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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18절부터 26절까지를 계속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을 "죽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러" 오셨다고 전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부터 15절 말씀이죠.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평생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그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삶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와도 같습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죽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제 생각에 가장 완벽한 삶을 산 것처럼 보였던 사람을 꼽자면 마하트마 간디를 들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모든 면에서, 즉 생활방식이나 종교, 대중적 인기나 언론의 주목 등 모든 면에서 볼 때에, 적어도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완벽하다고 여겼던 사람이죠. 늘 평화로워 보였고, 마음의 평안을 온전히 이룬 것 같았고, 그 어떤 두려움도 없어 보였습니다. 간디는 죽기 15년 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힌두교는 내 영혼을 완전히 만족시켰다. 나라는 존재를 가득 채웠다. 산상수훈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안을 바가바드 기타와 우파니샤드에서 얻고 있다." 완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자신의 힌두교 신앙에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서는 전혀 다른 고백을 합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1년이나 더 살 수 있을까. 50년 만에 처음으로 절망의 수렁에 빠져있음을 느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뭔지 아십니까? 아마도 간디는 천로역정을 읽고 있었을 겁니다. 계속 읽습니다.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빛을 찾고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것처럼 보였던 마하트마 간디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이상한 짓을 하곤 합니다. 터키의 한 시계공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자신의 무덤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무덤 위에 20센티미터 정도 되는 창문을 내고, 안에는 전기식 벨을 설치했습니다. 혹시라도 산 채로 묻히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버튼만 누르면 묘지 경비실에 알람이 울리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전구도 하나 달았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무덤에 묻을 사람들에게 7일 동안 불을 켜두었다가 다시 와서 보고 정말 죽어있다면 그때 불을 끄라고 지시했답니다. 브라질에서는 한 건축가가 39층짜리 마천루 묘지를 설계했습니다. 브라질에는 마천루가 많습니다. 대부분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죠. 하지만 이 마천루는 달라서, 시신 14만 7천 구를 안치할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시신을 빨리 운반할 수 있도록 헬기장도 있고, 교회 2개에 예배당 21개, 슬픔에 잠긴 유족들이 쉴 수 있는 편안한 침대도 있습니다. 24시간 내내 차분하고 엄숙한 음악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브라질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겪고 있는 심각한 매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묘지입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매장보다 화장을 더 많이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시신을 묻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묘지가 너무 부족해서 황실 가문이 아니면 묘지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러시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묘지가 있는데, 한 묘지에만 50만 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샌디에고에 최근에 생긴 납골당에는 7만 구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습니다. 납골당 옆에는 정원이 있고, 그 정원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해지는 예루살렘 동산의 무덤을 본떠 만든 모형이 있습니다. 이 모형은 납골당 옆에 세워질 예정인데, 비어있는 채로 문이 항상 열려 있어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직접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누워있는 다른 무덤들도 언젠가는 비워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무덤으로 가득합니다. 낮은 곳에도 있고 높은 곳에도 있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삶의 끝자락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죽음을 정복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관련된 성경 구절이 많지만, 요한복음 5장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6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11장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즉, 예수님은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가 있다. 그 권세를 내게 주셨다"라고 하셨고, "내가 살아있으므로 너희도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한 것처럼 사망이 쏘는 것을 없애고 사망의 승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따르면 메시아는 궁극적으로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영원한 세상을 가져올 것입니다. 메시아는 죽음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당연히 죽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11장 5절을 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이신지, 다윗의 자손이신지, 약속된 분이신지 확인하고 싶어서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3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당신이 메시아이십니까? 약속된 분이십니까? 요한이 선포해 온 그분이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그것이 무엇입니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살아나며…"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왕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자 왕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8장과 9장에서 메시아의 기적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장 1절부터 17절에서는 질병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8장 23절부터 9장 17절까지는 육체적, 영적, 도덕적 장애를 다스리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9장 18절부터 35절에서는 죽음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병, 장애,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보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증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왕국에서 영원토록 하실 일들을 미리 보여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18절부터 시작하는 본문에서는 궁극적인 원수인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세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첫번째는 죽은 소녀를 살리신 것이고, 두번째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이고, 세번째는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모든 기적은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한 번은 입이 죽어 말 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셨고, 또 한 번은 눈이 죽어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어린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몸의 일부인 신체 기관을 죽음에서 살리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린 소녀를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몸 전체도 죽음에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2주 전에 우리가 18절부터 26절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부활의 기적 자체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셨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권능뿐 아니라 사람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온유함도 보게 됩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매우 분명해집니다.

이제 사람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개요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18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잠깐 멈춰보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대화하시느라 바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항상 군중 속에 계셨고,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전체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4장 25절은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라고 하고, 8장 1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라고 하고, 12장 15절도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라고 합니다. 이는 19장 2절까지 이어져서 여기서도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라고 하고, 20장 29절과 21장 8절도 마찬가지로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전 생애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질문에 답하시고, 필요를 채우시고, 설교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구할 수 있습니다. 이교도의 신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신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라고 조롱했던 구약 시대의 이방 신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는 분이셨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18절을 보면 군중에서 한 사람으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한 관리가 와서"라고 합니다. 수많은 군중 속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러니까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진 겁니다. 단순히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것, 즉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의 삶에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나병환자를 만지셨고, 중풍병자 하인을 둔 백부장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열병으로 앓아누운 여인을 어루만지셨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죽어가는 딸을 둔 아버지와 심각한 출혈이 있는 여인을 만나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항상 개개인과 함께하시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필요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입니다. 절실한 필요가 있는 곳이라면, 큰 믿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 계셨습니다.

18절을 보면 "한 관리가 와서"라고 하는데, 다른 복음서는 회당장이라고도 전하고 있습니다. 종교 제도, 그러니까 유대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민이자, 가장 명예롭고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진 집단의 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딸이 죽은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딸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마태복음에서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이미 딸이 죽은 상태였기에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절망감 속에서 찾아왔지만, 동시에 큰 믿음도 보여주었습니다. 18절에서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큰 믿음입니다. 절실한 필요와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됩니다. 18절 중간을 보면 그가 와서 절했다고 나옵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절하다”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물론 절을 하면서도 거짓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6절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빚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주인에게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놓아 보내면서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그 사람은 곧바로 자기에게 약간의 빚이 있는 다른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거짓된 사람이었고 위선자였던 겁니다. 26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이것이 바로 거짓된 마음으로 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절을 한다고 하더라도 겉으로만 할 수도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에서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절하는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천국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보냈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이처럼 거짓되거나 이기적인 마음으로 절할 수도 있지만, 진실되고 진정한 마음으로 절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관리가 예수님께 왔을 때는 진정한 마음으로 왔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4장 33절을 보면 진정한 마음으로 절하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고, 배에 오르셨을 때 배에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하면서 절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마음으로 절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입니다. 15장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15장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에게 가시기 전에 먼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25절에서 보듯이 주님께 매달리며 절했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저는 이 여인이 진실한 마음으로 절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무시하시는 듯한 태도를 보이신 것이 오히려 여인의 진정한 믿음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인 너에게 내가 무슨 의무가 있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자신은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고, 부스러기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거짓된 마음으로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으로도, 혹은 진실한 마음으로도 절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으로 돌아가 보면, 여기서도 진정한 마음으로 절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그는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8장 8절의 백부장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만 믿었을 뿐입니다. 반면 이 관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을 겁니다.

이 관리가, 그러니까 회당장 야이로가 제자들보다도 더 큰 믿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 아십니까? 8장 24절입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14장 31절, 16장 8절에서도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고, 6장 30절에서도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있었지만 작은 믿음이었다면, 이 관리의 이런 믿음은 이미 구원받기에 충분한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관리가 진정으로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절실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간절했습니다.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큰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군중들도 모두 함께 따라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관리의 집으로 가는 좁은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시고 만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절실한 필요가 있는 이 한 사람을 위해 일어나 따라가셨습니다.

세번째입니다. 예수님은 만질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이 점이 참 좋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손이 닿을 수 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한 관리는 예수님께 절을 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20절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예수님의 옷자락에 달린 술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여인이 앓던 혈루증은 일종의 출혈병이었는데, 여인에게만 생기는 출혈입니다. 아마도 자궁근종 때문이었을 겁니다. 암일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12년이나 살아있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레위기 율법에 따르면, 여인에게 혈루증이 있을 때는 옷도 부정하고, 눕는 침상도 부정하고, 앉는 모든 것도 부정하고, 손대는 모든 것이 부정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도, 가정에서도, 부부 관계에서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부정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격리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가족도, 친구들도, 신앙 공동체도, 회당도 모두 멀어졌고, 사람들은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 여인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치유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믿음도 있었습니다. 21절을 보면, 헬라어 원문에는 여인이 계속해서 되뇌었다고 합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유대인의 예복에는 네 개의 작은 술이 달려 있었습니다. 파란색이었습니다. 민수기 15장과 신명기 22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율법과의 일치를 상징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 사이를 지나가실 때에, 그 작은 술이 등 뒤 옷자락에서 흔들렸고, 여인은 급히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그 여인은 그 순간에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에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질 수 있는 분이셨고,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위대한 성인 제임스 심슨 경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한 친구가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임스, 곧 예수님의 품에서 쉴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제임스는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예수님의 옷자락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여인은 부끄러움과 수치심 때문에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손을 뻗어 만지기만을 원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너무나 큰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리는 다소 불충분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린 딸이 살아나기만을 바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인의 믿음은 다소 미신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둘 다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21절 하반절에서 여인이 예수님을 만지려 했고 예수님이 돌아서셨다는 기록 사이에,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에는 기록된 일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꽤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8장 44절입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여인은 즉시 치유되었고, 그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모두가 아니라고 했을 때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밀치고 있었는데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변덕스러운 군중이 밀치는 것과 신실한 여인이 간절히 붙잡는 것의 차이를 아셨습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저는 46절 말씀이 참 좋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알려주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온전한 통로가 되셨습니다. 만진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여인을 치유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나가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손을 대는 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밀치는 사람과 즐거움을 찾아 왔다 가는 사람, 절박한 마음과 믿음으로 매달리는 사람의 차이를 아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내시고 ‘바로 너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번째로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가갈 수 있고, 늘 함께 계시며, 만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차별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공평하셨습니다. 이 한 여인에게 관심을 돌리신 것을 보면 얼마나 공평하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옷자락 좀 놓아주겠니? 난 지금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중이란다. 제발 내 옷자락 좀 붙잡지 마. 나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단다. 이 사람은 회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야. 이 사람이 회심한다면, 이 도시에 부흥이 일어날 수도 있단 말이다. 꼭 가봐야 하니 제발 좀 놔라.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유명인사나 스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만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늘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받아주셨습니다. 성경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시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잘것 없는 잡다한 무리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주에 폴 브랜드 박사(Dr. Paul Brand)와 필 얀시(Phil Yancey)가 함께 쓴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라는 정말 흥미로운 책을 읽었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셔야 할 책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겉모습이 얼마나 부족해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믿음직한 에서 대신 사기꾼이자 교활한 야곱을 택하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술꾼이었던 노아를 택하실 줄은 또 누가 알았겠는가?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망간 모세를 택하실 줄은 또 누가 알았겠는가? 출애굽이 하나님께 중대한 일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아론을 보내셔서 그 상황을 처리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대부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던 너저분한 선지자들을 택하실 줄은 또 누가 알았겠는가?"

폴 브랜드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외가 오히려 관례가 된 것 같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인간들은 하지 말라고 한 유일한 일을 해버렸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릴 새로운 민족의 지도자로 뽑힌 사람은 자기 아내를 아무것도 모르는 바로에게 넘기려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91세의 고령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에 하나님 앞에서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창녀였던 라합은 오히려 큰 믿음을 가진 여인으로 인정받았고, 가장 지혜로웠다는 솔로몬은 자신이 그토록 날카롭게 써낸 잠언들을 하나하나 어기는 데 열심이었다."

예수님 이후에도 이런 일들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말씀을 가장 널리 전한 두 제자인 요한과 베드로는, 사소한 다툼과 어리석은 행동으로 예수님께 가장 자주 꾸중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성경에서 가장 많은 책을 쓴 사도 바울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려 쫓아다니던 중에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에게 사랑과 하나됨과 교제라는 숭고한 이상을 맡기신 것은 정말 대담한 결정이었습니다. 냉소적인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저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표한다면 난 즉시 반대표를 던지겠다"라고 한숨 짓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니체가 이렇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죠. "제자들이 좀 더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여야 내가 그들의 구주를 믿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보잘것 없는 잡다한 무리가 아닙니까? 천한 것들, 약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멈추시고 소외된 여인을 돌보셨습니다. 멀리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9장 22절입니다. "딸아." 딸이라고요? 너무나도 친밀한 말씀입니다. 너무나 개인적이고, 가족같이 느껴지고, 너무나 부드럽습니다. 따뜻함과 애정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딸아, 딸이라고 부르신 것은 여인을 품어주시는 표현입니다. "안심하라." 딸아, 안심하라. 얼마나 자애로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공평하신 말씀입니까.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인은 그 즉시 나았습니다. 여인은 이미 치유를 받았습니다. 구원은 거기에 더해진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치유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불러내어 말씀하시기를,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네가 받은 치유는 사실 네 믿음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다"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와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는데, 믿음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어린 소녀에게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백부장의 치유받은 하인은 어떨까요? 역시 믿음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지만, 특별한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하지만 육체적 치유에 더해서, 예수님은 "네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육체적으로 낫게 되었다는 뜻의 '이아오마이(iomai)'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신약에서 구원받았다는 뜻의 '소조(sodzo)'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물론 여인이 질병의 고통에서 치유받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에는 구원이라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단순한 육체의 치유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겠습니다. 여러분께 더 자세히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게 참으로 감동적인 진리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연결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입니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야말로 큰 믿음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소조(sodzo)'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이 경우에도 '소조(sodzo)'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 치유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믿는 그런 믿음을 가졌다면, 영혼을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44절을 보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감동적인 내용인데, 이 구절이 앞선 이야기와 매우 중요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누가복음 7장 44절에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여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사랑과 경외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구원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잘 보십시오, 앞서 살펴봤던 치유 사례들에서 사용된 것과 정확히 같은 표현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여기에는 치유가 없습니다. 오직 죄 사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헬라어 ‘소조(sodzo)’라는 단어가 포함된 이 구절은 구원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소조(sodzo)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그 의미를 잘 살펴봐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17장 14절입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잘 보십시오. 열 명이 왔고, 열 명이 보내졌고, 열 명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카다리조(katharizo), 카다리조입니다. 즉, 씻김을 받아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한 사람만 돌아왔습니다. 그 한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그렇습니다. 같은 표현입니다. 소조(sodzo)입니다. ‘카다리조(katharizo)’와 ‘소조(sodzo)’는 서로 다릅니다. 보십시오. 열 명이 깨끗함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것은 단 한 명뿐입니다. 한 명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sodzo라는 단어의 사용을 영어 성경은 구별하지 않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이 단어에 구속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치유를 위해서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병을 앓다가 나은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또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병으로 죽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치유에 있어서는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주시지만, 구원에 있어서는 항상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주십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누구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마태복음 9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고, 누구든 만날 수 있었으며, 모든 이를 공평하게 대하셨습니다. 회당장이나 소외된 여인이나 똑같이 소중히 대하셨습니다. 우리가 돈 많은 사람들만 특별히 대하고, 때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무시하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잊을 수 없는 밤(A Night to Remember)>이라는 책에서 월터 로드(Walter Lord)는 1912년, 아마도 4월이었을 겁니다만,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배가 침몰했을 때, 뉴욕의 신문 '아메리칸(The American)'은 "백만장자 존 제이콥 애스터, 익사하다"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익사했지만, 세상이란 게 그렇습니다. 부자, 유명인만이 뉴스거리가 되죠.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배울 수도 있지만,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고, 직접 만날 수 있고, 모든 이를 차별 없이 대하셨다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정말 큰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앞의 네 가지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부분은 좀 어렵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아픔에 공감하며 손을 잡아줄 순 있지만, 병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중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바람에 소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잠깐만요, 누군가가 죽은 상황인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걸까요? 우리가 아는 장례식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누군가 죽어서 장례식장에 가면 무척 조용하지 않습니까?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속삭이듯이 이야기하고, 복도를 조용히 걸어다니고, 고요한 빈소에서 작은 오르간 소리만 잔잔히 흐르고 있죠. 누군가 물건이라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모두가 흠칫 놀랄 정도로 조용합니다. 이처럼 우리 문화에서 장례식장은 조용한 곳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문화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시끄럽고 소란스럽습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냈습니다. 당시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인의 장례식에는 세 가지 중요한 절차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소녀가 위독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장례 준비가 시작된 상태였습니다. 전문 애곡꾼들이 와 있었는데, 말 그대로 전문적으로 큰 소리로 곡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통곡하는 것이 이들의 역할입니다. 그럼 세 가지 중요한 절차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옷을 찢는 의식입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탈무드에는 이에 대한 39가지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반드시 서 있는 상태에서 심장 부위나 그 근처를 찢어야 했습니다. 특히 부모는 반드시 심장 바로 위를 찢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 근처면 됐습니다. 찢은 부위는 주먹이 들어갈 만큼 커야 했고, 7일 동안 그대로 두어야 했습니다. 그 후 30일 동안은 성긴 바느질로만 꿰맬 수 있었는데, 아직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 속옷을 찢은 후에 앞뒤를 거꾸로 입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자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옷을 찢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리자면, 이 장례식은 매우 성대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 아이의 아버지인 회당장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서 옷을 찢고 있었습니다. 두번째로는 곡소리가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애곡꾼 여인들이 들어와 통곡을 시작했을 겁니다.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장례식에 올 때는 그 가문의 집안 내력을 모두 외우고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슬픔을 되살렸을 겁니다. "아, 앨리스를 기억하십니까. 아, 찰리를 기억하십니까." 하면서 끊임없이 이어갔을 겁니다.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면서 통곡하고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지르면서 온통 소란을 피웠을 겁니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 대해 기억하게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세번째는, 23절에 나와 있듯이 피리 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피리를 가지고 와서 연주했을 겁니다. 탈무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매장하고 모든 나라의 관습에 따라 애도하며 슬픔을 표현해야 한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조차도 최소한 피리 부는 사람 둘과 곡하는 여인 하나는 꼭 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곡하는 여인 한 명, 그리고 피리 부는 사람 둘은 반드시 고용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탈무드에 따르면, 부자들은 재력에 걸맞게 더 많은 이들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꽤 부유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집에서 장례식이 시작되었습니다. 피리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옷을 찢고 헤집고 비명을 지르고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곳곳에는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로마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세네카(Seneca)의 기록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죽음 당시 피리 소리와 비명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서 이미 죽은 황제조차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장례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셨던 겁니다. 24절입니다.

“이르시되 물러가라.”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이르시기를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예를 갖추고 있는 겁니다. 탈무드에 이렇게 하라고 되어 있고, 저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러가라." 왜 그래야 합니까?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24절 하반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비웃더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무슨 말인가, 소녀가 죽지 않았다니? 모르는 것 아닌가?"

물론 예수님은 소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해주었죠. 예수님은 소녀를 다시 살리실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소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다.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자고 있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무슨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내가 다시 살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웃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면전에 대고 비웃었습니다. "죽은 아이를 깨우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이것을 보면 전문 애곡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울음이 이렇게 빨리 웃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이 아이를 위해 울다가도 순식간에 예수님을 비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면전에 대고 조롱했습니다. 실제로 여기서 쓰인 동사는 크게 웃었다는 뜻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보며 우월감에 차서 비웃는 것처럼 정말 크게 웃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동사가 이 이야기에서만 세 번 사용되었다는 겁니다. 바보를 조롱할 때 하는 것처럼 크게 비웃었습니다. 오직 바보만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버나움의 군중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다른 기적들도 보았지만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죠.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어쨌든 예수님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크게 비웃었습니다. 25절입니다.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달리다굼(Talitha koum)"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다른 복음서에는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적들이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예수님께 가해지는 압력도 더욱 커져갔습니다.

누가복음 8장 55절에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아이가 정말로 죽었다가 "영이 다시 돌아와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소녀를 굳이 만지시거나 손을 잡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말씀 한 마디면 충분했지만, 하나님이 얼마나 온유하신지를 보여주신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온유하신 방식입니다.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시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를 거룩한 입맞춤으로 맞이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겁니다.

26절입니다.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병도 고치시고, 장애도 치료하시고,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렇게 마태가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정점에 이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시인은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면서 울 필요가 없다. 떠난 자녀들을 죽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죽음은 잠이 되었고, 모든 무덤은 안식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D. L. 무디가 청년이었을 때 갑자기 장례 설교를 부탁받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장례 설교를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례식에 가실 때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심으로써 장례식 자체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례 설교를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곧바로 생명을 얻어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장례식 하면 아서 브리스베인(Arthur Brisbane)의 표현이 떠오릅니다. 장례식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애벌레들이 슬픔에 잠겨 행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치의 시신을 마지막 안식처로 옮기고 있습니다. 불쌍한 애벌레들이 슬피 울고 있는데, 그들 위로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다니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런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2주 전에 이번 설교 전반부를 들으신 한 분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존 목사님, 저희 가족에게 비극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오후에 저희 오빠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빠는 4년 동안 자동차 압류 전문가로 일해왔는데, 처음에는 밸리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로스앤젤레스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자신이 하는 일의 특성상 로스앤젤레스가 위험하다고 느껴서 다시 밸리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지난주부터 밸리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훨씬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눈치였습니다."

"목요일 오후에 오빠와 동료는 차량 할부금을 내지 못한 차를 압류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이 14년째 살고 있는 버뱅크로 갔습니다. 동료가 차량 소유주의 집 문 앞으로 가서 지금 당장 할부금을 내지 않으면 차량을 압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차를 가져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량을 가져가려는 순간, 갑자기 그 남자가 총을 들고 나왔습니다. 오빠는 즉시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차를 가져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결국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이 오빠의 가슴을 관통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이유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그래서 오늘 죽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설교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동생 둘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비록 오늘 그레이스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말입니다. 저희 오빠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든 친구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늘 도와주었습니다. 심지어 출근길에 차가 고장난 사람을 보면 지각을 감수하고서라도 멈춰 서서 도와주곤 했습니다. 가끔은 모든 게 괜찮은 것 같고, 오빠가 주님 곁에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평안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길바닥에 쓰러진 오빠의 모습이 떠오르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때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시고, 오빠가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정말 위대한 소망 아닙니까? 주님께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붙들어줄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에도 말씀으로 저희를 돌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의 필요를 채워 주옵소서.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오늘이 마음을 열어 믿음을 갖게 되는 날이 되게 하여 주시고, 이미 믿고 있는 분들은 더욱 깊이 헌신하게 하여 주시며, 교회와 하나 되라고 부르시는 분들은 오늘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 하여 주옵소서.

고개를 숙이고 계신 이 마지막 순간에,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 앉아 계신 그 자리에서 마음을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고, 죄를 용서받고, 주님의 자비와 구원을 경험하며, 죽음을 이기는 승리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아버지, 주님께로 나아와야 할 자들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이 위대한 소망으로 모든 영혼을 만져 주옵소서. 오늘 저녁에 다시 모여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행하신 일들을 나눌 때에 말씀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오늘 하루와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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