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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는 다시 로마서 12장으로 돌아가서 9절부터 21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인의 실천적 의무를 다루고 있는 이 놀라운 본문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조금씩 나누어서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전기를 참 좋아합니다. 기독교의 현재 모습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 기독교가 어떤 모습일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과 비슷한 모습, 다른 모습, 배울 점, 이런 것들을 살펴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래된 책들을 꺼내서 읽어보곤 합니다. 짧은 일화가 담긴 책이나, 오래전 인물들의 전기 같은 것들입니다. 저는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정말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로버트 C. 채프먼(Robert C. Chapman)이라는 성도의 매우 은혜로운 삶에 대한 책을 읽었습니다. 오래 전에 영국에서 살던 분인데 아마 아시는 분이 거의 없을 겁니다. 이 채프먼은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의 초대 지도자였던 J. N. 다비의 친구입니다. 플리머스 형제단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다비의 글을 한번쯤은 읽어보셨을 겁니다. 다비는 스코필드 성경으로 유명한 C. I. 스코필드(C. I. Scofield)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코필드는 중미 선교회(Central American Mission), 달라스 신학교(Dallas Seminary) 사역을 시작한 인물이죠. 그런데 이 채프먼은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인생 목표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은 너무 적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의 삶을 목표로 삼겠다.” 다비는 채프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채프먼은 내가 가르친 것을 살아낸다.” 얼마나 놀라운 칭찬입니까? “채프먼은 내가 가르친 것을 살아낸다.” 저는 또 윌리엄 아르노트(William Arnot)를 참 좋아합니다. 아르노트가 쓴 글 중에서도 특별히 성경에 나오는 비유 설명을 참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아르노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르노트의 설교는 훌륭하다. 글은 더 훌륭하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것은 그의 삶이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삶이 가장 훌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삶의 양식입니다. 삶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삶의 원리가 없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를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로마서 12장 9절부터 21절을 보겠습니다. 올바른 삶에 대한 매우 실천적인 말씀입니다. 삶의 방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안에서도 이 부분만큼 실천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이해하기도 쉽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일 말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조금 더 풍성하게 제가 설명을 하고, 강조하고, 권면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권면하는 삶의 방식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입니다. 자연스러운 삶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적이지도 않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자연스러운 삶이 아닙니다. 정상이라 할만한 삶도 아니죠. 인간의 선택만으로 살아낼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삶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능력을 공급하실 때에만 가능한 삶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를 통과한 사람만이 로마서 12장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심겨지기 전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가 여러분 영혼 안에 거하기 전에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배운 모든 것과, 로마서 12장 앞부분에서 배운 헌신에 대한 말씀은 바로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그레이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는 데 있다고 말이죠. 모든 교리는 반드시 올바른 의무를 행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올바른 섬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을 들으시면서 그 안에 담긴 진리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익숙하게 들리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가진 사랑하는 자들아.”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응해야 한다는 겁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자.”

이제 에베소서 2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아주 익숙한 본문이죠. 4절에서는 하나님을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말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6절에서는 또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를 통해 나타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핵심이 나옵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전에 예비하사 우리가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의로운 삶을 사는 방식으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형태로 우리를 이끕니다.

오늘 오전 예배에 해군에 복무하는 한 청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테이프와 책을 통해서 우리 교회 사역을 알게 되어서 한번은 꼭 와보고 싶었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꼭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과거의 어느 순간에 감정적으로 잠깐 반응했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제가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만일 칭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경험했다면 반드시 성화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고 거룩한 삶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물론 원하는 만큼 완전한 모습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기를 갈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경건한 삶을 살라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우리를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로, 마귀를 섬기던 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바꾸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경건한 삶을 살아갈 때에 여러분을 변화시키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을 변화시키신 하나님께로 이끌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또 여러분도 순종을 통해 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복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이유는 정해진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삶으로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빌립보서를 보겠습니다.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혼란스러워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이런 뜻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이죠. 또 어떤 사람들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씀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에베소서 2장에서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니, 모순 아닙니까? 한 곳에서는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라고 말이죠. 그러면 이 말씀을 전체의 흐름 속에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장 27절로 가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가장 중요한 하나의 권면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무슨 뜻입니까? 만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만일 너희가 정말 구원을 받았다면 삶에서 드러나게 해라. 내가 거기 있든지 없든지 그렇게 해라. 내가 옆에서 감시하지 않아도 진실되고 참되게 살아라. 내가 있든지 없든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

2장 5절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를 닮으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처럼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이어서 6절부터 11절까지에서 그 모습을 설명합니다. 겸손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9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을 너희도 품으라. 자신을 낮추는 마음, 복종하는 마음이다. 너희도 그 마음을 품으라.”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다시 말해서 “그러니 이제”,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문맥에서 보면 바울의 말뜻이 매우 분명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너희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되었다.” 1장 27절의 내용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겸손히 복종하심으로 너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 겸손히 복종하는 삶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 복종의 결과가 무엇인지도 보여주셨다.” 9절부터 11절이죠. 예수님은 6절부터 8절에서 복종하셨고, 9절부터 11절에서는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가 본을 보여주셨다. 너희는 순종하는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았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복종해라.” 이런 뜻입니다. “내가 있든지 없든지 그렇게 해라.” 빌립보 교인들은 분명히 복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바울에게 크게 의존했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있을 때에는 바울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바울이 있을 때에는 바울이 가르쳤습니다. 권면했습니다. 도전했습니다. 도왔습니다. 책망도 했습니다. 질문에 답해 주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복잡한 상황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장 27절의 내용입니다. “이제 내가 없다고 해서 덜 복종하지 마라. 너희는 내가 있을 때 잘 복종했다. 이제 내가 없을 때에도 계속 복종해라.” 이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종의 이유가 바울의 감시 때문이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에서부터 진심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씀 하나가 이어집니다. 12절 끝부분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다시 말해서 복종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두려워하거나 바울 때문에 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경외함으로, 온 마음으로, 겸손하게, 온유하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또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무슨 뜻입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고, 계속해서 성령님께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이 밖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미 내면에 있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격려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13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므로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면에 있는 것을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7장 1절과 에베소서 2장 4절부터 10절에서 살펴본 내용을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으니,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보았으니, 복종하는 자가 높임을 받는다는 것을 보았으니, 내가 있을 때 복종했던 것처럼 없을 때에도 계속 복종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외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라. 내면에 있는 것을 삶을 통해 드러내라.” 그리스도인 삶의 기준입니다. 내면에 있는 것을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좋습니다. 저는 저를 깨끗하게 하고 제가 마땅히 살아야 할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 안에 있는 구원을 제 삶을 통해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다시 로마서 12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실천적인 의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이미 교리적인 기초를 제시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3절부터 8절에서는 영적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은사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 바울이 설명하는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됩니다. 12장 9절부터 시작되어 15장까지 이어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에 대해 말합니다. 먼저 여러 항목들을 빠르게 나열합니다. 9절부터 아주 빠르게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치 하나의 원을 그려놓고 계속해서 그 원을 넓혀 가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범주, 다른 영역을 포함해서 점점 확장합니다. 첫 번째 원은 우리 자신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죠. 9절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세 가지 기본적인 태도로 시작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진실한 사랑입니다. 신자의 표지이죠.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가장 중요한 표지입니다. 위선이나 속임이 없는 참되고 경건한 사랑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악을 미워하라”고 합니다. 죄를 미워하는 겁니다. 그리고 셋째로 “선에 속하라”고 합니다. 마치 풀로 붙인 것처럼 선한 것에 딱 붙어 있으라는 겁니다. 원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원은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반드시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이제 10절로 가보면 원이 조금 더 넓어집니다. 이제는 단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가족을 포함합니다. 두 번째 부분인 10절부터 13절까지에서 바울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것은 교회 공동체를 향하고 있고, 어떤 것은 다시 개인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이 넓어진다고 해서 안쪽을 제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쪽을 포함한 채로 더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단계의 원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가족 공동체를 품으면서 동시에 우리 삶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들도 함께 포함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더 넓어진 원에 대한 첫 번째 말씀입니다. 형제 사랑과 따뜻한 애정,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관계입니다. 여기서 “우애하고”라고 하는 표현은 헬라어로 한 단어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단어인데요, 이 단어를 이해하면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사실 두 단어 모두가 사랑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사랑으로 사랑하라”, 이런 뜻입니다. 첫 번째 단어는 필레오(phileō)입니다. 따뜻하고 애정 어린 사랑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스토르게(storgē)입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사랑을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바울이 마지막 때 사람들이 “무정하다”라고 했을 때에 사용한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족 안에서 나타나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사랑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필로스토르게(philostorgē)는 두 단어가 결합된 합성어입니다. 스토르게는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름답거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사랑도 아닙니다. 가족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혈육 사이에서 당연하게 흘러나오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외모나 성격이나 욕망이나 상황 때문에 생겨나는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가족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여기서 사용한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레오(phileō)는 따뜻한 사랑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자연스럽게 사랑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저 역시 수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저는 전혀 모르는 분들을 만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분들과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특별한 사랑을 느낍니다. 문화, 시간, 장소, 사건, 환경을 뛰어넘는 공통된 유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같이 살지 않아도, 생활 방식이나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에 대한 공통점도 없지만,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을 만나면 즉각적인 애정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물론 있으실 겁니다. 이 사랑은 따뜻하게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랑은 매력 때문에 생기는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같은 구주를 섬기고, 같은 주님을 섬기고, 같은 아버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여기서 “업신여기다”라는 단어는 ‘카타프로네오(kataphroneō)’인데,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여긴다,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친밀감이 생겨납니다. 물론 가족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고 지켜주려다가 보면 때때로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저희 집 이야기를 예로 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오늘은 너무 잘 어울리는 이야기가 있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설교할 때 아이들이 제발 자기들 이야기는 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저도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자리에 없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여러분도 비밀로 하셔야 됩니다. 얼마 전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마크가 미식축구 경기를 뛰고 온 날이었는데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런 경기를 치르고 나면 밤에 아주 많이 아픕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서 마크가 침대에서 벌떡 뛰어내리고 말았습니다.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말이죠. “으악!” 이렇게 말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잘 이해가 됩니다. 옛날에 저 역시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요. 마크는 정말로 많이 아파했습니다. 다행히 조금 시간이 지나서 풀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마크가 학교에 간 사이에 제가 방에 들어갔다가 책상 위에서 작은 카드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워서 살짝 이렇게 보았습니다. 안에 사탕과 함께 동생이 쓴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마크 오빠에게, 내가 가끔 못되게 굴고 오빠를 귀찮게 할 때도 있지만 오빠가 아파하면서 소리 지르는 걸 들으니까 내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 내가 잘못했던 일들을 용서해주면 좋겠어. 오빠를 사랑하고, 오빠가 내 오빠라는 게 정말 좋아. 멜린다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긴 여행을 하는 중에는 차 뒷좌석에서 아무리 티격태격한다고 하더라도, 아프고 힘들어할 때 서로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게 당연하죠. 가족에게는 바로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우리는 정말 놀라운 가족입니다. 따뜻한 애정을 갖고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족입니다. 그래서 몇 주 전에 살펴본 것처럼 신약성경은 다섯 번이나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사랑의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며, 친족이며, 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어 표현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저는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데니스 맥브라이드(Dennis McBride)가 저에게 알려준 사실입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 갈릴리 반에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보신 분이 아마 계실 겁니다. 그중에 한 시각장애인 형제가 들어와서 브라유 복사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점자로 인쇄해주는 기계입니다. 더 많은 시각장애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기계가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일학교가 끝난 뒤에 원하시는 만큼 조금씩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그런데 헌금을 세어보니 2백만원 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 저는 갈릴리 반에 있는 분들 가운데 그 시각장애인 형제를 직접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시각장애인들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지체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친밀감, 관심,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보여주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단지 필로스토르게(philostorgē), 그러니까 “우애”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라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입니다. 여기서 “형제 사랑”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사랑으로 사랑하라. 사랑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거의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하고 있죠. 여기서도 다시 필라(phila), 애정 어린 사랑이 나오고, 아델포스(adelphos), 형제라는 단어가 함께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친가족처럼 가까운 존재로 여기면서 사랑하라,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같은 구절 안에서 친가족의 사랑을 나타내는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면서 매우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친가족처럼 사랑하라. 다시 말해서 친족처럼 사랑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리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애정입니다. 부드럽고 친절하며 돌보고 염려하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순수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5장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참 아름다운 말씀을 많이 남겼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향한 따뜻한 애정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선택은 너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너희를 사랑함으로 나아갈 것이다. 너희의 순종을 기뻐하며 따뜻한 애정을 갖고 나아가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게 하기 위해서 매를 가지고 나아가든지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사랑입니다. 죄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돌보는 사랑입니다. 염려하는 사랑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그런 사랑이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로마서 5장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렇게 사랑하도록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사랑이 더욱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법은 이미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더욱 넘쳐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9절의 뜻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에게만 특별히 나타나는 부드럽고 은혜로운 애정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10절의 두 번째 표현을 보겠습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사랑은 전체적인 분위기입니다.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개념인, 바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라는 가족 안에 반드시 필요한 또 하나의 요소를 만납니다.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려 한다면, 그리고 올바른 긍휼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4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기 일만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앞세워야 합니다. 여기 이 “먼저 하며”라는 표현에는 정말 아름다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앞장선다”는 뜻이 있습니다. 본이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렬의 맨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앞장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먼저 다른 사람을 존경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먼저 배려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됩니다. 누군가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됩니다. 누군가 먼저 존경하기를 기다리고, 사랑하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먼저 자기 시간과 재능과 자원을 희생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해주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맨 앞에 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단어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앞에서 이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생각 아닙니까? 존경을 먼저 나타내고, 칭찬을 먼저 베풀고, 존중을 먼저 표현하고, 사랑을 먼저 드러내고, 필요를 먼저 채워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게 겸손함을 시험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존중받는 모습을 보면 화를 냅니다. 질투합니다. 시기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정반대여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앞세웁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앞장섭니다. 그러니까 이제 원이 조금 더 넓어졌죠. 이제는 하나님의 가족을 향한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두 번째 원 안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적인 적용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매우 개인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11절에는 여러분과 저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나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 킹제임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를 “사업에 게으르지 말고(not slothful in business)”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적용하기에 좋은 번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되던 당시의 영국에서는 적절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에 종종 잘못 이해되기도 합니다. 실제 헬라어 표현은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사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스푸데(spoudē)’라는 단어인데요, 문자적으로는 “서두름”, “급함”, 이런 뜻입니다. 예전에 제가 한 흑인 설교자에게서 들었던 아주 인상적인 설교가 기억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설교 말씀이었습니다. 설교하는 내내 “여러분, 서둘러야 합니다”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셨습니다. 35분 정도 계속 그렇게 설교하시더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디로 그렇게 서둘러 가야 하는지가 두 번째 요점입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거의 서로를 밟고 나갈 정도였습니다. 모두 너무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죠. 어디로 그렇게 급히 가야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모두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분명하게 머리에 박혔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열심을 내는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둘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전체적인 요지는 이겁니다. “우리는 왕의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왕의 일은 지금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일을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하고, 지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열심을 잃지 말라. 사역하다가 게을러지지 말라. 영적인 문제이다. 영적인 열심에 있어서 게으르지 말아라. 빠르게 순종하고 전적인 헌신이 필요한 일에 있어서 뒤로 물러서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신약성경은 두 번에 걸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그리고 아마 데살로니가후서 3장 13절일 겁니다. 두 곳에서 모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긴박해야 합니다.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게으를 시간이 없습니다. 잠언으로 돌아가서 게으름에 대한 연구를 길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게으름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일에 게으름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태함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일은 긴박히 해야 합니다. 서둘러 해야 합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영적인 태도를 요구합니다.

전도서 9장 10절에서 솔로몬은 매우 지혜로운 권면을 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올에는 일도 없고.” 여러분의 손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면 온 힘을 다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 전에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 25장 26절에서도 한 게으른 종이 나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지만 너무 게을러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땅에 묻어둔 결과 영원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번 주에 읽은 이사야 56장 10절에 보면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책망합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사람들이 잠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짖어야 할 때 짖지 않는 벙어리 개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파수꾼으로서 아무 쓸모도 없게 된 것입니다. 눈이 멀고 무지하고 누워 잠자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 아직 할 수 있을 때 힘을 다해 일해야 한다. 잠언 18장 9절입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제가 아는 가장 큰 낭비는 돈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낭비하는 것일까요?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사서 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6장 12절도 “게으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같은 의미입니다. 게으르지 말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녹슬어버리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닳아 없어질 정도로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시대 분위기가 그런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하나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적게 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조사의 목적이었습니다. 기업에서 중간 관리직이나 상위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이 조사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 자기 시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조사의 핵심은 이랬습니다. “경영이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하루 8시간 가운데 실제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만약 공장에서 조립 라인에서 일을 한다면 하루 몇 시간을 실제로 일하는지 스스로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관리직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시간을 어느 정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나 일하는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 결과 미국 전체 평균을 보니까 하루 8시간 중에서 실제로 생산적인 시간은 두 시간뿐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시간은 두 시간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가 중심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틀린 생각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두 시간 동안은 엄청난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 두 시간이 다른 사람들의 여덟 시간과 견줄만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세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태도가 교회 안으로도 들어온다는 겁니다. 신학생들 중에서도 그런 태도가 보입니다. 오늘날 신학교의 흐름은 교육 과정을 점점 길게 늘어뜨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아내와 자녀들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생계를 위한 직업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든 사람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신학교를 가면 보통 한 3년에서 4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한 번에 끝낸 것이죠. 신학 훈련 과정은 근면과 절제를 훈련받는 데 유익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저는 17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21살에 대학을 졸업했고, 24살에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냥 계속 밀고 나갔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좋은 자기 절제 훈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해내는 법,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점점 과정이 늘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생들이 사역도 조금 하고, 학교도 조금 다니고, 약혼자와 데이트도 조금 하고, 라켓볼도 조금 하고, 자유 시간도 조금 누리고 그럽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 가면 한 가지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신학교 졸업생들이 그걸 감당하지 못합니다.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 예배를 없애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말씀 준비를 위한 절제된 삶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제가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목회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저는 항상 “해야 할 일을 다 끝낼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는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영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영적인 일입니다. 주님의 일은 반드시 열정적으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자매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8년 동안 한 주일학교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가르치셨답니다. 물론 같은 아이들을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니까요. 하지만 같은 연령대였습니다. 아마 3학년이나 4학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무려 18년 동안 같은 사역을 감당한 겁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계속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결 가운데 하나는 책임을 맡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자주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십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제가 억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예배에 오는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만듭니다.” 만약 제가 여기 와서 “여러분, 아직 설교 준비를 못 끝냈습니다. 화요일쯤 되면 끝날 것 같은데 다시 와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안 되죠. 예전에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금요일까지 제출하세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 3주 정도 미리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금요일에 꼭 제출하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금요일이 되었는데 절반 정도만 과제를 내고 나머지는 “월요일에 제출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안 됩니다. F입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교수님이 그렇게 엄격하실 줄 정말 몰랐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시 반박을 했습니다. “엄격한 게 아닙니다. 분명히 금요일까지라고 제가 진지하게 말을 했을 텐데요.” 학생들은 “하지만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분명히 금요일이라고 제가 미리 말했습니다.” 학생들이 또다시 얘기를 하더라고요. “왜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가서 주일 아침에 ‘며칠만 더 주시면 설교 준비를 해오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럴 순 없지 않습니까? 시간을 지키는 법을 지금 배우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제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네는 매주 주일이 될 때까지 설교 본문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니 목사가 되긴 어렵겠네.” 그런데 이런 압박감이 큰 도움이 됩니다. 어떤 반을 맡고 있거나 사역에 대한 책임이 생기면, 바로 그런 압박감 때문에 계속 움직이게 되죠. 그래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역을 맡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그냥 자유롭게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그런 사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지켜야 하는 사역에 자신을 묶어둘수록 더 열심을 내게 되고, 더 부지런히 준비하게 됩니다.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11절에는 이 말씀과 연결해서 또 하나의 원리가 나옵니다. “열심을 품고.”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입니다. 정말 중요한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게으르지 않을 수는 있지만 태도가 완전히 잘못되었을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해야 하니까 하기는 하는데 솔직히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은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러면 안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정말 좋습니다. 여기서 이 “열심”이라는 단어는 “끓는다”는 뜻입니다. 뜨겁게 끓어오른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영”은 성령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 속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끓어오르는 신자가 되라.”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상태가 아닌 언제나 끓고 있는 사람,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열정과 열심과 기쁨과 흥분과 전적인 헌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제목이 <열정을 가지라>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방금 로레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는데, 마치 작년에 버려진 새 둥지처럼 속이 비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떠났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보셨죠? 물론 만나보셨을 겁니다. 수도 없이 많습니다. 너무 흔해서 이제는 거의 사회적 전염병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병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슬픔이나 죄책감이나 비탄에 눌려 있기 때문입니까? 거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이 세상의 가장 오래된 질병은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저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선을 행하다가 지칠 수 있습니다. 열심과 기쁨과 흥분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에너지로 가득해야 합니다. 감격과 활력과 역동성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단지 해야 할 일을 의무감으로 하면서 게으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영이 끓어오르는 상태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흥분된 마음으로 말이죠.

성경에 그런 사람이 많이 나오지만, 이와 같은 표현으로 묘사된 특별한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아볼로입니다. 굳이 찾아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유대인”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아볼로는 주의 도를 배웠고, “열심으로”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표현입니다. 영이 끓어오르는 사람, 절대 멈추지 않고, 절대 느려지지 않고, 적극적이고 열정적이고 흥분된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영적인 열심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인도로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해 완전히 불타 없어지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절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했죠. “나는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 달린다. 나는 허공을 치는 것처럼 싸우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며 모든 것을 다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또 골로새서 1장에서는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정말 지칠 줄 모르는 열정적인 일꾼이었습니다. 단지 외적인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내면에서는 영이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좋아합니다. 열정과 기쁨으로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이제 11절의 세 번째 원리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단지 열심을 내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영이 끓어올라야 합니다.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고, 흥분되어 있고, 끓어오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주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마치 앞의 두 표현이 모두 “주를 섬기라”는 말을 수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영이 끓어올라야 합니다. 주를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 열정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시장에서 파는 물건에 흥분합니다. 새 집에 흥분합니다. 새 차에 흥분합니다. 새 옷에 흥분합니다. 또 사람들이 축구나 야구나 농구를 보면서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열광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수많은 일에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또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면 온 세상에 종이 울리는 것 같습니다. 표정만 봐도 다 드러납니다.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깨어 있는 동안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잠을 자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꿈을 꿉니다. 그렇게 사랑에 열광합니다. 여러분도 사랑에 빠져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어떤 기분인지 아시잖아요? 저 역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물론 예전처럼 그렇게 정신없이 들떠 있지는 않습니다. 표현하자면 예전만큼 그렇게 헤롱헤롱 거리지는 않습니다. 아마 이제 깊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겁니다. 어쨌든 마음속에서 불꽃이 튀고 종이 울리는 것 같은 그 사랑의 감정을 저는 압니다. 그렇게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흐려져 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감격하십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감격이 있다면 마음속에만 두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래야 합니다. 끓어넘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로마서 1장 8절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바울은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 자체를 사랑했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특권을 주셨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 확인해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놀랍고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특권을 허락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누리는 만족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만족보다도 크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열정으로 섬겨야 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기쁨과 감격과 열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섬길 수 없다면 사역 환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환경이 맞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정말 감격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에는 ‘섬긴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가 세 개 나옵니다. 첫 번째는 1절 끝에 나오는 “영적 예배”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이 “예배” 혹은 “섬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라트류오(latreuō)’입니다. 경외함으로 예배하는 섬김을 말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드리는 섬김입니다. 마치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을 말합니다. 7절에는 “섬기는 일”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여기 사용된 단어는 ‘디아코네오(diakoneō)’입니다.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섬김을 말합니다. 식탁에서 시중드는 일처럼 작고 평범한 일들을 감당하는 섬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며 제사장처럼 섬기기도 하고, 또 종처럼 실제적인 일을 하면서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11절에 나오는 단어는 또 다릅니다. 여기서는 ‘둘류오(douleuō)’입니다. 이 단어는 노예의 섬김을 말합니다. 종의 섬김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주인에게 내어맡긴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다른 주인을 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섬김을 열심과 기쁨과 뜨거움으로 감당해야 한다. 물론 바울은 이런 삶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려 할 때에, 가진 모든 것을 드리려고 할 때에 반드시 어려움을 만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세 가지 권면을 더 덧붙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 겁니다. 첫 번째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라는 말씀입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사람 가운데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붙들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면 미래를 바라보게 만드는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소유한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살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반대를 만나고, 무관심을 만나고, 냉담함을 만납니다. 또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도 맛봅니다. 때로는 잘못된 방식으로 일을 하다가 무너진 조각들을 주워 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열정적으로 섬기고, 아무리 헌신적으로 살아간다거 해도,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모든 섬김이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이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대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더 나은 것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주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 안에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입니다. 저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서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을 듣기를 바라며 섬깁니다. 저는 언젠가 그날이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섬깁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그리고 나서 이렇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과 승리에 대해서 이야기한 뒤에 바울은 58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상급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 마음으로 섬깁니다. 우리는 영원한 열매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모합니다. 소망합니다. 그것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로마서 8장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그날을 기다립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사명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때로는 정말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들다 해도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립니다. 왕 되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리러 오시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날에 모든 수고가 끝나고, 모든 일을 마치고,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이 우리의 닻입니다.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굳게 붙들어 줍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런 소망이 없다면 이 세상은 정말 암울할 겁니다. 계속 섬기고 또 섬기고 또 섬겨도 언제나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다 해내지 못하고, 기대했던 열매를 보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한다면 정말 절망스럽지 않겠습니까?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러나 언젠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이뤄질 것이다. 언젠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위에 빛이 밝아올 것이다. 언젠가는 모든 수고가 끝나고, 우리는 수고를 마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그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섬기는 동안에 기뻐하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실패를 경험하기 때문이죠. 좋은 일 하나를 보면 부족한 일들이 훨씬 더 많이 보입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때마다 기쁨을 느끼지만, 동시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러나 저는 미래를 소망하며 기뻐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12절이 “환난 중에 참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 “참는다”는 말은 압박 아래 그대로 머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압박을 견딜 수 있습니다. 시험을 견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환난”이라는 단어는 ‘들립시스(thlipsis)’인데, 문자적으로는 “압박”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압박을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계속 소망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올 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반드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습니다.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거절을 견뎌야 합니다. 적대감을 견뎌야 합니다. 사탄과 귀신들과의 싸움을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것들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영원한 승리의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굳게 붙듭니다. 그 소망이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압박을 견디게 합니다. 압박을 계속 견디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압박을 견디는 동안 12절은 “기도에 항상 힘쓰라”라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계속 압박을 허락하시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않는다면, 어쩌면 지금 압박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압박이 없는 이유는 어쩌면 섬기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섬기고는 있지만 뜨거운 열심과 불타는 마음으로 섬기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님을 섬기고 있다면, 온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면, 기쁨과 열정으로 섬기고 있다면, 반드시 고난과 압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장차 올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습니다.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여러분은 반드시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을 붙들게 될 겁니다. 여기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표현은 꾸준히 계속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즉시,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삶 전체가 하나님과 열린 교제가 되는 것이죠.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누군가 제게 어떤 말을 하면 저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로 반응합니다. 저의 삶의 방식이 그렇습니다. 오늘 예배 중에 찬양을 드리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제 자녀들도 여러 번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역에 대한 생각도 떠오릅니다. 여러분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도 떠오릅니다. 그러면 저는 하나님께 저에게 힘을 주세요, 지혜를 주세요, 해야 할 말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삶 전체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장으로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입니다. 영적인 호흡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드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신자들을 향해 진심어린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높아지기를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 높이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때에는 온 마음을 다한 열정적인 섬김, 뜨거운 섬김, 순종하는 섬김, 부지런한 섬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시험과 환난과 압박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장차 올 영광과 상급에 대한 강한 소망이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그 소망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어떤 상황도 견디게 만들고, 자신과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끊임없이 주님 손에 맡기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 몇 구절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더 남아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듣기만 하기보다 잠시 하나님 앞에서 직접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들은 말씀이 그냥 귀를 스쳐 지나가고 끝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가 성령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늘 기억나게 하시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헌신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하신 삶의 원리들에 순종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높임 받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있는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충만한 복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그 복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아직 구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오늘 그 영혼을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게 하시고, 죄 사함과 영생과 복을 얻게 하시고,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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