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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팔복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모든 진리가 삶 속에 자리를 잡으면 그 결과가 9절에 나타나고, 이어서 10절, 11절, 12절로 이어집니다.

팔복으로 사는 삶의 첫번째 결과는 긍정적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의 원리와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정반대되는 말씀이 바로 이어집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팔복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는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박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화평을 이루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신자는 화평하게 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평강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칼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신자는 항상 이런 긴장 속에 살아갑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화평의 사명을 감당하지만, 그 화평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을 일으키는 자가 되어서 결국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이죠.

팔복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팔복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의 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사람을 생각하면 우리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이 진리에는 놀라운 능력과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 창에 비친 인물이나, 석고상이나, 나무나 돌로 새겨진 성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죠.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 이 모든 놀라운 성품을 완전히 갖춘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스테인드글라스 속의 성인을 다루시는 분이 아닙니다. 석고로 만든 모형을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산상수훈의 이 놀라운 서론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신자의 참 모습, 참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상적인 모습이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죄인이라고 해서 기준을 낮추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을 이루도록 신자에게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팔복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죠. 참된 안녕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참된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팔복의 원리들을 따라 사는 사람이 이런 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께 이런 마음으로 나아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믿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이런 태도들이 어느 정도는 드러나야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온전히 누리기까지 매일 더 성장하고 자라나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복을 살펴봅시다. 팔복의 모든 요소를 갖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비록 아주 조금만 그렇더라도, 심령이 가난한 자, 죄를 슬퍼하며 애통하는 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여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을 구하며 동시에 긍휼을 베풀 준비가 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바라야 합니다. 비록 미약하게나마 이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에게서 이러한 성품들의 꽃이 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점점 자라고 성장해서 최소한의 흔적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는 특징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여덟 번째 복이 따라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나님 나라의 성품이 풍성하게 자리잡고 충만해질 때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를 따를 때에, 그 과정 속에서 고난과 아픔이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화평하게 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갈등을 일으키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신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정리할 수 있도록 야고보서를 비롯해서 몇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즉, 고난이 있을 것이고, 시험이 있을 것이고,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팔복의 성품을 실제로 사는 신자의 삶에는 반드시 세상이 반응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팔복 말씀에서 보았던 모든 성품들은 악한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세상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교만과 자기 과시, 자아를 세우는 데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죄를 슬퍼하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죄를 직면하지 않으면서 괜찮을 거라고 끝없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죠. 세상은 온유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만함을 좋아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오직 선물로만 주어지는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세상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죠. 세상은 긍휼을 모릅니다. 정결함을 모릅니다. 화평하게 하는 법을 모릅니다. 신자 안에서 이런 성품들이 더 풍성하게 드러나고 꽃필수록, 이 성품들은 세상의 체계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아주 정면 충돌합니다. 그리고 팔복을 실제로 살아가면 항상 이런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제 이 마지막 복에서 드러나는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보겠습니다. 10절, 11절, 12절에서 두드러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박해. 둘째, 약속. 셋째, 태도입니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박해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절은 10절을 적용한 말씀입니다. 10절이 “복이 있나니”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11절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면서 우리를 직접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저는 이것이 하나의 복이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10절에도 “박해”라는 단어가 나오고 11절에도 다시 “박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같은 복인데 11절에서 더 확장되어 설명된 것입니다. 또 하나, 이 둘이 하나의 복이라고 믿는 이유는 단 하나의 결과만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10절과 11절을 보면, 결과는 10절 끝에서만 나옵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모든 복에는 성품과 함께 약속이 따라오는데요, 10절과 11절에서는 10절 끝에 하나의 약속만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약속이라면 ‘복이 있나니’가 왜 두 번 나올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자에게 두 번 복을 선언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박해받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두 배로 복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이 경우에는 정말 그 복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 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박해받는 자는 두 배의 복을 받습니다.

이제 먼저 누가 이 박해를 받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누가 박해를 받는 사람일까요? 사실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고, 11절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라고 할 뿐이죠. 그러나 누가 박해받는 사람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10절과 11절에서 말하는 복 있는 자는 3절부터 9절에 나오는 복 있는 자들과 동일합니다. 성품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팔복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팔복을 더 많이 드러낼수록 세상의 반감이 더 심해집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 살수록 더 큰 세상의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첫번째부터 일곱번째 복을 살아내는 자들이 여덟번째 복을 경험합니다.

다른 성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입니다. 이 말씀은 미래에 대한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정확히 적용됩니다. 11절입니다.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 자로서 박해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따라 살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된다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그리고 팔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팔복의 성품을 살아낼수록 우리가 사는 사회와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성품이 더 크게 드러날수록 그 결과는 더 불가피해질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는 항상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합니다.

어떤 사람이 새 직장을 얻게 되었는데, 방탕하고 악한 사람들만 거기에 있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할지 두려워했습니다. 매우 비열하고 거칠고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첫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까 아내가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어땠어요?”라고요. 그래서 “어, 잘 지냈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거든.” 이렇게 말했답니다. 물론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무도 모르면 그냥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팔복의 성품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치욕을 함께 나누고, 고난에 동참하고, 세상에서 의롭게 살기 시작하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은 항상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될 겁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과 그의 체계에 정면으로 맞서 사는 삶은, 여러분의 메시지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적대감과 박해를 불러옵니다. 제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박해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한 번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삶에 별다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박해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받으셨던 바로 그 반응을 동일하게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이 많으신 분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위대하게 화평을 이룬 분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랑에 응답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 평강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사랑이 넘치고 관대하고 은혜롭고 친절하고 화평을 이루신 분이셨음에도, 가는 곳마다 반감과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왜입니까? 죄를 정면으로 대면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들도 항상 세상의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역사를 따라 의로운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경건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창세기 시작부터 계속 동일합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아벨은 경건하지 않고 불의한 형 가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아벨의 의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도 늘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따르면 모세도 애굽의 화려한 삶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항상 대가가 따릅니다.

청교도 저술가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정결하다 해도 경건함이 고난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가시밭길이며 피로 물든 길이다. 확고한 원리로 삼으라.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칼과 몽둥이를 만날 것이다. 신앙고백에 십자가를 꼭 포함해야 한다.” 구원을 받았다는 놀라운 보증 중 하나가 바로 박해입니다. 여러분이 박해받지 않는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은 신앙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셨습니다. 28절로 올라가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다시 말해서, 대적자들이 여러분을 대적하고, 복음을 미워하고,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싫어할 때, 그 적대감은 그들이 멸망으로 향한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그 박해는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의 적대를 경험하는 것은 여러분의 구원이 실제라는 증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환난들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고, 조금 고난을 당한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존경받기도 하고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즉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일부이다. 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진 일이다’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여러분을 박해할 때는,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이고, 동시에 여러분의 구원이 참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어떤 박해도 받고 있지 않다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반발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떤 파문도 만들지 않고,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딘가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살고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모든 기자들은 우리가 비교적 관용적인 시대, 비교적 관용적인 나라, 국가나 정부 차원의 박해가 적은 환경에서 살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관용적인 나라에서 가장 관용적인 시대에 산다 할지라도, 십자가는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삶을 온전히 살고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실제로 살아갈 때에 반드시 반감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순종하는 아들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살아내는 사람들은 사탄에게는 거슬리는 존재입니다. 늘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해서 세상의 태도가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사탄이 신자들을 속이는 거짓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연예계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분야에 있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두고 사람들은 “거봐요, 세상이 변했어요”라고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도 인기도 얻고, 유명해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정도 받고, 사회의 일부가 되고, 아무런 문제 없이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의의 기준을 낮추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아서 도대체 뭘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면 세상이 당장 토해낼 겁니다. 문제는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기준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더 관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삶을 살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기를 원하고, 유명해지기를 원하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세상은 결국 미워하고 반감을 가질 뿐입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화형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년 내내 박해가 계속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10절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 모두가 평생 동안 극심한 박해를 지속적으로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 중 일부를 선택해서 박해할 것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저는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어느 시점에서는 십자가로 인해 박해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화형을 당하는 시대는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화형당하는 것이 더 어려울까, 아니면 직장 동료들이 기독교 신앙을 불편해하기 때문에 평생 승진도 못하고 늘 미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 공동체, 혹은 동료들로부터 배제를 당하는 환경에서 사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은가? 또는 이웃들의 악을 묵인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이라서 동네 사람들이 더 이상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은가? 이처럼 신자를 향한 세상의 반감은 아주 다양합니다. 제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심각하고 극심한 박해를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본질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도가 다를 뿐이지 그리스도를 위한 치욕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이, 어떤 사람은 조금 덜 경험할 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원한다면 박해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평생 단 한 번도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냐구요? 세상의 기준을 인정하고 순응하시면 됩니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냥 함께 어울리면 됩니다. 세상이 사는 방식 그대로 사십시오.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말도 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멸망한다고 그런 말도 하지 마시고, 죽음에 이르는 심판이 있다는 말도 하지 마시고, 지옥 이야기도 꺼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고 다른 모든 종교 체계는 거짓이라고 가르치지도 말고 선포하지도 마십시오. 세상과 구별되지 마십시오. 세상이 사는 것처럼 그냥 그대로 사십시오. 세상의 농담에 웃고, 오락도 즐기고, 하나님을 조롱할 때 미소를 짓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때 그냥 내버려두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기를 부끄러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결코 박해받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한 뒤에는 자신을 살펴보아 믿음 안에 있는지 한번 스스로 확인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진지하게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면서 단지 불순종 가운데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방식으로 살기로 결심한다면 누가복음 9장 26절 말씀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너희를 부끄러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제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것, 그리고 여러분도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끄러워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누가복음 6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면, 사람들은 진실을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야 합니다. 팔복의 삶을 살아가려면 세상의 반응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그 현실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불의한 세상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면 아무런 반응 없이 그냥 지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선포하셨을 때, 그러니까 사역 초기에 이 말씀들을 주셨을 때에,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의논을 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공생애 초기부터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참 흥미롭게 생각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에도 팔복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은 병행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누가복음 6장 7절을 보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11절에서는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라고 합니다.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제대로 드러내시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그 주변에 모여 있는 무리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들리도록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들으라, 처음부터 분명히 말한다. 내 나라에 들어오려면 대가가 있다. 내 나라의 삶은 왕좌와 영광과 면류관과 명예와 칭찬을 누리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높임을 받는 삶이 아니다. 내 나라에 들어오려 한다면 너희는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라.” 이런 분명한 선언이 처음부터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것입니다. 누구도 착각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설교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체계를 거슬러 사는 삶으로 부름받은 것이고, 그에 따른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날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장 먼저 생업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석공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이스라엘의 석공은 이방 신전 건축 계약을 맡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후대의 이방인 성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겁니다. “아, 나는 석공인데 지금 이방 신전을 짓고 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 수 있지? 만약에 내가 이방 신전 짓는 일을 그만두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기 시작하면 일자리를 잃게 될 거야.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게 될 텐데...”

혹시 여러분이 재단사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재단사라면 거짓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믿음을 갖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말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겠구나.” 어떻게 됩니까? 생업에 영향을 받습니다. 또 불경건하고 부정직하고 잔인한 사람 밑에서 일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런데 믿음을 갖게 되어서 새로운 원리를 따르기 시작하면 더 이상 그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직장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해되시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산다면 직업 자체를 바꿔야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을 버는 방식이 바뀔 수도 있고,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의존하던 방식을 떠나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즉,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직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이후 100년쯤 지났을 무렵에 어떤 사람이 터툴리안(Tertullian)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 터툴리안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꼭 살으셔야겠습니까?” 여러분 보이십니까? 선택은 오직 하나입니다. 비록 죽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충성은 단지 직장 생활만 흔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도 뒤흔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친구들이 하는 일에 참여하고, 즐기는 방식대로 즐기고, 같은 활동을 하고,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면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여전히 친구들과 예전처럼 어울릴 것인가? 여전히 사람들과 여행하고 활동하고 과거의 일에 참여할 것인가? 내 사회생활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되실 겁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전에서 축제가 열렸습니다. 아주 큰 사회적 행사입니다. 음악에 맞춰서 춤도 추고 오락도 즐겼습니다. 희생제물로 바친 고기를 서로 나눠 먹었습니다. 사실 우스꽝스러운 일도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고기가 아까워서 불 위에 잠깐 흔들어서 그냥 털만 그슬리고는, 일부를 제사장에게 떼어주고 나머지를 가져와서 친구들과 아주 방탕한 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자 이런 고민이 생깁니다. “이제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으러 가야 할까? 오락을 즐기러 이방 신전에 가야 하나?” 사회적 관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더 심각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때로 외로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주 깊은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정도 흔들어 놓았습니다.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집안에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온갖 문제가 생겼습니다. 종종 사랑하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 대가가 훨씬 더 가혹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형을 당했습니다. 네로는 자신의 정원 잔치를 환하게 밝히기 위해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횃불 삼아 불태우곤 했습니다. 역청을 발라서 불을 붙였습니다. 또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야생동물 가죽 속에 꿰매 넣고는 사냥개들을 풀어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지가 찢기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펄펄 끓는 납 물을 부었습니다.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위에 뜨겁게 달궈진 놋쇠판이 놓였습니다. 눈이 뽑히고 신체 일부가 잘려 눈앞에서 불탔습니다. 손과 발이 불에 타들어가는 동안 고통을 더하려고 찬물을 부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온갖 죄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표현 때문에 식인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성찬식에서 사람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서로를 잡아먹는다고 했습니다. 또 음란하다고 모함했습니다. 사랑의 잔치를 음란한 욕망의 연회라고 주장했습니다. 평화의 입맞춤이라는 말을 부도덕한 행위라고 왜곡했습니다. 방화죄로도 모함했습니다. 로마 대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죠. 정치적 혁명가라고도 낙인찍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베드로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화재가 일어났을 때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전가하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정을 파괴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정치 체계를 전복하려고 한다고도 했습니다.

로마는 아주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예수님 이후 시대에 로마 제국은 영국 제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까지, 북쪽으로는 독일 최정상에서 남쪽 북아프리카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전체라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광대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제국을 어떻게 통합할지, 어떻게 하나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제국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로마 제국 전체를 상징하는 한 사람이죠. 황제, 그러니까 시저, 가이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국의 결속을 위해서는 로마 황제 제도가 핵심이다. 황제를 신격화하자. 모든 사람이 로마 황제를 경배하도록 만들고, 신적 영예를 돌리고, 제국 곳곳에 황제의 신성을 기리는 신전을 세운다면 제국 전체가 하나로 묶일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아주 천천히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황제 숭배가 하나의 종교적 체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실제로 황제 숭배가 로마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었습니다. 해마다 제국에 속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의무적으로 로마 황제 앞에서 향을 한 줌 불태우면서 “황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로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만이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로마의 황제 숭배 의식을 거부했습니다. 로마 당국은 향을 태우는 사람에게 리벨루스(libellus)라고 불리는 증명서를 주었습니다. 이 증명서를 받은 사람은 의식을 행한 후에 어떤 신이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숭배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그저 모든 사람이 황제에게 연결되는 것을 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리벨루스 증명서를 절대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항상 불법적인 예배자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반역자들, 충성하지 않는 집단, 제국의 결속을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찍혔습니다. 한 시인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허덕거리며 웅크린 무리, 그들의 유일한 죄는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낮은 기준으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팔복 목록에 ‘박해가 불가피하다’라는 진리를 더하셨습니다. 누구에게요? 팔복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입니다. 어떻게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박해를 받습니까? 이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방법입니다. 11절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자, 여기에 이제 세 가지 방식이 나옵니다. 박해하고, 욕하고, 거짓으로 온갖 악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박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쓰인 말은 헬라어 디오코(diōkō)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뒤쫓다, 몰아내다, 쫓아내다’라는 뜻입니다. 달려가면서 추격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결국 ‘박해하다, 괴롭히다, 악하게 대하다’라는 의미로 발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괴롭힘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잘 들으십시오. 제가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팔복은 내적인 태도였습니다. 모두가 마음의 태도를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외적인 종교 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내적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전부가 내적인 태도입니다. 이 말씀도 태도입니다. 이 말씀 또한 태도입니다. 박해를 받을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바로 이겁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한 태도, 그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핍박이 따른다면 그대로 달게 받겠습니다” 이런 태도입니다. 여기 쓰인 표현은 헬라어에서 수동태 분사입니다. 허용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스스로 박해를 허락하는 사람들이죠. 스스로 박해를 당하도록 허용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절대 도망치지 않고, 필요하다면 박해를 마주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원리를 살아내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수동태 완료 분사입니다. 완료 시제는 한 번 일어난 일이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즉 지속적인 태도, 팔복의 삶을 살기 때문에 생기는 어떤 결과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지속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박해를 받아왔고 지금도 기꺼이 박해받기를 원한다. 이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종종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꺼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씨름합니다. 제가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저는 그걸 기꺼워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저도 때로는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필요한 말을 담대하게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상황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며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 그 결과가 무엇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나 자신을 맞추고 싶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종종 이렇게 합리화를 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면 복음을 슬쩍 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몰래 행동하는 설교자를 필요로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몰래 움직이는 예언자, 숨어서 증언하는 증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담대하게 맞서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쫓기고 추격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려 했습니다. 박해라는 말에는 추격하고 몰아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어떤 사람에게는 그 끝이 감옥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쫓기는 형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회에서 정말로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다면 세상과 어울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전처럼 친구들과 파티에 갈 수가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 이웃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따라할 수 없습니다. 예전처럼 다른 부부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그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따라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무리 밖으로 밀어낼 겁니다.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원래 그래야 마땅합니다.

두번째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11절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욕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쓰인 헬라어는 ‘오네이디조(oneidizō)’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이빨에 던지다”라는 뜻입니다. 이빨에 던진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장면에 사용된 표현이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욕했습니다. 조롱하고 비웃고 욕했습니다. 멸시했습니다. 즉 누군가의 얼굴에 대고 던지는 겁니다. 더럽고 악의적이고 조롱하는 말을 퍼붓는 겁니다. 그게 본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전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전에 속해 있던 활동에서 배제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악한 말을 할 겁니다. 우리에 대해 말할 때 아주 거친 표현을 사용할 겁니다. 예수님께도 그렇게 했습니다. “저 사람은 창녀들과 술 마시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삶을 살려면 핍박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욕을 들을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주 거친 말을 할 겁니다. 아마 아끼는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 요소입니다. 정말 감당하기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내치려고 하는 것 자체는 견딜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목회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 곁에 오래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빨리 제 앞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게다가 제가 다른 목회자들과 달리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그렇습니다. 제가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조금이라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정말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의 모임에 거의 초대받지 못합니다. 이 정도는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악의적이고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그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보스턴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던 한 사람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더럽고 파시스트적인 돼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저를 “더럽고 파시스트적인 돼지”라고 말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또 그 사람이 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납니다.

저는 설교하다가 체포된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남부의 어느 지역에서 설교를 했는데, 순찰차가 와서 저를 체포하고는 감옥에다 가뒀습니다. 계속 이런 일을 하면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하겠다고 협박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말씀하신 세번째 요소,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한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말한 내용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꾸며낼 때는 정말 참 힘이 듭니다.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변호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악한 말로 비방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인의 사생아라는 비난을 퍼뜨렸습니다. 사실이 아니죠. 이런 비방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속 있었습니다. 아서 핑크는 “한 사람에게 세상의 저주와 그리스도의 축복이 함께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증명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얼마나 타락한 모습입니까. 그리스도의 축복과 사람의 저주가 같은 사람에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사람을 세상은 저주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불경건한 자들의 원한을 불러일으킵니다. 뱀이 거룩한 씨를 대적하는 원수라는 증거입니다.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정직하십니다. 정말 정직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는 “복이 있다, 복이 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첫 설교라면 분위기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알려줘야죠.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를 알려줘야죠.” 그런데 예수님이 처음 하신 말씀들은 그 기준이 너무 높아서 듣는 사람들이 뒤로 넘어질 정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말씀하신 후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방식으로 살고 싶다면, 너희는 핍박을 받을 것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쫓겨날 것이다. 너희는 욕을 들을 것이다. 즉, 사람들이 너희에 대해 악의적이고 거친 말을 쏟아낼 것이다. 그리고 결국 너희에 대해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퍼뜨릴 것이다.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러니 준비하라. 정말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너희는 피할 수가 없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이렇게 되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왜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왜 사람들이 여러분을 박해하는지 아십니까? 제가 충격적인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여러분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가 되십니까? 정말입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미워합니까?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여러분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을 미워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과 16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나를 죽였으면 너희도 죽일 것이고, 나를 미워했으면 너희도 미워할 것이며,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너희가 나에게 속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거룩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거룩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아십니까? 세상은 오랫동안 완전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완전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점점 더 스스로 만족하며 자신감에 차 있었죠. 기준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처음으로 완전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자기 확신이 무너졌습니다. 자신들이 서 있던 기반이 무너졌습니다. 완전한 사람 앞에서 자신들이 책망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완전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기준을 맞출 수 없다면 그 기준을 없애서 보이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세우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기준을 없애버리려고 할 겁니다. 그래야 스스로 만든 만족스러운 착각 속에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이처럼 의를 위해 살아가면 박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제자들에게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안드레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받았죠.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천천히 죽어가도록 밧줄로 십자가에 묶어둔 채로 방치했습니다. 베드로는 아홉 달 동안 감옥에 갇힌 후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습니다. 바울은 네로에게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야고보, 마태, 맛디아, 바돌로매, 도마도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요한만이 밧모 섬에서 외롭게 유배되어 죽었을 뿐, 모두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된 거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려고 하면 언제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그 열매는 영원합니다. 열매는 영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보여도 10절 말씀처럼 천국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겨도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팔복을 마무리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시작도 제대로 못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저녁 말씀으로 교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의 원리와 진리에 순종하게 하셔서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기준을 낮추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옵소서. 담대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성령 안에서 행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을 책망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분명한 기준이 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을 구하게 하거나, 아니면 거부하도록 만들게 하옵소서. 우리가 중립적인 상태에 만족하지 않게 하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만족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토하게 만들었던 그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여러분이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동안에, 한 가지를 꼭 떠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우리 교회 청년이 공원에서 예수님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해서 구타를 당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몇 주 동안에 걸쳐서 회복한 후에 로스앤젤레스 7번가와 브로드웨이 모퉁이에서 다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공격해서 두개골을 네 군데나 골절당했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져서 뇌압을 줄이기 위해서 두개골에 세 개의 숨구멍을 뚫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예수님 곁에서 깨어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일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청년이 보여준 용기와 담대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경건한 삶으로 주변 사람들의 책망을 받는 삶을 살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억지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거만해서도 아니고, 지나치게 요구해서도 아니고, 권위적으로 굴어서도 아니고, 말을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니고, 여러분 안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분명해서 세상이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그런 이유로 말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완전함이 여러분 삶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살아내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팔복의 증거가 되며, 어떤 대가든 감당하면서 예수님의 치욕을 함께 지고 갈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기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잃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어떤 대가든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바꿉니다.

지금 이 고요한 순간에 마음속으로 주님께 말씀드려 보십시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렇게 고백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세상을 책망하는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너무 깊이 묻혀 있어서, 사람들이 저를 보아도 아무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러시다면,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직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린 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이 그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저는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걸 잘 압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의 바울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데 항상 실패합니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령님께 순간순간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가진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팔복을 살아내기 위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잘 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값을 치를 준비가 된 사람인지, 우리가 정말로 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사람인지, 그래서 계속해서 박해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인지, 욕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인지, 거짓된 온갖 비난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인지 우리의 삶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위해 산다는 의미라면,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주님께 충성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그렇게 되어 있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항상 이렇게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아온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나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아직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린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번이 정말로 그 결단을 내리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대가를 치르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지금 이 시간 결단하게 하옵소서. 또 우리가 기준을 낮추지 않게 하시고, 세상에 맞추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 세상을 변화시키게 하옵소서.

오늘 저녁 허락하신 성도들의 교제로 인해서 감사드립니다. 이 교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지요.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무리에 속하지 않습니다. 배제되고 거부되어서 어울리지도 못합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풍성하고 놀라운 교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성도의 교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소중한 영혼, 모든 귀한 생명으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고 섬길 수 있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사소한 문제로 나뉘지 않게 하옵소서. 서로를 비판하지 않게 하시고, 이 교제 안의 모든 소중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아직 이 교제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주셔서 주님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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