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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볼 수 있어서 기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놀라운 이야기는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진리들이 너무나 많아서 한번에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부분들을 최선을 다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부터 끝까지 읽겠습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마태복음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저주에 빠진 땅, 인류, 우주를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메시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되찾으려고 하셨습니다. 땅과 우주도 되찾으실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바로 이 일을 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오셨습니다. 초림 때에는 인류를 구원하셨고, 재림 때에는 땅과 우주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이 놀라운 복음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고, 메시아이시고, 이 세상의 참된 통치자이시고, 땅의 왕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시고, 삼위일체의 제2위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라는 확실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속한 악한 영을 다스리시는 권능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구원하시고, 저주를 풀어주시며, 타락한 인류를 되찾으시려면, 지금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를 이기실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사탄과 악한 영들이죠.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구원하시고 되찾으실 분은 영적 세계의 권세를 무너뜨릴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악한 영들을 내쫓으시는 능력을 보여주시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즉시, 권위 있게, 말씀 한 마디로, 쉽게 악한 영들을 쫓아내십니다. 이를 통해 어둠의 세력을 다스리실 수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이기실 수 있다는 것은 마태복음 4장을 통해서 이미 살펴봤습니다. 사탄은 세 가지로 주님을 시험했지만, 주님은 모두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대적하실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맞서셨고 결코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능력은 그 이상입니다. 단지 사탄을 대적하거나 사탄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정도만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탄과 그 무리들이 예수님께 굴복하게 만드십니다. 사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잘 드러나죠.

우리는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완전하심을 보았습니다. 결코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이 굴복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귀를 대적하시고 마귀를 이기십니다. 어둠의 왕국을 다루시는 능력의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요한일서 3장 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지금부터 살펴볼 내용을 소개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이유는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왕국을 세우실 때 정확히 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모든 귀신의 무리를 천년왕국 동안 가두실 것이고, 천년왕국 끝에는 그 모두를 모아 영원히 고통받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영원히 멸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전반에 걸쳐 귀신들을 내쫓으심으로써 그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표징 중 하나가 사탄의 패망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너희가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을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마태복음 8장에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한 겁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몇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제자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7장 19절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와서는 "저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귀신들이 저희 말을 듣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주님께 권능을 받았음에도 자신들이 이 일을 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 손쉬운 일이라고 해서 우리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주문을 외우면서 요란을 떨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착각입니다. 우선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도들이 받은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당시 유대인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관여했습니다. 귀신을 쫓기 위한 의식과 의례, 장황한 주문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느냐”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처럼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다니던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움과 공포, 불안 속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치유를 행하기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다는 사실에 유대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장 27절입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보시다시피 예수님이 행하신 일 자체에 놀란 게 아닙니다.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들도 가끔씩은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이 아니라 너무 쉽게 쫓아내셨기 때문에 놀란 겁니다. 절대적인 권세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너무 쉽게 큰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과 결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짜고 치는 계략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 말은 곧 이런 뜻입니다. “이는 간교한 계략이다. 속아서는 안 된다. 이 사람은 귀신에 속한 자이다. 귀신과 결탁한 자이기에 귀신들이 협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절대적이고 완전한 권위로 하셨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놀라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기억해야 할 점은, 마태가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되돌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수 있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난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할 분이라면 병을 치료하실 수 있어야 했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또 자연을 다스리실 수 있어야 했는데,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하심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죄를 다루실 수 있어야 했는데, 바로 이것이 9장에 나오는 기적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이기실 수 있어야 했는데, 역시 9장에 그 기적이 나옵니다. 8장을 통해서는 귀신들을 정복하시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마태는 8장과 9장에서 아홉 가지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능력의 모든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핵심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귀신들림, 능력,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귀신에 의한 귀신들림, 그리스도의 능력, 사람들의 관점, 이 세 가지입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다른 배들도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바쁜 안식일을 보낸 후에 가버나움을 떠났습니다. 갈릴리 호수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에는 한밤중이었습니다. 큰 폭풍이 일어났는데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후 잔잔해진 고요한 물결 속에서 동쪽 해안가에 도착했습니다. 아마도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을 겁니다. 그 지역은 해가 일찍 뜨는 곳이어서 새벽 4시 45분에도 동이 틉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작은 배들이 해안에 닿자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28절부터 보겠습니다. 귀신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여기서 '건너편'이란 갈릴리 호수의 맞은편에 있는 '가다라 지방'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데, 그 이유는 영어성경에서 마태복음에는 가다라(Gadarenes), 마가복음에는 거라사인(Gerasenes), 누가복음에는 거게사인(Gergesenes)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다라일까요, 거라사인일까요, 아니면 거게사인일까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성경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해안에는 거게사(Gergesa)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가버나움에서 북쪽으로 약 9.7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인데, 이곳의 지형과 지리적 특징이 성경 이야기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돼지 떼가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절벽이 바다로 이어져 있어서 지리적으로도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이는 가다라(Gadara)는 훨씬 더 남쪽 내륙에 위치해 있어서 이 이야기의 배경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거라사인과 누가복음의 거게사인은 맞지만, 마태복음의 가다라는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이렇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특정 마을을 지칭했고, 마태복음은 그 지역 전체를 가리켜 '가다라 지방'이라고 표현했다는 해석입니다. 가다라는 당시 그 지역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비록 주요 도시는 내륙에 있었지만, 그 영향력이 해안까지 미쳤고 결국 그 지역 전체가 가다라 지방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게사, 혹은 게라사 마을이 있는 가다라 지방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단순히 우연히 도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배들이 해안가에 다다르자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났"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각자의 기록 목적에 따라 그 중 한 사람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복음서 모두 한 사람뿐이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대화를 보면 주요 인물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태는 두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마가와 누가는 직접 대화를 나눈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 들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귀신 들린 상태, 즉 '다이모니조메누스(daimonizomenous)'입니다. 귀신 들린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오늘날 우리가 누군가 귀신 들렸다고 할 때,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어떤 이들은 귀신에 사로잡힌 상태, 귀신에게 억압된 상태, 귀신에게 점령된 상태 등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런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은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귀신이 이곳에 있든, 저곳에 있든, 귀 밖에 있든, 또는 이리저리 움직이든 상관없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런 세세한 것들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결국 귀신 들렸다는 것은 귀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신은 사람에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죠. 귀신이 하는 일은 바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 시험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유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야만 합니다. 또 병에 걸리게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두고 "자만하지 못하게 괴롭히려고 보내신 사탄의 사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은 육체, 영, 정신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귀신의 가르침이 진리를 왜곡해서 우상 숭배를 하게 만들고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귀신의 공격을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체는 이렇게 공격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 누가복음 13장에서는 귀신 들려 꼬부라진 사람, 마태복음 17장에서는 귀신 들려 간질병에 걸린 사람이 나옵니다. 이처럼 귀신들은 신체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신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처럼 정신이상을 일으킬 수 있고,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살 충동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가 계속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죠. 또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5장의 경우처럼 자학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날카로운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라고 하죠.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 9장과 18장에서 보듯이 살인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은 우리의 몸을 무력화시키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귀신들은 영적 차원을 공격합니다.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 종교, 미신적 행위, 온갖 부도덕한 행동들을 일으킵니다. 언제나 사악하고 비열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제 귀신 들림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귀신 들림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입니다. 초자연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성경이 보여주는 범위 이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도움이 될 만한 정의를 내리자면, 귀신 들림이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귀신이 사람의 몸에 들어와 살면서 자신들이 원할 때마다 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 들림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의미입니다. 참고로 '다이모니조메노스(daimonizomenous)'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2번 사용되었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귀신 들림을 인정하셨습니다. 성경은 귀신 들림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기적의 은사 또는 '두나미스(dunamis)', 즉 능력의 은사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늘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점이 있는데, 신약성경에 기록된 귀신 들림 사례 중에서 예루살렘 시내에서 일어난 일은 단 한 건도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루살렘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모두 시골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탄이 각 사회의 수준에 따라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들이 귀국해서 들려주는 귀신 들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들립니다. 제 경우만 해도, 평생에 딱 한 번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사람을 통해서 서로 다른 일곱 귀신이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물론 제가 이런 일을 찾아다닌다면 더 자주 만날 수도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흔한 일은 아닙니다. 사탄이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덜 발전되고 덜 복잡한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훨씬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방 종교가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만연해 있습니다. 이교도의 신들은 모두 악한 면을 가지고 있어서 달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들이 악한 모습을 보일 때면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죠. 결국 거짓 신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방에 가두고 사회에서 격리시킵니다. 사회에서 쫓아내서 감금하고 어딘가에 숨긴 뒤에 모른 척합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좀 더 세련되고 품위 있게 위장했다면 우리 사회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이 시골 마을에서는 귀신 들려서 미친 사람들이 엄청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 불쌍한 두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귀신 들림에 대해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귀신에 들리면 귀신의 인격이 사람의 본래 인격을 완전히 덮어버립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을 때 귀신이 "내 이름은 군대니"라고 답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있다"는 뜻이었죠. 그 사람은 자기 원래 목소리로는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아까 말씀드렸던 귀신 들린 여자 아이와 대화를 나눴는데, 제가 질문할 때마다 목소리가 최소 일곱 개에 이름도 제각각이었습니다. 그 여자 아이는 자기 목소리로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본문과 똑같았습니다. 귀신 들림이란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은 사라지고 극도로 사악한 새로운 인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왔다 갔다 할 때도 있고 계속 지속될 때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 질환으로 진단받은 많은 분들이 실제로는 귀신 들린 겁니다. 이런 분들을 위한 해결책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귀신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28절을 보면 이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에 살았는지 나옵니다. "무덤 사이에서 나와." 상상이 되시나요? 저만 해도 밤에 길 가다가 묘지만 지나가도 등골이 오싹한데, 무덤에서 산다니요? 유대인들은 시신을 만지는 걸 가장 부정한 일로 여겼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갈 곳이 없었으면 무덤에서 살았을까요? 당시 갈릴리 바다 동쪽 해안에는 높은 절벽이 있었습니다. 무덤으로 쓰려고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또 "몹시 사나웠다"고 하는데, 아주 난폭했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미쳐서 날뛰는 사람들이었죠.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사람들에 대해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7절입니다.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게 뭐가 잘못됐나요? 전 누드 비치에 자주 가는데요." 하지만 성경에서 벌거벗고 다닌 사람들은 모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성도, 부끄러움도 전혀 없는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들이죠.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이들을 쇠사슬로 묶으려 했지만 아무리 튼튼한 쇠사슬도 모두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힘이 엄청났습니다.

제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귀신 들린 여자 아이가 두 손가락으로 사무실의 철제 책상을 뒤집어서 거기 있던 남자 위로 던져 버렸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이 힘이 쎘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비명을 지르면서 자기 몸을 마구 베고 날카로운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는 것은 헬라어로 ‘크라조(krazo)’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뜻합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벌거벗은 남자가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면서 비명을 지르면서 엄청난 힘으로 언덕을 달려 내려오니 당연히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곳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예 피하는 게 좋죠. 누군가 가기라도 하면 무덤에서 뛰쳐나와서 비명을 지르면서 언덕에서 달려 내려왔으니까요.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귀신들이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작은 배들을 보고서는 늘 하던 대로 하려고 했죠. 그렇게 동굴에서 나와서는 비명을 지르면서 언덕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29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기서 잠깐 멈추겠습니다. 헬라어로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왜 우리를 귀찮게 하십니까? 왜 여기 오셨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마가복음 5장 6절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헬라어로 프로스쿠네오(proskuneo)입니다. 엎드려 절하며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귀신들이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프로스쿠네오(proskuneo)는 손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한다는 뜻입니다. 깊은 경외심과 존경심, 공경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귀신들이 그렇게 했을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귀신들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사탄의 반역에 가담하기 전에는 거룩한 천사였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신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적이며 심판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멸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우리를 귀찮게 하십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던 겁니다. 보십시오. 귀신들은 심지어 올바른 종말론적 지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가 너무 이르다"라고 말했습니다. 환난 전, 천년왕국 전에 활동했던 귀신들인 겁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존재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저주받을 것을 알고 있고, 예수님을 경멸하고 혐오하며 미워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권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겁니다. 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귀신들은 빌립보서 2장 10절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직관적으로 자신들이 삼위일체의 제2위격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능적으로 자신들을 멸망시킬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거룩한 분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러시면 안됩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구속 계획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귀신은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보다 신학적으로 더 낫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귀신들이 아는 것조차 모르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귀신들은 종말론적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영원히 멸망받고 저주받을 운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은 심판하실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때때로 귀신들이 영매나 무당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아마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었을 겁니다. 주님의 제자들보다도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고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이 언제 일어날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귀신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29절을 다시 보면 흥미로운 점은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얼마나 중요한 고백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메시아,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아십니까?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말한 것은 "당신은 왕이시며, 메시아이시며, 기름부음 받은 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는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4장 41절입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그렇습니다. 귀신들은 알고 있었고,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을 운명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겠습니까?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공격했을까요? 왜 그리스도를 시험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만일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할 수만 있다면 함께 무저갱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미워해서 어떻게든 무저갱으로 끌고 가려고 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어쩌면 인성을 통해서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30절에는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난 후의 요청이 나옵니다. 귀신들이 요청을 했는데 참 기이한 내용입니다.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귀신들은 자신들이 쫓겨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포로된 자를 향한 자비와 사랑, 긍휼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참 이상한 요청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귀신 들린 돼지라니요? 돼지는 그저 돼지 아닌가요? 귀신 들린 돼지와 그냥 돼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이 요청에 무슨 의도가 있었을까요? 혹시 귀신들은 반드시 어떤 존재 안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아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거처할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나름의 타협안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해치지 말라고 하시니, 차라리 돼지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제발 저희를 무저갱으로 보내지만 마십시오." 귀신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죠. 무저갱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차라리 귀하지 않은 존재 속으로 보내주세요." 귀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덜 귀한 존재가 바로 돼지였을 겁니다. 사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돼지를 기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교의 기준이었습니다. 폐지된 적이 없었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이 이 돼지들을 소유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는데,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었죠. 마가복음 5장 13절을 보면 그 돼지 떼가 이천 마리나 되는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귀신도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귀신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돼지들에게 들어가면 지옥 구덩이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확신하는 바로는, 돼지들을 죽여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분노하게 만들고, 결국 돼지를 죽인 죄로 예수님을 처형하게 만들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나름의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32절을 보면 귀신 들림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초점이 옮겨집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귀신에게서 그리스도께로 돌려봅시다.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말씀드리자면, 인간이 귀신을 쫓아낼 때는 귀신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써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귀신들은 스스로 떠나가고자 합니다. 단지 어디로 가야 할지만 허락을 구했고, 예수님께서는 "가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이천 마리의 돼지가 모두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굴었다면서 이 기적을 못마땅해 합니다. 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물은 기본적으로 언젠가는 식량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진 돼지를 건져내서 요리하느라 분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돼지 떼 전체가 집단 자살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자, 잠시 멈추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모든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까? 그저 "가라"라는 말씀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가라"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귀신들은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라." 단 한 마디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점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방법이 놀라웠던 것입니다. 즉각적이고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해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귀신들은 정말 강력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싸울 힘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귀신들은 그런 면에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베드로후서 2장 11절입니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제가 오늘 아침에 읽은 시편 103편에도 "천사들은 힘이 뛰어나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들도 거룩한 천사들만큼 강력한가요?"라고 물으실 수 있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10장을 보면, 거룩한 천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니엘에게 전하러 왔다가 귀신에게 3주나 붙잡혀 있었고, 결국 하나님께서 미가엘을 보내주셔서 구해주셔야 했습니다. 그만큼 귀신들은 강력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귀신들과 맞서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귀신들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존재입니다.

열왕기하 19장 35절을 보면 거룩한 천사 하나가 단 한 번에 앗수르인 18만 5천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천사들은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존재입니다. 에스겔 28장을 보면 분명히 지성이 뛰어나고,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쇠사슬을 계속 끊어버리던 광인이나 사도행전 19장,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귀신들이 힘이 얼마나 센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따르면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10장을 보면 활동 범위가 하늘을 넘나듭니다. 또한 경험이 풍부합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기록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오랜 세월 존재해 왔고 자신들의 역할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 존재로서 물질 세계에 구속받지 않습니다. 실로 놀라운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만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요한계시록 20장에서처럼 귀신들을 구덩이에 던지실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귀신들을 다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귀신들의 요청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귀신들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의 뜻을 위해서였습니다. 귀신들을 돼지 떼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상 돼지를 키우면 안 되기 때문에 좋은 교훈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교훈은 돼지를 기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훈은 그리스도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라"라고만 말씀하셨다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귀신들이 실제로 이동했는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보내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또 다른 귀신 들린 사람이 생겨납니다. 귀신들이 떠났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평화로운 돼지 떼를 보십시오. 돼지들은 보통 수영도 하지 않고 양처럼 무리지어 함께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천 마리의 돼지가 절벽을 향해 달려가 절벽 끝으로 떨어져서, 모두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면, 분명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돌아보면 귀신 들렸던 두 사람이 앉아있고, 마가복음에서 말하듯이,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연관성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잊을 수 없는 그 두 사람의 구원을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귀신들의 파괴적인 본성도 보여주셨습니다. 귀신들이 돼지들을 덮치자마자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귀신들에게 다가올 멸망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돼지들이 걱정된다면 요점을 놓치는 겁니다. 사람들을 위한 돼지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권능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돼지 몇 천 마리 정도는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이 그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살아있는 증거를 원하셨기 때문에 돼지들에게 보내셔서 아무도 잊지 못할 증거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 살펴볼 마지막 요점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32절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28절에서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매우 사나웠다는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그 사나운 폭력성이 돼지들에게 옮겨졌습니다. 돼지들도 두 광인만큼이나 광기 어린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33절입니다. "치던 자들이 달아나." 이들은 주인이 아닙니다. 언덕에서 돼지를 돌보던 돼지치기들입니다. 돼지들이 모두 집단 자살을 하고 미친듯이 언덕을 달려 내려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시내로 달려갔습니다. 정신없이 도망쳐 달아났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이야기했는데, 돼지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귀신 들린 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돼지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귀신에게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돼지들은 단지 그것을 증명하는 수단이었을 뿐이죠.

그러니까 돼지 치던 자들이 시내에 들어가서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했습니다. 모든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34절입니다.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놀랍지 않습니까? 진정한 부흥의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아왔습니다. 그 자리에 옷을 차려입고 제정신이 되어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온 성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경배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귀신들보다 한 걸음 뒤처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제발 나가주세요! 제발, 제발 나가주세요!’ 라고 말한 겁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제가 읽은 모든 주석서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보다 돼지들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철저한 물질주의자였기에 '우리 돼지들을 돌려주세요.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했던 것이다. 두 귀신 들린 사람들의 영혼을 걱정하는 영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정확한 해석은 아닙니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돼지 주인들의 반응은 나오지 않습니다. 세 복음서 모두 돼지 주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돼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온 성의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보고 "떠나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복음 5장 15절은 "두려워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가 난 것도, 분노한 것도 아닙니다. 완전히 겁에 질려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37절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지난 몇 주간 함께하셨다면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실 겁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주할 때면 항상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사야 6장의 상황과 같습니다. "화로다 나여." 저주의 말입니다. 당시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던 이사야조차 하나님을 뵙고 자신의 부정함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에게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능력과 위엄을 목격하고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제자들은 폭풍이 불 때 두려워했고, 예수님이 폭풍을 잠잠케 하셨을 때는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폭풍보다도 고요해진 상황이 더 무서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배에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일을 목격하고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귀신들도 다스리시고, 동물들도 통제하시며, 한 인간의 영혼을 깨끗한 눈처럼 순수하게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이 본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사실을 완전히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사건이 초자연적인 일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불편해합니다. "우리 돼지나 돌려주시고 떠나주세요." 인간은 돼지는 다룰 수 있어도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는 법입니다. 초자연적 신비를 마주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것은 메시아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입니다. 이 때를 시작으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커져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오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보다 더 훌륭하고, 더 위대하고, 더 순수하고, 더 강력하고, 더 거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들이 더럽고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R. C. 스프로울(R. C. Sproul)은 이러한 현상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흥미로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이는 피터의 원리(The Peter Principle)라는 책과 비슷하다. 피터의 원리를 아는가? 이 책에 따르면, 기업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무능력 수준에 도달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A 단계에서 잘하면 B로 승진하고, B에서 잘하면 C로 승진하는 식으로 계속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 한계에 도달하게 되고, 결국 모든 산업과 조직의 체계가 무능한 사람들로 채워지게 된다. 같은 책에서 그는 또 다른 측면을 이야기한다. 무능한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처음부터 무능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무능력의 수준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다. 애초부터 무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조직에서 오래 버티는 이유는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첫번째 원리는 ‘조직의 체계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이 체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무능함은 오히려 장점이 된다. 체계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뛰어난 능력자가 등장한다고 해보자. 이런 사람은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승진하기 어렵다. 윗사람들 모두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평 이동하는 것이다. 한 조직에서 다른 조직으로 옮겨 다녀야만 한다. 자기 조직에서는 올라갈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뛰어난 능력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반에서 모두가 32점 이하를 받았는데 한 여학생만 100점을 받았을 때와 같은 상황입니다. 시험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학생들이 멍청했을 뿐인데, 그 여학생이 성적이 뛰어나서 미워했던 겁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예수님은 비범하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완벽함 때문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거룩함 때문에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르셨습니다. 사람들의 정체를 드러내셨고 얼마나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그 능력을 목격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경배하며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 대신에, "나가세요. 떠나세요. 필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 기적만 볼 수 있다면 믿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들어보십시오. 기적을 직접 본 사람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여전히 믿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미워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적만 보여주면 모두가 믿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놓여있던 돌을 들어올렸을 때, 그 밑에 있던 벌레들이 빛을 보자마자 흩어져서 숨을 구멍을 찾는 것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람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 서면 자신들의 어둠이 그리워서 다시 그 속으로 도망갑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행동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5장 19절의 병행 구절에서 끝나는데, 이 두 구절을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고 싶어했습니다. 배에 다시 올라서 동행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 5장 19절을 보십시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자신들의 땅에서 쫓아내려 했던 그 적대적인 사람들도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강력한 능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로 이 한 선교사와 친구를 사람들 가운데 남겨두셨습니다. 한 명의 선교사를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증언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탄을 이기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이 놀라운 기록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도구인 죄와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갖고 계시며, 언젠가 이 땅과 우주를 바로잡으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몸을 주실 것이며, 그곳에는 질병도, 슬픔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보았습니다. 귀신들조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판자로 오실 것이고, 불경한 자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실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의 증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심판자이시지만, 우리는 귀신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구원의 은혜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서 풀려난 사람에게 귀신들에게 증언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귀신은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계획이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저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위엄에 압도됩니다. 예수님을 전파하고 순종하겠다고 새롭게 결심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가 다시 이 자리에 모일 때까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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