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4절부터 46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앞서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기록을 보면 예수님을 인간의 불의와 잔인함의 희생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 법정과 로마 법정에서 조롱으로 가득한 재판이 이어지면서도 예수님께 죄가 없다고 거듭 선언했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역사상 법정에서, 한 인간에게 가해진 가장 노골적이고 부당한 행위로 뽑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셨기 때문에 부당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가장 불의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었습니다.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불의와 그에 못지않은 잔인함입니다. 예수님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을 조롱하던 로마 군인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도 하에 예수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가짜 왕관처럼 만들고, 왕이 입는 자주색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짜 규를 쥐어주고, 왕처럼 떠받들며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끌려가자, 마치 왕이 지위가 높은 신하 두 명을 곁에 두는 것처럼 흉내내면서 조롱하기 위해서 강도 두 명을 각각 좌우편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다음 지도자와 백성, 옆에 있는 강도와 군인들까지 예수님을 향해 온갖 욕설을 쏟아내며 예수님을 가짜 왕 취급하며 비꼬며 모독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갈보리 촌극이라고 불렀죠. 일종의 풍자극이자, 쇼였습니다. 가장 지독한 조롱이었습니다. 그러나 촌극의 절정에서 극 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촌극은 한편의 드라마가 됩니다. 모든 것을 조율하던 유대인 지도자들이 주연을 맡았던 무대에서 다른 누군가가 주연을 맡게 됩니다. 순식간에 촌극은 잠잠해지고 한편의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촌극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한 위대한 분이 무대의 중심에 서십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그날 갈보리에 오셔서 촌극을 한편의 드라마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육체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두 강도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도 예수님이 겪으신 육체적 고난만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또 십자가 사건을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희생으로만 간주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물론 위대한 사랑의 희생이 맞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죠. 다시 말해서 갈보리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도 사실이고,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하신 것도 사실이지만, 종종 간과되는 중요한 신약성경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사건입니다. 인간의 잔인함과 불의가 최악으로 드러난 사건도 맞고, 최고의 희생적인 사랑이 표현된 사건도 맞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도 의미가 있고 저에게도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갈보리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후에야 비로소 구원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인류의 희생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끔찍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사실입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얕은 물에서 벗어나 더 깊은 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갈보리 사건에서 하나님을 보기 시작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주간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후 세 시간 동안은 백성과 통치자, 군인, 심지어 범죄자들이 현장을 지배했습니다. 신성 모독, 조롱, 비웃음, 경멸, 욕설,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단 한 사람만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구원받은 강도였죠. 예수님 옆에 매달려 있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아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놀랍게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결국 정오에 이 촌극은 끝이 납니다. 3시간이 지나고 촌극이 막을 내리자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무대의 중심에 오십니다. 사람들의 극장이었던 갈보리가 이제 하나님의 극장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무대에 선 배우였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배우가 되신 겁니다. 44절부터 46절까지 이 세 구절은 아주 간결합니다. 따로 개요를 짤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 성경 구절로 설교하는 게 불필요한 사족을 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구성이 아주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세 구절의 장엄함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그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44절을 보겠습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즉 정오가 된 것입니다. 오후 12시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대체로 오전 6시쯤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시, 분, 초 단위로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의 길이는 계절에 따라 달랐지만 유대인의 하루는 오전 6시경에 시작되었고, 그 시작점에서 여섯 번째 시각은 언제나 태양이 가장 정점에 있는 정오였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봄, 그리고 정오입니다. 화창하고 건조하며 메마르고 햇볕이 내리쬡니다. 태양을 쳐다보지 않아도 눈을 찡그릴 정도로 햇볕이 따갑습니다. 한낮입니다. 잠시 요한복음 19장으로 넘어가서 한 가지 설명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모든 다른 기록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9장 14절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3절을 보면 예수님은 '돌을 깐 뜰'이라고 불리는 심판대에 계십니다. 히브리어로는 가바다(Gabbath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계시는데 제육시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달린 지 3시간이 지난 시각이 제 육시 즉 정오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각은 아침 9시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빌라도와 함께 있는 시각이 어떻게 제육시가 될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빌라도 법정에서는 로마 시간을 기준으로 했는데, 로마에서는 지금 우리와 같이 자정부터 하루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선 시각은 오전 6시였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사람들의 압박과 회유, 협박에 못 이겨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로마 시각으로 아침 6시에 예수님이 아직 빌라도 앞에 계셨다고 기록한 겁니다. 3시간 후, 아침 9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나고 촌극은 막을 내립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세 시간 동안 세 번 말씀하십니다. 먼저 주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사도 요한을 바라보시며 "네 어머니를 보라 네 아들을 보라" 하며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요한에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주님 곁에 매달려 있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딱 세번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얼굴에 조롱과 경멸, 비웃음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정오가 되자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말 그대로 빛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하늘 한가운데 정점에 태양이 타오르며 밝게 빛나고 있는 정오에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 겁니다. 해가 지고 달도 보이지 않습니다. 별도 보이지 않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 그 충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예고도 없이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워진 겁니다. 당시에는 전기도 없었고 심지가 있는 기름 등잔만 있었는데, 한낮에 그런 등잔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죠. 온 땅이 어둠에 잠긴 겁니다. 이 어둠이 어디까지 퍼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갈보리, 예루살렘, 혹은 유대까지였을까요?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흑암이 그 나라를 집어삼켰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 상황이 개기일식이라고 주장하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월절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고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일식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머리에 어둠의 권세를 행사하기 위해 사탄이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글쎄요, 누가복음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은 어둠이 임하는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왕국의 특징이 도덕적, 영적 어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 어둠도 있고 영적 어둠도 있지만 둘 다 갈보리가 어두워지게 만든 원인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종류의 어둠이지만 설명할 방법이 없는 어둠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만 가능합니다. 그런 어둠을 불러오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았을까요? "우와, 일식이다!"라고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유월절에는 보름달이 뜨기 때문에 그럴 수 없죠. "사탄이 나타났다!"라고 말했을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럼 뭐라고 말했을까요? 순식간에 완전한 어둠이 덮쳐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이 세 시간 동안 지속되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먼저는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겁니다. 언덕을 내려갈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데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빛이 없었습니다. 그럼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누군가는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실 때 낮에도 빛으로, 밤에도 빛으로, 즉 낮에는 빛의 구름으로, 밤에는 타오르는 불꽃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임재의 빛으로 내려오셔서 성막의 지성소에 거하셨고 성전에 거하셨으며, 시편 27:1에도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라"라고 쓰여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직접 자신을 빛과 연관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둠과 연관시키신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5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러 오셨을 때, 아브람을 축복해 주시면서 아브람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겠다는 언약을 맺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언약이죠. 그리고 그 언약을 피로 인치기 원하셔서 동물을 몇 마리 죽여서 반으로 쪼갠 다음 서로 마주보게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죽은 새는 쪼개지 않고 양옆에 두었는데, 이렇게 피투성이가 된 짐승 조각들을 마주보게 나란히 놓는 것이 고대에 사람들이 행했던 방식입니다. 피의 언약을 맺는 상징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언약을 맺을 당사자들이 피투성이 짐승 조각 사이를 지나는 것으로 언약이 체결됐습니다.
다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언약이었고, 아브람이 이행해야 할 조건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이 때 하나님께서는 어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심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출애굽기 10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둠과 함께 임재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하나님께서 어둠을 내리실 때 그 어둠이 느껴질 정도로 짙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7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6절은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라고 말합니다. 18절은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라고 말합니다. 20장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어둠과 짙은 구름과 연기와 함께 오셨습니다. 이사야 8장 22절에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초자연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어둠과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구름 몇 개가 태양을 가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하지만 이 어둠에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는데, 하나님의 어둠은 항상 심판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용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용어입니다. 여호와의 날. 신학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대문자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최후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간의 날이지만 곧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라는 뜻이죠.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최후의 심판을 내리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에는 심판과 함께 어둠이 임할 것입니다. 어둠은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엘서 1장 15절에 요엘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이어서 요엘 2장 10절입니다.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멸망입니다. 대재앙입니다. 너무 치명적이어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요엘 2장 마지막 절, 즉 30절은 여호와의 날이 어떠할지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요엘 다음 성경은 아모스이죠. 아모스 5장 20절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아모스 8장 9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꽤 구체적입니다. 스바냐 1장 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선지자들은 초자연적인 어둠이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뿐만 아니라 심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또 그냥 심판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온 세상이 순식간에 캄캄해진 그 순간, 촌극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몇 구절 뒤를 보면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물러간 후에 사람들이 언덕을 내려가며 슬픔과 두려움의 표시로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어둠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 언약때의 어둠보다 더 심한, 시내산의 어둠보다 더 심한 칠흑 같은 어둠,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의 어둠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마지막 어둠입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대에 새로운 배우가 등장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무대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이 아닌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갈보리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종말론적 심판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론적 심판을 내리시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갈보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육체적 고난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넘어서는 것이며, 여러분이 더 깊이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당시 갈보리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졌습니다. 영원한 진노가 곧 쏟아질 것이고 어둠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날 예루살렘에 지옥을 이르게 하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2절, 마태복음 22장 13절, 마태복음 25장 30절에서 예수님은 지옥을 "바깥 어두운 데"라고 부르며, 거기서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 울부짖고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어둠입니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예루살렘과 유대에 지옥이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로 나타나셨는데, 흥미로운 점은 그 진노가 로마인들을 향한 진노도 아니고, 유대 지도자들을 향한 진노도 아니고, 백성들을 향한 진노도 아니고, 바로 아들 예수님을 향한 진노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노를 온전히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사야가 이사야 13장 9절에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말이죠. 지옥이 이르렀습니다. 지옥이란 무엇입니까? 지옥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영원히 벌하시는 곳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히 진노를 쏟아 부으시는 곳입니다. 지옥 형벌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옥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곳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처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에서 영혼과 육체를 모두 파괴하십니다. 지옥의 왕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지옥에 있는 모든 영혼을 벌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벌하시기 위해 갈보리의 어둠 속에 나타나셨고, 모든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아들에게 영원한 지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던 잔입니다. 감람산에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시며 피할 방법은 없는지 물으실 정도로 심한 공포를 느꼈던 바로 그 잔입니다. 정오부터 3시까지, 그 세 시간 동안에는 어떤 촌극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비웃음도, 비아냥도, 희롱도, 신성 모독도, 조롱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예수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세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그 정반대입니다. 어둠은 완전한 심판과 복수, 분노로 가득 찬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한없이 의로우신 하나님이 무한한 진노를 쏟아내셔서 영원한 지옥을 감당할 수 있는 영원한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끝없이 형벌을 세 시간 동안 쏟아 부으신 겁니다. 주님은 바로 그곳, 즉 지옥에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짓밟히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세 시간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진노를 내리신 시간입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지내게 될 사람들은 결코 죄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지옥에서 영원히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시간 만에 믿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값을 모두 지불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는 무한한 존재이신 예수님만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랍습니다. 44절을 보겠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아홉 번째 시간이 되자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세 시간입니다. 오후 3시가 되자 빛이 돌아왔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3절입니다. "제육시가 되매”, 누가복음에도 동일하게 쓰여 있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 즉 오후 3시가 되자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학자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많은 연구와 토론을 했고 책도 많이 썼습니다. 제가 그분들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끝나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온전히 감당하신 후에 즉각적인 위로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셨을지 모릅니다.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즉각적인 사랑을 기대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더 이상 느끼지 않고 다정하고 친밀하게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위로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진노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리를 비우신 것이 아니라 진노를 쏟아부으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도 함께 떠나셨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말이죠.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이제 위로해 주셔야지요?"라고 말씀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심판이 끝난 후,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심판하시는 진노를 모두 감당하신 후에, 예수님은 다정한 위로를 기대하셨을지 모르지만, 그런 위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둠 이후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당연한 물음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곧바로 위로해주시지 않고 다정하게 교제를 나누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이 지옥의 마지막 고통인 것 같습니다. 물론 지옥은 죄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벌을 받는 곳이기에 굉장한 고통 속에 있겠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으며 아무런 위로도 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동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안도감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완전한 지옥을 견디셔야 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시면서도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위로의 부재! 이것이 바로 지옥이며, 지옥은 그날 갈보리에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이 지옥입니다. 지옥이죠. 구원이 없는 형벌이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아버지"보다 다소 무심하게, 애정이 덜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부르신 유일한 경우가 바로 여깁니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걸 나타내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한 애정을 잃으셨던 걸까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두 번 부르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10장 41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신 겁니다. 애정이 결여된 표현이었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망의 표현이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오히려 이것은 친밀한 표현입니다. 실망이 묻어나는 사랑의 표현이죠. 누가복음 20장 22절에서 31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며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시몬아, 시몬아." 사랑이 결여된 표현인가요? 아닙니다. 실망이 담긴 친밀한 표현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4절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사랑이 결여된 표현인가요?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역시 실망이 담긴 애정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아, 압살롬아"라고 말한 다윗과 다를 바 없는, 실망이 묻어나는 친밀하고 애틋한 표현입니다. 내 아들아. 실망이 담긴 애정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한 사람들, 주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실망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친밀하지만 실망이 담긴 표현입니다. 위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친히 견뎌내신 지옥입니다. 그리고 45절에서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가는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라고 놀랍지만 아주 절제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제육시부터 제구시까지 세 시간 동안이나 어두웠고 칠흑같이 캄캄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3시간 동안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더듬거리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애를 썼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 어둠이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유월절에 수만 마리의 양을 비롯한 짐승들을 도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제사장들이 성전에 모여서 피비린내 나는 도살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 즉 갈보리 언덕에는 올라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도시 한복판에 수십 수백만 명이 모여 있었는데, 3시간 동안 제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밝아진 후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였을 겁니다. 3시부터 5시까지가 유월절 양을 잡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양을 죽이기 시작할 무렵에,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께서 휘장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으시는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태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그냥 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의 가운데를 찢으셨습니다. 성전에는 휘장이 적어도 13개 있었는데요, 그 중 하나는 특별히 더 중요한 휘장이었습니다. 바로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휘장을 치라고 명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것도 속죄소에 피를 뿌리기 위해서 잠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모든 사람에게 닫혀 있는 곳이었지만, 3시 즈음 빛이 밝아올 그 때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라도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공식적으로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속죄입니다. 휘장은 출입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새 언약이 확증되었습니다. 새 언약이 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새 언약이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 하나님께서 휘장을 찢으시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후였습니다.
휘장이 찢어졌을 때, 성전은 더이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제사장들도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제사도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이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끝났습니다. 모두 그림자였고, 앞으로 일어날 일의 상징에 불과했기 떄문입니다. 제사장들이 죄를 없앨 수 없는 짐승을 도살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죄를 모두 해결하신 한 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휘장을 찢으시고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21장 6절에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전이 물리적으로 파괴될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성전 의식을 영적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성전의 모든 제도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완벽히 그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셨다고 말씀하시고 휘장을 찢으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을 보면, 1절부터 8절에 하나님께서 이곳을 어떻게 설계하셨는지 나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9장 후반으로 내려가서 11~14절에 이르면 갑자기 모든 것이 극적으로 바뀝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확증이며,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9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4장 16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찢으셨고 모든 일이 완성되었습니다.
한편 같은 순간이 마태복음 27장 5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이것은 바위가 터질 정도로 강력한 지진을 말합니다. 우리는 남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지진은 바위를 쪼개는 강력한 지진입니다. 그게 진도로 따지면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의 지진이 일어났다면 아마 예루살렘이 멈췄을 겁니다.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날은 상당히 무서운 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지진을 무엇과 연관지었을까요? 구약의 선지서들을 보면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19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8편 7절에는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주변이 암흑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지진, 즉 땅이 진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시편 68편 8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그리고 선지자 나훔은 예언서에서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라고 썼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진 속에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최후의 심판이 있을 때에 세상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 유대인, 로마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진노였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자리에 계십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임하는 곳에 계셨고, 또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어둠과 지진은 부정적인 것을 나타내지만 그 심판의 긍정적인 결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긍정적인 영향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정말 놀랍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제와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휘장을 찢으시고,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죽은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모든 사람의 첫 열매임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나왔고, 부활한 사람들은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증거했습니다. 대단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 나타나셨고 또한 구원 가운데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심판과 우리를 위한 구원이었습니다. 모든 진노는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모든 진노가 그리스도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둠이 걷히고 지진이 그치고 휘장이 찢어진 후 예루살렘의 혼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겠지만,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는 고요한 평온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은 이 순간 태풍 한 가운데에 있는 태풍의 눈과 같은 존재입니다. 완벽한 고요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제 끝났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가져가셨습니다.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달콤하고 고요한 평온 속에서 주님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놀랍도록 인간적이십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모든 것을 온전히 겪으시기 위해 끝까지 아무것도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끝났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항아리가 거기 있었는데, 사람들은 나뭇가지에 거의 식초와도 같은 신 포도주를 스펀지에 가득 담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개를 숙이셨고 영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떠나기 직전의 상황을 누가복음 23장으로 돌아가서 살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다 이루었다"라고 승리를 선포하시고, 영이 떠나가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셨다고 누가복음 23장 46절에 나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과 마가복음 15장 37절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보통 질식으로 죽어가기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산소도 부족하고 힘도 없었기에 간신히 속삭일 수 있을 정도였을 것이고, 심한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그 누구도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주님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온 힘을 다해 심장이 터지도록 외치셨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모든 유대인들은 그 말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시편 31편 5절의 기도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구절입니다. 유대인들의 저녁 기도문입니다. 잠들기 전에 하는 기도문입니다. “하나님, 이제 잠자리에 듭니다. 내가 나의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번역만 다를 뿐이지 원어로는 똑같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유대인 모두에게 아주 익숙한 기도문입니다. 매일 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기도에 두 가지 변화를 주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아버지"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다정한 교제가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세 시간 동안 지옥이 갈보리 언덕에 이르렀다가 사라졌습니다. 형벌이 끝났습니다. 고통이 끝났습니다. 아버지와의 다정한 교제가 이제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문에서 빼신 것도 있습니다. 원래 시편 31편 5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십자가에서 속량받은 분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속량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정말 정확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려주기 위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속량받는 대상이 아니시기 때문에 속량받는다는 부분은 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속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31편을 빌려오셨을 뿐입니다. 시편 31편은 고난을 받아 고통 가운데 있는 의인의 고백이 담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내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내 생명을 주님께 맡기는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고 죄가 없으신 의인이셨지만 고난을 받으셨고, 죽으시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사랑과 약속을 완전히 신뢰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저주하지 않으시고 미쁘신 창조주께 그 영혼을 맡기셨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 전에 예수님의 이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를 빌려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는 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기록한 후에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굉장히 단순하지만 절제된 표현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유월절 어린 양을 죽이셨고, 그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일단 47절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어떻게 했다고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요? 신약성경의 모든 축도는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성도들과 함께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이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이렇게 찬양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바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견디시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신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너무나도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과 아버지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행하시옵소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그 감사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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