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입니다. 1절부터 12절까지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도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말씀 앞으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사람의 언어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위대한 말씀에 담긴 주님의 진리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성령의 능력으로 도우셔서 주님이 의도하신 바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 주옵소서.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들의 부족한 한계를 넘어 더 깊은 것을 보고 알 수 있도록 성령께서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 이 세상에는 주님이 주시는 화평이 필요합니다.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사는 법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화평, 평화, 평안은 성경 전체에 퍼져 있는 개념입니다. 성경은 에덴동산의 평화에서 시작해서 영원한 평화로 끝을 맺습니다. 평화를 주제로 인류 역사 연대표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동산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짓자 그 평화는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다시 평화가 회복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이루셨기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참된 평화가 임합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평강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화’는 성경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입니다. 에덴동산의 평화, 죄로 인해 끊어진 평화, 십자가로 인해 사람의 마음에 다시 돌아온 평화, 그리고 평강의 왕이 다시 오셔서 세우실 평강의 나라, 마지막에는 영원한 평화로 이어지는, 이와 같은 흐름입니다. 성경에는 평화라는 단어가 4백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평화에 대해 지극히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큰 주제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자신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사탄의 대적과 인간의 불순종이죠. 천사들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이 평화 없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과 사탄이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원래 서로가 원해야 가능한 것이죠.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참된 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의 일곱 번째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일곱 번째 복, 곧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를 아주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셨습니다. 타락 이후 잃어버린 평화를 다시 경험하고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을 따로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대사, 사절이죠.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보다도 훨씬 더 큰 일을 합니다. 이들이 전하는 평화는 영원하며 실제적인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신다고 우리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도 견줄 수가 없습니다. 정치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정치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외교관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재자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왕이나 대통령이나 노벨상 수상자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과 같은 조직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단 조직이나 교회 연합 기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카터(Carter)나 키신저(Kissinger)나 사다트(Sadat)나 베긴(Begin) 같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사실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평화 중재자들은 늘 실패해 왔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터 대통령과 중동 지도자들이 만났을 때 온 세상이 평화의 전환점이라고 떠들썩했지만, 그 평화도 벌써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치적으로도 평화가 없고, 경제적으로도 평화가 없고, 사회적으로도 평화가 없습니다. 나라 안에도 평화가 없고, 민족 간에도 평화가 없고, 정치 집단에도 평화가 없고, 어떤 조직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가정에도 평화가 없고, 그 어디에서도 평화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워싱턴에는 평화 기념비가 참 많다. 전쟁이 끝날 때마다 하나씩 세우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도 참된 평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가 결코 잊지 못하는 통계가 하나 있습니다. “지켜진 평화 조약은 단 하나도 없다.” 이런 통계죠. 결국 평화란, 모든 사람이 재장전을 위해서 잠시 전쟁을 멈추는 아주 짧은 영광의 순간에 불과합니다. 국제연합(UN)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한 기구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1945년에 창설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끊임없는 혼란으로 가득합니다. 국제연합이 어떤 슬로건을 내걸었습니까? “후세들이 전쟁이라는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자.”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하루도 그 꿈을 이룬 적이 없습니다. 헛된 공상에 불과합니다. 뉴욕타임스가 1968년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기원전 36년부터 역사가들이 파악한 전쟁만 해도 14,553개나 됩니다. 1945년 이후로도 50~70개의 전쟁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폭력 사건이 164차례나 발생했습니다. 사실 1958년 이후로만 봐도 82개 나라가 분쟁으로 얽혀 있습니다.
닉슨 전 대통령이 1970년 선거 유세에서 “평화, 평화의 시대”를 말하면서 외치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평화의 세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평화를 단 하루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닉슨은 평화의 세대가 올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누린 평화는 33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역사학자들은 1815년부터 1846년까지, 그리고 1865년부터 1898년까지, 이렇게 두 세대의 평화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미국 원주민 전쟁을 제외하고 계산했기 때문이죠. 이 두 시기는 사실 미국 원주민들의 피로 물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미국 역사 속에는 평화의 세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전쟁이나 국제적 분쟁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 내에서 총기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 사이좋게 지낼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아주 위태위태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늘 어려움을 겪고 있죠.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전에 없이 정신적, 정서적 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정은 깨어지고, 학교에서도 문제가 계속되고, 행진, 점거, 시위, 집회, 항의, 데모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끝날 기미가 전혀 없습니다. 이유는 인간 안에는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 평화가 없으니, 그런 사람이 만들어내는 세상 역시 혼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지금은 정말로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 세상은 절실하게 화평하게 하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놀라운 구절에서 하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평화에 관한 다섯 가지 진리를 다뤄야 합니다. 평화에 대한 다섯 가지 진리입니다. 첫째는 평화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평화란 무엇일까요? 평화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평화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평화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실까요? 어떤 사람들은 평화란 갈등이 없는 상태, 다툼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공동묘지에는 다툼도 갈등도 없습니다. 그러나 묘지를 평화의 상징이라고 하지는 않죠. 하나님이 보시는 평화는 단지 무엇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말하면,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오히려 ‘의’가 존재하는 바른 관계의 상태를 말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란 두 사람을 사랑 안에서 다시 하나로 묶어주는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서로에게 “샬롬(shalom)” 이렇게 말할 때, “전쟁이 없기를 바랍니다, 갈등이 없기를 바랍니다”라는 이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의로움과 모든 선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이 임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샬롬은 선을 만들어내는 능동적인 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싸움을 멈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싸우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으로 채웁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단순히 휴전을 선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가 과거를 잊고 다시 품고 껴안을 수 있는 참된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능동적인 선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평화란 단지 빈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란 단순히 불편한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그 차이를 좀더 분명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휴전(truce)’과 ‘평화(peace)’는 다릅니다. 휴전은 총을 잠시 내려놓고 일정 기간 동안 서로 쏘지 않기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의 정의죠. 모두가 잠시 멈춰 서서 재장전하는 그 짧은 순간, 그것이 바로 휴전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란 진리가 드러나고, 문제가 해결되고, 서로가 서로를 껴안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단순히 전쟁을 멈추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갈등을 멈추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갈등을 더 깊게 만듭니다. 냉전일 뿐입니다. 냉전도 전쟁입니다. 갈등만 보이지 않게 가리고 싸움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평화를 시도하면 오히려 더 심각한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고, 문제를 지하로 숨겨버려서 결국 그 불씨가 스멀스멀 타오르다가 양쪽을 다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서로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을 떼어놓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서로 마주 앉아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다시 껴안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관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휴전이 아니라 평화가 필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결코 문제를 회피하지 않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조건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식의 평화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데도 덮어버리고 넘어가는 얄팍한 평화도 아닙니다. 성경의 평화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 정복해서, 두 사람이 다시 함께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듭니다. 마치 두 편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통스럽습니다. 때로는 씨름해야 합니다. 아픔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갈등이 잠시 더 깊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과정을 거쳐야 참된 평화가 옵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입니다.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나중에 18절도 다시 보겠지만 지금은 17절만 보겠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성경 말씀입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 곧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을 통해 평화에 이릅니까? 성결을 통해서입니다. 먼저 성결, 그리고 그 다음이 화평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결코 의를 희생시키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려면, 먼저 서로의 죄와 잘못과 미움과 쓴 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바로잡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성결을 통해서 평화가 옵니다. 성결을 무시한 평화는 성경이 말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그러니까 화평과 거룩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화평과 성결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화평과 의는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시편 85편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참된 평화가 있는 곳에는 의가 있습니다. 참된 평화가 있는 곳에는 거룩함이 있습니다. 참된 평화가 있는 곳에는 성결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문제 해결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우리는 모두 불필요한 다툼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희생하면서까지 갈등을 피하려 한다면, 우리의 원칙을 양보하게 되고 결국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휴전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잠시 멈춰서 재장전하는 것뿐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우리 주님은 매우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 말씀은 팔복과 완전히 반대 아닌가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분명히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자, 예수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괜찮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등이 먼저 해결되어야 참된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반드시 진리가 거짓과 부딪히고, 죄가 드러나고 다루어지고, 악이 폭로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는 ‘칼’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화평하게 하려면 진리를 반드시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에 진리를 말하면,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할 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먼저 미치도록 화나게 해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먼저 화나게 만들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먼저 기분나쁘게 만들어야 기분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참된 평화를 세상에 가져오는 과정도 똑같습니다. 먼저 ‘칼’로 베어내야 합니다. 그 후에 그 칼에서 참된 평화가 나옵니다. 성결의 칼, 의의 칼, 거룩함의 칼로 베어내야 합니다.
유다서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화평하게 한다는 것은 “저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와 믿음이 같지 않더라도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휴전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의와 거룩함과 정결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제시할 때 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양심을 찌르고, 논쟁과 갈등과 충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갈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해결될 때,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진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것은 원칙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신념을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불편해할 것 같으면 진리를 전혀 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죠.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지라도 반드시 진리를 말해야만 하고, 그 불편함을 지난 후에야 참된 평화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경적 평화는 그런 참된 평화를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결코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자주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는, 갈등이 해소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평화가 자리 잡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적 평화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다루지 않은 채 그냥 적당히 덮고 넘어가면서 평화를 이루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다루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분열을 일으키게 될 겁니다. 마음을 흔들게 될 겁니다. 질서를 흔들게 될 겁니다.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상황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직장에 가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간증을 하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고, 서로 화평하게 하고, 마음 속의 화평을 이루도록 돕고 싶은데, 평화를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서 이끌고 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죄 문제를 다루니까 듣기 싫고 불편하고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12장 5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참된 평화는 결코 휴전이 아니라 진리로 다스릴 때만 온다는 것을 아셨기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처음에는 반드시 갈등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후에 오는 평화가 진짜 평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은 너무 배타적입니다. 교단끼리 좀 더 연합을 해야죠. 서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잠시 내려놓고,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서 그 부분만 논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서로 모여서 공통점을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배교자들에게 복을 선언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류가 있는 사람을 만나셨을 때에는 언제나 그 오류를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평화는 진리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어떤 중요한 진리에 대해서 누군가와 의견이 다르다면, 저는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를 회피하면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단순히 휴전을 선언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도록 돕지 못하는 것이죠. 결국 화평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아무 문제도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나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의감이나 의로움이 없이 타협하거나 달래기만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참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사실은 아무 신념도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말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는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문제를 덮어두지 않습니다.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면,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잘못하고 있는 걸 알지만, 그냥 조용히 지나가고 싶어요. 아들이 무엇을 하든, 남편이 무엇을 하든, 친구들이 어떻게 살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태도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진리가 선포된 이후에만 옵니다. 그러므로 참 평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지하는 가짜 평화가 아닙니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재장전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휴전도 아니고, 냉전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평화란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의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의미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두번째는 평화에 대한 위협을 보겠습니다. 무엇이 평화를 방해합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죄입니다. 만일 평화가 의와 진리를 의미한다면,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죄와 거짓과 오류와 허위입니다. 왜 세상에 평화가 없는지 아십니까?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사람의 마음이 악하다는 겁니다. 그 악한 마음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이사야 48장 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예레미야는 사람이 악하다고 말하고, 이사야는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57장 21절입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예레미야 8장 11절에서도 말합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평화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평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없는 이유는 인간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평화를 알지 못합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입니다. 마가복음 7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마음이 오염된 인간입니다. 이런 모든 악한 것이 인간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런 마음에서는 평화가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평화는 거룩함과 의와 정결함의 결과이기 때문이죠. 내부가 죄로 가득하다면 평화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 3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자, 이 말씀을 보십시오. 참된 화평하게 하는 자는 의의 열매를 심는 사람입니다. 참된 화평은 의를 세우는 데서 시작합니다. 의가 세워지지 않으면 진짜 평화는 결코 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싸운다면 그 이유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제거하면 싸움은 끝납니다. 두 사람이 다투는데 서로 갈라놓기만 하면 아무 해결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무언가가 있어서 하나님과 전쟁 중이라면, 그 중간에 있는 죄를 제거하기만 하면 다시 하나가 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언제나 의를 심음으로 화평을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가 “먼저 성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상에서 참된 화평을 이루는 사람은 오직 사람들을 의로 이끌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이끌고, 하나님의 진리 앞에 엎드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외교관도, 정치가도, 사절도, 대통령도, 왕도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평화를 이루지 못한 이유이죠.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팔복의 처음으로 다시 데리고 갑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 문제를 먼저 다루지 않는다면, 앞의 여섯 단계를 지나지 않는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3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해 철저히 가난한 마음, 거지가 손을 내밀듯이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신의 죄를 보며 마음이 타들어가고, 아파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처럼, 절대적으로 주권적이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아무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는데, 그 온유함은 자신의 죄를 보고 애통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온유함 가운데 6절에서 말하듯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고, 7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은 8절에서 말하듯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해진 사람만이 무엇이 될 수 있습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러분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면 세상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왜 그렇습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언제나 의를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모든 상황에 하나님의 의를 적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를 기반으로 한 평화를 적용하려고 하면, 세상은 반드시 반발합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현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본질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냥 평화가 아니라 ‘의로운 평화’를 세상에 주려는 것입니다. 죄가 다루어질 때에만 참된 평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우십니까? 불안하십니까? 두려우십니까? 상담사를 찾거나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삶에 의와 정결함과 거룩함이 있다면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으십니까? 갈등이 있으십니까? 가정 안에서 가족들이 충돌합니까? 결혼생활과 가정에 의와 거룩함과 정결함이 있다면 그 가정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의가 바로 세워지면 하나님과 화평하고, 사람과 화평하고, 자기 자신과도 화평하게 됩니다.
따라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려면 반드시 팔복 전체를 거쳐야 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분명하게 보고, 아무 자격도 없는 비참한 영혼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미워하고, 스스로 얻을 수는 없지만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의를 거룩하신 하나님께 구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크신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시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는 그때, 그때에야 비로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천하고 별볼일 없는 사람들을 세상의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사용하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놀랍습니다. 상을 받은 것도, 신문에 이름이 난 것도, 주목을 받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이 사실은 세상을 정말로 화평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삶에 적용해서 평화를 알도록 도와주는 사람들, 하나님의 의를 관계에 적용해서 평화를 알도록 하는 사람들,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이 처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도록 돕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화평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주목을 받지는 않지만 실제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하려고 하면 세상은 항상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삶의 진리는 “우리는 갈등을 원치 않으니 무조건 피하고 조용히 지내자”가 아닙니다. 갈등을 피하는 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뜨거운 갈등의 한복판을 통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고통이든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평하게 하는 자이십니다. 예수님이 갈등을 피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지가야말로 갈등의 절정 아닙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예수님은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끝에서 참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구석구석 다 뒤지고, 상담자를 전전하고, 정상회담을 이어가고, 조약 위에 또 다른 조약을 쌓고, 이 종교 저 종교로 옮겨다녀도 평화를 찾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화는 환경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 평화를 빼앗습니다. 열이 나는 것은 외부 온도 때문이 아니라 우리 피가 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참 이상합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들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전쟁을 막거나 유가를 안정시키는 사람을 칭찬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상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싸우는 사람들을 더 높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링에서 서로를 때려 눕히는 것을 보기 위해서 기꺼이 돈을 냅니다. 세상은 언제나 전사들, 용사들을 가장 높이 기립니다. 항상 군인들, 싸우는 사람들이 영웅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힘과 남성성을 신처럼 숭배합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강하고, 거칠고,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영웅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여성도 마찬가지로 권리를 외치고, 요구를 내걸고, 갈등을 일으키고, 전통과 제도를 뒤흔드는 사람들이 영웅처럼 추앙을 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서 서로를 높이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과 행동주의자들은 “네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가져라.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빼앗기지 마라” 이렇게 말합니다. 끊임없이 더 많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죠. 사회가 이러한 내용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회에 복음이 가져오는 평화를 전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싸우는 자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이 로마 정부를 강철 주먹으로 짓누를 사람을 원한다. 가이사를 제압할 메시아를 원한다. 로마의 권세를 깨뜨릴 전사를 원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저런 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어?”
그리고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얕보면서 비겁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하면 우리와 싸웁니다. 그러나 저는 그다지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과 마주해야 한다면 아주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입니다. “그의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어디를 가시든 늘 갈등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절에서 사람들은 “그가 백성을 소동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백성을 소동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갈등, 갈등, 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평화의 사도였던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복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라고 했던 바울 역시 어디를 가든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어디를 가든 항상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4장 5절을 보면 사람들이 바울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디모데후서 3장 12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우리도 세상에 나아가 평화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의와 거룩함과 정결함을 통해서만 오는 참된 평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지 않으니 오히려 더 많은 전쟁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갈등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맞아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값을 치러야 하고, 담대하게 우리가 옳다고 아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뒤로 물러선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어떤 상황이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의를 적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화평하게 하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의를 그 상황에 가져오는 일을 합니다.
자, 지금까지 평화의 의미를 살펴봤습니다. 의의 풍성한 복입니다. 평화의 원수는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를 반드시 다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고 싶지만 때때로 너무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죄 가운데 살고 있다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진짜 화평하게 하는 자라면 그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과 전쟁 중입니다. 저는 당신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죄를 분명히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당신에게 전합니다.” 담대하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혹은 두 그리스도인이 갈등하고 싸우고 있다면, 문제를 피해서 조용히 넘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화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이 문제를 의롭게 해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요? 문제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셋째, 평화를 이루시는 이는 누구십니까? 평화의 근원은 누구십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평화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이 평화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 밖에는 어떤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약 전체는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으로 가득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3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그리스도를 ‘평강의 주’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역시 하나님이 평화의 근원이심을 말하는 선언들로 가득합니다.
평화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한 가지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사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지 않으시면 결코 평화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평화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완전한 평화 가운데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절대적인 고요함과 절대적인 조화를 이루며, 완전하게 하나 되신 분입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는 갈등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평화만 있습니다. 그 평화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평화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뿐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바로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화로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과 사람의 손을 붙잡아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 사람을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부부가 이혼 심리 중이었는데 서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 언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네 살짜리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 크게 충격을 받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또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을 잡아당겨서 결국 둘이 손을 맞잡게 했다고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된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게 하는 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평화의 근원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알기 전에는 결코 평화를 알 수 없습니다. 다른 평화는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평화를 이룬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평화라니요? 십자가에는 평화가 전혀 없는데요. 혼란에 빠진 군중이 소리를 치면서 예수님께 침을 뱉고,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조롱하고 저주했습니다. 제자들은 도망갔어요. 천둥과 번개가 치고 땅이 흔들렸어요. 한낮에 갑자기 끔찍한 어둠이 찾아왔죠. 예수님은 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좌우의 강도들도 욕을 퍼부었습니다. 무엇이 도대체 평화롭단 말입니까?” 십자가가 평화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십자가가 참된 평화를 이루는 의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갈등이 있습니다. 그 갈등을 통과한 후에만 참된 평화가 임합니다.
이번주에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의 <평화의 아이(Peace Child)>라는 책을 제가 다시 읽었습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한번 꼭 구해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놀라운 선교 이야기입니다. 리처드슨 선교사님은 인도네시아의 이리안자야(Irian Jaya) 섬에서 사위(Sawi) 부족을 섬기고 있었는데요,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죽으심의 뜻을 이해하도록 전달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위 부족은 다른 부족과 끊임없이 전쟁하고 복수에 복수를 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어서 평화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독특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한 부족이 아기를 직접 안고 가서 다른 부족에게 전해준 후에 그곳에 남겨두는 방식으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그 아이를 선물로서 영원히 다른 부족에게 주는 것입니다. 풍습에 따르면,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 두 부족이 반드시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문제는 서로를 너무 미워했기 때문에, 아무도 귀한 자기 아이를 상대 부족에게 줄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유일한 아이, 어린 아들 하나를 품에 안고 나섰습니다. 아내가 뒤에서 울부짖으면서 쫓아왔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자기 마을을 뛰쳐나와서 저 적대 부족의 마을로 들어가서 그 아이를 넘겨 줬습니다. 그 아이가 ‘평화의 아이(Peace Child)’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평화가 유지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드디어 알맞은 비유를 찾았다.” 예수님이 바로 ‘평화의 아이’이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한 평화는 지속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오래 살아계십니까?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평화의 아이이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느꼈을 깊은 고통, 그리고 그 사위(Sawi) 부족의 아버지가 자기 몸에서 난 단 하나의 아이를 적대 부족에게 넘긴 후에,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평화를 위해 치룬 대가의 가치는 엄청났습니다. 그렇게 갈등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아이이십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근원이시고, 예수님은 평화의 현현이시고, 성령님은 평화의 대리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고, 평화를 나타내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평화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도록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거하시고,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거하시고, 평강의 영이신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삼위 하나님 전체가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평화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평화를 원하십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결국 이 세상을 영원한 평화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 동안에 잠시 혼란이 가득할 뿐이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서 평화를 이루게 하셨고 장차 다시 오셔서 평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고 영원한 평화로 이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평화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갈등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전쟁이 이렇게 많은가”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전쟁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전혀 원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 “왜 하나님은 전쟁을 멈추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시는데,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그 전쟁을 시작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전쟁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보십시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화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무엇을 누리게 하려고 한다고요? “평안”입니다.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왜 세상을 이기셨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이 주신 화평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휴전은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평화는 만들 수 없습니다. 마음에 평화를 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 상담사가 되거나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은 근원 없는 평화입니다.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가정을 회복시키려 하는 것도 근원 없는 평화입니다. 하나님 없이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것도 근원 없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가진 평화는 하나님께서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고요한 안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를 가진 자는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여전히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주 안에 거하기만 하면 평화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저는 바닷속에 있는 이른바 ‘바다의 완충지대(cushion of the sea)’이라는 것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바닷물은 표면에서 요동치지만, 깊이 내려갈수록 잠잠해지죠. 그렇게 계속 깊이 내려가면 가장 깊은 곳에 ‘바다의 완충지대’라고 불리는 영역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영역은 아주 고요하고 아무런 방해도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동식물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조사해 보니까 수천 년 동안 거의 흔들림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바다의 완충지대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바다의 완충지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주변이 아무리 불안해도, 평강의 왕을 아는 사람, 평강의 영이 내주하는 사람, 평강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가진 사람의 영혼에는 평화라는 완충지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의 의미는 의이고,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죄입니다. 평화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 이제 네번째입니다. 평화의 전달자입니다. 누가 평화의 전달자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복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전달자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15절은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화로 부르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부터 20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여기서 “화목하게 하다”라는 말은 곧 “화평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이 평화를 만드셨고, 우리에게 평화를 만드는 직분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평화를 이루셨고, 우리에게 평화를 이루는 말씀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너희에게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라고 간청한다.”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평화군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이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도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삶을 다스리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 가지입니다. 실제적인 부분입니다. 첫째, 화평하게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스스로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평화의 복음, 곧 ‘복음이 주는 평화’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정말 좋아합니다. 신약 여러 곳에서 사용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가장 익숙한 구절은 에베소서 6장 15절일 겁니다.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한 신을 신고.” 복음은 온통 평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 싸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으로 여러분에게 전가되었을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복음이 평화를 전해줬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평화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자의 첫번째 특징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면 그 평화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 죄가 들어오면 그 평화는 언제나 흔들리게 되지 않습니까?
죄된 삶을 살면 하나님과 마음을 열고 교제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죄악된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온전히 주실 수 없지 않겠어요? 죄는 복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평화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가고,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한다면, 그 사람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이것 없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다른 누구도 화평하게 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렇게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 저는 주님과 화평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이들을 화평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두번째 특징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이 염두에 두신 것이 바로 복음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복음 전도야말로 가장 화평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전쟁 중인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게 하는 것,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더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일 뿐 아니라 사실 여러분과도 갈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바깥에 있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 오기만 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서 여러분과도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여러분의 형제가 됩니다. 복음 전도는 화평하게 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끝내고,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과 여러분과의 단절을 끝내게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5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로 이끄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보아야 합니다. 정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정치인이나 외교관이 이룬 그 어떤 정치적 성취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더 위대한 일입니다. 복음 전도야말로 궁극적이고 영원한 진짜 평화입니다.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얼마나 큰 책망이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로 가득 차서는 스스로 만족하고, 로마와 싸울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신학을 주장할 권리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목을 짓밟고 올라섰습니다. 관계를 맺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더 높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는 곳마다 다툼이 생기고, 가는 곳마다 갈등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사회를 여러 계층으로 나누고…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완전히 잘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스스로 영적 엘리트라고 자처하며 모든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비천한 죄인이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다.”
사도행전 10장 36절은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평화는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바로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정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G. 캠벨 모건(G. Campbell Morg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팔복의 다른 모든 특성을 가진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다.” 정말 훌륭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서로 화평을 이루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을 서로 하나되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멀어진 이들을 다시 가까이 이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쉽지 않지만, 화평하게 하는 자는 이 일을 감당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의식하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방식으로 말하지만, 모든 본문을 다 살필 시간이 지금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몇 가지 예만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율법이 말하던 그대로죠. 그러나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비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머리가 텅 비었구나, 멍청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공회에 잡히게 된답니다. “미련한 놈”이라는 말은 더 심각한 말입니다. 지옥 불에 들어갈 위험이 있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그러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내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그럴 때는 예물을 내려놓고, 예배를 멈추고, 가서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그 다음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나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 없이 그저 예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그 문제를 바로잡고 난 다음에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평하게 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만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의를 이루지 못하면 참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란 죄를 제거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서 화해해야 합니다. 서로 화평해야 합니다. 관계를 바로잡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5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다시 말해서 원수와도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팔복으로 돌아가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는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즉시 그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가서 죄를 말하고 회개하도록 권하라는 겁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세 명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회개하도록 권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에 말해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 거 왜 괜히 문제를 더 키우려고 하십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자는 개는 그냥 두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왜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문제를 터뜨리냐고 불만을 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냥 두는 것은 그저 냉전일 뿐입니다. 휴전일 뿐이지 평화가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의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문제를 해결할 때에 비로소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따르면 지식을 따라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신다면 아내와의 관계를 먼저 바로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이제 그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특히 교회 가는 길에는 더 이상 그 얘기 하지 말자. 예배드려야 하니까.” 이렇게 그냥 두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냉전일 뿐입니다.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늘 말하듯이, 때로는 그 과정에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50절에서 “너희끼리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 사이에 문제가 있다면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다리가 어떻게 세워지는지 본 적 있으십니까? 다리를 만들 때는 한쪽에 단단하게 기초를 놓고, 또 반대쪽에도 단단하게 기초를 놓습니다. 그리고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줄을 던집니다. 줄을 아주 팽팽하게 연결하는 거죠.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케이블을 한 번 걸고 나면 다시 돌아와서 또 한 번 걸고, 또 한 번 걸고, 이렇게 여러 번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다리가 생깁니다. 연결된 줄이 충분히 견고해지면 그 위에 강철을 올립니다. 강철이 충분히 많이 놓이면 그 위에다 콘크리트를 붓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다리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평화를 이루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아무도 자기 쪽에서 작은 줄을 하나 먼저 저쪽 건너편으로 건네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십시오. 조금 비용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약간의 고난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의미는 의입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죄입니다. 평화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평화의 전달자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우리이죠. 여러분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복음 전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도록 돕고, 갈등 중인 형제들을 화해시켜야 합니다. 저도 이렇게 의식적으로 실천하려고 합니다. 이제 네번째입니다. 일상적인 갈등, 그러니까 아주 심각한 전쟁은 아니지만 가벼운 갈등 상황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언제나 합의점을 찾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또 신학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만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미워하는 건 아니죠.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서로 존중합니다. 다만 신학적으로 생각이 다를 뿐이죠. 그래서 만날 때마다 “자, 우리가 서로 동의하지 않았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더 얘기할 게 있습니다”라고 한다거나, 또는 제 의견과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제 입장을 강요하는 테이프를 한 주머니 들고는 가서 “형제님, 주님이 이걸 꼭 들으라고 하셨어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늘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화평의 지점을 찾는 거죠. 일단 그 화평이 세워지면 그 위에 무언가를 쌓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시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와서 “저에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어떤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저는 늘 화평의 지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늘 항상 그렇게 합니다. 언제나 화평의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느끼신 건 정말 귀한 일입니다.” “저도 그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이 문제에서는 우리가 확실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네요.” “물론 이 영역에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 부분만큼은 우리가 서로 동의한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화평의 지점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사는 네번째 방법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의 상급입니다. 화평의 가치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아가면 어떤 상급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약속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호칭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제가 맥아더 집안 사람이라는 것이 참 좋습니다. 아주 유명한 스코틀랜드 가문입니다. 맥아더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죠. 심지어 존 맥아더라는 이름의 백만장자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습니다. 그냥 이름이 좋다는 겁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 참 기쁩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셨던 저희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것도 기쁩니다. 모두가 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가치, 그리고 영예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휘오스(huios)’입니다. 테크나(tekna), 그러니까 ‘자녀’가 아닙니다. 테크나(tekna)는 부드러운 애정의 관계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휘오스(huios)는 존귀함, 명예, 지위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애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귀함과 명예를 말씀하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 단어는 성품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별된 영광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이죠. 다른 모든 팔복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 화평하게 하는 자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늘 제가 말씀드려 왔듯이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혹은 화평하게 하는 자이지만 지금은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분열과 갈등으로 가득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고자 갈망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아마도 이 동사의 주어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녀를 규정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이죠.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일 때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미래형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미래를 내다보게 합니다. 동시에 계속되는 미래형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때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다고요? 몇 주 전에 나눴던 내용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이렇게 물으시면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 제가 결심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제가 그때 강대상 앞으로 나갔습니다. 손을 이렇게 번쩍 들었거든요. 새가족 카드도 작성을 했고요, 상담실에서 상담도 했고, 기도실에도 갔어요.” 그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저는 저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제 삶을 만지셨습니다. 그 긍휼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싶습니다. 제 마음은 청결합니다.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것이 옳은 대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라의 참된 아들들에게 주신 조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내 참된 자녀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아버지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저는 제 집보다 제 아들들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은 굉장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우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집보다 저를 더 사랑하십니다. 저는 제 재산보다 제 자녀를 사랑합니다. 물론 저는 재산이 없으니까 당연하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재산보다 여러분을 더 사랑하십니다. 야곱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베냐민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창세기 44장 30절을 보면 야곱의 생명이 베냐민과 묶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여러분과 저에게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자녀입니다. 저는 성경이 우리를 ‘하나님의 눈동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눈동자.
히브리어로 ‘눈동자’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바로 동공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육체 중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이 동공입니다. 정말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민감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동공을 보호합니다. 무언가가 눈을 향해서 다가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죠. 아무도 여러분의 눈동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느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눈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불쾌해 하시죠. 우리는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왕관을 만드실 때 우리는 그 왕관의 일부가 될 겁니다. 시편 56편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자신의 병에 담아 두신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이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억의 병에 저장하십니다. 옛 히브리 관습이죠. 어떤 일로 인해서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을 병에 담아 가지고는 사람들이 그 슬픔의 깊이를 알 수 있도록 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자신의 병에 담아두십니다. 우리가 어떤 슬픔을 겪어왔는지 기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시편 116편은 우리가 죽을 때, “여호와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왕자와 왕과 제사장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시편 16편 3절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서는 “귀히 쓰는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된다고 말하는 부분이 참 좋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무릎 위로 뛰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가 뭔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연약함과 죄를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불완전한 섬김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진리를 여러분에게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계속해서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상속자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여러분의 선을 위해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도록 지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일이라면 저는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이제까지 나눈 팔복이 완전수인 일곱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어떠한 존재이며 무엇을 행하는지 보여주는 일곱 가지 특징입니다. 오늘 밤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화평하게 하는 자인지 스스로를 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저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마음의 정결함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온유함도, 애통함도, 심령의 가난함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나아오기 전까지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고, 만족함을 얻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상한 마음으로,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가질 수 없었던 의를 갈망하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의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그 의를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겪었습니까. 바울이 되기 이전에는 사울이었습니다. 자기 의에 가득 차서 모든 것을 갖춘 줄로 착각했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교만했습니다. 자신이 행한 율법의 행위로 인해서 긍휼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은 죄로 가득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순간에 하나님 나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화평하게 하는 자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자신의 죄를 애통하는 자로 바꾸셨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외친 사람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로 만드셔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말한 사람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자로 바꾸셔서 “내가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라고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얻었노라”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 비참한 마음을 정결하게 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오늘 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머리를 숙이고 계시는 동안 잠시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함께 나누며 정말 놀라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지막 이 순간에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에 영접하셨습니까?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의가 여러분에게 전가되기를 구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여러분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이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까? “저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시다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긍휼과 정결함과 의를 얻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 삶에 그리스도를 모시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 깊은 책망을 느낀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집에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직장에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분란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시다면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 예수님, 저를 화평하게 하는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제가 걸어가는 모든 걸음마다 하나님의 화평의 향기가 드러나게 하옵소서. 온 세상 가운데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접점을 찾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금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결단을 내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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