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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도 로마서 12장을 보겠습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연말이 되면 참 바쁘지 않습니까? 모임도 많고, 여행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방문해야 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이렇게 분주한 시기에 말씀 앞에 함께 모이는 이 시간이 저에게는 정말로 소중합니다. 왜냐고요? 세상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갈급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오시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쁩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서 12장 9절부터 21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계속 말씀드려 왔듯이, 로마서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부분이 로마서의 핵심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칭의라는 위대한 주제 말입니다. 사실 로마서가 기록된 궁극적인 목적은 신자를 칭의에 이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앞부분에 있는 모든 내용은 이 목적을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칭의의 교리, 성화의 교리, 그리고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배운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위대한 진리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위한 기초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12장부터 16장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 편지의 진정한 목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기초를 세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진리의 기초 위에 서서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9절부터 21절까지에서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미 살펴본 1절과 2절에 나오는 헌신에서 시작됩니다. 3절부터 8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특별한 위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하고, 그다음에 교회에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교훈을 제시합니다. 9절부터 21절을 보면 마치 원 같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품고 있는데, 마치 동심원이 점점 넓어지는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9절은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 출발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거짓 없이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합니다. 실제적인 그리스도인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진실한 사랑, 악을 미워하는 태도, 선에 대한 헌신이죠. 간단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다가 10절에 이르면 원이 넓어집니다.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의 가족을 포함합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바울은 10절부터 13절까지에서 그리스도인은 거짓 없이 사랑해야 하고, 악을 미워해야 하고, 선에 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을 향해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존중하고 높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우리의 섬김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길 때 우리는 전적으로, 열정적으로, 마음을 다하여, 열심으로, 순종으로, 부지런히 섬겨야 합니다. 그 결과 12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여러 시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시험 가운데서도 소망 가운데 기뻐해야 합니다. 시험 가운데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시험 가운데서도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시험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시험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13절은 우리가 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들은 말하자면 신앙의 가족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족을 돌봐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듯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적인 원, 그리고 그리스도인 가족의 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저녁에는 세 번째 원과 네 번째 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세 번째 원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부터 16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원을 더 넓혀 우리가 모든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상대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사람들부터 시작합니다. 14절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바울은 신앙의 가족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고 이제 모든 사람을 대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을 박해하거든 그 사람을 축복하라고 합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랍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까지도 축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새로운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계속해서 나왔던 원리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또한 누가복음 6장 27절과 28절에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반복해서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라는 겁니다.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잠시 누가복음 6장 27절을 보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진실한 사랑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위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거짓된 사랑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참된 사랑입니다. 로마서 12장 9절에서 말하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도 나에게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선하게 대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려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된 사람이 사는 방식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얼마 전에 제 조카 팀 레이가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참 훌륭한 청년이었는데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정말로 헌신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조카 팀이 근무하고 있던 마트에 마약을 살 돈이 필요했던 강도가 들어와 버렸습니다. 위험에 처한 계산원을 도우려다가 그 순간 강도가 쏜 총에 생명을 잃고 말았죠. 저는 팀의 아버지인 제 처남 드웨인 레이의 반응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현재는 워싱턴에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우리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드웨인의 가장 큰 관심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그 사건과 관련된 법적 절차 때문에 이곳에 왔을 때도, 아직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드웨인의 가장 큰 관심은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입니다. 세상은 사랑하는 가족이 살해당했을 때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으로 대하라고 요구합니다.

얼마 전에는 저희 가정도 결코 반갑지 않은 일을 겪었습니다. 도둑이 든 겁니다. 몇 주 전의 일인데요, 아이들이 집을 나서면서 경보 장치 켜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지만, 패트리샤가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집안 물건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죠.

부엌 창문이 강제로 뜯겨져서 열린 채로 집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패트리샤는 마시에게 “뒷문으로 빨리 나가자. 아직 집 안에 누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빠져나와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리고 집 안이 완전히 뒤집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도둑들은 급하게 빠져나가면서, 문으로 나가면 경보 장치가 울릴 수 있다고 생각을 했는지 다시 창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칼을 하나 떨어뜨렸습니다. 만약 집 안에서 아이들과 마주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가지고 들어온 아주 큰 식칼이었습니다.

더 소름끼치는 일은 바로 전날 같은 시간에 멜린다가 잠시 집에 혼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하루만 일찍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 뒤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런 일을 겪으면 처음에는 매우 인간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방에 들어갔더니 물건들이 짓밟혀 있었습니다.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사방에 내팽겨쳐져 있고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소중한 물건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값비싼 물건은 없었지만 추억과 의미가 담긴 물건들이 많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시험받는 순간이구나.” 여러분의 사생활을 침해한 사람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훔쳐 간 사람들, 여러분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을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 신앙의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14절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 영적인 박해이든 다른 어떤 형태이든, 여기 사용된 단어는 디오코(diōkō)입니다. 해하려는 의도로 뒤쫓는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해하려는 사람조차 축복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에게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라는 겁니다. 축복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심과 은혜와 긍휼을 부어 주시기를 바라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빼앗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은혜가 베풀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을 보면 스데반도 그랬습니다. 돌에 맞아 쓰러져 죽어 가면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 이 일에 대해서 저들을 정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축복하라”는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축복하라는 의미입니다. 끊임없이 축복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축복하다”라는 말은 칭찬하며 말하다, 선한 뜻을 품다, 상대의 유익을 바라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반응은 인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입니다.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할 때 예수님은 결코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한 뒤에 다시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덧붙입니다. 다시 말해서 축복하면서 동시에 저주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주도 하고 축복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축복만 하라, 저주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입니다.

지난주에 아내가 제게 한 흥미로운 기사를 보여줬습니다. 저희 집으로 정기적으로 배달이 되고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간행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최신 연구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과학 분야의 연구도 있고, 성격 연구나 심리학, 또 사회학 연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고혈압, 불안과 관련된 여러 질병을 겪고 있다는 내용인데,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런 고혈압이나 불안,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의 상당수가 장기간 지속되는 과제나 업무가 주요 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스트레스가 직장의 과도한 업무 때문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심각한 스트레스는 훨씬 사소한 일들에서 비롯되는데, 자동차 열쇠를 찾지 못했다거나, 쇼핑몰 주차장에서 주차 공간을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한다거나, 물건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거나, 도로에서 누군가가 자기 앞으로 끼어든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한 일들이랍니다. 바로 이런 일들이 스트레스를 유발한답니다. 심각한 신체적 질병까지 일으킬 수 있는 스트레스를 말이죠. 어려운 일이 문제가 아니라, 쉽게 폭발하는 자기 마음이 문제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점점 심해지는 이기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에 아주 집착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 길을 막거나 방해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째려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려고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집에 가고 있었는데요, 어떤 사람이 주먹으로 제 차의 창문을 깨뜨리려고 했던 일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었을 겁니다. 아마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운전 중에 자기 길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일 아침 예배를 마치고 가족들하고 같이 집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고 있었는데, 제가 자기 차선을 침범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갑자기 제 앞을 가로막고는 차를 세워버렸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죠. “일단 차를 세우자. 저 사람이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싸우지는 말아야겠다. 어떻게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상의를 벗어제낀 상태로 저에게 뚜벅뚜벅 걸어왔습니다. 아마 남성적 이미지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차에 가까이 와서는 “창문 내려!” 이러면서 소리를 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창문을 조금 내렸습니다. 아주 흥분을 해서는 금방이라도 폭력을 휘두를 것 같이 보였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막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죠. 그 사람이 말을 다 쏟아낸 후에야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제 좀 기분이 나아지셨나요? 무슨 일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혹시라도 불편하게 했거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이죠.

그러자 그 사람이 주먹을 힘껏 뒤로 제치더니 있는 힘을 다해서 제 창문을 확 내리치더라고요. 너무 세게 쳐서 그 사람 주먹이 까져 버렸습니다. 그러더니 “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자기 손을 움켜쥐고 말았죠.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누군가 자기 영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죄송합니다. 불편을 끼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좋게 반응하려고 했습니다. “차에 돌아가셔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죠. 그 사람은 결국 아픈 손을 부여잡고 그냥 자기 차로 돌아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여러분, 참 두려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가 극에 달했습니다. 자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침해했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적대감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니 결혼 생활이 무너지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다른 인간관계들이 무너지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되갚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누군가 해를 끼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보복하지 않습니다. 제게 이렇게 반문할 분도 계실 겁니다. “왜 차에서 내려서 그 사람을 한방에 때려 눕히지 않으셨어요?” 또는 “경찰 영화에서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이 가까이 오면 차 문을 확 열어서 넘어뜨리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한바탕 본때를 보여주지 그러셨습니까?”

사실 저는 그렇게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로마서 12장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말씀을 실제로 적용해 보고 싶었습니다. 최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상할 정도로 이 본문을 직접 실행에 옮길 기회를 여러 차례 저에게 주고 계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본문을 다 마칠 날이 기다려집니다. 여러분이 괜찮으시다면 저는 빨리 15절로 넘어가고 싶습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이것 또한 그리스도인다운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이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질투심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입니다.

잠언 17장 5절을 보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3절에서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 다른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보여 줄 수 있는 아름다운 특징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성품입니까?

바울도 아마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겁니다. 한 구절만 더 말씀드리면 고린도전서 12장 26절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영광을 함께 기뻐하는 것,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5절에서 계속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무관심하지 않은 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냉담해지고 있습니다.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울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클라이오(klaiō)인데요, 문자 그대로 눈물을 흘리다,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감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뻐할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그 기쁨에 동참해야 하고요.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 사람을 깊이 아끼기 때문이죠. 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베푸신 복을 보고 너무 기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기쁨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웃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기뻐하는 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신 복을 귀하게 여기고, 그 사람이 복을 받은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기 때문에 그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다른 사람과 함께 우는 사람입니다. 친구의 눈물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슬픔에 빠진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와 함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것 역시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냉담하고, 감각을 잃어 가는 세상 속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구약의 예레미야가 떠오릅니다. 예레미야는 평생 울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예레미야는 분명히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만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문제에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9장 1절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한 부담이 정말로 컸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아예 눈물의 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없이 멸망해 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향한 마음의 고통을 밤낮으로 쏟아 내고 싶었던 겁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민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다가올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경험을 합니다. 일상 속의 작은 문제일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공개적인 사역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박해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이런 일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적 기준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을 축복하십시오.

지금까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원리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바울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16절에 세 가지 교훈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16절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아주 짧고 간결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을 동일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겁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말라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으려는 계산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생각하십시오.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십시오, 이런 말입니다.

로마서 15장 5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라고 합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는 차별하면 안 됩니다. 누구를 더 높이고 누구를 더 낮추고 이렇게 여기면 안 됩니다. 이 원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본문은 빌립보서 2장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야고보서 2장 1절부터 9절에도 같은 원리가 나옵니다. 야고보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라는 것이죠. 만일 금가락지를 끼고 부유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온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여기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반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쉽게 사회적 지위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 곁에 있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합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또 고린도전서 1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 모든 것은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겸손에서 흘러나옵니다.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자, 이제 바울은 16절에서 두 번째 원리로 넘어갑니다.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한 이후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높은 것을 생각하거나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높은 것”이라는 말은 높고, 고상하고, 뛰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높은 자리, 높은 사람들, 높은 지위, 세상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들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데 처하며”라고 합니다. 여기서 “처한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깔보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현대 영어에서는 상대를 깔보면서 대하는 태도를 뜻하지만, 여기에서의 의미는 “함께 내려가다”입니다. 문자적으로는 “함께 이끌려 가다”, “함께 어울리다”,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높은 것을 좇지 말고 낮은 사람들과 함께하라는 것이죠. 여기서 “낮은 데”라는 말은 타페이노스(tapeinos)인데요, 문자적으로는 “땅에 붙어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낮은 자들과 함께 땅에 서 있으라. 그렇다고 해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을 추종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는 겁니다. 쫓아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도, 또 제 친구들 중에도 높은 지위와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서도 영향력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평범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친구들로 인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결코 덜 중요하고 덜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들 역시 제 삶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제게는 그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귀중한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바울의 말도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낮은 자들과도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높아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도 편안하게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점은 분명합니다. 교회에는 귀족 계층을 위해 구별된 자리가 없습니다. 특권층만을 위한 자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낮은 자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 원리는 누가복음에서 매우 아름답게 설명됩니다. 잠시 누가복음 1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12절입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사람들은 흔히 내가 초대하면 상대도 나를 초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대접하면 상대도 나를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이렇게 하면 복이 있답니다. 왜냐고요? 이들은 여러분에게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유한 사람을 초대하면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갚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초대하면 누가 갚아 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누구에게 보상을 받고 싶으세요? 부유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물론 사람들을 대접하고 다시 또 여러분을 초대하거나 선물을 주면 기분 좋은 일이죠. 그러나 그 어떤 선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식사를 대접할 기회가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 저는 사람들, 맹인들을 초대하십시오. 여러분을 다시 초대할 수 없는 사람들, 여러분에게 갚아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십시오. 세상 기준으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과 기꺼이 어울리시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기에서 말하는 이 “낮은 데”라는 것은 영적인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낮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기준에서 볼 때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매우 높은 수준에 있는 경우를 저는 자주 봅니다.

만일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여기고 동일하게 대하는 겸손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함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두 번째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시작되고 자신에게서 끝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려면 반드시 깨달아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사회적 귀족 계층 같은 구별이 없습니다. 또 지적인 귀족 계층도 없습니다. “나는 너무 똑똑해서 어리석은 사람들만 가득한 그런 자리에 가고 싶지 않다.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거기서?”,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점이 이겁니다. “나와 수준이 맞는 사람들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는 사회적 귀족 계층, 지적인 귀족 계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원래 그렇습니다.

교회 성장 이론이 참 많습니다. 왜 교회가 성장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이론들이 있죠. 그 가운데 “동질 집단 이론(Homogeneous Units)”이 있습니다. 교회가 동질적인 집단을 중심으로 성장한다, 이런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고, 비슷한 사회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성장하게 된다, 이런 주장입니다. 또 모두가 흑인이고 비슷한 빈민가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공통된 배경과 유사한 경험 때문에 그 교회가 성장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교회, 그러니까 이질적인 집단이 모인 교회는 성장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이론을 가르치던 사람들이 학생들을 우리 교회로 데리고 왔습니다. 세미나를 위해서 이 지역에 올 때마다 한 3~4년 정도 우리 교회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더 이상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유를 물어봤죠.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고요. “저희가 더 이상 학생들을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그레이스 교회가 우리 이론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교회를 보고 자기들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전혀 자기 주장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대신에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학생들이 자기들 이론과 맞지 않는 교회는 보지 못하게 해 버린 것이죠.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이론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로 안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어를 사용하죠. 남부 캘리포니아라는 같은 지역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사회적 배경이나 지적 수준에 있어서 매우 폭넓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제가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아마 나중에 여러분도 기사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의 유명한 시사 주간지인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의 기자가 전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독립 교회에 대한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레이스 교회를 그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신문이 독립 교회에 대한 기사를 쓰는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정말 반가웠습니다. 더군다나 그 기자는 우리가 소송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참 좋았습니다. 왜냐고요? 그동안 우리 교회에 대해서 글을 쓴 사람들은 거의 모두 소송 이야기만 다뤘습니다. 그런데 그 기자는 우리 교회 자체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스페인어권 사역이 있는지, 흑인 성도들이 있는지, 아시아계 성도들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의 여러 사역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습니다.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목사님 교회로 오는 걸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기반입니다. 우리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입니다.” 저는 이 점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기자가 다시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독립 교회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는 “왜 큰 교단에 속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많은 대형 교단들이 성경적이지 않은 여러 문제에 깊이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자에게 우리 교회에 다양한 계층의 성도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원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사역은 사회적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인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역은 영적이고 성경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함께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귀족 계층이란 없습니다. 이 원리는 교회 밖으로도 확장됩니다. 우리는 낮은 사람에게도 다가가야 하고 높은 사람에게도 다가가야 합니다. 어느 한쪽에게만 다가가면 안 됩니다. 양쪽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제 17절에 이르면 원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9절에서 개인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10절부터 13절까지에서 하나님의 가족을 다뤘죠. 그리고 14절, 15절, 16절에서는 모든 사람을 포함했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신앙의 가족도 포함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원이 점점 넓어져서 모두를 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넓어집니다. 사실 이미 14절에서 소개되었습니다. 네 번째 원은 원수를 대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바울은 원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설명하고 예를 들어 드린 후에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음악회가 있고, 또 이어서 크리스마스 시즌이 오고, 그 다음에는 새해가 시작되기 때문에 한동안 이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원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매우 직접적인 원수까지 포함합니다.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다시 14절의 주제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14절은 긍정문이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그러니까 해를 끼치려고 쫓아오는 사람을 축복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는 “누군가가 너희에게 악을 행하더라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인간의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과는 정반대되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목사님. 출애굽기 21장, 레위기 24장, 신명기 19장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공적인 법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 율법의 그 규정은 국가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국가는 악에 대해 정당한 형벌을 집행하는 사법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살인이 일어나면 살인자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도난 사건이 발생하면 도둑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를 다스리는 법의 영역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원칙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복수를 허락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사적 보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13장을 공부하게 되겠지만, 거기에서 바울은 국가의 경찰과 군인이 칼을 헛되이 차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3장 4절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니까 사회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적인 심판의 기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사회가 공적 심판의 역할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 사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피에는 피로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범죄가 처벌받지 않은 채로 그냥 지나가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해 왔습니다. 법의 허점과 여러 제도적 문제들 때문에 수많은 살인자들이 처벌받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회 전체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회를 위해 정하신 법의 원리에 따라 악을 적절하게 심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을 행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사회 전체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우리 사회를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복수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복수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할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에서도 바울은 같은 말을 합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도 같은 원리를 가르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좋은 일을 계획하라”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의 말씀과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악으로 되갚는 대신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을 따라야 합니다. 선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여기서 “도모하라”는 말은 매우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좋은 일을 미리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미리 계획하라는 뜻입니다. 선을 행할 것을 미리 마음에 정해 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당황하여 육신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응답할 선을 미리 준비해 두라는 의미입니다. 선을 베푸는 삶을 즉흥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획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에게 악을 행했을 때, 만일 여러분이 즉각적인 반응에만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악에 대해 악으로 반응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의 본성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찾아올 때에 선으로 반응하도록 미리 자신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준비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나누었던 주제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지난주에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자기 절제입니다. 절제된 삶이란 생각의 질서가 잡힌 삶입니다. 모든 반응이 미리 준비되어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인간적인 감정에 그대로 끌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상황을 생각해 보고, 예상해 보고,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선으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는 삶이고, 질서 있는 삶, 절제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선을 행할 것을 미리 준비하라고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지 말라고 합니다.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말에서 “선한”이라는 단어는 칼로스(kalos)입니다. 눈에 보이는 선함, 밖으로 드러나는 선함, 분명하게 나타나는 선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악을 행했을 때, 상대방이 분명히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선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생각에만 머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의 감정에만 그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선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원수에게 선으로, 친절로, 은혜로 응답해야 합니다.

저도 여러 해 동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면 참 흥미로운 편지들을 많이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매우 화가 나 있습니다. 오늘도 어떤 사람이 저를 이단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저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일에 미리 마음을 준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제가 정해 놓은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반응이 친절하기를 바랍니다. 대개 이런 식입니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어떤 일로든 상처를 드렸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악에게 이렇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상대방에게 여러분의 친절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선한 행동이나 선물을 베푸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매우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반응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미 올바른 반응을 준비해 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하나님을 바르게 나타내고, 디도서 2장 10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18절에서 원수들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덧붙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참 좋은 말씀입니다. 매우 실제적입니다. 바울은 “화목하게 살아야 해. 그러나 몇 가지 예외를 인정할게”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할 수 있거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화목하게 지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을 더 해야 할지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는데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죠. 그래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이 위로가 됩니다. 성령님도 모든 경우에 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로서는”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화목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여러분 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라,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갈등의 원인이 되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화목을 추구하십시오. 상대방의 비난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여러분은 화목을 선택하십시오. 평화를 이루려 하십시오. 갈등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서 이 “너희로서는”이라는 표현은 저에게 매우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정말 화목을 이루려면 진리를 타협해야 할 것 같은데요. 진리를 조금 물러서야 할 것 같은데요. 이 사람은 내가 교리를 바꾸지 않으면, 혹은 내가 틀렸고 당신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계속 화를 낼 텐데요.” 그럴 때 우리는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너희로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우리는 화목을 추구할 겁니다. 화목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타협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하지 않을 겁니다. 만일 여러분이 요구하더라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로서는,” 다시 말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범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갈등을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이에도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36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예수님은 자신이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오셨지만 모든 경우에 평화를 이루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리를 타협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로서는,” 다시 말해서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할 수 있거든,” 그것이 가능하다면, 여기서 바울의 핵심 명령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세상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 정말 성가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3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성결 다음에 바로 무엇이 나옵니까? 화평입니다. 여러분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문제를 만드는 사람입니까?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화평하게 하십시오. 화평하게 하십시오

이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사기 14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도 흥미로우셨겠지만, 더 흥미로우실 겁니다. 삼손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14장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다음에 사사기가 나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지 몰랐던 사람의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소라(Zorah)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단 지파, 유다 지파, 이 두 지판의 경계 근처에 있던 마을입니다. 이 소라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세펠라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작은 마을에 마노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은 나실인, 그러니까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평생 머리를 자르지 않았고.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했습니다. 매우 절제된 삶이 요구되었습니다. 시체를 만져서도 안 되었습니다. 나실인 서원에 포함된 규례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이스라엘 땅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소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지만,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딤나라는 블레셋 마을이 있었습니다. 약 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블레셋 사람들은 소라에서 불과 6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들어와 있었고, 예루살렘에서도 32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위협이 여전히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일으켜서 블레셋 사람들을 대적하게 하셨죠.

사사기 14장 1절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삼손의 첫 번째 실수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마을을 드나들며 어울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삼손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여자를 밝히는 겁니다. 삼손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복장을 생각해 보면 오래도록 지켜볼 수도 없었을텐데 어쨌든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내가 딤나에서 한 여자를 보았는데…” 이렇게 했습니다. 삼손의 문제는 딤나에 내려가서 여자를 한 번 그냥 스윽 보고 와서는 곧바로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그 여자를 내 아내로 맞이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들이 삼손이라면 부모도 쉽게 말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합니다.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여자 중에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냐? 꼭 블레셋 여자하고 결혼을 해야 되겠니? 전통을 깨야 되겠니? 집안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야 하겠니? 장인과 장모는 어떻게 만나려고 그러는 거야? 도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고집이 아주 셌습니다.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삼손은 블레셋 여인을 보고는 그 여인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운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탐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뜻은 아닙니다. 삼손의 정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 했다는 의미입니다. 삼손의 욕망과 그로 인해 생겨난 혼란까지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셔서 결국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는 결과를 이루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의롭게 행동하든 의롭지 못하게 행동하든,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삼손이 의로운 행동으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불순종의 길을 선택한 결과 눈이 멀고, 그렇게 비참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죠. 삼손 자신의 선택입니다.

5절입니다. “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그러자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시매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삼손은 맨손으로 사자를 잡아서 찢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부모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부모와 떨어져 있던 중에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길을 가다가 사자를 만나서 찢어 죽였는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8절입니다.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삼손은 다시 같은 길을 따라서 블레셋 여인이 살고 있는 딤나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전에 죽였던 사자의 사체를 보려고 옆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보니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벌들이 그 사체 안에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삼손은 그 꿀을 손으로 떠서 먹었습니다. 죽은 짐승의 시체를 만지다니, 나실인 서원을 어기는 행동을 해 버렸습니다.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청년들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서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삼십 명을 데려왔습니다. 어쩌면 삼손을 감시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손의 체격이 워낙 크고 위압적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서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어쩌면 삼손이 무슨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지켜보는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손의 체격이 상당히 거대했던 모양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당시에는 이렇게 수수께끼가 중요한 오락거리였습니다. 다른 오락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죠. 텔레비전도 없고 다른 즐길 거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수께끼를 맞히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날에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듯이, 그 시대 사람들은 수수께끼를 즐겼습니다.

삼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속옷과 겉옷 한 벌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단어를 보면 상당히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의복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삼손은 “내가 낸 이 수수께끼를 너희가 맞히면 내가 너희 모두에게 값비싼 옷을 한 벌씩 줄게”라고 말한 것입니다. 꽤 큰 내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말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러자 그들이 말합니다. “좋아. 수수께끼를 내봐. 우리가 풀 수 있어.” 일주일이나 시간이 있으니까 충분히 맞힐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사람들이 사흘 동안이나 애를 써 보았는데 답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잔치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보통 일주일 동안 결혼 잔치가 계속되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마지막 날 모든 행사가 마무리되고 하객들이 떠난 뒤에 공식적인 부부가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다시 말해서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너희 집 가족을 모두 죽여 버리겠어” 이렇게 말한 겁니다. 젊은 여인에게 엄청난 압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려울 수밖에요. 본문에는 일곱째 날에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지만, 아마도 첫날부터 계속 압박을 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되자 “이제 정말로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한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답을 알아내라고 재촉했다면, 마지막 날에는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죽여버리겠어”, 이렇게 협박까지 더한 것입니다.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마치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처럼 계속되는 원망입니다. 삼손은 결혼을 코 앞에 두고 있습니다. 행복한 신혼생활을 기대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해서 하소연을 늘어놓으니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도다 하는지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 하리요 하였으나.” 하지만 삼손의 이 말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습니다. 계속 울었습니다. 잔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17절입니다. “칠 일 동안 그들이 잔치할 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그에게 강요함으로 일곱째 날에는 그가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그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더라.” 결국 삼손이 굴복하고 맙니다. 삼손은 말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죠. 끊임없이 원망하는 여인은 군대의 공격보다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삼손이 정말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19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이 아스글론은 4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삼손은 45킬로미터를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딤나에서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딤나 사람들이 삼손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다른 마을로 가서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모두 챙겨서 돌아와 나눠줬던 겁니다. 그런데 삼손이 떠나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결혼식을 코앞에 둔 약혼녀가 제단 앞에 서 있는데, 삼손은 삼십 명을 죽이러 4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갔습니다.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래 걸렸을 겁니다.

그 여인은 결혼식장에 홀로 남겨져 난처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딸을 삼손의 친구에게 시집보내 버립니다.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 딸을 결혼식장에 덩그러니 세워 둔 채로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던 거죠. 이미 잔치 준비가 모두 되어 있고, 처음부터 결혼식을 다시 치르기에는 비용도 너무 많이 들 것이니까요. 그래서 결국 가장 적당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고 만 겁니다.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아버지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상대가 누구입니까? 삼손입니다. 아무도 삼손을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라도 만일 딸이 한 명 더 있다면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 딸을 데려가십시오”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삼손은 이미 30명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장인은 “이 딸을 데려가시오. 이 딸을 데려가시오”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삼손은 더 화가 났습니다. 수수께끼 때문에 이미 화가 나 있었는데 이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 여인과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했던 압박 때문에도 분노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4절을 보면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다가 둘씩 꼬리를 묶고는 그 사이에 횃불을 달았습니다. 동물 학대라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일 겁니다. 삼손은 횃불에 불을 붙인 뒤에 그 여우들을 곡식밭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당시에 보복하는 아주 흔한 방식입니다. 원수에게 해를 끼치고 싶으면 아직 베지 않은 곡식이나 저장 곡물을 불태웠습니다. 보복했습니다. 보복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삼손은 수수께끼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 서른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밭을 태워 버렸습니다. 삼손은 완전히 복수심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쌍한 여우들만 상상조차 못할 고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6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물론 실제로는 끝내 사위가 되지 못했지만 말이죠.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자기들에게 행한 일 때문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왜 삼손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삼손에게 보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그 여인과 아버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을 불태워 죽인 것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까지 철저하게 쳐부수었다”, “완전히 도륙했다”, 이런 뜻입니다.

그 일을 마친 후에 삼손은 바위 산으로 올라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몸을 숨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보복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다음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삼손이 숨어 있던 바위 굴로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찾아왔죠. 11절입니다.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학살을 주제로 짧게 노래를 부른 겁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복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보복의 연속입니다.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삼손은 또 다른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 후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여인도 마음에 들어했죠.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어떻게든 죽이고 싶어했는데, 이미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죠.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들릴라에게 접근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내.” 결국 삼손은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맙니다. 그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사건 이전에도 삼손은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야기 할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성읍의 성문을 뽑아 들고 그대로 걸어갔습니다. 거대한 성문을, 엄청나게 큰 나무 기둥들에 금속을 입혀 만든 문이었는데, 그것을 들고 61킬로미터를 걸어 언덕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사사기 16장의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결국 들릴라는 삼손의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말했죠. “삼손을 잡았다.” 삼손의 눈을 뽑아버리고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머리를 깎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맷돌을 돌리는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잘 기억하실 겁니다. 삼손은 다시 블레셋 신전 안으로 들어갔고 “내 손을 기둥에 대게 해 달라. 내가 몸을 의지하고 서 있겠다” 이렇게 말하죠. 그리고는 그 기둥 둘을 밀어서 넘어뜨립니다. 그 결과 아마도 블레셋 사람 2만 명 정도가, 그리고 삼손 자신도 그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건 이겁니다. 복수는 결국 모든 관련자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수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제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다시 로마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아주 다정하고 간절한 호소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직접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직접 심판을 집행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문자적으로 “처벌하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벌을 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몫이 아닙니다. 대신에 이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신명기 32장 35절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누구의 말씀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직접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직접 벌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를 다루실 겁니다. 믿으십시오. 어떤 죄인도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복수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벌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나훔 1장, 하박국 1장, 시편 37편, 시편 94편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을 반드시 갚으십니다.

오히려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복수를 하지 말고 도와 주라는 겁니다. 도우십시오. “왜 그래야 합니까?”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참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이 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아시겠어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저도 이해하기 위해서 참 애를 많이 썼습니다. 많은 주석가들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한 가지 관습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수치와 죄책감을 드러내고 싶었을 때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싶을 때 머리에 숯불이 담긴 그릇을 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숯불은 죄책감이 주는 타는 듯한 고통과 수치심을 상징합니다.

바울이 이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수를 사랑으로 대하고, 그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면, 자신이 행한 악에 대해 타는 듯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상대방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타는 듯한 부끄러움 말이죠. 그래서 21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무엇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까? 선으로 이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이기라”는 단어는 니카오(nikaō)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나이키(Nike)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승리’라는 뜻입니다. 승리자가 되십시오. 정복자가 되십시오.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피해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십시오. 정말 실제적인 말씀 아닙니까?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밤 정말 인내심 있게 참 잘 들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얼마나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바울의 답을 들어 보십시오. 먼저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듭니다. 겸손하게, 그리고 따뜻한 애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봅니다. 열정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깁니다. 그렇게 섬길 때에 반드시 따라오는 저항과 어려움을, 소망과 기쁨과 믿음의 기도로 맞이합니다. 또 시험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면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집을 나누며 필요를 채워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때문에 공격을 받을 때에도, 우리를 대적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견딥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명예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지위나 직분을 얻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교제합니다. 또한 우리는 지적 우월감이나 사회적 특권 의식이 없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조차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했든지 선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모든 복수와 심판과 처벌은 오직 하나님께 맡깁니다.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깁니다. 바울이 말하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의 삶입니다. 칭의가 실제 삶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 말씀 안에서 새롭게 힘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배우기 위해 나온 귀한 성도들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실제로 적용되게 하시고, 이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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