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팔복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부터 12절까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말씀을 계속해서 함께 보셨다면, 팔복이 ‘왕의 선언문’, 곧 왕의 선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마태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여기서는 그 왕께서 자신의 나라 선언문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또 하나는 그 나라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입니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들어갑니다. 오직 애통하는 자만이 들어갑니다. 오직 온유한 자만이 들어갑니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계속 심령이 가난하고, 계속 애통하며, 계속 온유하고, 계속 더 많은 의를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이제 다섯번째 복으로 넘어갑니다. 7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기에도 동일하게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풉니다. 다시 말해서 긍휼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성품입니다.
예수님이 마주하신 당시의 종교는 피상적이고 얕고 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유대교의 외형적인 의식에만 집중하고 내면이 없는 모습을 보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고, 메시아의 통치 아래에서 으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식화된 외적인 의와 자기 의로 가득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고, 무관심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행하는 피상적인 ‘의로운 행위’로 인해 반드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의 내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가 이 문제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장 7절을 보면,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겉모양만 있었을 뿐, 진짜 회개를 보여주는 내적인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외적인 혈통이나 민족적 정체성에 의지해서 구원받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은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외적 종교만 가진 진정한 내적 실체가 없는 사람들, 종교적 형식만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임할 끔찍한 불의 심판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습니다. 불은 이미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외식적이고 자기 의로 가득한 이기적인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대면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내면이라고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모두 내적인 특성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쌓아올린 외적인 공로와 자랑을 모두 제쳐두시고, 곧바로 문제의 핵심인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내면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행위에도 관심이 있으시지만, 오직 내면에서 비롯된 행위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내면의 의로움이 올바른 행위라는 열매를 낳습니다. 반면에 내면의 실체 없이 행위만 흉내낼 수도 있습니다. 율법주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실한 태도에서 비롯된 진실한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올바른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행동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산상수훈의 6장부터 7장까지는 전부 ‘행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 말, 생각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초가 되는 것은 올바른 마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바로 이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언가를 하기 전에 이미 무언가인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언가를 하기 전에 이미 무언가인 사람이다.” 왕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특정한 성품을 지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성품, 애통하는 성품, 온유한 성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품, 긍휼히 여기는 성품, 청결한 마음의 성품,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성품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우리를 통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신앙을 통제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성은 우리의 신앙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외적인 행동 몇 가지를 억지로 조절하기를 원하신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 전체를 주도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신 원칙들은 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겉모습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겉치레나 가식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 중심이 마음을 다스리고, 그 마음에서 삶의 행동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소나 염소의 피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마음이 바르지 않은 채 드리는 무의미한 종교 행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저는 가끔 아모스 5장을 떠올립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내면의 태도입니다. 올바른 외적인 행동을 낳는 내면의 동기, 마음의 상태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제 마태복음 5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종교인들에게 아주 치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첫번째 복에서 아주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찌르셨습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영적으로 파산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선이 전혀 없는 가난하고 타락한 거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너희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지가 어두운 구석에서 손을 내미는 것처럼, 그런 절박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의로 인해 만족하고 기뻐하지 말라. 너희의 죄악 때문에 눈물 흘리며 슬퍼해야 한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율법을 지켰다고 교만해하지 말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의로 인해 자족하지 말라. 의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그 의를 사모하며 주리고 목말라해야 한다.”
이제 팔복의 다섯 번째 말씀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처음 네 가지 복은 전적으로 내적인 원리입니다. 전적으로 내면의 태도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섯 번째 복으로 오면, 내적인 태도에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 앞의 네 가지 복의 열매가 이제 외부로 향합니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 깨어지고, 죄로 인해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면, 그 결과로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자신에게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시작한다.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는 사람은 애통하는 동안 마음을 씻어 깨끗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된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언제나 의를 위하여 박해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팔복의 처음 네 가지가 어떻게 다음 네 가지와 연결되는지가 보이십니까? 처음 네 가지는 내적인 태도이고, 다음 네 가지는 그 내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거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과 똑같이 아무것도 아닌 다른 거지에게 기꺼이 나누어 줄 겁니다. 그렇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의 눈물로 마음을 씻어 깨끗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온유함은 화평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의를 위해 박해받는 것을 기꺼이 감당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환점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부터는 처음 네 가지 복의 내적 태도가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다룹니다. 네 가지 태도를 가졌다면, 네 가지 성품이 드러나는 특징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서론의 마지막 네 영역을 살펴보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제 ‘긍휼히 여기는 자’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짧은 한 구절을 함께 살펴보기 전에 여러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 깊고 방대한 진리이기 때문에 제가 다 다룰 수가 없습니다. 자료가 적으면 설교하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핵심을 반복해서 전하고 약간만 풀면 되니까요. 하지만 성경 전체에 걸친 큰 주제를 다루려면 무엇을 중심으로 전해야 할지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긍휼’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마지막 때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아주 거대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긍휼에 대해 네 가지 측면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의미, 근원, 본질, 결과입니다. 먼저, 의미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7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긍휼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죠.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 다 긍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내려다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찌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도주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라는 말씀을 단순히 일종의 미덕처럼 생각합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면,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잘할 거야”라는 식이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포셔라는 인물이 이런 말을 합니다. 대학 시절에 제가 읽었는데 아직도 생각납니다. 포셔가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의 속성은 강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부드러운 비처럼 땅 위에 떨어진다. 두 배로 복된 것이다. 주는 자도 복을 받고, 받는 자도 복을 받는다. 가장 강하고 가장 왕답게 만드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왕을 가장 왕답게 만드는 것을 긍휼이라고 말했습니다.
탈무드조차 긍휼 안에 고귀한 미덕이 담겨 있다고 인정합니다. 탈무드에서 가말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도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그러나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도 긍휼을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사고 속에는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면, 그들도 나에게 잘할 거야.” 혹은 “내가 하나님께 잘하면, 하나님도 나에게 잘해 주실 거야.” 후자는 좀 더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전자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금할 때 “저희에게 헌금하시면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실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일종의 주고받는 관계처럼 이해합니다. 셰익스피어처럼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거나, 가말리엘처럼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하면, 하나님도 나에게 이렇게 하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어떤 조건에 묶어두려는 태도입니다.
어떤 작가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의역했습니다. “여기 인생의 위대한 진리가 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돌본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돌보실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안타깝게도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팔복이 말하는 긍휼에는 인간적인 격언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가말리엘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분명 상호적인 원리가 작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사실, 로마 사회에는 긍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긍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고 싶으시다면, 로마 철학자들의 말을 떠올리면 됩니다. 긍휼을 ‘영혼의 질병’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긍휼은 나약함의 표시라는 겁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의 특징으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정의와 용기와 절제와 힘을 찬양했지만 긍휼은 경멸했습니다. 나약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 그러니까 ‘가부권’이라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들어 올린 후에 살리고 싶으면 엄지를 올리고, 죽이고 싶으면 엄지를 내렸습니다. 엄지가 내려가면 아이를 즉시 익사시켰습니다. 긍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 시민이 노예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면, 칼로 죽이고 묻어도 아무런 제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로마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런 인간적인 격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너희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 그들도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다”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그저 헛된 바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경쟁심이 만연한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헛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네가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풀면, 네 목을 밟고 올라설 거야”라고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말처럼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인간의 격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이 단순한 인간적 교훈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증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가장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해를 끼치신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향해 손을 내미시고 고치셨습니다. 다리 저는 자를 걷게 하셨습니다. 맹인을 보게 하시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녀와 세리와 타락한 사람들을 찾아가 사랑의 품으로 끌어안으시고, 구속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슬퍼하는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외로운 자를 품으시고 사랑받는 존재로 느끼게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인간보다도 긍휼이 충만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길을 지나가시는데 장례 행렬을 만났습니다. 통곡하는 어머니를 보셨죠.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제는 아들도, 남편도 없는 그런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장례 행렬 한가운데로 다가가서 관을 멈추게 하고 손을 얹고는 그 아들을 살리시고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남자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말씀을 나누시고, 또한 고발자들을 대면하신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얼마나 놀라운 긍휼입니까.
예수님은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16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왜 천박한 자들과 어울려 다니냐.” 처음부터 끝까지, 복되신 주 예수님의 생애는 끝없이 긍휼을 베푸시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긍휼을 베푼다고 해서 반드시 긍휼로 되돌려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긍휼을 많이 베푸신 분이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요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단순한 인간적 격언이 아닙니다. 만일 긍휼이 긍휼로 보상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긍휼을 많이 베푸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얼굴에 침을 맞고 저주받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가장 긍휼을 많이 베푸신 분이, 자신이 긍휼을 베푼 사람들에게서 단 한 번도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두 냉혹한 체제, 로마 체제와 유대 종교 체제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로마가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는 로마를 그저 한 번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들을 보십시오. 자비 없는 로마의 전체주의는 예수님을 위협으로 여긴 무자비한 종교 체제의 불관용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긍휼은 단순히 인간적인 덕목이나 그 자체로 보상을 가져오는 어떤 인간적 미덕이 아닙니다. 그 의미가 아닙니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 그들도 너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무슨 뜻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바로 이런 뜻입니다. 두번째 구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이제 긍휼이라는 단어 자체를 보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단어, 엘레에몬(eleēmōn),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한 번은 바로 여기에서, 또 한 번은 히브리서 2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긍휼의 가장 위대한 본보기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긍휼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지만 동사형으로는 성경 전체에 아주 자주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에서도 흔히 사용되는데, 히브리어로는 헤세드(chesed)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긍휼히 여기다’, 즉 고통받는 자를 돕고, 불쌍한 자에게 도움을 베풀며, 비참한 자를 구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폭넓은 개념입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긍휼입니다. 우리는 흔히 긍휼을 구원과 관련된 ‘용서’의 측면에서만 생각하지만, 사실 긍휼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긍휼은 행동으로 옮겨진 연민, 단순한 연민을 넘어서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동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엘레에몬(eleēmōn)’은 단순히 마음으로 느끼기만 하는 동정심이 아닙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가짜 긍휼이 아닙니다. 또 자기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베푸는 위선적인 긍휼도 아닙니다. 진심이지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침묵 속의 연민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긍휼은 순수하고 이기심이 없는 동기로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손을 내미는 실제적인 자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 나라의 사람들은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는 사람들이다. 내 나라의 사람들은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사람들이다. 내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져서 남을 돕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실상을 정확히 찌르셨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의롭다고 여기면서 누구에게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유대인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만든 규례를 합리화하면서 부모에게조차 긍휼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는 반드시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긍휼이란 단순히 동정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이해하고 공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배고픈 사람을 보고 음식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을 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을 보고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긍휼은 단순히 마음으로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단어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단어들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 ‘긍휼’과 ‘용서’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 두 단어를 함께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긍휼과 용서. 긍휼이 곧 용서일까요? 용서가 곧 긍휼일까요? 그리고 이 둘은 어떻게 구별될까요? 자, 이제 잠시 집중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긍휼은 구원의 과정에 포함된 요소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긍휼은 구원의 배경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 덕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용서의 근원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긍휼과 용서를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9장 9절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긍휼’과 ‘용서’가 함께 묶여 있습니다. 두 단어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시편 130편에도 놀랍고도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긍휼을 근원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긍휼과 용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용서로 나타나는 긍휼을 생각하지 않고는 긍휼을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긍휼에서 비롯되지 않은 용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용서만이 긍휼의 전부는 아닙니다. 긍휼을 단지 구원론적인 개념이나 구원의 사건으로만 좁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긍휼은 용서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6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창세기 32장 10절입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사무엘하 24장 14절입니다. “...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느헤미야 9장 19절입니다.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시편 69편 13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이 모든 말씀은 긍휼이 단순히 용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용서는 긍휼의 한 표현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저는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 외에도 긍휼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많습니다. 예레미야애가에 가장 아름다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하나님의 긍휼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긍휼과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는 지금 긍휼의 의미를 정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긍휼과 사랑을 비교해 봅시다. 다시 정리하면, 용서는 긍휼에서 나오고, 긍휼은 무엇에서 나옵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왜 긍휼을 베푸셨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순서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긍휼을 낳습니다. 긍휼은 용서를 포함한 수많은 은혜를 낳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긍휼의 근원으로써 긍휼보다 더 크고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잠깐만요, 방금 긍휼이 용서보다 더 크다고 하셨잖아요.” 맞습니다. 긍휼은 용서보다 더 크고, 사랑은 긍휼보다 더 큽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긍휼을 베푸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어떤 문제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사랑은 문제가 없을 때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지만 아들에게 긍휼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아들도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도 긍휼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는 천사들을 사랑하시고 천사들도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누구도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긍휼보다 큽니다. 긍휼은 의사 같고, 사랑은 친구 같습니다. 사랑은 애정으로 행동하지만, 긍휼은 필요로 인해 행동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긍휼은 어려울 때에만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 긍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긍휼보다 더 큽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우리의 필요를 향해 흘러내리는 통로가 바로 긍휼이라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의롭고 긍휼이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더 이상 긍휼이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사랑은 긍휼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오고, 긍휼은 다시 용서라는 생각으로 좁혀집니다. 사랑은 의미가 훨씬 더 넓습니다. 한 가지, 아니 두 가지 개념을 더해볼까요? 긍휼과 은혜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긍휼이 은혜와 같은 건가요?” “은혜가 긍휼과 같은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이제 잘 들어보십시오.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긍휼(mercy)’이라는 단어와 그 파생어들은 항상 고통과 비참함, 그리고 괴로움, 이런 요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죄의 결과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죄이든, 아니면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이든, 죄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와 연관됩니다. 긍휼은 언제나 문제를 전제합니다. 고통, 비참함, 괴로움을 다룹니다. 그러나 ‘은혜(grace)’는 죄 자체를 다룹니다. 긍휼은 증상을 다루고, 은혜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긍휼은 형벌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은혜는 죄 자체를 제거합니다. 이해되시죠? 먼저 은혜가 주어집니다. 은혜가 죄를 제거하고, 그 다음 긍휼이 형벌을 제거합니다. 둘은 다릅니다. 바울은 세 개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개인에게 보낸 편지들,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에서만 “긍휼과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긍휼과 은혜는 다릅니다. 긍휼은 고통을 없애고, 은혜는 더 나은 상태를 허락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힌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습니다. 거의 죽을 만큼 얻어맞고, 가진 것도 다 뺏겼습니다. 제사장은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외면했죠. 그런데 사마리아인,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혼혈인이 지나가다가 불쌍한 유대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을 부어주고, 고통을 덜어주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고통을 덜어주고, 상처를 싸매주고, 피를 멈추게 하는 겁니다. 은혜는 무엇을 합니까? 은혜는 더 돌보는 겁니다. 주막 주인에게 사례를 하면서 더 머물수 있도록, 더 돌보아 주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자, 긍휼은 부정적인 면을 다루고 은혜는 긍정적인 면을 다룹니다. 긍휼은 고통을 없애고 은혜는 더 나은 상태를 줍니다. 긍휼은 지옥에서 건져내고 은혜는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긍휼은 “너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하는 것이고 은혜는 “너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과 은혜는 놀라운 한 진리의 양면입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비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긍휼과 공의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긍휼을 베푸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라면 어떻게 공의를 무시할 수 있을까요? “너는 죄인이지만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고 긍휼이 많으니 너를 용서하겠다”고 하실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공의가 완전히 충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담당할 완전한 희생 제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희생 제물이셨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긍휼은 공의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죄를 대충 넘어가는 감상적인 동정심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죄를 대충 넘기는 일이 교회 안에서도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가 치루어져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거짓이요 가짜인 감상적인 긍휼이 있습니다. 공의를 무시한 채 “사람들에게 아무 대가도 지게 하지 말자”, “누구도 거절당했다고 느끼게 하지 말자” 이렇게 하면서 죄를 덮어버리려는 태도입니다. 사울 왕이 아각 왕을 살려둔 것이 바로 그런 감상적인 긍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긴 행위였습니다. 다윗도 압살롬에게 감상적이고 가짜인 긍휼을 베풀어 쉽게 용서했지만, 그 결과는 마음속에 반역의 씨를 심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거룩의 진리를 어기면서까지 긍휼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지만, 반드시 진리가 바로 선 후에야 긍휼이 임합니다. 압살롬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그 긍휼은 참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죠. 단지 감상적인 동정심에 불과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거스르는 악을 행하면서도 그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 악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긍휼은 원합니다. 야고보서 2장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중의 어떤 한 조항이라도 어기면 전체를 어긴 것과 같다. 전체에 해당되는 죄책을 져야 한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라.”
야고보서 2장 13절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먼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긍휼 없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여기에서 진리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그 어떤 감상주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죄로 흘려보내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데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받아주실 거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긍휼을 베푸십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일 때에, 또 이미 그 희생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려면 죄를 죄로 인정하고 자백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특별합니다. 긍휼은 용서보다 크고, 사랑보다 작으며, 은혜와는 다르고, 정의와는 하나입니다. 용서보다 크고, 사랑보다 작고, 은혜와는 다르고, 정의와는 하나입니다. 긍휼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긍휼한 사람은 악한 자들의 모욕을 잠잠히 들을 뿐 아니라, 그 악한 자들에게조차 마음으로 동정합니다. 긍휼한 사람은 공감하고, 용서하고, 은혜롭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감상적인 마음으로 악을 변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슬프거나 불쌍하다고 해서 죄를 벌하지 않거나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긍휼은 진리가 받아들여졌을 때, 공감과 완전한 용서와 사랑과 은혜로 손을 내미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37편 21절입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실제로 저희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 아들이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라고 말하면 저는 긍휼을 베풉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거나 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비는 없어. 무조건 벌을 받을 거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태도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은혜롭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부당한 일을 당한 후에도 롯을 구하러 나섰던 것은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그렇게 잔혹한 대우를 받고도 형들을 받아들이고 필요를 채워준 것도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미리암이 모세에게 반역하자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나병을 내리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도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생명을 살려준 것도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긍휼이란 용서하고, 돌보고, 돕고,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습니다. 목을 조르지 않습니다. 짓누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시편 109편에는 긍휼이 없는 사람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긍휼이 없는 악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09편 14절입니다.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왜 이렇게 말합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몇 달 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위대한 감람산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하나님은 궁핍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바로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부패한 사회가 우리에게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져라”고 외치는 소리를 극복하고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모욕하더라도, 긍휼을 베푸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에게 잘못을 행하더라도, 긍휼을 베푸십시오. 자비롭고, 선행을 베풀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누군가 실수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빚을 갚지 못하거나, 빌린 것을 돌려주지 못하더라도, 긍휼을 베푸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성품입니다.
잠언 11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정말 비참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긍휼 없이 사십시오. 그러나 행복해지고 싶으시다면 긍휼을 베푸십시오. 잠언 12장 10절입니다.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이 말은 의로운 사람은 짐승에게까지 긍휼을 베풀지만, 악한 자는 모든 것에 잔인하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 3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회의 특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29절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무자비한 자니라.” 절정입니다. “무자비한 자.” 긍휼이 없는 사람의 최종 결론입니다. 긍휼이 없는 사람.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긍휼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히 긍휼을 구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두번째로 살펴볼 점입니다. 긍휼의 근원. 긍휼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긍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앞의 네 가지 복을 경험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자기 죄를 슬퍼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으로 서고,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여 목마름으로 찾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고 하나님의 긍휼의 선물을 받을 때, 비로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긍휼이라는 성품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 그들도 나에게 긍휼을 베풀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입니다. 가끔은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이 우리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의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리로 나아오지 않는다면, 결코 진정한 긍휼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긍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워주실 때 주어지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복을 주시는 분께 속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복은 원하지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거짓 선지자 발람하고 똑같습니다. 발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그러나 한 청교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의인처럼 죽기를 원했지만, 의인처럼 살기는 원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긍휼을 원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긍휼을 얻는 사람은 오직 팔복의 처음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며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지는 그 의를 구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를 주실 때, 그 의와 함께 긍휼을 베풀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에베소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며,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께 두 종류의 성품이 있습니다. 절대적 속성과 관계적 속성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절대적 속성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고, 거룩하십니다.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고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게 되면서, 그 절대적인 속성들이 관계적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진리는 신실하심으로, 거룩은 정의로, 사랑은 은혜와 긍휼로 관계적 속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본성에서 흘러나온 관계적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휼과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긍휼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시편 103편 11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긍휼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긍휼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절정에 이른 사건은 단연 십자가입니다. 그 어떤 행위도 십자가의 긍휼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긍휼의 대제사장이 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반하우스 박사(Dr. Barnhouse)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예언의 영역을 벗어나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님,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한다면,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시길 구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실 모든 긍휼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베풀어졌다. 이것이 긍휼의 전부이다. 더 이상 추가될 긍휼은 없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긍휼을 다 베푸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은혜로 행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 샘은 이미 열렸고 지금도 자유롭게 흐르고 있다.”
우리가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까? “타락으로 인해 망가진 나를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하셨네. 길을 잃은 나를 구원하셨네. 하나님의 긍휼, 얼마나 큰가.”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거기에는 크신 긍휼과 자유로운 은혜가 있었네, 거기에서 용서가 넘치도록 내게 임했네, 거기서 내 짐진 영혼이 자유를 얻었네.” 어디입니까? 바로 갈보리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긍휼이 행해졌습니다. 미가 7장 18절은 “주께서는… 인애를 기뻐하시므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 긍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근원이십니다.
이제 세번째로, 긍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부 내용을 건너뛰고 핵심만 정리하겠습니다. 긍휼의 본질입니다. 무슨 뜻이냐구요? 긍휼을 어떻게 실제로 적용할 수 있냐구요? 어떻게 하면 살면서 긍휼을 베풀수 있냐구요? 성경에 정말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고린도후서 1장, 에베소서 4장, 골로새서 3장, 갈라디아서 6장, 마태복음 5장, 마태복음 6장 등등, 수없이 많은 말씀들이 반복해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라고, 또다시 긍휼을 베풀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육체적인 차원입니다. 먼저 우리는 육체적으로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잠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겁니다. 원한을 용서로 바꾸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긍휼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참으로 많습니다. 구약에 예가 가득합니다. 용서를 넘어, 여러 종류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신명기 15장 8절입니다.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그러니까 노예를 몇 달 후에 풀어줘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꾸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면제년이 가까워져서 빚이 곧 탕감될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필요한 것을 주라는 겁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무언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저에게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긍휼을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필요에서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길은 너무 많습니다. 긍휼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보복하지 않습니다. 복수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실패를 가지고 흠잡지 않습니다. 죄를 계속 들추어내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긍휼이 너무 커서 집에 큰 식탁을 만들어 두고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항상 초대해 먹였습니다. 그 식탁 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을 좋아하는 자여, 이 식탁에는 너의 자리가 없다. 그러니 금식하라.”
우리는 육체적인 부분뿐 아니라 명예면에서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수리우스(Surius)라는 예수회 학자의 글을 읽었는데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수리우스는 마르틴 루터가 악마에게서 신학을 배웠고 술에 취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중상모략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배신하게 됩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면,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반드시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로마의 박물학 작가였던 아일리아누스(Aelian)는 흥미로운 동물을 하나 언급합니다. 인도에 ‘그리핀(griffin)’이라는 동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생물이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는데,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큰 짐승 같은 네 발이 있고, 독수리 같은 날개가 있다. 분류하기가 참 어렵다. 신들만이 알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거 가짜 그리스도인들하고 똑같네. 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발은 땅에 단단히 붙어 있는 사람들 말이야.” 그리핀처럼 왕국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진흙바닥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복수심에 불타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고, 자기 자신만 방어하려는 사람은, 길 건너편으로 지나쳐 가 버린 제사장과 레위인하고 똑같습니다. 가짜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 긍휼을 베풀 수 있는 방법이 참 많습니다.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오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네 가지를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떠난 몸을 두고 울면서, 하나님이 떠난 영혼을 두고는 울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차갑게 식은 시신을 보면서 많이 웁니다. 그런데 영혼을 생각할 때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저를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그 긍휼을 매일 경험합니다. 저는 의로움이 전혀 없어서 심령이 가난했던 사람입니다. 죄를 놓고 비천하고 소망 없는 정죄 가운데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비참하고 정죄받은 처지에서 제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스스로 얻을 수 없었던 의에 주리며 목말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하나님의 크신 마음에서 흘러나온 긍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동일한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사도행전 7장 60절을 보면 스데반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생명을 잃어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한 겁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모습하고 같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 위에 군림하거나 스스로 더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일은 동정만으로가 아니라 ‘찌르기’로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찌르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디모데후서 2장 25절입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다시 말해서 찌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죄를 직면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복음을 들려주는 것이죠. 디도서 1장 13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꾸짖지 않으면 바른 믿음에 설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꾸짖음으로써 여러분의 영혼을 돌볼 수 있습니다. 저는 죄인들에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죄를 꾸짖음으로써 그 영혼을 돌볼 수 있습니다. 그건 사랑이 없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잔인한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겁니다. 유다서 1장 23절입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어떤 사람은 불에서 끌어내어야 합니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저는 사랑이 없다는 비난을 참 많이 받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듣습니다. 오늘 오전 설교 후에도 누군가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직면하게 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죄를 직면해야만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기도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람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살피는 일은 찌르고 불쌍히 여기는 것뿐 아니라 기도할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드리는 기도, 죄 가운데로 향하는 신자들의 영혼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긍휼입니다. 얼마나 긍휼한 사람인지는 얼마나 신실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느냐로 드러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복을 흘러가게 하는 긍휼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긍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불쌍히 여김으로, 찌름으로, 기도로, 그리고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들의 영혼에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를 원하십니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제가 긍휼을 베풀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여기에 선순환이 있는 것 보이십니까? 선순환이 보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더 큰 긍휼을 주십니다. 긍휼의 놀라운 선순환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다시 강조된 대명사가 사용됩니다. 오직 그들만, 오직 그들만 긍휼을 받습니다. 오직 그들만입니다. 이 진리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사무엘하 22장 26절에서도 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야고보서 2장 13절도 동일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6장에서도 같은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부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리고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리라.” 시편 18편에도 동일한 진리가 있습니다. 잠언 14장에도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긍휼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경고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구원을 얻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로마 가톨릭이 범한 오류이죠.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수도원과 수도사들을 만들어냈고, 이 단어를 잘못 적용한 결과로 수많은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긍휼은 결코 구원을 얻는 방식이 아닙니다. 가톨릭 안의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놓쳤습니다. 긍휼의 행동을 하고 선행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면 결국 구원의 긍휼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공로로 긍휼을 얻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긍휼은 더 이상 긍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긍휼은 공로가 전혀 없는 곳에서만 적용되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공로가 있다면 더 이상 긍휼이 아닙니다. 공로가 있다는 것은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지, 긍휼을 받을 이유는 아닙니다. 긍휼은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조차도 결국 긍휼이 필요한 사람일 뿐입니다. 핵심은 마태복음 18장에 있습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이 비유가 무엇을 보여줍니까? 참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종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을 진짜로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붙들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는 역사가 그의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에게 임한 긍휼은 겉보기만 그런 가짜 긍휼이었습니다. 실제로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긍휼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기회를 얻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목을 잡아 끌고 가서 감옥에 던졌습니다. 그가 긍휼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참 증거입니다.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18장에서 주신 비유에서 말씀하신 핵심은 이것입니다. 누군가가 긍휼을 전혀 베풀지 않는다면, 애초에 긍휼을 받은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이 말씀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이미 긍휼을 받았다는 증거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의 그 사람은 진정한 긍휼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풀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을 받은 사람은 긍휼을 베풀고, 또다시 더 많은 긍휼을 받고, 계속 더 많이 받습니다. 참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긍휼을 받은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먼저 긍휼을 받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긍휼을 더하십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입을 것과 먹을 것까지 공급하시는 하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내용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긍휼 위에 긍휼을 부어주십니다. 왜냐하면 긍휼의 하나님에게서 이미 받았기 때문이죠.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왜냐구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이미 긍휼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손에서 긍휼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미래에 있을 심판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미래에도 현재에도 긍휼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긍휼히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다윗은 반복해서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나님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나님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다윗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86편 3절입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편 23편 6절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미래에만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평생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긍휼이 풍성하신 대제사장입니다. 그 긍휼은 현재를 위한 것입니다. 또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6절에서는 미래를 봅니다.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위해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합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저는 바울이 아마도 심판을 바라보면서, 구원의 날을 바라보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래뿐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가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라고 말한 것이 당연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말씀 안에 거하는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풍성하고 은혜로운 저녁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의 인내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마음에 있는 많은 것들을 나누었고, 성령 하나님께서 목적 있게, 분명하게 역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의 삶에 역사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를 긍휼의 사람으로 빚어 주옵소서. 우리가 이기심에 오염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누구보다도 긍휼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알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주셨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가짜 신자가 아니라 참된 신자라는 증거를 긍휼의 삶으로 드러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립니다. 긍휼이 사라진 이 세상 속에서 긍휼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우리를 사용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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