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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 위대한 장, 새 언약의 영광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함께하지 못하신 분들께는 먼저 양해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어져 온 내용을 정리하면서 마지막 부분을 살펴볼 것이기 때문에, 지난 두 달여 동안 함께하지 못하신 분들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진리를 전달해주실 줄 믿습니다.

이 풍성한 장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책이나 성경에 제가 사인을 할 때 고린도후서 3장 18절을 함께 적을 정도로 이 말씀을 정말 사랑합니다. 예전에는 제일 좋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더 많은 말씀을 깨닫게 해주셔서 좋아하는 구절이 바뀌었지만 말이죠.

몇 년 전에, 아마도 한 10년쯤 되었을 텐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에 대해 책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구절로 책을 썼습니다.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말씀은 정말 보물 같습니다. 자, 이제 읽겠습니다. 18절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그 과정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화, 신자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지를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깐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구속받은 백성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는 우리에게 주어질 최고의 찬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들에게 아들을 닮은 구속된 백성을 세우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이것이 목표입니다. 구속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완성되어 가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점점 더 닮아갑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영화(glorification)를 향해 가는 성화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신자가 사는 이유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울 신학 전체를 단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꼽아야겠죠. 바울이 선택한 그 단 한 가지, 그 한 가지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완성될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무엇입니까? 마지막에 받는 영원한 상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될지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바울이 가진 열망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부였습니다. 바울이 붙들고 살았던 단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시선을 고정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그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그 영광을 바라볼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한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이 계속해서, 점점 더,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입니다. 성화입니다.

이 구절만큼 신자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에베소서 4장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또 골로새서에서는 “각 사람을 가르쳐 온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이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한 단계의 영광에서 그 다음 단계로, 또 그 다음 단계로, 계속해서 우리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자,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영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이 본문 전체에서 ‘영광’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사는 동안에 점점 더 커지는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신자가 사는 동안에 점점 더 커지는 영광이 있습니다. 새 언약 아래 있는 신자들은 영광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모세와는 분명히 대조가 되죠.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영광은 어떤 영광이었습니까? 점점 사라지는 영광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에게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새롭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백성에게 나타내셨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진작부터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죠. 하나님께서 함께 거니시고 말씀하셨죠. 서늘한 낮에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교제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나타나셨죠. 이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속성, 곧 긍휼과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거룩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눈에 보이는 빛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 빛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이었죠.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백성에게 계속 나타내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성막에 임하셔서 그 영광으로 성막을 가득 채우셨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그 안에서 직무를 수행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켜서 쉐키나, 이렇게 부릅니다. ‘임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찬란한 빛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빛으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신 것이죠.

그러나 쉐키나의 임재가 가장 특별하게 나타난 사건은 출애굽기 34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모세가 나오죠. 모세가 산에 올라갑니다. 고린도후서 3장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마주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입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 위에 임했습니다. 단순히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의 얼굴 위에 실제로 나타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마치 태양처럼 강렬하게 빛났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처음에는 빛 때문에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온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그리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왜 그랬습니까? 사람들이 모세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죠. 그 빛이 너무 강해서 그대로는 함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모세가 하나님과 말씀을 나눌 때에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나와서 말할 때에도 수건을 벗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직접 보게 하기 위해서죠. 다시 말해서, 옛 언약의 영광, 옛 언약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모세의 얼굴을 통해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모두 전하고 나면, 그때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빛이 너무 강해서 백성들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사람에게 임하기까지 했습니다. 옛 언약에도 영광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시민법, 의식법, 도덕법, 그 모든 요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드러냈습니다. 분명히 영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7절입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바울은 유대주의자들, 그러니까 할례파로부터 율법을 깎아내리고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 율법에도 영광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이라고 하면서 옛 언약의 영광이 이렇게나 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옛 언약에도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뜻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목적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새 언약에는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있다고 말합니다. 9절에서는 새 언약을 “의의 직분”이라고 부르면서 그 영광이 더욱 넘친다고 말합니다. 10절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합니다. 11절에서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영광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영광입니다. 넘치는 영광, 비교할 수 없는 영광, 그리고 영원히 남아 있는 영광, 18절의 핵심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옛 언약의 영광은 사람에게 보이고, 사람에게 머무는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은 사람 안에 거하는 영광입니다. 사람 안에 있습니다. 최대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모세보다 변화산에서의 그리스도와 더 닮아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장막을 거두시고 변화되셨습니다. 그 안에서부터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변화되셨습니다. 본질적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이 영광은 안에서부터 흘러나온 영광입니다. 모세의 경우는 다르죠. 모세의 영광은 겉에 덧입혀진 영광이었습니다. 외적인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산에서 드러냈던 영광보다, 변화산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영광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영광은 내적인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본질입니다. 영광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러니까 유대주의자들이 고린도에 들어와서 옛 언약의 영광을 전하고, 옛 언약의 율법을 강조하고, 옛 언약의 의식들을 주장하면서, 옛 언약이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하고, 옛 언약 안에도 구원의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반박합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여러 방식으로 그 주장을 반박하면서 옛 언약의 영광은 외적인 영광이지만, 새 언약의 영광은 내적인 영광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에, 성령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한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변화가 실제로 일어납니다.

옛 언약의 영광은 사라지는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는 영광입니다. 옛 언약의 영광은 점점 줄어드는 영광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다시 그 영광을 받기 위해서 또다시 산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커져 갑니다. 구원할 수 없는 언약의 반사되어 희미해지는 영광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하는 언약의 영광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탁월합니다.

바울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롯해 새 언약을 전하는 모든 참된 설교자들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옛 언약에도 영광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라지는 영광입니다. 가려진 영광입니다. 결국 지나가고 새로운 언약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7절이 말하는 것처럼 옛 언약은 죽게 하는 직분일 뿐이었고, 9절이 말하는 것처럼 정죄의 직분일 뿐이었습니다. 죄를 드러내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뿐, 결코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에 새 언약은 훨씬 탁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생명을 줍니다. 6절이죠.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새 언약 안에서 성령님이 생명을 주십니다. 두번째, 의를 이룹니다. 9절에서 바울은 새 언약을 “의의 직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번째, 영원합니다. 11절이 말하는 것처럼 새 언약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옛 언약이 사라져 버리고 대체된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네번째, 새 언약은 소망을 줍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옛 언약은 소망을 줄 수 없었습니다. 죄인을 철저한 죄책감과 수치 가운데 몰아넣을 뿐이었죠.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그 상태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스스로 의에 이를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결국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소망을 줍니다.

다섯번째, 새 언약은 분명합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바울은 옛 언약의 영광이 가려져 있었던 사실을 말합니다. 옛 언약의 불분명함을 보여주는 예이죠. 옛 언약은 모형, 상징, 그림자, 의식, 제사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장차 올 실체를 보여주는 표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에는 분명히 가려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신비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그 모든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여섯번째, 새 언약은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에 탁월합니다.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6절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새 언약은 생명을 주고, 의를 이루고, 영원하고, 소망을 주고, 분명하고,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로, 성령의 역사라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지난주에 다 마치지 못했는데 오늘 마무리하겠습니다.

17절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새 언약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을 기록하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신약도 기록하셨습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도덕법을 주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새 언약도 주셨습니다. 온 세상을 죄 아래 두시고 모든 입을 막으신 하나님이, 이제 성령님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율법 아래에서 사람을 속박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성령님을 통해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모순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의 하나님과 새 언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이 아닙니다.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바로 성령님이시고, 옛 언약의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옛 언약이 의도했던 것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절망 속에서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죠. 주의 영이 바로 그 구원의 능력이십니다. 회개하는 신자에게 새 언약의 구원을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어느 시대든지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구약 시대 사람이 율법의 본질을 제대로 보게 되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이 무엇입니까? 정죄의 직분입니다. 죽게 하는 직분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말하자면 그 율법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지옥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율법이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어서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 긍휼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받을 자격은 없지만, 간절히 구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보시고 용서하십니다. 바로 그때 일어나는 그 변화, 그 구원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그 회개하는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사역을 거슬러 적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역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옛 언약 아래 있든 새 언약 아래 있든, 언제나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곧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동일한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십니다. 로마서 8장이 말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생명과 복의 길로서 율법을 따르게 하십니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앞에서 정리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을 세대주의적인 배경에서 배운 분들은 성령님이 구약에서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고,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셨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님이 거의 사역하지 않으신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에서도 성령님의 사역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네 가지 영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첫째는 창조입니다. 이미 살펴봤죠. 둘째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계시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성령님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이 분명하게 말하죠. 넷째는 많은 분들이 혼동하는 부분인데, 성령님은 창조와 능력과 계시뿐만 아니라, 거듭남에도 역사하셨습니다. 거듭남에도 역사하셨습니다.

구약의 신자들도 거듭났습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변화되었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 비참한 죄인이었기 때문이죠.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습니다. 스스로를 바꿀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비참한 상태를 스스로 바꿀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바꿀 수 있느냐? 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있느냐?”라고 묻지 않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와 같은 상태에 갇혀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무능력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의가 무엇일까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스스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게 되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죠. 결코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또 우리는 구약 시대에도 성령님이 죄를 깨닫게 하셨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성령님이 사람과 다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구약의 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시편 119편이죠.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변화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변화된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변화된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도록 변화된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동일하게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으로서는 결코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삶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모두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구약 시대 신자들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서 마무리를 했습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나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셨습니다. 부활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도 오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이 강림하시지 않았고, 교회도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화가 이루어지던 시대는 구약 시대, 옛 언약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집니다. 아직 피를 흘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새 언약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옛 언약 시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새롭게 생긴 원리가 아닙니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이미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옛 언약 시대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6절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8절 하반절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변화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새로운 탄생, 본질적인 변화, 완전한 변형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였습니다. 새 언약이 세워지기 이전이죠.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구약 시대에 성령님은 신자의 삶에서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제가 이제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님은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성령님이 계시의 배후에 계셨고, 신자가 믿을 수 있는 진리를 주셨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죄를 미워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겠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구약의 신자들도 붙드셨다고 확신합니다. 오늘날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구원 안에 지킬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존됩니다. 구약에서도 동일하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택하신 신자를 모두 거듭나게 하셨고, 끝까지 붙드셨습니다. 마음 속에서 역사하신 분이 바로 성령이셨습니다. 삼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들릴라와의 죄에 깊이 빠졌던 삼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지막에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령님이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삼손은 성령님께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의 은혜 안에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 그 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윗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의 죄를 깊이 고백하고 통곡하던 시편 51편의 장면입니다.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와 죄를 범한 그 사건 이후입니다. 다윗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시편 51편 10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윗이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개입을 구하고 있습니다. 씻어주시고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다음에는 제가 더 잘해 보겠습니다. 제 힘으로 이겨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깨끗함도, 힘도, 거룩함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면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정결, 거룩, 성화, 그리고 끝까지 지켜 주시는 이 모든 역사,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의 역사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제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8장입니다. 이번 주에 제가 말씀을 묵상하다가 아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 주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성령님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다가 누가복음 8장 15절을 발견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니까 아주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여러분 기억하시죠?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습니다.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기억하시죠? 그렇다면 좋은 땅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땅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딱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굳은 마음, 세상의 염려로 가득 찬 마음, 고난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인간 중에서 본래부터 좋은 마음을 타고난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비참하고 타락한 상태입니다. 썩었습니다. 독사의 독이 그 입술 아래 있습니다. 죄악밖에 모릅니다. 그렇다면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 마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신 마음을 말합니다. 반드시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좋은 마음이 만들어집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 왜 이 사람이 이렇게 할까요? 다른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음이 참 좋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 마음을 만지시고 변화시키신 이후에야 좋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결코 좋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약과 복음서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개입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창세기에서 성령님이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 위에 운행하시면서 질서를 이루셨던 것처럼, 성령님은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새 창조를 이루시는 분이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구원은 다른 모든 영적인 사역과 마찬가지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이루어집니다. 스가랴 4장 6절이죠.

그러니까 구약 성도들도 분명히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저는 성령님이 함께 계셨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고요? 이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4장입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면서 이제 곧 떠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사실 때문에 깊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나와 같은 또 다른 보혜사입니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너희를 혼자 두지 않겠다, 이런 말씀이죠. 내가 떠나지만 다른 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이제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함께 거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바로 여기에 새 언약의 영광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나요?” 차이가 분명하죠. 성령님의 능력과 역사와 도우심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새 언약의 신자는 구약의 신자와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함과 깊이를 경험합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십시오. 37절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절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그 사람 안에서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그 깊은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39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질문이 생기죠.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이미 성령님이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직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답은 이겁니다. 구약 성도들도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구약 시대 사람들이 성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신자가 경험하는 성령의 충만함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 깊습니다. 더 풍성합니다. 더 충만합니다. 마치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생수의 강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모세보다 변화산에서의 그리스도와 더 닮아 있다고 제가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신자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구약의 신자에게 역사하신 성령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정도가 다르다입니다. 범위가 다르다, 나타나는 방식이 다르다, 충만함이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신자로 살아가는 엄청난 특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삶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성령 충만함이라면 가능한 한 다 받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덜 받은 것 아닌가? 조금 불공평한 것 아닌가?” 이제 하나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오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이 임하시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이후에, 성령님이 임하시고, 그때부터 신자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계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시고,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되게 하시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오순절 사건조차도 사실은 완전한 성취가 아니라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요엘 2장에 이미 예언된 말씀입니다.

요엘 2장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에 의해 인용된 말씀이죠.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무엇을 가리킵니까? 주의 크고 두려운 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는 때를 가리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성령 충만함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그 충만함을 각기 다른 수준과 정도로 나타내실 자유가 있으십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구약 성도들은 우리가 아니면 온전함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0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 성도들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그러니까 성령님의 능력이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또 앞으로 올 시대, 곧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나라에서 성도들이 경험하게 될 성령 충만에 비하면 아직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도들도 분명히 새롭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붙드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았고, 성령님이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순종하도록, 죄를 미워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다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충만함, 풍성함이 있습니다. 더 깊은 친밀함이 있습니다. 더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더 지속적인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가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신 곳에는 언제나 자유가 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닙니다. 사탄의 종도 아닙니다. 두려움의 종도 아닙니다. 썩어짐의 종도 아닙니다. 죄의 종도 아닙니다. 죽음의 종도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 모든 속박에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뭐가 보이십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멸망시키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보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해 사람을 깨닫게 하시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새 언약 안에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로 나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옛 언약을 계시하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제 성령님을 통해 새 언약의 자유와 해방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이제 마지막 요점입니다. 드디어 18절입니다. 이미 일부는 살펴보았죠. 새 언약이 왜 탁월합니까?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새 언약은 변화시킵니다. 변화시킵니다. 놀랍게 변화시킵니다. 수건이 벗겨지면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변화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한 사람만 해당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세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그리스도를 보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고린도후서 4장 6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보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보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보면,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수건이 벗겨지고, 아무런 방해 없이 바로 눈앞에서 거울을 보듯이 분명하게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 그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헬라어로 ‘메타모르포오(metamorphoō)’입니다. 계속해서, 점점 완성되어가는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변화됩니까?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어떤 형상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한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음 단계로, 그 다음 단계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점진적인 성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영광과는 정반대이죠. 모세의 영광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신자에게 나타나는 영광은 다릅니다. 점점 더 커집니다. 점점 더 커집니다. 사라지는 영광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빛나는 영광입니다. 시편 84편 7절이 말하는 것처럼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을 하십니까? 18절 끝부분이죠.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다시 옛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겁니다. 만일 다시 종의 멍에로 돌아간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효로 만드는 겁니다. 이미 새 언약을 가지고 있는데, 왜 사라져 가는 영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그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한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로 변화되어 가십시오. 그 누구도 이 과정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 정하셨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한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점점 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조금 닮습니다.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조금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조롱하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지만, 그만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속에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죠. 우리가 붙들고 살아가는 단 하나입니다. 점진적인 성화입니다. 제 삶의 목표입니다. 한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익숙한 이야기죠. 미운 오리 새끼는 다른 오리들보다 몸집이 크고 못생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오리들이 놀렸습니다. 행동도 모습도 이상하다고 비웃었습니다. 상처를 받고 마음이 상해서 어떤 집으로 들어가서 숨어 버렸습니다. 그 집에는 고양이와 닭이 있었죠. 그런데 거기서도 무시를 당했습니다.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릴 수도 없고, 닭처럼 알을 낳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좀 이해해 달라고 말했지만, 더 심하게 비웃기만 했죠.

어느 날, 연못에서 헤엄을 치면서 다른 오리들처럼 살아보려고 애쓰던 그때였습니다.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들을 봤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백조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한 감정이 일어났습니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숙명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백조들이 날아오르자, 목을 길게 뻗어서 따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느꼈죠. “나는 저 백조들이 참 좋아.”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추운 겨울 내내, 미운 오리 새끼는 그 아름다운 새들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무엇인지도 몰랐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몰랐지만, 언젠가 또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마침내 봄이 왔고 연못의 얼음이 녹았습니다. 다시 물 위를 헤엄치게 되었죠. 그리고 어느 날, 아직 이른 봄에 다시 그 아름다운 새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의 백조가 곧장 미운 오리 새끼를 향해서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렇게 우아한 존재들이 자신처럼 못생기고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될까봐 그게 부끄러웠기 때문이죠.

백조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고개를 숙이고 날개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바로 그 아름다운 새하고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오리가 아니었습니다. 백조였습니다. 날개를 내리고 고개를 치켜들었습니다. 교만하게 치켜든 것이 아니라, 감사와 겸손으로 살짝 숙인 채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의 신앙 경험입니다. 처음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저는 마치 백조를 처음 본 미운 오리 새끼 같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죄책감, 무가치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강한 끌림이 제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 깊은 곳에서 반응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제가 본래 되어야 할 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변화의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점점 더,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그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새 언약의 역사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존재를 닮아갑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돈을 숭배하면 물질적인 사람이 되고, 권력과 명예를 숭배하면 마음이 차갑고 굳어집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돌처럼 죽어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예배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수건이 벗겨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주의 영광을 바라보게 될 때에, 주님이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점점 더 사로잡아 갈 때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성령님이 그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구절은 새 언약 안에서 성령님이 이루시는 성화의 점점 더 커져 가는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의식적인 종교 행위나, 성례 중심의 형식이나, 제사장적인 체계나, 인간의 의를 쌓는 모든 체계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아무것도 주지 못했고, 여러분에게도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수건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그 일을 시작하십니다.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화려한 형식이 아닙니다. 종소리도 아닙니다. 촛불도 아닙니다. 의복도 아닙니다. 교황도 아니고, 추기경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단 하나뿐인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삶입니다. 관계가 핵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진리와 그 진리의 능력에 감사드립니다. 새 언약의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생명과 의와 소망과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변화의 은혜를 모두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순전한 복음 밖에서 다른 것을 찾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 한 가지에 집중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안에서 빛나는 영광이 점점 더 커지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영광을 가리는 것들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더 큰 영광으로 채워 주옵소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주의 영광에 집중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때, 성령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의 삶의 중심이 오직 그리스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그 모습을 따라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장차 올 삶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 되신 것처럼, 우리가 그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그 이름을 지닌 자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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