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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고린도후서 3장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3장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바울이 사랑했던 고린도 교회에 진심을 담아 보낸 그런 편지입니다. 3장 6절부터 18절까지를 함께 보면서 “새 언약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여러분에게 새 언약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주어진 구원의 약속입니다. 새 언약은 영광스럽습니다. 충분합니다. 우리를 구원합니다. 바로 이 새 언약이 기독교 복음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의로 덮어 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새 언약을 전합니다. 새 언약이 복음, 그러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바울도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울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새 언약과 함께 옛 언약을 전하면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구원에는 의식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행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악 앞에서 깨어지고, 통회하고, 겸손해져서 심판과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와 긍휼과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근거로 하여, 죄인을 용서하시고, 품으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그 어떤 의식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의례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참된 새 언약을 믿는 교회는 의식이나 상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상징에 맡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맡깁니다. 그러나 바울 시대든 오늘날이든 이른바 상징적 종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례 중심의 종교, 제사장 중심의 종교입니다. 상징적인 행위에 영적인 의미와 영적인 실체와 구원의 은혜를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에게 다가와서는 구원이 확실해지려면, 구원이 인정을 받으려면 모세의 의식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죠. 정결 예식과 각종 의식과 제사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폐기된 옛 언약의 상징으로 돌아가라고 요구를 한 겁니다. 그러나 상징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의 실제를 거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상징의 본래 목적과 의미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 상징들은 은혜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생명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 일을 성취하실 분을 가리키는 예표일 뿐이었죠.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사람들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 전환을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립하는 것도 아닙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옛 언약은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의를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폐기되어야 했고 새 언약으로 대체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옛 언약의 목적도 분명했습니다. 매우 선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었죠. 그 목적을 다했을 때, 옛 언약이 폐기되고, 그 자리에 새 언약이 들어온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복음주의 진영 안에도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관계,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번 주에 매우 놀랍고 안타까운 사건으로 인해서 이 사실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 성도님이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와 담임 목사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목회 경력이 꽤 오래 되신 분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다가 목사님께 이분이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즉시 이렇게 대답을 하셨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오해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적 지도자가 이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시대에도 율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율법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 이제 율법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하던 내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좁혀 들어가듯이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말할 때는 보통 모세 율법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율법이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처음의 다섯 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세 가지입니다. 시민법, 도덕법, 그리고 의식법입니다.

이 세 가지 종류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시민법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사회적, 경제적 삶을 위한 하나님의 지침입니다. 물론 일부 원리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변 나라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죠. 이방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드러내는 순결한 증인으로 서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 그러니까 모세 율법에는 이스라엘을 특별한 나라로 세우기 위한 시민법이 있습니다.

둘째로 도덕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 가운데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사회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규정이 아닙니다. 한 나라를 구별되게 만들기 위한 사회적 규범도 아닙니다. 도덕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 사람을 향한 태도, 그리고 삶 속에서 드러나는 도덕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마음과 관련이 되어 있죠. 덕과 의와 죄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의 세 번째 요소는 의식법입니다. 이 의식법은 일종의 예표요 상징입니다. 어떤 형태였든 모두 구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식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서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다른 의식은 십자가의 희생을 보여줬습니다. 예를 들어 동물 제사입니다. 정결 예식은 죄에서 깨끗해져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구원의 결과와 목표인 안식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처럼 모세 율법의 의식법은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세 가지 종류로 이루어진 율법은 매우 포괄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한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으로서, 이 백성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었고, 세상과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한 것이죠. 이스라엘에는 음식에 관한 규례가 있었습니다. 절기와 명절이 있었죠. 일상의 삶을 규정해 주었습니다. 옷을 입는 방식, 음식을 준비하는 방식에도 규례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을 구별된 존재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소유물, 곡식, 가축을 다루는 방식에도 규정을 두어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독립된 공동체로 세워 주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과 분리된 존재였지만, 동시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백성이었습니다. 시민법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의식법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림이요 상징입니다. 동물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적인 씻음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거나 희년을 지킨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의식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표일 뿐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도덕법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새 언약이 온 후에는 시민법,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게 하던 그 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중간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기 때문이죠.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더 이상 어떤 시민적, 사회적 행동 규범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재건주의자나 신정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죠. 그런 용어를 들어보지 못하셨다면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그런 개념을 모른다면 더 좋은 일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시민법에 따른 삶의 체계를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혀 필요하지 않은 일입니다. 이미 다 지나간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해 줍니다. 의식법 역시 폐하여졌습니다. 골로새서 2장을 보면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로 누구든지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제사 제도 전체가 폐하여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율법의 중심은 도덕법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도덕법입니다. 의식법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장차 올 새 언약을 미리 보여줄 뿐이었죠. 그래서 지난 몇 주 동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의식 중심, 성례 중심, 제사장 중심, 상징 중심의 기독교는 왜곡된 겁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모든 의식은 참된 실체인 새 언약을 보여주는 그림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새 언약이 이미 왔는데도 여전히 그 의식들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후에 다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도덕법을 보겠습니다. 가운데 있는 이 도덕법을 주목해야 합니다. 도덕법에는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덕적 본질과 거룩하심,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속성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율법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율법은 하나님 자신을 보여 줍니다. 율법이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쳤던 그 하나님이 율법에 드러납니다. 이렇게 율법은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둘째, 사람이 어떻게 살야야 하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율법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셋째입니다. 도덕법의 세 번째 목적은 사람을 죄인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인인 사람이 율법 앞에 서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기준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는 부족하다, 나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깨닫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사람의 죄를 드러냅니다. 구약에서 율법은 세상과 구별된 특별한 백성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백성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면서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서야 했죠.

두 번째 요소인 의식법은 그 백성에게 장차 새 언약에서 이루어질 구속을 생생한 그림과 상징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구원이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핵심인 도덕법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사람이 스스로 부족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식법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이어지도록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의식법을 계속 붙잡고 이어가려고 했죠.

이 사람들을 유대주의자들이라고도 부르고, 거짓 교사들, 거짓 사도들, 또는 할례파라고도 부릅니다.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교회가 있는 곳마다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계속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서, 그 의식들이 구원에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옛 언약의 상징으로 돌아가라고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왜 상징이 필요합니까? 이들은 다시 상징으로 돌아가서 상징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복음의 실체를 거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상징이 가진 본래의 의미까지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 은혜의 복음에서 떠나서, 상징과 그림자와 모형에 머무는 공허한 성례주의로 돌아가는 것이죠. 바로 그런 일이 고린도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옛 언약도 분명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역할이 있었고, 그 나름의 영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이 왔습니다. 그리고 옛 언약은 지나갔습니다. 이 장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에도 매우 비슷한 모습이 있습니다. 복음주의적이고 정통적이고, 근본적인 기독교는 우리와 같은 복음을 전합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종교개혁이 외쳤던 그 “솔라(sola)”, 오직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각처에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혼란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그 자리마다 뒤따라오는 흐름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성례 중심, 제사장 중심의 전통을 강조하는 일부 전례적 개신교의 흐름입니다. 이들은 상징과 그림을 마치 실체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루었던 문제와 정확히 같은 문제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심각합니다. 적어도 유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상징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시고 세우신 것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죠. 이것은 성경에 있다, 구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이죠. 적어도 그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비록 이제는 폐하여진 것이지만,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구약에서 제정하시고 명하신 체계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전혀 다른 길로 갔습니다. 성경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런 상징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낸 겁니다. 그리고 그 상징들이 실체를 대신하는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여러 형태들, 심지어 일부 개신교의 흐름들까지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자신들만의 행위와 의식 체계를 만들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에서는 묵주, 성인과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 정해진 형식의 기도문, 고해성사, 보속, 성인과 천사에 대한 공경,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구약에도 없습니다. 신약에도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겁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나름의 사상과 전통, 공의회와 교령 속에서 형성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루터교 안에도 있습니다. 성찬 예식 자체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함으로써 은혜가 전달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의식이 곧 실체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성례주의자들은 신성모독적인 주장까지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 요소들 안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빵 안에도 계시고 포도주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사가 진행되면서 빵과 포도주가 사람들에게 주어질 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문자 그대로 반복해서 계속해서 희생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가장 극단적인 유대교 의식주의조차도 그런 식으로 온갖 것들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새 언약 안에 있는 참되고 순수한 구원이 의식주의자들에 의해 복잡하게 흐려지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역하던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서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옛 언약에도 영광이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본래의 역할을 잘 감당했고, 자기 자리를 지킬 뿐 아니라 본래 목적을 이루었지만, 새 언약이 도래했다 이제. 구원을 주는 새 언약이 이제 왔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더 할 말이 많지만, 이제 핵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옛 언약, 특히 도덕법은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도록 주어졌습니다. 죄를 인식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해서 접하며 살았습니다. 매 안식일마다 율법을 읽었죠.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을 때나 일어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날마다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노출되었습니다. 그 율법은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삶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죠.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죄가 드러납니다. 결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번도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죄의 현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은 구약 시대 사람, 그러니까 구약 시대의 유대인을 절망의 자리로, 깨어짐의 자리로, 통회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고백하게 되죠.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 나는 저주 아래 있다.” 신명기는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어기면 정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과 완전한 뜻과 완전한 성품과 완전한 기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비참한 죄인이죠. 소망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여기서 어떤 거짓말이 등장합니다. “제사만 잘 드리면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정해진 때에 성전에 가고, 안식일을 지키고, 정결 예식을 행하고, 음식 규례를 지키고, 율법의 모든 규정을 잘 따라가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죠. “의식만 행하면 된다, 잘 따르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잘못된 유대교입니다. 이 거짓말이 온 민족을 속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전체가 의식을 지켜 행하는 것이 죄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행위, 수없이 반복해서 각종 의식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죄책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의식법을 구속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 본 것이 아니라, 구속을 이루는 수단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가톨릭의 방식과 똑같죠. 가톨릭의 상징을 보면 분명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실체를 제대로 본다면 말이죠. 그러나 실제로는 그 상징이 실체를 가려 버립니다. 속임수입니다. 그 상징을 행하면서 스스로 구원을 얻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똑같은 속임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죄로 몰아가는 율법은 의식을 지킴으로써 죄가 해결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그렇게 왜곡해 버렸죠. 그리고 오늘날에도 성례 중심, 제사장 중심의 종교가 빠지는 왜곡이 똑같습니다. 의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그저 상징들을 모아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임수를 해결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이 아닌데도 말이죠. 그래서 세상에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 한번 가 보면 종교적인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열심입니다. 모든 의식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모든 것을 다 지키면서 꼬박꼬박 행합니다. 정말 헌신적이고 정통적인 방식으로 그 모든 과정을 따라합니다.

한번은 제가 옛 성전 터에 세워진 회당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머물면서 사람들을 지켜봤는데 율법의 문자 하나하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연구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앞에 앉혀 놓고는 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칩니다. 율법이 정한 모든 과정을 매 시간마다, 날마다,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내리는 결론은 이겁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그 무능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특정한 의식과 의례를 지키고, 행위들을 덧붙입니다. 그런 의식적 행위가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은 결코 완전한 절망의 자리,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깨달음의 자리, 의식 종교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않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부르짖는 자리까지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죄인인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은혜로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주신 구원을 의식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죠. 매주 의식에 참가하기만 하면 자신들의 죄가 해결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톨릭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는 겁니다. 계속 이 속임수 속에 갇혀 있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다시 본질로 돌이키려고 합니다. “율법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율법의 모든 요소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도덕법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어야 합니다. 의식법은 우리가 얼마나 절실하게 구주를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의식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면 안 됩니다. 할례를 행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의식을 따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도덕법을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하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단 하나라도 어기면 우리는 정죄 아래 놓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참된 설교자요, 참된 사역자요, 참된 하나님의 종은 모두가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이 하려던 일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뒤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바울은 6절에서 더 나은 새 언약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여덟 가지를 말합니다. 지난주에는 일곱 가지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하나를 더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여덟 가지입니다. 물론 바울이 실제로 여덟 개를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새 언약의 탁월함을 최소한 여덟 가지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덟 가지입니다.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의를 이루게 합니다. 영원합니다. 소망을 줍니다.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자유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지금 다 기억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하나씩 이제 살펴볼 거니까요. 이 여덟 가지는 새 언약의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옛 언약을 제자리에 두게 만듭니다. 옛 언약은 이미 대체된 겁니다. 참으로 놀랍게 구별합니다. 이제 첫 번째를 다시 봅시다. 지난주에 이미 살펴보았죠.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새 언약이 생명을 주는 이유는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내적입니다. 외적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율법 조문”이라는 말은 율법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주의나 의식으로 왜곡된, 율법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 조문”은 문자 그대로 잘못 이해한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로마서 2장 27절부터 29절에도 설명됩니다.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27절입니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바울은 “율법 조문”과 “율법”을 구분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문자, 율법 조문을 율법과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9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 구절에서도 “율법 조문”과 율법을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율법 조문”은 율법을 오해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도덕법을 보고 “해답은 의식을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만 것이죠. 그래서 외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규정과 의식을 지키는 체계를 만들어 내고는 그렇게 구원에 이른다고, 이것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 조문입니다. 율법 조문은 치명적입니다. 율법도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방향에서 죽이죠.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어서 결국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조문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율법 조문은 사람을 완전히 망가지게 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해결 방안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성례주의 종교의 속임수입니다.

율법 조문은 사람을 실제로 죽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서 외적인 것들을 강요하고,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적용하게 만들면 너희를 죽게 할 것이다.” 오직 성령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전합니다. 성례 중심의 체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 조문, 그러니까 종교적 의식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고 합니다. 참된 기독교를 왜곡하는 아주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자,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내용입니다. 서두르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죠. 여러분이 분명하게 이해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새 언약은 의를 이루게 합니다. 새 언약은 의를 만들어 냅니다. 이제 7절을 보십시다. “만일”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렇게 옮기는 것이 더 좋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직분도 영광이 있어…”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폄하하는 사람으로 오해받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받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반대하여 말한다”라고 고발을 받은 것이죠.

유대인들은 바울을 율법을 반대하는 사람, 반율법주의자 이렇게 불렀습니다. “노모스(nomos)”는 헬라어로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늘 율법과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을 반대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옛 언약과 율법을 올바른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올바른 관점이란 무엇입니까?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을 “죽게 하는 직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죽게 하는 직분”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율법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정말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사역을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죽게 하는 직분을 가졌습니다. 율법 앞에 서는 사람을 모두 무너뜨립니다. 로마서 7장을 보십시오. 바울의 논리를 잘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대답은 분명하죠. “그럴 수 없느니라.” 헬라어로 “메 게노이토(mē genoito)”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절대로 아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아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율법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은 완전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7절을 보십시오. 매우 강력한 말씀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죄를 규정해 주는 율법이 없다면 어떻게 죄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만일 이 말씀이 없다면 탐심이 죄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율법이 없다면 죄를 규정할 기준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정의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율법이 없다면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탐내는 것이 죄라고 말해 주지 않았으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은 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규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죄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회에서 완전히 제거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판단할 수 없죠.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대학에서 한 책임자가 라디오에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학교가 동성애자와 레즈비언을 차별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ROTC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군대와 ROTC가 동성애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우리 학교도 그런 차별을 한다고 비난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다 받아들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설명을 하더라고요.

UCLA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뛰어난 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 갈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곳이죠. 그런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기준이 전혀 없습니다. 방송에 나와서는 성경적인 기준처럼 해묵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받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정의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까? 결국 이런 메시지입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결국 “그저 네 인간적인 본능에 따라서 살아” 이렇게 말하는 것하고 다르지가 않습니다.

1960년대에 휴 헤프너(Hugh Hefner)가 했던 주장하고 똑같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실린 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헤프너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플레이보이 잡지를 발간하면서 그런 생각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자연스러운 욕구 아닙니까? 우리는 먹고 싶은 욕구가 있고, 마시고 싶은 욕구가 있고, 자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자연스러운 욕구 아닙니까?”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냥 인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먹고 싶어 하듯이 이것도 자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뭐가 문제입니까? 그냥 인간의 행동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에 대해서 타락한 마음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래, 맞아.” 그리고는 그대로 행해버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겠습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없는데요, 기준을 모르는데 어떻게 죄책감을 느낍니까?

그래서 제가 <사라지는 양심(The Vanishing Conscience)>이라는 책을 쓴 겁니다. 경고해 주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양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책감을 느끼겠습니까? 권위 있는 법이 주어질 때에야 비로소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 내가 그렇게 행하면 죄인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죄인은 지옥에 간다는 말인가?” 율법이 없으면 아무 메시지도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율법을 알기 전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율법을 알고 나서 깨달았다. ‘탐내지 말라’고? 나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동이라고 전에는 생각했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탐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죄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제 두 번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은 단지 죄를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정말 흥미롭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분홍색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 절대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순간 무엇이 떠오릅니까? 분홍색 코끼리가 떠오르죠. 누군가에게 “탐내지 말라”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더 탐을 냅니다. 율법을 계속해서 강하게 들이대면,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더 자극을 받습니다. “그건 잘못이야” 이렇게 말하면, 마음속에서 “그래? 그런게 있어? 그럼 한번 해 볼까?” 이런 반응을 합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에 내 삶 곳곳에 탐심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디에나, 모든 것에 말이죠.

사실 그 탐심은 원래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죠.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자, 타락한 본성이 반응을 한 것입니다. “나는 그 법이 싫다.” 그러면서 오히려 더 율법을 범하도록 밀어붙입니다. 마치 가게를 지나가는 어린아이하고 같습니다. 계산대에 “손대지 마시오” 이런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아이를 한번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엄마가 잠깐 다른 데를 보는 그 순간에 슬쩍 손을 뻗어서 계산대를 만집니다. “화단에 들어가지 마시오” 이렇게 하면,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부러 발로 확 밟아버립니다. “나 그거 해봤어”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겁니다.

율법은 이러한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율법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마주하게 되면, 죄를 정의할 뿐만 아니라 그 죄를 더 드러나게 하고 더 자극합니다.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한번 보십시오. 율법이 방 안에 들어와서 마치 하인처럼 먼지를 털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는 그 방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햇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방에서 먼지를 털기 시작하면, 그 방이 온통 먼지로 가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 이렇게나 더러웠단 말인가” 하고 놀라죠. 율법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곳곳에 있는 더러운 먼지들을 다 일으켜 냅니다.

율법은 의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말 그대로 죽입니다. 죽게 하는 직분이 있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절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무슨 뜻입니까? 영적인 죽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에서 끊겼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고, 정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절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그러니까 결론은 이겁니다.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있습니다. 나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도덕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법을 반드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법을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그것도 높은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무너뜨리기 때문이죠.

갈라디아서 3장을 보십시오. 잠깐만 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의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오직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율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죄인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가능해진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를 간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충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만들어 낼 수 없을 뿐입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만일 율법이 할 수 있었다면, 율법으로부터 의가 나왔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의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옛 언약은 의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이제 잘 들으십시오. 아무도 도덕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과 상징과 그림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구별된 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율법 안에는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단 한 번이라도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다시 말해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정의하고, 죄를 더 분명히 드러내고, 죄인을 절망의 자리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율법의 전체 목적은 죄인을 죄 아래 가두어서, 결국 구주를 향해 돌아서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초등교사”는 학교 교실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감독자라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보통 종이 이 역할을 했습니다. 아이를 따라다니면서 회초리를 들고 행동을 통제하고 규율에 맞추도록 지도했습니다. 율법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만듭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그 방식입니다. 율법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이 방식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자들이기에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믿음만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율법은 단지 사람을 하나님께로 몰아가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자, 이제 율법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율법의 목적을 이룬 것이죠. 내려놓아도 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율법은 우리 마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이루게 됩니다. 율법은 오직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로마서 3장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죽이는 직분입니다.

이제 다시 고린도후서 3장으로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보겠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무엇을 말합니까? 십계명입니다. 출애굽기 32장 15절부터 16절입니다. 모세가 산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죠. 돌판에 십계명을 기록해서 주셨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돌에 써서 새긴 율법 조문”은 바로 이 장면을 염두에 둔 겁니다.

십계명이 무엇입니까? 잘 들으십시오. 십계명은 도덕법의 요약입니다. 도덕법을 열 가지 계명으로 압축해 놓은 겁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보면, 그 열 가지도 두 가지 계명 안에 다 포함이 됩니다. 뭡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덕법을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었죠.

사역을 하면서 기념이 될 만한 물건들을 여러 해 동안 많이 모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세계 여러 곳곳을 방문하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다양한 선물을 받습니다. 그 선물들은 제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사무실하고 또 연구실 이곳 저곳에다 놓아 두고 소중한 기억으로 떠올립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한 친구로부터 아주 소중한 물건 하나를 선물받았습니다. 크기도 작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그런 물건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합니다. 때로는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액자에 연필로 그린 그림이 하나 담겨 있습니다. 그 그림에 모세로 보이는 인물이 나옵니다. 머리 위에 돌판을 높이 들고 있습니다. 분노에 가득 찬 표정입니다. 그 돌판을 당장이라도 내리쳐서 앞에 있는 연약하고 초라하고 절망에 빠진 한 사람을 그대로 짓눌러 버리려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그 생명을 완전히 짓밟아 버리려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연약한 사람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품에 안고 계십니다. 가슴과 어깨를 감싸 안아 완전히 덮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돌판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에 율법이 내리친다면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 내리치게 될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맞으신 후에 율법은 산산이 깨져버립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율법의 역할을 이 그림만큼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막으실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은 실제로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생명을 취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 보호하시는 자를 더 이상 죽일 수 없도록, 율법의 그 능력은 깨져버렸습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돌에 새겨진 율법 조문은 사람을 죽입니다. 스스로 도덕법을 지켜서, 착하게 살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율법 조문은 결국 그 사람을 산산이 부숴버릴 겁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내리칠 때 그리스도를 향할 뿐이고, 우리에게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율법이 영광 가운데 왔다.” 율법은 영광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산 위에 구름이 있었고, 천둥과 번개가 있었습니다. 천사들도 있었습니다. 율법은 천사들을 통해 중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불꽃 같은 손으로 돌판에 직접 기록하셨습니다. 온 사방에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폄하하면 안 됩니다.

모세가 높인 것을 바울이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광 가운데 주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제자리에 있습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의롭고, 선합니다.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 율법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영광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7절 끝을 보면 그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사라지는 영광입니다. 점점 사라지는 영광입니다.

율법에도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사라지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 언약의 영광이 대신 차지합니다.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새 언약은 의를 이루게 합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을 죽일 뿐이죠. 율법은 의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를 자극할 뿐이죠. 율법은 죽음과 죄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생명과 의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앞으로 이어질 말씀의 기초입니다. 나머지 내용은 이 진리를 설명하는 예시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놀랍고도 인상적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었던 그 사건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구속 역사에서 그 놀라운 사건을 선택해서, 사라지는 옛 언약의 영광과 영원한 새 언약의 영광을 대비하는 예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출애굽기로 돌아가서 그 장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 사건이 앞으로 이어지는 본문의 기초가 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크고 깊은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음으로 큰 복을 누리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율법과 복음,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우리에게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구원은 언제나 주님의 은혜로, 회개하는 죄인의 마음 가운데 성령께서 이루시는 믿음을 통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이제 압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 가운데, 스스로 도덕법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살면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두렵고 치명적인 속임수에 속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이 시간 건져내 주옵소서.

또한 의식을 많이 행하고, 교회에 자주 나가고, 촛불을 켜고, 묵주를 세고, 기도를 반복하고, 형식적인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여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같은 치명적인 속임수에서 건져내 주옵소서. 모든 죄인을 자신의 죄 아래에 가두어 주옵소서. 자신의 죄를 분명히 깨닫게 하여 주시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죄가 드러나게 하셔서 그 죄의 실상을 온전히 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그 사람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대신하여 율법의 심판을 받으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이 생명을 주고, 풍성한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주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를 덮어 주신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다시 외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들로 돌아가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실체이심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바울과 같이, 우리가 한때는 그 모든 것을 붙잡고 살았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깨닫고 나서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되게 하셔서 오직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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