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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성경을 펼쳐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최고의 특권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누가복음 23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누가복음을 읽다 보면 마치 역사학자 누가와 함께 역사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듭니다. 자… 보십시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등장으로 시작해서 메시아가 오실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됩니다. 이어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마리아의 찬가가 나오고,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 공생애 사역이 나오죠. 그렇게 누가와 함께 예수님이 겪으신 모든 시련과 승리의 순간을 지나 갈보리 십자가 발치에 선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23장 32절부터 39절까지입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같은 부분을 다뤘지만 오늘은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읽습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지난주에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 제목을 ‘갈보리 촌극’이라고 붙였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촌극이라고 부르는 것이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의 의도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하게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말입니다. 예수님께는 군대도, 권력도 없었습니다. 따르는 무리의 수도 초라할 정도로 적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아무것도 정복하지 않으셨고 아직 구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엄청난 힘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되려 약해져만 가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촌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십자가 주위에 모여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빈정대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최대한 무례하고 모욕적이며 수치스럽게 대하려고 안달이 났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행동은 아주 심각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죄가 정점에 이른 겁니다. 최악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비웃고, 창조주이자 구세주이신 참된 왕, 참된 메시아를 비꼬며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보다 더 악한 죄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을 화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최악의 신성모독입니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이 직접 나서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극악한 신성모독 앞에서 진노를 쏟아내셔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사탄과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짜 신들의 세계에서도 이 정도의 만행을 허용하는 신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참되시고 거룩하신 분이라면 어느 정도의 존엄은 지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명예를 지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되고 거룩하다고 자신을 밝히신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신성모독을 당하셨다면,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셔서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심판하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심판은 40년이 지난 후에야 일어났습니다. 로마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것이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중에는 40년이나 더 살고 로마가 침략했을 때가 되어서야 죽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심지어는 이 심판을 받기도 전에 죽은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40년이라니, 너무 오래 참으신 거 아닌가요? 아무리 거룩하고 의로우며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조롱하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야 하는 때라고 여러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군중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임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신성모독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24장 16절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중대한 죄입니다. 신성모독자를 죽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모욕하고, 저주와 욕설을 퍼부으며 희열을 느꼈습니다. 도리어 엉뚱하게도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라고 비난까지 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이 사역 초기에 죄를 사하는 권능을 나타내셨을 때 그랬습니다. 또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을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오히려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만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3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입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모든 것이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은 유대인에게 임했어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님께 임했습니다. 신성모독을 저지른 사람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권세도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요?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왜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하박국 1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언제까지 죄 많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용납하실 겁니까?"라고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겁니다. 또 요한계시록 6장 10절에는 미래에 다가올 환난의 때, 적그리스도 세력의 손에 순교한 순교자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나옵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이처럼 하나님의 인내심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갈보리 십자가 사건 당시의 군중에게 내려져야 마땅했지만, 정말 놀랍게도 그리스도에게 대신 임했습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요? 그런데 이 상황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구약성경 말씀을 예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사야서로 돌아가 봅시다. 이사야서를 잘 모르신다면 여러 번 읽으셔서 익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이사야서를 반복해서 읽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 즉 죄인들이 어떤 상태인지와 다가올 심판의 선포가 담겨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메시지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1장은 이사야 전체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장 2절에서는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과 4절에서도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5절과 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스라엘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터지고 병들고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7절입니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이것이 이사야서의 패턴입니다. 죄와 심판이 반복되어 나오죠. 하지만 16절부터는, 아니 14절부터 보는게 좋겠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토록 심각한 이스라엘의 상황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의 제안이 정말 위대하지 않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셔야 할 정도로 죄가 많은 백성에게도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형식이 이사야서에서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정말 놀라운 방식으로 말이죠. 그 중에서 몇 개만 보겠습니다. 다가올 심판의 온갖 경고가 끝난 후에 이사야 40장은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정말 놀라운 긍휼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42장 6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 42장 앞부분은 종이신 메시아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고 죄 많고 악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앞으로 도래할 구원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고 계신 겁니다. 이런 약속은 43장에도, 52장에도, 53장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55장으로 넘어가면 정말 위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심판과 죄를 경고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이어서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 말씀을 들으시고는 이런 질문을 하실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반역하고, 반항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시고도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실 수가 있을까? 정말 하나님의 인내심이 이렇게까지 크실까?”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8절에서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의 인내심에는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인내심에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도 그러실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훨신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심한 모욕을 당하고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실 뿐 아니라 용서와 자비, 은혜, 긍휼을 베푸사 자녀로 삼아 기어코 거룩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특별함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나타난 엄청난 대조를 보십시오. 군중의 무자비한 모욕과 이를 대하는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간구 사이의 대조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입니다. 먼저 군중의 무자비한 모욕을 보겠습니다. 35절을 보시면 네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백성, 지도자, 군인, 강도들이죠. 이 네 부류의 군중은 모두가 똑같이 예수님을 무자비하게 모욕했습니다. 동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무정하고 잔인하고 잔혹하기까지 합니다.

35절입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누가는 백성들의 태도를 정말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피가 난무하는 경기를 무감각한 상태로 지켜보는 것처럼, 촌극이 펼쳐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을 유대인과 로마인들이 연출했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요. 거기서부터 조롱이 시작됐습니다. 모든 비웃음과 조롱, 모욕적인 풍자는 예수님이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것에 맞춰 진행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께 겉옷을 입히고 갈대를 손에 쥐어주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기 전부터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강도를 한 명씩 못 박은 것도 좌우편에 두 신하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서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정말 왕이라면 그 위대한 권력을 행사해야 하지 않느냐며 비꼬면서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을 수없이 도발했습니다. 동정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수많은 군중들 중에서 동정심을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잔인하지 않습니까?

로마 군인들이야 늘 이런 잔인한 일을 해왔기 때문에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사람들도 직업적으로 해왔던 것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잔인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는 조금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죄인과 세리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잔인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이들을 받아주셨죠. 또 강도들이야 범죄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니 이미 오래 전에 동점심이나 연민 따위는 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 현장에 모여든 군중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테니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들 중에는 어쩌면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예수님이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직접 경험한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북쪽 갈릴리에서 온 사람도 많았을 텐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음식을 먹었던 오천 명 무리 중에 있었던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셔서 다시 보게 되고, 다시 들을 수 있게 되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또 그런 사람을 잘 아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남아있기를 기대하는 게 무리인가요?

하지만 이들도 무자비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서서 구경했다고만 쓰여있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죠. 누가는 아주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그 자리에는 정말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유월절이어서 이른 아침에 공개 재판을 마치고 갈보리로 향하는 중에 군중들이 수십만 명으로 불어났을 겁니다. 또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십자가 주변에 모인 무리가 점점 더 커졌을 겁니다. 이들은 월요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을 때 장차 왕이 될 분으로 여기면서 환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겁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라는 누가복음의 표현만 보면 마치 군중들은 지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더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부터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군중과 지도자들이 함께 모욕하고 있었던 겁니다. 마가복음 15장 29절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마가복음도 지나가던 군중과 지도자들을 구분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군중은 그냥 바라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모든 조롱에 지도자들과 군중이 함께 했습니다. 군중은 지도자들의 지휘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불신이라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조종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촌극의 재미에 빠져서 예수님을 향해 악랄한 비웃음을 쏟아냈습니다. 이 군중은 그 한 주 내내 옳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아들을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대했을 뿐이었습니다. 놀랍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이었습니다. 군중은 무자비했습니다. 다음으로 무자비한 지도자들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23장 35절입니다.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관리들, 즉 지도자들은 ‘그리스도’, 즉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는 메시아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혹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라는 단어는 메시아적 용어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아라는 주장을 비웃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고 주장한 것을 비웃는 겁니다. 여기 ‘비웃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크무크테리조(ekmuktérizó)’입니다. 누가복음에만 두 번 나오고 다른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센 어조의 단어입니다. 코를 뜻하는 무크테르에 ‘들어올리다’라는 뜻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코를 들어 올려 조롱한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매우 심하게 조롱하고 경멸할 때 사용하는 가장 센 어조의 말입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 직접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십자가 주변에서 예수님께 직접 말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군중에게 말했을 뿐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표현으로는 잘 와닿지 않지만 영어성경을 직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기 자신도 구원하게 놔두라.” 어떻습니까? 예수님께 직접 말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군중을 선동할 의도였기에 예수님께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 자신도 구원하게 놔두라.” 무슨 말인가요? 그냥 단순한 풍자나 조롱인가요? 예수님은 아무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건가요?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란 정치적, 군사적 차원에서의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온 이스라엘을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자기 자신도 구하게 그냥 놔두라는 말인데, 이보다 더 심한 조롱의 말이 없습니다. 조롱이죠. 완벽한 조롱의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지도자들은 가짜 왕을 무너뜨렸다며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심지어 예수님의 피가 자신과 그 자녀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입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만 정작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시편 22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22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또 7절에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군중들과 지도자들이 정확하게 이렇게 했습니다. 계속해서 8절입니다.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이 모든 비꼬는 말이 시편 22편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 시편의 예언이 십자가에서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한편, 누가복음 9장으로 돌아가서 20절과 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직분을 취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로 불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점을 우습게 여기며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신명기 21장 23절을 근거로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십자가 매달린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진정한 메시아요 왕이라는 생각을 경멸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요 왕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라 여겼기에 계획적으로 어리석은 군중을 조종하고 부추겼던 겁니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사야 53장 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10절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게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바울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떠올리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군인들입니다. 무자비한 군중, 무자비한 지도자에 이어 세 번째로 무자비한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사실 군인들은 유대교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이 비웃음의 놀이에 참여한 것뿐입니다. 군중과 지도자들이 하는 말을 그저 따라했을 뿐입니다. 이 무자비한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을 뿐 아니라 도발도 했습니다. 헬라어 엠파이조(empaizō)는 도발한다는 뜻입니다. 고통 속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께 고통을 더했던 것이죠. 그리고 마치 예수님이 왕인 것처럼 경의를 표하고 섬기는 흉내를 내며 신 포도주를 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마실 것을 두 번 제안받았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첫 번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장소에 데려왔을 때 쓸개를 탄 진정제용 포도주를 드린 것이죠. 고통을 덜어주어 몸부림치지 않게 해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조금이나마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던 것 기억하시죠?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거절하셨죠.

그 후에 6시간이 지나 임종 직전인 오후 3시에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자, 군인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 저는 이 두 번째 포도주가 군인들이 첫 번째로 주었던 포도주와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인들이 하고 있던 놀이의 일부였을 겁니다. 예수님이 요청해서 드린 게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이건 진정제도 아니었던 것은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촌극이 이미 펼쳐질 대로 펼쳐진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신 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왕에게 왕실 포도주를 바치는 모습을 흉내내며 조롱 삼아 포도주를 예수님의 입에 댄 겁니다. 조롱이 극에 달한 거죠. 당시 로마 군인들은 싼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이 싼 포도주를 예수님께 바치는 흉내를 내면서 백성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조롱했던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38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가 붙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모든 조롱의 출발점이 이 문구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패의 문구는 누가 정했을까요? 요한복음 19장 1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십자가에 죄인을 못 박을 때 죄목을 적은 패를 붙였는데요, 예수님에게서는 어떠한 죄목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뭐라고 쓸지를 정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9절입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빌라도에게 죄목을 적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마태, 마가, 누가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이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라고 썼던 것 같습니다. 죄패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 죄패를 읽을 수 있었고, 그래서 더 많은 유대인 인파가 모였을 겁니다. 빌라도는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이 문구를 적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알아보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면서 죄패의 문구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을 조롱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빌라도는 유대인에게 조롱당했습니다. 죄목을 찾지 못하겠다는 빌라도를 향해 처형 판결을 해달라고 몰아붙였죠. 궁지로 몰아넣으며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협박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조차도 이 죄 없는 사람에 대해서 손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다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헤롯도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몰아붙여서 바보처럼 만들어 버렸고, 이에 빌라도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거죠. 상황을 뒤집어서 유대인들을 바보처럼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빌라도가 작은 복수를 한 겁니다. “이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 유대인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문구를 바꿔달라고 했는데도 “나는 내가 쓸 말을 썼다”면서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했고,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했던 겁니다.

한편, 이렇게 머리 위에 죄패를 달았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가 T자 모양이 아닌 가로축 위로 세로축이 올라와 있는 전형적인 ‘열 십(十)’자 모양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34절 마지막 부분에 군인들의 또 다른 행동이 나옵니다.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렇게 옷을 나눠 갖는 것은 늘 해왔던 행동입니다. 처형 집행자에게는 처형당한 사람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작은 직업적 특혜였습니다. 요한복음에 이 군인들의 행동이 보다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3절입니다. “그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예수님이 걸치셨던 옷가지를 총 네 종류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겉옷입니다. 외투처럼 따뜻하게 하려고 입거나 잠잘 때 담요로도 사용했던 겁니다. 둘째로 샌들과 같은 신발입니다. 셋째로는 머리에 두른 천 같은 것이 있었고 넷째로는 허리에 감는 띠입니다. 이렇게 모두 네 종류를 걸치고 계셨을 겁니다.

십자가 처형에는 군인 네 명이 한 조를 이뤄 투입됐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사도행전 12장 4절을 보면 로마 분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네 명이 한 분대를 이루고, 이 네 명씩 네 개의 분대가 하나의 중대를 이루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분대 하나가 처형을 집행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이 걸치신 네 종류의 옷을 이 네 명의 군인이 나눠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평상복으로 입으셨던 반포 속옷은 이음새가 없고 통으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서 주인을 정하자고 의견을 모았던 겁니다. 시편 22편에 나오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했던 예언이, 실제로 병사들이 겉옷을 나누고 속옷은 제비뽑음으로써 성취되었던 겁니다.

이렇게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가지를 하나씩 나눠가졌고, 제비뽑기로 반포 속옷까지 가져갔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벌거벗은 상태가 된 겁니다. 하체를 가리는 속옷,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팬티를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겨서 알몸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남아 있을 수 있는 그 어떤 존엄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빼앗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철저하게 조롱거리가 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했을 때 자신들이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되었던 장면, 기억하시나요? 벌거벗었다는 것은 도덕적 죄책감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상징합니다. 이에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스스로를 가리려고 했죠. 창세기 3장에 나오죠. 이 때 하나님께서 직접 동물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고 도덕적 수치심과 죄책감의 상징인 벌거벗음을 가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벌거벗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덕적 죄책감과 수치심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하나님 앞에 계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번에는 가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벌거벗겨져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벌거벗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벌거벗음은 우리의 도덕적 죄책감과 수치심의 상징이었고 하나님은 이를 가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벌거벗음 위에 모든 진노를 완전히 쏟아부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벌거벗은 예수님이 우리의 가리개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가려주고 덮어주시는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무자비한 강도들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36장 39절을 보면 십자가형에 처해진 강도 중 한 명이 예수님께 막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앞서 말씀드린 세 무리와 같은 방식으로 촌극 놀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에는 두 강도 중 한 강도의 말만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가복음 15장 32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두 강도 모두 그랬습니다. 군중, 지도자, 군인뿐 아니라 강도들까지도 모두 예수님을 조롱하는데 동참했습니다. 누가는 둘 중 한 명의 말만 기록했지만, 사실 두 강도 모두 가담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비꼬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욕에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중보기도를 한번 보십시오.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34절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정말 충격적입니다. 충격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 쏟아지는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이 악한 모든 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악의 신성 모독입니다. 거룩에 대한 모욕입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이자 가장 지독한 악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 복수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불의이고 가장 심한 죄악입니다. 최악의 이단이요, 최악의 불경건, 최악의 욕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성모독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두를 맹렬히 책망하고, 심판하고, 극악무도한 죄악의 대가를 그 자리에서 바로 치르게 하실 것을 기대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전의 중보기도가 첫 번째였습니다. 두 번째로 강도 중 한 사람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로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에게는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면서 멀리 서 있는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이후 세 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지고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둠이 걷힌 후에 다섯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여섯 번째로 군인들에게 "목이 마르다"고 말하자 군인들이 해면에 적신 신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곱 번째로 혼잣말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이전에 가장 먼저 하신 말 씀, 즉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취를 풍기는 탕자를 끌어안기 위해 달려가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 같지 않나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전에 말씀하시기를 많이 용서받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처럼 엄청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셔서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하신 겁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서 24절을 보면, 예수님이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되 위협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피묻은 돌로 생명이 짓밟히는 순간에도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드린 기도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중한 죄라도 하나님의 아들에게 회개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내용이 이런 겁니다. 이렇게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들도 용서해 주신다면 세상 그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기도에는 보편성 뿐만 아니라 구체성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을 때, 이 ‘자기들’이 후에 어떻게 변화될지를 알고 계셨던 게 분명합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의 유대인 3천명이 그리스도께 회심하고 세례를 받아 교회가 시작되었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모욕했던 유대인들 중에서 회심할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주 후에 5천 명이 더 회심을 했고, 그 수가 날마다 더해져 예루살렘에서만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또 주님이 부활하신 후 몇 주 동안에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군중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기도는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마다 아무리 심한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보편적인 기도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마음속에 미리 알고 계셨던 구체적인 대상, 즉 군중 가운데 용서받을 사람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갈보리 십자가 발치에 서서 하나님의 아들을 조롱했던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군인 중에서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23장 47절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이 일을 보고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한 마태는 그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참고로 그 백부장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4절을 보겠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기도는 그 자리에서 응답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했던 무리 중에서 최초의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군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한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로마 백부장이, 그리고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했습니다. 덧붙여서 지도자 중 일부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 중 한 명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어떤 의미에서 이 기도는 그리스도를 거부한 모든 사람이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간구하는 보편적인 기도이기도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군중과 군인과 강도와 심지어 제사장들에게도 즉시 응답되었던 매우 구체적인 대상을 위한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가장 큰 역설은, 이 모든 조롱이 그리스도에게 쏟아지는 동안 예수님은 그 어떤 저주보다도 더 가혹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계셨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저주받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저주와 하나님의 저주를 모두 받으셔서, 자신이 하신 기도 그대로 하나님의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 영혼을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게 하는 십자가 사건이 기록된 장면에 담긴 생생함과 풍요로움, 경이로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게 되기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기를, 또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들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저희같이 자격 없는 죄인들을 위해 인간의 모든 저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저주를 기꺼이 받으시고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을 소리 높여 계속해서 찬양할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주님, 저희 모두의 마음 속에 주님의 일을 행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때에 저희도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도 그 “저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아버지께서 응답해 주신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구원을 이뤄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구원을 땅 끝까지 선포하는 데 저희를 사용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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