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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누가복음 24장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4장 1절부터 1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누가의 관점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겠습니다. 잘 들으시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누가가 설명한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어떤 이야기의 결말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마지막에 일어난 일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사셨던 목적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사셨던 목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사셨던 이유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날부터 교회는 언제나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일요일에 모이기로 했습니다. 한 주의 첫째 날이자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인 일요일에 모여서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면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기로 했습니다. 부활 사건 이후로 교회는 금요일에 모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일요일이 금요일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인 부활주일은 성 금요일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하고, 입증하셨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한낱 무의미한 죽음에 불과합니다.

부활이 전부입니다. 부활은 복음과 구원의 필요성을 입증합니다. 복음의 목적은 단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서 영생을 얻어 영원토록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완전한 거룩과 기쁨을 누리면서 말이죠. 육체의 부활은 기독교에만 있는 핵심 진리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여러분을 그저 세상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또 기독교 복음은 우리 영혼을 모호하게, 불분명한 방식으로 계속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은 여러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적 존재로 남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님이 어떤 영향력이나 영적인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어떤 점에서는 지금 우리 몸과 비슷하지만, 모든 죄악과 죽음에서 벗어난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부활의 몸과 같은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겁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에는 이런 메시지가 없습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힌두교에도 육체의 부활은 없습니다. 단지 다른 어떤 형태로 반복해서 다시 태어나면서 돌고 돈다는 윤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육체의 부활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영광된 부활의 몸을 입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서, 기쁨과 평강 가운데 예수님을 섬기고 경배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기독교는 육체의 부활을 약속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몸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부활의 몸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죄나 악은 전혀 없습니다. 불완전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형태의 육체가 됩니다. 그런 몸의 예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었습니다. 흉터도 있었습니다. 부활의 몸으로 예수님은 음식도 드셨고, 걸으셨고, 말씀하셨고, 생각도 하셨고, 들으셨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행동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중요성을 함께 들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복음 전파는 헛것이며, 신약성경도 헛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도 완전히 없어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을 것이며, 우리가 전파하는 모든 것은 거짓과 속임수일 뿐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신약성경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도 헛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이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복음서 모두에 이 기념비적이고 유례없는 사건,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인 부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은 부활 전파 역사의 기록입니다. 사도들, 선지자들, 전도자들과 사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전파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런 역사의 기록입니다. 이어지는 서신서는 부활의 의미를 자세히 전해줍니다.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 위대한 사실을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전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 속에서 우리가 부활한 모습으로 살게 될 곳이 어디인지 알려줍니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부활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전파됩니다. 그런 후에 부활은 자세히 설명되고, 적용되며, 마침내 요한계시록에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자, 이제부터 부활의 네 기록, 즉 신약성경의 저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부활에 관해 쓴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기록들에는 ‘암묵적인 조화’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암묵적 조화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조화를 말합니다. 이 암묵적 조화를 살펴보면 부활의 기록들이 결코 꾸며낸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어떤 위원회가 있어서 “자, 지금 여기 네 가지 다른 기록이 있는데,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어 아주 정교하게 일치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내용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둘러앉아서 모의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복음서에는 훌륭하고 자연스러운 요소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각 저자가 하나님의 영, 성령에 감동되어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기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우면서도 개인적입니다. 동시에 기록들 간의 암묵적인 조화가 존재합니다. 그 조화를 따라가면 우리는 전체적인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각 저자는 저마다의 강조점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독특한 부활의 요소들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네 가지 진리에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진리는 모두 부활의 타당성과 증거, 그리고 검증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들입니다. 첫째로, 빈 무덤입니다. 저자들은 모두 빈 무덤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둘째로, 천사들이 빈 무덤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천사들이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셋째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대화를 나눈 여인들의 목격담과 증언을 언급합니다. 넷째로, 사도들의 불신에 주목합니다. 빈 무덤, 천사들의 증언, 여인들의 증언, 그리고 사도들의 불신, 이 네 가지가 실제 일어난 부활의 핵심적인 증거입니다.

자, 지난주에 다뤘던 처음 두 가지 내용을 잠시 떠올려봅시다. 첫째, 빈 무덤입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이 여인들이 누구인지는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마가복음 16장 1절을 보면 여인들 중 또 다른 한 명은 살로메였습니다. 여인들은 아마도 대여섯 명 정도였을 겁니다. 그보다 좀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인들이 온 이유는 십자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죠? 그곳에서 여인들은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채로 예수님이 죽어가시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죠. 23장으로 돌아가 보면,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장사되실 때에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55절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여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피와 물이 나올 때에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되실 때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그리스도의 몸에 바르려고 백 리트라, 약 35킬로그램 정도가 되는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나타난 것도 봤습니다.

그러자 여인들도 그때서야 비로소 제자임을 드러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뒤쳐지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돌아와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23장 56절에 나와 있죠. 기억해야 할 것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 금요일이라는 겁니다. 그날 저녁 6시나 그보다 조금 늦게 안식일이 시작되는데요, 그때까지 여인들은 몇 시간, 어쩌면 한 시간 정도 남은 시간 동안 향품을 준비한 겁니다. 안식일 당일에는 준비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들은 안식일이 끝나는 일요일에 미리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이른 아침에 무덤에 다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한 겁니다. 그렇게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여인들이 다시 무덤에 갔습니다. 일요일 아침 이른 새벽입니다. 그런데 무덤에서 돌이 굴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인들이 오는 도중에 무덤에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 의논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돌이 무덤을 막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굴려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이 도착해 보니 놀랍게도 돌은 무덤 문에서 굴려 옮겨져 있었고, 무덤 안에 들어가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자, 그 날은 일요일 아침입니다. 한 주간의 첫날이자 예수님이 죽으신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신 겁니다. 이제 이야기를 종합해 보겠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인들은 아마도 약 2마일 그러니까 한 3.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베다니 어딘가에 있었을 겁니다. 다른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인 요셉과 야고보의 어머니이자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 이렇게 둘이 함께 아침에 무덤으로 출발합니다. 다른 여인들도 그 두 사람의 뒤를 따라서 갑니다. 가장 어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제일 먼저 도착합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따르면 아직 어두운 새벽에 무덤에 도착합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혼자였습니다. 왜냐구요? 요한이 기록하기를 막달라 마리아가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봤다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즉시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가서 다른 여인들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몸을 돌려 되돌아갔습니다.

새벽 어둠 속에서 다른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다른 길로 해서 돌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많았을 겁니다. 어쨌든 되돌아 갔습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 자신에게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고 알리려고 곧바로 달려왔다고 말합니다. 요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과 2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와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인들 중 그 누구도, 막달라 마리아도, 사도들도, 그 누구도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나서 직접 확인하기로 결정하고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러 떠났을 때쯤에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겁니다. 이제부터 그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여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해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놓여있는 수의만 발견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증언에서 알 수 있는데,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처음으로 무덤에 왔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려고 3.5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을 되돌아갔고, 그러는 사이에,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떠난 직후에, 나머지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합니다. 그 여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모릅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해줍니다. 마태복음 27장 62절에서 64절입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경비병을 세워서 무덤을 지키게 한 겁니다. 캄캄한 밤중에 무덤에는 로마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밤중에 경비병들이 있었는데, 마태복음 28장 2절에서 4절을 보면 그때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내려오는 동시에, 땅을 뒤흔드는 아주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경비병들이 천사를 봤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고, 눈부시게 빛나는 천사가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는 것을 봤습니다. 그 순간 무시무시한 두려움과 충격으로 죽은 사람처럼 되었죠. 하지만 지금까지 목격한 것은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경비병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사들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돌이 굴려 옮겨져 있었습니다. 분명히 무덤 안을 살피며 확인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 시신을 감쌌던 수의만 놓여있는 것을 봤습니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세마포가 시신을 감았던 모양대로 놓여 있고, 머리에 쌌던 수건은 따로 놓여 있는 것을 봤을 겁니다. 경비병들은 그 즉시 아직 어두울 때에 유대 지도자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1절부터 15절에서 그들이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전부 말해줍니다. 경비병들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저희가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감시했습니다. 무덤 입구는 분명히 돌로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시무시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지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 지진은 특정한 지역에만 한정된 매우 국지적인 지진이었을 겁니다. 또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지진이 일어나는 도중에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는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덤을 확인했더니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아주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절대로 아무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거짓말을 해야 하오.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말을 해야만 하오. 그렇게 거짓말을 해주면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겠소. 여기 돈이 있소.” 잠깐만요, 왜 거짓말을 지어냈을까요? 무엇을 은폐하려구요? 바로 진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저는 실상 유대 지도자들이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시체가 없어졌다는 말에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들을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자들을 듣게 하셨으며, 말 못하는 자들을 말하게, 걷지 못하는 자들을 걷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이나 어디에서나 그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한 번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런 기적들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조사한 적도 없습니다. 광범위하게 조사해서 이 기적이 가짜라는 것을 폭로하려고 시도한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계속되었고, 어디에서나 있었고,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확인이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아주 강력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경비병들의 경험을 전해 들었을 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을 지키던 로마 경비병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시체를 훔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폐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서 도리어 부활을 입증해주는 거짓말을 꾸며내고 맙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경비병에게 그 어떤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추가적인 조사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게 정말 흥미롭지 않습니까? “아니, 뭐라고 했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지진이 나고 천사가 내려왔다고? 눈부시게 빛나는 천사라고 했소?” 라고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경비병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가 뭔지, 본 사람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그 존재가 도대체 뭔지 알아보라고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뭐라고 했소? 무슨 일인지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유대 지도자들은 가장 큰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죽기를 바랐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다면 가장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는 겁니다. 그러니 실상을 제대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분명한 건 무덤은 비어 있고, 수의는 시신이 누워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다고 합니다. 시신이 수의를 통과해 빠져나간 것이 분명합니다. 수의는 시신이 누워있던 자리에 그 모양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그 누구도 시신이 있던 위치에 수의를 그대로 남겨두고 시신만 훔쳐가지는 않을 겁니다. 훔친 후에 빨리 달아나려면 무덤에 들어갔을 때 놓여있는 그대로 훔쳐가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습니다. 부활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자고 한 겁니다. 이 유대 지도자들은 지난 수년간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고 주장해온 많은 회의론자들이나 자유주의 비평가들보다는 훨씬 더 정직한 편입니다. 왜냐하면 시신을 훔쳤다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쳤다는 거짓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거짓말은 그럴듯 했습니다. 믿을 만도 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았고, 어떤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제대로 지켰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럼 당신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이오? 분명히 깨어 있었소? 도대체 어떻게 지키고 있었던 거요?”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더욱이 부활에는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습니다. 천사나 지진에 관해서도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은 강력한 증거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어설픈 학설 따위를 제시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글쎄, 예수는 아마도 기절했다가 스스로 걸어 나왔을 거야”라고 말입니다. 천만에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십자가에 여섯 시간 동안 매달려 찢긴 상처에서 피를 흘린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 너무 확실해서 군인들이 다리를 부러뜨리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옆구리를 창에 찔려서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시신이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지고, 옮겨지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서 며칠 있으니 예수님이 괜찮아지신 거라고 말하려는 겁니까? 그래서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아주 큰 돌로 막혀 있는 입구에 살짝 열려 있는 작은 틈을 노려서, 그걸 통해 돌을 무덤 안쪽에서 어느 각도로 밀어서 굴려낼 힘이 있었다는 겁니까? 웃기는 소리입니다. 거기다가 수의는 모두 그 자리에 놓아 두었다구요? 유대 지도자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경비병들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무덤 안을 살펴본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경비병들이 수의에 관해서도 보고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무엇보다도 수의에 관한 사실 때문에 요한이 부활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추측하건대 베드로도 빈 무덤과 함께 시신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놓여 있던 그 수의 때문에 부활을 확신했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므로 사복음서 저자 모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부활의 첫 번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부활이 아니라면 이 빈 무덤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두 번째 강력한 증거는 천사들이 전한 계시, 곧 천사들의 증언입니다. 4절에서 7절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이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다른 저자들은 천사들이 청년의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계속 읽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활의 증거이자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두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진실을 전하면서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고 선포합니다. 부활하셔서 여기 계시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의 증언은 빈 무덤과 함께 부활을 확증합니다. 사실에서 나온 증거이고 하나님의 계시라는 증거입니다. 이제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전하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증거를 보겠습니다. 세 번째 증거는 여인들의 증언입니다. 여인들의 증언… 여인들의 증언 역시 굉장합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이 아직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 말씀해 주신 것을 여인들로 기억나게 해 주었습니다. 8절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마지막 해의 사역을 위해서 유대에 계십니다. 그러나 갈릴리에 계셨을 때로 돌아가면,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에게 넘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8절에서 여인들은 그때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기억난 겁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세 번 이상 각기 다른 때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복음서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 자신이 죄인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며,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최소한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여인들은 이제서야 차츰차츰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천사들은 여인들이 부인할 수 없는 계시를 전했습니다. 여인들은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땅에 대고 거룩한 존재들 앞에 두려워하며 엎드린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듣고서, 여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약속과의 연관성을 떠올립니다. 그 순간 땅에만 새벽이 밝아온 것이 아니라 여인들의 심령에도 새벽이 환히 밝아왔습니다. 여인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서 돌이켜 밖으로 나갑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몸을 돌려 급히 달려갑니다. 어디로 갑니까? 9절입니다.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여기 열한 사도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자, 기억하십시오. 여인들은 돌아서서 무덤을 떠났습니다. 누가 무덤으로 향하는 중이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미 돌아가서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으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이제 막 돌아서서 달리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속을 살펴본 적이 없습니다. 수의나 천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떠나 출발합니다. 9절입니다.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그런데 잠깐만요, 돌아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십시오. 도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가가 왜 이 일을 생략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겠죠. 여인들이 돌아가는 중입니다. 마태복음 28장 8절입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거룩한 천사들 앞에 있을 때에도 똑같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큰”, 무엇이요? “기쁨”이 더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것이 여인들에게 분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인들은 달려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갔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보라." 마태복음 28장 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마치 “잘 있었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 이런 간소함이 참 좋습니다. 감탄할 만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땅이 또 다시 흔들리거나, 하늘이 갈라진다거나, 별이 떨어진다거나, 사람들이 나팔을 분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안하냐”고 물으실 뿐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고 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빈 무덤을 보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의 계시를 들었고, 드디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여인들의 기쁨이 다시 두려움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날 보게 될 거야. 갈릴리에서 보게 될 거야. 실은 그 전에 보겠지만, 갈릴리에서 다 함께 모였으면 좋겠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은 지금 열한 사도들에게 알려주려고 돌아가는 중입니다. 열한 사도란 열두 사도를 대신해 부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열두 명이 아닌 열한 명이어도 사도가 공식적인 직분이니까 모든 사도를 칭하는 말로 열한 사도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무덤으로 가는 길에 있으니까 거기에는 지금 아홉 명만 있습니다. 여인들은 돌아가는 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사도들에게 “어서 가서 확인해 보세요”라고 말해주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경험입니다. 어쩌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한 가장 최초의 목격자가 여인들이라는 게 좀 이상한데요?” 그럼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죠. “그건 여성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닐까요?” 글쎄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먼저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여성을 높이 평가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된 이유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서서 지켜보던 사도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몇 명이요? 한 명, 요한뿐입니다. 한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증거로 인정되려면 두세 사람의 증언으로 확증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목자가 죽임을 당할 때 흩어진 양들이었습니다. 그렇죠? 사도들은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최초의 목격자가 여인들이라는 사실은, 여인들의 사랑과 용기, 고귀함에 대한 놀라운 증표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여인들만이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되신 것과, 다시 사신 것을 본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들만이 목격자로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요한 외에 예수님의 죽음을 본 남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증하는 장례를 본 남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이 증인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전부 다 본 목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죽고 장사되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습니다. 진짜로 죽고, 진짜로 장사되고, 진짜로 부활했다는 증언을 해야 하는데 여인들은 그 모든 것을 다 봤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죽는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죽으셨다는 것을 여인들은 알았습니다. 어떻게요?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요? 로마 군사들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서 피와 물이 쏟아지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요? 장사되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인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도 아는데, 살아계신 예수님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이 모든 일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알립니다. 열한 명 중 아홉 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비록 열한 명이긴 해도 공식 명칭은 사도입니다. 그리고 거기 있던 다른 모든 신자들, 거기 있던 제자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는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인 두 제자들, 즉 사도들과 함께 있던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도 알립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10절은 매우 흥미롭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이러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인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그 여인들과 합류해서 같이 있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들은 것은, 무덤에 가서 빈 무덤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막달라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고 결론을 내렸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고 자신의 결론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막달라 마리아가 이 여인들의 무리에 합류했을까요? 이 점에 관해 누가는 간단히 요약만 했습니다. 어떻게 여인들과 합류하게 되었는지는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천사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목격자의 무리에 속할 수 있었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들이 말하기 전이나 또는 천사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무덤을 떠났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답은 이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또 다시 간 겁니다. 요한복음 20장 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이제 천사들은 안쪽에 앉아 있습니다. 이 광경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의 서로 다른 광경입니다. 지금 이 광경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서만 보는 겁니다. 그리고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빈 무덤을 살펴보고 있는데 천사가 말을 걸면서 “아가씨, 왜 울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대화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전히 자신이 내린 결론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왜 알지 못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눈물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인 그때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천사들이 했던 것처럼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이건 정말 어리석은 말입니다. 동산지기가 왜 무덤에서 시체를 훔쳐내려고 하겠습니까? 이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이 저는 참 좋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마리아는 아마도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고 매달렸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제가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마리아야, 이제 가서 제자들에게 나를 봤다고 전해라. 나는 살아 있어 잠시 머물 것이지만 여기에 날 붙잡아 둘 순 없단다. 난 하늘로 올라갈 거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거란다. 하지만 잠시동안 갈릴리에서 너희 모두를 만날 거야.” 실제로 예수님은 그날 밤에 제자들을 만나셨고, 그 다음 일요일 밤에도 만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에도 여러 번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라”고 말씀하셨고, 놀랍게도 18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합니다.

이제 감이 잡히십니까? 여기에 여인들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고 뛰어오느라 숨이 차 있는 여인들입니다. 그리고 아홉 명의 남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세요. 살아계신 예수님을 봤어요. 저희에게 “평안하냐”고 물으셨어요. 저희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어요. 천사들도 봤어요. 천사들은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전해줬어요. 이건 예수님이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일이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어요. 그렇게 하실 거라고 말씀하시고 정확히 그대로 하신 거예요.” 그러자 이 아홉 명의 남자들이 "자, 자, 좀 천천히, 한 번에 하나씩 말해봐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여인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두가 똑같은 말을 합니다. 아홉 명의 사도들은 그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분명히 숨이 막힐 듯이 놀랐을 겁니다. 이렇게 모든 대화가 진행되는 중인데, 그 자리에 막달라 마리아가 나타났습니다. 급히 달려왔기 때문에 아마도 숨이 찼을 겁니다. “제가 주님을 봤어요, 주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빈 무덤과 수의를 봤고, 천사의 계시를 들었으며, 직접 예수님을 만났고 경험한 마리아가 이제 전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도 다른 모든 여인들이 겪었던 것과 동일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세 증인 중 한 사람에 포함될 수 있는 겁니다.

회의론자들은 “여인들이 다른 무덤으로 갔던 것”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천사들도 로마인들도 모두 다른 무덤으로 갔던 거라고 진짜로 그렇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렇다면 진짜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부활이 거짓임을 밝히고 속임수라고 폭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아니다,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서 죄수들의 시체 구덩이에 던져버린 것이지, 예수를 무덤에 장사한 적이 없다. 그게 예수가 무덤에 없는 이유다.” 라고 말이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리마대 요셉과 관련한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겁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었다면 저는 요셉이 당장에 반박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명성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요셉이 빼돌려 묻었다는 절도 혐의로 고소라도 하게 되면 산헤드린 공회 의원 지위를 잃게 됩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요셉은 어떻게든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아니라고 말했을 겁니다. 어쨌거나 지금 여인들은 모두 다 똑같은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목격자가 다수입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곧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도마를 제외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일주일 후에는 도마도 함께 있을 때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 즉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동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갈릴리의 한 산에서 열한 사도에게 나타나셨고, 그곳에서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그 후 승천하실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셨고, 성전에 다시 나타나셨으며,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부활의 마지막 증거인 믿지 않는 제자들을 살펴봅시다. “아니 그게 어떻게 부활의 증거가 됩니까?”라고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제자들이 부활을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비평가들이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서 부활한 것처럼 보이게 꾸며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집단 환각 증상에 빠졌던 것이다. 부활이 일어나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나머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을 그렇게 간절히 원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기대한 적도 없습니다.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부활을 너무 간절히 원해서 일종의 환각 증상으로 예수님을 봤을 리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1절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허탄한 것',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생각은 ‘허탄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어리석고 헛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허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레로스'(leros)인데요, 공허한 이야기, 일종의 꾸며낸 우화라는 말입니다.

여인들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요? 한결같이 모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모두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깁니다. 그렇게 똑같이 말하려고 몇 주 동안이나 열심히 꾸며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말에 일관성이 있었는데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말해주는데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그저 이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고, 그래서 아예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을 조작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가 베드로에 관해서 짧게 언급한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까? 그 된 일을 보고 놀랍게 여겼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다우마조’(Thaumazo), 즉 베드로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그제서야 “부활이다, 부활이 일어난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갔을 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무덤에 오기 전이었습니다. 여인들의 제대로 된 증언도 듣기 전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시간적 순서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요한복음 20장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을 보면,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그 다른 제자”와 함께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 다른 제자는 요한 자신입니다. 요한이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한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죠. 요한이 베드로보다 빠른데, 베드로의 성격을 아는지라 조심스러워합니다. 베드로는 항상 첫 번째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더 젊고 더 빨랐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해서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약간 주저하며 망설였습니다. 그 안에 세마포 수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베드로가 따라와서 무덤 안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요한도 바로 옆에 붙어 함께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세마포가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을 봅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엉켜 구석에 던져져 있을 것만 같지만,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정확히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그 다음에 뭐라구요? "믿더라." 빈 무덤과 수의가 전부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까지 베드로와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한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죠? 다른 여인들의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보라고 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곧 출발했습니다. 그 사이에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와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소식을 전하려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라곤 빈 무덤과 수의가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습니다. 요한은 죽은 예수님이 무덤 안에서 돌을 굴려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 말고는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덤이 빈 것과 수의만 남은 것을 보고서야 요한은 믿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야."는 말을 보면 그때까지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요한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흥미롭지 않습니까? 저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랐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12절에서 누가는 베드로가 세마포 수의를 본 후에 어떻게 했는지를 기록합니다.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러분, 이건 결코 무덤에서 시신을 훔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만일 시신을 훔치고자 했다면 시신만 그대로 훔치면 됩니다. 무덤 안에서 시신의 수의를 벗기고, 차곡차곡 모든 것들을 정리하면서 바보처럼 얼쩡대지 않습니다. 시신을 훔쳤다면 바로 도망가야 정상이죠. 그러므로 부활이 일어난 것이 확실합니다. 요한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집에 갈 때까지도 아직 반신반의합니다. 그 사이에 여인들은 다른 아홉 명의 사도들을 붙잡고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완고할까요? 누가복음 24장 19절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도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한 채 대화가 시작됩니다.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섭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19절입니다.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절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사흘째인데 아직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분명 예수님이 살아계시다고 알려줬건만 전혀 믿으려는 시늉조차 안했습니다. 제자들은 믿지 않았던 겁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인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길 바랐습니다." 그리고서 이렇게 무심코 내뱉습니다. 22절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 베드로와 요한이죠 -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봐, 우리가 무덤에 갔었는데,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 같아. 우리가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면서 부활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나서야 믿겠다는 고집스러움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흔히 부활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고 도마를 비난합니다. 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다른 제자들도 도마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여인들의 증언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야. 무덤은 열린 채로 비어 있었고, 수의가 거기 놓여 있었어. 그렇다면 예수님이 살아나셨는지도 몰라.” 하지만 아직 완전히 부활을 믿고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날이 저물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 모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제자들이 믿지 못하는 모습을 제시하는 이유는, 부활을 너무나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부활을 꾸며냈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불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제 생각을 좀 말씀드리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부활하신 구세주”라는 짧은 찬송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가사가 이렇습니다. “예수 예수… 내 맘에 살아계시네." 그런데 이 찬송가를 부르다 보면 제 마음이 늘 불편해집니다. “어떻게 아냐 물으면 내 맘에 계시네." 글쎄요, 그건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누가 제게 묻는다면, 주님이 제 마음에 살아계시기 때문이라는 것 그 이상의 대답을 할 겁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계시다는 대답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글쎄요, 잘됐네요. 예수가 당신 마음에 살아계시다고 하니 참 기쁘군요. 하지만 그건 보편적이지도 않고,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느낌은 우리를 감정적으로 도와주기는 합니다. 느낌은 우리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을 가로막는 감정적인 장애물이나, 부활에 관한 말을 믿기 어렵게 만드는 감정적인 장벽을 없애줍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느낌만 가지고 안 된다면 실제적인 사실이면 되겠습니까?” 사실도 좋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사실이 주어졌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한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느낌이 감정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면, 사실은 실제 사건 여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그러니까 일련의 증거가 있으면 가능성 낮은 선택지가 제외되고, 설득력 없는 주장이 일축되면서, 말도 안 되는 이론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증거주의가 바로 이런 것이죠. 느낌은 감정적 장벽을 제거하고 사실은 지적인 장벽을 제거합니다. 그러나 느낌과 사실 이 두 가지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마음 속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모두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부활에 대한 여러분의 느낌, 심지어 부활에 관한 사실들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부활을 믿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확신입니다.

느낌을 믿지 말고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은 사실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다음에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부활에 대한 지적 장벽이 사라졌습니다. 둘째, 제 삶에서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것으로 부활에 대한 감정적, 심리적 장벽이 사라졌습니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게 주신 믿음,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느낌이나 감정으로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로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확신을 얻습니다. 확신은 구원받는 믿음의 구성 요소입니다. 하나님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위대한 진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부활의 영광에 감사드립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신앙, 기독교의 복음 그리고 기독교 그 자체의 정점인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과 우리의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 복음의 모든 것은 마지막 때에 우리로 영광스러운 몸을 입어 영원한 복으로 인도하여, 섬기며, 사랑하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완전히 만족하며, 아무 부족도 없는 충만을 누리고, 영원토록 온전히 기뻐하게 하는 것임을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부활의 중요한 역할을 이해하게 하옵소서. 부활은 구원의 근원으로서, 부활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보좌 앞에 둘러서서, 지금의 몸과 비슷하지만 영광을 입은 몸으로 영원무궁토록 주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복음의 약속인데,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며 그 소망의 빛 안에서 살아갈 때, 이 약속이 단지 이 세상에서만 일어날 뿐만 아니라,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약속임을 이해하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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