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도 마태복음 8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마태가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이 놀라운 복음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16절에서 22절까지 말씀의 제목은 "무엇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가" 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는 따르려는 사람들을 거절하시는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시고, 사랑이 넘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왜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류를 위해 돌아가신 세상의 구주 예수님은 처음 오셨을 때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을 공부하다 보면 사람들의 불신과 거부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신분이 너무나 명백하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사역, 죽음, 부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1장은 "자기 백성에게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하고, 요한복음 5장은 "너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실 때 사람들은 "우리는 이 사람의 다스림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모든 말들은 그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대면했을 때 인정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반응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거부는 수많은 증거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세상은 마치 법정에서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를 보고도 사실과 완전히 반대되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권위는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46절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시력을 회복한 맹인은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예수님의 지혜는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람들이 동전을 가지고 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말씀하신다는 것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모든 이들을 경탄하게 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5절에서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라고 말하면서 놀라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셨습니다. 산 위에서 무리를 먹이셨고,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8절입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말 그대로 사람들을 압도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우시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다스리시는 모습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 33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무리가 놀라며 "이스라엘에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무화과나무에 다가서시자 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0절은 "그들이 보고 놀랐더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평정심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도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조금의 두려움도 없으셨고,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4절에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랍비보다도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요한복음 7장 15절에는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또 예수님의 열두 살 소년 시절에는 성전의 선생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율법 체계에서 벗어난 예수님의 독자적인 가르치심에 전율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의식에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자비심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채로 남자와 살고 있는 여인, 창녀이자 간음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사랑으로 대하시며 정결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7절에는 "그들이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이 놀라웠습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었습니다. 초자연적이며 신성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 6장 6절의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그런 걸까요? 어떻게 이렇게 확실한 증거들을 보고도 등을 돌릴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의지적으로 죄를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사람들은 죄를 사랑하기에 증거를 무시하고 자신의 죄악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반대방향으로 달려갈 뿐입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예수님의 능력, 위엄, 힘과 같은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흥미거리를 찾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인격에 매료되었지만, 결국 빛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처럼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지금부터 본문에서 이 유형에 속한 세 사람을 만나보겠습니다.
16절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는 세 가지 기적을 기록했는데, 이 기적들은 아마도 같은 날에 일어났을 겁니다. 예수님은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을 전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가르침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미 수천 명을 고치신 덕분에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이 세 가지 기적은 안식일에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안식일이 끝나고 16절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저물매,” 저녁, 즉 해가 지는 시간은 안식일이 끝나는 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때까지 안식일 법을 어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던 겁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그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자 예수님은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고쳐주셨습니다. 늘 그러셨습니다. 기적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수천 건의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영적인 문제로 귀신들린 사람이든, 육체적인 질병을 앓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믿음이 얼마나 크냐를 따지지 않으셨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던 곳을 떠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마태복음 14장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조건이나 한계가 없는 온전한 치유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누가복음 9장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질병을 완전히 없애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 규모나 수를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났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기적을 행하다 보면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인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가짜 치유자들도 사람들을 끌어모읍니다. 나은 것 같았다가 다시 아픈 상태로 돌아가는 사람들조차 계속해서 다른 치유자를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자연스럽게 군중은 점점 더 불어났습니다. 16절의 군중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치유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질병을 미워하신 이유는 질병이 무엇의 산물인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죄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아픈 것이 특정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 말은 이 세상에 죄가 있기 때문에 질병이 있고, 세상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와 죽음과 질병을 미워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치유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신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십니까? 더 이상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질병도 없을 겁니다. 지금 여기 16절에서는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질병을 몰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영원한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육체의 모습을 벗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신 것처럼, 질병이 영원히 사라지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치유하신 세번째 이유가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목적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고, 선지자들은 메시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세상의 구주, 죄를 없애실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 수많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예언을 예수님이 오셔서 모두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예언 중에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마태복음 8장 17절입니다, "병을 짊어 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메시아가 하실 일 중 하나는 질병과 고통을 해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질병, 모든 죽음, 모든 병, 그리고 모든 죄가 사라지는 놀라운 나라를 세우실 것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 나라를 맛보게 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는 말씀은 이사야 53장에서 온 것입니다. 이 장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맥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몇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마태가 인용한 구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보시다시피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는 말씀은 직접적인 육체적 치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질병에서의 치유를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잘 들으십시오. 육체는 간접적으로 치유됩니다. 죄를 치유하면 질병도 치유됩니다. 왜냐하면 죄의 산물이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속죄에 육체적 치유도 포함되어 있나요?"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속죄에는 분명히 육체적 치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잘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육체적 치유는 지금이 아닌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의 죄를 가져가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죄와 씨름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죄를 해결하셨지만, 완전한 성취는 미래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죽음이라는 원수를 제거하고 파괴하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죽지 않습니까? 완전한 성취는 미래에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의 질병도 짊어지시고 해결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병에 걸리지 않습니까? 완전한 성취는 미래에 이루집니다. 그러니까 속죄 안에 치유가 있습니다. 마치 속죄 안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영원히 하나님 앞에 영광스런 모습으로 서는 완전한 회복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속죄 안에 치유가 있으니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아프면 안 됩니다. 감기에 걸려서도 안 되고, 암에 걸려서도 안 되고, 마비가 되어서도 안 되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병에도 걸려서는 안 됩니다. 속죄 안에 치유가 있기 때문이죠." 이런 논리라면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죄를 지어서도 안 되고, 죽어서도 안 된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거나 죽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도 결국 다 죽는다는 겁니다. 아마 이 사실 때문에 조금 난처할 것 같네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질병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복음은 치유가 아니라 용서와 관련된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질병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없애 주셨지, 우리의 질병을 없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만약 마태복음에서 이사야 53장을 이렇게 인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질병의 치유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인용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고침받게 해 주셨다는 뜻으로만 이 말씀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증거하는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는 말씀 다음에 이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확실히 죄로부터의 영적인 치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표현함으로써 죄의 문제에서부터 질병의 문제에 이르기까지로 그 의미를 확장시키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죄에는 치유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죄에는 온전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완전한 성취 안에서, 즉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받을 때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단지 그 나라의 맛보기, 하나님 나라의 예시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우리의 병을 다 짊어지실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없애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일의 맛보기입니다. 정말이지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심으로써 그렇게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는 전지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을 다 아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셨습니다. 기억하시고 계신 것처럼,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니고데모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묻지 않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에 그런 일을 자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지하시다는 것은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겁니다. 완전히 전지한 분이시라면, 깊은 것들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느끼는 어떤 고통도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무엇을 동정하신다고요? 연약함입니다. 질병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함께 느끼신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고 믿습니다. 제가 읽어드린 것처럼,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셨다는 단어는 고통을 함께 겪는다는 의미입니다. 함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우리의 병을 앓지는 않으셨지만, 우리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이 초래하는 고통을 함께 겪으신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을 짊어지셨습니다.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의 근원을 아신다는 의미에서 짊어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질병을 보실 때 죄의 권능을 느끼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가에 서 계셨습니다.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데 예수님은 그 집에 여러 번 머무셨죠. 나사로가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덤 가에 서 계셨습니다. 성경은 이르기를 예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는 예수님이 우셨다고 전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셨을까요? 왜 우셨을까요? 우리는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려던 참이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이제 곧 나사로를 무덤에서 부르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것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질병을 볼 때마다 갈보리의 처절하고 끔찍한 현실을 대리적으로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든 고통과 비통과 슬픔과 애통이 전부 다 죄가 초래한 악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평생을 십자가의 그늘에서 사셨고, 질병을 보실 때마다 죄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고통을 초래한 것이 죄란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마태복음 9장 5절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 다 똑같습니다. 만일 질병을 제거했다면, 질병의 근원, 곧 죄도 제거한 것입니다. 만일 죄를 제거했다면, 죄의 결과, 곧 질병도 제거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똑같이 어렵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질병을 다룰 수 있는 분은 죄도 다룰 수 있습니다. 질병과 죄는 저주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근본 원인과 결과를 다 처리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십자가를 향해 가실 때 죄를 완전히 멸하시는 방식으로 처리하셔서 궁극적으로 모든 연약함과 모든 질병이 제거될 것이고, 우리가 보는 이 치유들은 그 놀라운 날의 예고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시면서 그 나라의 특성들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계속 나타내 보이셨고 그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에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 보더라도 잘못 판단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돌아서서 떠났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사랑했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인격에 매료되어 끌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흥미거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지만, 각자의 경우에 진정한 회심을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세 가지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안락함입니다.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예수님과 무리가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가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주님의 육신은 지치고 피로했습니다. 실제로 배를 타고 건너가시던 중에 예수님이 배의 고물에서 잠이 드실 정도였습니다. 기도와 재충전의 시간, 휴식과 묵상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셨습니다. 군중들이 하나님의 계획과는 관계없는 부담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떠나서 다른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자 일부 제자에게는 즉시 헌신의 문제가 닥쳤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작은 배를 타고 가실 때 다른 작은 배들이 선단처럼 뒤따랐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배를 탈 것인가, 아니면 그냥 머물러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아침에는 이와 같은 기로에 선 세 사람을 만나보겠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관심이 아주 컸지만 결코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보다 안락함을 더 원했기 때문입니다. 19절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참 멋진 말 아닙니까? 이런 찬송을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주를 따르리, 나는 매일 주를 따르리.”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서기관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서기관들은 율법 권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공식 승인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당국으로부터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서기관들은 고등 교육을 받았고, 제도에 충성스러웠습니다. 선생이지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또 서기관들은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적대시하고 반대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을 대면한다는 것은 다소 껄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서기관이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서기관이 “선생님이여”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디다스칼로스(didaskalos)’, 즉, 선생, 랍비, 스승이란 뜻입니다. 얼마나 확신에 차 있습니까. “어디를 가시든 나는 무조건, 그리고 계속 따라가겠습니다. 나를 영원히 붙잡으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헌신, 영원한 헌신의 표시입니다. 저는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가장 위대한 선생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저는 그 서기관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다. 정말 믿기지 않는, 너무나 대단한 사람이다. 이 사람과 가까이 하고 싶다. 이 사람이 가는 곳이 어디든 나도 가고 싶다.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였다면 “그래, 좋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라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난데없이 튀어나온 말처럼 느껴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뭐라구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우가 갑자기 왜 여기에 끼어들까요? 새는 또 뭘까요?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일종의 격언 같은 겁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야생동물들에게도 있는 삶의 기본적인 요소가 예수님께는 없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집이 없었습니다. 밤이면 땅에 누워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지내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는 예수님께 따뜻한 환대를 베풀었던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다니의 작은 집에서 얼마나 자주 묵으셨는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예수님께는 개인적인 안락함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서기관에게 줄 수 있는 것도 없으셨죠.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을까요?" 예수님은 서기관의 마음을 읽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서기관이 망설이는 이유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은 이미 충분히 풍요로워. 원하는 건 이미 다 가졌어. 난 내 삶에 만족하니까 그냥 예수님을 내 삶에 보태고 싶을 뿐이야. 지금 내 모든 것을 그대로 가져가서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일시적인 인기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이러한 표적들을 예루살렘에서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사람들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이 얕고 겉치레에 불과하며, 단지 신기한 것을 좇는 데 불과하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 대해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설명하셨습니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처음에는 열심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고 믿음의 대열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박해가 시작되고, 더 이상 편안하지 않고, 머물 곳도 없고, 기본적인 생활도 어려워지면 금세 떠나가 버립니다. 마치 뜨거운 햇볕에 타서 말라죽는 씨앗처럼 말이죠.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 매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얼마나 불안정한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자극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군중과 기적, 그리고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이 서기관은 완전히 매혹되어 있었습니다. 렌스키(Lenski)가 지적했던 것처럼 말이죠. "서기관은 행진하는 군인들을 바라보며 멋진 제복, 반짝이는 무기들을 보고 참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행군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 그리고 이름도 없이 남겨질 무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 사람은 너무 성급했고, 너무 열성적이었고, 너무 완벽한 헌신을 제안했습니다. 마치 돌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았습니다. 빨리 자라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곧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은 제자도의 근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며, 고난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이 있다. 나를 따르려면 편안함을 포기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서기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20절과 21절 사이의 어딘가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님이 서기관의 실체를 정확히 지적하시자 서기관은 떠나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얼마나 다르신지 보이십니까? 우리는 복음을 달콤하게 포장해서 모든 사람이 최대한 쉽게 들어올 수 있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헌신이 없는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도록 매우 어렵게 만드셨습니다.
저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라는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인자라는 표현은 다니엘 7장 13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다니엘은 메시아가 인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오셔서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인자라는 말이 복음서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되는지 아십니까? 80번이나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인자됨을 거듭 확인해 주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로 겸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신성을 드러낸다면, ‘인자’라는 말은 겸손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겸손하여 여우도 가진 것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그 지역에는 여우들이 땅에 굴을 파고 살았고, 새들도 도처에 둥지를 짓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게는 그것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삶의 기본적인 안식처조차 없으신 겸손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우리도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결코 달갑지 않은 말씀이었을 겁니다. 그렇죠?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요?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2절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23절입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24절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또 “그들이 너희를 죽이고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고 생각할 때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또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마태복음 5장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히브리서 11장에서도 모든 믿음의 영웅들은 전부 고난을 당했습니다. 11장 끝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대가를 치를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저 재미를 더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또 다른 유다가 될 뻔했는데, 유다는 한 명으로 충분했죠. 그래서 예수님이 몰아내신 겁니다. 마치 학문을 배우고 싶다며 찾아온 청년에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열심히 공부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고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미지의 땅을 탐험하겠다며 팀원을 모집하는 탐험대가 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모두가 열광적이지만, 극심한 추위와 더위, 늪지대, 야생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하나둘씩 발을 빼기 시작합니다. 위대한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하는 젊은이에게 코치가 "그래, 하지만 정상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감당할 수 있겠어?" 이렇게 묻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 쉽다고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께 큰 결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만큼 가슴 벅찬 것이 없고, 그 여정의 끝만큼 영광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번도 이 길이 쉬울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늘 강조하신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좋은 것은 다 누리고 싶어합니다. 기존의 생활 방식은 그대로 유지한 채 예수님만 더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을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인물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안락함을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재물을 원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여기서 사용된 제자라는 단어는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대문자 D가 아닌 소문자 d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제자란 말은 단지 배우려는 사람,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다양한 수준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그럴만한 합리적인 요청처럼 들립니다. 나이드셔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냥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땅에 묻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죠.” 유대인들은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 죽으면 정말 빨리 무덤에 안치해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30일 동안 애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말은 어쩌면 “한 달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 정리하고 추스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마지막 섬김의 도리가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합리적인 요청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곧 배를 타고 떠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지 못하지만,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나서 뒤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말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해야 한다”라는 표현은 현대에도 중동에서 흔히 사용되는 관용적인 문구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중동에서 선교사로 있는 발트마이어(Waldmeyer) 박사가 한 튀르키에 사람과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부유하고 젊은 튀르키예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이 그에게 자신과 함께 유럽의 어떤 지역을 함께 다녀오자고 제안했습니다. 훈련을 시켜서 함께 사역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겁니다. 그 사람이 교육을 마친 후에 설득을 했는데, 그 튀르키에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먼저 내 아버지를 장사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발트마이어 선교사는 “자네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걸 몰랐네. 정말 유감이라네. 혹시 내가 무례하지 않았기를 바라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관용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잘 살아계십니다. 저는 그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곁에 있으면서 저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말한 겁니다. 그리고 나면 당연히 제 몫의 재산을 상속받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가서 죽지도 않은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는 말은 곧 “나는 상속받을 재산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니 저를 더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말입니다. 이 제자는 지금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습니다. “유산을 다 받고 나면 어디든지 따라갈 겁니다”라고 말하는 거죠. 이해가 되시죠? 이 사람은 재물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게 이 사람에게서 제자의 길로 나가는 용기와 헌신을 앗아갔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지금 이 말씀 역시 아주 날카롭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죽은 사람을 장사할 수 있습니까? 먼저 언급된 죽은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분명히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이는 하나의 격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누가는 병행 구절에서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여우와 새의 격언과 같은 그런 또 다른 격언입니다. 첫번째 격언은 “보아라, 나는 어떤 안락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게 하라. 세속적인 세상이 스스로 문제들을 처리하게 하라. 너는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너는 그릇된 차원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이 스스로 처리하게 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독교인은 장례식에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장사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 역시 하나의 격언입니다. 세상의 지나가는 것들, 사람들의 생사, 사람들의 흥망성쇠는 다 죽은 자들의 일부라는 겁니다. 너는 생명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니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잘못된 우선순위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세상적인 일들은 세상 사람들의 몫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체계는 알아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제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역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22절과 23절 사이 어딘가에서 떠나버렸습니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소유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몫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흥분, 카리스마, 경이로움, 기적을 좋아했습니다. 아주 멋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류에 편승하고자 했지만, 헌신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돈을 원했을 뿐입니다.
이 일은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정말이지 멋지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21절에서 이르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방법인가요? 모든 것을 팔아 모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건가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돈이 구원의 길을 방해하고, 돈이 신이라면, 구원을 받기 위해 돈을 없애야 합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돈을 포기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그냥 치워 버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돈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년이 “저는 모든 율법을 지켰으니 영생을 원합니다”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가 어떻게 사는지를 정확히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셔서 모든 것을 아주 자세히 아십니다. 그래서 “좋다. 그러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약점을 정확히 찌르셨습니다. 그 다음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청년은 유감스럽지만 재물에 집착하는 바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이 안락함과 재물 때문에 예수님께 거부를 당한 겁니다. 둘 모두 마음이 이끌렸고 놀라워했지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에 영원히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날 세번째 사람이 나왔는데, 마태는 그 사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누가가 말해줍니다. 누가복음 9장입니다. 빨리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기본적으로 같은 내용인데, 누가는 이 세번째 사람에 대해 9장 61절에서 덧붙여 언급합니다. 이 9장은 아주 긴 장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이 사람이 세번째 사람입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글쎄요, 우리는 “물론이지요. 얼른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오세요. 어머니에게 입맞춤의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와는 작별의 악수를 하고 오세요”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분명히 주전 8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 격언을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격언은 헤세드(Hesed)라는 이름의 인물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주 흔한 격언이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 말씀의 뜻은 뒤를 돌아보면 고랑을 곧게 갈아엎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쟁기질을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긴 하지만, 딴 데를 쳐다보면서 고랑을 갈면 고랑이 삐뚤삐뚤해진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셨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아내와 아이들이 아닙니다.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십니까? 어머니 치마 폭에서 논다, 이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이 사람은 부모의 압력, 부모의 권위, 부모의 영향력, 부모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돌아가면, 어머니의 치맛바람, 가족의 압력, 배척의 위협, 떠나지 말라는 감정적인 간청이 있을 것임을 아셨고, 결국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자 하지만, 가족들이 뭐라고 말할지, 가족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아버지는 뭐라고 말할지를 두려워합니다. 따돌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거짓 종교 제도 안에 머물거나,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로께부터 돌아서 버립니다. 어쩌면 교회에 가끔씩 나타나기도 하고, 들여다보기도 하고, 뒤를 돌아보면서 쟁기질을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결국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 이하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이해가 되십니까? 만약 이렇게 가족들로 인해 헌신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에 매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절반의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봉사가 초점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가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것도, 반쪽짜리 제자의 지위조차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관계, 재산, 안락함, 이런 모든 것들이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을 보면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물으시겠죠. “이 사람들이 왔는데 예수님이 내쫓으신 거잖아요”라고 말이죠. 그렇지만 요한복음 6장을 계속 더 읽어보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하신 이 말씀 후에 6장 끝부분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무슨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전부를 얻거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그때부터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온전히 헌신하려고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거절하신 겁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만일 나의 조건을 완전하게 따른다면 말이다. 팔복의 자세, 곧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해하며,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고, 나로 말미암아 기꺼이 욕과 박해와 미움을 받고자 한다면 말이다.”
어느 날 주인이 한 노예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기쁨과 행복을 네가 가지고 있구나.” 노예가 그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인이 말하기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네가 가진 그리스도를 나도 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노예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가서 흰 옷을 입고 오셔서 진흙탕에서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주인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건 내 품격을 짓밟는 일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일년 뒤에 주인이 그 노예에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더 깊은 문제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인은 “네가 가진 것을 나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노예는 “내게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라고 말했죠. 주인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너처럼 그리스도를 알 수 있을까?” 노예는 “흰 옷을 입고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진흙탕에서 일하면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난 후에 절망에 빠진 주인이 그 노예에게 세번째로 와서 말했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도 가져야만 하겠다.” 그러자 노예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계십니다. 흰 옷을 입고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진흙탕에서 일하면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 그러자 노예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무슨 말이냐?” “그냥 기꺼이 그렇게 할 의지만 있으시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안락함을 빼앗고 싶어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유를 빼앗고 싶어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간관계를 끊어내고 싶어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하고자 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주님이 주인이심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가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저것에 매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주님께 반쪽 마음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자 한다면, 주님은 여러분의 몫을 여전히 가지고 있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의지입니다.
이 세 사람은 떠나 버렸습니다. 윌리엄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위한 안락한 장소를 마련하고, 부차적인 것들을 끌어안고 여생을 살고자 그리스도를 떠났다.”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참된 제자입니까? 증거들을 보셨습니까? 수세기에 걸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말씀과 사역, 지혜와 순결함과 진실함, 능력과 공급하심, 치유와 사랑과 통치, 판단력과 평정심, 가르침과 독자성, 겸손함에 경탄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압도되었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예수님의 요구 조건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잃은 채로 떠나갔습니다. 라일 주교는 “지옥으로 가는 가장 슬픈 길은 설교 강단 아래를 지나고, 성경 옆을 지나고, 경고와 초대의 한복판을 지나간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찬양을 부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찬양의 여운이 우리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에서 이 진리들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과의 연을 끊어내고 세상적인 것들은 세상에 맡긴 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영원한 것을 위해 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게 하시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게 해 주시되, 주님께서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수 있음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제자도 자신의 안락함과 소유물, 인간관계 때문에 그리스도를 등지지 않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성령님께서 이 진리를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시는지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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