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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도 야고보서 1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처럼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찾으시는 동안에, 편지 한 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몇 주 전에 성도님 한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하셔서 처남이 최근에 너무 큰 비극을 겪었는데, 혹시 전화를 해줄 수 있겠느냐 이렇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해서 “저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존 맥아더입니다.” 이렇게 첫 인사를 드렸더니 말을 잇지 못하실 정도로 놀라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콜로라도에 사셨는데, 그동안 라디오와 테이프를 통해서 제 설교를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직접 전화를 할 줄 몰랐던 겁니다. 그러면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시다니요. 저는 지금 식탁에 앉아서 목사님께 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편지가 저에게 도착했는데, 네번째 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로 지금 목사님께서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내용을 읽던 때가 1986년 3월 16일 오후 6시 15분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계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편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1년 전쯤에 시작된 사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다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복잡하니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댄(Dan)입니다. 그레이스 교회에서 목사님을 잠시 뵌 적이 있습니다. 1985년 12월 22일, 예배당 가운데 줄 뒤에서 네 번째 칸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제 아내는 그날 몸이 아파서 함께 예배드리지 못했습니다. 저희에게는 네 살 된 아들 루크와, 22개월 된 딸이 있습니다. 1985년 3월, 저희 아내 캐롤린은 오른쪽 소뇌에 뇌종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5년 4월 3일, 아내는 종양과 함께 오른쪽 소뇌의 80퍼센트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성 금요일이었습니다. 수술이 잘 되어서 의료진은 캐롤린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습니다.”

“1985년 4월 5일 밤 10시 30분쯤에, 저는 아이들이 있는 처가집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을 재우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당시에 8개월이던 사라가 눈이 풀린 채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이미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어린이 병원 의사들은 척수 천자를 하더니 척수 수막염에 걸렸다고 진단했습니다. 의사들은 아이가 죽을 가능성이 크고, 살아남더라도 여러 가지 장애가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24시간이 고비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 딸 사라는 기울어진 아기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팔과 한쪽 다리에는 부목을 찼고, 왼발과 오른손, 왼손, 그리고 머리에 링거가 꽂혀 있었습니다. 두 팔을 벌린 채로 묶여 있었습니다. 가슴에는 세 개의 모니터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울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이 아이입니까? 이 아이는 아무 죄도 없는데요. 저는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입원해 있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정말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85년 4월 6일, 부활 주일 아침 7시, 저는 어린이 병원에서 온갖 선, 링거가 연결된 사라를 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한 간호사가 들어와서 사라가 고비를 넘겼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라가 항생제에 잘 반응해서 모든 장치를 제거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저는 두 병원을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아내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캐롤린은 콜로라도 롱몬트에서 방송되는 KWBI AM 91 방송을 늘 틀어두었습니다. 그 방송에서 처음으로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도행전을 통해서 박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교 시리즈였습니다. 처음 그 설교를 들었을 때 저는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이 너무 나와서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었죠.”

“제 아내 캐롤린은 수술 이후에, 비록 운동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힘든 재활 과정을 견뎠습니다. 아내는 아이들과 저, 그리고 구주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께 진실로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하나님 나라의 삶에 관한 성경 공부를 하면서 남긴 메모 몇 장을 동봉합니다. 모두 아내의 손글씨입니다. 뇌 손상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죠.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아내는 성경학자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세번째 종양은 수술이 불가능했습니다. 1986년 5월 8일, 아내는 제 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정복하신 구주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제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장례식 꽃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가득합니다.”

“저는 동정을 얻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그레이스 투 유 사역이 저와 저희 가족에게 얼마나 큰 은혜가 되었는지를 꼭 전하고 싶어서 편지를 드립니다. 저희 가족 외의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레이스 투 유, 그리고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꼭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나오는데, 저는 이 내용이 참 좋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의 많은 성도님들께 캐롤린과 저, 그리고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추신으로, 저희도 목사님과 새 예배당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댄 허멀 드림.” 댄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말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시간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댄이 이렇게 고백했죠. “아내는 제 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을 정복하신 구주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의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위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고난이 아무리 깊어도 승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관점의 문제입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렸던 로마노스키(Romanoski) 가족을 기억하실 겁니다. 어제 두 딸을 잃은 그 가족은 지금 러스 부부(Russ and Heidi Moore)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러스에게 그분들의 상태를 물었더니, 러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니 기뻐한다고요? 자동차 사고로 두 딸을 잃었는데 기뻐한다니요? 그렇습니다. 기뻐하는 이유는 두 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 사고에서 살아남은 다른 두 학생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이유이죠.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인생에서 그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맞닥뜨릴 수 있는 최악의 시련은 무엇입니까? 재정적인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투자금을 모두 잃고, 평생 저축한 돈을 잃어버리는 거죠. 또 직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해고를 당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입이 끊기고, 자존심까지 잃는 거죠. 혹은 의사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중의 누군가가 당장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아야 한다거나, 거대한 뇌종양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여러분, 어떨까요? 아니면 전화기 너머로 이런 소식을 듣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딸이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거나,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식 말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집에 침입해서 아내를 살해했다는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녀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서 며칠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일 수도 있고요.

끝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 결국 우리 모두가 겪는 일 아닙니까? 욥이 말한 것처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기만 한 환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을 스스로 준비하는 셈입니다. 고난이 다가올 것을 반드시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슬픔과 고통과 시련이 다가올 것이라는 현실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기쁨 위에 드리우는 그림자 아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조차도 누그러뜨립니다. 어쩌면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이 여러 차례 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웃으셨다는 기록은 한 번도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웃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깊은 슬픔 앞에 마음껏 기뻐하지는 못하셨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언젠가는 고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언젠가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가 옵니다. 그래서 고난을 대면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 주에 서재에 앉아서 가장 혹독한 시련이 무엇일까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말이죠. 저는 가족과 재산과 가축,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 욥을 떠올렸습니다. 소유도 자녀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아내조차 전혀 욥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본인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극도로 힘든 시련임이 정말 분명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니, 제 기준으로는, 여러분이 동의하실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제 기준으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시련에 직면했던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잠시 창세기 22장을 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야고보서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계속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시련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시험 가운데 가장 혹독합니다. 창세기 22장 1절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여러분, 바로 페이라스모스(peirasmos)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시련입니다.

아브라함이 직면한 가장 혹독한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그리고 강조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마치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 사실을 되새기게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냥 아들이 아니라, 네 독자, 유일한 아들입니다. 유일한 아들일 뿐 아니라, 네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믿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희생제사를 요구하십니다. 그것도 인간을 제물로 요구하십니다. 아들을 요구하십니다. 그곳으로 가서 네 아들을 희생제물로 죽여 나에게 드리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인간 제사를 요구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이방 종교에서나 있는 일이었죠.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녀를 제물로 드려서는 안 됐습니다. 더구나 이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죽은 것과 같았던 아브라함의 몸을 어루만지셔서, 마찬가지로 잉태할 수 없는 상태였던 사라와의 관계를 통해 아들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언약의 아들이었고, 약속의 아들이었고, 소망의 아들이었습니다. 평생 아이가 없었던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한번도 요구하지 않으셨던 인간 제사를 요구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이 알던 하나님과 정반대되는 명령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평생 아이를 낳지 못했던, 거의 백 세에 가까운 남자와 여자에게 아들을 기껏 주셔 놓고, 이제는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바닷가의 모래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면서도, 아브라함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라고 하시는 걸까요? 정말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늙은 아브라함에게 남아 있던 자손에 대한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약속에 대한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사랑을 죽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죽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부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제거하는 것이고, 메시아의 계보를 끊어 버리는 일입니다.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인간에게 주어진 시험 가운데 가장 혹독한 시련이라고 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삭을 죽여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죽이라고 명령받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비추어도 말이 되지 않고, 구속의 계획에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맞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도 맞지 않고, 이삭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에도 맞지 않습니다. 가장 치열한 논쟁 거리가 될 만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 제발 좀 설명해 주십시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데, 저는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십시오.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뭐라고요? 아침에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나무를 쪼갭니다. 아들을 올려놓고 불태워 죽일 번제에 쓸 나무를 자기 손으로 직접 쪼갭니다.

그리고 일어나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그곳으로 갑니다. 놀라운 사람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질문도 없고, 망설임도 없고, 논쟁하지도 없고, 따지지도 않고, 반응도 없습니다. 사흘 후가 됐습니다, 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함께 온 젊은 종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잘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여기에 밑줄을 그으셔야 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은 우리 둘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너무도 고통스러운 장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러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아들이 번제를 앞두고, 사랑으로, 부드럽게 어린 양은 어디에 있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여기에도 밑줄을 그으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런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언약에 일치하는 뜻을 반드시 가지고 계신다, 이런 확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윤곽은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잠깐 멈추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왜 신약성경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장 위대한 본보기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자기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는 바로 그 지점까지 갔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얼마나 큰 시험입니까. 이해할 수도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살인입니다. 아브라함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데도, 아브라함은 순복합니다. 순종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꺼이 하려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셔서, 실제로 행하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렇습니다. 이것은 시험이었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통과했습니다. 통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사람이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시험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것에서 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것들, 이를테면 아들, 딸, 남편, 아내, 혹은 친구 같은 존재를 통해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죽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도록 놓아주는 그런 방식을 취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보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이 자기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와 상관없이 이삭을 기꺼이 포기하려 했을 때에,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붙들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걸 보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소유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맡길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시험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런 일을 요구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할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순종하기 위해 더 어렵고 더 큰 것이 요구될수록 순종의 수준이 더 탁월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이 어려울수록 더 큰 자기부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자기부인을 요구하는 순종이 있습니다. 엄청난 자기 부인이 요구되기에 가장 탁월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다시 말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증명되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큰 시험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시험에 대한 해설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습니다. 잠시 함께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7절이 아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교회로 오는 길에 라디오를 들으면서 운전을 했는데, 갑자기 ‘삐’ 소리와 함께 “시험입니다”라는 안내 멘트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삐, 이것은 시험이다. 삐, 시험이 끝났다.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여기 나옵니다. 핵심이 나옵니다. 19절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참으로 신실하셔서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라면 죽은 자도 살리실 분이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에 너무 많은 것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면 아브라함은 아들의 생명을 실제로 취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은 아쉬웠을지도 모릅니다. 부활을 직접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저의 상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한다면,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험도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보좌에 계시고, 약속을 지키시고,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반드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이런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페이라스모스(peirasmos)”, 그러니까 “페이라소미노스(peirasomenos)”의 자리에 놓였을 때, 다시 말해 시련으로 시험을 받았으나,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이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믿음의 본보기라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인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본보기입니다. 9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씨를 통해 세상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고 이루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통과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한가운데서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안락을 꿈꾸고, 완벽한 환경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인생의 거친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제 인생에서 그런 순간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가끔 그런 순간이 온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잠시 누리는 쉼과 일시적인 평안이 마치 우리가 시험에서 영구적인 면제를 받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시편 기자의 말을 기억합니다. 시편 30편 6절입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이 말 속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틀렸다. 내가 풍족할 때에는 이것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다.’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그런 어리석은 낙원 속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고난도 예상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평안만을 약속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험(peirasmos)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깨어 있으라는 것은 시험을 예상하라는 말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능력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번 주에 청교도 작가 토마스 멘톤(Thomas Manton)의 글을 읽었는데, 제 마음에 계속 남아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죄 없는 아들 한 분이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죄는 단 하나도 없다.” 삶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겪습니다. 시편 23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험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합니다. 사실 본문으로 바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서론을 조금 더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번 주에 제 마음에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서론에서 다뤘어야 할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잠시 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시험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첫째로, 시험은 우리 믿음의 강도를 시험하기 위해서 옵니다. 이 부분은 지난주에 이미 어느 정도 다루었기 때문에 간단히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시험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옵니다. 아주 좋은 예가 역대하 32장 31절에 나옵니다. 굳이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들으셨습니까?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그런데 누가 알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시험을 통해 히스기야의 마음을 아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시기 위해 여러분을 시험하셔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 누구도 시험으로 마음을 알아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자기 점검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자기 성찰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저는 저의 믿음 강도를 알아야 하고, 여러분도 각자의 믿음 강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강한지 약한지를 우리 자신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지금 여러분이 혹독한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혹은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질 만큼 분노하고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끊임없이 따지고 계시다면, 하루 종일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 속에 있다면, 분명히 믿음이 약하다는 신호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시험을 겪는 가운데서도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면, 그 문제를 주님의 손에 맡기고 그 짐을 하나님이 지시도록 내어드린다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한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계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의 믿음에 힘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련을 감사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저는 언제나 저의 믿음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더 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강할수록 하나님께 더 쓰임받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커집니다.

하박국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을 때에,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자기 백성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참담한 약속 앞에 서 있었을 때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다시 말해서 ‘인생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이 다 사라질지라도’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찬양입니다.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가운데서도 하박국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자기 믿음의 강도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시험의 목적은 바로 여러분과 저에게 믿음의 강도를 드러내고, 더 크고 강한 믿음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욥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시험의 결과로 42장에서 우리가 잘 아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다시 말해 이런 말입니다. ‘주님,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을 지금처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주님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 말했던 것들, 마음에 품었던 것들 가운데 죄된 것들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제 믿음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험은 우리 믿음의 강도를 점검하기 위해 옵니다.

두번째입니다. 우리는 시험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은 우리가 영성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옵니다. 첫번째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시험은 우리 믿음의 강도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실제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 바울의 증언만큼 생생하게 나타난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다시 말해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일, 하나님께 받은 풍성한 계시들,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표적과 기사와 능력 있는 사역들로 인해서, 바울은 스스로를 높게 평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을 계속 쳐서 괴롭히셨습니다. 왜입니까? 다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히 영적인 사역에서 복을 받고 있을 때에도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성을 실제보다 더 높이 평가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이제 적수가 없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이 문제를 계속 생각하면서 깨닫게 된 세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 통찰이면서 동시에 저의 개인적인 묵상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시험을 통해 우리를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떼어 놓으신다고 믿습니다.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공급받던 젖줄을 끊게 하십니다.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느껴보셨을 겁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될수록, 가구나 자동차, 집이나 은행 계좌, 혹은 우리가 이룬 성공, 경험들, 우리가 다녀온 곳, 보고 누린 것들이 많아질수록, 그런 것들의 의미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말입니다. 한때는 인생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인생의 진짜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불안과 상처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시험이 닥쳐올 때, 우리가 그런 세상적인 것들을 붙잡아 보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습니다. 시험이 우리를 그런 것들로부터 떼어 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세상적인 것들이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고난의 순간에 우리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자원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젖줄을 끊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먹일 떡을 우리가 어디서 구합니까?” 철저히 세상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근처에는 식당도 없고, 설령 있다 해도 이 많은 사람을 먹일 만큼의 떡은 없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고, 거기에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어떻게 먹일 것을 마련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절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세상적인 자원을 바라보는지를 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빌립은 세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세상적 사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곧바로 음식을 창조하셨고, 빌립을 아주 빠르게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떼어 내셔서 영적인 것으로 만족하게 하셨습니다. 또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자랐습니다. 애굽의 왕자로 교육받았습니다. 40년 동안 훈련을 받아서 바로의 가문에서 높은 지위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정점에 있던 애굽 사회의 정상에 서 있었습니다. 모든 교육, 모든 재물, 모든 명예와 권세, 모든 성공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보십시오. 모세는 그 모든 것에서 눈을 떼고 자기 백성이 겪는 고난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시험을 사용하셔서 모세를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떼어 내셨습니다. 시험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시험에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소망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시험은, 여러분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저의 경우에는 분명히 영원한 소망으로 저를 부릅니다. 제 삶의 시험들은 저로 하여금 하늘을 더 사모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너무 어렵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은 우리를 영원한 소망으로 부릅니다. 저에게 편지를 보낸 형제님처럼 말입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제 품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정복하신 구주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갑자기 하늘이 이전보다 훨씬 더 달콤해집니다. 두 딸을 잃은 그 작은 가정에서도 하늘이 이전보다 훨씬 더 달콤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지나가는 세상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다면, 여러분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 하늘에 보화로 쌓여 있다면, 여러분은 이 지나가는 세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시험은 인간의 자원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내어 하늘의 소망에 정착하게 만듭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이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나는 점점 더 영광을 갈망하게 된다.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소망이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다.’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게 될 그 영광스러운 자유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우리가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험을 통과하면서 영원한 것을 더욱 소망하게 됩니다. 영원한 도성을 사모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위의 것들에 두게 됩니다.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것,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은 어떻게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매우 간단합니다. 8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아간다.’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바울은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 세상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차라리 영광 가운데 있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시련에는 매우 매우 유익한 목적이 있습니다. 시련은 우리 믿음의 강도를 시험합니다. 시련은 우리의 영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만듭니다. 시련은 우리를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떼어 내고, 하늘의 소망으로 사모하게 합니다.

다섯번째, 시험은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은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있었겠습니까? 있었을까요? 이삭보다 더 귀한 것은 아마도 없었을 겁니다. 바로 그것이 시험이었습니다.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을까, 아니면 하나님을 이삭보다 더 사랑했을까를 드러내는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은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드러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하나님, 이 일을 통해 이루시는 일에 감사합니다. 제가 그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분노하고, 격앙되어, 마음에 쓴뿌리를 품고, 불안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요구하셔야만 합니다. 제거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에서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만일 저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제거하셔야 하니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항상 그렇게 하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이 점을 생각하면서 모세오경을 다시 읽다가 신명기 13장 3절에 이르렀습니다.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거짓 선지자를 말하는 겁니다.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시험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정말로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느니라.”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정말로 기독교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필요하다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끊어낸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다른 어떤 사람이 어떤 호소를 하든지 간에, 아버지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어머니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아내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가 무엇을 말하든지, 심지어 자기 육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이 최고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아브라함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아브라함이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지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한 분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험의 가치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든 사람도 그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통과할 때, 그 시험이 여러분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험의 여섯 번째 목적입니다. 매우 유익한 목적입니다. 시험은 하나님의 복을 소중히 여기도록 우리를 가르칩니다. 시험은 하나님의 복을 가치 있게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이성은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라고 합니다. 감각과 감정, 이런 것들은 쾌락을 가치 있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을 가치 있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붙잡고 살아라. 감각과 감정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즐거움을 찾아라. 그러나 믿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그러면 복을 받는다.

보십시오. 시험은 순종의 복을 가르칩니다. 시험 한가운데서 우리가 순종할 때에,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시험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시험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순종하면 하나님의 복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63편 3절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하나님, 저는 주의 인자하심을 보았고, 그것이 가장 좋은 것도 알았습니다.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서 완전한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시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만큼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자신을 건져 달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다른 방식으로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통과하게 합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 순종하게 하시고, 그 후에 하나님의 충만한 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통과할 때, 그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면, 반드시 하나님의 복이 주는 벅찬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제 시험의 목적을 두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곱째입니다.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옵니다. 매우 매우 귀한 목적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고난이 오는 이유가, 다른 목적 없이 단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더 잘 돕게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사탄이 너를 흔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그리고 잘 보십시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바로 이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목적입니다. 히브리서 4장과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하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모든 시험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시험을 겪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직접 겪은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신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입니다. 본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부분인데, 다음 주까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덟번째, 시험은 더 크게 쓰임받기 위한 지속적인 힘을 길러 주기 위해서 옵니다. 더 크게 쓰임받기 위한 지속적인 힘을 길러 주기 위해서 옵니다. 다시 토마스 멘턴(Thomas Menton)의 말을 인용하자면, “모든 것이 평온하고 안락할 때 우리는 믿음이 아니라 감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병사의 가치는 평화의 때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병사의 가치는 평화의 때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 속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영적인 근육이 단련됩니다. 그래서 다음 시험을 맞이할 때 더 강해집니다. 더 큰 대적을 상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곧 더 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시험을 지나고, 또 다른 시험을 지나고, 또 다른 시험을 지나는 동안 그 모든 과정이 계속해서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강하게 만들고, 강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점점 더 크게 쓰임받습니다. 우리의 성숙함은 우리를 더 유용하게 만들고, 더 유용해질수록 하나님께 더 많이 쓰임받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쓰임받을수록 성령의 능력 안에서 더 많은 일을 이루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집니다.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 믿음의 강도를 시험하셔서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강한지 약한지를 우리가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우리의 영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우리를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떼어 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넷째, 우리가 땅의 것을 붙들며 살지 않고 위의 것을 바라보며 살도록, 하늘을 소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섯째,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섯째, 고난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가치 있게 여기고, 그 복을 깊이 감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일곱째, 시험은 시험받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하기 위해 옵니다. 서로의 짐을 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여덟째, 더 크게 쓰임받기 위한 지속적인 힘을 길러 주기 위해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넓은, 더 효과적인 사역에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자, 모두 가치 있는 목적들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 안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저도 마찬가지로, 이런 질문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시험이 온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럼 그 시험을 어떻게 견뎌야 합니까?

야고보서 1장으로 돌아가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은 시험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반드시 옵니다, 3절입니다. 그리고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은 옵니다.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시험이 온다는 것도 알고, 그 시험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도 이해했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이루시려 한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나는 어떻게 견뎌냅니까? 어떻게 그 시험을 통과합니까? 설교 노트에 정리해 두는 것은 좋은데, 실제로 그 시험 속에서 나는 어떻게 버텨야 합니까? 바로 그 지점을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12절 말씀이 정면으로 다룹니다. 첫째, 기뻐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시험을 견디는 첫번째 수단은 기뻐하는 태도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둘째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앎이라.” 이 시험이 어떤 열매를 만들어 내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셋째는 순복하는 의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러니까 “인내가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라” 이런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니 그 과정이 이루어지도록 맡기라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5절부터 8절에 나오는 믿는 마음입니다.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되, 6절에서 말하듯이 무엇 안에서 구해야 합니까? 믿음 안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험에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그 시험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믿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9절부터 11절에 나오는 것은 겸손한 영입니다. 겸손한 영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태도, 이해하는 마음, 순복하는 의지, 믿는 마음, 그리고 겸손한 영으로 시험을 견뎌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마지막 두 가지, 곧 믿는 마음과 겸손한 영을 살펴볼 겁니다. 오늘은 그 토대를 놓고 싶었을 뿐입니다. 앞으로 매우 매우 흥미로운 진리를 보게 되실 겁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구하는 것,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지를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겸손한 영이 어떻게 인내하게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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