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누가복음 20장을 보겠습니다. 27절부터 40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20장 27절부터 40절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배경만 보자면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하는 대적들이 공격하는 상황이기에 과연 예수님의 위엄이 나타날까 싶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결국에는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십니다.
27절부터 읽겠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제가 정말 놀랍게 생각하는 점은 인류가 항상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권에서 그랬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용 경전인 ‘사자의 서’를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대에도 사후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죠. 약 5천 년 전에 봉인된 이집트 파라오 쿠푸의 무덤에서는 사후세계에서 하늘을 항해하기 위해 만든 ‘태양선’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은화를 시신의 입에 넣기도 했는데요, 부활의 땅에 이를 수 있게 하려고 신비로운 죽음의 강을 건너는 배삯을 준 것입니다. 미국 인디언들도 죽은 전사의 무덤 속에 활과 화살이나 죽은 말을 함께 묻었는데요, 사후세계의 행복 사냥터에서 사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노르웨이에서도 사후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갑옷과 죽은 말을 함께 묻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린란드에서는 죽은 원주민 아이들을 매장할 때 사후세계의 추운 황무지를 지나갈 수 있도록 안내견을 함께 묻었습니다.
이처럼 인류는 항상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훨씬 더 발전된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벤자민 프랭클린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도 사후세계를 믿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묘지에 가 보면, 프랭클린의 무덤과 그가 직접 쓴 비문이 있습니다. 이 비문을 보면 그가 사후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죠.
프랭클린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쇄공이자 낡은 책의 표지 같은 프랭클린의 몸이 벌레의 먹이로 여기 누워 있다. 비록 내용이 찢기고 글자와 금박은 벗겨졌지만 이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에 의해 수정되고 교정되어 더 우아한 판본으로 다시 한 번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시적인 고대 문화에서나 혹은 정교하게 발전된 현대 문화에서나 상관없이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인류 안에 항상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부활을 굳게 믿었습니다. 많은 유대 문헌에서 찾을 수 있죠. 마카비 2서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책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400년 기간에 기록된 외경입니다. 이 주전 1세기 경에 쓰여진 마카비 2서에 부활에 대한 흥미로운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내용이 아주 조잡하면서도 원시적이기는 합니다.
마카비서에는 라지스라는 지도자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라지스가 이렇게 죽었다고 합니다. 라지스는 자신이 혐오하던 헬라인들의 손에 넘겨지는 대신에, 가파른 바위 위에 서서 스스로 칼을 들고 배를 갈라 손으로 창자를 끄집어내서 무리에게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카비 2서에 의하면 라지스가 “생명과 영혼의 주이신 하나님께 의지해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마카비 2서 14장 46절 내용입니다. 이것은 외경이지 진실도 아니고 역사적 사실도 아닙니다. 성경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죠. 하지만 그 당시의 사상을 알 수는 있습니다.
또 다른 1세기 유대 문헌인 바룩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에 땅은 반드시 죽은 자들을 되돌려 줄 것이다. 형체를 바꾸지 아니하고 받은 그대로 되돌려 줄 것이요, 넘겨진 그대로 보존하여 일으키리라.” 이 바룩서 역시 주전 1세기 무렵, 그러니까 예수님의 초림 전후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런 사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부활이 있을 거라는 것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 죽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같은 형체로, 같은 관계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사상을 유대인들은 익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계속 바룩서의 기록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자들을 알아보게 되면”, 그러니까 모두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죽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 중에 영광을 입어 광채를 발하리라. 천사의 광채로 변하고, 별과 같이 되고, 자신이 바라는 모든 형체로 변화되어 아름다움에서 사랑스러움으로, 빛에서 영광의 광채로 변하리라.” 떠난 그대로 돌아와서 모든 사람을 알아보면 변화가 시작되고,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렇게 변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외경인 에스드라서와 에녹서 등 다른 유대 문헌들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혼란스럽게 섞인 채로 부활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모든 시대의 모든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현세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육신의 부활은 탈무드에도 자주 언급됩니다. 탈무드는 유대교의 신학과 전통을 총망라한 책이죠. 랍비들은 이 책을 지식의 원천으로 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문헌들 외에 물론 성경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부활을 약속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16편 9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죽더라도 무덤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보이셔서 주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참으로 성경적인 소망입니다.
시편 49편 15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부활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또 다른 구절입니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 말씀들은 모두 성경이 말하는 부활에 대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시편 139편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8절일 겁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어디로 가든지, 천국에 가든지 무덤에 가든지 주님 안에 있을 거라고 합니다. 변함없이 주님 안에서 존재할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호세아 6장에도 있습니다. 이사야 26장에도 있습니다.
또 다니엘 예언의 마지막 부분인 12장 2절에도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인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도 있고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 이후에 누군가는 천국에 가고 다른 누군가는 지옥에 가게 되리라는 겁니다.
이처럼 유대인에게는 부활에 대한 전통 사상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이 있었습니다. 역사 내내 그랬지만 특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죽은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죽음 이후에 하나님 안에서의 삶과 하나님 밖에서의 삶이 있다는 것, 육신의 부활, 즉 생명으로의 부활과 수치로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는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두개인입니다. 27절을 보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답니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부활을 믿고 있는데도, 제가 앞서 말씀드린 부활에 대한 말씀들이 구약성경에 있는데도 부활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이 늘 그렇게 우울해 보였군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으니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장 8절에도 사두개인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합니다. 사두개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을 다 믿는 바리새인과는 정반대의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사두개인의 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아주 소수 집단이었죠. 하지만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부유한 귀족으로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19장 47절과 20장 1절에 나오는 대제사장들도 대부분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도 사두개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산헤드린 의원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최고 공회인 산헤드린의 의원 70명 중 대부분이 사두개인이었습니다. 비록 전체적인 숫자는 적었지만 사두개인들은 이처럼 권력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27절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접근해 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지금은 수요일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마태복음 22장과 마가복음 12장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는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질문했던 날과 같은 날에 왔다고 합니다. 바로 수요일입니다. 수요일에 바리새인들이 먼저 예수님께 질문을 했고, 그 다음에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주 수요일은 정말이지 분주했습니다. 금요일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지만, 지금 수요일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지도자들과 충돌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쫓아왔고 헤롯당원도 왔습니다. 이제 사두개인의 차례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매우 분노한 상태입니다.
사실 복음서에 사두개인은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을 때에는 이들을 볼 수 없습니다. 유대 땅을 다니실 때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이 등장하는 곳은 바로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고, 공생애 마지막 주에도 다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19장을 통해서 그 일을 살펴봤죠. 사두개인들은 성전 사업을 관리하면서 많은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아주 부자였죠.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의 성공적인 사업을 방해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증오했습니다. 몇 시간 전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아 버리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그 일 때문에 분노한 상태였습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이 일은 사두개인들을 향한 공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신학을 공격하신 것처럼 사두개인의 돈줄을 공격하신 겁니다. 사두개인들이 성전 운영에 대한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죠.
사두개인에 대한 배경지식을 좀 더 알려드겠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기꺼이 로마에 협력하고자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했으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걱정도 없었기 때문에 현세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얻을 수 있는 모든 권력과 부와 지위와 권한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으니 로마와 협력해야만 했던 거죠. 사두개인에게 모든 권한을 준 것이 바로 이 로마인들입니다. 로마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거죠. 그러므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로마의 비위를 맞추고 굽실대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백성들은 그런 사두개인들을 혐오하고 싫어했죠. 그래서 사두개인의 수가 많지 않았던 겁니다. 한마디로 사두개인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사두개인을 싫어했던 이유는 사두개인이 로마와 타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전에 갈 때마다 감수해야 하는 조직적인 부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로마가 좋아할 만한 일에만 열심을 냈고, 이는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겁니다. 부패한 성전 운영은 이러한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죠.
한편 주후 70년에 로마는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진압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파괴했습니다.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실제로 천 개에 이르는 이스라엘 주변의 도시와 마을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로마인들이 이렇게 모든 것을 무너뜨렸을 때 사두개인도 사라졌습니다. 제사장 지위와 권력이 단번에 무너지자 사두개인의 역사도 막을 내렸던 겁니다.
종교적으로 사두개인들은 매우 편협하고 엄격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두개인들을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과 천사와 영을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도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공의와 율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무자비했습니다. 이런 잔인함은 사두개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사두개인은 다른 유대인 분파보다 아주 야만적이었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은 사두개인에 비해 백성들에게 관대했습니다. 사두개인은 권력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무자비하게 강요했습니다. 근본주의자이자 전통주의자로서 구전 율법과 필사본 율법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둘 다 인정하고 받아들였죠.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성경과 구전 율법, 필사본 율법 전부를 받아들인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오직 성경만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순수한 신앙에 헌신한다는 점에서 아주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모세율법을 그 누구보다도 문자적으로 해석했고, 레위기 정결법을 아주 엄격하고 까다롭게 지켰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나 보상에 대해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두개인은 죽고 나면 영혼과 육체 모두가 소멸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죽고 나면 삶도 없고 형벌도 없고 보상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두개인이었고, 신약성경에서도 사두개인을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스스로를 자유주의자, 근본주의자, 전통주의자, 순수주의자라고 여기면서 성경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가 아까 읽어드린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을 거부했던 걸까요? 그 대답은 사두개인들이 모세율법, 즉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인 모세오경을 최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다른 모든 책은 모세오경에 종속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순수한 신앙의 옹호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으니 모세만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구약의 다른 모든 책들은 단지 모세오경의 주석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모세오경 어디에도 부활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은 순수한 신앙이 아니며, 부활을 논하는 어떤 시도도 옳지 않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심지어 성경의 다른 책에 부활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부활 교리는 모세오경에 존재하지 않고, 구약성경의 다른 책들은 모두 모세오경의 주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겁니다. 그리고 다른 책에 쓰여 있는 부활의 경우에는 그 자체를 믿기보다 해석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두개인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정의했습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까다롭게 율법을 적용해서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백성들을 억압했습니다.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면서 백성들의 희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마음껏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아주 확고했습니다. 부활에 관해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바리새인들이 바룩서를 비롯한 외경의 내용을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죽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 옷을 입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벗고 있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를 토론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모든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부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옷을 입고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서 옷을 구할 수가 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이어지는 논쟁은 부활할 때 새 옷을 입을 것인지 아니면 입었던 것과 같은 옷, 그러니까 땅에 묻힐 때 입었던 바로 그 옷을 입고 부활할 것인지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주제로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만약 이생에서 결함이 있었다면, 그러니까 신체적 결함이든 정신적 결함이든 어떤 형태라도 결함이 있었다면 죽은 후에 부활해도 같은 결함이 있을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이 죽을 때 입었던 옷과 같은 옷을 입고 부활할 것이고, 부활 후에도 이생에서와 같은 결함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일부 바리새인들은 모든 유대인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역사 전체에 걸쳐서 죽은 모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부활하게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디에서 죽었든지 상관없이,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이스라엘 땅에서 부활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 그물처럼 연결된 아주 거대한 경사진 통로가 있고, 유대인들이 묻힐 때에 그 통로를 따라 내려가서 지하에 있는 시체더미에 다다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 복잡한 통로들 덕분에 모두가 다 수월하게 그 더미에 이르게 되고 거기서 부활하게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주제로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종종 사두개인과도 토론을 했죠. 사두개인들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주 어리석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우스꽝스러운 소리로 여기면서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조롱하는 자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나머지 유대인들의 화를 돋우면서 놀리는 법을 잘 알았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우스갯소리로 여겼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겼던 이유 중의 하나는 만약 누군가 이생에서 여러 번 결혼했다면, 그리고 부활 이후의 삶에서 이생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를 입고 같은 몸으로 살고, 같은 결함이 있고, 같은 관계 속에서 산다면, 도대체 누가 그 사람의 남편이나 아내가 되겠는가 하는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이 최고 랍비에게 질문을 할 차례가 되면 이 질문으로 강력한 한방을 날렸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불신을 아주 능숙하고 탁월하게 변호했던 겁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고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사두개인들이 수요일에 예수님께 왔습니다. 자신들을 위협하는 예수님을 제거할 목적을 가지고 말이죠. 이것은 요한복음 11장 47절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대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로, 바리새인들과 신학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이었지만 예수님이 죽기를 바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로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체포하게 하려고 예수님께 접근한 장면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로마에게 체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신경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점차로 바리새인에게 동조하게 된 겁니다. 제가 보기에 사두개인들은 로마를 개입하게 하거나 로마를 자극하는 행동은 무엇이 되었든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서 매우 꺼려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 47절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공회를 보면 모두 뜻을 같이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기적들,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들이 두려워한 것이 바로 이겁니다. 한마디로 사두개인들은 지위를 잃을까,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했습니다. “만일 예수를 이대로 두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지위를 빼앗아 갈 것이다.” 이게 바로 대제사장들의 심정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백성들은 예수님이 대적들을 전복시킬 수 없다는 걸 보고 즉시 메시아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니 말이죠.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로마인들이 관여하게 되면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로마인이 그 일에 관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렇게 말한 겁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죽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무너지고 만다, 이런 말입니다.
그렇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확실하게 예수님이 죽기를 원했지만, 사두개인은 로마가 침략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예수님의 죽음까지 바라지는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나선 겁니다. “잠깐, 예수는 죽어야만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것을 잃을 것이오.” 그래서 양측 모두는 예수님이 죽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두개인의 접근방식은 이랬습니다. 지금껏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던 질문을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께 던져서 예수님을 불신하게 만들자는 겁니다. 결정적인 질문은 바로 이겁니다. 이 질문은 그동안 토론했던 모든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최고로 강력한 한방이죠. ‘이 질문으로 예수를 어리석게 보이게 하자. 부활에 관한 이 질문으로 예수를 바보로 보이게 하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두개인의 접근방식이었습니다. 둘째는 부활의 불합리성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터무니없게 보이고자 했습니다. 28절입니다.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존칭을 사용한 겁니다. 21절을 통해 살펴봤던 것처럼, 가장 유명한 랍비들에게만 사용되는 그런 호칭이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명예로운 호칭으로 부르면서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혜로운 대답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하게 합니다.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당연히 이들이 언급하는 것은 모세입니다. 당연히 모세오경이죠. 신명기 25장을 인용한 겁니다. 신명기 25장입니다.
여기서 잠깐 신명기 25장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율법이죠. 5절입니다.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한 겁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형제들 중에서 한 명이 결혼을 했는데 자식을 낳기 전에 죽었다면 낯선 남자와 다시 결혼해선 안 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신명기가 기록된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이제 곧 그 땅에 들어갈 것이고 땅이 분배될 것입니다. 지파별로 주어질 것입니다. 지파들이 후손을 이어 가는 것, 자녀를 낳는 것, 그래서 대를 이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지파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아내가 있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형제 중의 하나가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아 계속 대를 이어가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자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과 정체성, 그리고 땅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을 ‘수혼제’라고 합니다. 라틴어로는 형제라는 의미가 이 말에 들어 있습니다.
이 수혼제는 구약성경에 처음 등장합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야곱의 아들 유다의 집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난이 죽은 형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자녀를 낳아서 후손을 잇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창세기 38장에서 오난의 생명을 빼앗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의 백성과 지파들을 보호하고 보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방식이 바로 이 수혼제입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 역시 다른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세오경과 수혼제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온 겁니다. 아마 가장 두드러진 예는 룻일 겁니다. 엘리멜렉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룻이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오벳을 낳고 키웠습니다. 오벳에게서 이새가 나오고, 이새에게서 다윗이 나오고, 다윗의 가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역사 초기의 이 수혼제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은 수혼제를 끄집어낸 겁니다. 그런데 황당한 이야기를 여기에 덧붙입니다. 29절입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일곱 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마태복음에는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그냥 단순한 가정이거나 어쩌면 어딘가에서 한번쯤 일어났던 일이기도 한 것처럼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이 여자는 정말 위험한 여자입니다. 제가 만약 넷째였다면 마을에서 도망쳤을 겁니다.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였다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아주 꽁꽁 숨어 있었을 겁니다. 그야말로 이 여자는 죽음을 부르는 여자입니다. 일곱 형제가 이 여자와 결혼하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32절입니다.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아이구야 정말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자가 죽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네요.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황당한 상황을 덧붙이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어쩌면 이들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이 질문을 얼마나 많이 써먹었겠습니까? 이런 식의 비유나 예화를 사용해가면서 부활이 황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농담 같은 말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아니, 바리새인들은 부활 이후에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같은 외모를 하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단점과 장점을 가진 채로 같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거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러면서 농담을 했을 겁니다. 또 마이모니데스 같은 사람들은 실제로 부활 후에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마이모니데스는 원조 몰몬교입니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황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당시에 이해되던 식의 부활은 사두개인들에게는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사두개인들의 접근 방식을 살펴봤고 이제 성경의 답, 드디어 성경의 답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빠르게 보겠습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아, 그런데, 제가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잠깐 더 살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 포함된 내용이 여기에는 빠져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2장 29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잘 들으셔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이 성전에 채찍을 들고 들어가서 깨끗하게 하시면서 사두개인의 사업을 뒤엎으신 것도 참기 어려웠는데 신학까지 공격을 당한다면 얼마나 더 참기 어려웠을까요? 사두개인은 자신들이 성경의 해석자라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였다’는 말은 ‘플라나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로 ‘방황하게 하다, 길을 잃게 하다’ 이런 뜻입니다. 즉 “너희가 스스로를 방황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길을 잃게 만들었다. 진리와 실제에서 벗어났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요? “너희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고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살펴보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성경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요점은 성경을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모든 참된 깨달음의 근원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한다.’ 사두개인들이 듣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말이었을 겁니다. 너희는 무지한 성경 해석자들이다. 너희는 잘못 이해했다. 너희는 스스로 길을 잃고 말았다. 너희는 진리에서 벗어났다. 너희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여태까지의 모든 거짓 교사들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성경 지식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사두개인이 성경을 알았더라면, 진짜로 성경을 알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부활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만일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자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것,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황당한 우스갯소리라고 비웃는 대신 말이죠.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진리를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이 세상의 자녀들.” 여기 이 세상의 자녀들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히브리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결혼, 성, 생식, 출산,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지 부활 이후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입니다.
몰몬교를 믿는 분들이 있다면 잘 들으십시오. 몰몬교만의 세상에서 천상의 성관계를 가지면서 초자연적인 자녀들을 낳으며 영원히 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슬람을 믿는 분들도 잘 들으십시오. 죽음 이후에 72명의 처녀들과 녹색 베개 위에서 성관계를 갖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결혼은 오직 이 세상에만 있는 제도입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거기에서는 없습니다. 가족도 없을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36절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대체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기 때문에 후손을 이어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헬라어로는 ‘이상겔로이’인데, 누가가 조합해서 사용한 동사입니다. 오직 여기에서만 사용되었죠. 천사들은 모두 한 번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거나 죽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 수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낳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결혼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체될 필요도 없습니다. 종족을 이어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참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연합의 관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 안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완전해지기 때문에 그보다 못한 관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5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일종의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사두개인들을 향한 직접적인 경고입니다. 저 세상과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너희는 천사도, 하나님의 자녀도, 부활의 자녀도, 죽음 이후의 삶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도 믿지 않는구나. 이 모든 것을 부인하는구나. 그렇기에 너희는 합당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 부활의 자녀로 합당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합당히 여김을 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을 뿐입니다. 구약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합당함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었을 때 생깁니다. 주권적인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생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에게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이라고 하신 것은, 지금 그들이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은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은 황당한 것입니다. 천국에는 결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36절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 곧 성과 무관한 하나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부활의 자녀가 됩니다. 성경에서 “자녀, 이 세상의 자녀들, 하나님의 자녀들, 부활의 자녀들”이란 말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질적 특성 혹은 의미를 규정하는 자질을 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벨리알의 자녀라면 본질적으로 사탄의 특성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특성을 갖습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자녀라면 부활의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자녀라면 인간성을 갖습니다. 저 세상의 자녀, 즉 부활의 자녀라면 영원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천사들처럼 자식을 낳지도 않을 것이고, 성관계도 갖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순전하고 충만한 생명을 얻게 될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부활의 특성인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결혼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의 삶에서 결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의 신학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계십니다. 부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35절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주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 부활의 몸이 어떤 형태가 될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부활의 몸은 빌립보서 3장 21절이 증거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과 같은 몸일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지금 바로잡고 계십니다. 결혼은 부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 점을 바로 알아라. 그렇기에 너희의 질문은 쓸데없는 질문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37절을 보겠습니다. 아주 강력합니다. 읽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달리 말해 결혼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이제 잊어버리고 핵심으로 들어가자는 겁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이게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두개인이 자꾸 그렇지 않다고 하기 때문이죠. “모세도,” 여기서 예수님은 사두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도전하십니다. 그렇죠? 사두개인의 영역에서는 바로 이것, 즉 부활이 모세오경에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말 그대로 가시나무 떨기,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 불타오르는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 나오죠.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부활의 진리를 보여줬다구요? 어떻게 보여줬나요?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하나님이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이 직접 강조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마태복음 22장 32절에는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느니라”라고 하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동사의 시제에 주의를 기울인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누구 누구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6장 24절과 28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데, 아브라함은 이미 죽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6절, 15절, 16절, 그리고 4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데, 이 세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십니까? 38절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떤가요? 살아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죽은 시체에게 경배를 받아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 어떤 영광도 되지 않습니다. 이들을 개인적이고 개별적으로 각기 구별하여 말씀하십니다.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강조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각각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관계 안에서 살아있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볼 때는 죽은 자들이지만 말이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자들은 살아있습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바 그대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되어 모두 살아있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에게는 또 다른 삶, 내세, 부활의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이며,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끝났습니다. “완패했다”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아주 박살이 났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자신들의 최선의 논증, 가장 빈번히 시도하고 시험했던 부활의 불합리성을 내세워 공격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잘못된 부활에 대한 견해, 즉 부활의 삶에서도 결혼하고 그 삶은 현세의 삶과 거의 똑같을 것이라는 견해를 예수님이 부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모세오경을 통해 모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자신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다는 사실을 사두개인들에게 증명하심으로써 최후의 일격을 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요점인 놀람입니다. 백성의 놀람, 서기관들의 놀람입니다. 어쩌면 사두개인들의 놀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 신학자들입니다. 성경을 가장 신중하고 깊이 있게 숙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감탄하며 할 말을 잃었습니다.
“잘 말씀하셨나이다”라는 말은 다소 절제된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3절에는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놀라다’라는 단어가 여럿이 있지만, 마태복음 22장 33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에크플렛소’입니다. 어느 사전에 나와 있는 풀이처럼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의 지혜를 꺾다’입니다. 일종의 고대 영어 접근 방식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다’란 의미입니다. 이게 정확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경악하고, 감탄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끝났습니다. 40절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NASB에는 더 이상 ‘용기가 없었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헬라어 동사로는 “주제넘게, 감히”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사두개인들이 최고의 한방을 날렸지만 완패를 당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모두 무너졌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이후로 그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에서는 오늘 본문이 예수님이 질문을 받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수님과 지도자들의 마지막 충돌입니다. 41절부터 예수님은 십자가로 이끄는 질문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다시 마태복음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바리새인들이 아주 끈질긴 사람들답게 한 번 더 예수님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3절을 보겠습니다.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질 만큼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정말이지 바리새인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처형당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또 하나의 질문을 내놓았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물론 마태는 예수님이 하신 대답까지 기록해 두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질문 이후로 바리새인들도 결국 다 끝났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6절입니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은 증오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셨습니다. 지도자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했죠. 각기 자신만의 방식과 유형으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보잘것없는 공격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 큰 영광을 나타내시고, 더 큰 놀라움과 더 큰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키실 뿐이었습니다. 누가는 이것으로 공격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지도자들은 이제 더 이상 주님께 와서 질문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경이로움입니다. 누가복음의 모든 부분에서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죠? 엄청난 경이로움입니다. 제가 찾아낸 것은 먼저는 예수님의 위대한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혜로 모든 대화를 이끄시고 모든 논쟁을 제압하셨을 뿐만 아니라 명백한 초자연적 지식을 다루셨습니다. 둘째로 올바르게 해석된 성경을 향한 헌신입니다. 세번째로는 부활에 대한 확증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대적했던 사두개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기회를, 참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혜, 성경을 향한 끊임없는 헌신, 부활에 대한 확증을 보여주는 아주 큰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대적에게는 패배의 장면이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장면입니다. 그렇죠? 지도자들이 망연자실한 채로 침묵에 휩싸여 굳어 있는 반면에 우리는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성경을 참되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적용하셨으며, 자신의 입술로 부활에 대한 성경의 약속들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모든 지혜요 모든 능력이 되시는, 항상 참되시고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합니다. 이 기쁨은 지금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기에 합당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합당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치르신 희생과 죽음과 부활을 믿고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제게는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의를 덧입혀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라고 말하며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으며, 영생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합당하심을 힘입어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충돌 장면에서 우리 구주께서 말씀으로 친히 확증해 주신 그 소망 속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예배를 마치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 부활의 자녀에 대한 말씀이 소망 중에 메아리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기에 우리도 그곳에서 살아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자녀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영원한 천사들의 삶과 같은 부활의 삶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럴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이토록 영광스러운 약속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합당하심을 붙들게 하옵소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을 충성되이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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