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는 마태복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8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여름 안식월 동안에는 마태복음 연구를 잠시 멈추고 베드로후서 1장을 살펴봤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다시 기쁜 마음으로 마태복음 연구를 이어가겠습니다. 1장부터 7장까지는 이미 살펴봤으니까, 오늘부터는 이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마태복음을 8장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장부터 12장까지는 예수님의 생애와 마태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기적 중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아홉 가지 기적을 특별히 선정해서 기록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기적들이죠. 예수님의 신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기적들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유대인들이 8장과 9장에 나오는 모든 기적을 보고 그 후에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후에도,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마귀에게 속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결론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이 마태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시고자 모든 것을 보여주셨지만, 유대인들은 오히려 반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3장부터 유대인을 떠나 이방인 교회를 세우시는 전환이 일어난 겁니다. 따라서 이 8장부터 12장까지는 성경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총 세 가지 기적으로 시작됩니다. 첫 네 구절에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기적이, 5절부터 13절까지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이, 그리고 14절과 15절에서는 열병을 앓는 여인을 고치시는 기적이 나옵니다. 첫번째 세 가지 기적입니다. 8장과 9장에는 모두 9가지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 개씩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세 가지 기적과 그에 대한 반응이 세 번 반복되는 형태입니다. 이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창조에 필적하는 기적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본질로만 설명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인간은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이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기적으로 증명하는 이런 방식은 마태복음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도 나타납니다. 함께 요한복음을 살펴보면서 기적의 중요성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물론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 요한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 우리가 그에게서 신성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 인간의 모습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보았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다." 어떻게 봤을까요? 어떻게 드러났을까요? 요한에게는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습니다. 요한이 이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완전한 현현이심을 보여주는 일련의 기적들을 기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동일한 결론에 이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의 핵심만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선언입니다. 20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같은 장 36절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내셨을까요? 말씀하신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행하신 일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초자연적인 창조의 능력을 통해서죠. 창조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바로 그러한 창조의 기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5절을 보면 이런 내용이 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다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가 말했지만 너희는 믿지 않았다.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았고, 내가 전하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능력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고 있다. 내 말은 부인할 수도 있다고 해도 내가 행한 일들은 어떻게 부인하겠느냐?" 3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풍자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분명히 초자연적인 일이었으니 말이죠. "그 중에 어떤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37절입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를 믿지 말라. 내가 하나님임을 너희에게 보여줄 수 없다면,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행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으라. 이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믿게 하기 위함이다." 14장 10절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믿지 않느냐? 이것이 너희에게 문제가 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일들을 보고 믿으라."
15장 24절에서도 같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예수님을 거부한 죄이죠,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보십시오, 이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봤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을 내리라는 겁니다. 20장 30절에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으로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입니다.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도 마태처럼 일부만 기록했다. 여기에 기록된 기적은 단지 일부일 뿐이다. 다른 기적도 많이 행하셨다. 이것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너희가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기록한 것이 무엇입니까? 표적들, 기적들입니다. 이어서 뭐라고 합니까?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잘 보십시오.
요한의 전체적인 의도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를 알고 믿어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으로 돌아가 보면 마태의 목적도 동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왕의 자격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증거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매우 전략적인 지점에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5, 6, 7장에서 강력한 설교를 마치신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종교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고, 삶이 잘못되었으며,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지지하고 믿고 소망하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셨는데, 그 어떤 랍비의 말이나 유명한 문헌도 인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반복적으로, 사실 그대로, 절대적으로 "이것이 진리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계속해서 "너희가 들었으나, 내가 말하노니"라는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모든 말씀을 마치셨을 때, 7장 28절입니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왜 그랬을까요? 29절입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확고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반면 서기관들은 어땠을까요? 다른 랍비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자신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르침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른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저 말씀하셨을 뿐인데 그 권위가 놀라웠습니다. 유대인의 종교 체계를 완전히 뒤엎으셨습니다. 위선을 벗기셨습니다. 영적 가면을 쓴 자들의 정체를 폭로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런 극적인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1세기 유대인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런 말을 할까? 무슨 권위로 말을 할까? 우리가 왜 이 말을 들어야 하나? 왜 귀를 기울여야 하지? 왜 믿어야 하지?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도대체 어디서 올까? 어떻게 자신의 말을 진리라고 단언할 수가 있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8장과 9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권리가 있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8장과 9장에서 하고 싶은 말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장에 걸쳐 나오는 아홉 가지 사례를 보면 예수님은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병든 육체도 고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것이 "무슨 권위로 이런 말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지금부터 처음 일어난 세 가지 기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적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세 가지 기적이 있는데,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일,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일, 여기서 중풍병이란 마비 증상을 보이는 환자입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병을 앓는 여인을 치유하신 일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기적입니다. 이 첫번째 세 가지 기적에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 기적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인 육체를 치유하시는 기적이었습니다. 물론 삶이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체적 고통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영적인 것이나 위로, 물질적 축복, 환경의 변화, 섭리만이 아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육체적 필요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질병 때문에 생겨나는 깊은 고통까지 살피셨습니다. 이후에 두번째 기적들을 통해서는 더 영적인 부분을 다루시고, 세번째 기적들을 통해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인간의 궁극적인 원수인 죽음까지 다루십니다. 하지만 이 첫번째 기적 세 가지를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뿐 아니라 긍휼하심을 보여주시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다루고 계십니다.
둘째로 주목할 점은 세 가지 기적 모두에서 간구에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를 보여줍니다. 첫번째로 나병환자가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간구했고, 두 번째로는 백부장의 친구들이 "그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있습니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세번째는 누가복음 병행구절에 덧붙여진 것처럼, 베드로 가족의 친구들이 예수님께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으니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진심 어린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기적에서 세 번째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모든 경우에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셨다는 점입니다. 동정심이 있으시고 깊은 연민도 가지고 계셨지만, 동시에 주권자이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각각의 경우에 예수님은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네번째로 주목할 점은 정말 아름다운 점인데, 이 모든 기적에서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셨다는 겁니다. 첫번째는 세상의 쓰레기로 여겨지던 나병환자였고, 두번째는 이방인이었고, 세번째는 여인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관심을 두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비천하고 연약하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처음으로 밝히신 대상이 유대인도 아니고 사마리아의 창녀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는 당시 유대 사회에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보이실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긍휼도 보이실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자비롭게 응답하시되, 동시에 주님으로서의 권위도 행사하셨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것은,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렸다는 점입니다. 12장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하시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유대인의 견고한 종교 체계를 흔드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이 나타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종을 고치시고, 여인을 일으키시고, 바다를 다스리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맹인을 보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걷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시고, 예수님께 데려온 병든 자를 모두 치유하셨습니다. 놀라운 권능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의 앞부분을 보면, 이 부분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장에서는 족보를 통해 메시아의 법적 자격을, 2장에서는 탄생과 예언의 성취를 통해 메시아의 선지자적 자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고,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해서는 메시아로서의 영적 자격을, 설교를 통해서는 신학적 자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적을 통해 가장 중요한 자격,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참고로 8장은 4장 끝부분에서 이어집니다. 그 사이에 산상수훈이 들어있습니다. 4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기억하시나요?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치유의 기적을 베풀고 계셨습니다. 산에 오르시고, 설교를 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다음, 다시 이 일을 시작하신 겁니다.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모든 이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중에서 첫번째 세 가지 기적을 소개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첫번째 기적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1절에서 4절까지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이게 다입니다. "정말 멋진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이 이야기가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깊이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입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니." 어떤 산일까요? 가버나움 마을 근처에서 설교를 하신 바로 그 산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알려드릴까요?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흠모해서도, 믿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권위 있게 말씀하시는 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고치시며 다니시는 분도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군중을 모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군중이 보고 싶어 하는 일이 2절에서 일어납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헬라어로는 '접근했다'라는 뜻인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나병환자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이 뭔지 아시나요? 헬라어로는 '레프로스(lepros)'입니다. '비늘' 또는 '비늘 모양'을 의미하는 '레피스(lepis)'에서 유래했습니다. 영어로는 레프러시(leprosy)인데, 이 헬라어 레프로스(lepros)를 그대로 반영한 겁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나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있는데, 이 역시 '비늘' 또는 '비늘 모양'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두 경우 모두 피부가 눈에 띄게 비늘처럼 일어나는 피부병을 가리켰습니다. 증상이 피부에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피부병이었죠. 레위기 13장에서 보듯이 이 병은 피부보다 더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비늘 모양이라는 용어로 이 병을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센병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 나병이 같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사용된 용어가 정말 같은 질병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질병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면역력이 생겼거나, 인간 사회가 변했거나, 또는 특정 세균이나 박테리아의 존재 여부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질병도 있기 때문에 두 질병이 정확히 같은 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곧 살펴볼 레위기 13장의 설명을 보면, 매우 비슷한 질병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 병이 무엇이었든 간에, 우리가 제대로 비교할 수 있으려면 나병이 어떤 질병인지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 연구를 해온 대부분의 학자들이 한센병과 나병이 비슷하다는 관점을 취해왔기 때문에, 오늘 아침 우리도 같은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서운 병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성경에서 나병이라 불리는 이 질병은 분명히 이집트, 애굽에서 옮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나병이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은 이것이 미코박테리움 레프라에(mycobacterium leprae), 나균이라는 세균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질병의 흔적은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시신의 피부에 나병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이를 통해 나병이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 있을 때 나병에 감염이 되었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올 때 나병도 함께 왔던 겁니다.
나병은 그 자체로 공포스러운 병이었기에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많은 법을 제정하셨는데, 나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법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현대의 나병 유병률은 10%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오늘날에는 90% 이상의 사람들이 나균에 노출되더라도 나병에 걸리지 않는데, 자연 면역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나병의 전염성이 더 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27절을 보면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으나 오직 나아만만 치료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전염성이 더 강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에서 나병 유병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캘리포니아 주의 발병률이 가장 높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연간 신규 환자가 30-4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300명이 넘습니다. 현재는 DDS 답손이라는 약물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약물로는 나병의 표면적인 증상만 통제할 수 있을 뿐이지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완치가 불가능한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환자는 죽을 때까지 이 병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 나병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자 이 병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주 분명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레위기 13장을 읽어드리겠는데요, 용어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NASB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듣기만 하셔도 좋고, 혹시 같은 번역본을 갖고 계신다면 함께 보셔도 좋겠습니다. 꽤 긴 구절을 읽어드릴 텐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보시면 정말 흥미로울 겁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기 13장 1절입니다,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다시 말해서, 나병이 의심되는 사람은 누구든 제사장에게로 데려가야 한다는 겁니다.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그러니까 모근까지 감염되어 털이 하얗게 변한 것으로 보아 단순한 피부 질환이 아니라 더 깊은 감염으로 보인다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그 사람을 격리해서 증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라는 겁니다.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이렇게 2주를 격리해서 지켜보는 겁니다.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이런 경우는 건선이나 습진, 백반증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 심각하지 않은 피부 질환이지 심각한 나병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그러니까 상태가 계속해서 나빠지면 나병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두 주간의 검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한 나병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9절에 나옵니다.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 이런 경우에는 이미 어떤 병인지 매우 분명하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격리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다시 말해서, 만일 전신이 하얗게 변했을 뿐 진물이 나거나 벌어진 생살이 없다면 심각한 나병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문헌에서 헤로도토스와 히포크라테스는 백피증이라는 질병에 대해 기록했는데, 피부의 색소를 공격하여 피부를 희끄무레하고 얼룩덜룩한 색으로 만드는 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백피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습진이나 건선, 오늘날의 백반증 같은 무해하고 심각하지 않은 피부 질환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전신에 이런 증상만 나타났다면, 단순히 하얗게 변하거나 얼룩덜룩하게 창백해지는 정도라면, 나병이 아니었기에 정하다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나병을 봐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종형 나병으로서 아주 심각한 나병이고, 다른 하나는 결핵양 나병이라고 불리는 무해한 종류로 피부를 얼룩얼룩하게 만들 뿐 1년에서 3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나병은 확인 과정을 거쳐야 했고 아주 주의 깊게 검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만일 누군가 심각한 종류의 나병에 걸린 경우라면, 13장 나머지 부분에 기록된 대로 대처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38절입니다. “남자나 여자의 피부에 색점 곧 흰 색점이 있으면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피부의 색점이 부유스름하면 이는 피부에 발생한 어루러기라,” 어루러기란 오늘날의 습진입니다. 심각하지 않은 종류의 나병을 뜻하는 히브리어를 이렇게 번역한 겁니다. “그는 정하니라 누구든지 그 머리털이 빠지면 그는 대머리니 정하고.” 어떤 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요. “그러나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는 나병이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발생함이라.” 즉 색점이 붉은 종기처럼 부풀어 오르는 등의 증상이 있다면 나병이라는 겁니다. 추가적인 검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제 45절을 보겠습니다. 핵심 구절입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나병에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LA 타임즈 최신호의 한센병에 대한 의학적인 분석 기사를 읽었습니다. 나병은 호흡할 때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고 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염되는 것입니다. 나병이 전염되는 방식 중 하나가 호흡기 감염이기 때문에 나병환자가 입을 가려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또 나병환자가 만진 물건을 만졌을 때도 전염됩니다. 나균이 물건 표면에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같은 바늘로 문신을 받은 사람들이 동일한 나병에 걸린 사례가 있었습니다. 나병환자의 옷을 불살랐던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또한 나병환자는 평생 윗입술을 가린 채 "부정하다! 부정하다!" 이렇게 외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했죠. 그래야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최소 2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어야 했습니다. 바람이 불 때는 45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유대교에는 61가지 부정한 목록이 있었는데, 첫번째가 시체였고 두번째가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겁니다. 접촉하지 말라는 겁니다. 구약의 나병에 대한 매우 중요한 논문을 쓴 R.K. 해리슨(R.K. Harrison)은 레위기 13장에 나오는 모든 증상이 나병의 전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충분히 나병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모든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명백한 나병의 경우에는 격리하지 않고 바로 진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심각한 나병은 정말 끔찍하고, 끔찍하고, 끔찍한 질병입니다.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약물로) 관리할 수가 있어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나병에 걸리면 반점 같은 신체적 증상과는 별개로, 신경계를 공격해서 즉시 사지가 마비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나병에 걸리면 코가 떨어지고 손가락도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환자들이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자신도 모르게 사지를 닳아 없어지게 해서 손상시킨다는 겁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카빌의 나병 요양소에서 연구한 결과 이런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병 환자는 잘 맞지 않는 신발을 신어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서 발가락이 닳아 없어지게 됩니다. 손으로 일하는 여성 환자들은 손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느끼지 못해서 손가락이 닳아 없어집니다.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나병은 골수까지 침투합니다. 혈액 순환계가 감염되는 겁니다. 그러면 뼈가 수축되면서 피부와 조직을 안쪽으로 당겨서 손발이 마치 갈고리처럼 변형됩니다. 여기에 피부 감염으로 인한 분비물까지 더해져서, 이미 감염되고 위축된 손가락으로 일을 하면 결국 손가락이 닳아 없어집니다. 정말 끔찍한 질병입니다. 환자들은 말 그대로 사지를 잃게 됩니다.
게다가 나병은 눈을 공격해서 실명케 하고, 치아를 빠지게 하고, 내부 장기를 공격해서 불임을 유발합니다. 사실 통증은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흉측한 질병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이마, 귀, 코, 턱이나 뺨에 하얀색이나 분홍색 반점이 생기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그 후에 점차 퍼져나가면서 얼굴 전체에 스펀지 같은 종양과 덩어리가 생깁니다. 전신으로 퍼져서 간, 골수, 혈액까지 침투합니다. 감각을 잃고 결국에는 실명하게 되죠.
의료 선교사였던 후이징거(Dr. Huizinga)라는 의사는 나병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나병이라고 부르는 이 병은 일반적으로 신체의 특정 부위에 통증이 생기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감각 상실이 뒤따른다. 감염된 부위의 피부는 본래의 색을 잃고 두꺼워지며 반질거리고 비늘 같은 각질이 생긴다. 질병이 진행됨에 따라 두꺼워진 부위는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더러운 상처와 궤양이 된다. 피부, 특별히 눈과 귀 주위의 피부는 주름이 고랑처럼 깊게 패이면서 집중적으로 부종이 다수 발생한다. 따라서 나병환자의 얼굴은 사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간다. 손가락은 떨어지거나 오그라든다. 발가락도 비슷한 영향을 받는다. 눈썹과 속눈썹도 빠진다. 이쯤 되면 그처럼 비참한 상태의 사람이 나병환자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만져봐도 알 수 있고, 심지어 냄새로도 알 수 있다. 매우 불쾌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균이 후두를 공격하는 물질을 생성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거칠어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눈으로 알 수 있고, 느낌이나 냄새로도 알 수 있고, 심지어 목소리로도 알 수 있다. 또 나병환자와 함께 얼마 동안 지내면 입에서 불쾌한 맛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모든 감각이 나병 환자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병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전체 인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든 일부에만 그렇든 상관없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환자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습니다. 무조건 진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사무엘하 3장 29절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악한 요압을 저주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압의 집에서 나병 환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최악의 저주였습니다.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보다 더 비참한 사실이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흉측한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을 텐데, 거기에 더해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었습니다. 나병은,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죄의 상징이었습니다. 죄는 온 몸을 더럽히고, 추하고, 혐오스럽고, 치료할 수 없으며, 전염성이 있습니다. 죄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소외시키며 버림받은 자로 만듭니다. 그래서 모든 나병환자는 자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죄의 산 증거로 살아가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부정한 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철저하게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탈무드의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병환자들이 보이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돌을 던진다." 또 다른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병환자가 걸었던 거리에서 파는 달걀은 절대 먹지 않겠다." 나병환자들을 증오하고 경멸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실 때, 마을의 수많은 병든 바리새인들은 제쳐두시고 이런 나병환자를 먼저 찾아가신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2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너무 흥분해서 성경 구절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킹 제임스 버전에는 '보라'라는 단어가 있는데, 왜 있는지 아시나요? '보라' 혹은 '보시오' 또는 일상적인 말로 하면 '믿기 힘들겠지만'이라는 뜻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나병환자들은 절대 다가오지 않습니다.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수치심 때문에도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지만, 사회적 낙인, 구약 율법, 정결 의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얼굴을 가린 채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녔을 뿐입니다. 그래야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았으니까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 나병환자의 모습에서 네 가지가 눈에 띕니다. 첫째,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보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저는 이 모습이 좋습니다. 기어오듯 살금살금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쉿, 쉿, 비켜주세요,"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당당히 나아왔습니다. 헬라어 원문의 표현이 참 좋은데, 직역하면 '나병환자가 다가왔다'입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아마도 군중들이 순식간에 갈라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저는 자신의 필요를 너무나 절실히 느낀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참 인상적입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아서 군중 앞에 나서지도 못했을 텐데,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수치심도 잊었고, 사회적 낙인도 잊었습니다. 그저 앞으로 나아왔을 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절실했던 겁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나병환자들은 죽은 사람처럼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나병환자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에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냥 나아왔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지키는 것보다 도움을 받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병환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아, 이 부분이 정말 좋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나병환자의 외모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혼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고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수염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내면은 비참하게 썩어 있었고, 죽은 자의 뼈와 같았습니다. 반면에 이 나병환자는 겉은 흉하고 비참하고 더러웠지만, 내면은 아름답고 경건했습니다. 예배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나병환자가 "주님"이라고 했을 때, 단순히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절을 하면서 경배를 드렸겠습니까? 여기서 쓰인 헬라어 프로스쿠네오(proskuneo)는 엎드려 절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주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 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통해 알게 됐을 겁니다. 수많은 치유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병환자의 친구 중 하나가 치유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나병환자는 주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왕과 하나님 앞에서만 이렇게 엎드리기 때문에 저는 나병환자가 예배하는 마음으로 왔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병환자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배하러 왔습니다. 영혼이 육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는 예배하러 왔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러 왔습니다.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입니다.
셋째로, 나병환자는 겸손한 자세로 나아왔습니다. 정말 멋진 모습 아닙니까?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나병환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것처럼 자신의 뜻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치유받아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지도 않았고,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만 이 병에 걸리고 다른 사람들은 걸리지 않았다면서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리나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치유받고 싶습니다"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이 원하신다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니 제가 무엇을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만 했습니다. 정말 멋진 모습 아닙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께 치유를 요구하고, 온전함을 요구하고, 자신들의 치유를 주장하라고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 사람에게는 주장할 것이 없었습니다. 먼저 예배를 드렸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주님이 원하신다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렌스키(Lenski)의 말처럼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원하신다면 산 송장과 같은 상태로 남아있기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먼저 예배를 드리고 자신을 위한 어떤 요청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병환자로 남게 되더라도 여전히 믿음을 가지고 떠났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병환자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Dunasai, dunamai, dunamis’는 능력, 다이너마이트를 의미하는 헬라어입니다. "주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주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알고 있고 확신합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항상 모든 것을 임상적으로 분석했습니다. 누가의 표현을 빌려보겠습니다.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그런데도 나병환자는 "주님은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확신을 어디서 얻었을까요? 아마도 마태복음 4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이 능하시다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능하시다고 하면서도 뭔가 어서 일을 하시라고 강요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실 수 있는지조차 의심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입니다. 깊은 필요가 있었기에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았기에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깨달았기에 겸손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믿음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본문에는 이렇게만 나와 있지만, "그러자 군중 모두가 숨이 멎었다"라고 덧붙일 수 있을 겁니다. 나병환자는 절대 만지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레위기 5장 3절을 보면 부정한 자를 만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나병환자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깨끗한 사람이 자신을 한 번이라도 만져주는 것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사실 만지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신 후에 천사들이 노래하고 땅이 흔들리고 천둥이 치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극적인 장면은 없습니다. 저는 이런 간결함이 참 좋습니다. 아주 간결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였다는 큰 증거 중의 하나는 성경 기자들이 불필요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고 글을 썼다면, 아마 18장 정도 썼을 겁니다. "그러자 나병환자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설명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영감의 큰 증거입니다. 인간이었다면 대단하게 부풀렸을 테니까요. 성경은 그저 손을 내밀어 대셨다고 할 뿐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내가 원하노니,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즉시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치유자에게 가서 치유를 받은 후로 계속 좋아지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그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우리가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해지지만, 예수님이 만지시면 그 부정함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병든 것을 만지면 감염되지만, 예수님이 만지시면 깨끗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그 장면이 어땠을지 정확히는 모르지겠만 저는 상상이 됩니다. 쪼그라든 갈퀴 같던 손이 순식간에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손이 되었을 겁니다. 발과 얼굴도 완전히 새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지시자 나병환자는 즉시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문드러진 이마, 눈썹과 속눈썹이 다 빠진 눈, 비늘처럼 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된 피부, 망가진 코, 목구멍, 눈, 갈퀴처럼 변해버린 손가락과 발가락이 순식간에 온전해졌습니다. 정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의 소위 치유라는 것들은 이런 전능하신 능력에 비하면 완전히 무의미하기 그지없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치유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원하는 나병환자를 골라서 치유해 보라고 해도 이렇게는 못할 겁니다. 소위 치유자들은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비하면 한낱 어리석은 소리일 뿐입니다. 세계 곳곳의 모든 문명에 치유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말 어리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치유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런 치유자들은 손가락을 새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발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그것도 즉시 말입니다.
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누구에게도 한 마디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네요.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에 들어오신 후에 있는 첫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바로 순종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좋다. 네가 치유를 받았으니 이제 이렇게 해라. 두 가지이다. 첫째, 모세가 말한 대로 하여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 모세는 구약에서 놀라운 규례를 두었습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졌을 때는 성전에 가야 했는데, 정말 놀라운 의식이었습니다.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레위기 14장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나병이 치유되었다고 생각했다고 합시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물론 드문 일이었겠지만 그런 경우가 있었을 겁니다.
우선, 새 두 마리를 가져와서 흐르는 물 위에서 한 마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옵니다. 이것들을 살아있는 새와 함께 죽은 새의 피에 적신 다음, 살아있는 새를 자유롭게 날려 보냅니다.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과 옷을 씻고 몸을 깨끗이 합니다. 7일을 기다린 후에 다시 검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나서 머리카락, 머리, 눈썹을 모두 밉니다. 그 후에는 흠 없는 숫양 두 마리, 암양 한 마리,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분의 삼, 기름 한 록의 제물을 바칩니다. 그런 다음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피를 섞어 바르고, 마지막 검사를 받습니다. 치유가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벽에 걸 수 있는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과거 나병환자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라는 증명서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4장의 규례를 이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제도를 무너뜨리시는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설명입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사역하시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 피하셔야만 했기 때문이죠.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자나 정치적 지도자로 보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아서 로마에 대항하려 했던 일 기억하시죠? 또 다른 이들은 "당시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시는 시기였기 때문에 높임 받기를 원치 않으셨다"고도 합니다. 이 모든 설명이 일리는 있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시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성전으로 가서 모세의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라. 8일 동안 검사를 받고, 나병에서 나은 사람으로서 네 친구들과 함께 가서 검사를 받으라. 제사장들이 하는 모든 검사를 받으라. 그러면 결국 '이 나병환자가 완전히 나았다'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때 이렇게 말해주어라. '누가 저를 고치셨는지 아십니까? 나사렛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내린 결론이라는 덫에 걸리게 될 것이다." 보이십니까? 정말 훌륭한 방법입니다. 제사장들이 먼저 나병환자가 나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직접 검사하고 확인한 결과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은 나병환자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사실을 떠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치셨다는 소문이 먼저 퍼진다면, 제사장들은 아예 검사하는 것조차 꺼려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나병환자는 예수님 말씀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와 있듯이 도처에 다니면서 입을 놀렸습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는 좀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아침에는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을 고치는 것과 죄를 용서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여러 번 하셨는데요. 왜 그러셨을까요? 이런 기적들을 행하시면서 질병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기적이 또 다른 영역에 대한 권능을 보여주는 예시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에 대한 겁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의 비유를 발견했습니다. 이 본문은 저에게 회심을 보여주는 비유 같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병은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와 매우 닮았습니다. 죄는 퍼져나가고, 추하고, 혐오스럽고, 전염되고, 고칠 수 없고, 사람을 추방자로 만듭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는 확신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나병으로 인해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심도 이렇게 일어납니다. 죄라는 병의 혐오스러움 때문에 절망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도에서 너무나 부족한 부분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회적 낙인도, 배척당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 끔찍한 병에서 치유받고 싶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압도했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유행을 좇아가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두번째로, 나병환자는 예배하러 왔습니다. 저는 진정한 회심이 일어나는 것은 절박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한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의 위엄을 인정하고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하러 올 때라고 믿습니다. "주님,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는 진정한 구원에는 이러한 죄에 대한 비참함에 더해 주님께 경외심을 갖고 주님으로서 예배하는 확신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나병환자는 겸손하게 나아왔습니다. 저는 참된 구원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의지도, 자기중심성도, 자기효능감도, 합당함도, 가치도, 권리도, 주장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온유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병환자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믿음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서 비참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나아오면 예수님이 만져주시고 정결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죄라는 병이 나병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받으면,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두 가지를 해주겠니? 첫째,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거라. 율법에 순종하거라. 둘째, 사람들이 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하라. 너의 말이 아닌 너의 삶에서 발견하도록 하라." 참 흥미로운 비유 아닙니까?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상이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스스로 검증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입으로만 떠들어대고 우리가 사는 방식으로 뒷받침할 수 없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한 남자가 이렇게 외치며 돌아다닙니다. "예수님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으셨어요! 저 좀 보세요. 전에는 나병환자였는데 완전히 깨끗이 나았어요! 호산나!"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지 않는 건가요?" "아, 나중에 갈 겁니다." 간증을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간증은 가치를 잃게 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드러내실 겁니다. 바로 여러분의 삶이 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죄로부터의 영혼의 치유를 보았습니다. 제가 언젠가 천국에 가면, 그 나병환자에게, 지금 천국에 있을 거라고 믿는데, "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이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천년 전 살았던 그날의 이야기가 지금도 이렇게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며 얼마나 가슴 벅찬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만져주시고, 특히 우리 가운데 죄라는 나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들을 정결케 하여 주시고, 오늘이 지나기 전에 깨끗하게 하여 주옵소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시는 분이 계시다면, 나병이라는 병이 두렵게 느껴지신다면, 정말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죄 가운데 있어 영원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에 비하면 말입니다. 오늘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시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시고, 내면에서 느끼며, 성령님의 음성이 여러분을 이끄는 것을 느끼신다면, 그 음성에 순종하시겠습니까? 그러시리라고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만지시고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불순종이 성령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그것조차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놀라운 능력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만지시고 깨끗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늘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셨음을 알 수 있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기도실로 가야 할 이들이 있다면 이끌어 주옵소서. 이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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