 삶 속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자신을 채우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달려와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텅 빈 마음과 굶주린 영혼, 목마른 영혼을 잔치로 채워주십니다.
요한일서 2장은 세상에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에 무엇이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잠시뿐입니다. 모두 다 바람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니 지금 이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권력입니까, 칭찬입니까, 소유입니까, 쾌락입니까? 혹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자신을 채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개가 자기 토한 것을 다시 핥는 것처럼, 돼지가 진창에 다시 몸을 굴리는 것처럼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유일한 참된 근원이신 오직 한 분께 시선을 두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무엇을 갈망하고 계십니까? 복 있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이제 팔복의 다른 말씀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핵심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이 복은 다른 팔복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먼저 3절을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 벌거벗은 채 아무런 의로움 없이 서 있는 그런 자라는 인식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더해도 그 총 합계가 결국 ‘0’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는 절망, 죄인이라는 자각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이것은 앞선 인식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신을 보고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마음이 깨지고 애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으로 파산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슬픔이죠. 그리고 그 다음이 온유입니다. 온유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온유는 겸손입니다. 죄를 보고 마음이 꺾이고 애통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해진 사람은, 의로움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네번째 복으로 이어집니다. 스스로는 가질 수 없는 의를 사모하면서 주리고 목마르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팔복의 순서는 분명한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은 앞의 말씀에서 논리적으로 이어진다. 앞선 모든 복들이 도달하는 결론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을 점검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기준은 없다. 만일 이 말씀이 성경 전체에서 가장 복된 말씀이라고 느껴진다면 분명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신앙의 기초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영이 가난해져서 자신의 죄악에 압도되고, 그 죄를 슬퍼하며 애통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때 반드시 생겨야 할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는 의를 갈망하고 목마름을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 의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은 전혀 다른 것들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돈, 물질, 명예와 인기, 쾌락을 좇습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탐욕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슬픈 사실은, 미국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잘못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돈이 아닙니다. 행복은 쾌락이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마음이 부서지는 것이고, 행복은 죄를 슬퍼하는 것이고, 행복은 온유한 것이며, 행복은 의를 갈망하고 목마름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무엇을 얻습니까?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배부를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합치면 무엇이 됩니까? 모든 것입니다. 배부르고, 땅을 기업으로 받고, 위로를 받고,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조건을 갖추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요점은 이겁니다. 세상은 물질적인 것과 돈과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하지만, 만일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다면,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을 얻기 위해 목이 부러지도록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애써서 얻으려고 하면 결코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조건, 그러니까 자신이 얻으려 하지 않을 때 그제서야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이 모든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느냐?” 유대인들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위로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땅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에 의미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내가 주겠다. 내가 나라를 주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위로를 주겠다. 너희의 삶을 만족으로 채워 주겠다. 온 땅을 주겠다. 이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제시하는 조건을 따라야 한다.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어쩌면 이 모든 말씀의 핵심은 바로 ‘온유함’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온유한 사람은 죄로 인해 마음이 부서져서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선물을 구할 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온유한 자의 예 한번 보십시오. 온유한 자가 온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온유한 자의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지난주, 아니죠 한 2주 전쯤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롯과 땅을 나눌 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온유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무엇을 확신하고 있었습니까? 그 모든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롯이 잠시 그 땅의 일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수 있었던 겁니다. 온유한 자는 결국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온유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기억하십니까? 다윗은 사울을 향해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이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결국 모든 것이 자신의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다시 말해서, 그 기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순간, 이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맥아더야, 너는 내 자녀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이 세상에서 저의 힘으로 무언가 얻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니죠, 전혀 없습니다. 어차피 제 것이 될 텐데요. 다른 사람에게 잠시 빌려줘도 괜찮습니다. 결국은 다 저에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말이죠.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모든 근본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이 자기 것임을 압니다. 단, 하나님이 주실 때에 비로소 내 손에 쥘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원리는 이후의 다른 산상수훈 말씀들의 근본 동기입니다. 마태복음 5장 40절을 보십시오. “또 너를 고발하여 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잃어버린다고 해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러니까 세상 것들을 붙잡으려고 그렇게 애쓰지 마십시오. 소유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다 여러분의 것이 될 테니 나누어 주십시오. 이런 마음,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만이 올바른 야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얻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결국 모든 것을 주십니다. 모두 다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결국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땠습니까? 나라를 얻으려고, 땅을 차지하려고 애썼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했고, 자기 인생을 채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방식으로 따르기만 하면 내가 전부를 줄 것이다.” 주님은 6장 3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결국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면 모든 것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면 행복합니다.
3절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4절에는 애통하는 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5절에는 온유한 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자아의 죽음입니다. 일종의 자살과도 같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6절에 위로가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이것이 바로 해답입니다. 자아가 죽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다소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자신의 죄를 보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이 복이 여기에 위치한 이유입니다.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사람, 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음을 알고 온유해진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간절히 구하며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이제 두번째 질문을 보겠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언급했듯이 ‘갈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단순한 갈망이 아니라, 크고 강렬한 갈망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놀라운 힘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희미해졌지만, 당시에는 크게 느껴졌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배고픔을 잘 모릅니다. 목마름이 무엇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목마르다고 할 때는, 잠깐 밖에 나가서 놀다가 목이 마른 정도를 말합니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가뭄 속의 갈증이 아닙니다. 배고프다고 할 때도, 그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배가 고픈 정도지, 며칠 동안 음식을 못 먹은 배고픔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림과 목마름은 절박하다는 뜻입니다.
길버트 소령(Major V. Gilbert)이 쓴 <최후의 십자군(The Last Crusad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1966년 <내셔널 크리스천(National Christian)>이라는 잡지에서 블레이클록(E. M. Blaiklock)이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팔레스타인 해방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앨런비 장군(General Allenby)이 제1차 세계대전 때에 팔레스타인 해방 작전에 참여했습니다. 책 내용은 이렇습니다. “브엘세바(Beersheba)에서 출발한 영국,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이 후퇴하는 터키군을 쫓아 메마른 사막을 지나 진격하고 있었다. 공격대는 물을 나르는 낙타 행렬보다 너무 앞서 나가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보급대와 떨어져버린 겁니다. “물통은 모두 비었고, 태양이 매섭게 내리쬐었다. 하늘에서는 독수리들이 원을 그리며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타는 듯한 햇살에 눈은 충혈되고 침침해져 있었다. 혀는 붓기 시작했고, 입술은 검은 자줏빛으로 변하더니 부르트기 시작했다. 부대에서 낙오된 병사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남은 병사들은 셰리아(Sheria)까지 필사적으로 전진했다.”
“셰리아에는 우물이 있었다. 만일 해질 때까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면 수천 명의 병사들이 목말라 죽을 운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목숨을 걸고 싸웠다. 퇴각하는 터키군의 뒤를 따라 셰리아에 들어갔다.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차갑고 맑은 식수가 가득한 커다란 석조 물탱크였다.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물이 탱크 안으로 흐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모두가 미칠 듯이 목이 말랐지만 그럼에도 ‘모두 두 줄로 물탱크를 향하여 정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단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았다. 부상자, 경계 근무자, 그리고 중대별로 순서가 정해졌다. 마지막 병사까지 물을 마시는 데 무려 네 시간이 걸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병사들은 불과 6미터 앞에 있는 낮은 돌담 너머, 수천 톤의 물이 가득한 곳을 바라만 보면서 서 있었다. 나는 그때 우리가 처음으로 성경의 진정한 교훈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을 향해 그때와 같은 갈망, 모든 것을 삼킬 만큼 강렬하고 온 마음을 사로잡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요점이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은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헬라어로 매우 강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페이논테스(peinōntes)’는 ‘궁핍하다’, ‘굶주리다’ 이런 뜻으로, 단순한 허기가 아니라 몹시 굶주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 ‘딥사오(dipsaō)’는 ‘목마르다’, ‘갈증을 느끼다’라는 뜻인데요, 실제적인 갈증을 뜻합니다. 가장 강력한 본능적 욕구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모두 현재분사로 쓰였습니다. 즉, ‘지금도 계속 배고파하는 자들’, ‘지금도 계속 목말라하는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지속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만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의 지속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예수님의 의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주리고 목말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도 저는 여전히 그 의를 더 사모하면서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위대한 주석가 렌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배고픔과 목마름은 만족하는 그 순간에도 더욱 커진다.” 누가복음은 여기에 ‘지금’이라는 단어를 덧붙였습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니, 이것은 현재를 포함하여 계속 이어지는 삶의 태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갈망이 멈추지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의를 향해 배고파하지도, 목말라하지도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지 한번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타오르는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곧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실 때, 모세는 또다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마른 땅을 지나가게 하신 다음, 이집트 군대를 모두 물에 잠기게 하실 때도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행진할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쉐키나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죠.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모세, 이제 그만해요. 많이 봤잖아요.” 그러나 모세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산으로 데리고 가셨고, 불타는 손가락으로 돌판에 율법을 새기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산에서 내려올 때 만족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점점 희미해지자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고, 또 올라가고... 결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8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만족 안에 불만족이 있고, 충족 속에서 더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더 갈망합니다.
다윗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했던 다윗,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던 다윗.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셨고, 돌보셨고, 인도하셨고, 길을 지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정이 다윗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 임한 고통이 다윗에게도 임했습니다. 하나님을 친밀히 알았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야. 시편이 마치 시냇물처럼 영혼에서 흘러나오는구나.” 그러나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목말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겁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사는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바울,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나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고, 예루살렘 감옥에서도 주님을 보았고,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보지 않았습니까? 신약을 기록하고 신학을 정립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정리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바랄 게 있나요?” 그러나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이 한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결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끝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바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초기 플리머스 형제단 운동, 그러니까 19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복음주의 개신교 개혁운동을 이끌었던 존 다비(John Darb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고픈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를 향해 어떤 마음인지 정말 알기 위해서는 굶주려야 한다. 탕자가 배고팠을 때는 쥐엄 열매로 허기를 채우려 했지만, 굶주렸을 때는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절박한 갈망입니다.
오늘 아침에 자매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그 친구가 성경 공부에 한두 번 나오더니 이제는 더 이상 오지 않으려고 해요. 종교적인 사람으로 살고는 싶다는데, 헌신하는 건 싫다고 하네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그 친구는 충분히 배고프지 않은 겁니다.”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전까지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장 5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팔복에서 이 말씀이 이 자리에 놓인 이유이죠.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매우 강렬한 갈망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저는 지금 하나님의 의를 그 어느 때보다 더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갈망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뵙는 날까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세번째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주립니까? ‘의’입니다. 아모스는 세상 사람들이 땅의 티끌을 탐한다고 말했습니다.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세상은 땅의 먼지와 같은 것들을 갈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갈망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세상이 가장 많이 갈망하는 것도 행복일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원합니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행복하게만 해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오락거리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디즈니랜드나 낫츠베리팜, 매직마운틴 같은 놀이공원, 혹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오락과 즐길거리로 가득차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고통스러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병 자체를 치료하려 하지 않고 단지 통증만 없애길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가 환자한테 “통증을 줄여줄 주사나 약은 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좋은 의사가 아닙니다. 병을 진단하고 고치려는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병들어 있지만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행복으로 덮으려 할 뿐 결코 그 병 자체를 다루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행복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 놀라운 건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진정으로 원하는 게 ‘행복’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요? 어떤 황홀한 감정을 추구합니다. 특히 은사주의 운동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황홀감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체험을 원하고, 영적인 황홀감을 원하고, 뭔가를 느끼기를 원합니다.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영적인 황홀감을 얻기 위해서 세미나를 쫓아다니고, 집회를 찾아다니고, 상담가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행복만을 찾으려 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너무 불행해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추구해야 하는 것,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결과물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행복은 의의 결과로 주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어떤 순간적인 전율이나 감정적인 고양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으로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디카이오쉬네(dikaiosunē), 그러니까 의로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방법 뿐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가리킵니다. 첫째는 구원이고, 둘째는 성화입니다. 첫째는 구원, 둘째는 성화입니다.
잠시 구원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먼저 구원을 구합니다. 믿을 때 주어지는 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의를 구합니다. 자신의 죄를 봅니다. 자신의 반역을 봅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음을 봅니다. 깨어지고, 애통하며, 온유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용서를 원합니다. 그래서 구원에서 오는 의, 곧 구원의 의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죄의 권세와 죄의 존재, 그리고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구원을 향한 시작점입니다.
구약의 많은 본문에서, 오늘 저녁에 모두 다 다루지는 않겠지만, ‘의’는 ‘구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선지자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이사야는 반복해서 ‘의’를 ‘구원’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구원의 순간에 의롭게 됩니다. 이사야는 이 점을 특히 후반부인 45장, 46장, 51장, 56장, 61장에서 강조합니다. 구원을 주제로 할 때마다, 의를 구원받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의’라는 단어 대신 ‘구원’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됩니다. ‘구원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구원에 주리십시오. 구원을 사모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기를 갈망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의가 적용되기를 갈망하십시오. 죄의 용서를 갈망하십시오.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버리고, 자기 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구원을 간절히 사모할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여기가 유대인들이 걸려 넘어졌던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행위로 자기 구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너희는 아직 그것을 갖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이미 의로 충만하다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의를 위해 완전히 엎드려 배고파하고 목말라하기 전에는 결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행복은 거룩한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입니다. 만약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그 어딘가에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함은 단지 규칙에 순종하는 외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의로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외적인 형식을 완전히 벗겨내고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었습니다. 구원을 향해 배고파하고 목마를 때에야 비로소 채움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닙니다. 두번째 요소가 있습니다. 성화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을 제가 느끼는 만큼 강하게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 갈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멈추지 않는 갈망, 예수님을 더 닮고자 하는 그 열망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계속해서 배고파하고, 계속해서 목말라하고, 더 큰 덕을 사모하고, 더 깊은 순결을 구하고, 더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코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역겨운 태도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내가 나를 구원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신자가 “나는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모두 가증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결코 갈망을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그렇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더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순종해도 더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그리스도의 생각을 닮더라도 더 닮아야 합니다. 끝없이 열망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누가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하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의의 범위가 얼마나 크고 완전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단지 의의 한 조각, 부분적인 모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의 전부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모든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의의 총체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헬라어에서 ‘배고프다’, ‘목마르다’ 같은 동사에는 보통 ‘~중의 일부’라는 속격 형태가 따라옵니다. 헬라어에서는 ‘부분 속격(partitive genitive)’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부분이니까 집중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헬라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배고프다’ 혹은 ‘목마르다’라고 말하고, 그 뒤에 속격을 붙였습니다. 헬라어는 격변화를 통해서 의미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배고파서 음식의 일부를 원한다.’ ‘나는 목이 말라서 물의 일부를 원한다.’ 부분 속격은 ‘그 중 일부’를 원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서, 헬라인은 결코 ‘나는 배고파서 음식을 원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식을 다 원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제한을 두는 격을 써야 했습니다. ‘부분 속격’은 ‘나는 배가 고파서 음식의 일부를 원한다’, 즉 ‘세상의 모든 음식이 아니라 일부만, 내 배고픔을 채울 만큼만 원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목말라서 물을 원한다’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상 모든 물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 대신에 ‘나는 목이 말라서 물의 일부를 원한다’, 즉 ‘목을 축일 만큼의 일부를 원한다’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이것이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표현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연구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이 구절에서는 헬라어의 일반적인 용법이 완전히 무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라면 이렇게 표현되었어야 합니다. “의의 일부를 사모하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의 보통 용법인 속격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목적격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의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직접목적어로 삼은 것입니다. “나는 의를 사모하고 의에 목마르다.” 즉, ‘모든 의를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누리고 있다 해도, 모든 의를 다 누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계속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말이죠.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 전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쓰인 정관사도 중요합니다. 헬라어 원문은 “그 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어떤 막연한 의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구원으로 시작해서 성화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일부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전부를 가져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전부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제 마음속에 정리가 안 될 정도로 감탄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의를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의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의를 소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게 바로 우리야. 우리 모두가 의를 소유하고 있지”라고 했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이 없고,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영적으로 가장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배부르고 만족한 사람들을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결코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 신자의 말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샘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목마름이며, 그리스도로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배고픔이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불만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이 팔복의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의를 사모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결과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에는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배부를 것’이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합니다. 원래 이 단어는 동물에게 먹이를 충분히 먹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만족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만족하게 하십니까?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역설 아닙니까? 만족하지만, 결코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배부르지만 여전히 더 갈망합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희 아내는 파이를 참 잘 만듭니다. 특별한 레몬 파이를 만드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아내가 만든 파이를 먹을 때면 저는 정말 만족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또 먹고 싶습니다. 보통 저녁 식사 후라서 이미 배가 부르지만, 그 맛과 만족감 때문에 더 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만족하면서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의로 채움을 받지만, 그 채움이 너무 달고 깊고 풍성하기 때문에 더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배부르다’라는 단어는 신약 전체에 등장합니다. 아주 놀라운 단어입니다.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여기서 말하는 그는 궁핍한 형제나 자매입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이때의 ‘배부르게 하라’는 말이 바로 ‘만족하다’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영적 양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배부르게 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콜타조(chortazō)’인데, 매우 강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정말로 배부르고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의를 허락하십니다. 여러분이 처음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의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 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매일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며, 순종하고, 의를 살아내려 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채우십니다.
시편 107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편 34편 10절에서는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편 23편 1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레미야 31장 14절에서도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또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된 불만족이 있습니다.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 가고 싶고, 더 닮고 싶다는 거룩한 갈망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될 때에야 완전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권력이나 쾌락, 소유나 명예가 아니라 의를 향한 불타는 열망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말씀이 왜 팔복 중에서 네번째로 나오는지, 또 어떤 의미인지, 누가 대상이고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제가 정말로 의를 사모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그것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십니까?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위대한 청교도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것을 가장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깊은 불만을 느끼십니까? 늘 이렇게 고백하는 자신을 발견합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아니면 여러분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 틀리고 나 자신만 옳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하십니까? 만일 어떤 형태로든 만족한다면, 과연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며 아픔을 겪고 있습니까?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가 거의 굶어 죽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가? 바로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선해 보여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합니다.
두번째 질문입니다. 외적인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내 감정이 외부의 것들에 의해 쉽게 흔들리는가? 새로운 것을 하나 사면 삶이 더 나아지는 것처럼 느끼는가? 잘못된 것으로 허기를 채워버려서 정작 바른 갈망을 잃어버리지는 않는가? 잘 들으십시오. 의를 향한 갈망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될 수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꽃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오직 음식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주거나 장미를 건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오직 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의를 사모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다른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십니까? 배고픈 사람이 마침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너무 게걸스럽게 먹기 때문이죠. 그렇죠? 우리의 음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 말씀 안에서입니다. 이 말씀에 기록된 규칙에 순종할 때 의가 이루어집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말씀을 먹었다고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면 말씀에 대한 식욕이 너무 커서 그 말씀을 게걸스럽게 삼킬 겁니다. 저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으라고 애써 설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성경공부 좀 하세요.” “성경 좀 읽으세요.” “성경을 좀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로서 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행복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갈망하는가?
네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달콤하게 느껴지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 달콤합십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들어보십시오. 너무나도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27장 7절,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들으셨습니까?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저는 누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에 고난을 허락하실 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기에 고통 속에서도 만족하고 채움을 받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일이 일어나야만 기뻐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죠. 그런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얕은 행복을 쫓는 사람입니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음의 몰약도 꿀처럼 먹을 수 있다.” “주린 영혼에게는 모든 쓴 것이 달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깊은 시련을 경험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고통과 불안과, 어려움을 겪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로는, 그런 고통의 시간도 좋은 때만큼이나 달았습니다. 좋은 때만큼이나 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린 영혼에게는 모든 쓴 것이 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중에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더 의롭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느끼는 주림과 목마름이 무조건적인가? 정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무조건적이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부자 청년을 기억하십시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나 이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의에 주렸지만 조건적이었습니다. 결국 결코 배부름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그리스도도 원하고, 죄도 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제 교만도, 그리스도와 함께 잘못된 관계도, 그리스도와 함께 학교에서의 부정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업에서의 거짓도, 그리스도와 함께 탐심도, 그리스도와 함게 물질주의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과 새 옷을 함께 원하지 않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음식과 새 신발을 함께 원하지 않습니다. 옷이나 신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음식과 물만을 원합니다. 시편 119편 20절입니다.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까? 이사야는 이사야 26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보이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오기 전에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목말랐고 미리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목마름이 너무 늦을 겁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에 나오는 부자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결국 너무 늦게 목마르게 될 겁니다. 더 이상 구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목마르십시오. 그리고 지금 채움을 받으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말씀의 교제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성령께서 이 진리들을 우리의 삶에 꼭 맞게 감싸 주시며 적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당한다고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길 원합니다. 우리를 주리고 목마른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혹시 오늘 이 가운데 아직 구원을 향한 주림과 목마름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지금 경험하게 하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사슬을 끊어 주시고,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여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의를 구하게 하옵소서. 의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또 어떤 이들은 성화의 의를 구해야 할 겁니다. 우리 중에 스스로 만족하며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 우리의 자만을 깨뜨려 주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에는 끝이 없음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그날까지, 우리 마음이 늘 주님을 향해 주리고 목마르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올려 드립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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