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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누가복음 연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24장, 우리 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록입니다. 오래도록 기다렸던 바로 그 부활입니다. 오늘 설교는 흥미로운 모험이 될 겁니다. 왜 모험인가 하면 사복음서에 기록된 부활의 내용, 형식, 문체가 서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이 기록을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 부활이라는 사건이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각자의 관점에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가 모두 같은 부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특별한 강조점이 서로 다르고, 모두가 다룬 내용일지라도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세부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잘 엮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이 부활이라는 이 다면적인 사건을 잘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누가의 관점을 중심으로 해서 부활에 관한 기록들을 하나로 엮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중심이 되는 사건입니다. 복음의 주춧돌이자 기초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을 보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존재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해지는 메시지는, 죽음은 기껏해야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일 뿐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빌리면, 모든 사람은 그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해서 영원히 살게 되는데, 누군가는 생명의 부활을, 누군가는 심판의 부활을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영원히 살게 되는데, 영원한 기쁨 속에 사느냐 영원한 고통 속에 사느냐로 나뉜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요 구원의 왕국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끝없이 영원한 기쁨을 누리기에 적합한 부활의 몸을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구속사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소망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망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죠. 모세의 소망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욥의 소망이었고, 이사야의 소망이었으며, 다니엘의 소망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 백성의 소망이었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한 시편 기자나, “비록 벌레가 이 몸을 해칠지라도 나는 육신으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한 욥이나, 이 약속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 백성의 소망이었고, 언제나 믿음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 소망이 요한복음 14장 19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더욱 확실하고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중심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이 한 사람은 아담이죠, 계속 읽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사람들은 늘 부활을 기대했습니다. 그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한 오순절 설교는 부활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전부 살펴볼 시간은 없지만,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이어 베드로는 시편을 인용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하지만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가 하나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셨고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았느니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16편 말씀대로 예수님을 살리시고 높이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는 모든 사람들의 첫 번째 열매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부활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설교의 일관된 주제입니다. 사도행전 4장 8절에서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여 병 고침 받은 사람에 관해 말했습니다. 8절입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너희는 모두 다 알라." 10절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반복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두세 개 정도만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13장으로 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사도들의 또 다른 설교가 있습니다. 서신서의 분명한 주제도 부활입니다.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고, 우리가 그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골로새서 2장, 베드로전서 1장도 그렇습니다. 부활은 모든 사도들의 설교와 기록의 주제입니다. 나머지 신약성경도 부활의 실재와 부활의 능력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복음서를 기록한 네 명 모두가 부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활이라는 놀라운 진리와 그 진리가 미치는 영향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대신에 그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보상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서 은혜를 입은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부활에서 은혜를 입은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장을 보면 전체가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왜일까요?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분명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을 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곧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만약 죄의 삯이 치러진다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의 삯을 완전히 다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죽음은 단지 열린 문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문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갑니다. 말씀드렸듯이, 누가복음에 모든 세부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없는 내용도 있는 반면에, 다른 복음서에는 없지만 누가복음에만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제 이 부분을 모두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는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누가가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복음서 기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각자의 주제와 의도에 부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했습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에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사도행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는 정확한 증거들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여러 차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40일 동안이나 가르치신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몇 가지만 기록했습니다. 또 우리가 알듯이 누가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아는 것들을 누가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바울 또한 누가가 기록하지 않은 몇 가지 사실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5장 5절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것과, 7절에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신 일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감동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신 내용들만 기록했습니다. 주제에 어긋나지 않는 것들로만 말이죠. 그리고 다른 복음서들과도 훌륭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 어떤 모순도 없습니다. 그 어떤 불일치도 없습니다. 동시에 정보를 허위로 조작하거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합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어설프게 짜맞추려는 인위적인 노력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들이 하나의 공통된 자료를 베껴서 썼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각각의 저자들이 기록한 방식은 아주 자연스럽고, 훌륭합니다. 개인적이고, 꾸밈이 없고, 작위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짜맞춰 하나로 합치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저자들이 서로 완벽하게 일치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라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연스러운 의미라는 관점으로 보면 사복음서는 서로 조화롭게 잘 어우러집니다.

네 저자가 공통적으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예수님이 정말로 죽으셨다는 겁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이죠. 둘째로,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사흘째 되는 일요일 아침에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또한 중요한 사실입니다. 천사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해 주었다는 것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목격자가 여인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사도들과 남자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에 따라서 세부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중요하게 기록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셨고, 일요일에 무덤이 비어 있었으며, 천사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줬고, 여인들이 첫 번째 목격자였으며, 남자들은 믿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것들이 부활의 확실성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하면서도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제가 방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내용들을 이번주와 다음주에 걸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복음서 모두에 공통적으로 이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무엇입니까? 실제 부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찾아보시면 없을 겁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부활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부활에 관한 어떤 묘사도 없습니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셨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어떻게 부활하셨는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제 말씀드린 개요를 바탕으로 해서 누가복음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나머지 세 복음서도 함께 살펴볼 겁니다. 여러분, 저를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이제부터 사건의 순서를 여러분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드릴 텐데 집중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놓치시면 안 됩니다. 자, 우선 본문을 제가 언급한 중요 부분들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이미 다루었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심장이 파열되어서 그 피가 심장을 에워싸고 있는 심낭에 들어 있는 심낭액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는 뜻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셨다는 충분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 후에 봉인까지 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죽은 사람으로 다뤘습니다.

그런데 부활에 있어서는 네 명의 저자 모두가 언급한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빈 무덤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누가는 확실하게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돌이 굴려 옮겨져 있었고, 한 무리의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 여인들이 빈 무덤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날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한 날이 금요일이었으니까, 토요일은 하루 종일 무덤에 계셨고, 일요일에도 상당한 시간을 무덤에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그 전날 밤 6시에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예언에 관해서는 지난주에 마태복음 12장 40절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당시 유대인들은 요일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이런 이름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숫자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날을 안식일과 관련해서 계수했습니다. 한 주간의 첫날은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는 일요일이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후로는 삼일째 되는 날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갔던 때는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 새벽이었지만, 당시 하루는 그 전날 해질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요일 새벽이라 함은 일요일이 시작된 지 거의 12시간 정도 지났을 때인 겁니다.

그 일요일이 바로 예언된 그날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요일이 교회의 새로운 예배일이 된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은 합법적인 마지막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기자들이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안식일은 더 이상 지켜야 하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 규정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음식에 관한 율법이 사라졌듯이 안식일 규정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엄격히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안식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의 교인들에게 “더는 절기나 월삭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던 그 때의 토요일이 합법적으로 승인된 마지막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순간부터 일요일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말하는 주의 날, 주일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에 "교회가 안식 후 첫날에 모였더니”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는 “매주 첫날에 너희가 모일 때, 너희의 연보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셋째 날이 바로 안식 후 첫날입니다. 이 첫날이 이제 교회를 위한 예배의 날입니다. 저는 여기에 아주 큰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날, 일요일에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로서 주님을 계속해서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정말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 하루 전체를 주님께 드린다는 그런 생각이 참 좋습니다. 우리 교회가 일요일 오전과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 참 좋은데,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주님의 날, 주일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일에 뭐든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토요일 밤에 한 시간 짜리 예배를 슬쩍 끼워넣는 그 추세가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으로 갔습니다. 왜 갔을까요? 여러분, 23장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따라서 무덤까지 갔습니다. 이 여인들은 여전히 충격을 받은 상태로 아직 정신이 없었습니다. 가장 섬뜩하고 끔찍한 일을 겪었습니다. 자신들이 믿었던 주 예수님이 체포되어서 매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고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향품은 35킬로그램이나 됩니다. 여인들은 정신이 없는 상태로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여인들도 그 일을 함께 하기로 합니다. 56절을 보면 예수님의 시신이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보고, 여인들이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인 금요일 밤에 되돌아갔습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그 일을 바로 다시 시작하지는 못했습니다. 안식일에는 계명을 따라 쉬었습니다. 마지막 안식일을 지킨 겁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향품을 준비했고,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다시 돌아왔던 겁니다. 1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제 짐작으로는, 새벽이란 말은 동이 트는 새벽녘일 겁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조각들을 하나씩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이 시기에 관해서 마가는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였다고 하고 마태는 첫날이 되려는 새벽이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해가 뜨는 순간을 새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서 아직 어둡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결국 이 모든 기록들을 하나로 합쳐보면 사복음서 저자 모두가 분명히 새벽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점이 앞에서 제가 언급한 내용을 잘 보여줍니다.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조작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자들이 하나의 자료를 공유해서 세부적인 모든 사항들까지 다 일치하게끔 열심히 짜맞춘 게 아닙니다. 저마다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마치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보이는 일출같이 말입니다. 해가 동쪽 사막에서 떠올라서 아직 산을 넘지 않았을 때는 해의 윤곽만 보이지 않습니까? 해가 떠올라서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 동쪽으로 향할 때까지, 감람산 서쪽 뒤편은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관점에서 보면 어두운 때였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해 돋을 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새벽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어두웠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감람산 꼭대기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나서야 예루살렘에 새벽 빛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요한이 약간 독특하게 기록해서 그런지 더 흥미롭습니다. 요한은 아직 어둡다고 했습니다. 다른 저자들은 모두 해가 떴고 새벽이 왔다고 했지만, 요한은 아직 어둡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잠깐 보면, 요한이 기록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이미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갔습니다. 이 부분을 제가 왜 읽었을까요? 왜냐하면 이 ‘한 여인’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의 경험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만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왔습니다. 그리고 옮겨진 돌을 보았습니다. 아직 무덤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옮겨진 돌만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추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고, 혼자 베드로에게로 달려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혼자 말입니다.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서 없어졌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베드로에게 알린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아마도 베다니에 있었을 겁니다.

요점은 이겁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 갔다고 기록한 반면에,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 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이자 글로바의 아내인 또 다른 마리아와 동행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여인, 즉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이자 글로바의 아내로 알려진 마리아가 이른 새벽에 함께 출발했습니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어렸을 겁니다. 또 다른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을 보면 이 여인들이 함께 무덤에 갔다고 합니다. 누구입니까? 23장 55절로 돌아가보면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로서 한 무리의 여인들입니다. 누가는 이처럼 24장 도입부분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곧이어 10절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언급합니다.

종합해보면 아마 이런 일들이 있었을 겁니다. 여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러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도 함께 갑니다. 이 두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보다 더 빨리 갔는데 아마도 더 어려서 그랬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인들은 어둠 속을 줄지어 갔습니다. 두 마리아가 함께 무덤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절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다른 여인들보다 앞서서 ‘맨 처음으로’ 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고 막달라 마리아만 언급합니다. 이는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앞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설명에 의하면, 마리아는 제일 먼저 혼자서 무덤에 도착합니다. 아직 어두웠지만 무덤 가까이에 이르러 돌이 굴려 옮겨진 것이 보일 만큼은 밝았습니다. 마리아는 방향을 돌려 다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분명히 봤습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한 첫 번째 여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왔던 또 다른 마리아가 뒤쪽 어딘가에서 오고 있었고, 아마도 또 다른 여인들도 어둠 속에서 뒤따라오고 있었을 겁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열려 있는 무덤 입구는 봤지만 무덤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즉시 그곳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을 만났다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다른 길로 갔을 겁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베드로와 요한과 사도들에게로 가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추측한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때, 요한이 아직 어두웠다고 말한 그 때는 가장 어두웠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처음으로 무덤에 왔고, 그 뒤로 다른 여인들이 오고 있는 동안에 점차 더 밝아졌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른 저자들이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를 누가처럼 "새벽에", 또는 "해 돋을 때에"라고 한 겁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시간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에 간 여인들 중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마리아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에 나오는 다른 여인들도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여인들도 마리아와 똑같은 광경을 발견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무덤에 갔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갔죠. 이제 다른 여인들도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발견합니다. 이 광경에 여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따르면, 여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가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인들은 금요일 밤에 예수님이 무덤에 안치되셨을 때 그곳에 있었고, 요셉과 니고데모가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았습니다. 여인들은 돌이 무덤 입구를 막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입구에서 돌을 굴려 줄까?’ 하며 서로 물었던 겁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이처럼, 여인들은 무덤으로 가는 도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드디어 무덤에 가고 있어. 금요일에 준비한 이 모든 향품으로 우리 할 일을 하는 거야. 주님을 향한 사랑을 담아서 주님의 몸에 바를 거야. 그런데 돌은 누가 굴리지? 우리 힘으로는 택도 없는데.”

이 내용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았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6절은 아리마대 요셉이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그 돌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아무 대책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인들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향품을 준비한 이튿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태복음 27장 62절을 보겠습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여인들은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고는 거짓으로 부활을 조작할지 모른다고 우려한 유대인들이 토요일에 빌라도에게 가서 무덤을 지키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대로 경비병을 얻어냈습니다. 무덤이 열리지 못하게 로마 방식으로 인봉했습니다. 무덤 앞에는 경비병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돌만이 유일한 장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비병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자 흥미롭게도 경비병들이 없었습니다. 사복음서 어디에도 여인들이 경비병을 만났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어디로 간 걸까요? 글쎄요, 마태복음 28장으로 돌아가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토요일에 유대인들이 경비병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아직 캄캄한 이른 새벽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28장 2절입니다. "큰 지진이 나며." 이것은 두 번째 지진입니다. 금요일에 바위가 쪼개지고 무덤들이 열릴 만큼 큰 지진이 있었죠. 계속 읽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여인들이 돌아가고 없는 동안 무덤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토요일에 경비병이 배치되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천사가 돌을 굴려내자 지키던 자들이 놀라서 거의 실신 상태가 되었습니다. 천사는 예수님을 나오시게 하려고 돌을 굴려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덤에 들어갈 수 있게 하려고 굴려낸 겁니다. 예수님은 벽을 통과하실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실제로 벽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렇죠? 문이 닫혀 있는데, 예수님이 사도들 앞에 나타나신 사건, 여러분 기억하시죠?

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우선 말씀드려야 할 것은 벌어진 일이 아주 확실한 일이었다는 겁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경비병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여인들은 ‘여기에 경비병이 왜 서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큰 지진이 일어난 그 일요일 새벽의 깊은 어둠 속에서, 경비병들은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습니다. 무덤 입구에서 옮겨진 돌, 번개같이 빛나는 천사들의 형상, 강력한 지진이 남긴 흔적들을 봤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경비병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겁니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초자연적이지는 않더라도 강력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허둥지둥 달아났습니다.

경비병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거기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경비병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무덤 안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돌아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왔을 때는 이처럼 경비병들이 그곳을 떠난 다음입니다. 경비병들이 이미 떠나고 없는 겁니다.

경비병들이 보고한 내용은 잠시 후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고, 지금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 봅시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도착했지만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았고 치워진 돌만 보았습니다. "오 이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어!" 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몸을 돌려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알립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반신반의하면서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직접 가서 확인하고자 무덤을 향해 출발합니다.

이로 보건대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을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겁니다. 전혀 머릿속에 없었습니다. 직감에 따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요한이 더 어렸으니까 더 빨리 달렸을 것이고 무덤에 먼저 도착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하고 있다구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새벽에 여인들은 이미 무덤에 거의 다 도착했고, 남자들은 아직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습니다.

이제 다른 여인들과 함께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들어가 봅시다. 3절입니다.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 결론을 내린 성급한 막달라 마리아와는 달리, 이 여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추측하기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신이 없어졌다면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간 게 분명합니다. 죽은 사람은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죠. 죽은 사람이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반드시 누군가가 옮겼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결론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광경을 아름다우면서도 짤막하게 설명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설명입니다.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의 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의 시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란 칭호는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묘사하는데 쓰인 칭호가 아닙니다. 주 예수란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예수님을 주로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오순절에 말한 내용이 바로 이겁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이제 주님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자, 그럼 이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경비병들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떠난 겁니다. 시신이 아직 무덤에 있었다면 여전히 시신을 지키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여인들과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아예 경비병을 보지 못했습니다. 경비병들이 떠나버렸으니까요. 왜 떠났습니까? 무덤에 시신이 없었기 때문이죠. 여인들이 둘러봤지만 거기서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무덤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고, 봉인되어 있었고, 누구도 와서 시신을 가져갈 수 없도록 감시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친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마리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시신을 훔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일어난 일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경비병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경비병들은 지진과 함께 나타난 번개같은 천사들의 형상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에 와서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뭔가 아주 강력하면서도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경비병들이 말한 내용을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28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경비병들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돌아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11절입니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경비병들이 정확히 뭐라고 했다고 합니까? 일어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정말로 아주 강한 지진이 일어났는데, 번개같이 밝게 빛나는 어떤 존재가 돌을 굴려 냈습니다. 저희는 그 때 정신을 잃다시피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경비병들은 일어난 일 그대로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봅시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뭐라구요? 여러분 같으면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시겠어요? 유대 지도자들은 돈을 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자는 동안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했다'고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웃기는 이야기죠. 사실 경비병들로서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 군사가 근무 중에 잠을 자면 군법에 회부되는 것 이상의 처벌을 받습니다. 처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거짓말을 하라는 겁니다. 만약 이 거짓말이 총독인 빌라도, 모든 군사들의 총사령관인 빌라도의 귀에 들어가면, 자기들이 곤경에 처할 것이 뻔하다는 것을 경비병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이 “우리가 빌라도를 설득하고 너희에게 아무 문제도 없게 해주겠다. 처벌을 받지 않도록 뒤를 봐주겠다"라고 말한 겁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유대 지도자들이 시키는 대로 말했습니다. 그 말이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로마 경비병들은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대가로 뇌물을 받았으니까요. 유대 지도자들도 거짓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대가로 뇌물을 주었으니까요. 무덤은 분명히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과 관련해서는 경비병들이 겪은 일 외에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경비병들은 대가를 받고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유대인들이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아주 쉬웠을 겁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빈 무덤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다가 일련의 형편없고 어리석은 이야기가 자신들을 얽어매고 말았습니다.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거짓말을, 그것도 정말 커다란 거짓말을 꾸며낸 겁니다. 유대 지도자나 유대 민족 중 어느 누구도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는, 가능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여인들도 남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시리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습니다. 유일한 설명은 성경 뿐입니다. 천사가 내려왔고, 돌이 굴려 옮겨졌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무덤에서 걸어 나가셨다는 것이 유일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빈 무덤만으로도 확신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요한만이 유일하게 확신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6절부터 8절에 따르면,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고, 거기 놓여 있는 세마포와 수건을 보았고, 믿더라”고 합니다. 요한 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충격에 빠져 있었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증거는 그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겁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무덤을 잘못 찾아간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무덤을 잘못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은 이미 금요일 밤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그 무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덤은 자신들이 인봉하고 지키게 한 무덤이기 때문이죠. 바로 그 무덤이 비어 있었고,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시체를 훔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 어떤 바보가 시신을 훔치고는 부활이라고 꾸며낸 거짓을 위해서 순교자로 죽겠습니까?

이 부활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두 번째 요소는 천사들의 말입니다. 4절부터 7절입니다. 여인들은 시신이 사라져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는 동안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4절입니다.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마치 군인들이 아직 거기 있을 때에 어둠 속에 와서 돌을 옮기던 천사 같으니.” 돌을 옮기던 천사와 똑같이 찬란한 모습의 두 사람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부활의 가장 위대한 첫 번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두 번째 위대한 증거는 신성한 계시입니다. 4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인들은 당황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도 모른 채 당혹스럽기만 했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그간의 모든 고난, 재판, 십자가, 이 모든 일들이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새벽이 밝아오는 빛과 그 빛으로 생긴 그늘 속에서 선 채로, 평생 겪은 일들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광경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그 여인들 중에 천사를 봤던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갑자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여인들 옆에 서 있었습니다. 요한은 두 천사로 묘사합니다. 천사는 인간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마가는 이 둘 중 하나를 청년으로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두 남자는 천사로,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청년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천사는 늙지 않기 때문에 청년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분명히 거기에는 두 천사가 있었는데, 아마도 신명기 19장 15절, 무엇이든 확실한 증거가 되려면 두 명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말을 하고 있는 천사만 언급합니다. 모두 “천사가 이르되”라고 표현합니다. 두 천사가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두 천사가 있었고 각자 따로 말했다고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천사들이 각각 따로 말했지만, 아마도 같은 내용을 반복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고요? 말에 약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천사들이 말한 내용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아마도 천사들이 매우 초자연적으로 말했기 때문일 겁니다. 천사들이 한 말을 여인들이 곧바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두 천사가 동시에 함께 말하지 않고 각자 따로 말을 했을 겁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천사들이 각자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이고,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은 거기에 두 명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한 겁니다.

여인들 입장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니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성경의 기록이 놀랍도록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각 복음서가 보이는 차이를 인위적으로 합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천사들은 같은 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여러 번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인들이 처음으로 천사들을 봤을 때, 누가복음 24장 4절에서는 천사들이 여인들 곁에 섰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다시 돌아왔을 때 천사들이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도 모순은 없습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천사들이 서 있었지만, 나중에는 무덤 안쪽 예수님의 시신이 있었던 곳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천사들은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처럼 눈부신 모습,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영광으로 임하는 성도들의 빛나는 모습, 천국 영광 그 자체를 반영하는 눈부신 옷을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신성한 사자였음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젊은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처럼 보이는 천사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진짜 천사였는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비록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났을지라도, 눈부시고 찬란하며 광채가 나고 빛나는 확실한 천상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겁에 질려 놀라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했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것이죠. 헬라어로는 ‘엠포보스’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포보스’라는 단어의 강조형으로서 공포증, 두려움, 공황, 공포… 이런 말이 여기서 유래됐습니다.

심지어 천사들의 말을 들은 후에도 여인들은 계속 두려워합니다. 마가복음 16장 8절을 보면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이사야의 경험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주님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던 경험 말입니다. 천사들 앞에서 일종의 영적 혼수상태에 빠졌던 에스겔의 경험과도 비슷합니다. 또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영화롭게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던 요한의 경험과도 비슷합니다.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던 제자들의 경험과도 비슷합니다. 여인들은 몹시 놀라 겁에 질려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무덤에서 도망칠 때 날이 밝아옵니다. 마태복음 28장 8절입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여인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방금 천사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자, 사도들에게로 달려가는 이 여인들에게 큰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덤으로 오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도착할 때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빨리 알리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겠지만, 그 시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십시다. 4절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거룩한 임재 앞에서 저절로 엎드러지는 모습입니다. 여인들은 자신들이 천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천사를 통해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천사들의 말이라는 점이 정말로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사들의 말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부활에 관해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증거입니다. 5절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일종의 부드러운 꾸짖음입니다. 살아계시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살아계신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6장 9절은 사망이 다시는 예수님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천사의 말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첫 번째 선언입니다. 왜 살아 계신 예수님을 여기서 찾고 있느냐? 생명이신 분, 죽지 않으시는 분, 죽음이 붙잡아 둘 수 없는 분을 왜 여기서 찾느냐? 그리고 나서 천사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6절입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헬라어로는 ‘에게르테’ 인데요, 수동태로서, 직역하면 예수님이 ‘일으킴을,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빈 무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거룩한 하나님의 사자들의 증언입니다. 오류가 없고, 권위있으며, 반박할 수 없는, 약속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천사들은 이 말을 함으로써 여인들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세 가지입니다. 넘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살아나리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천사들의 말은, 부활이 갑자기 뜬금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드러운 책망이라고 말을 한 겁니다. 어찌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부드러운 책망입니다. 예수님은 오랫동안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갈릴리에 계실 때인 누가복음 9장 22절을 보면,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9장 43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실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여러 차례 동일하게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또 한 번 나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렇게 말한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희에게 이르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느냐?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거라고 하지 않으셨느냐? 십자가에 못 박히실 거라고 하지 않으셨느냐?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거라고 하지 않으셨느냐? 넘겨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은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부활 외에는 다르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적들에게는 시신을 훔쳐서 부활했다고 조작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시신을 훔칠 리가 없었고, 거짓으로 부활을 조작하고 이 날조된 거짓말을 위해서 순교자로 죽었을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천사들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설명을 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았던 것은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확실한 증거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빈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먼저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로마서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에베소서 1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골로새서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요한계시록 1장입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성경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첫째, 부활의 역사적인 증거를 부인하는 겁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겁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서 2장 2절에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하듯,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증거가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죄를 사랑하는 완악한 마음 때문에 거부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악마의 교리들은 악에서 나온 겁니다. 사람들은 부활의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결과, 즉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주님, 즉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부활을 부인하는 게 더 낫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주님이시며 성경은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장 큰 부활의 증거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사들을 통해, 신약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영을 통해 반복된 증거입니다. 누가복음을 주석한 노벌 겔덴하이스라는 신학자가 정말 멋진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신약성경은 결코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절대로 기록되지 않았을 겁니다. 계속 읽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메시아 됨과 신성에 관해서 엄청난 주장을 했지만 결국 그토록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은 사람에 불과하다면, 누가 그런 사람의 전기를 쓰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찬양받기 합당하시며, 예수님은 정말로 부활하셨다. 바로 이것이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열정과 거룩한 확신을 갖고 펜을 든 이유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신성한 권능과 영광을 받으셨다고 확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여인들은 아직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아마 일주일 동안 그런 상태로 있어야 할 겁니다. 아직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귀중한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옵소서.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을 믿음으로 죄와 죽음과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부활을 고대하게 하옵소서. 모든 심령 속에서 주님의 일을 행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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