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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는 마태복음 9장을 여는 여덟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9장 1절부터 8절입니다. 2절 마지막 부분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구절에 먼저 주목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실 답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포해야만 하는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죄 사함’입니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자 생명력입니다. 기독교의 다양한 가치와 미덕을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는 인간이 죄를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9장 1절부터 8절에서 다루는 기적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 마태는 우리 주님이 행하신 여러 기적을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서, 물론 신성을 증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만, 이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마태가 많은 기적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메시아 왕국에 대한 예언에 부합하는 매우 구체적인 기적들을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도래하게 하실 분이심을 알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마태가 선택한 이 기적들에는 유대적 특징과 구약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는 이 기적들을 정점으로 향하도록 배치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두 장에 나오는 아홉 가지 기적 중 다섯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9장에 이르러서는 이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향해 나아갑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고, 그 다음에는 손도 대지 않고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고, 이어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육체적인 기적을 넘어 자연을 다스리시며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고, 나아가 자연을 다스리시는 권능뿐 아니라 귀신들을 내쫓으심으로써 초자연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권능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적의 정점에 이르러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인 죄를 다스리시는 권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 즉 인간을 창조주와 분리시키는 악을 다루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님은 병자를 치료하시고, 폭풍을 잠재우시며, 귀신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바로 죄를 사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그리스도의 권위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는 권위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하고 끝이 납니다. 7장 28절을 보면 설교 후에 예수님이 권위 있는 자처럼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리적 권위, 신학적 권위, 혹은 교리적 권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인 28장 18절에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라고 나옵니다. 통치하는 권위, 주권적 권위, 또는 다스리는 권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권위를 보게 됩니다. 구속적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할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마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종교에 대한 권위를, 8장 1절부터 17절에서는 질병에 대한 권위를, 8장 23절부터 27절에서는 자연에 대한 권위를, 8장 28절부터 34절에서는 귀신에 대한 권위를, 그리고 이제는 죄에 대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권능을 점진적으로 보여줍니다. 9장에 가면 우리는 심지어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권위를 보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태에게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끄실 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는 특히 두 번째 세 가지 기적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중 첫번째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이 세상의 저주를 이기실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30장은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35장에서는 사막이 장미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41장, 51장, 55장, 요엘 3장, 에스겔 36장에도 비슷한 예언이 나오는데, 모두 하나님 나라의 물리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수처럼 싸우던 동물들이 더 이상 서로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땅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수명도 길어져서 100세에 죽는 사람은 갓난아이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기에 메시아는 반드시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파도와 바람을 잠재우신 기적은 바로 예수님이 그런 능력을 가지신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여 큰 세력을 이끌고 올 것이지만 결국 패배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스가랴 3장, 다니엘 7장, 8장, 11장을 보면 사탄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려 하는지, 마지막 때에 귀신의 세력과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할 것인지가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메시아는 반드시 귀신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기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 용서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36장, 이사야 33장, 이사야 40장, 이사야 44장, 이사야 60장이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의 용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절에서 8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 땅과 영원한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메시아가 되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기적을 무작위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기록했습니다. 또한 매우 구체적이고 특별한 방식으로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도 보여줍니다. 예언이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두번째 세 가지 기적 중에서 마지막인 세번째 기적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그러니까 갈릴리 호수의 동쪽 해안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8장과 9장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요점을 전달하기 위한 특정 기적들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신 후에 다시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동네에 가셨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나사렛이 예수님 동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때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4장 13절을 보십시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30절부터 31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선지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 북쪽 해안가의 작은 마을 가버나움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머무셨던 것 같습니다. 8장 14절에 나오는 집, 즉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그 집에 말이죠. 그러니까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을 임시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기 전에 예수님이 가버나움과 그 주변에서 행하신 기적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시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군중은 계속해서 불어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돌아오시면 또다시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돌아오시자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도 같은 사건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세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가 같은 이야기를 쓰면서도 각자의 목적에 맞는 부분을 선택해서 기록했다는 점이 참 놀랍습니다.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 17절부터 26절을 본문과 함께 보면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으로 추정되는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마 2층에 계셨을 겁니다. 당시에는 2층집이 일반적이었는데, 2층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큰 방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던 다락방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대부분의 집에서 아래층에 부엌과 여러 다른 공간들이 있고, 위층을 큰 모임 공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지붕이 있었는데, 그 지역의 날씨 특성상 지붕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든 집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외부 계단이 있었습니다.

이날 주님이 계신 집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습니다. 마치 여러분이 참석했던 금요 성경공부처럼 몸을 돌릴 공간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일부는 문밖으로 넘쳐나와 현관에 서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2절부터 시작됩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개의 핵심 단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는 '믿음'입니다. 2절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자, 우선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마태는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기록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을 함께 보면 정말 놀라운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여기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마태복음에는 앞뒤 맥락이 없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네 명의 친구들 혹은 친척들, 즉 이 병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네 명의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고 싶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볼 때,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네 사람은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왜 데려와야 했을까요? "중풍병자"였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는 ‘파랄뤼티코스(paralutikos)’입니다. 우리가 앞 장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중풍병자입니다. 신체가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마비란 신체의 운동 기능이 상실된 상태입니다. 때로는 감각 기능도 상실되어 움직이거나 감각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마비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고로 인한 목이나 등의 부상, 선천적 결함, 근위축증, 소아마비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에는 심각한 마비 상태였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사지마비였을 겁니다. 적어도 침상에 누워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등을 대고 누워 있었습니다. 전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네 사람이 들어야 할 정도로 자신을 옮기는 사람들을 도울 수조차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중풍병자가 들것 혹은 침상에 누워있었다고 나오는데, 두꺼운 이불, 누빔이불, 또는 말아서 운반할 수 있는 얇은 매트리스 같은 것을 말합니다. 바닥에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또 작은 나무 틀도 있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틀에 밧줄로 매트리스를 매달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마비가 된 채로 침상에 그저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마비를 일으키는 또 다른 질병이 있었는데, 바로 매독입니다. 중풍병자가 정확히 무엇 때문에 중풍병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어찌됐든 이 중풍병자는 침대에 누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 시대의 마비 환자들은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힘든 병이지만, 당시에는 의료 기구도 없고,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고, 의학 지식도 부족했기 때문에 더욱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겁니다. 게다가 이 중풍병자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사회적 낙인이 찍힌 상태였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 이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생각입니다. 그 시대에는 질병과 고통을 모두 죄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물었던 것을 떠올려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제자들이 질병을 죄와 연결시켜 이해했던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죄가 없었다면 질병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죠. 하지만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병에 걸린 것은 죄 때문'이라는 당시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의 사고방식이 그랬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하는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들이 했던 말이 나옵니다. "네게 문제가 생긴 것은 너의 죄 때문이다. 네가 겪는 고난은 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이 중풍병자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낙인과 장애로 인한 고통도 겪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무거운 짐까지 져야 했죠.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자신의 죄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사람들을 피해 혼자 있고 싶어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찾아가고 싶어했습니다. 제가 확신하건대,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는 병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들아, 안심하여라.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중풍병자가 괴롭고 절망스러웠던 진짜 이유는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질병이 항상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여러분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에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모든 질병이 징계는 아니지만,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파괴적인 힘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가 자신의 병이 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느꼈든, 야고보서 5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삶에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든, 또는 병으로 인한 절망이 너무나 컸던 것이든, 저는 중풍병자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런 큰 믿음을 갖게 했을까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보셨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분명히 믿음이 있었을 겁니다. 비록 아픈 사람을 돕기 위해 데려왔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하실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경우에도 비록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의 상태를 알고 있었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셨다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치유를 하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이 분명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네 명이 침상을 들고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을 겁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흔했던 외부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서는 지붕 덮개를 하나씩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그 집을 잘 살펴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 병자를 정확하게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놓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봅시다. 모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덮개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끈질기고 간절하면서도 창의적인 믿음의 모습입니다.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중풍병자는 그대로 누워 있었습니다. 아마도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요청도,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의 발 앞으로 내려왔을 뿐입니다. 슬픔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을 겁니다. 뒤이어 나오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치유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마음까지도 치유해주시는 분이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중풍병자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바로 자신의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으로 몹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 "에이, 포기하자. 이 인파를 봐."하고 돌아갔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대단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 지붕을 뜯어내고 밑으로 내렸습니다. 자신의 보기 흉한 모습을 드러냈고, 스스로 사회적 낙인이라 여기던 것을 드러냈으며,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드러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발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정한 겸손입니다. 바로 팔복의 자세입니다.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죠. 성경은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는데, 그 다섯 사람 모두의 믿음을 말합니다. 평범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강하고 끈기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믿음이 적은 사람도 고치셨지만, 특히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고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9장 18절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이것이 바로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 관리의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28절에는 맹인들이 예수님께 왔을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물으시자 "예, 주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특별히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발 앞에 누워 있습니다. 아무 말도 없는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과 경외심으로 가득한 침묵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전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정말 멋진 단어입니다. ‘작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논(teknon)'은 '자녀'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무한한 사랑이 담긴 표현입니다. 여기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죄인으로 낙인찍혔습니다. 영혼 속에서 죄책감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에, 죄인임에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그 결과를 감당하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두려워했지만,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아들아, 얘야"라고 따뜻하게 부르셨습니다. 자신의 병과 죄를 깊이 느끼며, 슬픔과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거룩하신 분 앞에 섰는데 예수님이 “얘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다니 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입니다. 죄는 미워하셔도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안심하라" 또는 "용기를 가지라"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달세오(tharseo)’는 매우 흥미로운데, 마음에서 우러나는 내면의 용기를 의미합니다. 좀더 잘 이해하려면 때때로 '용기를 내다'로 번역되는 또 다른 동사 ‘톨마오(tolmao)’와 비교해보면 좋습니다. ‘톨마오(tolmao)’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용기입니다. 이를 악물고 견뎌서 두려움을 극복하라는 의미입니다. 일어나서 행동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말하는 종류의 용기입니다. 하지만 ‘달세오(tharseo)’는 그렇지 않습니다. ‘달세오(tharseo)’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이를 악물고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얘야,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할 것이 없단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두려워할 것이 많습니다. 정말 많이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풍병자가 나아왔을 때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는데,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중풍병자의 마음은 올바른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는 자가 아니라 드러내는 자여야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중풍병자는 슬픔으로 떨고 있었고, 두려움에 압도되어 있었으며,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의 믿음, 참된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 이는 두번째 핵심 단어인 용서로 이어집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사함은 다른 어떤 기적과도 견줄 수 없는 신성한 기적,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얼마나 깊이 있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까. 주목할 점은 중풍병자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원한다는 것을 아셨을까요? 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마음을 읽으신다는 겁니다. 병든 사람의 마음도, 서기관들의 마음도 읽으셨습니다. 누구의 마음이든 읽으실 수 있습니다. 요청하기도 전에 아십니다.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은 우리가 말로 표현하기도 전에 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 사함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완전하고 온전한 용서입니다.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하노라"라고 하실 때, 시편 103편이 말하는 것처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저는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이 참 좋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용서받았답니다. 용서입니다.

선교사들이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알래스카로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을 에스키모 언어로 번역할 때 큰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에스키모 언어에는 '용서'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용서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에스키모인 사이에서 사용되는 매우 특별한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이수마기조우주나이너믹(issumagijoujunnainermik)'이라는 단어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선교사들은 성경에 용서라는 단어 대신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의 죄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사하셨습니다. 용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큰 필요인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가장 큰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대학교 4학년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면서 국제 봉사 단체인 키와니스 클럽(Kiwanis Club)에서 연설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 주의 선수상” 같은 것을 받아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미식축구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지만 저는 주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건 확실한데 다른 분들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네요. 연설이 끝난 후에 한 분이 제게 와서 제가 꼭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여학생이었는데, 목에 총상을 입어서 척수가 손상된 상태였습니다.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 여학생은 학교 치어리더 대표였는데, 남자친구가 실수로 쏜 총에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침상 위 양가죽에 누워 있는 바로 이 남자와 똑같이 목 아래가 마비된 채로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했고,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여학생은 할 수만 있다면 자살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모든 대화가 끝나자 여학생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영접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에 여학생이 제게 건넨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몇 번 더 병문안을 갔는데, 어느 날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존, 정말 솔직히 말하는 건데 이 일이 일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가 "사고를 말하는 거예요?"라고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이 일이 없었다면 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죄도 용서받지 못했을 테니까요."

죄 사함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슬픔을 주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가장 깊고 근원적인 방식으로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죄 용서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와 죄사함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말하면 안 돼요. 너무 부정적이에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저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4절에 따르면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고 영혼을 더럽힙니다. 죄는 우리 안에 마귀의 형상을 심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자 심각한 배은망덕입니다. 죄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죄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는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조차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죄는 마음을 지배하고, 의지를 왜곡시키며, 정서를 더럽히고, 육체를 오염시킵니다. 죄는 인간을 마귀의 지배 아래 놓이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합니다. 죄는 인간을 불행에 빠뜨려서 불꽃이 위로 날아가듯이 고생하게 하고, 공허함에 빠지게 하고, 평안을 알지 못하게 하고, 지옥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또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그 순간 예수님의 위대한 마음 속에 갈보리의 또 다른 아픔이 스며들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님 자신이 그 죄를 짊어지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삶 전체를 통해 십자가의 쓰라림과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때마다 그 연약한 영혼에게서 제거하신 형벌을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첫째는 믿음, 둘째는 용서입니다.

세번째 단어는 분노, 분노입니다. 3절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속으로 이르되,” 마가복음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잘 들으십시오. 중풍병자는 용서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서기관들이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달랐던 걸까요? 용서를 원하지 않았던 걸까요?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 주일 저녁에 보았던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간음한 여인과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베푸시자, 여인은 그 자리에 남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떠났습니다. 오랫동안 이런 일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용서에 대한 말씀을 전할 때면 어떤 이들은 남아서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지만, 어떤 이들은 떠나버립니다. 관심이 없는 겁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서기관들은 "놀랍구나,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니. 내 마음의 죄책감과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주실 수 있다니, 이 용서를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이 사람이 죄를 용서한다고 하니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신성모독이다." 보십시오, 이들에게 있어 최고의 신성모독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가장 큰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실 이들의 첫마디는 맞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이사야 43장 25절에서도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점은 맞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크게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죠.

3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마가복음에서는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은 말도 아니었는데,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을 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지하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마음뿐만 아니라 서기관들의 마음도 생각도 모두 아셨습니다. 마음을 읽으실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주목할 점은,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한 이것이 결국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는 불씨가 되었다는 겁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한다고 비난했고, 11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도덕성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린다. 틀림없이 나쁜 사람일 것이다. 신성모독자이면서 부도덕한 자다."

14절입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여기서는 예수님이 종교적이지 않다고 비난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당신은 종교의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고 있다. 신성모독이고 부도덕하고 비종교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이제 분노가 극에 달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한쪽에는 믿음과 용서가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분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가운데 계십니다. 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시면, 이를 알아보고 받아들이며 기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증오하고 경멸하며 분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 이제 네번째 단어는 논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일에 대해 논증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부분의 경우에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지 않으셨지만 이번에는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에 변호하셨습니다. 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을 아실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에 대해 누구의 증언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셨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아는 분이라면 틀림없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열왕기상 8장 39절입니다.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역대상 28장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예레미야 17장 10절입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에스겔 11장 5절입니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왜 너희는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악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8장에서는 시몬이 하나님을 속이려 했습니다. 악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는 마음입니다. 왜 음모를 꾸몄을까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었을까요?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셨습니다.

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논증을 보십시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서기관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둘 다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둘 중 어느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두 말씀 모두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신성한 능력으로 두 가지 모두 행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둘 다 똑같이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든 수고로워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질병과 아픔이 죄의 결과라고 가르친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질병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질병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들 자신의 신학이 이미 이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말씀하신 겁니다. 답은 어느 것도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 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보아라. 너희가 답을 못하고 있구나. 내가 이것들을 할 수 있다면, 내가 하나를 할 수 있다면 다른 하나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다른 하나도 할 수 있다면 나는 신성모독자가 아닌 하나님이다." 서기관들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죄 사함은 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습니다. 거부가 진리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였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질병, 질환, 귀신, 재난, 죽음을 물리치실 수 있다면 분명 죄도 다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바라보는 또 다른 흥미로운 관점이 있습니다. "행하는 것"의 관점이 아닌 "말하는 것"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다르게 읽어보겠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실제로 행하기에는 둘 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하기에는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쉽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여러분 중에 누구에게든 "죄 사함 받으셨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휠체어를 타고 계신 분께 "일어나 걸어가세요"라고 말한다면,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게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말하기만 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이제 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권세가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왜 이것을 알아야 했을까요? 바로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만약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만 말씀하셨다면, 사람들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시고 그 사람이 실제로 일어나 걸었을 때, 예수님의 권능이 입증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한 가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도 사하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가다라에서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실 때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돼지 떼에게로 보내셨습니다. 이유가 있었죠. 그저 "귀신아 나가라"고만 하셨다면, 사람들은 귀신이 정말 나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것도 다이빙 선수처럼 멋지게 뛰어내린 게 아니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습니다. 이렇게 이천 마리의 돼지가 절벽에서 뛰어내려서 바다에 빠져 죽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귀신들이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바로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을 증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죄였고, 질병은 그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를 하실 수 있다면 다른 것도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든 와서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네 죄가 용서받았다", "너는 이제 죄에서 자유롭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단순히 말씀만 하신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치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죄 사함의 능력을 입증하신 겁니다. 결국 그 사람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다섯번째 단어는 '힘'입니다. 능력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6절 하반절입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절에는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이 뜯어낸 지붕에서 머리를 들이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죽여 듣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말문이 막힌 채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극적인 순간에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논리적인 말씀으로 설득하신 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중풍병자가 일어나 침상을 팔에 말아 들고, 나무 틀을 집어 들었습니다. 걸어나갈 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을 겁니다. 중풍병자가 밖으로 나왔을 때, 네 친구들이 계단을 내려와서 만났을 때의 그 기쁨이 어땠을지, 여러분 상상이 되시나요? 분명 이들의 귀갓길은 무척이나 특별했을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도 치유하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단어인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부분을 특별히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적용이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면 "무리가 이를 보고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헬라어로 '포베오(phobeo)', '포보스(phobos)'입니다. 영어의 '포비아(phobia)', 그러니까 '두려움'이라는 단어의 어원이죠. 무리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셨고,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며, 인간이신 예수님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이 인간이시라는 것을 알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물론 ‘케노시스(kenosis)’의 온전한 의미, 즉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성육신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고 눈앞에 보이는 인간이신 예수님께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두려워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아온 동일한 반응 아닙니까? '포보스(phobos)', 또는 '포베오(phobeo)'는 고대 헬라어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경외' 또는 '존경'을 의미합니다. 무한히 위대한 존재 앞에 섰을 때 느끼는 두려움을 뜻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예를 보면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봤을 때, 폭풍을 잠잠케 하셨을 때, 이 사람이 치유를 받았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을 때, 귀신들린 자들이 치유받았을 때도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사가랴가 제단 옆에서 주의 천사를 보았을 때, 그리고 누가복음 1장에서 사가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구경꾼들의 반응도 이 단어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목자들이 천사들의 노래를 들었을 때,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이 천사가 돌을 굴리는 것을 보았을 때,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돌아갈 때의 감정도 이 단어로 묘사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서는 마지막 날의 격동적인 사건들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를 목격하고 초대교회의 능력을 체험했을 때의 감정을 설명하는 데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고,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에베소의 당황한 이교도 마술사들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경외심, 존경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처럼 그리스도를 경외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교회가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서신서에서는 이러한 반응을 우리의 실제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결한 삶의 원천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절은 우리의 정결한 삶이 두려움과 함께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거룩함의 근원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고린도후서 7장 11절은 이것이 진정한 회개를 이끌어낸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은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기초라고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1절을 보면 이것이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존중하고 봉사하는 기초가 된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서는 이것이 전도의 원동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그리고 디모데전서 5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이 두려움, 이 포보스(phobos), 하나님에 대한 이 경외심은 모든 기독교인의 행동의 근원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선진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했으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반응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계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그 용서를 경험하셨기를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당시 군중은 용서받은 사람들과 분노한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성경은 이 두 부류를 제외한 또 다른 부류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분명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무심히 걸어간 변덕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용서를 베푸시며, 모든 과거를 지우시고, 모든 죄를 씻어주십니다. 여기서 죄라는 단어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소식입니다. 이 용서는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계시는 동안, 현대 미국 시인 엘렌 길버트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부러진 날개를 애써 퍼덕이며 날아가는 새처럼,

저는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제게는 어울리지 않았던

자유로운 비행을 하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광활한 공간과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알았던 제가,

이제 해가 저물어

주님의 날개 아래 피신처만을 구합니다.

부러진 날개를 애써 퍼덕이며 날아가는 새처럼,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 다시 한 번 주님의 가슴에 저를 안아주시고,

제 과거로부터 저를 숨겨주소서.

이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싶어하십니다. 곧 예배가 끝나면 기도실이 열릴 것입니다. 제 오른쪽 앞쪽에 있습니다. 여러분을 도와주실 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져가실 수 있는 자료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혹시 원치 않는 자유 속에서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과거로부터 숨기를 원하신다면, 상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영혼을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여러분의 육체도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주신 이 진리를 우리 마음 깊이 새겨 주옵소서. 인간적인 것들은 잊게 하시고 주님께로부터 온 것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오늘 저녁에 다시 모여서 교제하고, 서로 나누며,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오늘 예배를 마친 후에 기도실에 꼭 와야 할 분들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번주가 특별한 추수감사 주간이 되게 하시고, 무엇보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것에 가장 큰 감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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