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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도 야고보서를 보겠습니다. 1장 2절부터 12절까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이 본문 전체를 다 다루지는 못할 겁니다. 이 말씀에 담긴 진리가 정말 풍성하고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조금 더 천천히 다루고 싶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12절까지를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지난주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구절을 살펴보며 설교를 마쳤는데, 이 구절부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삶의 모든 시련을 견디게 하는 비결입니다. 어쩌면 거듭난 영혼을 가장 결정적으로 증명해 주는 유일한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저는 이것이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야고보가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부르는 호칭이죠.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견딜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견딥니다. 어떤 시련이든, 어떤 싸움이든, 어떤 어려움이든 견딥니다. 사랑이 우리를 굳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죠. 어떤 관계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서로 사랑하면 온갖 역경을 이겨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찾아오는 시련과 환난과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주님께 붙들어 매고 믿음을 굳게 지켜 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뉴욕에서 목회를 하셨던 가디너 스프링(Gardiner Spring) 목사님은 사랑이 지닌 인내의 능력에 대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애정과, 우리의 행복을 최고의 동기와 목적 삼아 하나님과 맺는 이기적이고 거룩하지 않은 우정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행복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만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때문에가 아니라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한다면, 그런 감정 안에는 도덕적 미덕이 전혀 없다. 자기애는 클지 모르나,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없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심어주는 원수가 죽임을 당한 영혼은, 하나님의 성품과 화목하게 된다. 하나님 영광의 충만함 가운데 경건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묵상한다. 은혜로운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난다.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되며, 하나님의 존엄과 아름다움 앞에서 모든 것이 원자에 불과한 헛된 것으로 보이기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지는 관심 밖으로 멀어진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달라붙어 있으며, 경건한 사랑의 따뜻함과 열정 속에서 이렇게 외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가디너 스프링 목사님이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 사람을 하나님께 묶어두는 것은 사랑입니다. 피상적인 호감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정서, 그러니까 “당신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한은 내가 머물겠다” 이런 식의 태도가 아닙니다. 어떤 시험이 닥쳐와도 견딜 수 있는 참된 사랑의 유대입니다. 목사님은 이어서 개인적인 점검을 위해서 매우 유익한 일련의 질문을 던집니다. 제가 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이 상상하는 모습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실제 모습 때문인가?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모든 부분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뿐 아니라 거룩함도 사랑하고, 긍휼뿐 아니라 공의도 사랑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멸하신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은 없는가? 하나님보다 더 아름다운 성품의 소유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에게 더 뜨겁게 갈망하고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는가? 더 깊이 감사하는 존재가 있는가? 결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할수도 있지만, 이처럼 분명한 문제에서 스스로를 속일 필요는 결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새 마음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새 마음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야고보도 바로 이 말을 하는 겁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반면에 참된 사랑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 구원받는 믿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먼저 외적인 도덕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학적 지식도 참된 사랑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신학에 대해서 많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적인 활동 역시 살아 있는 참된 믿음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종교적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심지어 죄에 대한 자각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반드시 참된 구원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구원의 믿음을 증명합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에 기초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참되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됩니까? 무엇이 참된 사랑을 드러냅니까? 야고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겁니다. 사실 야고보서 전체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련의 시험을 통해 점검합니다.

먼저, 시험을 받을 때 누구를 탓하는가 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1장 후반부에서 살펴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한 차별 없는 사랑의 시험, 의로운 행위의 시험, 혀의 시험이 있습니다. 겸손한 지혜의 시험, 세속적 탐닉의 시험, 하나님을 의지하는지에 대한 시험, 인내의 시험이 있습니다. 진실함의 시험, 마지막으로 기도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 모든 시험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통과하게 되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본문에서 살펴보고 있는 첫번째 시험은 바로 시련 가운데서 견디는가 하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드러냅니다. 참된 사랑에 의해 지탱되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험을 받을 때 끝까지 참습니다.

이제 2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보았죠. 3절에서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참된지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이유는 믿음을 시험하고, 사랑이 진짜인지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같은 말을 했죠.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전서 1장 6절부터 8절에 동일한 주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12절은 2절부터 3절을 요약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참된 사랑에 기초한 진정한 구원은 시련을 통해 드러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peirasmos)’이며, ‘시험하다’라는 뜻의 페이라조(peirazō)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죠. 살아 있는 믿음인지를 시험합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영원히 안전하게 붙들려 있고, 우리의 관점에서는 끝까지 인내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매우 중요하면서도 균형 잡힌 진리입니다. 참된 신자는 주님께 붙들려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주님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련 가운데서도 인내합니다. 따라서 시련을 겪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랑이 참된지, 그 믿음이 참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그 어떤 시련과 환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살아 있는 구원의 믿음을 지녔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을 겪을 때 도망치듯 빠져나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을 외면해 버린다면 죽은 믿음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저희 아들 맷(Matt)이 저에게 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결혼한 한 남성이 있는데, 이후에 다른 교회에서 간사로 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아내하고 이혼하고, 지금은 기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답니다. 사실상 믿음을 부인하고 떠난 겁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답니다. 이 사례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주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면서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이죠. 반면에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참으로 살아 있는 믿음임이 드러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성도로서 우리가 어떻게 시련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최대한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시험 속에서 최대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인내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인내란 하나님의 성도가 사랑과 믿음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시련을 견딜 수 있습니까? 어떻게 시련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시련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이제 시련을 견디는 데 필요한 다섯 가지 핵심적인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기뻐해야 합니다. 기뻐하라고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이렇게 부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들이란 신자를 의미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죠. 1절에서 말하듯이 흩어진 열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분명하게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신자입니다. 야고보는 이 편지 속에서 계속 “형제들” 이러헥 부릅니다. 1장 2절, 16절, 19절, 2장 1절, 5절, 14절, 15절, 3장 1절, 그리고 5장 7절, 9절, 10절, 19절, 여기에 나오죠. 제가 빠뜨린 구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분명히 동료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라는 말에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데요, 공통적인 유대감 속에서 독자와 동일시하는 효과를 줍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형제들로 끌어안는듯이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가지 시련을 견디며 끝까지 인내하고 마침내 승리하고자 한다면, 어떤 시련이든 기쁘게 여겨야 한다.’ 첫번째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라”라는 단어를 보겠습니다. “여기라”라는 말은 부정과거형입니다.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라,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 스스로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닥치든 “이 일은 기쁨이 될 거야. 나는 이 일을 기쁘게 여길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의식적으로 기뻐하기로 결단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 말을 하기 직전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했습니다. 기쁘게 여기는 태도를 배운 것이죠. 훈련한 것이죠. 우연히 생겨난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는 겁니다. 부분적인 기쁨이 아니라 온전한 기쁨입니다.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영어 성경으로 보면 “when”이 쓰였습니다. “if”가 아니라 “when”입니다. 헬라어로 호탄(hotan)입니다. “언제든지”, “언제나”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이 형태로 접속법과 함께 사용될 때에는, “언제든지 피할 수 없다” 이런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빠질 때에”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페리핖토(peripiptō)’인데요, 시련 속으로 비틀거리듯이 빠지는 모습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되는데, 두 번 더 나옵니다. 먼저 누가복음 10장 30절에 나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을” 때, 이 “만났을” 때에 이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갑자기 강도의 습격을 당했다는 표현입니다. 또 하나는 사도행전 27장 41절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배를 타고 가던 중 배가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났다”라고 할 때 쓰였습니다. 항해를 해보셨다면 두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실 겁니다. 마치 벽에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그곳을 ‘만났다’는 말은 갑작스럽고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휩쓸려 들어갔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계획되지 않은, 놀라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을 덮쳐 버리는 사건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페리(peri)는 “주위에” 이런 뜻으로, 사방에서 에워싸는 모습을 말합니다. ‘시련이 우리를 둘러싸고 집어삼킬 때에’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이런 식으로 걸려 넘어지듯이, 놀라고 충격을 받으면서 사방에서 에워싸는 뜻밖의 고난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이 말 속에는 빠져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다시 말해서 “너희는 나의 모든 ‘페이라스모스’, 그러니까 나의 시험, 나의 고난, 나의 시련 중에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이런 뜻입니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시험은 사방에서 에워쌉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고난을 찾지 않으셨지만, 언제나 그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서도 기쁨으로 여기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기억하십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예수님은 시험 너머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 시험이 결국 무엇을 이룰지를 보셨다는 말입니다. 시험이 이루어 낼 결과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후반부를 보면, 여러분도 잘 아시는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따라서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련을 통해 주님께서 온전하게 하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태도를 배우고 훈련하게 됩니다. 구주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지나 기쁨에 이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사실상 바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예수님이 겪은 것과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0장 25절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으면 족하도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제자훈련의 방식이라기보다는 고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1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시련 너머를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을까요? 시험을 통해 주님께서 온전하게 하시는 일을 이루고 계신다는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6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몇 구절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지난주 설교에서 시험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지금은 마무리로 덧붙이는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난주에 함께하지 못하신 분들께는 충분히 설명드리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주님께서 여러분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한 말씀이죠, 세상은 기뻐하겠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울면서 애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죠.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너희 근심이” 어떻게 됩니까?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그리고 주님은 비유를 드십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리고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저는 이것이 모든 신자의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어떤 시련이든 그 속으로 빠져들어갈 때에, 시련 너머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시련을 통과한 뒤에 올 기쁨을 바라보고, 그 시련을 통해 더욱 강해질 우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야고보서 1장으로 돌아가 보면, 부분적으로만 기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시련을 만날 때 올바른 태도를 갖겠다는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결단하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오직 기쁨만이 존재하는 상태, 그러니까 순수한 기쁨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주석가들은 섞이지 않은 기쁨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완전한 기쁨, 전적인 기쁨이라고도 합니다. 제 마음에 드는 표현은 ‘순전한 기쁨’입니다. 어떤 표현이든 사실 상관없습니다. 모두 같은 의미이죠. 믿음이 시험받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는 사람이 가지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시험받음으로써 구주께 더 가까이 이끌려 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관계를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에, 심지어 시련조차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의 임재에 더 민감해지는 것을 느껴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느껴보지 않으셨어요? 어려운 시기를 지나갈 때 기도 생활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껴보시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 깊어지지 않습니까?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더 간절히 찾게 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주님께로, 그리고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믿음이 시험받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을 특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12장 4절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겪으신 만큼 고난을 겪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참 자주 생각합니다. 제가 시련을 겪을 때, 분명히 저도 시련을 겪습니다, 상황이 꽤 힘들어질 때, 과연 기뻐할 만한 일인가, 정말 기뻐할 이유가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게 될 때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기까지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견디시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기쁜 기회로 여기셨다면, 제가 어찌 저에게 닥친 작은 시련을 기쁨으로 견디지 못하겠습니까? 저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너무 비현실적인 본보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제 삶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저와 좀 더 가까운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도 바울에게로 마음이 끌립니다. 바울만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바울은 그 어떤 시련을 겪을 때에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이 떠오르죠.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죠. 오늘날의 교도소와는 전혀 다릅니다. 화장실도 없고, 어둡고 눅눅하고 더러웠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차꼬를 차고 있었습니다. 이 차꼬는 팔과 다리를 벌려 고정시키는 도구를 말합니다. 팔은 양쪽으로 벌려서 나무판에 묶고, 다리를 마치 닭다리처럼 쫙 벌린 다음에 늘어뜨려서 근육을 긴장 상태로 굳어 버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근육이 긴장 상태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 점점 경련이 일어났을 겁니다. 감옥에 이런 상태로 있었습니다. 생명도 위태로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이것이 바로 극도로 힘든 시련 한가운데서 드러난 기쁨입니다. 바울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고린도후서 12장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탄의 사자가 바울을 쳐서 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심각한 고난이었습니다.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주께 기도했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시련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시험, 그러니까 시련을 만날 때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첫째로, 시련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줍니다. 둘째로, 시련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교제의 특권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이제 셋째로, 시련은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의존하게 만듭니다. 이것 역시 특권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십시오. 모든 고난이 반드시 육체적이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고난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감옥에 갇혀 있었죠.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자신의 투옥이 복음을 더 전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은 쇠사슬로 로마 병사와 함께 묶여 있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의 궁정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4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로마 황제는 죄수 한명을 잡아 병사와 사슬에 묶어 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병사에게는 복음 전도자를, 바울에게는 복음을 들을 자를 제공해 준 셈입니다.

바울은 1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다시 말해서, 바울의 ‘감옥 사역’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해졌습니다. 마치 “바울처럼 감옥에 가면 우리도 부흥을 경험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감옥에서의 사역으로 여러 가지 반응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바울을 대적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대립하는 사람들이죠. 이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바울을 헐뜯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는 이유가 사역을 망쳤기 때문이라거나, 주님께서 바울을 이제 한쪽으로 치워 버리셨다거나, 바울의 시대가 끝나서 이제는 퇴장당했다거나, 혹은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옥에 갔다 이런 식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시기와 분쟁, 다툼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17절에서는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라고 했습니다. 쇠사슬에 매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거기에 더해서 악한 말로 상처를 입히고 아프게 하려 했던 겁니다.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18절을 보십시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얼마나 훌륭한 본보기입니까? 참으로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기쁨의 사람입니다. 2장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다시 말해서, 너희가 구원받는 일을 위해서 내가 죽게 된다고 해도, 계속 읽습니다,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은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원한 것은 오직 맡은 사역을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3장 7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유익하던 것이 무엇입니까?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그 모든 종교적인 이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까지 말합니다. 왜입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4장에 가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기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떻게요? 자신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교제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구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바울은 자신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날 것을 알았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께서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빚으시고,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시고, 바울의 믿음을 증명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의 기쁨은 이런 겁니다.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 하나님과 변론하지 않겠다.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다시 말해서, 최종적으로 빚어질 결과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신뢰하겠다는 말입니다. 욥기 23장 10절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욥의 아내는 곁에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지만, 욥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시련을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시련은 검증된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끕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 만듭니다. 얼마나 달콤합니까? 그리고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약속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 당하는 고난을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차 맞이하게 될 미래가 너무도 영광스럽기 때문이죠. 로마서 8장 18절이 말하지 않습니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마치 오랜 고통에서 벗어난 후에 느끼는 쾌감과 비슷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정말 말할 수 없이 좋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러니까 시련을 어떻게 맞아야 합니까?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기쁘게 여기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실 모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증명되고, 강해지고, 삶에서 죄가 깎여 나가고, 더 이상 시련이 없는 그날을 향한 소망으로 마음이 채워지고, 기도와 교제로 이끌리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 얼마나 풍성하고 놀랍습니까. 기뻐해야 할 이유들입니다.

최근에 저는 제 친구 워런 위어스비(Warren Wiersbe)가 쓴 빌립보서 주석을 읽다가 아주 훌륭한 단락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만일 우리가 성품보다 안락함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면, 시련은 우리를 흔들어 놓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면, 시험을 온전히 기쁨으로 여길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현재만을 위해 살고 미래를 잊어버린다면, 시련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쓰라리게 만들 것이다.” 이 말이 맞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평가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시련을 기뻐할 수 없다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여러분의 가치관이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이 그 시련 속에 목적을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이 설교를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 몇 주 안에 이 설교를 실제로 살아내게 하시겠구나.” 저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월터 나이트(Walter Knight)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때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억눌리고, 힘을 넘어선 것처럼 강하게 억눌리고, 몸과 영혼이 억눌리고, 마음까지 억눌려 어두운 파도가 밀려오고, 원수로부터의 압박과 친구로부터의 압박, 압박 위에 압박이 더해져 삶이 끝날 것처럼 억눌린다. 그러나 이것은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랑하도록, 하나님 외에는 아무 도움도 없음을 알도록, 아무것도 매달리지 않는 자유를 얻도록, 불가능한 것을 믿는 믿음을 얻도록, 주 안에서 사는 삶으로 변화되도록,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이끄시고자 우리를 억누르시는 겁니다.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상처가 없는가? 발이나 옆구리나 손에 숨겨진 상처가 없는가? 이 땅에서 인정받는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당신이라는 밝은 별을 환호하는 것도 듣는다. 당신에게는 상처가 없는가? 상처가 정말 없는가? 나는 활 쏘는 자들에게 상처를 입었고, 죽기 위해 나무에 달렸으며, 나를 둘러싼 탐욕스러운 짐승들에게 찢겨 기절하였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상처가 없는가? 상처도 없고 흉터도 없는가? 주인처럼 종도 그러하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발은 찔림을 당한다. 그러나 당신의 발은 온전하다. 상처도 흉터도 없는 사람이 과연 주님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우리 몸에 지니는 기쁨과 특권, 믿음이 강건해지기까지 시련을 견디는 일, 이것이 바로 기쁨의 태도입니다.

이제 두번째를 보겠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 인내하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기쁘게 여길 뿐 아니라 알고 있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3절의 마지막 단어가 무엇입니까? 무엇입니까? “앎이라.” 우리는 기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기노스코(ginōskō)’인데요,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입니다. 진리를 직접 마주하며 배워서 얻게 된 지식입니다. “앎이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시련을 승리로 통과하고 끝까지 인내하려면, 반드시 알고 이해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견디시며 기쁘게 여기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다가올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매우 유익한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나누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련을 겪을 때에 인내하기 위해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걸 알아야 합니까?” 이렇게 물으실 분이 계실 텐데요, 그 이유는 시련을 지났을 때, 여전히 믿음을 붙들고 있다면, 자신의 믿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정말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누군가 저에게 “목사님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시나요?” 이렇게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저는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물론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은 아니지만, 제가 가진 전부를 다해서 사랑합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또 이렇게도 말을 할 겁니다. “저는 어려운 상황들을 지나왔고, 그 시련을 모두 겪은 후에도, 저의 모든 소망이 여전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시험받고 있습니다. 참된 것은 반드시 시험을 받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 증명되고 나면 참으로 놀라운 격려를 받습니다. 내 믿음이 진짜였다, 시험을 통과했다, 그 시험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도키미온(dokimion)’입니다. ‘증명’이라는 뜻입니다. 알아두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증명되는 과정은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이룬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성취하다, 이루어내다’ 이런 뜻입니다. 시험이 아무것도 이루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험은 반드시 어떤 일을 이룹니다. 우리 삶에 존재하는 모든 시험은 무엇인가를 이루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무엇을 만들어 냅니까? 바로 ‘휘포모네(hupomonē)’입니다. 인내, 이렇게 번역되기도 하지만, 가장 적절한 단어는 인내하는 능력, 혹은 견딤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는다는 뜻인 ‘마크로뒤미아(makrothumia)’가 아니라, 여기서는 “견디는 힘”을 말합니다. 끝까지 버티는 힘입니다. 지속하는 능력입니다. 어쩌면 옛 신학자들이 말했던 “성도의 견인”이라는 개념이 담긴 본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시험이 끝날 때 하나님께서 시험을 제거하시고, 거두시고, 보상하실 때까지 압박 속에서도 붙들고 버티는 영적 강인함입니다. 이렇게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시험을 하나 통과할 때마다, 여러분이 시험을 지나올 때마다, 저 역시 시험을 지나올 때마다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우리는 조금 더 인내하게 됩니다.

시편 40편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시험을 하나 통과하고 나올 때마다 이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들어 올리시고, 반석 위에 세워 주시고, 내 마음에 찬송을 주시고, 이전보다 더 강해진 모습으로 다시 걸어가게 하셨다.’ 시험을 참고 견디면서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여기서 말하는 시험도 동일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겪는 시험은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초자연적인 시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잘 보십시오.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여기서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해 봅시다. 시험을 견디는 능력이 모두가 동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경험도 없는 갓 태어난 신자에게는, 더 성숙한 신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시험을 견딜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를 먼저 작은 시험들을 통해 단련하시고 강하게 하신 다음에야 더 큰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삶이나 제 삶에, 너무나 극심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시험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그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 인내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큰 시험을 마주할 준비를 하게 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주권적이고 신실하며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과거 어느 한 시점의 선언만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와 인격적이고 친밀하게 동행하시면서 지키십니다.

달리기 선수하고 비슷합니다. 몇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노스리지 캠퍼스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달리기 대회 같은 것이 열렸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같이 뛸 거냐고 묻길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제가 같이 뛰면 기부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회 날이 다가올 즈음에, 제가 뛰면 기부하겠다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바퀴에 백 달러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압박감이 엄청났습니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백 달러가 모인다니 말이에요. 그리고 한 시간 안에 돌아야 했습니다. 저는 달리기를 하던 사람도 아니고, 예전에 미식축구를 하다가 무릎을 다친 적이 있어서 사실 무릎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 오늘은 뛰자.” 그래서 뛰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 시간 동안 스물여섯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건 잘 모르셨겠지만, 저는 그 후로 일주일 동안 걷지를 못했습니다. 무릎이 완전히 퉁퉁 부었습니다. 뭐 제 병력을 다 아실 필요는 없겠지만, 정말입니다, 아예 걷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아내가 저에게 “왜 그렇게 무리를 했냐” 이렇게 잔소리를 했죠. 그런데 제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그래도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돈을 많이 모았다”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저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싶다면 단거리부터 단계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거꾸로 했죠. 처음에 너무 무리를 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다시는 뛰지 못하게 된 겁니다. 처음부터 최대치를 해낼 순 없습니다. 최대치를 향해 점점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말하는 요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라는 겁니다. 더 큰 사역을 위해, 더 큰 섬김을 위해, 더 큰 시험을 위해, 그리고 덧붙이자면 더 큰 기쁨을 위해, 더 큰 인내를 만들어 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싸움이 어려울수록 더 달콤한 승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련이 클수록, 통과했을 때의 기쁨은 정말 더 큽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제 삶 속에서 배웠습니다. 시련이라는 터널 끝에는 항상 빛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시련을 지나면, 하나님께서 주신 더 큰 힘과 구원을 기뻐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임을 증명해 주고,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인내가 무엇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자라나는 믿음, 넘치는 사랑, 그리고 놀라운 증거입니다. 열매맺는 공동체입니다. 3장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참으로 인내하는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히브리서 11장도 이 점을 보여줍니다. 모세에 대한 설명이죠.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왜입니까?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다시 말해서 모세는 인내가 장차 무엇을 가져올지를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미래의 계획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고,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왕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기 때문이죠. 믿음으로 유월절을 지켰고,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뿌렸습니다. 장자를 멸하는 자가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죠. 믿음으로 모두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고, 애굽 사람들은 빠져 죽었습니다. 장차 이루어 낼 것을 인내로 바라본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극심한 시험을 통과했던 사람들이 계속 나옵니다. 32절로 내려가 보면 이런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입니다. 늘 그렇듯이,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입니다. 여기 나오는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고,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서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어떤 여인들은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 받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하게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녔습니다. 말 그대로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다녔습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모두가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내를 만들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우리를 더 큰 사역을 위해 강건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번째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고, 나머지 두 가지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세번째 필수적인 방법입니다. 첫째가 기쁘게 여기는 것이고, 둘째가 아는 것이라면, 셋째는 순복하는 의지입니다. 순복하는 의지입니다. 저는 4절 말씀이 참 좋습니다. 아주 직설적입니다. 보십시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영어 성경으로 보면 “let”이 쓰였습니다. 여기서 “let” 그러니까 “~하게 하라”라는 말은 현재 능동 명령형입니다. 명령입니다. “인내가 그 온전한 일을 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하시도록 두라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인내가 그 역할을 하게 하라는 겁니다. 순복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험 앞에서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맞서 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따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면서 항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만일 여러분이 맞서 싸우고, 저항하고, 따지고 논쟁하려고 든다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 아래로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하나님은 온전하게 하시고, 빚으시고, 다듬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맞서 싸우면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복해야 합니다. 순복해야 합니다. 기억하십니까? 오래 전에 고린도전서 10장을 다룰 때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시련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통과하는 것입니다. 옆길은 없습니다. 출구는 항상 통과하는 길뿐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런데 그 피할 길은 언제나 통과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기뻐합니다. 장차 올 영광을 보기 때문이죠. 아버지와의 달콤한 교제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풍성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죄가 깎여 나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쁨 속에서 우리는 인내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더 큰 유익을 위해, 더 큰 사역을 위해, 더 큰 시험을 위해 인내를 만들어 가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 일에 순복합니다. 순복하는 영, 순복하는 의지로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내가 온전히 이루게 하라.” 인내가 하려는 일, 하나님께서 인내를 통해 하시려는 일은 오직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히”이라는 단어는 “영적으로 성숙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시련이 올 때 주저하지 마십시오. 맞서 싸우지 마십시오.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놀라운 성숙의 사역을 막지 마십시오.

시편 131편을 봅시다. 단 세 절밖에 없기 때문에 자칫 지나치기 쉽지만, 그 안에 이런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통과하게 하신 그 모든 과정이 나를 자라게 했습니다. 나는 성숙해졌습니다. 더 이상 젖병에 매달린 아이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특권으로 여깁니다. 강해지도록 젖을 떼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욥 역시 하나님께 감사했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시련에 자발적으로 순복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욥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상황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계속 하나님께 묻는데, 아무 응답이 없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욥기 5장 7절에서 엘리바스가 말합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시련을 통과할 때 이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시편 37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잘 들으십시오. 이 흐름을 따라가 보십시오. 인내가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는 온전함입니다. 인내는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진행됩니다. 시험을 통과합니다. 그러면 더 강해집니다. 더 큰 인내가 생깁니다. 그 더 큰 인내는 더 큰 시험을 통과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더 큰 인내와 더 큰 시험의 반복이 결국 영적 성숙을 이루어 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은 영적 성숙과 같은 말입니다. 인내가 목표를 끝까지 이루도록 두라는 말인데, 그 목표는 영적 성숙입니다. 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죄 없는 상태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야고보서 1장 4절이 말하는 것은 영적 성숙, 충분히 자란 상태, 온전한 성장입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의 표현으로 말하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영적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온전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레이온(teleion)’은 세속 문헌에서는 다 자란 동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다 자란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인내하게 하셔서 더 큰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고, 더 강한 그리스도인,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빌립보서 3장 15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그 자리까지 이끌어 가기 위해서 이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더 의존하게 만들고, 더 강하게 만들고, 더 깊은 교제로 몰아넣기 위해서 시험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더 성숙하게 만듭니다.

“온전히”라는 단어에는 성품의 풍성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르기를 원하는 그 자리,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고자 하시는 그 자리에 이르게 하는 자리입니다. 동시에 이 단어는 균형이라는 개념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안정되어 있고 균형 잡힌,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구절이 있는데,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바울의 갈망이었고, 궁극적인 영적 목표였습니다. 바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4절에서 말하는 온전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하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여기서 다시 ‘텔레이오이(teleioi)’가 반복됩니다, “구비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단어인데요, ‘홀로클레로스(holoklēros)’입니다. 홀로스(holos)는 ‘전체’를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홀로그래피’라는 단어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360도 전체를 담아내는 이미지죠. 클레로스(klēros)는 이 ‘모든 부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부분이 빠짐없이 갖추어진 상태, 영적으로 잘 균형 잡히고 온전히 정돈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정형으로 덧붙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정말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 가운데 두셔서 인내하게게 하시고, 그 인내를 통해 더 많은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완전히 세우고자 하십니다.

오직 시험만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성경 말씀을 취하십시오. 디모데후서가 말하듯이 말씀은 사람을 온전하게 합니다. 동시에 시험도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어떻게 하신다고요? “온전하게 하시며...” 말씀 그리고 시험, 그리고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성숙,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이루어 가시는 방법입니다.

예레미야 48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제 이 요점을 마무리하면서 예레미야 48장을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48장은 제가 구약에서 참 좋아하는 말씀 중의 하나인데요, 의미가 매우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48장에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나옵니다. 모압은 예루살렘의 남동쪽에 있던 이웃 나라입니다. 이방 민족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압 족속을 저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모압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룻의 이야기에서는 놀라운 예외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모압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모압은 경건하지 않았고, 거듭나지 않았고, 방탕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에서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는 삶은 약한 성품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보십시오.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 여기서 말하는 ‘찌끼’가 뭔지 아십니까? 찌끼는 포도주를 만들 때 가죽 부대 바닥에 가라앉는 침전물입니다.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포도주 제조 과정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저도 책을 보고 알게 된 거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 제 경험은 아닙니다. 포도주를 만들 때는 가죽 부대 여러 개를 사용합니다. 먼저 포도즙을 부대에 붓고 가만히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찌끼나 침전물이 바닥으로 가라앉아서 포도주와 분리됩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포도주를 다른 부대로 옮깁니다. 그러면 이전 부대의 바닥에는 찌끼가 그대로 남게 되죠. 새 부대로 옮긴 포도주도 다시 시간이 지나면 또 찌끼가 가라앉습니다.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한 부대에서 다른 부대로 계속 옮기는 동안 찌끼는 점점 제거되고, 마침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옮겨 부었을 때는 더 이상 침전물이 남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맑고, 부드럽고, 달콤한 포도주를 얻어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찌끼들, 그러니까 그 침전물을 모아서 식초를 만듭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포도주는 향기롭고 달콤한 향과 맛을 냅니다. 포도주가 이 부대에서 저 부대로, 또 다른 부대로 계속 옮겨졌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얻어낸 거죠. 그때마다 옮기는 과정 속에서 쓴맛을 내는 찌끼가 바닥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이겁니다. 만일 모압이 고난에서 고난으로, 시험에서 시험으로 이렇게 부어졌다면, 그 쓴맛이 가라앉아 제거되었을 것이고, 모압은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압은 평안했습니다. 평안히 지냈습니다. 결과적으로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기쁘게 여기십시오. 시험을 통과했을 때 얻을 결과를 아십시오. 그리고 시험에 순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시험에서 시험으로, 고난에서 고난으로 부으실 때마다, 모든 쓴맛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마침내 우리는 쓴맛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향기로운 제물로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우리는 그 완전하게 하시는 사역을 이해하고, 기꺼이 순복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태도로 시험을 맞이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고난을 승리로 바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 두 가지가 더 남아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듣기만 하고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기억하기는 하지만 삶에 적용하지 않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들은 이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이제 이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 깊이 새기게 하시고, 우리의 진심어린 고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찬송가 작사가가 아름답게 써 내려간 가사를 함께 부를 때에, 이 고백이 단지 노래의 가사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영혼아 잠잠하라” 이렇게 노래할 때,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하는 말이 되게 하시고, 어떤 시험이든, 어떤 싸움이든,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친히 정하시고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게 하시고, 모든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알게 하시고, 주님이 우리의 가장 선하신 분이시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친구이심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길이 아무리 가시투성이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주님께서 우리를 기쁨의 결말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이 찬송을 함께 부를 때 우리의 진심을 담아 고백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각 사람의 삶 속에서 온전하고 은혜로운 주님의 사역을 이루어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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