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기회이자 특권입니다. 오늘도 마태복음 9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서를 연구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참으로 기대됩니다. 마태복음을 연구하면서 먼저는 제 마음과 영혼을 채울 수 있고, 또 여러분께 그 내용을 나눔으로써 이중의 특권을 누릴 수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무도 오지 않아서 설교할 대상이 한 명도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담긴 풍성함 때문에 연구하는 것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마태복음 9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27절부터 33절 상반절까지를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부터 33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은 "시력과 청력이 회복되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담은 이 땅의 왕이었습니다. 다스릴 권리가 있었고, 동물의 이름을 붙였고, 창조 질서를 지배했습니다. 아담이 왕으로 다스린 나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아담의 나라는 놀랍고 경이로웠습니다. 빛의 나라, 영광의 나라, 경이롭고 아름다운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왕권을 잃어버렸습니다. 통치권을 잃어버렸습니다. 빛의 나라가 어둠의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통치권을 사탄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렇게 어둠의 나라가 됨으로써 눈물, 고통, 슬픔, 고생, 비탄, 병, 상처, 고난, 부패, 다툼, 싸움, 전쟁, 혼란, 살인, 거짓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빼앗긴 나라가 회복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언젠가는 인간이 다시 이 땅의 왕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통치권을 사탄에게서 되찾아올 것입니다. 어둠의 나라가 끝나고 빛과 영광의 나라가 돌아올 겁니다. 영원히 지속될 영광의 나라로 말이죠.
실제로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라 불리는 분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구약은 하나님이 구주를 보내실 것이라는, 왕을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그 왕이 나라를 회복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다시 세우시며, 질병과 죽음과 고통과 병과 슬픔과 전쟁과 다툼을 없애실 겁니다.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그분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아들, 왕 중의 왕, 사탄을 정복하시는 분, 죽음을 물리치시는 분, 죄를 멸하시는 분, 치료하시는 분이 오신다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약은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는 그분이 오실 것이다. 반드시 오셔서 보좌를 세우실 것이다. 그 때에 세상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회복될 것이다."
마태복음의 목적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 구약이 말했던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 그리스도가 약속된 왕이시라는 것, 예수님이야말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저주를 거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원수를 멸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분이십니다.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이런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 8장과 9장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기록했습니다. 무작위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구약의 예언과 연결해서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마태는 그중 아홉 가지를 선택해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 8장과 9장에 기록했습니다. 세 가지씩 세 부분입니다. 이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다. 예수님이 예언을 성취하셨다. 구약에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모든 일을 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예수님이 그 예고편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질병에 대한 권세, 죽음에 대한 권세, 자연에 대한 권세, 이 땅 위의 모든 것에 대한 예수님의 권세를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에서 이 모든 권세의 예고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홉 가지 기적 중에서 처음 세 가지는 질병과 관련되어 있고, 그 다음 세 가지는 혼란이나 무질서에 관련되어 있으며, 마지막 세 가지는 주로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약간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대략적으로 나누자면 그렇습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8장을 시작할 때 첫 세 가지 기적이 질병의 치유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 기억하십니까? 이제 그 맥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33장 22절부터 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굳이 찾아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예언 몇 개를 빠르게 읽겠습니다. 이사야는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서는 질병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57장 19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이처럼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질병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질병이 없었듯이, 회복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면, 그 능력을 보여주실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태가 예수님께 질병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둘째로, 9장에 나오는 두번째 세 가지 기적은 무질서를 다스리시는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질서란 물리적 세계의 무질서, 귀신과 관련된 영적 세계의 무질서, 그리고 죄와 관련된 도덕적 세계의 무질서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중에서도 특히 35장을 읽어보면 물리적 세계와 관련해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메시아의 나라가 임하면 이 땅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사막이 무엇처럼 피어납니까? 백합화 같이, 장미같이 피어날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입니다. 지형이 바뀌고 지리적 환경이 변화될 것입니다. 메시아가 자연을 바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이러한 일을 하실 것이라면 먼저 그런 능력을 나타내 보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가 마태복음 8장의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 물리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 겁니다.
두번째 무질서의 영역에서 메시아는 사탄과 그 수하에 있는 귀신들을 물리치실 겁니다. 다니엘 9장, 10장, 11장은 이 갈등, 즉 거룩한 천사들과 타락한 귀신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결국 하나님과 천사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그러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와 같은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가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수의 귀신들, 즉 가다라 지방의 광인에게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기적을 선택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러한 능력을 보여주실 것임을 증거한 겁니다.
세번째 무질서의 영역은 도덕적 무질서, 즉 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태복음 9장 1절에서 8절까지에서 죄를 쫓아내시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겁니다. 왜일까요? 이사야 33장 24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나라에 사는 백성이 죄사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죄악을 용서해야 하며, 귀신들을 정복해야 합니다. 또한 물리적인 세계를 다루고 질병을 치유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시려면, 그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적들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가지 기적, 즉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기적들은 주로 예수님의 죽음을 이기시는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다른 부수적인 기적도 있지만, 우리가 집중해서 보고 있는 주요 기적은 18절부터 26절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지난주에 다뤘죠.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사야 65장이 말하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메시아에게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다니엘 12장 2절은 메시아에게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그 능력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 사건이 그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신체 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 즉 눈이 멀거나 귀가 멀거나 말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다스리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권능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구약의 두 예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첫번째는 이사야 29장 18절입니다. 한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사야 29장 18절입니다. 오늘 본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날과 메시아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이사야 35장 5절부터 6절입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고,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자가 걸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메시아가 죽은 감각 기관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력과 청력을 회복시키는 기적, 바로 이 기적이 마태복음 9장 27절부터 3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기적들을 분명하게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설명을 하나 덧붙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을 더 깊이 연구할수록, 예수님께서 초림 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날 일들을 문자 그대로 눈이 부시도록 미리 보여주셨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셔서 변형되셨을 때에, 육신의 장막을 걷어내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일을 축소판으로, 즉 작은 규모로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훗날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아 각국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도,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 궁극적으로 나타날 일들의 표본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는 이 땅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원한 통치를 확립하실 때 나타내실 궁극적 권능을 엿볼 수 있는 일련의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태는 이런 기적들을 아무렇게나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넣은 것도 아닙니다. 이 기적들은 예언적 성취의 전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예수님이 바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확증해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시력과 청력이 회복되는 기적을 살펴보겠습니다.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잠깐만요, 어디에서 떠나셨다는 말입니까? 바로 야이로의 집에서, 야이로의 동네에서 떠나셨다는 말입니다. 같은 날 저녁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혈루병 앓는 여인을 치료하시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대화도 나누신 정말 바쁜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매우 바쁜 하루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을 떠나십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점은, 예수님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는 겁니다. 사실 두 무리의 군중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가버나움의 좁은 골목길들을 뚫고 야이로의 집까지 밀고 들어온, 혈루증 여인을 고치실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군중들로서 예수님의 기적에 매료된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군중이 합류했습니다. 바로 야이로의 딸의 장례식에 온 조문객들과 돈을 받고 고용된 악사들, 피리 연주자들, 곡하던 여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딸을 죽음에서 살리셨을 때 장례식이 중단되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이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자신이 머물고 계시던 집을 향해 이동하십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지금부터 간단한 개요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이 놀랍고 경이로운 기적들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두 맹인을 치유하신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27절에 나오는 이들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서 떠나실 때, "두 맹인이 그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집트, 아라비아 국가, 이스라엘에서는 시력을 잃는 일이 흔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는 맹인을 치유하신 기록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실명이 얼마나 흔했는지를 보여주죠. 가난과 그에 따른 비위생적인 환경, 강렬한 햇빛, 뜨거운 열기, 모래, 사고, 전쟁, 감염성 병원균, 이런 것들이 실명의 원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선천적 실명은 주로 임질 때문이었습니다. 때로는 산모도 감염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기가 자궁에서 나올 때 산모의 자궁에 있던 임질균이 아기 눈 결막에 달라붙고, 그 세균들이 번식하기 시작하면 3일 만에 영구적으로 눈이 멀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신생아의 눈에 소독 점안액을 넣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죠.
요한복음 9장 2절에서 제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도 그런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을 겁니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질문했을 수도 있지만, 의학적 혹은 육체적인 측면도 있었을 겁니다. "이 사람이 부모의 죄 때문에 눈이 먼 겁니까?"라고 물었는데 죄악된 성병으로 인해 아이가 실명하는 일이 매우 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은 부모의 성병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트라코마 결막염의 원인이 되는 감염성 세균과 바이러스도 있었습니다. 항생제의 일종인 설파제 덕분에 요즘에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모든 것이 실명을 일으켰습니다. 심각한 문제였죠. 눈먼 사람들은 서로 함께 몰려다녔습니다. 두세 명의 눈먼 사람들이 서로 붙잡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두 맹인이 처한 상황도 이랬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들의 외침을 봅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군중들을 밀어내면서 길을 만들었습니다. 눈이 먼 상태에서도 무리와 함께 있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야이로의 동네를 떠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밀고 밀리며 나아갔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면서 "다윗의 아들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담대했습니다. 수줍어하면서 뒤로 물러서거나 구석에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밀어내고 나아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분명히 야이로의 집에 있던 군중의 일부로서 부활 사건을 들었을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마음이 상한 자들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자들입니다. 상처받은 자, 적합하지 않은 자, 소외된 자, 낙심한 자, 슬퍼하는 자, 외로운 자, 죄를 지은 자,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자만하는 자들,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들, 별다른 의문이 없는 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 한 남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알고 싶으시다면 그리스도에 대해 제가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남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절실한 필요를 느끼는 자리로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들만이 예수님께 나아오기 때문입니다.
자,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리지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참 흥미롭습니다. 이 단어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소리치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날카롭게 외친다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정신이상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소리치고 비명지르는 그런 장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간질 환자에게도 사용됩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귀신들린 가다라의 광인이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치고 외칠 때 사용됩니다. 마가복음 15장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큰 소리를 지르고 숨지시니라"라고 할 때 사용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2절에서는 해산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여인을 묘사할 때도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명료한 말이나 지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멉니다. 앞서 들어드린 예처럼 고통 중에 내지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울부짖음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맹인들이 날카롭게 외치고 비명을 지르고 울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다윗의 아들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처럼 실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계산적이거나 냉소적이거나 학문적인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고뇌와 절망, 그리고 깊은 필요 가운데서 울부짖으며 소리치고, 애원하고,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절망이 거듭남의 토대입니다.
자, 맹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왜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요? 혹시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족보를 알고 있었을까요?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다윗의 후손인 마리아의 족보를 알고 있었을까요? 글쎄요,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요?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호칭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부르는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호칭입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마태는 바로 이 표현이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인정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마태복음 1장 1절을 이렇게 시작한 겁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무슨 말입니까? 메시아적 선언입니다. 약속된 분, 그리고 그 호칭인 '다윗의 자손' 안에는 선지자들이 말한 통치권과 왕권과 왕 되심에 대한 모든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구약성경은 메시아가 무엇보다도 먼저 여자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한 사람,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처녀에게서 나셨지만 여전히 인간인 여자의 후손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창세기 22장에서 범위를 좁혀서 단지 여자의 후손만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으로 좁혀 나가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모든 후손들 중에서도 아무나가 아니라 유다의 후손으로, 그리고 유다의 혈통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창세기 49장 10절에 나오죠, 다시 한 번 다윗의 후손으로 범위를 좁히셨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인간을 통해, 아브라함을 통해, 유다를 통해, 그리고 마침내 다윗을 통해 오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하 7장 12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런데 이 말씀은 솔로몬에게서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사무엘하 7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다윗의 자손이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2절에는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69절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합니다. 2장 4절은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가니…" 사도행전 2장은 그리스도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된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도 서신서에서 그렇게 했고, 요한도 요한계시록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렸습니다.
잠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확실히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무리가 환호하며 찬양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발 앞에 던지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9절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말하는 겁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셨고 가장 높으신 분을 대표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군중들이, 물론 다소 변덕스러웠지만, 예수님을 메시아적 호칭으로 불렀던 겁니다. 그 메시아적 호칭 중에서 ‘다윗의 자손’보다 더 직접적인 호칭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22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변덕스러운 군중들조차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가 메시아를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결코 믿지 않았던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또는 메시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다시 마태복음 9장으로 돌아갑니다, 바리새인과 변덕스러운 군중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27절에서 두 맹인이 와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을 때에, 이들은 예수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정당한 상속자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마도 이사야 35장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메시아가 오실 때 맹인을 고치실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은 매우 성공적인 사역을 했습니다. 드디어 메시아가 오신다며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그렇게 높아진 기대감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간절히 기다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서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일까지 행하셨을 때, 이 두 사람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야말로 자신들이 기대했던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의 호칭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글쎄요, 변덕스러운 군중도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이렇게 묻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그 변덕스러운 군중보다 더 진심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맹인들이 외친 또 다른 말을 살펴보면 이들의 진심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지식과 함께 올바른 태도도 갖고 있었습니다. 절실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들이 육체적 필요 이상으로, 아마도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 필요를 느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바로는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가져다줄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비를 구한 겁니다. 이런 말은 바리새인들에게서는 절대 들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비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죠. 아시다시피 자비란 받을 자격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면제해 주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기억하실 겁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런데 구석에 있던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바리새인은 결코 자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비를 구했습니다. 올바른 분에게 왔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자비로우셨습니다.
제 책 중에는 <하나님 나라의 삶(Kingdom Living)>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제가 쓴 책 중에서 유일하게 반복해서 읽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팔복이 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셨는지에 대해 썼는데, 제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 중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자비로운 분이셨다. 병든 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치유해 주셨다. 다리 저는 자에게 손을 내밀어 걷게 해주셨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고, 말 못하는 사람의 입을 열어주셨다. 창녀들과 세리들, 방탕하고 술 취한 자들을 찾아내 사랑의 품 안으로 끌어안으시고 구원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 외로운 자들을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다.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고 사랑해 주셨다. 예수님만큼 자비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은 예수님 앞으로 장례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들을 잃고 우는 어머니를 보셨다. 이미 과부가 된 상태에서 이제 자신을 돌봐줄 자식마저 잃은 것이다. 이제 누가 여인을 돌봐줄까?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관에 손을 얹고 그 아이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 예수님이 여인을 돌보셨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에베소서 2장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다니엘 9장은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애가는, 자비에 관한 구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치유를 위한 긍휼, 구원을 위한 긍휼입니다. 이 두 절망적인 맹인에게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올바른 지식,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고 외치면서, 자신들이 받을 자격도 없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제게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전혀요. 이들로 계속해서 마음을 쏟아내고 또 쏟아내도록 하셨습니다. 진정한 마음을 쏟아내게 하십니다. 변덕스럽고 지나가는 것들, 피상적인 것들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만약 이들의 믿음이 진짜라면 계속 외칠 겁니다. 예수님이 치유하실 때까지 돌아서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믿음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극한까지 달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향해 어떤 마음으로 외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셋째로 28절의 대면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라고 되어 있는데, 아무 집이 아니라 바로 그 집입니다. 어떤 집입니까? 어떤 집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집'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머무시던 집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집에 머무셨을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여전히 갈릴리 바다 북쪽 연안의 가버나움 성에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머무셨는데 아마도 베드로의 집이었을 겁니다. 또 유대에도 거처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집이었죠. 이 집이 예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침내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가르치시고 설교하시고 치유하시고 걸으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정말 바쁜 하루였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십시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저는 우리 주님께 사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끊임없는 압박, 그러니까 예수님의 발걸음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쉴 새 없는 공세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자, 맹인들도 예수님을 따라 곧바로 들어갔습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 기간 내내 예수님께 매달리는 바람에, 밤늦게 기도하러 은밀한 곳으로 가시지 않는 한 조금의 쉼도 전혀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마침내 맹인들이 집안까지 들어오자 예수님은 맹인들을 피하실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본 모든 치유의 과정에는 끈기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참된 믿음을 이끌어내신 방법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모든 치유들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영적 회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믿음을 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치유받게 하려고 말 그대로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끈기입니다. "어, 저기 사람이 너무 많네. 다른 날 다시 오자"라고 하는 대신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회당장은 "제 딸이 죽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으로 향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멈추셨습니다. 온 무리가 거기 있었습니다. 혈루병을 앓는 여인을 치유하시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회당장이 얼마나 걱정하고 초조해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딸이 죽었는데, 시간은 흘러가고, 예수님은 지체하셨으니까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술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여인을 불러내시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게 하셨고, 여기서는 이 맹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집까지 쭉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28절입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거 참 이상한 질문이네요. 예수님이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냐고요? 맹인들이 그 많은 군중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요. 만일 믿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겠어요? 예수님이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글쎄요, 저는 이 질문의 의도가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라고 부른 믿음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물어보시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물으신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을 확증하는 그들 자신의 고백을 듣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따라서 저는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는 확실한 고백을 이끌어 내시고자 그렇게 물으셨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맹인들은 “글쎄요, 어쩌면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맹인들의 믿음이 진실한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참된 회심의 증거로 여길 수 있는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맹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뭐라고 불렀다구요? “주여.”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누구로 시인해야 합니까?, “주로 시인하면”입니다. 두 맹인의 믿음을 입증하는 확실한 표현이 바로 이 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두 맹인이 정치적 해방자를 찾고 있던 자들과 다른지 구별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정말로 하시는 말씀은 이겁니다. “너희는 내가 단지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자라고 믿느냐? 내가 그저 카리스마가 있거나 유능한 인간이 아님을 믿느냐? 내가 너희의 눈먼 것을 고쳐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낼 것이라고 믿느냐? 내가 하나님의 사자로서 여기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과 내가 그 나라의 주권자라고 확실히 믿느냐?”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치유를 위해서 믿음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치유하신 순간들로 가득하지만, 치유받은 사람들에게 전혀 믿음이 없었던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회심을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들의 믿음이 회심의 수준에까지 이르도록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고, “다윗의 자손이여”, 즉 ‘약속된 메시아여’라고 외치고,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주여”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 그 믿음은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그 수준의 믿음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맹인이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비록 주님이라는 말이 단순히 선생을 일컫는 존경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에 그 말이 담을 수 있는 모든 의미를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경외심과 존경심으로 가득했다고 믿습니다. 사랑과 찬양과 예배와 순종과 헌신으로 가득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고백이었습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네번째입니다. 맹인들의 회심입니다. 우리는 맹인들의 상태를 봤습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외침, “너희가 믿느냐?”라고 질문하시고 “주여, 그러하나이다”라고 대답한 대면, 그리고 이제 회심입니다. 저는 여기서 회심이란 단어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회심이란 말은 치유보다 훨씬 더 큰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29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저는 이들이 육신의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그 순간 믿음의 꽃이 활짝 피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사람들을 만져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맹인들의 눈을 살며시 만져주셨습니다. 이게 다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런 점이 참 좋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는 팡파레가 울려퍼지는 경우가 전혀 없었습니다. "뒤로 물러서라, 이제부터 나의 능력을 보여주겠다" 이렇게 하지도 않으셨고,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자, 잘 보아라!" 이렇게 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고작 두 명의 맹인을 고치시는 데 굳이 큰 에너지를 쏟으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죽어서 묻힌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면, 맹인 두 명쯤은 얼마든지 간단히 고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눈을 만져주시기만 했습니다. 30절입니다.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여기서 ‘밝아진지라’는 부정과거 시제인데 그 즉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을 겁니다. 갑자기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말이죠. 29절 하반절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너희 믿음대로"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맹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컸을까요? 치유받을 만큼 충분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원받을 만큼 충분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치유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믿음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의 핵심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 믿음은 구원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크다. 그러니 믿음대로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믿음은 구원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믿음 그 자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1902년 트렌치 대주교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정말 놀라운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다. 주목해 보라. 믿음은 우리의 빈 마음과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연결하는 고리이다. 여기에 믿음의 모든 가치가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샘에 내려지는 양동이와 같다. 믿음이 없다면 사람은 구원의 우물에서 생명의 물을 길어올릴 수 없다. 우물이 너무 깊어서 사람에게는 스스로 물을 길어올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지갑과 같아서 그 자체로는 주인을 부자로 만들 수 없지만, 그 안에 담긴 부로 인해 실제로 부자가 되게 한다."
정말 훌륭한 표현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우물에 담그는 양동이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부는 아니지만 부를 담고 있는 지갑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지갑은 내가 줄 모든 것을 받기에 충분히 크다. 너의 양동이는 구원의 우물물을 모두 담기에 충분히 크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네, 주님께서는 시력을 주실 능력도, 구원하실 능력도 있으십니다. 지금까지 상황, 부르짖음, 대면, 회심을 보았습니다. 이제 주님이 주시는 명령을 보겠습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아, 이건 심각합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맹인인 척하려고 눈을 감고 다니면서 이곳저곳에 부딪혀야 한다는 말일까요? 원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말이죠. 지금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걸까요? 글쎄요, 주님은 매우 진지하십니다. "엄히 경고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매우 강한 의미입니다. 심지어 말이 내뿜는 거센 콧김에도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정말 강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마가복음 14장 5절에서는 누군가를 꾸짖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러실까요? 어떤 사람은 "주님이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아닙니다. 주님은 공개적으로 기적을 행하고 계셨으니까요.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아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하신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친구들과 친척들이 곧바로 알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집에 버젓이 걸어 들어가면 이제 볼 수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바로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분명히 더 큰 이유, 뭔가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숨기려고 하셨던 건 아닙니다. 그랬다면 사람들 앞에서 행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길 바라셨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다 알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맹인들이 외쳤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메시아, 다윗의 자손,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고 다니면 정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용납하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유대 기득권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로마인들도 용납하지 못했을 겁니다. 가이사, 그러니까 황제만을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알고 계시겠지만 바로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그 고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건 "아직 그런 일이 시작될 때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을 그냥 기적만 행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위험하고 불필요한 대중적 관심과 소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시는 걸 보고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사방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만들려는 문제도 다루셔야 했고, 또 보복을 불러오는 소문의 문제도 다루셔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니 그런 일이 시작되지 않게 하라"고 하신 겁니다. 10장에 가서야 예수님은 정확한 메시지를 들은 제자들을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맹인처럼 새로운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가지고 성급하게 나서는 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말하자면 "확실히 하자. 이제 곧 공식적인 사신을 보낼 것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를 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소문으로 듣고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는 직접 와서 보기를 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일 맹인들이 자신들을 아는 사람들의 범위를 넘어서서 이 일을 퍼뜨리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정말로 장님이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믿을 수가 없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사람들이 그런 결론을 내리기 전에 직접 와서 확인해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자, 지금까지 예수님이 알리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은 변덕스럽고 성급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도 않고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단지 구경거리만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잘못된 장소와 잘못된 시간에 예수님을 위한 혁명적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매우 엄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맹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정확히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제 말은, 만일 여러분이 맹인이었는데 이제 볼 수 있게 되었다면 너무 신이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당연하겠죠. 대부분은 주님께서 우리가 말하기를 원하시는 때에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말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때에는 말해버립니다. 물론 감사한 마음에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고집입니다. 사람들의 고집 말입니다. 명령을 받았지만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끝이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31절에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다음주에는 31절을 다른 맥락에서 다루겠지만, 32절로 계속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눈이 먼 상태였습니다.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대면이 있었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회심이 있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명령이 있었습니다, "알리지 말라." 거역이 있었습니다. 온 땅에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마지막으로, 헌신이 있었습니다. 헌신 말입니다. 만일 이들이 한 일이 즉시 달려나가서 불순종하는 것뿐이었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인지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한 다른 일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32절입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이제 볼 수 있게 되어 집에서 나갔습니다,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여기서 쓰인 헬라어는 코우포스(koufos)입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는 귀머거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귀머거리면서 벙어리였던 것 같습니다.
이 말 못하는 사람은 맹인들의 친구였을 겁니다. 맹인들은 눈이 멀었고, 말 못하는 사람은 귀머거리이면서 벙어리였습니다. 말하자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면서 온전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맹인들은 즉시 나가서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이것이 맹인들의 헌신입니다. 함께 구걸하던 동료 중 하나입니다. 당시 귀머거리는 매우 흔했습니다. 중이와 내이의 감염 또는 선천적 결함이 원인이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날리는 모래가 귀지에 쌓여서 귀머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적절한 관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실제로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그 중 어느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는지 3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귀신에 들렸던 겁니다. 귀신으로 인해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귀신은 사람의 육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하게 하는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귀신의 왕국에 대해서도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33절 상반절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이 능력을 행하실 때 팡파레가 울려퍼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셨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손쉬운 일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시니 그 사람이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는지 몰랐는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냥 "나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도, 구원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두 맹인이 그리스도께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오는 일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습니다. 맹인들은 연약했고 불순종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함께 구걸하던 동료를 그리스도께 데려올 만큼 헌신했습니다.
자, 이제 곧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짧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 전체에서 구원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눈멂은 영적 눈멂의 비유입니다. 죄 때문에 길을 잃고 눈이 먼 상태입니다. 이 이야기를 구원의 이야기로써 따라가 보겠습니다. 자, 잘 들으십시오. 우선, 맹인들에게는 필요가 있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구원이 시작됩니다.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 자신이 볼 수 없다는 것을 모르면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맹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진리를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필요를 느끼면 지식이 따라옵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자이시며 메시아이시고 다윗의 아들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의 깨달음은 옳았습니다. 필요에서 지식이 나왔습니다. 알고자 했고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구원받는 과정도 이렇습니다. 먼저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그 절실한 필요에서 올바른 답을 찾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 다음에는 죄의식이 따라옵니다. 맹인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무언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을 자격은 없지만 필요한 것이 있기에 간청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구원이 바로 이런 겁니다.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부르짖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넷째로, 믿음이 있었습니다. 맹인들은 "그렇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끈질기게 따르며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저희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끈질기게 구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따라서 구원은 필요로 시작해서, 해결책에 대한 지식, 자신이 그 해결책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죄의식, 끝까지 손을 뻗어 추구하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그 다음에 고백이 나옵니다. "믿느냐?" "주여 그러하오이다."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복종, 헌신,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저희가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회심이 일어납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런데 회심 후에 종종 따라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연약함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순종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시 태어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들은 분별할 줄 모릅니다.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합니다. 연약합니다. 불순종에 빠지기 쉽습니다. 열심히 하려다가도 순종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맹인들이 불순종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께 데려오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새신자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신자들은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저 가장 가까이 있는 들리지 않고 말 못하는 사람을 붙잡고 끌고 와서 "여기 데려왔습니다, 주님."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께서 맹인들의 믿음 때문에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거든요. 저는 주님께서 그 두 맹인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님께 쓰임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시려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에서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증거를 거슬러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직 맹인들의 삶을 통해 살펴본 회심에 이르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 죄의 어둠과 눈멂 가운데 있는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셔서 어둠을 물리치셨기 때문입니다.
조지 랜싱 테일러(George Lansing Taylor)의 시를 읽겠습니다.
오, 구주여, 우리는 눈먼 벙어리입니다.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하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진리의 밝은 빛으로 우리의 눈을 만져주소서.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의 슬픈 어둠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로 인해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의 빛을 구하게 하소서,
우리가 기쁨의 이 선고를 받기까지,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면 우리는 즉시 말 못하는 사람을 주님께 데려올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라고 모든 이가 보고 노래할 때까지."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 이 놀라운 이야기를 살펴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젠가 주님의 영원한 임재 앞에 나아갈 때, 주님께서 구원해 주신 이 두 사람을 만날 특권을 누리게 될 것에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 자신이 부족함을 알고, 주님이 해답이심을 알고, 믿음으로 계속 매달리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모든 죄인들을 주님께서 동일하게 기다리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이들을 변화시키려 기다리고 계시고, 이들의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모든 일과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통해 행하신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기도실로 이끌어 주옵소서. 오늘 주신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늘 저녁 우리를 다시 모아주시고, 로마서의 놀라운 서론을 통해 신약의 수많은 책을 기록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그토록 능력 있게 사용하신 인물, 바울을 살펴보게 하옵소서. 오늘 저녁 예배를 위해서도 우리 마음을 준비시켜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함으로써 멋진 하루를 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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