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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마태복음 8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부터 27절까지입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부터 27절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을 이 땅의 왕으로 삼으셔서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을 다스릴 권세, 주권, 통치권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주권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스릴 권리를 잃었습니다. 땅 또한 죄가 없던 태초의 위엄, 경이로움,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벽한 나라를 잃게 된 겁니다.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로 땅의 통치권은 이 세상의 왕이요 이 시대의 신이라 불리는 사탄의 손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통치권을 잃었고, 땅은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질병, 고통, 죽음, 인간관계의 문제, 전쟁, 슬픔, 불의, 거짓, 기근, 자연재해가 가득하고 마귀가 활개치는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지금도 이 땅은 이러한 일들을 계속해서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구원 계획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환경, 이 땅, 그리고 우주까지 모두를 구원하셔서 저주를 완전히 없애실 겁니다. 이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하나님은 두 번 이 땅에 오실 겁니다. 첫번째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땅과 우주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즉 재림 때는 찬란한 영광으로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그 다음에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심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질병도, 죽음도, 질환도, 어려움도, 재난도, 마귀도 없는 우주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의롭고, 거룩하며,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우주입니다. 앞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주님께서 지구 자체의 저주를 뒤집으시는 천년왕국의 시기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영원한 상태로서, 하나님께서 현재와는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때입니다. 미래에는 모든 것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저주라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뒤집힐 겁니다. 인간의 존재를 망치고, 마음을 아프게 하며, 기쁨을 빼앗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했던 통치권과 주권을 빼앗는 모든 것들이 말이죠. 성경은 우리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주의 구속입니다. 모든 것이 지금과 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지구와 우주가 구속받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이 주실 영광스러운 나라를 생각해보면 인간은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환경을 바꿀 수 없습니다. 몇몇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죠.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릴 수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우주를 오염시킬 뿐입니다. 온갖 종류의 기계와 장비를 만들 수 있지만, 만들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주변 환경을 오염시킬 뿐입니다. 어떤 의사가 제게 알려주기를, 의학적으로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새로운 여섯 가지 문제가 생겨난답니다. 그러니까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욱 뒤처지게 되고, 진보를 이룰수록 합병증이 더욱 심각해지는 겁니다. 인간은 지구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저주를 없앨 수도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로켓을 만들어도, 에너지원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핵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환경과 우주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만일 지구가 바뀌어야 하고 환경이 바뀌어야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겨난다면,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저주를 뒤집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그런 종류의 능력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드시는 데 필요한 능력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 시편 62편은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라고 합니다. 욥기 26장 14절은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라고 합니다. 시편 79편 11절은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라고 하고, 나훔 1장은 “여호와는…권능이 크시며”라고 합니다. 이사야 26장 4절도 “주 하나님은 영원한 반석, 권능이심이로다"라고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65편 6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또 다윗이 시편 63편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고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장 20절에 이렇게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이 능력은 어떤 능력입니까?

우주를 더 자세히 관찰할수록 우주에서 드러나는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게 됩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은 흙을 파내기 위해 450마력짜리 불도저를 하루만 사용해도 경유 378리터를 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우주를 움직이는 데는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작은 망원경으로도 40억 광년, 그러니까 9조 4천 6백억 킬로미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먼 거리를 볼 수 있어도 아직 우주의 끝에는 근접하지도 못했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우주는 엄청난 힘으로 움직이는 천체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둘레가 40,075km, 지름이 12,742km인 거대한 공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6.5x10의 24승 톤이나 되는 이 지구는 말 그대로 허공에 떠 있죠. 우리는 "중력이 지구를 지탱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력이 대체 뭘까요? 이 거대한 지구를 우주에 떠 있게 하는 그 중력은 어떤 힘일까요? 게다가 지구를 회전하게도 만듭니다. 우리를 시속 1,670km로 회전하게 만드는 로켓을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시속 1,670km로 원을 그리면서 돌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움직임은 매우 정확해서 1초의 오차도 없이 시간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분당 1,670km라는 엄청난 속도로 9억 4천만 km에 달하는 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태양계 전체가 완주하는 데 수십억 년이 걸리는 궤도를 따라 그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끝없는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죠. 이런 엄청난 움직임을 만드는 연료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힘이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요?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걸까요?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대구 한 마리가 한 번에 9백만 개의 알을 낳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재미있어 하실 것 같아서 말씀드려 봤습니다.

하나님은 대우주뿐만 아니라 소우주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태양의 마력이 500백만 곱하기 백만 곱하기 십억 마력이고, 우리 은하에만 최소 1조 개의 태양이 있다, 또 수백만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엄청난 힘은 어디서 생겨난 걸까요? 무엇이 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걸까요? 그리고 물 한 티스푼에 수백만개, 수억개, 심지어 수조개의 원자가 들어있다는 것도 아시나요? 원자가 뭔지 아십니까? 에너지입니다. 작은 에너지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 않나요?"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자의 실제 물질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1조분의 1입니다. 물 한 티스푼에 수조 개의 원자가 있고, 그 원자의 1조분의 1만이 부피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운동에너지입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다르게 설명하자면, 제가, 어떤 분들은 상상하기도 싫겠지만, 만일 제 몸에서 빈 공간을 모두 없애버리고 순수한 물질만 남긴다면, 실제 물질이 얼마나 될지 아십니까? 180cm가 조금 넘는 제 키를 기준으로 할 때, 고작 이백만분의 일 밀리리터만 남는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전부 운동에너지입니다.

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능력으로 만물을 붙드신다는 말은 단순히 물질계를 붙들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주의 모든 원자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광대한 우주를 말이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구를 다시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저주를 물리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에덴동산을 되살리실 수 있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그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저주받은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영원히 선포하시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왕이시며, 약속된 메시아이시고, 인간에게 주권을 되돌려 주실 수 있고, 땅을 회복시키시고 죄를 없애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자격을 갖추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6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여기까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신 것은 질병이 없는 영광스러운 나라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죽음이 없는 영광스러운 나라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파도를 잠잠케 하신 것은 자연이 결코 통제를 벗어나지 않을 나라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마귀가 전혀 활동하지 못할 나라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진리를 말씀하신 것은 거짓이 없고 오직 진리만 가득한 나라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거룩함을 나타내신 것은 오직 의로움만 있을 나라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내가 저주를 끝낼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내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인간에게 주권을 되돌려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9장 8절입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10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두 가지 영역에서의 권능을 주셨는데,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과 병을 고치는 권능입니다. 이 두 가지가 사도들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의 영역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연을 다스리는 기적은 행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었지만, 사도들에게도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모든 권능을 받았다"고 하신 겁니다. 모든 권능입니다. 마가복음 9장 1절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무슨 뜻일까요? "너희 중에서 몇 명은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때까지 살아있을 것이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변화산 사건을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데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입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 앞에서 변형되사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입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히 드러날 권능을 미리 본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32절입니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6절입니다.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로마서 1장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능력이 어디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저주를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 죽음, 사탄, 귀신, 자연, 동물, 고통 등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통해서 이 땅의 합당한 상속자이시며 왕이시자 주님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첫 세 가지 기적을 살펴봤습니다. 8장과 9장에는 총 아홉 가지의 기적이 나옵니다. 첫 세 가지는 질병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세 가지는 자연적 영역, 초자연적 영역, 죄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즉 질병에서 시작해서 자연의 요소들, 귀신의 영역, 나아가 죄와 죽음까지 다루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이제 23절부터 27절까지의 본문을 살펴보면서 네 가지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체적인 상황, 공포, 능력, 징조입니다. 먼저 구체적인 상황을 보겠습니다. 23절과 24절을 보겠습니다. 잠시 복습하면 앞서 마태는 첫번째 세 가지 기적과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했습니다. 그 반응이 18절부터 22절에 나옵니다. 23절 이후부터 또 다른 세 가지 기적을 보여주고 다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18절부터 22절에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님께 매료되어 있었고 관심도 많았고 예수님의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금 당장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고 하시자 모두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반응입니다.

이제부터 두번째 세 가지 기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 기적 후에 예수님은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반응을 보이십니다. 18절로 돌아가서 당시 상황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23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무리가 너무 많아져서 예수님이 더 이상 감당하시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떠나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정확히 말하면 갈릴리 호수의 서쪽 해안에 있었는데, 이 호수는 길이가 21킬로미터, 넓이가 가장 넓은 곳이 13킬로미터 정도 되는 작은 호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고, 이룰 수 있는 것도 다 이루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은 피곤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치신 상태였죠. 안식일도 끝났고, 16절에서 이미 저녁이었던 것을 보면 이때는 저녁을 지나 늦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더 이상 견디시기 힘든 상황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가야 한다. 지금 떠나야 한다." 이런 상황은 사람들의 결정을 촉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세 사람이 와서 "저도 주님을 따르고 싶지만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해서요"라고 말하면서 망설였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대화했지만 결국 자기 자리에 머물고 말았죠. 반면에 기꺼이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3절은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따랐더니"라고 말합니다.

앞서 살펴본 세 사람은 따르지 않았지만, 다른 제자들은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작은 배가 가버나움 해안을 떠나 반대편으로 8-10킬로미터를 나아갔을 때, 여러 작은 배들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제자들이 따랐다"는 말은 당연히 다른 배를 타고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배 바깥에 매달려 갔을 리는 없을 테니까요. 마가복음에는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의 갈릴리 바다에는 작은 배가 정말 많았습니다. 이 지역은 농사와 어업이 주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물고기가 아주 많이 사는데, 실제로 그곳에 가보시면 ‘베드로 고기’라 부르는 생선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농어와 비슷하게 생긴 작은 민물고기인데요, 맛도 있고, 또 이 지역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어업과 농업이 이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배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가실 때 이 작은 배들이 함대처럼 따랐던 겁니다.

23절 끝부분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몇몇 제자들과 함께 배에 타고 계셨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미 이때는 열두 제자를 택하신 후였습니다. 아마도 그 중 몇 명은 예수님과 같은 배에 있었을 것이고, 나머지는 다른 배에 나누어 타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여러 배에 나누어 타고 모두 함께 움직이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열두 제자를 택하셨지만, 여기서 "제자들이 따랐더니"라는 표현은 열두 제자보다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을 지칭하는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신약성경에는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이라고 할 때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문맥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단어 자체만으로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쓰인 헬라어 마테테스(mathetes) 혹은 마테타이(mathetai)라는 단어는 학생, 배우는 사람, 따르는 사람, 이런 뜻입니다. 상당히 포괄적인 단어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제자라는 단어가 일반 신자보다 한 단계 높은 그리스도인, 즉 더 성숙한 영성을 가진 최상위층 신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평범한 신자가 있고, 그 위에 제자라고 불리는 슈퍼 성도가 있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계속 살펴보겠지만, 문맥상 그런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이들을 진정한 의미의 제자로 볼 수 없는 이유를 5장 1절을 통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열두 제자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열두 제자만을 위한 것이므로 구원에 관한 메시지일 리가 없다고 합니다. 이미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분명히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청중들이 반드시 믿는 자들이라고 전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당시 그곳에는 무관심한 군중이 있었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다"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신앙적 헌신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구원에 대해 말씀하신 겁니다.

8장 21절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라 불리던 사람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에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제자는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제자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은 겁니다. 현재 상황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 모두는 존 맥아더의 제자입니다. 그렇죠? 여러분은 마테테스(mathetes), 즉 배우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가르침을 듣고 배우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여러분 중에는 이 가르침을 즐거워하는 분도 있고, 거부하는 분도 있고, 좋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계신 분들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니 제자, 곧 배우는 자인 겁니다. UCLA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노스리지, 피어스 칼리지, 또는 로스앤젤레스 뱁티스트 대학교, 바이올라 대학교, 칼버트 신학교 등등 어디서든 수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에서 여러분은 마테테스(mathetes), 배우는 자가 됩니다. 전부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전부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전부 믿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과 가르침을 믿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자란 단순히 배우는 자라는 뜻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여기서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 제자들이 있었던 겁니다. 의로움도, 거룩함도, 참된 구원의 증거도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잘려나가 불에 던져졌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었고 제자라고는 했지만, 진정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네 종류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네 밭은 모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뿌려진 씨는 세 밭에서는 죽어버렸고 한 밭에서만 자랐습니다. 결국 한 명만이 진정한 제자였고 나머지 셋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유다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유다는 끝까지 견디지 못했습니다. 결국 참 제자가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배우는 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제자라 불린다고 해서 모두가 믿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판가름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자'라는 단어 자체는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끌려 말씀을 들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을 크게 네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알고 계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첫번째는 호기심 많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에 매료되어 흥미를 느끼면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이는 곧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모든 것을 함께하고, 삶에서 예수님의 완전한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에 성경은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고 합니다. 헌신된 자가 아닌 단순히 호기심 많은 자들이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지만 우리는 믿고 확신한다는 고백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우리는 단순히 호기심으로 따르는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헌신된 제자입니다. 주님이 진리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확신합니다"라고 고백한 겁니다. 이처럼 호기심 많은 자들은 왔다가 떠나갔습니다.

한편 지적으로 설득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지적으로만 믿은 제자들입니다. 니고데모가 전형적인 예시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곁을 맴돌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지켜보다가 어느 날 밤에 찾아와서는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머리로는 확신했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믿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아리마대 요셉처럼 자신의 믿음을 숨기고 조용히 따르는 비밀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담대하게 따르며 헌신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모습은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라고 할 때는 베드로 같은 사람도, 유다 같은 사람도,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도, 그리고 상황이 힘들어지면 금방 떠나버릴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제자’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 없이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 앞에서 믿기 힘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사건을 준비하셨습니다. 24절입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우선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배는 큰 배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작은 배입니다. 아마도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는 개방형 배였을 겁니다. 지붕이 없는 배였다는 겁니다. 그때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갈릴리 바다는 작은 바다, 아주 작은 바다입니다. 사실 호수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저 호수일 뿐입니다. 요단강은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있는데, 해수면보다 300미터나 낮은 사해로 이어집니다. 갈릴리 호수는 해수면보다 185미터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에는 지중해가 있고, 이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사이에 2,800미터 높이의 헤르몬 산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그 헤르몬 산에서부터 해수면 아래 185미터까지 급격하게 내려가는 곳에 위치합니다. 그 사이사이에 계곡과 협곡이 있습니다. 북쪽의 차가운 바람이 지중해를 건너서 헤르몬 산과 주변 산들의 경사면을 따라 내려오면, 그 계곡들을 통해 돌진해서 내려와서 갈릴리 호수 분지에 머물러 있는 따뜻한 공기와 만납니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폭풍이 생기는데, 이런 폭풍은 순식간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일단 동쪽 해안의 절벽과 부딪히면 그 작은 분지에서 소용돌이치면서 휘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데, 아주 흔한 일이라고 합니다.

저도 가버나움에서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습니다. 길이가 한 9미터 정도쯤 되는 작은 배를 탔는데, 처음에는 호수가 거울처럼 아주 잔잔해서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호수 중간쯤 갔을 때 하얀 물결이 사방에서 일어났습니다. 뱃머리를 넘어오는 물이 배 뒤쪽에 앉아있는 사람들까지 흠뻑 적셔 버렸습니다. 배에는 갑판이 두 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셔츠를 벗어버리고 파도를 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온몸이 다 젖었죠. 이 폭풍은 아주 갑자기 일어났는데, 현지인들은 아주 흔한 일이라고 말하더군요.

자, 제자들이 이렇게 폭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에 있습니다. 밤이었습니다. 어두웠습니다. "큰 놀", 그러니까 큰 폭풍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세이스모스(seismos)'라고 하는데, '지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지진계(seismograph)'라는 단어가 유래했습니다. 큰 흔들림이나 요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흔드셨는지, 아니면 바다 밑의 땅을 흔드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가 되었다고 결정하셨습니다. 마치 물이 가득 찬 큰 그릇을 흔드는 것처럼 땅을 흔들기 시작하셨습니다. 땅이 흔들리면 당연히 물도 따라 흔들리게 되죠. 그렇게 갈릴리 바다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회오리바람이나 폭풍을 의미하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지진과 격변, 회오리바람이 일어났고, 그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바람이 내려오면서 갑자기 평소와는 전혀 다른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평소에 폭풍을 자주 겪었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behold’, 즉 ‘보라’라는 단어가 맨 앞에 있습니다. 감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충격적이고 놀라운, 전혀 예상치 못한 심각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 중에는 어부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선원들은 폭풍을 수도 없이 겪어봤을 겁니다. 이 작은 호수에서 일어나는 폭풍을 아주 자주 겪었지만, 이런 폭풍은 처음이었습니다. 대지진이 일어나 격변하는 것 같은 격렬한 흔들림이었습니다. 바람과 지구의 움직임이 물을 통해 그 작은 배를 강타했습니다.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이번 여름에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메이드 옵 더 미스트(Maid of the Mist)’호, 나이아가라 유람선을 탔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타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마치 저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폭포 밑으로 가까이 가자 배가 심하게 흔들렸고 모두가 흠뻑 젖었습니다. 얼굴만 빼고 전신을 감싸는 잠수복 같은 고무 옷을 입었는데도 말입니다. 배가 계속 흔들리면서 들썩들썩했고, 수백만 톤의 물이 눈앞에서 떨어졌습니다. 배를 돌리는 데만 15분이나 걸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찬송가도 부르고 서로를 격려하면서도 계속 "이건 늘상 있는 일이야,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하면서 서로 다독였습니다. 매일 운항되는 배니까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상황에서 안전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다면 얼마나 무서웠을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캄캄한 밤중이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조차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24절 말씀이 참 좋습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정말 깊이 주무셨나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무실 수 있었다는 건 예수님이 얼마나 피곤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죠. 너무 피곤해서 잠이 드셨을 뿐만 아니라, 그 큰 폭풍우에도 깨어나지 않으실 정도였습니다. 정말 지치셨던 겁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작은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고 말합니다. 배 뒤편 널빤지에 작은 베개가 있었는데, 그걸 베고 주무신 겁니다. 온몸이 다 젖었을 텐데도 계속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인간적인 모습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으로서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바다에는 사나운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댔습니다. 작은 배는 마치 대양 위의 코르크 마개처럼 떠다녔고, 다른 복음서들의 기록처럼 배 안으로 물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창조주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무시는 그 순간에도 우주의 모든 원자를 붙들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수님이 정말 깊고 평안하게 주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보이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너무나 아릅답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도 보입니다. 두려워할 법도 한데 그토록 평안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셨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세상일에 휘둘리다가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불안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완전한 평안 그 자체였습니다. 전지하신 분이기에 우주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주변 상황에 전혀 동요하지 않으셨던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폭풍이 심해지면서, 어부였던 제자들은 분명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을 겁니다. 25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번째 요점이 나옵니다. 공포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공포로 넘어갑니다. 여러분, 베테랑 어부들이 폭풍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직 목수에게 물어봤다는 것은 정말 큰 곤경에 처했다는 방증입니다. 예수님은 바다 근처에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내륙 한가운데 있는 나사렛에 사셨습니다. 25절을 보면, 공포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깨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서 기록들을 모두 종합해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여러 개의 짧고 함축적인 문장입니다. "주여, 주여! 구원하소서!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여기서 익사하고 있습니다! 좀 일어나십시오!" 말 그대로 절망적인 모습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께 향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제자들을 도우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달리 의지할 곳도 없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확신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이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의를 끄시기 위해 절망적인 상황으로 이끄셔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인간적인 해결책을 다 써버렸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다 써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원했습니다. 질병을 다스리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어쩌면 바다도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만일 제자들에게 완전한 믿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처럼 잠에 들어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확신하면서 말이죠. 아마 제자들도 예수님만큼이나 피곤했을 테니까요.

더할 나위 없이 극적인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남성들의 특성상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만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늘 하나님이 없다고 공언하던 선장 이야기를 아십니까? 자신만만하던 이 선장은 바다에 빠지자 하나님을 찾으며 간절히 부르짖었지만, 구조된 후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글쎄요, 하나님이 안 계시더라도 그런 위급한 순간을 위해서라도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말입니다. 우리도 참호 속에 들어간 후에야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이 아프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죽음을 맞이하거나, 직장을 잃거나, 배우자와 문제가 생기면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구원조차도 죄인의 절박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반응한다는 겁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외칩니다. 여러분도 그런 적이 있으십니까?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하나님, 저희를 돌보지 않으시나요?"라고 하신 적 있으십니까?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낯선 모습은 아닙니다. 옛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시편 10편을 기억하십니까? 1절입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하나님, 제게 하나님이 필요할 때는 늘 자리에 안 계십니다. 관심이 없으신 건가요? 시편 44편 22절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하나님, 우리가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여 깨어나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이사야 51장 9절에서도 같은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부족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니까 이사야는 "깨어나소서! 일어나소서, 하나님! 백성들이 겪는 이 끔찍한 상황을 보지 못하십니까? 어떻게 이 상황에서 주무실 수 있으십니까?"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수 있나요? 어떻게 무관심하실 수 있나요? 어떻게 이렇게 냉정하실 수 있나요? 어떻게 저로 하여금 이런 일을 겪게 하실 수 있나요?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농담하시는 거죠?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주위를 둘러보세요. 한밤중인데다 이런 폭풍은 처음입니다. 배에 물이 가득 차올랐는데 왜 무서워하느냐고 물으신 겁니까?" 참고로 '무서워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겁쟁이', 또는 '비겁한' 이런 뜻입니다. 죄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인들의 목록에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가 나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두려워하는 자들', '겁쟁이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같은 단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표현된 부분을 마가복음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표현합니다. "어찌하여 나와 나의 사랑, 나의 능력을 믿지 않느냐?"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는다면 어떤 폭풍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것, 둘째로,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다루실 수 있다는 것,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 이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하나님이 돌보시는지, 능력이 있으신지를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더 무엇을 보아야 한단 말입니까? 주님은 기적을 수도 없이 거듭 행하셨습니다. 4장 23절부터 25절에는 온갖 종류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세 가지 예시는 그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8장 16절을 보면 주님은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모든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이토록 많은 기적을 보고도 제자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를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님이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을 못 봤다면, 정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도, 막상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거기서 행하신 일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저기서 행하신 일을 간증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다가도, 정작 우리 삶에 시련이 닥치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 얼마나 믿음이 작은 자들입니까.

제자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7장 5절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나병환자 열 명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잘 확인해보고 믿음에 도움이 되는지 살펴보아라.’ 믿음은 계속해서 강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는데, 성경공부를 하실 때 이 '작은 믿음'이라는 개념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비겁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둘 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관심은 있으시지만 아무것도 못하시나 봐", 혹은 "하나님이 능력은 있으시지만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신가 봐."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도 있으시고 능력도 있으시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했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도 주님의 뜻이었을 테니까요.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셨을 겁니다. 분명 구약의 시편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시편 89편 기억하십니까?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시편 46편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힘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시편 107편을 잊었나 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바다 위에서 배가 이리저리 구르고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으신가요?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107편에서 이렇게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8장에서 똑같이 행하셨습니다. 결론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기서 세번째 요점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공포로, 마침내 권능으로 이어집니다. 윌리엄 카우퍼는 이런 위대한 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움직이시며

그의 기적을 이루시나니

바다에 발자국을 남기시고

폭풍을 타고 다니시네…

두려워하는 성도들이여, 용기를 내어라,

그토록 두려워하는 구름은 자비로 가득 차 있으니

머리 위에 복이 되어 쏟아질 것이라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그러자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보통 바람이 멈추더라도 파도는 그 힘이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일렁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잠잠하라" 혹은 한 주석가의 번역대로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시자, 바다는 마치 유리바닥처럼 되었습니다. 파도도 멈추고 바람도 멈추고 완전한 고요함이 찾아왔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권능입니다 . 그 폭풍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폭풍의 바람이 지녔던 힘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폭풍만 하더라도 바람을 통해 수백만 마력의 에너지가 생성됩니다. 비까지 내렸다면 더욱 큰 에너지가 발생했을 겁니다. 아무도 그 지진의 힘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멈추셨습니다.

이것이 마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이기실 수 있는 분이며, 자연을 다스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나중에는 귀신들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말해줍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이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 살아계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27절을 보면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사전에서 '놀라운 일'은 '경이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은 경이로움과 놀라움, 감탄을 자아냅니다. 27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여기서 ‘어떠한 사람’은 헬라어로 '포타포스(Potapos)'입니다. 예수님을 그 어떤 범주에도 넣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바람과 바다조차 복종하는 이분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이제 잘 들으십시오. 마가복음의 병행구절, 그러니까 같은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말합니다. 마가는 폭풍이 불었을 때 제자들이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을 때는 더욱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폭풍 속에 있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배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 어떤 폭풍보다도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환경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니엘 10장을 보면 다니엘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몇 주 전에 살펴보았죠, 떨면서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하나님을 뵙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뵈었을 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 거룩하심에 압도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모든 생각을 읽으셨고, 제자들 안의 모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제자들의 다음 뱃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폭풍을 잠잠케 하신 후를 두고 마태복음 14장 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이번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께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없애실 수 있는 분이신가요? 땅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킬 능력이 있으십니까? 그 답은 '예'입니다. 한 작곡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권능을 노래합니다.

산들을 높이 솟게 하시고

드넓은 바다를 펼치시며

저 높은 하늘을 지으신 주.

낮을 다스리는 태양을 두신

그 지혜를 찬양합니다

달빛도 주님의 뜻대로 비추고

별들도 순종하나이다.

주여, 주님의 놀라운 섭리가

눈길 닿는 곳마다 드러나고

발걸음 닿는 이 땅에서도

하늘을 보아도 나타납니다.

이 땅의 작은 풀 한 포기도

주의 영광을 전하나니

구름 모이고 폭풍 불어도

주님 보좌의 명령입니다.

이제 마지막 연입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주께 매여

주 떠나시면 죽으리니

영원히 가까이 계신 주님

결코 슬프게 하지 않으리.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그 예수님께서 우리 몸 속의 모든 원자를 움직이게 하시고, 지구를 우주 공간에서 돌게 하시며, 이 우주의 균형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언젠가 오셔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그 나라에 속하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주님의 말씀을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돌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도 신뢰하고 믿는 법을 배웠습니다. 주님, 삶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믿음이 작은 저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또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구원하시고 저주받은 이 땅을 새롭게 하여 영광스러운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확실히 알게 하옵소서. 아버지, 오늘 아침 이 자리를 떠나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믿음으로 나아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임을 깨닫게 하셔서 주님을 믿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인 저희에게는 주님, 저희의 연약한 육신과 의심, 그리고 질문들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저희는 얼마나 많이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돌보지 않으십니까?"라고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주님이 약속하신 사랑을 의심하고, 주님께서 주신 능력마저 의심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배우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가르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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