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장을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누가복음 20장 9절부터 16절의 비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고, 강력하며, 놀랍고, 때로는 충격적인 비유를 간결하면서도 익숙한 일상적인 언어로 들려주셨습니다. 폭넓은 이해와 심오한 깊이, 군중의 상태를 꿰뚫는 분석으로 놀라울 정도로 설득력 있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이러한 주님의 비유가 40개 정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탁월한 비유를 모두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입니다. 정말이지 아주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 겁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들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비유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아주 폭넓고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목을 한 번 붙여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 살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9절부터 시작되는 이 예언적 비유의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이 비유의 배경을 간단히 복습해 보겠습니다. 때는 수요일,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주의 수요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전 안에 계십니다. 거기서 이른 아침부터 내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지배하셨습니다. 그 전날 성전에서 장사하던 이들을 내쫓으시고 아버지의 집을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이죠. 이제 성전은 우리 주님의 교실이 되었습니다. 20장 1절을 보면 성전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백성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대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군중들은 매우 흥분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정점에 이르렀던 군중의 흥분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되리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흥분한 상태로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몹시 미워하고 경멸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분노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돈줄을 막아버린 데다가 허가도 받지 않고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는지를 따졌습니다. 예수님이 죽기를 바랐던 지도자들은 그 일을 계기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렇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에 금요일에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죽게 했죠.
예수님 생애 마지막 주간의 수요일에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가르치시던 때가 이런 상황입니다. 그날 주님은 여러 개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누가복음에는 하나만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에는 세 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지금 이 비유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줬다는 아주 간결한 비유입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주인에게 대가로 지불하는 것 외의 나머지는 농부들이 전부 자신의 몫으로 소유할 수 있었죠. 때가 되어서 주인이 계약에 따라 소출의 얼마를 받고자 여러번 종을 농부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그 종들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인내하는 마음으로 주인이 다시 자기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이 종들은 제대로 대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존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농부들은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이 비유를 듣던 군중들은 모두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줘야 한다는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참으로 간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다루면서 먼저 비유 자체의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두 번째로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봤습니다. 기억하시죠? 16절입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군중들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서는 '절대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듣고 이르되, 즉 ‘아쿠오’,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라 “비유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채고 "아닙니다, 안돼요, 그래선 안 됩니다"라고 말한 겁니다. 비유의 해석은 무엇이었습니까?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입니다. 농부들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을 돌보고 이끌 책임, 즉 하나님의 포도원을 가꿀 책임이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주인이 떠나 있는 긴 기간은 구약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시작되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돌봄을 받은 긴 시간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소출을, 열매를 받으시기 위해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율법을 반복해서 선포하고, 순종을 촉구하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그 선지자들을 배척했는지, 얼마나 미워했는지, 어떻게 돌로 치고 반으로 토막내서 죽였는지, 오죽하면 예루살렘이 선지자들을 죽이는 도시로 알려질 정도였는지 증거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저 죽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영적 열매를 맺게 할 책임을 맡기며 세우신 지도자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할 정도로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영적인 열매를 맺도록 촉구하셨다. 하지만 너희 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죽이기까지 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셨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하겠느냐?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아들마저 죽일 것이다.” 실제로 이 일이 있고 이틀 뒤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면서 로마인들을 압박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했습니다. 그들이 만족할 길은 이것 뿐입니다. 왜일까요? 유산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원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왕국을 자신들 마음대로 다스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첫째는 진멸하시는 겁니다. 16절입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 말씀은 40년이 지난 뒤인 주후 70년에 임할 일의 예언입니다. 로마의 장군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가 대군을 이끌고 4년 전부터 시작된 유다의 반란을 진압하러 왔습니다. 그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비롯한 주변 지역까지 완전히 파괴하고 초토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건물과 도시와 사람들을 향한 일시적 심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 그 대학살에서 죽임을 당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메시아를 거부한 채로 지옥에 내던져져서 거기에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진멸이 임했습니다. 이 진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계속될 일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서 관리하게 하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청지기 직분을 박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란 또 다른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비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청지기 직분을 박탈하셨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이들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 사두개인, 장로들을 비롯한 영적 지도자로 간주되는 사람들과 제사장 집안과 제사장 계열의 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맡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한 영적 열매, 의의 열매를 맺게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를 진멸하실 뿐만 아니라, 반역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성실하지 않고 메시아를 거부하는 지도자들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실 것이다.”
게다가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족보를 비롯한 모든 기록들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멸망 이후 족보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제 어떤 세대도 족보를 볼 수 없습니다. 모조리 파괴되었기 때문이죠. 제사장 집안이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조상이 누구인지조차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모두 끝났습니다. 성전은 그 이후로 재건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기록도 복원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맡게 될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리라고 하셨는데, 이 다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21장 4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그러므로 반역한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랐던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의의 열매를 맺게 할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후 70년의 멸망을 통해 이전의 이스라엘을 옆으로 제쳐 놓으신 후에, 새로운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청지기 직분에 충실할 것이고, 새로운 백성들도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 그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맡은 자들, 성경을 맡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다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은 유대인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정말 끔찍한 현실입니다. 이 새로운 지도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업신여기고, 경멸하고, 조롱했습니다. 기껏해야 갈릴리의 하층민 출신들이고, 랍비로서의 자격을 갖추거나 랍비로 훈련 받지도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맡은 자들이 되니 그들에게는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방인이 유대인을 대체한다거나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도 개종하고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한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십만명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의 구원 대상의 이동이 아닙니다. 비록 과거에는 분명히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주류였고 지금은 이방인들이 주류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지도력의 이동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는 바로 지도력의 이동입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백성들 중에서 멸시받던 모든 사도들이자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러한 전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간략히 설명드리겠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오늘밖에는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까 빠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누가복음 9장입니다. 들으면서 받아 적기만 한다면 스트레스를 좀 덜 받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여러분이 제대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예수님의 사역 초기의 일입니다.
6절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제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는 없었던 능력과 진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는 진정한 권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능력도 얻지 못했고, 진리도 알지 못했고, 진리를 선포하지도 못했습니다. 사역 초기에 예수님이 열두 사도에게 권한을 주시면서 귀신과 질병을 다스리는 권세와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내보내십니다. 바로 구원의 길이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처럼 전환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새로운 관리자, 새로운 청지기, 새로운 농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누가복음 10장에서 훨씬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1절입니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70명의 다른 제자들입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양의 탈을 쓴 늑대로 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어린 양으로 참된 복음을 전할 70명을 보내셨습니다. 전환은 이미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70명의 제자들과 평범한 12명의 사도들이 그 막중한 책임을 맡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진리의 새로운 청지기들입니다. 70명이 2명씩 35개 조로 나뉘어 나갔다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0장 17절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제자들이 주님의 권능을 사용했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23절입니다.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말하자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갈망해 왔던 특권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는 절대로 없다. 너희는 신성한 진리를 맡은 새로운 청지기가 바로 너희 자신들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일들을 보고, 배우고, 권능을 받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11절에는 정말 위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너희에게는 다른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것이 주어졌다. 그것은 비밀을 아는 것인데, 지금은 계시되었지만 이전에는 숨겨져 있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를 아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진리, 바로 그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다시 보면서 이 사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도들과 제자들과 토론을 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묻고 계신 겁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메시아라고 대답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정답을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너는 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계시를 주시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다. 너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이해한다. 다른 사람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비유도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는 없는 귀신, 질병,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전환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고 계속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8절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에베소서 2장 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신약 성경을 기록하고 설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바로 새로운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나는 너희와 너희가 선포하는 진리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며, 그 진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하나님 나라를 열어서 사람들을 들여보내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무엇을 결실했을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아닙니다. 지옥의 자식들입니다. 지옥의 자식들을 결실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지옥의 자식들이 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가 없었습니다. 거짓된 종교 체계와 제도만 있었을 뿐입니다.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말은 이런 말입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하늘의 복으로 사역한다는 말입니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매고 풀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의문을 가진 분도 계실겁니다. 사실은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누군가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을 거라고 했는데 거절했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 죄에 매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을 거라고 했는데 받아들였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죄에서 풀려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중 일곱은 어부였습니다. 기술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았고,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준으로 볼 때나 전혀 중요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 소유 포도원의 새로운 지도자들이고, 새로운 농부들이고, 새로운 청지기들이고, 하나님의 새 백성을 맡은 자들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지상대명령을 주실 때, 열한 사도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7절입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님이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의 모든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너희가 가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대리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새로운 농부들이고, 새롭게 계약한 일꾼들이고, 내 포도원의 새로운 농부들이라고 하십니다.
사도들에게 이 청지기 직분이 주어졌고 사도들은 이 직분에 충성했습니다.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 역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로마서 16장의 끝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비밀을 맡은 자가 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에베소서 3장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전에는 감추어 있다가 지금은 계시된 것들을 초자연적으로 자신에게 계시해 주셨다는 겁니다. 바로 신약의 진리인데 이제는 자신이 그 비밀을 맡은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비밀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여기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새로운 지도자들입니다. 이는 어떤 공로에 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들 모두에게 영적 지도자의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렇게 복음 전파와 덕을 세우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하나님의 일은 새로운 청지기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새로운 청지기들은 사도들로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선지자들, 복음 전도자들, 가르치는 목사들로 주욱 이어집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과 동역자들에게 계시된 것들을 바탕으로 가르치는 일입니다.
저 역시 그 긴 청지기 대열에 속한 한 사람입니다. 저도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성경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청지기 직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 새롭게 받게 된 세대에 속하는 한 사람입니다. 충성된 목사라면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전환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이 요한복음 14장에 있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주간의 목요일에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하신 말씀 중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입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사실 주님은 정말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많은 말씀을 하셨죠. 3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에 있는 모든 책에 기록하더라도 다 담을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자들은 청지기가 해야 하는 것들을 다 기억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내가 떠나면 성령께서 오신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하셔서 기록하고 선포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15장 26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여기서도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셔서 자신이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거라고 약속하고 계신 겁니다. 제자들이 이어질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하나님이 뜻하신 모든 것들을 기록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바로 이 기록들이 모여서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16장 12절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이를 것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실 말씀들이 더 많이 있지만 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께서 과거의 모든 일이 생각나도록 도와주실 것이고, 또한 장래 일도 알려주실 거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를 기록하게 된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먼저는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과 그 동역자들입니다. 다음은 사도들에 의해 전해지고 기록된 것을 선포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 청지기 직분을 수행한 모든 세대의 신실한 복음 전파자들과 가르치는 목사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새로운 지도자들입니다. 이 새로운 지도자들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새 백성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참되고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청지기 직분은 간단히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바른 교훈을 전하라고 말하면서 두 가지를 신경쓰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6절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성경을 읽으라. 성경을 해석하라. 성경을 적용하라.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청지기 직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6장 20절입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네게 부탁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라데케'인데 ‘은행에 맡긴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네게 진리를 맡겼다.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진리를 네게 맡겼다. 모든 거짓과 모든 기만을 피하고 그 진리를 지켜라.” 디모데전서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어서 디모데후서 1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아름다운 것이란 무엇입니까? 13절에 나오는 ‘바른 말’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사도들이 이것을 받았습니다. 바울도 받았습니다. 디모데도 받았습니다. 디도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계속 전해져서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사도들과 그 동역자들을 감동하여 기록하게 하신 그 진리입니다. 우리가 받은 청지기 직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 농부들입니다. 우리가 계약을 맺고 하나님께 고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책임을 부여받아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책임은 비할 데도 없고 필적할 수도 없는 책임, 곧 사람들로 하여금 의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나님의 포도원을 돌보는 것입니다. 지옥의 자식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포도원 비유는 대체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스라엘을 영구적으로 대체하는 것일까요? 지난 주일 저녁에 들으셨던 분들은 아마 아실 겁니다. 답은 무엇입니까? ‘아니오’입니다. 일시적인 대체입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가 올 것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진리의 청지기 직분도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놀라운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부터 19장의 긴 내용에 걸쳐서, 분명하고 상세하게 기록된 ‘환난’이라 불리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환란의 때에 유대인 14만 4천 명을 각 지파별로 1만 2천명씩 선택하십니다. 자신이 어느 지파에 속하는지 유대인들은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들이 모두 회심하고 복음 전파자가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나라에 들어갈 때에,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고, 예루살렘에서 다스리시면서 세상을 통치하기 위한 보좌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이 아브라함과 다윗과 선지자들에게 주어졌던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의 약속들을 받을 때에, 그 때에 유대인들이 다시 하나님 진리의 청지기가 될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 진리의 청지기가 될 것이고, 천년왕국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요점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아주 멋진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 스가랴 8장입니다.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지만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스가랴는 미래를 내다본 선지자입니다. 8장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미래를 봅니다. 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질투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무슨 성읍이라고요? 진리의 성읍입니다. 놀랍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지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던 때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예루살렘에 진리와 거룩이 있을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예루살렘 길거리에서 노인들이 지팡이를 잡고 있을 거랍니다.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해석하기가 어려우십니까? 저는 그리 어렵게 보이지 않습니다.
20절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미래에 있을 위대한 천년왕국 시대 중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말씀 그대로 여러 백성들이 다시 올 겁니다.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돌아올 겁니다. 한 곳의 주민들이 다른 곳에 가서는 당장 가서 주님의 은총을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를 찾자고 할 것입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백성들과 나라들이 만군의 주를 사모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갈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고 통치하실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은총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으로 올 것입니다.
저는 23절 말씀이 참 좋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온 세상이 주님을 만나려고 데려가 주기를 바라면서 유대인들의 옷자락을 잡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달콤한 섭리와 은혜로 유대인들이 다시 회복되어 진리와 거룩함의 청지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21장 24절입니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 말씀에 관해서는 몇 주 혹은 몇 달 뒤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이방인의 때가 찰 때까지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 새로운 지도자는 바로 우리이고, 그 새로운 지도자를 따르는 새 백성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것으로 포도원 비유가 끝날까요? 아직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비유 이야기의 마지막에 농부들이 아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이렇게 끝나버리면 안됩니다. 끝이 아닙니다. 20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비유를 듣던 청중들이 의미를 깨닫고 당황합니다. 진멸과 대체에 대해 이해하자마자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래야 마땅하죠.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기록된 바 그것은 무엇이냐?” “기록된 바”라는 이 간략한 표현은 군중들도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동일한 말씀이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모르느냐?” 또는 “성경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이처럼 성경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을 잊었느냐?”
여기서 우리는 포도원 비유의 내용 그 자체에서 해석으로, 해석에서 확장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여기서부터 포도원 비유를 확장하십니다. 포도원 비유는 끝났습니다. 그 끝은 포도원 농부들의 비극적인 결말이죠. 그 농부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그 시점에서는 아들에게도 비극적입니다. 아들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이 그 비유의 결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군중을 바라보시며 “이게 이 이야기의 끝인가 하고 의아해하는 걸 보니 너희가 다 성경을 잊은 것 아니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리고는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시면서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비유 말미에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며 청중을 사로잡으십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 봐라. 성경을 잊었느냐?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런데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청중이 명확하게 이해하는 내용이 여기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 113편에서 118편을 일컫는 ‘할렐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대부분 시편 118편을 외우고 있었을 겁니다. 지도자들은 분명히 외우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머릿돌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심지어 그 머릿돌에 메시아의 의미를 덧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 2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환상에서 우상을 부수는 메시아가 ‘손대지 아니한 돌’이기 때문이죠. 메시아는 당시 사람들에게 ‘돌’이란 상징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머릿돌이 무슨 용도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대에는 건물을 지을 때 돌을 쌓아 올려서 지었습니다. 그래서 멋진 건물을 지으려면 완벽한 돌 하나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머릿돌입니다. 머릿돌은 모든 면이 완벽해야 합니다. 바닥이 완벽해야 건물이 수평을 유지할 수 있고, 측면이 완벽해야 건물이 수직으로 곧게 설 수 있습니다. 윗면이 완벽해야 건물이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각도가 정확해야 건물이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머릿돌은 건물의 모든 각도를 결정합니다.
건축가들은 건물을 지을 때 완벽한 머릿돌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죠. 그렇다면 완벽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 완벽한 머릿돌을 찾기까지 많은 돌을 버리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손으로 다듬어진 돌이라고 할지라도 완벽한 돌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찾고 또 찾아야 할 겁니다.
돌의 한쪽 면이 돌출되어 있는데 그대로 건물을 지으면 제대로 잘 지어질 리가 없습니다. 각도가 약간만 비뚤어져 있어도 기울고 말 겁니다. 그러니 건축가들이 완벽한 머릿돌을 찾기까지 “이건 좀 잘 다듬으면 다른 곳에는 사용할 수 있겠네” 이렇게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돌을 돌더미에 던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비유의 내용이 바뀌어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돌에 비유되고 있는 겁니다. 아들은 이제 건축자들이 버린 돌입니다. 이스라엘이 “당신은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당신을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시편 118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기서의 머릿돌은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다른 나라들을 책망하고 계신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주변에는 언제나 거대한 제국이 있었지만, 그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부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거부당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머릿돌 나라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부당한 메시아가 하나님의 머릿돌이 되셔서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118편의 머릿돌이 의미하는 것은 먼저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머릿돌 나라입니다. 온 세상의 운명은 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거부하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이스라엘은 참된 머릿돌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참된 머릿돌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때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참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고 참된 머릿돌 나라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분명하게, 예수님은 자신이 머릿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0절부터 11절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통치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안나스와 가야바와 모든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여러분이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러분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거부하고 버린 그 돌이 돌아오셔서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셔서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부활입니다.
포도원 비유는 아들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회복이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바로 부활입니다. 금요일에 죽임을 당하시지만 일요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던 그 돌, 자신들이 짓고자 했던 건물에는 들어맞지 않던 그 돌, 유대인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부적격하고 불완전하며 용납할 수 없고 흠이 있다고 하면서 거부한 바로 그 돌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시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세우시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나라의 전체 구조와 대칭을 책임지는 켑할레 고니아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원 비유의 해석은 비유를 끝내기 위해서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이 18절에 있습니다. 위협입니다. 일종의 적용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의 심각한 위협에 가깝습니다. 이 18절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경고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무슨 뜻입니까? 돌에 부딪히면 다치고 죽게 될 거랍니다. 구약성경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 8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8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15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로마서 9장 3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8장과 28장 16절을 인용합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을 믿든지, 예수님께 걸려 넘어져서 깨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제 생각에는 베드로도 이 말씀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6절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 역시 이사야 28장 1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베드로 사도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될 것이고, 그 돌이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깨지게 할 것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한데 묶어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 머릿돌 비유의 바탕이 되었을 법한 고대 랍비의 격언이 발견되었습니다. “솥에 돌이 떨어지면 돌이 솥을 부술 것이고, 솥이 돌에 떨어져도 돌이 솥을 부술 것이다.” 돌이 솥에 떨어지든지, 솥이 돌에 떨어지든지 결과는 똑같습니다. 어차피 돌은 부서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든 부딪쳐 충돌하게 되면 우리만 깨지고 부서진다는 뜻입니다. 반대의 경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만 다칠 뿐입니다.
주님은 아주 직설적이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메시지이면서도 동시에 경고와 두려움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이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19장 41절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누가 되었든 가장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 비유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택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택에 대한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수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과 부딪혀서 넘어지고 깨지시겠습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9절을 보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예수께서 자신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을 알아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대신, 정죄를 받아들이는 대신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비극적인 모습입니까.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처럼 말이죠.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디에 서 계십니까? 예수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셨습니까? 아니면 가루로 만들어 흩으시는 심판자이신 예수님과 부딪치셨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마음에 역사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야 할 진리를 맡기시고 우리가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니 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시편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의 힘과 노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이 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심령에 그 구원을 베풀어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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