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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계속해서 로마서를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입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 본문은 말하자면 일종의 목록입니다. 9절부터 시작해서 21절까지 일정한 구조와 흐름 속에서 매우 실제적인 권면들이 계속 나옵니다. 앞으로 이 내용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독교의 실제 삶의 방식,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짧은 권면이 계속 나옵니다. 스무개가 넘는 권면이 아주 빠르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권면을 하나 하나 들을 때마다, 너무 중요하고 긴급한 말씀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찔리고, 또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책망을 받으신다면,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정확하게 찌르고 계신 것입니다.

반면에 권면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그 중요성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갈등이나 책망을 받는 다는 느낌이 크게 들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이미 그 권면의 모습이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이런 모습들이 반드시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완전히 무너진 것 같은 패배감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크게 책망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에 이 말씀을 계속 묵상하면서, 어떤 말씀은 제 마음을 아주 직접적으로 찔렀습니다. 또 어떤 말씀은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삶 속에 아주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접할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해야겠다고 깨달을 때마다, 성령님께서 저를 책망하고 계신다고 느꼈습니다. 반대로 어떤 말씀은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는 성령님께서 이미 제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연구하면서 책망을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 삶 가운데 실제로 일하고 계시다는 확신으로 인해서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나도 느낀다. 말씀에 동의한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행하고 계신다.” 아마 함께 말씀을 공부하시다 보면 여러분도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나를 정죄하는 말씀이야, 이렇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정죄도 책망도 받으실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격려도 받으실 겁니다. 분명히 이런 순간들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내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본성을 따르던 나의 삶을 초자연적인 삶으로 바꾸어 가고 계시는구나.” “이 말씀들이 실제로 내 삶에 나타나고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실 겁니다. 로마서 12장을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으실 겁니다.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 헉슬리(Huxley)가 아주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전부를 드려야 한다.” 또 D. L. 무디(D. L. Moody)의 아주 가까운 친구였던 헨리 드러먼드(Henry Drummon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입장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우리의 모든 것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은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 자체로 독특하고 특별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 경계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는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옳은 일을 행할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자유입니다. 우리를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반드시 행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로마서 12장 9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신약의 율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의 자유 안에 참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공부하면서 이미 보았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길대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입니다. 또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특별합니다. 삶의 경계와 울타리와 기준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 모든 선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일반적인 면도 있고, 구체적인 면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면이란 삶의 모든 영역과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면이란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에, 반응할 때에, 이 원리들이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물론 여기 기록된 내용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완벽하게 다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다른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내용만 보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신비롭지 않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몽롱한 영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영성도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실제적입니다. 현실적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말하느냐,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실제로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은 로마서의 아주 중요한 부분에 나옵니다. 대부분 로마서 12장 8절까지 오면 이미 핵심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12장 1절과 2절에 나오는 헌신의 말씀을 지나고, 또 3절부터 8절까지 나오는 은사에 대한 말씀을 지나면 로마서가 거의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가 로마서의 진짜 핵심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신자의 삶의 방식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앞의 11장은 바로 그런 삶을 위한 기초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12장처럼 살게 하시려고 1장부터 11장까지의 일을 하셨다.” 이제 12장에 와서는 “그러니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라, 하나님께 헌신해라”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최대한 사용해서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라고 합니다. 12장부터가 로마서의 진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장부터 15장 앞부분까지 바울은 아주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우리 앞에 펼쳐 놓습니다. 가족이 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과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정부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3장, 14장, 그리고 15장 앞부분까지 이어지는 이 실제적인 권면이야말로 바울이 처음부터 계속 말하려고 했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앞부분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서 기초를 설명했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기초를 단단히 놓고 싶었습니다. 또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은혜를 제대로 깨달으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깨닫는다면, 12장부터 15장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려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12장 9절에 이르러,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감당해야 할 삶의 모습들을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합니다. 아주 현실적인 것입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삶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야 하는 모습입니다.

이 부분은 사실 딱딱 나누어서 개요를 만드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9절부터 21절까지를 한번 보면, 작은 조각으로 깔끔하게 잘라서 정리하는 게 아주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하실 수 있도록 제가 설명을 드리자면, 점점 넓어지는 동심원 같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원으로 시작을 하죠. 그런데 점점 커집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품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9절을 보십시오. 굉장히 개인적입니다. 나에게서 출발합니다. 나의 사랑을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합니다. 아주 개인적인 것이죠. 내 마음의 결단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서 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0절부터 13절로 가면서 조금씩 커집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원이 넓어지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원이 조금 더 넓어지지만 여전히 나 자신을 놓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하다가도 다시 내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원이 더 넓어집니다. 14절부터 16절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가족, 그러니까 형제자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넓어집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포함합니다. 그런 사람들까지 축복하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 16절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시 내 안에 있는 교만의 문제를 건드립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점점 넓어지는 원처럼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해서 품어갑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시 돌아와서 내 마음과 내 삶도 계속 점검합니다.

원이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넓어지는 부분이 17절부터 21절입니다. 이제 우리를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원수들까지 포함됩니다. 단순히 우리가 믿는 신앙 때문에 반대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실제로 상처를 입히고, 해를 끼치고, 악하게 대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바울이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합니다. 복수심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태도를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이 넓어져서 원수들까지 포함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립니다. 예를 들면 18절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합니다. 결국 다시 나의 태도를 말합니다. 나의 마음을 말합니다. 내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자, 그러니까 바울은 여러 가지 주제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각의 원을 점점 넓혀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 본문의 흐름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귀를 즐겁게 하는 특별한 내용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말씀에 가깝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 나오는 많은 모습들이 이미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이 여러분에게 격려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필요한 부분에서는 책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 안에서 이런 일들을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격려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첫 번째 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의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9절에서 세 가지를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이런 세 가지 묶음을 아주 자주 사용한다는 겁니다. 9절에도 세 가지가 나오고, 11절에도 세 가지가 나옵니다. 12절에도 세 가지가 나옵니다. 바울의 생각이 이런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쨌든 9절은 아주 개인적인 내용입니다. 세 가지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세 가지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마음과 생각의 방향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9절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실 이 말씀은 설명이 많이 필요하지 않죠. 아주 분명합니다. 아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너무 익숙해서 그냥 지나쳐 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잠시 하나씩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함께 보면서, 여러분 마음속에 더 분명하게 새겨지도록 해보겠습니다. 첫번째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게 하라.” 아주 적절하게 바울은 사랑부터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모두 이 말씀 잘 알고 계시죠?

로마서 13장을 잠깐 보겠습니다. 8절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리고 10절 끝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이루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바로 이겁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여기에서 사랑으로 시작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 이렇게 시작하죠. “성령의 열매는…” 가장 먼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희락과 화평이 이어지죠. 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또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사랑이 가장 위대합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앞에서 본 말씀들만큼 익숙한 본문은 아닐 수도 있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또 폭동과 소요 가운데서도 사역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들이 바울의 사역에 자주 있었습니다. 또 수고 가운데서도, 깨어 있는 가운데서도, 금식 가운데서도 사역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늘 경계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그리고 이 표현이 나옵니다. 밑줄을 치시기 바랍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바울은 자신의 사역 태도를 설명하면서 “거짓이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순수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12장 9절로 말하면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꾸며낸 사랑이 아닙니다. 가짜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도 기억하실 겁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죠.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다시 말해서 너희가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이런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거듭난 사람은 거짓 없고 순수한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는데, 여기에 사용된 이 '뜨겁게'라는 말은 아주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고른 헬라어는 '에크테네스(ektenes)'입니다. 원래 말의 근육이 팽팽하게 늘어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람에게 비유하더라도 근육을 한계까지 뻗어서 최대한 멀리 손을 내미는 행위를 뜻합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해부학적인 용어를 선택해서, 우리가 거듭난 만큼 서로 사랑할 때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온 힘을 다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가장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바로 사랑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기 나오는 이 ‘뜨겁게’ 역시 헬라어 ‘에크테네스(ektenes)’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악행이나 잘못, 허물과 상처를 포근히 덮어주는 담요 같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나 앞서 읽어드린 고린도후서 6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결코 가식적이거나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 사랑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순수하고 깊이 있는 진짜 사랑입니다. 디엘 무디(D.L. Moody)는 "말은 크림처럼 풍성하게 하면서 삶은 무지방 우유처럼 밍밍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꼬집은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밍밍한 우유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진짜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만족을 채우려 하지 않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불순물을 모두 걸러낸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순전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베푸는, 연기가 아닌 진짜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토록 순수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개씨를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상 저에게 이런 뜻으로 들릴 때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영적인 의무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 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뿌려주는 것처럼 말이죠. “자, 이 사랑 받으세요. 제 사랑은 아니지만 하나님 때문에 전달해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사랑을 다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손을 내밀어 실제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직접 씻겨주시면서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필요를 예수님이 채워주셨습니다. 낮아지셨지만 부정적이거나 모욕적인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낮아지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위선보다 더 악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죄인이었던 유다, 유다가 그렇게까지 악했던 이유는, 그가 너무도 위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위선은 모든 죄 가운데 가장 혐오스럽고 추합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미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죠. 위선보다 더 악한 죄는 없습니다. 위선보다 더 파괴적인 악도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덕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위선적인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모순입니까? 신학자 존 머레이(John Murra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이 모든 덕의 총합이고, 위선이 모든 악의 절정이라면, 이 둘을 함께 묶는 것만큼 모순된 일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순수하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설명하기보다 요한일서 3장 14절을 보는 것이 가장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형제를 사랑함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8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진실하고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시험하는 기준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말에만 머무르면 안된다, 혀로만 표현해도 안된다, 반드시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진실한 사랑은 감상주의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친절을 베푸는 행동으로, 돌보는 행동으로, 필요를 채워주는 행동으로, 붙들어주고 섬기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지금은 하나님 품에 안겨 계신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Tenth Presbyterian Church)에서 사역했던 위대한 성경교사 도널드 그레이 바른하우스(Donald Grey Barnhouse) 박사는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참된 사랑은 무대 위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삶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반대의 모습이 누가복음 22장 48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눈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예수님은 사랑의 입맞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이자 최고의 의무는 위선 없는 사랑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참되고,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이기심이 없는 희생적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뒤에 이런 질문을 받으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쓰러져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여러분의 가는 길 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여러분이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여러분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기억하십니까? 바울은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여러 가지 영적 은사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은사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 은사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에,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길이 있다. 그리고 곧바로 13장으로 넘어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 위대한 사랑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으면 결국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 친구, 교회를 비롯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신자들은 진실한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이 참되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 교회에 찾아왔던 여성 한 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결혼 문제로 상담을 받기 위해 저 아래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갔는데 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담을 해주지 않아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 시설을 찾아서 길을 따라 걷다가 우리 교회까지 왔던 겁니다. 그때는 아직 저 모퉁이에 불교 사찰이 들어오기 전입니다. 그래서 계속 걸어와서 우리 교회로 들어왔던 것이죠.

사실 교회에 들어오고 싶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가 마침 주일이었고,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회중 사이에 들어와서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지금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여성은 예수님을 만났고, 나중에 저에게 간증을 들려줬습니다. “회당에서 저를 상담해주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죠. “그날 예배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시더군요. “솔직히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목사님이 앞에 계셨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어요. 제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랑이에요. 바로 그 사랑이 저로 하여금 메시야를 만나게 했어요.”

사람들이 사랑을 간구하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사랑을 찾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들을 들어보십시오. 의미 있는 사랑을 갈망하며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찾는 그 깊은 차원의 사랑은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세상에 사랑을 전하면 가장 위대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9절에서 두번째로 말하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밤에 21절까지 다 보지는 않을 겁니다. 편안히 계셔도 됩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16절이나 다루었다고 해서 또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오늘은 9절까지만 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바울이 9절에서 말하는 두번째 내용입니다. “악을 미워하라.” 정말 간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첫번째 명령과 연결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악을 미워하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악은 교제와 사랑의 관계를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죄를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죄는 저와 여러분의 관계를 깨뜨리고 무너뜨립니다. 죄는 사랑의 관계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치명적인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악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97편 10절에는 아주 짧지만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이 둘은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정반대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아주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는 ‘구별되었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가 전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전적으로 순결하고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악을 방관하실 수 없고, 악을 용납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악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재형 명령법이 사용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악을 계속해서 미워하라. 끊임없이 미워하라” 이런 뜻입니다. 계속해서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악은 어떤 수준에서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악은 우리가 반드시 미워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악과 타협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악을 조금이라도 허용하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악한 모든 것, 악과 관련된 모든 것을 계속해서 미워해야 합니다. 시편 101편을 들어보십시오. 바로 이런 태도를 요구하는 겁니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다윗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 저는 완전한 길로 행하겠습니다. 순결한 마음을 지키겠습니다. 사악한 마음을 제게서 몰아내겠습니다. 사악한 사람을 만나면 제 앞에서 쫓아내겠습니다. 속이는 사람을 만나면 제 삶에서 끊어내 버리겠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제 집에서 내보내겠습니다. 저는 악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겠습니다. 악한 사람들과도 아무 관계도 맺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악과는 어떤 타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악을 용납하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이 사람들을 끊어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끊어낸다”는 표현은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죽인다는 뜻입니다. “나는 악을 제거하겠다. 악을 행하는 자들을 제거하겠다”, 이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는 죄를 철저하게 다루라는 것입니다. 죄를 단호하게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너무나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8장 13절을 기억하십니까? 어린 시절에 배웠던 잠언이 생각납니다. 잠언 9장 10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반대편에 잠언 8장 13절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여러분은 악을 미워하십니까? 교만을 미워하십니까? 거만을 미워하십니까? 사람들의 악한 길을 미워하십니까? 패역한 입을 미워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패역한 말들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습니까? 패역한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셨습니까? 그런 것들을 용납하고 계십니까? 그런 자리에 있어도 더 이상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습니까? 패역한 삶을 사는 사람, 패역한 말을 내뱉는 사람, 교만과 거만으로 가득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괜찮으십니까? 아니면 그런 것들이 너무 미워서 다윗처럼 이렇게 말하게 됩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 내 앞에서 내쫓겠다. 왜냐하면 내 삶의 거룩한 기준이 무너지는 희생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해주는 또 다른 구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있는 아주 짧은 서신, 유다서를 보겠습니다. 유다서 1장 23절, 매우 강력하고 단호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20절입니다.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 그리고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속 거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 사랑의 삶 가운데 계속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볼 때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다시 말해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손을 내밀 때는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로 더러워진 옷이라도 미워하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옷”이라는 단어는 매우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겉옷이 아니라 속옷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에 가장 가까이 닿는 속옷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피부 바로 위에 입는 속옷, 내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에 닿아 있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여러분이 세상으로 나가서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할 때에 반드시 거룩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더러움에 조금이라도 물든 것이라면 반드시 미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치 불 속에서 나뭇가지를 급히 끌어내듯이 사람을 건져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옷까지 더러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심각한 경고입니다. 마치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에이즈(AIDS)라는 새로운 질병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질병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의료진은 알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가까이에 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적하며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죄를 미워합니다. 물론 잃어버린 영혼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는 반드시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죄에 우리까지 물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다가 그들의 오염된 삶이 우리를 더럽힐 수도 있고, 영적으로 병든 상태가 우리에게까지 옮겨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다녔던 사람 중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데마입니다. 데마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 곁에 있었지만 결국 바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데마는 능력 있는 선교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으로 다가갔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데마 안에 있던 가장 악한 것들을 끌어냈기 때문입니다. 결국 데마가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세상이 데마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미워하는 이유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얼마나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죠. 오래 전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를 보고 충격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죄를 보고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는 순간, 죄가 우리의 의식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는 어떤 죄를 보아도 충격을 받기가 참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죄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죄를 미워하라.

여러 구절이 있지만 두 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모스 5장 15절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미가 선지자를 기억하십니까? 미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심판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문제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는 것이다.”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이죠.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을 기억하십니까?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어떤 것이 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악이 아니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악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즉시 떠나라는 것입니다. 당장 그 자리를 떠나라는 겁니다.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겁니다. 패역한 말을 듣거나 악한 길을 보면 즉시 떠나십시오. 악이 보이기 시작하면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정말 악인지 아닌지 판단하려고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시면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든다면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히브리서 1장 8절에 나오는 구주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 위에 높임 받으신 이유는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는 거룩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죄가 얼마나 저주스러운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악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분명히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제가 몇 가지 말씀을 드리죠. 잠언 6장으로 가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잠언 6장을 보면 아주 분명하게 나옵니다. 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교만한 눈”입니다. 여러분은 교만을 미워하십니까? 정말로 미워하십니까?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십니다.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살인을 미워하십니다. 어떤 형태이든 악한 계략과 음모를 미워하십니다. 악을 향해 급히 달려가는 행위를 미워하십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시고, 분열과 다툼과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입니다. 물론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다른 각도에서 비슷한 목록들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잠시 이사야 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책망하시면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누가 오라고 했냐? 내가 오라고 했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도 너희를 부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아십니까? 거짓 종교를 미워하십니다. 형식만 남은 거짓 신앙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이 무엇인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는 사람은 아주 간단한 의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악이 완전히 드러났을 때만이 아니라, 악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부터 미워해야 합니다. 악을 멀리하고, 피하고,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악처럼 보일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그런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사람들은 오히려 악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단지 악의 결과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이 명령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 들으십시오. 단지 악의 결과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명령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의 결과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악이 가져올 결과 때문에 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악을 미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고,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악 자체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악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싫을 뿐입니다. 매우 유치하고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태도이죠. 결코 신자의 마음 안에 있어야 할 동기가 아닙니다. 선한 사람은 결과가 두려워서 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미워합니다.

다시 로마서 12장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9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에 속하라.” 여기서 ‘속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콜라오(kollaō)’입니다. 결혼 관계를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원래 의미는 ‘풀로 단단히 붙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것에 단단히 붙어 있으라. 절대로 떨어지지 말아라. 결코 분리되지 말아라’는 의미입니다. 요즘에 새로 나온 접착제 광고가 아주 제격입니다. 금속 덩어리에 접착제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다른 덩어리를 붙인 다음에 고리를 달아서 들어올리면 트럭이 딸려 올라갈지언정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게 선한 것에 붙어 있으라는 겁니다.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라는 겁니다. 선한 것에 붙어 있으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 “선하다”는 헬라어로 ‘아가도스(agathos)’입니다. 본질적으로 선한 것, 진실로 선한 것, 질적으로 선한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시편 기자가 말한 내용 아닙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정말 깊은 말씀입니다. 잘 보십시오.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악인들과 함께 걷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인들과 함께 걷다가 멈춰 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바라보면 결국에는 그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죄에 빠져드는 것이죠.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자리에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십시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십시오. 빌립보서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입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는 겁니다. 계속 마음에 품는 겁니다. 그러면 선한 것에 단단히 붙어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이랬습니다. 잠시 로마서 7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바울의 마음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15절 말씀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이미 신자인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때로는 죄를 짓고 나서 스스로 놀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죄일 수도 있고, 말의 죄일 수도 있고, 무관심의 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스스로 이렇게 말하게 되죠. “내가 왜 그랬지? 나는 이런 것을 미워하는데. 내 안에 있는 저런 모습을 미워하는데.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죄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도 미워하는데.” 저도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바울도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왜 내가 이런 짓을 하는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제가 아는 한,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기준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단순히 “결심했어!”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로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느냐 하는 겁니다. 물론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이 바로 그 말을 하는 겁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왜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할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짓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리고 바울은 죄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신자가 이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것들을 사랑합니다. 마음에 쓴 태도를 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판적이고 정죄하고 차갑고 무정한 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들로 눈과 마음을 채우고 싶지 않습니다.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말을 하죠. “나는 그런 모습이 싫어.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하고 있지?” 그렇게 좌절하면서 바울처럼 외칩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야.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야.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이야.” 그래서 다시 외치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의를 이루시기를 바라면서 자신을 성령님께 더 내어드립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이 모든 싸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날을 기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육신과 죄를 벗어버리고 주님과 함께하게 될 그날을 사모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영혼만 아니라 몸까지 구속받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자유하게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참된 신자는 가장 깊고 진실한 마음 속에서 죄와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자신이 행하는 죄조차 미워한다. 여러분 스스로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시험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준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미워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잘못된 일을 했을 때 그것을 혐오하고 미워하며 버리고 싶어하십니까? 바울은 죄와 악을 미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원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거짓 없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선한 것에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9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선을 행하기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선한 것에 붙어 있고 싶어했습니다. 선한 것에 매여 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립 지대가 없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선한 것에 붙어 있든지, 아니면 악을 향해 움직여 가든지 둘 중의 하나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선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선한 것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면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요, 제 마음과 생각 속에 아직도 더러운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세상 방식대로 살아왔기 때문이죠. 당신의 생각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완전히 씻겨 나가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유일한 길은 말씀으로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로마서 12장 2절에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바로 제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게 되면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잠기고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 갈수록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단순히 말씀을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동안 누가 여러분을 가르칩니까? 바로 성령님이 여러분을 가르치십니다.

오늘 저녁에는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에 속하는 것, 선에 단단히 붙어 있는 데서 시작합니다. 정말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 어쩌면 대부분은 지금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하실 겁니다. “저는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분이 우리 교회에 오면 하나님과의 친밀함, 또 사랑, 성도들을 향한 희생의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아십니까? 오히려 무관심을 느낄뿐만 아니라 거부감과 반감까지 느낀다고 합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사랑이 느껴진다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을 때 기쁘시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사도 바울의 싸움에 공감할 수 있다면, “나는 선에 붙어 있기를 원한다. 비록 언제나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선한 것을 원한다. 나는 악을 미워한다. 비록 때로는 악을 행하기도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악을 미워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소원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악을 피하는 것이라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계속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그리고 이제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되도록 끊임없이 악을 미워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선한 것에 단단히 붙어 있으라는 겁니다. 악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는 겁니다. 악은 사람을 너무 치명적으로 더럽히기 때문에, 혹시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라는 겁니다.

오늘 시작이 참 좋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더 큰 덩어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진리들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끊임없이 이런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실패했는지를 보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악을 충분히 미워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여러 모습으로 죄를 용납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선한 것에 단단히 붙어 있지 못했습니다. 선한 것을 붙들기보다 악한 것을 향해 마음을 내어준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들을 행하기 원합니다. 복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적인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육신으로 더러워진 옷까지도 미워할 만큼 악을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악에 조금이라도 닿아 있는 것조차 멀리 피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선한 것에 단단히 붙어 있는 법도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것과 의로운 것과 옳은 것들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이 고개를 숙이고 계시는 동안에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이렇게 아주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마음속으로 주님 앞에서 조용히 이렇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이 우리 삶 속에 온전히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 주옵소서. 그렇게 행하실 주님께 우리를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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